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충남의 대표 수필가 김영배(金英培)
글 최중호
생애 요약
김영배 수필가는 1931년 10월 5일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갈산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중학교 때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감동하여 상록수에 등장하는 박동혁과 채영신처럼 어둡고 가난한 아이들의 문맹 퇴치를 위한 농촌계몽 활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강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마을 공회당에서 한글 강습소를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선생은 20대 때 오른쪽 얼굴에 신경마비가 와서 결혼 및 직장생활을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과 미래를 약속했지만, 여자 쪽 가족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자신의 얼굴에 대해 혐오감을 느껴 심한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몇 해 동안 실의에 빠져 생활하였다. 그 뒤로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선생은 얼굴 때문에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월등한 지식과 탁월한 실력을 갖춰 많은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독서로 지식을 쌓고, 문학으로 지명도를 높이고자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독학으로 초·중·고 교사 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해 교사 자격을 얻었고, 문학 부문에서도 서서히 그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 선생은 광석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61년 5·16 군사정변 때 병역 미필로 해직을 당했다.
1963년부터 1969년까지 논산대건고 국어 교사로 근무했고, 1969년부터 공립학교로 이동해 천안농고, 강경상고 등의 교사를 거쳐 1984년 예산 덕산고 교감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다. 1985년부터는 충남교육연구원, 충남도교육청에서 연구사, 장학사로 근무한 후, 1990년 홍성 홍동중학교 등에서 교장으로 승진 근무하다가 1997년 2월에 논산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였다.
퇴직 후, 논산문화원 부원장을 역임하면서 수필창작에 열중하던 중 2008년 제9수필집 『떠나간 자리의 뒤처리』(좋은수필사)를 마지막으로 발간 한 후, 2009년 11월 14일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학 활동
선생은 청년 시절부터 천부적인 문학적 소질이 있어 1948년 제1회 남녀 중학생 문예작품 현상공모에서 「뻐꾹새 우는 내 고향」이란 수필이 당선되어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72년 『수필문학』에서 「동심의 산」, 「오작교의 의미」로 문단에 등단하여 본격적인 수필 창작활동을 하였다.
선생은 1970년 충남지역에서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한얼 문우회」의 창립 회원으로 참여해, 1971년 동인지 『교단의 미소』(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72년 『교단의 여백』(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74년『교단의 메아리』(한얼문우회)에 수필을 발표하였다.
1975년에는 5인 수필집 『소부리의 대화들』(한국문학사), 1977년에는 10인 수필집『등 너머 푸른 숲엔』을 발간하였다.
선생은 1978년에 제1수필집 『정한 나무의 연륜』(유림사)을 발간하였다. 1981년에 제2수필집 『비둘기 하늘을 날을 때』(교음사), 1986년 제3수필집 『정과 한을 다듬는 소리』(교음사) 등을 발간한 후, 마지막 수필집인 제9수필집 『떠나간 자리의 뒤처리』(좋은수필사)를 발간하였다. 이로써 선생이 얼마나 수필문학에 열정과 사랑을 갖고 사셨는지 알 수가 있다.
평소 선생은 수필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4년 한국신문예협회에서 수필부문 문학상, 1992년 대전일보사의 대일비호상 교육문화부문, 1995년 월간 수필문학사의 수필문학 대상, 2005년 원종린 수필문학 대상, 2007년 충남 펜문학상과 소월문학상(새한국문학회) 등을 수상하였다.
선생은 수필문학 외에 시조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84년『현대시조』에 「목련」, 「여승당」, 「경칩」으로 등단한 후, 1987년 제1시조집 『출항의 아침』, 1993년 제2시조집『산 울음 담은 강물』을 시작으로 2007년 제6시조집 『굴렁쇠 세월』 등 7권의 개인 시조집을 출간하였다. 그 결과 1998년 한밭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선생과 만남
내가 선생을 처음 본 것은 1960년대 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고모 집엘 갔다. 설 명절 후라서 광석 면민 회관에서 노래자랑이 있어 구경을 갔다. 그때 사회를 맡아 보던 분이 바로 선생이었다. 5·16 군사정변으로 초등학교 교사직에서 해직되어 직업이 없어 그곳에서 사회를 봤으나, 시골 노래자랑 사회자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해박한 지식으로, 다정다감하게 사회를 봤던 기억이 있다. 그때 사회를 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분의 인상이 다른 사람과 달라 기억할 수 있었다.
그 후, 부여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나,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등록금을 기한 내에 내지 못해 논산대건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때 선생은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어, 운동장 조회 때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계룡산 신원사 계곡에서(오른쪽으로부터 강석호 회장, 김영배 수필가, 장백일 교수, 최중호)
수원 세미나 후, 남한강가에서(오른쪽부터 최병호, 김영배, 강봄내, 김희선, 박연구, 최중호)
대학을 졸업하고 천안공고 교사로 있으면서 한국문인협회 천안지부 회원으로 수필을 공부할 때, 『충남수필문학회』가 창립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선생께 연락해서 발기인 대회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선생과는 그렇게 인연이 되어 『충남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30여 년 동안 수필문학 활동을 하면서 전국에서 개최되는 수필문학 세미나 등이 있을 때마다 선생을 모시고 다녔다.
한때는 선생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기도 해서 자주 뵐 수 있었다.
어느 여름날, 선생이 강경여중 교장으로 계실 때 전화가 왔다. 강경으로 한 번 놀러 오라는 것이다. 차를 몰고 강경으로 가보니 서울에서 고 강석호 회장님과 고 장백일 교수님이 와 계셨고, 천안에서는 최병호 수필가도 와 계셨다. 그날 밤 교장 사택에서 자면서 늦도록 술을 마시며 수필 정담을 나눈 후, 이튿날 관촉사를 경유해서 계룡산 신원사 계곡으로 가 시원한 계곡물에 등목을 하고, 너른 바위 위에 앉아 수박과 맥주를 마시던 기억이 있다.
수필 세계
선생은 수필도 쓰고 시조도 쓰지만, 선생의 수필 세계는 선생의 인생관과 문학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선생의 수필은 일상생활에서 얻은 경험에다 선조들의 삶에서 얻은 지식을 자신의 인생으로 승화, 융합 시켜 소박하게 그려낸 자조적 문학이라 할 것이다.
먼저 선생의 수필 세계를 말하기에 앞서 선생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계기를 살펴보기로 한다. 선생은 20대에 오른쪽 얼굴에 신경마비가 왔다. 그로 인해 선생은 다른 사람이 겪지 못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 뒤로 선생은 삶에 대해 회의를 느꼈고, 좌절도 하였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자신이 겪고 있던 어려움을 타개해 나갔다. 그 결과 선생은 직장에서도 좋은 결과를 가져왔고, 수필문단 및 시조 문단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또한 선생은 서예 분야에서도 능해 필체(筆體)도 달필(達筆)이었다.
선생께서 필자에게 보내 준 연하장
하지만 선생의 수필 중에는 젊은 시절에 겪었던 아픔이 작품 속에 잠재적으로 내재된 것을 알 수 있다. 직설적 표현은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젊은 시절에 겪었던 아픔을 선한 마음으로 여과시켜 한 단계 승화된 문장으로 기술하고 있다. 선생은 남들이 미워하는 것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잘난 사람보다 못난 사람을 사랑하고, 지위 높은 사람보다 말단에 있는 사람을 사랑했다. 여기서 선생의 서민적이고 인정미 넘치는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글은 곧 그 사람이라 했다. 선생의 수필에는 그런 마음이 녹아있다. 그런 마음의 기저에 선생의 문체와 문장이 숨 쉬고 있었다. 선생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는 사물을 예리하게 통찰하여 형상화 시키는 능력과 탁월한 직관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선생의 문장에는 아름다운 서정과 조밀한 서사가 있다. 서정과 서사가 알맞게 조화를 이뤄 글을 더 돋보이게 하는, 선생만의 독특하고 유려한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수필론
선생은 자신의 수필론을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수필문장은 간결해야 한다.
문단의장(文短意長)이란, 글은 짧고 뜻은 깊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글은 함축성이 있고, 여운이 깃든다. 글이 짧으면 맑고 신선하며, 뜻이 깊으면 은근한 메아리가 생긴다. 함축성이 있어야 읽을거리가 있고, 여운이 있어야 읽을 맛이 난다. 칡뿌리를 씹듯이 오래오래 씹히며 맛을 내는 그런 글맛이 바로 수필의 맛이다.
둘째, 수필은 평이하게 써야 한다.
의현사명(意玄詞明)이란, 글의 속뜻은 깊어도 그 말을 쉽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철학적 유현한 진리가 깃들어 있다 하더라도 표현하는 말들은 이해하기 쉬운 것이어야 한다. 내용을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부질없이 현학적으로 써나가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셋째, 수필은 정밀해야 한다.
묘사나 서사에 있어서 혼미하거나 모호한 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인 표현으로 실감을 주도록 해야 한다.
넷째, 수필은 솔직해야 한다.
수필은 수식이나 가식이 필요하지 않다. 보면 본 대로 느끼면 느낀 대로, 그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거짓말이 없어야 한다.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말, 실제에서 일어나는 느낌, 직감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글은 참된 것에서 피어나고, 거짓된 것에서 시들어 버린다. 간결, 평이, 정밀, 솔직, 이 네 가지 기준으로 글은 써야 하고 남의 글을 따오거나 모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간결만 해서 문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대한 절약과 진지한 수법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수필처럼 쉬운 글도 없듯이, 수필처럼 쓰기 어려운 글도 없을 것이다.
대전·충남의 대표 수필가
선생은 일찍 수필에 관심을 두고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선생이 수필문학 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만 해도 한국 문단에서도 수필문학은 태동을 시작하던 때였다. 중앙에서도 누구나 수필은 쓸 수 있는 것으로 여겨 저명인사들이나 타 장르의 문인들이 쓰는 글로 여기고 있었다. 수필 장르를 별도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 중앙에서 월간 『수필문학』, 『수필문예』(한국수필 전신), 계간『수필공원』 등의 수필전문지가 발간되던 때였다.
이때 선생은 충남에서 수필 동호인들의 모임인 『한얼 문우회』의 창립회원으로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동인지 『교단의 미소』,『교단의 여백』,『교단의 메아리』 등을 발간하며 수필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대전과 충남에 거주하는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충남수필문학동인회』를 발족하여 초대회장을 맡아, 1981년 3월에 동인지『수필예술』창간호를 발간하였다. 그 당시 대전, 충남지역은 수필문학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그런 척박한 땅에 수필의 뿌리를 내려 이 지역 수필 애호가들에게 작품 발표의 기회를 제공해서, 전국의 수필가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찬사를 받기도 했다.
선생은 『충남수필문학동인회』에서 1988년 제4대까지 회장직을 맡으면서 이 지역 수필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의 노력을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제1수필집 『정한 나무의 연륜』을 시작으로 9권의 수필집을 발간하는 등, 수필창작 활동도 꾸준히 해 왔다. 그 결과 중앙문단으로부터 수필문학 대상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여 선생의 수준 높은 수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지역 수필 문단의 위상도 한층 더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은 자신이 태어나서 생활했던 논산(論山)과 강경(江景)을 사랑했다. 해서 호(號)도 논산과 강경을 상징하는 첫 글자를 따서 논강(論江)이라 하였다.
선생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는 어렸을 적 마셨던 숭늉 같아서 누구에게나 친근감이 가는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정이 많았던 선생은 동료 수필가 및 후배 수필가들에게도 항상 친절했고, 그들에게 수필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하는 한편, 수필창작 지도에도 열정을 다했다.
항상 전국의 수필가들과 교유하면서, 후배 수필가들에게도 그들과의 교유에 앞장을 섰다. 전국 규모의 수필문학 세미나가 개최될 때마다 동료 및 후배 수필가들을 데리고 가서 유명 수필가들을 소개해주고 그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선생은 몸이 불편할 때도 『대전수필문학회』의 모임에 꼭 참석해서 많은 회원이 선생의 건강을 염려하기도 했다. 이렇듯 선생은 대전, 충남의 수필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많은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따라서 선생은 대전·충남의 대표적인 수필가요, 한국 수필문학의 거목으로 우뚝 서서 이 지역 수필가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다.
인생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증자는,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하다(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라고 했다. 선생이 남긴 마지막 수필집이 『떠나간 자리의 뒤처리』였다. 그 수필집을 보면 살면서 겪었던 슬픈 이야기들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선생은 운명을 미리 짐작하셨던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소중하게 간직했던 많은 책을 공공기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작품감상|
긴 여름, 그 오후의 반추
김영배
모악산 산기슭에 자리한 삼간 토방집은 내가 말년을 편히 쉬고 싶어 찾아오는 쉼터다. 그러므로 나는 이 집을 이름하여 별장이라 부르고 있다.
내가 이 별장에 와서 여가를 선용하는 것은 이 집이 거루고각(巨樓高閣)이거나 집 구조가 멋스러워서가 아니다.
봄이면 산사 입구의 공원에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여름이면 더위를 식힐 수 있는 맑은 계곡물이 바로 마당 끝으로 흘러내리며, 가까운 산록에는 사찰 하나가 자리하고 있어 조석으로 예불을 드리거나 그곳 강원에서 스님의 강론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숲속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과 졸졸졸 흐르는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도 좋은 이 별장은 그래서 언제나 청풍이요 물소리요 명월이다.
내 고향의 선비요 예학의 대가이던 사계(沙溪) 선생의 시조에는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草廬) 삼 간 지어내니/
한 간엔 청풍이요 한 간엔 명월이라/
산천을 들일 곳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고 읊은 한 편 글이 있으니 그 기상이 얼마나 청빈고고(淸貧孤高) 한가?
나는 가끔 이 계곡 가에 나가 앉아 두 발목을 담그고 있노라면, 어느덧 심신은 범속의 굴레를 벗어나 순수한 지경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것은 분명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요 정관(靜觀)의 세계다.
‘만족함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고 천하여도 항상 즐거울 것이요, 만족스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부하고 귀하게 살아도 늘 근심이 많다.’는 말씀이 있듯이 비록 토막 삼간에 살면서도 이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음은 얼마쯤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증일까?
발목을 쓰다듬으며 흐르는 이 계곡물은 멀리 모악산 등성이에 내리는 빗물이 근원이 되어 여기까지 이르는 것이거니, 그 여정은 꽤나 먼 것이 분명하다. 그 길은 거칠고 험한 행로요 먼 거리였을 것이니, 바위와 돌과 나뭇등걸의 저항을 받으며 아래로 아래로만 흘러왔을 고달픈 여정이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인생의 한살이와 흡사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고 느껴 보게도 된다. 또한, 지금 내 발등을 넘어선 이 물살은 다시 멈춤 없는 행보를 계속하면서 주위의 산 것들을 키워내며 한 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음향 섞어 흐르는 물살의 밑바닥을 응시하고 있다. 어디선가 송사리 떼들이 오몰오몰 거슬러 올라왔다. 날렵한 몸매로 태어났기에 이렇게 흐르는 물살을 거슬러 오를 수가 있는 것일까? 깨알보다도 더 작은 눈으로 이 세찬 흐름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요 작은 미물을 보며 나는 문득 이들에 대한 애정이 솟았다. 왕 구슬만 한 눈동자를 갖고서도 한 길 물속을 뚫어보지 못하고 하루의 앞날을 예견치 못하는 게 우리 인간이 아니던가?
잠시 후 다른 한 집단의 송사리 떼가 몰려와선 내 발등과 발가락 사이를 비집으며 반응을 꾀하고 있다. 나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발을 움츠렸다. 순간 놈들은 해적(害敵)이나 만난 듯이 기민한 동작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그 놀라운 감각과 속도에 다시금 경탄한다.
나는 그간 태초의 세 쪽이나 해파리처럼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오직 내 처지에 만족하며 의지 없이 살아왔음을 자각한다. 교직에 몸담은 후 한평생 그곳을 천직으로 삼고 온갖 정성을 쏟고 살아온 45년 세월이었다.
가난과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일으킨 개발 독재 시대에도 지혜로운 이들은 날쌔게도 도시로 도시로 나가 자리를 잡고 요령껏 돈도 벌며 승진도 하고 고대광실 속에서 떵떵거리고 살아가는데, 나는 해묵은 논밭을 갈고 사는 황소처럼 무거운 멍에를 짊어진 채 시골 교단을 지켜 왔다.
윤리와 도덕이 퇴색해 가고, 가치관마저도 거꾸로 서버리는 물질주의의 물결 속에 나는 한 마리 거북이 되어 게으른 행보를 거듭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게 부딪혀 오는 갖은 고난마저도 으레 내게 치러야 할 숙명적 업보라고 여기며 거부할 념도 없이 순응해 온 세월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오직 정신을 상하게 할 뿐이요, 허망한 행동은 도리어 재앙을 불러온다(濫想은 徒傷神이요, 妄想은 反致禍라)는 도덕관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나는 긴 한숨을 내리 쉬었다. 정말 잡된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나 보다. 이런 의식은 새로운 상충 의식 밑바닥에서 곰실거리던 잠재의식이 한 번쯤 고요한 사색의 나래를 펴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현상일지도 모른다.
엊그제 밤 지허 스님의 강론이 생각난다. ‘반야의 참뜻에 대한 설법이었는데, 그것은 깨달음을 얻는 진실한 지혜에 대한 문제였다. 그 진실을 바르게 꿰뚫어 보는 지혜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두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지혜를 말하며, 이러한 지혜로 깨달음을 얻게 되면 불타가 될 수 있음으로 반야(般若)를 일명 불모(佛母)의 품 안이라고 일컫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중 실상반야(實相般若)는 일체의 존재가 모두 공(空)임을 알고, 그 모든 잡된 마음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지혜라고 말했다.’ 정녕 그럴 것 같다고 새삼 새겨들었다.
그토록 무섭게 휘두르며 뭇사람의 기골을 옥지르던 권력자도, 그렇게 화려한 돈방석에 앉아 떵떵거리며 살던 부호도, 만인의 부러움을 받으며 명성을 드날리던 유명인사도, 일단 그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병들어 눕게 되거나, 한 시대가 크게 소용돌이치는 날에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마의공수(麻衣空手)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수 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현실 의식으로 돌아왔다.
행적을 감춰버린 송사리 떼들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먹이를 던져 주어야 한다. 나는 먹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물 위에 던져 주었다. 순간 잠적했던 그놈들이 일순간에 모여들었다. 어떻게 냄새를 맡고 모여드는 것일까? 모여든 그들은 또 한 번 소유에의 쟁탈이 벌어졌다. 그 상황이 눈물겹도록 애처롭게 느껴지는 순간, 나는 눈길을 돌리며 인간 세상을 떠올렸다. 그리고 물속에 담가 놓았던 음료수병을 집어 올려 그 진한 액즙을 입안 가득히 쏟아부었다. 그것은 흔들리는 마음의 끝자락을 조용히 추스르고자 함이었다.
최중호
월간 수필문학 등단(1991),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대전문인협회 부회장, 『수필문학』편집위원, 대전·충남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수필춘추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대전문학상, 박종화문학상, 인산기행수필문학상, 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 『장경각에 핀 연꽃』, 『한국인의 두 얼굴』
첫댓글 최선생님. 김영배 초대회장님의 업적을 찾아 장문의 글 쓰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또한 최선생님 글을 제41호 수필예술 특집에 올릴수 있게 해 주셔서
우리 수필지의 품격을 한층 높이게 되었습니다.
대단히 감사 합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글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조사해서 써 본 것입니다.
이 분의 성함을 선생님들에게서 드문드문 들었습니다. 잘 모르는 분이었는데, 지루할 틈도 없이 쓰신 글로 어떤 분인지 알 것 같습니다. 작품까지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시면서 재미있는 추억을 지니신 것 같아 부럽습니다. ^^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대전수필문학회를 창립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셨고, 초대에서 4대까지 회장을 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못쓰는 글이지만 한 번 써서 올렸습니다.
이번 41호 특집에 실린 글을 미리 올려봤습니다.
직접 써주신 신년 연하장이 제게도 있습니다만...
품격이 드러나는 논강 선생님 글씨를 보니 그 어른 생각이 다시 납니다.
논산 부영아파트에 계실 때 책을 한 보따리 싸주시던 모습 역시 ~~
덕분에 늘 선비같던 모습을 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네요. 귀한 글에 감사드립니다~^^*
잘 보셨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