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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자라는 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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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스크랩 마태복음 (19 : 1~30) 주석
주님목자 추천 0 조회 68 09.06.09 12: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태복음 19장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ㅇ이 말씀을 마치시고 - 마태복음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있는 다섯 설교의
다섯 종결 문구(ending formula)중의 네번째 것으로 앞장(18장)의 설교
가 끌났음을 의미하는 문구이다. 이로써 공생애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
셨던 갈릴리 사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이 때는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으로 죽으시기 약 한달전으로서 대략 A.D. 29년 2-3월경의 일로 추정
된다. 한편 본서에 언급된 다섯 종결문구는 본문 이외에 7:28;11:1;13:53
;26:1에 나오고 있다.
ㅇ갈릴리에서 떠나 - 3차에 걸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
에서의 수난주간을 맞이하실 때까지 사마리아를 경유하지 않고 유다와 베
레아를 순회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전도하신 기사이다. 따라서 19-20장은 갈
릴리를 떠나 예루살렘 입성까지 도중의 기사로, 보통 '베레아 전도'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이 전도사역은 갈릴리에서의 출발(1절)로 시작되어 베다
니에서 왜 마리아의 기름부음(26:6 ff.;막 14:3)으로 끝난다. 이 기간 동
안에도 예수는 역시 계속해서 민중들로부터는 기대와 환호를 받았으며, 유
대 교권주의자(敎權主義者)들로부터는 질시와 모함과 배척을 받으셨다. 
ㅇ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 - 이곳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이는 평행구절인 막 10:1에서는 분명히 이 지방이 베레아인
것처럼 보이지만 눅 9:52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땅
을 통과하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도 예수께서 갈릴리를
떠나 (1) 요단 동편 베레아로 가셨다(Plummer, D.A.Carson, Carr). (2) 요
단강 서편 사마리아를  지나 가셨다(Delitsche, Weiss)는 견해로 양분되어
있다. 그런데 대체로 베레아 방문설을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잔치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다른 수 많은 유대인
들과 함께 베레아를 지나(유대인들은 '거룩치 않은 땅'으로 생각한 사마리
아를 피하여 대신 베레아로 통과하곤 하였다,요 4:9) 예루살렘에로의 순례
여행을 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요단강 동편이 베레아를 가리
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곳은 유대땅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 '건너편'이라는 표현인 '페란'이 바로 뒷
단어인 '유대'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페란'과 '유대' 사
이에 접속사 '그리고'(카이)가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여 '요단강 건너편과
유대에 이르시니'로, 각각 독립 구문으로써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2) 유
대 지경이라는 표현은 그 '구역'을 의미하는 코우스트(coast)가 아니라
'경계'를 뜻하는 보오더(border)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요단강
건너와 유대지경(사실은 '경계')은 동격으로 베레아가 유대지방이 아니라
그 경계임을 드러내는 정확한 보도가 될것이다. 한편 베레아란 이름의 뜻은
헬라어 문자그대로 '건너편'(페라이아)으로, '요단 저편'의 또 다른 이름이
다. 이곳 베레아는 그 남쪽 경계가 헤롯의 요새인 마케루스(Machaerus)
로 세례 요한이 처형된 곳이며(14:1-12), 북쪽의 경계는 야르묵(Jarmouk)
강까지로 비교적 넓고 비옥한 지역이었으며 예수 당시 헤롯 안티파스
(Herod Antipas)의 통치하에 있던 구역이었다.      

2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ㅇ큰 무리가 좇거늘 - 마가의 평행 구절에서는 '무리가 다시 모여 들거늘'
(막 10:1) 이라고 표현한 것에 비해서 마태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동사
'좇다'(아콜루데오)를 통해 그 무리들이 보통의 군중들이 아니라 예수와 밀
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임을 시사하고 있다. 보통 이 동사는 '따르다'
'제자가 되다' 등의 의미로 갈릴리에서 베레아까지 예수를 따라온 무리들이
결국 예루살렘으로 까지 계속 예수를 따라다니는 일종의 '제자무리'들 임을
나타낸다. '제자됨'을 나타내는 이 동사는 21절과 27절에서도 다시 사용되
고 있다.
ㅇ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 이적기사가 많은 마가복음에 오히려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라고 되어있고, 설교기사를 선호하는 듯한 마
태복음에 도리어 '병고침'이 언급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마태의 19장 본
문의 내용이 설교가 아니라 주로 설화 부분이기 때문에 마태가 의도적으로
마가의 본문을 수정한 것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A.W.Argyle).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의 주요 세 사역인 가르치심(teaching)이 갈릴리
뿐만 아니라 이 베레아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뜻하는 말로 이해함으로써,
선포자(18장의 설교), 예언자의 모습을 갖춘 메시야로서 예수의 완전한 사
역을 설명하려는 마태의 노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Gerhardson).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ㅇ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 예수의 소문이 헤롯과 예루살렘의 교권주의자
들에게 전해짐으로써(14:1) 그곳의 산헤드린에서 급파된 진상조사단인이 바리
새인들은 사마리아를 제외한 전지역과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를 시험하고, 비
방(誹謗)했으며, 모함할 요소를 찾기에 분주했다(9:1-13;12:1-21;15:1-20). 그
리고 본문에서 그들은 예루살렘 종교회의와 로마 당국에 고소할 거리를 찾아
신학 논쟁을 벌이고있었다. 한편 지금 예수가 머물고 있는 베레아 지역은 땅이
비옥(肥沃)하고 경제력이 타지역보다 상당히 앞서 있는 참으로 평화로운 전원
풍의 지역으로서 유대적 교권주의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욱이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의 선교 활동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곳에까지 찾아와서 적대행위를 일삼았을 뿐 아니라 무리
를 충동질하여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였던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그들의 현
재 위치가 헤롯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부정한 결혼의 문제로 세례 요
한이 처형된 곳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그들이
제기한 이혼문제는, 곧 바로 예수의 처형을 획책하려는 음모(陰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들은 중요한 신학적 논쟁거리처럼 보이는
이혼법에 관한 난제를 제시함으로써 예수를 정치적 곤경에 몰아 넣으려고 하
였다.
ㅇ시험하여 -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시험당하거나 유혹받은 것은 맨 처음 사단
에 의해서이고 그후에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헤롯당에 의해서였는데(4:1,
3;16:1;22:18, 35), 이는 모두 그의 메시야적 권위를 시험하거나 도전하는 것
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바리새인들의 시험의 형식은 언제나 하나의 문
제에 대해서 '가', '불가'를 묻는 방법으로 예수께서 만일 '옳다' 하여도, 아
니면 '그르다'말씀하셔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될 애매한 문제에 대한
답변 요구가 대부분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양자 택일의 흑백논리의 오류
에 빠져들지 않고 논제의 본질을 그대로 파헤치심으로써, 근본적인 문제 해결
을 시도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시험은 번번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ㅇ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 이는 문자적으로 '어떠한 원인으로든지'라는 뜻이
다. 이같은 물음은 규율에 어느 정도의 자율성(自律性)을 부여하고 있는 힐렐
학파가 취한 태도와 학설에 근거해서 제기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힐렐
과 쌍벽을 이룬 샴마이학파는 일정한 이혼사유가 규정되어 있었으며, 계약을
맺고 들어간 쿰란공동체 사람들은 이혼은 어떤 경우에도 불법적인 것으로 간
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J.R.Muller). 새번역에서는 이 문구가 '이유가 있
으면', 공동번역에서는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으로 번역되어 있는
데, 이 번역이 본문 해석상 적절한 것 같다. 한편  NIV의 'for any and
every reason'이란 번역은 공동번역의 표현과 잘 어울린다.
ㅇ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 그 당시 팔레스틴의 유대 사상에 주
류를 이루는 랍비 학파인 힐렐(Hillel)과 샴마이(Shammai)는 특히 이혼
문제로 해서 크게 대립되어 있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다 이혼을 인정하였는
데, 물론 남편이 아내를 버린 경우의 이혼만을 인정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불
가하였다. 이들의 이혼에 대한 생각은 신 24:1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에
르와트 다바르', 곧 '수치(羞恥)되는 일'이라는 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수치'(indecency)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
해서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즉 샴마이학파는 수치를 '간음'(姦淫)과 갈이 엄
청난 정도의 것으로 해석했는데, 물론 성경 본문은 수치가 반드시 간음을 의
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간음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은 죽음이었지 이
혼이 아니기 때문이다(신 22:22). 마찬가지로 '수치되는 일'이 아내의 '간통
에 대한 의심'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 이는 아내가 간통한 사실을 밝히고 싶
을 경우에는 저주를 내리게 하는 쓴물을 아내에게 마시우게 하는 의식이 있었
기 때문이었다(민 5:5-31). 따라서 '수치되는 일'은 바로 간음은 아니라고 하
더라도 아내의 순결 문제 등과 같은 상대 남편에게 큰 충격이 되는 일로 추측
해 볼 수 있다. 또한 율법의 근본 취지를 고려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란 남
편이 아내에게 떳떳하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요구할 만한 충분하고도
객관적인 사유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한편 힐렐학파는 '수치'의 의미를 확
대 해석하여, 실제의 죄든 아니면 상상속의 범죄이든지 간에 모든 종류의 죄
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 '지극히 사소한 잘못'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음식이 상한 일이라든지, 남편이 자기 아내보다 더 좋아하는 여인
이 생겼다든지 또는 더 이상 애정이 생기지 않는 것 등의 부당한 일에 의해서
남편의 이혼 요구가 있는 경우 아내는 이혼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
앞에 제기된 물음은 바로 신 24:1에 대한 힐렐의 해석에 동의하느냐 안하느냐
의 문제였다. 만일 예수가 힐렐학파의 주장을 따른다고 한다면 그의 대적자들
은 샴마이학파의 견해를 지지하면서 '예수가 도덕적으로 엄격하지 않은 자유
주의자'라고 공박할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엄격한 샴마이학파의 편을 들면 그
들은 '죄인들에 대한 예수 자신의 친절과 자비 행위는 바로 위선'이라고 선전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샴마이나 힐렐의 견해를 모두 따르지 않
았는데, 이는 비록 엄격한 샴마이학파라 할지라도 이미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ㅇ사람을 지으신 이가...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 유대인들은 신 24:1을 이
혼의 합법적 근거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서 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創造)하셨는가를 환기시킴으로써 창조의 원
리(창 1:27)를 통해서 이혼의 절대 불가성과 아울러 결혼의 신성함과 영구성
을 강조하시고자 하였다. 특히 본문의 '본래'라는 말은 남.녀의 근본적인 창
조 목적을 소개하고자 하는 강한 암시가 내포된 말이다. 실로 결혼의 법은
하나님의 섭리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과 생명 유지의
법이었다(고전 7:25-38). '여호와께서는 이혼을 미워한다'고(말 2:16) 선포
한 말라기 선지자와 같이 예수는 창 1:27의 말씀을 통해 남자와 여자는 결혼
을 통해 한 몸이 되는 것임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추는 것인 동시에 창조때부터 여자와 남자는 하
나의 몸에서 잠시 분리되었으며, 적당한 때가 되면 결혼으로 다시 한 몸을 이
루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한다.

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ㅇ이러므로 - 창 2:24에서의 이 말(for this reason, NIV)은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고 서로를 위해서 지음 받은 짝으로서 '이는 내 뼈 중의 뼈
요 살 중의 살임'을 아담이 깨달은 데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남
자와 여자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관계되고 있는 존재'임을 깨달은 데서 비
롯된 말이다. 정녕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든 결혼에 있어서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다시 맞
추는 동시에 창조 때에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증
거가 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창 1:27의 말씀, 즉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
었기 때문에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合)하여 한 몸을 이룬다고
하는것은 당연한 사실이라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ㅇ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 남녀 한 쌍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요
구 조건이다. 이는 부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淸算)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온전히 합일을 이루는데 그 어떠한 장애 요인도 있을수
없다는 뜻이다. 그와 더불어 두 사람의 독립적 인격성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
다(창 2:24). 
ㅇ합하여(콜레데세타이) - 이는 '아교로 붙이다', '연합하다'는 뜻을 지닌 원
어 '콜라오'의 단수 미래 수둥태로서 '완전히 달라 붙어 뗄래야 뗄 수 없게
될것이다'는 의미이다. 이는 부부란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결합체가 아니라 영
원히 나뉠 수 없는 온전한 합일체라는 뜻이다.
ㅇ한 몸이 될지니라 - 남자와 여자와의 결합을 정신이나 혼만의 결합으로서
이해하지 않고 육체(씨릍스)의 결합으로 본 성경의 이해는 참으로 놀라운 것
이다. 실제로 결혼에 의하여 남녀는 그 몸이 유기적(有機的)으로 결합하여 하
나의 몸이 되는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한 몸'이란 결혼을 단순히 정신적
인 결합(한 정신)으로 봄으로써 구체성(육체리 합일)을 상실한 공허한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요소들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두 사람을 결코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잘 드
러내 주고 있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한 가지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할 사실
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 그 자체, 곧 단순히 성적 합일체가 된
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신과 영혼이 전제되지 않는 육체는 순전히
쾌락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한 몸'이란 육체를 근간으로 한 전인
격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과 생명의 지배를 받는 한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
을 뜻한다. 이를 루이스 에이 바비에리(Louis A. Barbieri Jr.)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보다 더 높은 관계로의 부르심'이라고 표현하였다.     

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

ㅇ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 - 한마디로 천생연분이라는 말이다. 한편 여기서
'짝지어 주다'란 말은 '결합하다', '함께 멍에를 메다'는 말의 헬라어 '쉬쥬
그뉘미'가 사용되었다. 이 헬라어는 부정 과거형 직설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끝나버린 단 한번의 과거 사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과거의
어느 한 순간에 이미 발생되어 버린 일이므로 어떤사람도 그 연합을 나눌 수
없다는 의미가 강하다. 더욱이 이는 무시간적 개념으로 이해하여 짝지어 주신
그 일이 영원히 진리(질리)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또한 '짝지어 주신것'
이라고 하는 말에는 관계대명사 '호'의 중성 단수형이 사용됨으로써 부부는
벌써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이 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단수 관계대명사
'호'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명확히 짝지어 주신 '것'(What)이라
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입법(立法)하신 결혼법을 말하는 동시
에 그 법이 단지 아담과 하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남녀의 결혼
관계에 적용됨을 암시하고 있다.
ㅇ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나누
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당위론적인 진술이다. 맥네일(A.H. McNeile)은 말
하기를 '모든 결혼한 부부는 아담과 하와의 결합(結合)의 재현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합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실로 이혼이란 인간
의 사악한 의지의 반영일 뿐이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는 둘이 온전한 하
나가 되는 것이다. 한편 유대 용어로 결혼을 나타내는 말은 '키두신'인데, 이
말은 성별(性別), 헌신의 의미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바
쳐진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W. Barclay). 부부란 서로에게 바쳐진 몸이
요 계속해서 헌신해야 할 대상이다. 또한 서로에게 헌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 몸'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키두신'이다. 그러므로 헌신된 제물로서의
부부는 결코 나누어질 수 없으며, 또한 둘로 나뉘어진 '키두신'은 이미 '키두
신'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 의해 분리된 부부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 사
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정죄를 받는다. 정녕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사람(남자)
과 아내를 한 몸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결혼으로 맺어진 신성한 관계를 해치
는 그 어떠한 분열 의사도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반(反)하는 것이다.     

7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ㅇ어찌하여 모세는 - 이혼의 불가능성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들은 바리새인들
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신 24:1을 들어 다시 한 번 예수께 공격하였다. 실
로 율법주의자(律法主義者)에게 있어서 모세는 그들의 최고 가치기준이며 원
리였다. 따라서 모든 유대인들은 '모세가 말한 것'이라고 하면 이성적 판단이
정지된채 무조건적으로 그 말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모세보다 더 큰 분이신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나는 너희에
게 이르노니'(5:22, 28, 32)라고 하심으로써 매번 모세에 대해 지나치게 권위
를 부여하며 율법 정신을 왜곡하는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셨다. 구속사의 전개
상 메시야의 그림자에 불과한 모세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실체(實體)이신
예수의 시대가 이제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며 그분의 말씀도 순종치 않는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어리석음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여하튼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최소한의 규정을 담고 있는 모세
율법을 핑계삼아 자신들의 사악한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이 말을 한
것인지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하는 진지한 노력에서 모세의 이름을 언급
한 것이 아니었다.
ㅇ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 그 당시 히브리인 남편들은 단지 구두
(口頭)로 아내와의 이혼을 합법화(合法化)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혼 사유가
발생하면 신 24:1-4의 율법 조문에 근거하여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 줌으
로써 그 이혼을 공식화할 수 있었으며, 그와 더불어 이혼 사실에 대한 공적
인정을 받기 위해 얼마간 이혼 사실을 공중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혼을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던, 실제적인 목적은 (1)
합리적 이유를 들어 아내 내어 버리기를 쉽게 생각하는 남편의 방종(放縱)을
막고, (2) 신실치 못한 아내에 대한 자비의 수단, 즉 그 아내에게 미칠 각종
불이익과 공개적 형벌을 미리 예방하고 아내로 하여금 자유케 하려는 데 있었
다. 사실 당시만해도 법적으로 여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던 남자가 이
혼 증서를 준비할 권한과 그 약정을 폐기해 버릴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
다. 한편 종이가 흔하지 않았던 고대에서는 나무잎 위에 '자신의 아내가 이제
는 어떤 사람과도 결혼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라는 내용을 적어 여자에게 주
었으나 나무잎이 시들게 되면 그 내용이 희미해져서 잘 알 수 없게 되는 폐단
이 있어서 후에는 작은 돌, 양피지, 종이의 순으로 이혼 증서의 재료가 바뀌
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혼의 허용은 점차 이혼의 남용(濫用)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시키게 됨으로써 이 이혼 문제는 사회적으
로, 종교적으로 큰 고민 거리가 되었다. 유대의 어떤 랍비는 성전의 쟤단 앞
에서 초혼의 아내와 이혼하는 자를 위해서 매일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 이야기
가 있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ㅇ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허락하였거니와 - 여기서 '마음의 완악함'
(스크레로카르디안)이란 '거칠고 잔인하며 완고한 마음' 또는 '말라붙은 마
음'이란 의미로서 인간의 타락한 심성(心性)을 반영해 주는 말이다. 실로 그
들은 하나님이 마련한 결혼법을 지킬만큼 순수하다거나 신앙적 열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아내를 내쫓기 위해 심하게 학대(虐待)하거나,
살해할 의사까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모세는 그러한 '큰 죄악'을 범하면
서 남녀가 함께 기거하느니 차라리 갈라서는 '작은 악'을 허용하고자 했던 것
이다. 즉 모세는 이혼을 적극적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묵허
(黙許)한 것이었다. 따라서 허용된 이혼을 빌미로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은 '작은 악'을 스스로 인정하는 수치였다.
ㅇ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친히 정하신 결혼법에
는 '본래' 이혼의 허용이나 그 가능성에 대해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
런 점에서 모세는 아내의 수치되는 일(에르와트 다바르, 신 24:1)을 보았을
경우에 반드시 이혼하라고 명령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허용했을 따름이
다. 이혼은 결코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아니다. 따라서 이혼이 성립
될 것인가 말것인가의 여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기본입장은
옳지 못한 것이다. 이혼은 모세에 의해서 허용된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이혼
자체가 이미 사람의 완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이혼은
본래의 하나님의 창조질서(創造秩序),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상태
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혼에 대한 모세의 본래적인 생각일 것이다.
이에 대해 빈센트(Vincent)는 말하기를 '최초에 제정된 결혼법은 결코 폐지
되거나, 또다른 법으로 데체된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효력을 지닌다'고 설명
한 바 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ㅇ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 모세의 권위를 초월한 예수께서 친히 당신의 권위
(權威)로 절대적 윤리(倫理)를 가르치셨다.
ㅇ음행한 연고 - 음행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포르네이아'이다. NIV에서는 음행
을 '결혼한 사람들 간의 성적(性的)인 관계에서의 부정'(marital
unfaithfulness)으로, KJV에서는 미혼 상태의 남녀간의 '사통'(私通,
fornication)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학자들은 이 음행이라는 말을
(1) 결혼이 금지된 촌수 내에서의 결혼으로 이해하고 있는 가하면
(Baltensweiler) (2) 겔다드(Mark Geldard)와  같은 사람은 KJV의
번역과도 같이 결혼 전의 부정으로 본다. (3) 또한 플레밍(Fleming)과 시갈
(Sigal)은 '포르네이아'가 단순히 간음을 의미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라고 본다. (4) 또 다른 견해로는 '포르네이아'가 무분별(無分別)하고 방종하며
집요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문란한 성생활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 한번의
잘못된 부정 행위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경우가있다. 따라서 계속되는
이러한 부도덕(不道德)한 아내의 성생활도 이혼사유가 될 수 있는데, 이는 결혼
의 연합을 깨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1)의 근친상간의 결혼은 이미
합법적인 결혼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혼 사유가 될 수 없으며, (2) 결
혼전의 부정이나 간음으로 보는 것은, 첫째, 간음(adultery)란 말의 '포르
네이아'가 아니라 '부부간의 성실성이 없음'이란 의미의 '모이케이아'란 말로
분명히 달리 쓰이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둘째, 간음하는 것이 이혼 사유가 된
다고 한다면 예수의 의견은 샴마이학파와 전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하
지 않다. 그런데 막 10:11-12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어떠한 연고에 의해서도 이
혼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결코 찬성하시지 않았던 것같다.그래서 10절의 제자
들의 불평이 나왔을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라는 말은 (4)
번의 견해와 같이 결코 고칠 수 없는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아내의 경우를 의미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결혼한 여자가 '음행'을 저지른 경우에
받던 죽음의 형벌은 사실상 폐지된 것이고, 이제부터는 이혼함으로써 부부 관계
를 청산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혼의 절대 금지에서 예외적인 조
항을 밝힌 이 부분은 바로 앞 (4-8절)의 주장과 모순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
다. 예수께서는 분명 4-8절에서는 결혼과 이혼에 대해 구약이 가르치고 있는 참
된 방향을 제시하셨을 뿐이다. 더욱이 성적인 죄악은 창 1:27;2:24의 결혼법에
관한 예수의 관점(4-6절)과 특별한 관게가 있는데, 그 이유는 창조 기사에서 인
용한 구절들(창 1:27;2:24)이 예수가 옹호하고 있는 결혼의 영구 불변성인 성적
인 결합, 곧 한 몸됨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인 부정은 이혼 금
지에서 제외되는 예외적 행동에 속한다. 실로 성적 부정이 반드시 이혼으로 연
결되지는 않지만 이혼과 재혼을 허용한 모세의 정신은 예수의 생각과 완전히 일
치되고있다. 마하니(Mahaney)는 '포르네이아'가 당시 이방인들 사이에서 흔
한 근친상간을 의미하는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마태가 이들이 점점더 교회
에 들어오게 됨을 염려하여 그들이 예수의 절대 이혼 금지(음행한 연고 외에는)
를 그들 이방인들의 부정한 결혼을 묵인하는 것으로 오해할까 하여 이 구절을
집어 넣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구절이 예수의 절대적 윤리가 초대 교
회에 있어서 점차 상대적 윤리로 전향(轉向)해 가는 과정을 반영해 준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10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찐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ㅇ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 직역하면 '만일 사람의 연고가 아내
에 대해서 이같을 진대'로, 개역 성경에는 '연고'(아이티아)라는 말이 생략되
어 있다. 여기서 '사람의 연고'란 남자가 여자에게 이혼올 요구할 수 있는 이
유, 조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조건의 까다로움 또는 더 나아가서 이혼불
가라는 예수의 너무나도 엄한 결혼관에대해 불평하는 제자들의 극단적인 견해
에 해당한다. 아마도 그 당시의 사회가 이혼과 재혼 또는 축첩(蓄妾)의 제도
가 성행(盛行)하고 있던 시대이므로 예수의 말씀은 실현뷸가능의 이상으로써
만 이해되었을 것이다.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

ㅇ사람마다 이 말을...타고 난 자라야 - 예수의 답변 중의 '이 말'은 제자들의
극단적인 견해인 '장가들지 않는 것(독신)이 좋삽나이다'(10절)를 가리키는 말
이다. 한편 '받다'의 뜻인 헬라어 동사 '코레인'은 그릇이 일정량의 빗물을 받
듯이 '어떤 것을 위한 공간(空間)의 자리에 담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히 지적인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그와 상응하는 도덕적 의지가 뒤따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말을 받는다고 하는 표현은 말 그대로를 전의지적으로 따
른다고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나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 내지 금욕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자라야 할 수 있다고 하
셨다. 그런데 이 '타고난  자'란 결혼 문제에 있어서 인간적인 고집이나 선택
에 의해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 부터 부름받고 은혜를 입어 믿음으로 응답
함으로써 결혼을 자발적으로 포기한자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으로 번역하고있다. 예수께서는 12절에 새
유형의 고자(鼓子)를 예시함으로써 이 말의 의미를 더욱 확실히 소개해 주셨다.  

12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

ㅇ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 - 선천적인 성불구자나 성욕이 완전히 핍절(乏絶)
한 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고자'(유누코이)란 원래 '침실을 맡은 자'란 뜻으
로 고대 동양에서 왕의 침실에 수종들던 내시(內侍)가 모두 거세(去勢)당한
자들인 데서 유래하였다. 한편 이스라엘에서 고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레 21:20)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신
23:1).
ㅇ사람이 만든 고자 - 고대 동양에서는 왕의 아내들에게 수종드는 남자들로 하
여금 그들의 생식기를 거세하게 하였는데, 이는 그들에게 왕의 부인과의 성적
접촉을 금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 여자가 사제인 이교(異敎)에서도 그들을
돕는 남자들도 역시 거세되었는데, 예를들면 에베소에 있는 다이아나(Diana)
신전에서 봉직하는 자들도 그러했다. 선천적인 고자나 내시나 환관 등의 특수
계급의 고자는 모두 장가를 들수 없도록 만든 사람들로서 성욕에 대해서 자발
적으로 자제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욕 자체가 생겨나지 않는 수동적이고 불가피
한 절제자들이다.
ㅇ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 -대표적인 사람으로 동양의 오리겐(Origen)
을 들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천국을 위하여'란 '천국을 얻기 위하여'가 아니
라, 천국의 요청과 천국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독신  생활(獨身生活)을 하
는것을 가리킨다(J. Blinzler). 이 구절에 대해 결혼한 사람이 천국을 위하여
결혼 안한 사람같이 된다고 하는 페이(F.R. Fay)의 의견은 잘못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 7:32, 33에서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아내를 기뻐
할 일에 골몰하고 장가를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주께서 기뻐하실
일에 열심을 다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알롄산드리아의 클레멘트
(Clement of Alexandria)는 말하기를 '참된 고자는 육체적인 쾌락(快樂)
에 빠질 수 없도록 된 사람이 아니라, 육적인 쾌락을 거부하는 사람이다'고 하
였다. 한편 본문의 말씀은 결혼을 천박하게 본 것이 아니라 결혼을 훨씬 능가
하는 가치, 즉 하늘 나라 봉사를 위해 결혼을 희생하는 것이 고귀함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ㅇ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 이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절대적 규범이나
명령이 아니라 영적고자로 부름받은 소수의 사람들의 선택적 규범이다. 이를
가리켜 사도 바울은 받은 바 은사의 다양성에 따라 되어진 자발적인 선택의 일
로 보고  있다(고전 7:7, 26).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나 그의 제자
들은 독선 생활이 결혼 생활보다 더 거룩한 것으로 보지 않았을(딤전 4:1-3;히
13:4) 뿐 아니라 복음 사역에 있어서 최고의 차원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8:
14;고전 9:5). 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더 유용하게 쓰임받기 위하여 특별
한 소명(召命)을 부여받았다고 하였다. 만약 스스로 이러한 생활이나 훈련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우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다고 하는(고전
7:9) 바울의 권면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13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ㅇ때에 - 결혼과 이혼에 관계된 예수의 가르침이 있은 바로 직후라는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 말이다(2:7). 결혼의 신성함을 말씀하셨던 예수께서는 이제 그
결혼 생활의 고귀한 열매(아이들)를 인정하시고 축복하시고 계신다.
ㅇ사람들이...버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 예수 당시의 사람들은 종종 자신
의 어린 아이들을 랍비들과 장로들에게 데리고 가서 안수(按手)라는 관례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들이 축복받게끔 하였다(창 48:14;민 27:18;행 6:6). 그런데
원래 이 안수는 상징성이 강한 행위로서 한 집안의 가장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나, 길을 떠날 때 혹은 죽음이 임박하여 자손에게 특권과 축복을 시여(施
與)할 때 주로 행해졌는데, 대부분  축복의 기원이 그 내용이었다. 이 안수의
축복은 유대교에서 전례되어 초대 교회에 정착되었고(행 6:5-6;딤전 4:14)
또한 오늘에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여하튼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의 병고침과 필요만을 위해서 모여든 것이  아니라, 메시야이신 예수의
축복이 자신의 집안 대대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믿음에서 아이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기사를 기록하면서 안수받는 대상에 대해 마
태가 7세 이하의 '작은 아이들'(파이디아)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에 반해서 누
가는 눅 18:15에서 신생아 또는 젖먹이 아이, 즉 유아(乳兒)를 가리키는 말인
'브레페'를 사용하였다. 이를 종합해본다면 그때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데리
고 왔는데, 그 중에서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나온 아이도 있었고 품에 안거나
어머니 등에 업혀 온 아이들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18:1-10의 말씀에서
당시 어린이들을 무시하고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귀히 여긴다고 하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전하여진데서 나온 행동들일
것이다. 이 문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온 그 사람들의
믿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ㅇ제자들이 꾸짖거늘 - 여기서 '꾸짖다'는 뜻의 원어 '에피티마오'는 '책망하
다', '경고하다' 등의 의미로 엄히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제자
들이 꾸짖은 대상은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그들을 데리고 온 자들(NIV,
those who brought them)이었다(막 10:13). 이 때 제자들이 화를 낸
것은 어린아이들이 많이 몰려옴에 따라 예수의 권위가 손상된다거나 예루살렘
으로 가던 여행이 지체될 것을 생각하고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그 보다는 많은 병자와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나왔으
므로 여전히 아이들에 대해서 귀한 보배라고 하는 인식(認識)이 없었던 제사
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어른들이 예수로부터 고침을 받고 축복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최우선(priority)은 어른(남자)이며,
그 다음(secondary)이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비록 나이가 어
리고 신체적으로 미숙하며 지적인 발달이 미진한 어린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한 사람의 인격체로 여기며 그들이 당신의 백성이 되
는 것을 기뻐하셨다. 

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ㅇ용납하고...금하지 말라 - 예수께서 아이들이 자신에게 기뻐 달려오는 일
을 용납(容納)한 것은 천국이 어린아이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천국이 어
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용납하고'(아페테)란 능
동태 명령형으로서 '상관치 말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라'는 뜻의 강
한 요구이다. 그리고 '금하지 말라'의 원어 '메콜뤼에테'는 강한 부정의 의미
를 지닌 '메' 현재 명령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지금하고 있는 일을 당장 그
만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을 제재하는 일을 당장
포기하라', '당장 허락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오스카 쿨만(O.
Cullmann)에 의하면 본문에서 이 말이 쓰인 것은 원시 기독교의 세례식
(洗禮式) 용어가 반영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 까닭은 이 동사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세례와 관련되어 사용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3:14;행 8:36;10:47;
11:17). 그러나 쿨만은 그렇다고 해서 본문에서 예수가 유아 세례를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신약의 교회가 이 기사를 기록하여 전하
는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어린이 축복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부모의 믿음
과 관련된 유아 세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였다.
ㅇ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 예수께서 소개하시는 당신의 나라를 들어가기
원하는 자는 그 마음과 믿음에 있어서 어린아이같이 순결하고 순수하며, 주님
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어야 했다(18:3). 따라서 지금 신경질적으로 어린아이
들의 접근을 제어 하는 제자들은, 무엇보다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인습을 떨
쳐버리고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아이들을 친절하고 온화하게 맞아들여야만
한다.

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ㅇ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의 소
원을 기꺼이 들어주셨다(13절). 그런데 그 소원들 중 '기도하심을 바란' 소
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계셨다. 이에는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
었는데,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本體)로서 스스로의 권위에 의해 축복과
필요를 채우실 수 있으셨기 때문에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셨던 것이다.
물론 예수는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기도 하셨으나(요 11:42;12:30) 본 시점에
서는 당신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시기 위한 교육적 목적에서 기도없는 축복을
행하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은 어린아이 축복과 유아 세례의 기원이 되
는 구절이다. 그런데 유아 세례의 전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초대 교회시대 때부터 큰 반발없이 자연적으로 확산
되었다. 이 유아 세례에 관해 처음 증언한 사람은 이레니우스(Irenaeus)와
오리겐(Origen) 및 터툴리안(Tertullian)이었다. 그 중 아레니우스는 유
아 세례와  관련하여 180년경에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과 어린이들과 소년
들과 젊은이들과 노인들 등 자신을 통해 거듭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
셨다'(Hoer, xxii, 4)고 자신의 글에 피력한 바 있다. 또한 자신도 유아
시절에 세례받은 경험이 있는 오리겐은 분명히 그 관습의 기원을 사도시대로
보고 있다. 그는 특히 롬 5:9을 근거로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전통을 물려받
아 유아에게 세례를 준다'고 주장했으며 유아 세례는 일종의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라고 말했다(Hom, On Lev. viii, MPG,ii, 496). 한편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새로 회개하고 구원받은자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함으
로써 유아세례의 가능성을 확실히 예시하고 있다(행 2:38;16:15;고전 1:16).
더욱이 앞절(14절)에 언급된 바 있는 '메 콜뤼에테'란 말이 초대 교회 당시
빌립 집사의 선교 사역 중 구스 내시(內侍)의 세례 장면에 나와 있는 관계로
보아(행 8:36) 적어도 70년경에는 유아 세례가 보편화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
기도 한다. 한편 종교 개혁 당시 재세례파(Anabaptist) 사람들에 의해
유아세례가 거부되기도 했지만 루터와 칼빈을 위시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그 시행의 정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특히 종교 개혁자들의 유아 세례관
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아이들의 신앙은 성인들보다 훨씬 직관적이요, 순
수하다. 따라서 그들을 유아 시기부터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들
이 스스로 신앙고백할 때까지 거룩히 훈련시키고 죄를 씻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약속에 동참케 하기 위해 마땅한 바이다". 더욱이 개혁자(改革者)들
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재성과 유아 신앙의 특이성 등에 근거하여 유아 세례
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여하튼 유아 세례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신앙적 책임
을 일깨워 주는 것과 더불어 육아의 인격적 독립성및 신앙적 의속성(依屬性)
에 의지하여 시행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무시된 채 단순히 의
식으로서의 유아 세례를 집행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실로
교회는 마치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을 안수, 축복해 주
셨던 것처럼 큰 사랑과 부족없는 노력으로 그들의 영혼을 훈육(訓育)하고 성
결히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ㅇ거기서 떠나시니라 - 베레아 지역을 떠나 예루살렘으로의  행보(行步)를
재촉하셨다.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ㅇ본절의 문장 초두에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감탄사 '보라'(이두)
가 첨가되어 있다. 이는 뒤이어 나오는 사건의 돌발성 및 중요성을 일깨우며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1:20). 아마도 본 사건은 유아 축복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날 발생했을 것이다.
ㅇ어떤 사람이 - 22절에 의하면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청년이며, 막 10:17에
의하면 계명을 다 지키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예
수에게로 달려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영생을 구한 열정적인 구도자(求道
者)였으며, 눅 18:18에 의하면 그의 직업은 '관원'으로 알려졌다. 물론 '관원'
이란 유대인들의 회당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고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징
부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정
확하게 알 수 없다. 새번역에 의하면 그는 의회원 중 한사람으로 번역하고 있
다(눅 18:18). 이 부자 청년은 젊음, 재물, 명예를 다 얻었으나 구원의 확신
이 없음으로 인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채 나날이 회색의 삶을 살아가
고 있는 불신 세대(不信世代)의 한 전형적인 인물이다. 이 부자 관원의 이야
기는 공관복음서에서는 모두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13-15절) 뒤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자와 들어갈 수 없는 자가 어떠한 자인지
분명히 깨우치기 위한 목적에서 편집되었을 것이다.
ㅇ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 먼저 이 청년이 예수를 '선생'(디다스칼
레)으로 부른 것은 그가 예수를 율법 교사인 랍비로 보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물론 이말은 '랍비'라는 칭호를 직접 사용한 것보다는 그 존칭의 의미가 약하
지만(막 10:51;요 20:16), 어쨌든 그 청년은 예수를 자신의 문제를 능히 해결
해 줄 수 있는 선생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편 마가복음(10:17)과 누가복음
(18:18)에서는 질문자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고 질문을
시작하고 있고 예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善)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고 대답하고 있다. 마태에 나오
는 예수의 대답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오직 한 분이시
니라"(17절)고 하였다. 여하튼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뜻을 지닌 '아가도스'가
문장 어디에 붙든지 상관없이 예수의 대답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분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청년에게 있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선한
일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분이 명하는 바를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암 5:4, 6, 14). 그러나 이 청년은 믿음의 도(道)에 의해 구원에 이
르게 됨을 알지 못하고,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공적(公的)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해야할 것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하나님을 바로 알며 그분에 의한 선한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ㅇ영생을 얻으리이까 - 청년이 지닌 치명적(致命的)인 과오를 일깨워 주는 말
이다. 사실 '영생'이란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지적이고 선택적이며 개방적인 은총에 의해서만 부여될 수 있는 것
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떠한 선행을 쌓아야지만 메시
야의 나라에서 그 영생을 쟁취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던 것이다. 이 청년이
이러한 왜곡된 생각을 한 데는 그 당시 랍비들의 그릇된 구원관 교육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있다. 랍비들 가운데는 계명 중에도 영생에 이르는 계명이 있
는가하면 영생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계명(어겨도 별 상관없는)이 있다고 가
르쳤다.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율법과 시편의 암송, 또는 노인들에 대한 공
경(恭敬) 등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이 청년은
그가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메시야의 왕국에서 영생할 수 있도록 하는 고상한
행위법을 예수께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길은 바리새인들 처럼
규율을 준수하는 데에 있는것(doing)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절대 선하신 하
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수한 영혼과 순종의 마음을 지니는 겸손한 존
재가 되는 데(being)에 있는 것이다.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ㅇ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 평행구를 이루는 막 10:1과 눅 18:19 및
에브라임 사본에는 본문을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라고 표현하고 있
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 몇몇 학자들(Hoskyns, Allen)은 뒤이어 나오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와 연관지어 예수와 하나님의 존재
론적(存在論的) 차별로 인해 예수의 신성이 부정될까 하는 염려에서 의도적으
로 변경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권위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베자 등)과 라틴 벌게잇 역(Valgate) 등에는 예외 없이 본서의 읽기를 따르고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차이를 분석하기 전에 먼저 본 기사의 핵심 내용을 살
펴볼 필요가 있다. 즉 본 기사에는 예수가 선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청
년에게 그의 질문을 되받아 묻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실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절대적 의미에서의 선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대상 16:34;대하 5:13
;시 106:1;118:1, 29). 따라서 본문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인 '선'을 하
나님과 함께 공유(共有)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는다. 더
욱이 예수는 지금 선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짓는 하나님의 뜻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에도 관심을 지니지 않으셨다. 이런 측면에서 본 대화를 기술한 마태의
표현은 세 공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심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러한 마태의 표현은 마가-누가 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중심 문제에
근접해 있으며, 앞의 기사들과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마태의 기록
에 따르면 이 청년은 천국에 속한 자들과는 엄청날 정도로 정반대의 자리에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로 볼 때 막 10:18이 예수의 무죄성(sinlessness)
을 묻고 있지 않듯이 본절도 역시 예수께서 선한 것을 판단할 합법성(合法性)
을 지니셨는지의 여부를 묻고 있지 않다. 한편 마태, 마가-누가 그 어느 기자
도 다른 전승을 의존하고 있지 않으며 다만 마가의 기록이 마태보다 먼저 기
록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D.A. Carson). 그렇지만 마가 우선설 때문에
만일 예수가 죄를 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가능성(可能性)을 마
태가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고 마태를 비난할수는 없다. 실로 마태는 마가복
음을 의존하여 본문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이 본 사건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갖고서 목격자의 입장에서 재구성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의 보고 문학 형식에서 상호  모순되지 않고 허용할 수 있는 통
상적 범위 안에서 독자적인 보고를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선한 일을 묻는 그
청년에게 하나님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일만이 유일하게 선한 것임을 지적함으
로써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수 없고 자신을 선하다고 말
할 수도 없음을 가르치셨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을 예수의 신성과 절대 무흠
하심을 부인하는 뜻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선하다'는 말을 자신과 연관시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
청년의 잘못된 신앙관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즉 그 관원은 예
수를 하나의 '선생', 곧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이해 수준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도무지 선할 수가 없다고 선
언하신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 청년의 왜곡된 사고(思考)와 신앙관을 깨
우치기 위해 '선'의 주체이시며 궁극적 원인자이신 하나님을 두드러지게 강조
하셨다. 따라서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이 관원의 바리새적인 구원
관은 인간은 결코 스스로는 선한 존재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예수의 말씀에 의해 벽에 부닥치게 되었다. 정녕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다만 믿음을 통해서 의인(義認)된 죄인만이 있을 뿐
이다.
ㅇ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여기서 '생명에 들어가려면'이란 16
절의 청년의 질문과 짝을 맞추기 위한 예수의 의도적 문구로서 '영생을 얻으
려 한다면'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본문의 말씀은 계명을 지킴
으로써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생명에 들어갈 자, 곧 구원받
을 자는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자임을 말하고 있다. 사실 신구약을 통틀
어 '선한' 분이신 하나님의 계명은 이미 '그속에 생명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
다는 사실을 계속 인정해 오고 있다(레 18:5;롬 10:5; 갈 3:12).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인간은 영생의
삶을 살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은 바로 계명의 명령자이신 하나님과 그 계명
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
이다. 따라서 본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란 모세의 십계명을 맹목적(盲目
的)이고 외형적으로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계명을 문자 그대
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의 원목적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정신대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계명의 참 순종(순종)은 생명에 들어가는 참믿음의
결과요 증거이다.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ㅇ어느 계명이오니이까 -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청년은 예수
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게명이 이미 자신이 다 실천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계명인지를 예수께 묻고 있다.
관원은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수 많은 조항들을 덧붙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예수가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보편적이지
않고 실행하기 매우 힘들어 그 계명을 준수(遵守)한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인정을 받을수 있는 또 다른 특수한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ㅇ'살인하지 말라'부터 '부모 공경'까지의 다섯 계명은 출 20:12 이하와 신
5:16이하에 나오는 십계명이다. 그런데 마태는 막 10:19의 '속여 취하지말
라'는 말을 생략했는데, 이는 구약의 본문에는 그러한 명령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의 본문은 출 20:1-16의 히브리 본문에 일치하도록 변형되었다.
또한 마태는 레 19:18의 '이웃 사랑'을 새계명으로 덧붙이고 있는데, 바울
도 롬 13:8에서 십계명의 네 계명(6, 7, 8, 10)과 더불어 '이웃 사랑'의 계
명을 덧붙였으며 그 당시 랍비들도 이웃 사랑의 계명이 율법을 요약한 것이
라 가르쳤다. 예수께서 이 이웃 사랑을 말씀하신 것은 특별히 청년이 가지
고 있던 외적 선행에 대한 '자만'을 지적하시기 위함일 것이다. 한편 페이
(F.R. Fay)에 의하면 본절의 두 계명은 십계명의 두돌판의 계명들을 각
각 요약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즉 부모 공경은 제 5계명까지, 이웃 사
랑은 제 6-10계명까지의 요약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
계명들은 모두 인간을 향한 인간의 의무 조항들이다. 즉 인간관계와 이웃에
대한 태도들을 규정(規定)하는 계명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제 1-
5계명 보다 5-10계명을 더 강조하신 이유는 (1)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
들이 5-10계명들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박
하와 회향과 근채(根菜)의 십일조는 강조하면서도 계명의 핵심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행치 않았다(23:23). 따라서 당시의 율법주의에 빠긴 바
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자세를 비판하신 것이다. 이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이 청년도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었다. (2) 영생이란 영원한 삶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영원'(아이오니오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한 것 또는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는 것을 의미
한다(W. Barclay). 따라서 영생이란 하나님의 속성에 어울리는 상태이며
이는 율법의 여러 조항들을 모두 낱낱이 준수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라, 죽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는 하나님의 본체
(本體)이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ㅇ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 막 10:20에 의하면 '어려서부터'라는
말이 붙어있다. 따라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의 종교적 행습(行習)은 칭찬
할 만하다. 그런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청년의 이 대답을 통해서 그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찾아볼 수있다. (1) 긍정적인 측면 :
세상의 열락(悅樂)에 빠질 만한 여러 조건들을 다 갖추고서도 그는 어려서
부터 그러한 것들에 몰두하지 않은 건전하고도 경건한 삶을 살아왔다. 실로
그가 완벽한 율법 준수자라고 자처한 것도 과장이나 위선에서가 아니라 열
정(熱情)에서 실토한 순수한 자기 주장이었다. 마가의 보고(막 10:21, '예
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는 이를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사
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
가 많다. 사실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영생에 이르는 길'을 물은 것은 바로
그가 지닌 내면적 공허함을 해결하고 외형적 율법 준수로는 얻을 수 없는
마음의 평화(平和)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지금 '영적으로 철저히 고갈한
상태'였던 것이다. (2)부정적인 측면 : 율법과 계명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
가 부족했다. 그의 사고 방식은 당시의 유대  바리새인들의 율법관과 동일
한 것이었다. 그는 많은 율법과 계명과 규례들을 일일이 다 지키었으나, 그
것들이 의미하는 바의 진정한 정신은 잘 알지 못하였다. 즉 그는 율법의 의
(義)로는 전혀 부족함 없는 존재였다(빌 3:6). 따라서 그는 율법의 자구(字
句) 하나하나에 얽매임으로써 아무런 의심없이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기 의'
(自己義)를 주장했던 것이다. 실로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나 실행, 자기 성취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의 영적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ㅇ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 막 10:21에 의하면 계명을 다  지키었다고
장담(壯談)하는 그에게 예수께서 한 가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계셨다.
바울도 그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빌
3:6). 그러나 본문에서의 그는 자신이 계명을 다지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
엇인가가 부족하다고 하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
문에 그는 유대 랍비들을 떠나 예수에게로 나아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구
원받을 만큼 충분히 선한 일을 했다고 확신하지 못했으며 그뿐만 아니라 그
는 확실히 선한일이란 율법에 명시된 계명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받은 율법 교육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이다.
율법교육은 끝없이 외형적인 선과 의를 쌓으면 그것이 자신의 공적(功績)이
되고, 영생한 삶으로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많은 계명을 지키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구원의 확신은 없었고 여
전히 영혼의 불안과 궁핍을 느끼고 있었다(롬 7:24).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ㅇ온전하고자 할진대 - 여기서 '온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텔레이오스'는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거나 무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궁극
적인 목표인 신적인 완전에 도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는 인간의 자의
지(自意志)에 따른 결과로서의 완전이 아니라 처절하게 자신의 무능과 부
족을 통감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依托)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완전이다(5:48;빌 3:12). 한편 본문에서의 이 말은 좀더 특수하게
그 청년이 목표로 삼고 있는 영생에 이르는데 조금도 핍절함 없는 완벽한
상태, 즉 절대적인 자기 부인(self-denial)과 철저한 순종 및 완전한
자기 의뢰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ㅇ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예수의 온전케 하는 계명은
겉으로는 구약의 율법에서 벗어난 것 같이 보인다(Banks). 왜냐하면 구
약의 어떠한 구절에서도 본문의 이 명령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온전히 섬길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셨다(6:19-24). 더구나 사람은 본성적(本性的)으로 탐욕(貪慾)스런 존재
이기 때문에 재물이 많을수록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됨으로써 차
차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땅에의 욕심이
많으면 하늘에로의 관심이 적어지게 됨을 아시고 그 부유한 청년이 그의
재물을 다 나누어 줌으로써 진정한 영생의 삶을 누릴 수있는 방법을 알게
하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청년은 율법에 나타난 모든 외적인
계명들을 다 준수하려고 했지만 율법에 대한 형식적인 순종의 차원에 머무
르고 말았다. 즉 그는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주는 적극
적이고 전적인 자기 포기를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지금까지 소극적
이고도 수동적으로 행한 수 백 가지의 율법 준수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
고 말았다. 한편 소유를 다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명령은 다
가오고 있는 천국에 관한 임박한 종말의식(終末意識)을 갖고 있지 않는 사
람에게는 도저히 실천 불가능한 것이다. 새하늘과 새땅(계 21:1)이 다가옴
을 깨닫지 못하고 그곳에서의 참 보화를 소망하지 못하는 한 소유물들을
더욱더 굳게 움켜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의 요지는 '소유
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라, '와서 나를 좇으라'하는
데에 있다. '가서, 팔아, 나누어 주라'(휘파게 폴레손 카이도스)는 천국과
영생의 실체이신 예수를 좆는 제 1 전제 조건이었고, 온전함을 얻기 위한
단 한가지의 필요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의 절대적 명령에 따라 '가
서', '팔아', '나누어줄' 때 동시적으로 그에게 내적 변화가 수반될 것인
데, 그 내적 변화는 바로 그가 지금까지 율법을 순종하면서도 '하나님 사
랑', '이웃 사랑'을 온몸과 뜻과 정성으로 행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ㅇ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 13:44-46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을 '밭에
감추인 보화'나 '극히 값진 진주'로 비유하셨다. 이는 결국 본문의 '하늘에
서 보화'란 이 부자 청년이 찾아헤매는 바의 영생의 삶을 의미한다. 그의
마음이 지상의 재물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하는 의미로, 예수께서 그 즉석에서 영생의 삶을 보장하시는 말씀이다. 실
로 자기 보물이 있는 그곳에 자기 마음과 소망(所望)과 미래가 있는 것이
다(6:19-21).        
ㅇ와서 나를 좇으라 - 가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
수의 명령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직(discipleship)과 연결
되고 있다(Lane). 즉  하나님의 뜻, 계명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17-19절) 바로 참 생명의 주인이시요 인간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따르
는 상호 협력적인 위치에 서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있어서 구원이 이루어지
는 것은 바로 율법의 형식적인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 즉 자아(自我)의 전적인 포기를 수반한 복음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해 진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은총을 통한 승리'라고 규정
지을 수 있다. 본문에서 볼 수있는 바대로 예수께서는 수시로 사람들을 그
의 제자로 부르셨으며 다음과 같은 제자의 길을 제시하셨다. '아무든지 나
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16:24)따르라고 말
이다. 이 말씀처럼 구원의 기쁨을 얻고 예수의 사람이 되려는 자는 자기의
것을 다 내어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즉 세속적(世俗的)인 기대와 세상적인 인연에서 해방되어 오직 예수께 자신
의 전부(부, 희망, 삶 등)를 맡기고, 그분과 더불어 죽고 더불어 사는 일체
적(一體的)삶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갈 2:20). 이는 제자가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크고도 힘든 장벽이자 조건이 되는 조항이다.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ㅇ재물이 많으므로 - 헬라어 원문의 뉘앙스로는 그는 현재에도 재물이 풍
부할 뿐아니라 그 풍요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로 보
건대 그 청년은 자신의 재물로 인한 풍요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청년에게 있어서 재물은 단순한 소유 이상의 가치로
서, 그의 미래와 희망과 운명이 걸려 있는 절대적 가치였다. 이처럼 영원
한 세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상대적 가치에 불과한 것들을 절대화(絶對化)
하는 것은 영생과 천국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ㅇ근심하며 가니라 - '조심하다'는 뜻의 헬라어 동스 '뤼페오'는 '마음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다', '고통스러워 하다' 등의 뜻으로, 막 10:22에 의하
면 심각한 내적 갈등으로 인해 '슬픈 기색을 띤 것'을 의미한다. 한편 16
:3에서 이 동사는 궂은 날씨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이와 연관하여
'못 마땅해서 얼굴을 찡그리는 것'(lowering)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가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것은 바로 재물과 예수 사이이다(6:24). 사실
구약의 전통적 개념으로 보자면 부자는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에
속향다(욥 42:10-12;잠 18:11). 그 청년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도 자신이
지금까지 이해해 왔던 대로 물질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함에 따라 영생
을 보장하는 방법으로써의 물질포기에 대한 예수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보장된 현재 때문에 보장될 미래와 영생을 잃어버리는 불행
한 선택을하고 말았다. 실로 이같은 선택을 한자에게 참된평화가 있을 수
없었기에 그는 고통 중에 '근심하며' 또다시 영원한 허무(虛無)와 갈증만
있는 형식적 율법 준수의 길로 되돌아서 가고 말았다. 정녕 참된 평화는
자기의 소욕을 극복하고 예수께 자신을 전적으로 의뢰할 때에만 주어진다
(요 14:1).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ㅇ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 그리스도께서는 재물과 탐욕이
얼마나 큰 장애물이 되는가 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막 10:23에
의하면 부자는 바로 '재물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
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하였다. 그런데 분
명한 것은 부자나 빈자(貧者)나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는 자는 영생
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영
생에 들어가고 부자라고 해서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견
해이다. 그러나 실제로 부자들일 경우에 재물이 많기 때문에 그것에 의존
하는 정도가 지나칠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영생
의 길이 완전히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나온 '어렵다'의 뜻인
부사 '뒤스콜로스'는 소화되기 어려운 나쁜 음식을 먹은 것처럼 힘들게 나
마(with difficulty)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나타내는 말
이다. 그 방법은 꼭 한가지, 즉 모아두었던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
어 주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것 뿐이다.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ㅇ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 부자가 영생을 얻기 어렵다고 하는 내
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 비유는 극단의 상징성 때문에 학자들에 의
해, 상징된 단어의 완곡한 이해가 종종 시도되었다. 그중 바클레이
(W. Barclay)에 의하면 우선 바늘귀란 '작은 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흔히 성곽을 두르고 있는 도시에는 문이 두개가 있었는데, 그
중의 큰문은 낮에 사람이나 짐수레 등이 다니는 것이며  작은 문은 밤에 사
용되는 것으로서 사람이 서서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으로 흔히
'바늘귀 문'(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큰짐승 중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는 약대(camel)가 이 작은
문으로 통과하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을 가리킨다고 해석되었다. 한편 칼빈
(Calvin)은 약대를 가리키는 말의 헬라어가 '카멜로스'이며 배에서 사용
되는 '밧줄'(rope)의 헬라어는 '카밀로스'인점으로 미루어서 약대가 아니
라 밧줄이 바늘귀에 통과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하고있다. 그러나
바늘귀가 '바늘귀 문'이며 약대가 '밧줄'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약대는 바늘
문으로 통과할 수 없으며, 밧줄은 바늘귀에 매어쓸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이 비유를 완곡하게 표현하려는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
능성의 정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랑게(Lange)에 의하면 육중한 몸
무게의 약대가 부자를 상징하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로인
바늘 구멍이 하늘나라로 가는 영적통로를 상징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문자 그
대로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적어도 본문은 이같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로 이해하는 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진의(眞意)를 더욱 확실히 해
줄 것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격언으로 바벧론 탈무드에는(B. Berakoth
55b) '약대' 대신 '코끼리'가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벧론에서는 코끼리
가 흔하고, 가장 큰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도 이슬람교의
코란경에는 '약대가 바늘 귀로 지나갈 때까지 천국 문은 악인에게 닫혀있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는 이 복음서에서 빌어 쓴 듯하다. 여하튼 구원
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인데, 더구나 교만(驕慢)과 자기 만족으로 살
찌운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더욱 더 좁은 것이다. 이 비유가 영생의 불가능성
을 이야기하는 만큼 영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만큼 더 놀라운
것이며 감사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ㅇ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 유대의 지혜사상(智慧思想)에 의하면 재물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빈곤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한다. 그 실
례로 부자였던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벌과 저주
를 받았다고 믿었다(욥 5:17).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은 '불편함'
이전에 '부끄러움과 멸시'의 대상이었다(잠 19:7, 23). 그러므로 예수의 부
자에 대한 경고(警告)와 재물 포기와 가난으로의 권유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도 전혀 새로운 사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 관원들 보다 못한 자신들
역시 '구운받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염려로 아연실색
(啞然失色)하였다. 여기서 본문의 '심히 놀라'(여세플레쏜토)란 말은 마치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이 어안이 벙벙했다'는 뜻으로 제자들의 지금까지의
통념(通念)을 완전히 와해시킬 정도의 충격이 가해졌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천국과 천국의 진리는 기습적이고도 충격적으로 각 개인의 심령에 돌입한다.
ㅇ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 이는 제자들의 심각한 회의에 휩싸인
질문이다. 즉 만일 천국 입성이 부자에게 그렇게 불가능할 것 같으면 그 이
외의 사람들은 더더욱 어렵지 않겠느냐는 투의 놀람과 불만 섞인 물음이다.
사실 (1) 유대인의 통념상 모든 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을 뿐 아
니라(Carr, Plummer), (2)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부를 축적하기 위한
노력과 욕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De Wette, Homer A.
Kent, Jr.)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강
제법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ㅇ저희를 보시며 - '보다'의 뜻인 헬라어 '엠브레포'는 사려깊은 눈빛으로 상
대를 주시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에서는 예수께서 깊은 동정심과 사랑
이 충만한 눈빛으로 제자들의 불안(不安)을 완전히 씻어버릴 정도로 그들을
바라보는 모습을 가리킨다. 구원에 대한 염려로 떨고 있는 제자들의 내면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시는 구원자요, 참 스승이신 예수의 모습이 잘 드러나
고 있다.
ㅇ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 여기서 먼저 '사람으로'라는 말은 (1) 사람의
판단으로(Frizsche, Edward) (2)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De Wette,
Meyer)등의 뜻으로 사람의 모든 노력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사람의 행
함, 즉 도덕적 선행과 자유 의지(自由意志)의 결행 등으로는 구원이 절대 불
가능함을 나타내는 말이며, 이는 약대비유의 참 의의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
이다.
ㅇ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 '구원'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전적으
로 하나님의 일임을 공언(公言)하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구원은 사람의 선행
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졌다(엡 2:8
-10).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재물에 대한 의존력을 과시하시고 하나님 그
자신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절망에 빠진 제자들을 격
려하셔서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믿음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망을 품게 하셨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하는 제자들의 부정적인
질문은 '하나님은 다 할 수 있다'고 하는 긍정적인 대답에 의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말로 이끌어질 수 있다. 사람이 보기
에는 구제받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약대를 바늘귀에 꿰실
수 있는 하나님의 강권과 그분의 능력에 의해 구원의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
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적(意志的) 선택으로 인해 심지어 구원의 문에 들
어가기 거의 불가능한 부자들 조차도 천국 시민이 될 수 있었다(9:9;27:57;
눅 19:9;행 4:32-37). 실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초월적인 경륜(經綸)에
따른 부르심을 믿음으로 수용함으로써 재물로 인한 장애요인을 제거할 수
있었으며, 순결한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또 자신이 가진 소유를 하나
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다.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ㅇ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 감탄사 '보라'(이두)는 마태가 즐겨 사
용하는 문구로, 인칭 대명사 '우리'(헤메이스)와 더불어 강조 용법으로 사용
되고 있다. 즉 이는 가버린 부자 청년에 비해 예수를 따르고 있는 제자들 자
신을 주목해 보십사고하는 말이다. 더불어 제자들이 말한 '모든 버린것'은
바로 부자 청년이 거절한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써, 사실 제자들은 예
수의 부름을 받으면서 세상적인 욕구나 생존(生存)의 터전및 자신들의 친족
과 옛 생활까지 모두 갈릴리 해변에 버려두고 예수의 고난의 길을 좆아 예
루살렘으로 향하였던 것이다(4:20, 22;9:9;눅 5:11).
ㅇ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 베드로의 이 말이 보상을 기대하는 잘못된 것
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Calvin, Carr), 사람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예수의 엄격한 말씀에 불안을 느낀
제자들이 영생에 대한 확증(確證)을 얻고자하는 마음에서 제기된 물음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Homer A. Kent. Jr). 여기서는 후자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본다. 만약 이 견해에 의한다면, 제자들은 자신이 소유했던
것들이 부자청년의 재물과 명예에 비해 보잘것 없는 것으로 생각 하였으며,
그러나 비록 그러한 것이라도 아낌없이 버려두고 예수를 좇은 일이 과연 예
수의 말씀에 적합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심을 품고 초조해 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어떤 선을 행해야 영생을 얻게
되는가'를 물은 부자 청년의 잘못된 구원관과는 달리 '행함'으로가 아니라,
'버림'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제자들이 장차 누리
게 될 영생에 대한 관심에서 제기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버
림으로써 얻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 지닌 신비한 역설(Paradox)이다.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ㅇ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는 다음에 이어지는 자신의  발언의
진정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이 말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시는 그 언약(言約)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내포
되어 있다. 즉 미래의 보상에 대한 희미한 믿음과 적은 기대를 가진 제자들
에게 확신을 주심으로써, 선을 행함으로 자신의 의(義)를 쌓아가는 바리새
파나 엣세네파 사람들과는 달리,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새
로운 공동체로서의 제자 집단만이 올바른 것임을 인식하게 하신 것이다.
ㅇ세상이 새롭게 되어 - 심령이 거듭난 상태, 즉 중생(重生)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인(딛 3:5) '팔링게네시아'는 만물의 재탄생(renewal of all
things), 재창조를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여기서의 '새롭게 됨'
이라고 하는 말은 RSV에 의하면 '새 세상이 와서'(in the new world)
의 의미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다. 즉 사람이 거듭나야 하
나님 나라에 참예(參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만물이 완전히
'중생의 과정'(rebirth)을 겪음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 실로 예수
의 초림으로 만물의 변화(빛이 어둠을 몰아냄)는 시작되었고 예수의 재림으
로 그 변화는 완성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은 '피조물(被造物)
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라고 설파
하였다. 한편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1) 현존의 질서와 우주
의 종말(24:35)과 (2) 자연의 대파국(大破局)(24:6; 7)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벅찬 사실은 모든 세대가 고대하고 바라던(사 65:17;66:22
;벧후 3:13;계 21:1,5) 세상종말에 도래할 만물의 변화(갱신)는 오순절 성
령 강림을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이 현재적으로 향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ㅇ영광의 보좌에 앉을때에 - 이는 최후 심판의 비유의 서두(25:31)를 상기
시키는 말이다. 정확한 시점이 명시된 이때는 '메시야가 다시 오실 때'가
아니라 그가 '심판주로 보좌 위에 앉으실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의
'앉음'은 단순히 막연한 의미에서의 착석(sit)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
(judge)의 시작을 알리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영광의 보좌에 인자가
앉으실 때는 메시야가 그의 통치권을 확립하시고 공의(公義)와 불의를 가르
실 때를 의미한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영광의 보좌'란 단순히 재림의 주
이신 예수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내실 보좌라는 뜻이아니라 그 보좌 자체가
영광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그분의 영광을 반영한다는 의미일 것이다(F.R.
Fay). 실로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만물을 심판하실 심판주요, 만유의 주
이신 예수께서 앉으실 보좌는 그분의 영광의 중심이요, 그분의 충만한 영광
의 광휘를 나타내는 핵심적 요소이다.
ㅇ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 '앉다'라는 말인 '카디조'는 '앉
게 하다'의 의미로, '임명되다', '승진하다'의 뜻도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심판주로서의 취임과 더불어 그의 제자 열 둘도 심판과 영광의 자리에 앉아
서 예수의 보조 심판자로서의 역활을 담당하게 된다.
ㅇ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 예수를 따르던 성도들이 마지막 날
에 인자와 함께 심판할 것이라고 하는 사상은 신약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눅 22:30;고전 6:2). 한편 예수의 사도와 이스라엘 족속의 '열 둘'이 일치
하는 이러한 이유로 해서 예수의 사후, 가룟 유다의 자살로 공백이 된 사도
의 자리는 반드시 메꾸어 져야 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열 두지파가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 지는 분명치않다. 즉 (1) 열 두 사도들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열 두 족속을 심판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2) 새 이스라엘로 상
징되는 교회 전체(계 21:12-14)에 대해 심판을 행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혹시 (3) 열 두 사도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재판장의
역할을 담당할 메시야 공동체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는점이다(계 20
:4).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예수의 열 두 제자들이 하나님
의 나라가 도래할 때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
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메시야 되신 예수를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Baumgarten, France). 한편 본문의 '심판하리라'는 말은 선악(善惡)
을 구분하고 형벌을 선언하는 심판의 주체자가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러한 심판의 주권(主權)은 오직 예수 한 분만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심
판하다'는 말이 '판결하다'는 뜻 외에 '통치하다'(시 9:4, 8) 또는 '감독하
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본문의 이 말은 12제자들이 예수의 권
위를 덧입어 그분의 심판의 모든 절차를 보좌하고 대행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ㅇ내 이름을 위하여 - 막 10:29에 의하면 '복음을 위하여'로 또 눅 18:29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로 표현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본문의 이
름에 해당하는  원어 '오노마'는 자기 자신을 알리는 것, 즉 계시 또는 복
음, 하나님 나라 등으로 대치될 수 있는 용어이다.
ㅇ집이나...전토를 버린 자마다 - 여기서 예수의 권고는 열 두 제자들에게만
안정된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헌신(獻身)하는 모든 제자들에게까지 그 대상
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특별히 예수께서는 당신을 증거하기 위하여 특별히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을 세 가지 차원 (1) 광의적 의미
의 가정(집) (2) 친족(자매, 부모, 자식) (3) 소유(전토) 등으로 구분하셨는
데, 이는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구하셨던
3중적 포기(창 12:1)와 비교할 만하다. 실로 예수 자신도 복음 전파를 위하
여 집을 떠나고 그의 모친과 동생을 떠나시었다(12:46-48). 정녕 이러한 떠
나는 믿음은 얻는 축복으로 넉넉히 보상될 것이다.
ㅇ여러 배(倍)를 받고(헤카톤타플라시오나) - 문자적으로 '일백 배'를 의미
한다(막 10:30). 이에 비해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을 '폴라플라시오나' 즉
'여러 배'로 표현하였다(눅 18:30). 이러한 차이는 본문의 의미를 손상시키
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문제점이라고 할수 없다. 여하튼 예수의 이 언약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일백 배 또는 여러 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수를 먈한다. 실로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집, 부모, 형제
를 버린자는 신앙 공동체(信仰共同體)의 일원으로서 영적 가족이 되어 수많
은 신앙의 형제 자매를 얻게 될 것이다(12:49, 50). 또한 그는 비록 물질은
상실했지만 물질보다 더 영원하고 가치있는 참 평안과 사랑과 행복의 실제이
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 될 것이다.
ㅇ영생을 상속하리라 - 마가에 의하면 백 배의 축복은 이생에서 핍박과 더불
어 받는 것이며 영생의 축복은 내세에서 받는것으로 나뉘어져 있다(막10:30).
성도가 이세상에서 자기 희생의 대가로 받는 축복은 물질적인 차원의 풍족함
이며, 내세에서 받는 축복은 영적인 차원의 풍성함, 즉 영원한 생명이 될 것
이다. 한편 영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그 나라를 유업(遺業)으로 상속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5:5;21:38;
25:34). 그러나 분명히 인식할 사실은 영생은 가정과 재산을 버린 것 그 자
체에 대한 보상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핍박받은 것에 대한
공로의 보상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정 그것은 지금까지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구원된 삶을 누리고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참
여하게 됨을 의미한다.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ㅇ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 이 구절은 부자와 천국에 대한 교훈의 결론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유대의 격언으로, 다음 장에(20:1-16) 나오는 '포도
원 품꾼의 비유'의 서론으로 사용됨으로써 부자에 대한 이 교훈과 비유를 연
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문에서의 이격언은 메시야 왕의 통치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역전(大逆轉)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된 자, 나중된
자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1) 어떤 사람들은 마지
막날에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자는
가난하게 되고 가난한자는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주장이 그러
한 윤회(輪廻)로서의 역전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2) 많은 교부(敎父)들은
먼저 된 자는 유대인이며, 나중된 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Clarke).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본 장에서 그렇게 뚜렷이 드러
나고 있지는 않다. (3) 어떤 학자는 서로가 먼저 된 자라고 주장하며 논쟁하
는 제자들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예수가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 주장은 오히려 18장에서 더 잘 어울리는 말이다. 이하 두 견해가 가장 적
절한 해석인듯하다. (4) 카슨(D.A. Carson)에 의하면 이 격언은 이 세상
에서 부유하고 권세가 있던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역시 더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낡은 유대식 관념(觀念)을 모두 부정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5) 한편 또 다른
학자는 이 격언이 사용된 막 10:31과 눅 13:24-30에 의하면 나중이라는 의미
가 천국 안에서의 '나중된 자'가 아니라 '그 나라밖에 있는 자'를 가리키며,
그런 점에서 '먼저된  자'는 그 나라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따
라서 자신들은 이미 그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했다고 믿는 바리새인
과 서기관 등의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마지막 날 그나라에서 쫓기움을 당할
것이요, 세리와 창녀등 스스로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
고 주를 따른 자들은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영적 우월 의
식과 특권 의식을 철저히 경계하시고, 대신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과 온유와
순결한 영혼을 인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천국 시민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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