신도(神道)에 대하여
1. 개요 2. 천황제(天皇制)를 중심으로 하는 신도의 역사 3. 신도의 경전 4. 카미(神)의 개념 5. 신사(神社)와 의식 및 교리 6. 신도와 기독교의 충돌 : 신도의 비종교화 7. 신도에 대한 선교 전략
조명단 : 김정식, 김홍익, 박명진, 박형복, 유래성, 임종민, 한영호 발표자 : 유래성, 한영호 방문지 : 제일 일본인 교회(요시다 코죠 목사) 방문자 : 유래성, 한영호, 박명진 자료 수집 및 문서 작업 : 김정식, 김홍익, 박형복, 임종민,
1. 개요
아세아 종교 중에서 외부 세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도 한 나라의 사상, 문화, 사회, 정치에 엄청난 영향을 준 종교를 예로 들자면 단연 신도일 것이다. 신도는 지역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일본에 국한되는 일본의 민족주의 종교이다. 신도는 교리적으로 체계가 없으며 창설자도 없는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유교, 불교, 도교를 혼합하여 만든 일본제 종교로서, 오늘의 일본을 만든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말하면 일본은 세계 최강의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였는데 일본의 경제 대국화에는 정치, 사회, 기술적 요인도 크게 작용하지만 신도의 정신적 요소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신도는 일본의 민족적 종교이지만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있어서는 만만치 아니하다. 일본은 독자적 문화가 없는 모방의 나라로 말하는데, 일본의 신도 역시 외국에서 수입한 문화와 종교를 잘 혼합하여 발전시킨 민족 종교이다. 크래머(H. Kraemer)는 신도의 종교적 특징은 중국 문명의 우주주의(universalism)와 유교의 정치 및 사회 윤리와 불교의 형이상학과 종교적 요소들을 자신들의 고유한 사상들에 잘 가미하여 혼합한 원시적 부족 종교로 간주한다. 그리고 또한, 천황이라는 인격에서 종교와 민족과 국가가 불가분리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 신도이다. 신도와 일본의 민족주의의 결합에 대한 크래머의 말을 더 인용하는 것이 일본과 신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천황 제국의 제도는 신적 행위이다. 이러한 신정 국가를 배경으로 한 현재의 신도는 엄청난 중요성이 있다. 신도는 영적 지평을 확대하고 국가적 야망을 강화함으로 신도라는 국가적이고도 부족적인 종교는 지금 보편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곧 일본은 온 세상의 선을 위하여 신의 뜻에 의하여 민족과 국가가 탄생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세상을 위하여 구세주적 의미를 가진 신이 택한 민족이다. 따라서 신도는 정열적이고도 야망적 애국주의와 자연주의의 신학적, 형이상학적 기초가 되었고, 정부는 이를 잘 활용하여 국민 도덕을 함양하였다. 최근 일본의 발전은 원시적인 신도로부터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크래머가 분석한 일본의 신도는 물론 2차 대전 이전의 신도이나 그의 지적은 정곡을 찌른 것이다. 일본은 자기 민족을 신격화 한 신도를 바탕으로 경제 대국을 이룩함으로 최근 서구 국가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회에서는 경제 성장과 종교와의 상관관계를 크게 다루지 않는데, 왜 하필이면 일본에서는 경제 대국과 신도의 관계를 논하는가? 그 이유는 70년대 이미 일본 경제가 미국 다음으로 급성장하게 되자 일본 사회에서는 명치유신으로의 복귀를 노골적으로 외치는 소리가 등장하면서 명치유신 100주년을 대대적으로 축하하는 분위기였고, 국제적으로는 중국과 북한이 먼저 일본의 군국주의로의 복귀를 노골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하원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 조사단 보고는 "일본이 신군국주의에 역점을 두는 일에 우려를 표명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한국 사회에도 때로 통치자들이 문화적 복구주의를 시도하였는데, 일본은 경제 성장에 힘입어 정치가들이나 국민들이 일체가 되어 신도에로의 복귀 인상을 주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예를 들면 70년대에 일본은 경제 대국이 된 데에 고무되어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성한 국민으로서의 우월감을 가지자는 운동이다. 이것은 결국 신도를 기초로 하는 천황이 항상 일본의 영적 지주가 되고 국민 통합의 구심점이 된다.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은 종교심이 약한 백성이라고 일본인들 스스로 말한다. 요코하마 국립대학의 히사끼 유끼오(久木辛南)교수는 통계적으로 일본에서는 약 2만 2천 종의 서적과 2천 종의 많은 잡지가 있으나 종교 서적과 잡지는 그에 비하여 적고, 특히 TV나 라디오의 종교 방송의 시청률은 불과 1%도 안 되는 것을 추산한다. 이상의 통계 수치로는 분명 일본은 종교 정보의 부재 사회로 불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사실상 종교 인구가 실제 인구보다 더 많은 나라로서, 문화청의 통계로는 일본의 종교 인구는 일본 인구보다 많은 1억 7천만이다. 이것은 각 종단이 정부에 보고한 통계를 근거한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종교적 관심이 많아지고 있음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통계는 이미 1970년도의 것이다. 일본은 70년대 종교의 부흥으로 미국의 한 학자는 일본 사회를 신의 "러시아워"라고 표현하였다. 이 종교들 중에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로 뭉치게 하면서 영적 활력을 제공하는 종교는 말할 것도 없이 신도이다.
2. 천황제(天皇制)를 중심으로 하는 신도의 역사
신도는 항상 일본 국가의 영적 지주요 국민 통합의 구심점이 되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교는 국가 통치와 통합의 이데올로기로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는데, 일본의 신도는 이것의 가장 대표적인 실례이다. 서구에서는 천주교가 국가권력과 밀착되었고, 러시아에서는 정교회가 국가 권력을 뒷받침하였다면, 신도는 근대적 일본 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한 종교이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는 종교로 민족주의를 함양하는데 크게 성공하지 못하여 19세기 서구의 식민주의의 희생물이 되었지만 섬나라 일본은 신도로 민족주의를 가장 발전시킨 나라이다. 신도는 교주가 분명한 유교나 회교나 불교와 달리 교주가 없고, 따라서 교주가 가르친 교리가 없으며, 거룩한 경전이 없이 힌두교처럼 장기간에 걸쳐 역사적으로 발전되었다. 장기간에 걸쳐 형성되다보니 힌두교를 제외한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지만 신도의 가장 중요한 바탕은 샤머니즘이다. 히사키 유끼오는 일본 종교의 기원을 인류학적으로 규명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 중의 한 사람인데, 그에 의하면 일본 종교의 뿌리를 추적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우나 분명한 사실은 농사와 관련하여 발전하였다는데 결론을 내린다. 즉, 일본 종교는 자연 숭배에서 조상 숭배, 그리고 다음 단계로 천황의 현인신(現人神)으로 발전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신관의 발전을 기능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분석한다. 즉, 씨족 사회에서 부족 사회 및 국가로 발전하는 사회 변화와 더불어 종교도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이것을 노골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으나 신도는 자연을 숭배하는 원시 종교인 샤머니즘과 같은 유형에서 시작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데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신도의 역사는 주전 3, 4세기 전으로 보는 것이 또한 일반적인 견해이다. 일본의 문화는 백제를 통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는데, 샤머니즘도 한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일본은 명치유신 때 천황을 살아 있는 신(現人神)으로 신성화하고 국민 통합의 구심점으로 하였다. 따라서 유신은 천황을 신성화하는 국가 신도를 발전시키면서 인도에서 힌두교를 인도의 고유한 풍속이나 문화로 간주하는 것처럼 신도를 문화와 풍속으로 규정하였다. 일본을 전문으로 연구한 미국의 여류 문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명치유신 때에 일본의 정치가들은 마치 미국인들이 성조기에 경의를 표하는 식으로 국가 신도를 필수적인 국가 의식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종교 분야에 있어서는, 명치시대의 정치가들은 정치에 비해 훨씬 기묘한 형식적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같은 일본의 좌우명을 실천한 것이었다. 특히 국민적 통일과 우월의 상징을 선양시키는 종교는 국가 관할에 속하게 하고, 다른 모든 종교는 개인 신앙의 자유에 맡겼다. 이 국가적 관할 영역이 바로 국가 신도이다. 국가 신도는 미국에서 국기에 대해 경례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국민적 상징에 정당한 경의를 표하는 것을 원래의 뜻이기 때문에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일본은, 서양의 신앙 자유 원칙에 조금도 저촉됨이 없이 모든 국민에게 국가 신도를 요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미국이 성조기에 대해 경례를 요구함이 조금도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단순한 충성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국가 신도는 2차 대전이 끝나기 전에는 종교를 초월하는 국민 도덕의 원천으로서 불교나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전쟁 종식으로 미군정, 특히 맥아더 원수는 천황 제도를 폐지할 것을 고려하다가 그것은 일본의 영적 진공 상태를 초래한다고 판단하고 천황 제도의 폐지는 유보하였다. 그러나 군정은 1945년 12월 「신도 지령」에서 국가 신도는 일반 신도로 환원시키면서 국가 신도를 지원하는 것을 중지시키는 법령을 공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신도 학교를 폐지하며, 교과서에 나타난 신도의 내용을 삭제하고, 국민들과 공무원들이 신도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자유를 부여하였다. 물론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일부 일본 국민들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국가 신도는 명치유신 때에 형성되었으나 신도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15세기로 본다. 15세기에 이미 요시타(吉田兼俱 : 1425-1511)는 “유일원종신도(唯一源宗神道)”를 발흥시켰다. 요시타의 신도는 다분히 국수적이어서 이것을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 이후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 시대에 더욱 천황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도를 발전시켰다. 이렇게 신도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국가의 통합적 수단이 되었지만 사실상 신도는 한국을 통하여 들어온 불교, 유교 다음 서구에서 들어온 기독교와 만나서 상호 작용의 단계를 거쳐 발전하였다. 레이지 오야마는 한국에서는 외부로부터 새 종교가 들어올 때는, 기존 종교는 철저히 배격하고 새 종교를 받아들이지만 일본은 정반대로 과거의 종교는 그대로 가지면서 새 종교를 흡수하여 혼합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도 새 종교는 기존 종교와 충돌하였다. 신도의 역사는, 1단계는 신도와 불교가 만나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시대, 2단계는 신도가 불교에 흡수된 것에 반발, 불교를 신도에 종속시키자는 이세 신도의 시대, 3단계는 신도와 유교가 만나는 유교 신도의 시대, 4단계는 복고 신도의 시대이니, 이것은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기 전의 신도로 돌아가자는 복고 운동이다. 5단계는 천황과 신도를 완전 일치시키어 신도를 국교화하는 제정 일치의 시대로서 이것은 에도(江戶) 시대부터 서서히 진행하다가 명치 시대에 절정에 달하게 된다. 다음으로 명치 시대 때에 신도 이외에 교파 신도를 허용한 교파 신도의 시대이다. 천황 제도의 골자는, 일본은 신의 국민이거니와 천황은 후에 서술하는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소위 황국 신민의 사상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상의 시대 구분에서 한 가지 생략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교와 기독교가 신도에 끼친 영향이다. 오야마에 의하면 천황이란 용어와 신도의 소위 신기(神器)는 중구 도교(道敎)의 영향으로 간주하며, 복고 신도의 시대에는 히라다 아쓰다네(平田篤胤)가 중국의 천주교 서적을 읽고 이것을 신도에 도입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히라다는 기독교의 일신론, 내세론, 논리성, 국가관 등을 신도에 흡수하여 복고 신도를 발전시켰다고 말한다. 현재 일본의 천황은 상징 천황으로 아무 실권은 없으나 국민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의 상당수 기독교 신학자들은 천황제의 비성경적 원리를 열렬히 외치지만 아직은 일본 국민들에게는 요원한 비현실적인 소리로 받아진다.
3. 신도의 경전
모든 종교는 대체로 경전을 가지는데, 신도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신도의 경전은 결코 성경이나 코란처럼 계시를 근거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신화적인 이야기로 구성된다. 그 이야기로 古事記(고지키)와 日本書記(니혼쇼키)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두 책은 주후 약 712년에서 72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지끼의 저자는 귀족 계급의 사람으로, 황실의 기원과 나라의 역사를 수록하라는 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저술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희랍의 신화와 내용이 유사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오히려 한국의 고대 신화와 유사하여 한국에서 전래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근거는 내용 중에 이자나끼와 아자나미는 신라 때 남자를 기(岐)로 여자를 미(美)로 표현하였고, 또한 삼위일체와 유사한 신관도 신라 때에 들어온 경교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19세기 동경제국대학의 구메라 교수는 두 책의 역사적 신뢰성을 의심하여 교수직을 박탈당하였으며, 종교학자 흄은 고지키에는 너무나 음탕한 내용이 많아서 영어 번역은 무려 16페이지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은 라틴어로 번역하였으며, 경건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될 만한 비극이나 영광스러운 주제도 결여되고, 선악의 갈등이나 인간의 도덕적 의무, 개인의 덕에 대한 교훈, 전체 세계에 대한 신의 섭리나 미래에 대한 신비스러운 이야기는 전혀 결여되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고지끼의 내용은 너무나 허황된 신화로서 기록되어 내용을 소개하기가 단순하지 아니하다. 간략하게 내용을 요약하면 자생적으로 발생한 신이 일본과 일본 황실을 창조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일본 국민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므로 천황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여 준다. 하늘과 땅이 시작되었을 때, 고천원(高天原)에는 세 그룹의 가미(神)가 외견상 자생적으로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후계자 없이 사라지고 대신 다섯 쌍의 가미가대를 이었는데, 그중에서 이자나끼(伊邪那崎)와 아자나미(伊邪那美)가 부부의 신인데, 이들은 천상의 거룩한 소원에 의하여 하늘의 부교(浮橋) 위에 서서 보석창을 아래로 던지고 다시 찾아보니 거기에 바다가 있었다. 창끝에서 떨어진 한 물방울을 아래로 던지고 다시 찾아보니 거기에 바다가 있었다. 창끝에서 떨어진 한 물방울은 굳어져서 섬이 되었으니, 그 섬 이름을 오노고로 섬이라고 하였다. 이 두 신은 이 섬에 내려가서 거하여 다른 8섬과 다른 신들을 창조하였으니 이 섬이 곧 일본이다. 이이서 이 신들은 인간까지도 낳게 된다. 그런데 이나자미는 35개의 기둥 신을 낳고, 마지막으로 불의 신과 가구토(迦具土)를 낳았는데 불행하게도 그녀는 불의 신에 타서 죽게 된다(실제로는 女陰이 타서 죽는다). 죽은 그녀는 죽은 자들이 가는 황천의 나라로 간다. 그녀를 사랑하는 이자나기는 황천의 나라에 가서 불의 신과 가구들을 죽이고 이자나미를 데려오려고 하였지만 가보니 실망스롭게도 이자나미는 몸이 부패해 있었고 황천의 나라의 악령들은 이자나기를 괴롭혀 부득이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다시 상부 세계에 돌아와서 그에게 붙어 있는 불결한 것을 정화하였는데, 거기서 그가 버리거나 씻은 오물로부터 많은 다른 가미들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즉, 그가 왼쪽 눈을 씻은 가운데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가 탄생하고, 오른쪽 눈을 씻을 때에 달과 어두움의 세계인 쯔끼요미(月讀) 신이, 다음엔 코를 깨끗하게 하자 폭풍의 신 다께하야 스사노 오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이자나끼는 이 세 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너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는 높은 하늘을 다스리고, 쯔끼요미는 밤을, 스사노 오는 바다를 다스리라."고 이들 신 가운데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통치자로서, 항상 평화와 질서를 도모하였고, 농사와 식량을 제공하였다. 그녀의 남동생인 스사노는 반면 거칠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신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하늘에서 추방되어 땅으로 내려가서 대지의 왕이라는 나라를 낳는다. 후에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는 손자 니니기노 미꼬토를 보내어 일본을 평화와 질서로 다스리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려오면서 세 개의 신성한 보물인 거울, 보석, 칼을 받았다. 지구에 도착한 그는 꽃의 공주인 후지산의 가미와 결혼하였으니 그의 증손자가 바로 일본의 첫 천황 짐무이다.
4. 카미(神)의 개념
신도의 카미 개념은 단순하지 아니한,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다. 먼저 신도의 카미 개념을 요약하면 다신론이며, 자연물을 신격화하고, 신의 세계는 계층적이다. 그러면서도 막상 신사에는 신상(우상)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힌두교는 3억에서 8억의 신을 말하나 신도는 소위 8백만 신을 말한다. 물론 8백만은 문자적으로 8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신도의 카미 개념은 다분히 중국의 사상과 유사한 것도 있으나 중국과 다른 것은, 중국은 하늘이 곧 신인데 일본에서는 하늘은 신이 거주하는 공간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많은 자연들이 신격화되는 점에서 한국의 샤머니즘과 유사하여 영국의 일부 종교학자들은, 일본의 신은 한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말한다. W.G. Aston은 "일본의 신도와 고대 한국의 종교 사이에는 분명한 관계가 있으며 신도의 어떤 신들은 한국에서 온 것이거나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신도의 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우리가 신도와 다른 종교를 비교해 보면 신도는 원시적인 종교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원시적인 다신론에 불과하다. 즉, 신들의 인격화는 모호하며 연약한 신으로, 영의 개념을 거의 볼 수 없고 도덕적 강령이 전무하다. 또한 미래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심오한 사상이나 진지한 경건의 흔적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도는 원시인들의 종교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신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을 발전시켰고, 일본은 안정된 정부와 높은 문명을 소유하였다.
신도의 카미는 의미가 너무 다양하여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기 어려워 일본의 종교학자들도 다양한 이론을 제시할 뿐, 정확한 해답을 유보한다. 신도의 권위자 무라가미 시게요시는 일본인의 카미 개념은 원시 농경 사회를 시발로 오랜 역사를 통하여 발전하면서 복잡하게 되었다는데, 지금까지 어의에 대하여 10가지 이론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요약하면, 기부정통(忌部正通)의 카세가미(かせがみ : 要覽요람)설, 길천유족(吉川唯足) 등의 거울설(かがみ), 곡천토청(谷川土淸)의 혁견(赫見 : かかみ : 환하게 빛나는 것, 혹은 밝게 비치는 것)과 명견(明見 : あかみ : 밝게 보이는 것)설, 대국융정(大國隆正)의 깨무는 것, 혹은 양조(讓造 : かもす : 술을 만드는 것)설, 황목전구로(荒木田九老)의 경외, 혹은 황공(かしごみ)설, 과천진뢰(果川眞賴)의 기령(奇靈 : くしび)설, 평전독정(平田篤鼎)의 피령(彼靈), 아(牙 : かみ)설, 산기암제(山崎闇齊)의 상관(上觀 : かみみる)설 등이 있으나 지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통된 이론은, 카미는 '上'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카미라는 단어는 본래 일본의 체구가 작은 아이누족들이 위에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카무이(カムイ)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카미를 '上'과 관련시키는 것은 아마도 신도의 신들은 하늘의 자연물들이 신격화된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카미의 일반적인 뜻은 이상하고 신비스러우며, 두렵다고 생각되는 자연물이나 초자연물은 다 카미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5. 신사(神社)와 의식 및 교리
모든 종교는 사원을 가지는데, 신도도 예외는 아니다. 신사는 주로 산림이 울창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두려움과 동시에 경건미를 자아내게 하는 낮은 산, 그러면서도 동네와는 약간 떨어진 좋은 곳에 위치한다. 신도는 철저히 산을 중심으로 하여 경건을 추구한다. 이것은 철저히 자연 종교라는 것을 입증한다. 신도를 위시한 일본의 종교가 산을 중심으로 하는데 대하여 미국의 종교학자인 H. Byron Earhart는 일본의 종교사를 연구하는 가운데 일본 종교의 핵심을 산에서 찾는다. 일본의 대부분의 종교는 고대로부터 산은 신이 거주하며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제공하는 거룩한 장소로 경외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주류를 이루는 종교는 항상 산을 신성시하여 산에서 수도하는 수험도(修驗道)에서 일본 종교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는 색다른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더 부언하기를 수험도는 고대 일본인들이 본래 가졌던 산의 신앙에다 불교적 은둔사상과 도교의 仙人 사상이 가미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일본 종교사 연구는 좀 흥미로운 주장으로 참고할 가치는 있다. 지금도 수험도의 본산은 오사카에서 한 시간 떨어진 금봉산(金奉山)에 수험본종(修驗本宗)이 있는데, 이 절은 신도의 신사가 아니라 불교의 절이다. 그러나 절이나 사원은 주로 산에 위치한다는 것은 일본 종교의 특징만이 아닌, 고대 희랍이나 중동 지방에도 이러한 예를 볼 수 있다(이사야 2:2를 참조할 것). 신사의 구조는 주로 도리이(鳥居)라는 입구를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은 물론 하늘을 향하여 찌르는 듯한 울창한 나무가 들어선 곳이다. 유대교의 성전에 신이 거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신도는 신사에 신이 거하는 것으로 믿으며, 신사의 구조는 힌두교의 절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구조를 하고 장식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세신궁과 이즈모 신사(出雲大社)는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건축된 대표적인 신사이다. 여하튼 조용한 산에 위치하는 일본의 신사는, 10세기에는 3,132개, 1880년에는 약 18만 개나 되었으나 1920년에는 약 12만 개로 줄었다고 한다. 2차 대전 때는 정부가 지원하는 신사는 11만 개나 되었는데, 여기에는 교파 신도의 신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신사가 아직도 일본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판단할 수 있다. 신도는 교리는 없고 다만 신사의 의식을 중시한다. 그러나 신사의 예배는 개인적이지 교회처럼 집단적으로 하는 것은 없다. 특별한 의식은 없고 개인적으로 엄숙한 자세로 신사에 들어가서 합장을 하고 절을 한 다음에 본당 앞에 비치된 헌금함에 돈을 넣는다. 신사중에서 이세 신궁이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를 모시기 때문에 제일 신성한 신사이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쿄토(京都)의 이세 신궁 내전에는 둥근 거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신사에 가면 자식의 합격을 비는 부적, 자동차 사고를 예방하여 준다는 부적, 사업을 번성케 하는 부적, 합격을 기원하는 부적 등이 있으며 갖가지 기원문이 적힌 상징물들이 있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사서 집에 장식하거나 신사 내의 지정된 장소에 걸어 둔다. 일본인들은 매해 신년1일에서 3일까지 80% 이상의 사람들이 신사를 방문하기 때문에 연초는 모든 신사들이 그야말로 성시를 이룬다. 그리고, 신사에서 큰 행사를 할 때 방문을 하는데 대표적인 보편적인 것을 소개하면 위에서 말한 신정이 첫 번째이다. 그리고 매년 2월 3일에 행해지는 세츠분(節分)인데 이 행사는 귀신을 콩을 뿌려 쫓아낸다는 복을 바라는 기복신앙의 행사라 할 수 있다. 3월 3일은 히나 마츠리라고 해서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히나인형,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무샤(武士)인형을 선물하며 부모들이 선물을 하는데 이 날은 여자 아이들의 축제로 아이들의 복을 비는 축제이다. 그렇다면 남자 아이를 위해서는 5월 5일 무샤마츠리라고 하여서 남자 아이들을 위한 축제이다. 끝으로 7·5·3으로서 아이들이 7세 5세 3세가 되는 해에 부모는 아이에게 비단으로 짠 밝은 옷을 입혀 가까운 신사에 참배하러 보낸다. 신도의 예배는 재계(齋戒 : 혹은 청결 의식 미소기 하라이), 공물을 바치는 것, 기도 등이다. 일본인들이 가장 중요시하고 또한 신도의 핵심 의식이 되는 것은 청결 의식이다. 이것은 카미에 접근할 때 더러운 것을 없이한다는 것으로, 가정의 카미다나(神柵 : 일본인들의 80%가 가정에 모신다는 신주 단지에 해당된다)에 절하거나 신사에 들어갈 때는 자신을 깨끗이 한다. 신사 정문의 도리이를 통과하는 것도 재계 행위와 관련되고, 특별히 손을 씻는 곳이 따로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신도에서 재계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속죄의 사상은 없고, 다만 악신이나 재액(災厄)을 없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도는 기독교식의 원죄 사상은 없고, 오히려 인간은 본래 선하고 깨끗하다고 보면서도 죄예(罪穢 : つみげかれ)를 즉 죄의 더러움을 떨어버리는 것을 강조한다. 신도의 예배는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몸과 마음과 주위를 깨끗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거니와 기독교적 원죄의식이 없으면서도 일본인들을 도덕적 국민으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고 본다. 신도의 기도는 손을 합장하고 묵념을 한 다음에 두 번의 박수를 치는 연속 동작을 한다. 일반 신도는 신관에게 카미 앞에서 대신 기도를 드리도록 부탁을 하는데, 이때는 대가로 사례를 한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연초에 대부분 신사에 가서 절을 하고 소원 성취의 부적을 사는 것이 관례가 되며, 동네 단위로 신도의 축제일이 있다. 신도의 축제일에 신관이 기도(축문 : のりと)할 때나 유교의 축문 읽는 것처럼 리듬과 음성의 조화를 중시한다. 신관의 기도 내용은 주로 카미의 찬양, 보호와 축복의 기원, 카미의 뜻대로 행하게 하여 달라는 것이다. 신도도 역시 감사와 헌신에 해당하는 공물이 있다. 헌신은 추수 감사와 같이 농사에 감사하여 추수의 첫 열매를 드린다는 뜻을 지니는 것으로, 쌀이나 술이나 기타 농산물을 바친다. 신도는 체계화된 교리가 없는 대신에 생활로서의 종교를 강조하기 위하여 국가 신도가 폐지되고, 신사 신도로 명칭을 변경한 이후 1956년도에 신사 신도 본청은 소위 경신 생활(敬神生活)의 강령(綱領)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사 신도의 교리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용은 “신도는 천지 유구의 大道로서 숭고한 정신을 배양하며, 太平을 여는 기초이다. 신의 뜻을 두려워하고, 조상의 교훈을 따라서 더 분발하여 도의 정화(精華)를 발휘하고,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이 사명을 달성하는 근거이다. 여기에 이 강령을 높이 받들어 향후 할 일을 명확하게 밝혀 실천할 의무로 삼아 이것으로 大道를 선양하도록 한다.”
6. 신도와 기독교의 충돌 : 신도의 비종교화
1930년대 세계 기독교회는 신학적으로 교회와 정부 간의 관계 정립으로 가장 고심한 때라고 볼 수 있다. 독일에서는 나치의 히틀러가 독일 교회를 세계적 유대 관계에서 단절시키면서 교회를 국가 권력에 복종시키려고 하였고, 일본은 한국에서 역시 한국 교회로 하여금 세계 교회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어 고립화 정책을 시도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 나라 교회는 30년대 세계 교회의 연합 사업과 모임에 참여 중지를 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신학계는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도 연구에서 한국의 기독교회가 명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사 참배 결정은 신도(국가 신도)라는 남의 나라의 종교와 공적 대결에서 실패하였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견지하는데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1938년 한국의 장로교회에서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일본 정부의 신도의 비종교화 정책에 회유당하여 신사 참배를 합법으로 결정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였다. 이것은 일본이 서구에서 배운 식민주의(확장주의)를 종교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그들의 정책은 종교를 정치 이데올로기화하는 모순을 범하였다. 위대한 태양 여신은 일본을 신의 나라로 세웠고 아세아의 제국들은 일본의 지붕 밑에 속해야 한다는 소위 대동아 공영권(팔광일우八宏一宇)을 주장함으로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신도에 대한 선교 전략은 먼저 과거 일본과 한국에서 기독교회가 신도를 어떻게 대하였느냐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 이유는, 한국은 항상 역사에서 과거 청산이 없이 새 역사를 맞이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되는데, 신사 참배 문제는 더욱 그러하다. 해방 이후 한국 교회사의 서술은 불행하게도 진보적인 사람들이나 민족주의적 사관의 사람들에게 독점된 인상을 주었다. 현재의 민중 신학적 사람들은 과거 역사 서설에서는 객관성을 상실하고 신사 참배의 문제는 아예 거론조차도 하지 않고 말았는데, 다행히도 김양선 박사는 신사 참배의 불행한 사건을 한국 교회가 범한 중대한 오류라고 지적한다. 고신의 이근삼 박사의 Christian Confrontation with Shinto Nationalism(기독교와 국가 신도의 대결)은 한국 교회가 신도에 굴복한 역사적 과정을 잘 밝혀 주고 있다. 한국 교회는 "태양신과의 싸움"에서 실패하여 언약의 교회로서 순수성을 이미 상실한 채 해방을 맞이하였고, 이로 인하여 많은 분열의 악순환이 연속되고 말았다. 타종교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포용적인 감리교는 공적으로 신사 참배를 인정함으로 일찍 교단의 방향을 설정하였고, 장로교는 찬성과 반대의 극심한 대립을 노정하였다. 반면 성결교와 침례교는 비교적 단호하게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여 해방 후 분열의 상처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청교도적 유산과 계명을 중시하는 한국 교회는, 개인적으로는 신도와 투쟁하는 신앙의 투사들이 많았으나 공적(노회나 총회)으로는 국가 신도를 종교로 보지 않고 국가 의례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물론 당시의 억압적인 상황에서 그것도 교회를 지키려는 한 수단으로 보아야 한다는 항변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신학적으로 정확한 진단을 하였어야 하며, 아울러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는 저항을 했어야 한다. 물론 당시의 정황에 접하지 못한 후세대들이 과거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선조들의 잘못된 역사를 거울로 삼아 미래의 순수 교회 건설을 위하여 노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특히 신도에 대한 기독교회의 태도 규명은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자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재 일본의 신학자들도 신도를 바탕으로 하는 천황 제도에 대하여 예리한 신학적 진단을 시도하면서 한국 교회가 행한 신사 거부 운동을 용감한 신학적, 신앙적 저항으로 자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발하면서 천황 제도의 폐지를 외친다. 양심적인 일본의 신학자들은 현재의 일본의 상황을 예수님 당시와 비교하면서 편협한 민족적 에고이즘과 세계적 보편주의의 대결로 묘사한다. 신학자도 아니면서 일본의 정치적 모순을 예리하게 말하는 이누마 지로 교수는 일본적 에고이즘과 보편주의 간의 갈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전후 45년간의 일본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하면 기본적 인권과 민족 에고이즘 간에 끊임없이 벌어지는 투쟁의 역사였다(기본적 인권이란 전체 민족의 인권을 동등시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여기에 대하여 민족 에고이즘이란 일본 민족 이외의 인권은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금일의 일본과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는 그야말로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민족 차별, 민족 에고이즘이 강하나, 반면 거기에 대한 반대 운동도 있으니 곧, 예수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다. 우리들은 기독교의 원점에 서서, 새롭게 예수의 말씀의 참 의미(민족적 에고이즘과 기본적 인권에 대하여)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곧, 기독교의 신앙을 참으로 현재의 일본에 적용하는 길이다.
현재 일본의 일부 기독교 신자들과 신학자들이 천황 제도를 비성경적으로 단정하고 저항하는 것은 전쟁 당시의 천황 제도나 신도에 대한 일본 기독교의 태도와 비교하여 볼 때 큰 차이가 나는 용감한 결단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말하면 일본의 기독교회는 국가 신도 정책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저항하는 자는 극소수였고, 대체로 타협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일본 교회의 타협적인 자세에 대하여 이근삼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국가의 신도에, 국가가 교회에 애국이라는 명목으로 협조를 구할 때에 교회는 세속적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하여 투쟁하거나 저항할 확고한 기반을 준비하지 못하였다. 일본의 신자들은, 기독교 신자들이 비애국적이고, 국가와 천황에 대하여 불충한다는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일반적인 국민들의 감정에 극단적인 반대자가 되기를 주저하였다. 신자들은 이러한 비난을 받을 때 충돌을 피하고 심리적으로 유약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애국적 입장에서 일본의 교회는 국가와 협력하였고, 전쟁 중에는 국가를 위하여 군부와도 협력하였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 기독교단(교단)은 종교 애국협회라는 명목으로 군부의 행동을 지지하였다.
7. 신도에 대한 선교 전략
아시아에서의 선교 전략은 타 종교인에 대한 전도 전략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선교역사 전략을 보면 샤머니즘, 회교, 불교, 힌두교, 유교 등에 대한 선교 전략은 많이 거론되고 다루어졌으나 신도는 거의 취급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신도는 일본에 국한되는 종교이면서도 일본인 중에도 신도 신자를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크게 작용하고, 또한 신도는 다른 종교처럼 교리 체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데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신도에 대한 선교 전략은 일본 교회가 발전시켜야 하는데, 일본인들은 민족적인 긍지나 국가관에서는 아주 배타적이면서도 사상에서는 배타적인 정죄나 공격을 함부로 하지 않는 포용적인 사상 때문에 신도 전략을 노골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도 교회가 힌두교 선교 전략을 많이 논하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여기서 우리는 바빙크식의 선교 변증학의 입장에서 신도의 문제점과 동시에 전략을 다루었다. 신도는 일본 국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애국심, 상관에 대한 존경심, 공동체 의식, 질서와 청결과 미를 중시하고, 정직과 친절을 일본 국민에게 가르치는데 성공하여 아시아의 다른 고등 종교보다는 탁월한 국민정신과 도덕을 제공하였다는 점에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것은 한국이나 다른 아시아의 나라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일본은 이러한 국민성 때문에 세계적 일본이 되었다고 본다. 우리는 단순하고도 소박한 신앙으로 일본은 많은 우상으로 인하여 망한다고 말하는데 현실적인 문제점도 직시해야 한다. 한국의 크리스찬이 반드시 도덕과 예의와 공중 질서에서 비기독교인인 일본인들보다 못할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해야 할 것이다. 실천이 없는 맹목적 하나님 신앙이 자동적으로 축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인 면에서 신도의 문제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신도의 문제와 한계는 첫째로, 신도를 기초로 하는 소위 일본주의는 일본 국민들에게 세계에 유례없는 애국심을 국민들에게 심어 주었다. 1차 대전 때에 신풍(神風 카미카제) 특공대가 항복하기보다는 나라를 위하여 자결한 것은 이러한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잘 반영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애국심은 너무나 배타적이어서 항상 주변 국가들의 경계의 대상이 된다. 태양신 숭배 사상은 일본 자체를 신격화함으로 편협하고도 배타적이며, 공격적인 민족주의의 요인이 된다. 성경은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가르치며, 특정 민족이나 국가만이 신의 나라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곧 하나님나라라고 가르친다. 편협한 민족주의에 기초하여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보다는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 더 고귀하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친다(마 6:33). 둘째로, 신도는 혼합주의의 종교로서, 다신론이며 범신론적이어서 신과 인간 사이에 연속이 있다. 아울러 인격적 신 개념이 없기 때문에 신앙의 심오한 체험이 결여된다. 신도는 종교학에서 말하는 절대 타자에 대한 경험은 전혀 없는 인간과 국가의 유익을 위하여 종교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종교적 실용주의이다. 실용주의란 인간의 편의를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다. 사람이 종교를 이용할 경우 새로운 이기주의와 요행주의를 조장시킨다. 셋째로, 신도는 도덕적 이상이나 윤리가 없기 때문에 숭고한 사랑의 동기에 기초한 윤리 행동이 결여되거니와 따라서 도덕관이 결여된다. 일본인들은 근면하고 정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고민은 공중도덕과 정직은 다른 나라보다 앞섰지만 청교도 정신을 기초로 하는 미국과는 달리 성(性) 윤리의 부재가 심각하다. 성 윤리의 부재는 결국 가정의 파괴를, 가정의 파괴는 사회의 위기를 초래한다. 이 점에서 일본은 경제 대국에 합당한 우주적 도덕률이 없어 국제적 차원에서 봉사나 사랑의 행동이 없다는 것은 이미 국제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뜻 있는 일본인이 심각하게 지적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넷째로, 신도는 개인 인권 부재의 종교이다. 신도는 개인의 번영과 복을 신에게 빌지만 실제로 국가를 위하여 존재하는 종교이지, 개인의 인권과 존엄성을 말하지 않는다. 이로 인하여 지금 일본인들은 개인적으로 심각한 아이덴티티 위기에 빠지고 있다. 개인이 국가를 위하여, 혹은 직장을 위하여 죽도록 헌신하고 충성하지만 후에 개인적으로 돌아오는 보상은 무엇이냐고 회의한다. 이 점에서 신도에는 흄이 지적한 바와 같이 미래를 위한 영광스러운 희망이 없다. 일본인에게는 현재의 일본만 존재하지 영원한 하늘나라가 없다. 이처럼 신도에 대한 선교 전략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신도에 대한 바빙크식 선교 변증학적 접근을 시도한 자는 명치시대 때에 에손이라는 한 외국인 선교사이다. 그가 「신도파척(神道破斥)」이라는 간단한 소책자를 만들어 신도를 공격하면서 전도를 시도하였는데, 그것은 곧 신도 사람들로부터 큰 저항을 받았다고 한다. 이 전도지에서 그는 신도보다는 기독교 신앙의 우월성을 일본인들에게 알리고, 다음 신도의 신에 비하여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유일신이라는 것을 천명한다. 다음 요꼬하마의 일본 기독공회가 작성한 기독교 신앙의 세 가지 중요한 조항 가운데 제 1은 일본 재래의 신은 참 신과는 다르므로 숭배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지금 일본 교회에는 상징 천황제의 모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천황 제도는 성경의 제 1계명과는 정면 배치되며, 비합리적이고 비민주적이어서 일본은 상징 천황제라는 잘못된 신화에서 해방이 요구된다고 역설하는 신학자들이 등장하였다. 신도 전도의 첫째 메시지는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이다. 따라서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많은 신을 섬기는 나라와 백성은 망한다는 소박하고도 단순한 신앙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지성적인 일본인들에게 상징 천황제의 문제점을 이론적으로 예리하게 지적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을 절대 거부한다. 구약에 나타나는 배타적 유일신론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은 신도를 향한 중요한 메시지이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출 22:20). -내가 네게 이른 모든 일을 삼가 지키고 다른 신들의 이름은 부르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말 지니라(출 23:13).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출 34:14).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으로 배타적 유일신론을 거부하고 대신 다신론적인 사상으로 기울어짐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 이때 선지자들은 과감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기적 동기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시아의 대부분의 종교들은 개인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는데 종교의 목적을 두지만 신도는 먼저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하여 태양신을 위시한 많은 신들을 섬긴다. 신도의 사상은 국가 공익이라는 명분이 있는 것 같으나 결국 국가 권력을 우상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것은 또한 종교가 새로운 형태의 집단주의나 전체주의를 정당화시키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우상의 모순과 죄악을 책망한다.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 바며 저희가 또 은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호 8:4).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이라(호 13:4).
일본의 천황 제도는 인간 신격화의 대표적인 모델로서, 반드시 천황만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사람은 항상 신이 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야스꾸니 신사의 "전쟁 영웅"들은 거의 신으로 모셔지거니와 전후에도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1968년 일본 자위대의 한 장교가 근무 중 자동차 사고로 죽었는데, 미망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사에서 신으로 모셔졌다. 미망인은 이것을 일본의 정교 분리의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제기하여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를 신으로 모시고 싶은 집단들의 의사는 그대로 허용되는 모순을 나타내었다. 성경은 죽은 자를 우상화하는 것을 정죄한다. 신도 사상의 일본인들에게 전도할 다음의 중요한 메시지는 국가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 지상에는 영원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성경을 기초로 말해야 할 것이다. 일본인들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한 애국심과 충성심은 다른 나라에 본이 되고 국가 발전의 정신적 기초가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더 우위이며, 더 절대적이며, 영구하며, 더 보편적인 가치와 이상이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롬 14:17). 국가와 특정 민족만을 우상화할 때 지상에서 국가와 국가 간, 민족과 민족과의 전쟁은 끊어지지 않아 지상의 평화는 불가능하다. 이상 신도에 대한 선교 전략을 더 이상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일본에서 순수하게 신도 신자를 만나기는 어렵다. 다 신도이면서 또한 불교적인 문화권인지라 오히려 일본 선교 전체를 다룰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면상 여기서 일본 선교 전략을 총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고, 가장 중요한 원리만을 한 가지 강조하자면 일본은 아직도 기독교가 서구의 종교로 통하여지며, 이것도 저것도 다 좋다는 일본인들에게 배타적 기독교는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정신적 풍토, 기독교는 지성적 종교라는 인식으로 대중화되지 못한 점, 기독교는 많은 요구를 하는 종교로 인식되는 것이 전도의 걸림돌이다. 이러한 걸림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에 대한 선교 전략은 역시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살아 있는 신이요 제사장이시며, 동시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장 고귀하게 희생하셨다. 일본 신학자들 중에서도 사무라이 정신과 십자가를 결합시키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과거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였고, 지금도 직장과 사회를 위하여 희생하나 대가에 대하여 지금 많은 사람들이 회의를 표시한다. 인간적인 어떠한 희생도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희생만이 진정한 구원의 보장이 된다. 반면에 일본에서 기독교는 개인의 복음으로, 개인주의를 조장한다는 오해를 야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야말로 공동체의 종교이며, 동시에 개인을 궁극적으로 보호한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일본에는 지금도 카미다나를 가정에 모시는데, 그것은 조상신이다. 일본인들의 60% 이상이 지금도 가정에 조상신을 모시는데, 그 이유는 개인과 가정의 보호를 위함이다. 한 일본 신학자는 일본의 조상 제사의 이유는 가정의 보호이며, 가정의 궁극적 목표는 "소속의 안심감"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들에게 전도의 메시지는 소속의 궁극적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서구 선교사들도 일본에서는 자본주의식의 개인주의 복음을 그대로 일본에서 가르칠 때 개인주의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일본인들에게 오히려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소속 집단, 예를 들면 직장, 도시의 마을, 시골 등에서 종교적 이탈은 공동체에서의 이탈로 여겨지고, 그것은 심각한 고립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 일본에서 복음을 비교적 잘 받아들이는 집단은 공동체에 매이지 않아도 되는 청년과 학생 계층이다. 기독교로 회심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하는 것은 초자연적 공동체에 가입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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