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
인생의 그릇이 새로워 질 때
김홍은 (충북대교수. 수필가)
이번 한국수필의 7, 8월호는 발에 대한 특집으로 ‘발 건강과 인생’, ‘발로 뛰는 사람’, ‘발을 찬미한다.’라는 글이, 어느 때 보다도 마음을 이끌고 있다. 이는 자연의 오염으로 환경이 점점 나빠지면서 누구나 건강을 중요시 여기고 있음이 아닌가 한다.
우선 의학상식이 부족한 우리들에게는 의학전문가, 약사. 삶의 경험자들이 발과 연관된 상식과 체험들을 수필로 편안하게 이해하도록 작품을 통하여 건강지식을 들려주고 있어 유익했다. 무엇보다도 건강뿐만 아니라 발 관리를 위하고, 발에 관한 많은 내용을 들려줌으로 흥미로웠다.
우리들의 한국수필문학이 발전하려면, 하나의 문학작품으로만 끝을 맺기 보다는 인생의 삶에 유익한 글이 많이 발표됨으로 사회에 관심도를 높일 필요성도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한다.
* 특집 발
한영자의 <발과 인생>은 몸무게를 받쳐주는 발바닥은 온 몸의 장기를 연결시킨 것이란다. “엄지발가락은 뇌, 둘째는 목구멍, 세째는 기관지, 네째는 후두부, 다섯쩨는 눈, 귀를 관리 한다. 이렇게 발가락 五관이 앞부분을 맡고 엄지발가락을 기점으로 하여 일직선으로 가면서 위 척추의 축대를 세우고 갑상선, 폐, 간장, 부신, 자율신경계, 방광, 견갑관절, 시낭, 요추, 대장, 소장, 오관절, 무릎, 소화액분비 촉진으로 음식을 소화해 낼 수 있는 내장의 배치도가 섬세하다.”
이것은 혈관계, 신경계 등 전신으로 연결되어 있다며, 이와 같이 인체의 모든 기관과 교감하는 발바닥은 그냥 쉬게 두지 말고, 매일 자극을 주어 몸의 축소판을 움직여 주어야 건강이 계속 유지된다고 하였다.
많이 걸음으로 족소음신경의 사작부위인 용천혈(湧泉穴)을 밀어 압박시킴으로써 원기가 솟게 되고, 스트레스 노폐물이 쌓인 울혈(鬱血)을 풀어주는 작용의 효능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 인체의 기능이 떨어지는 노년기에는 하루에 만보걷기요법이 잘 알려져 있지만, 이를 실천하기는 그리 쉽지가 않다고 했다.
조영남의 <섬 아낙>으로 화자는 진도에서 태어났다. 진도의 추석명절 둥근 달빛아래 술래마당에서 너풀대는 고운 치맛자락 끝과, 하얀 코고무신을 신은 버선발로 뛰는 섬 아낙들의 노래 가락과 함께 어우러지는 군무 강강술래의 율동미의 아름다운 발을 연상시킨다.
아내는 늘 남편의 발을 만지고 씻기며 행복의 기쁨을 누린다. 청진기 수술칼날에 지친남편의 발을, 아내는 10여 년간 매일 씻겨 주었다. 아내는, 어느새 망나니 아들을 효자로 만든 어머니가 되어있었다. 그러는 동안 50대에 들어서면서 화자는 아내의 발과 점점 닮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결절성 통풍. 급성발작시기에 심한 통증과 함께 많은 불편을 주지만 오히려 기쁘게 생각한다며, 그렇게라도 아내를 좀 더 기쁘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이라고 하고 있다.
윤주홍의 <세족례>는 의학적으로 발에 대한 기본 상식을 들려주고 있다. “발은 걸을 때 마다 체중의 압력을 받아 혈액을 심장으로 올려 보내는 펌프 역할도 한다. 그래서 ‘제 2의 심장’ 이라 할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다. 발에 생기는 병적증상은 단지 발이 아픈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발목, 무릎, 골반, 척추, 어깨 등 목 관절을 비롯하여 몸의 모든 부위에 통증을 유발할 수가 있는 관과 못할 발이다”라고 들려주었다.
발은 인체의 가장 하부에 있는 기관이면서 이를 소홀히 여긴다. 몸무게 70키로 그람으로 하루에 최소 10,000보를 걷는다면, 약70여 톤의 부담을 주게 된다. 이런 수치로 미루어 보면 연간 300만보 이상을 걸으며, 평생 동안 지구를 4바퀴 반의 거리를 걷게 되는 수고를 갖게 되는 셈이란다.
예수시대에도 집에든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일은 종들의 몫이었지만, 예수는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으려 하자 천부당 만부당일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단다. 이것은 제자들을 향한 겸손과 성김의 본을 보여주는 향후 제자들의 생애에 대한 예시(豫示)인 것으로 세족례는 받아도, 베풀어도 모두의 내 정체를 깨닫고 울게 된다며 끝을 맺고 있다.
김사연의 <발 병(病)>은 “인간의 양쪽 발은 52개의 작은 뼈와 60개의 관절, 214개의 인대와 38개의 근육과 수많은 혈관으로 구성되었으며, 25만개의 땀샘에서 하루 0.5리터의 땀을 배출 한다”고하였다.
발의 병중에는 가장 흔한 게 무좀이라며, 무좀균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타원형 짚신처럼 생겼고, 이 균이 사방으로 피부 조직을 잠식해 들어가 가렵고 허물이 벗겨진다는 것이다. 무의식중에 그 허물을 벗기는 과정에서 손가락에 감염이 되고, 손톱과 발톱까지 감염될 수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무좀약을 사용한 분들이 완치될 줄 알았는데 재발했다며, 약효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하였다. 이것은 재발이 아니라 재감염이란다. 무좀이 완치되었다 하더라도 무좀환자의 양말을 신거나, 맨발로 무좀환자가 거주하는 가정을 방문하면 여지없이 재감염 된다고 일러주었다.
“발톱이나 손톱 무좀을 호선(弧癬)이라고 칭하는데, 발톱과 발가락 피부 사이에 단단한 각질이 생기며, 색깔이 검게 변하고 외양이 일그러지기까지 한단다. 한때 화자가 조제한 ‘만수당 무좀약’은 각종 피부 질환에는 효과가 있어, 입소문을 들은 환자들이 전국에서 찾아왔으나 발톱 무좀에는 속수무책이었단다. 호선에 감염되면 바르는 약은 물론 내복약도 효과가 없고, 병원에서 손톱과 발톱을 뽑는 외과 수술을 받아도 재발된다고 한다.
손톱이 한마디 크기로 자라는데 6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무좀치료 내복약을 6개월간 복용하면 낫는다고 처방해 주지만 효과를 기대할 수 없고, 장기복용 시 오히려 위장장애와 간에 무리가 오기 때문에 화자는 절대로 권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발의 무좀은 갑상선과 신경계통에 이상이 생겼을 때 갑자기 발에서 땀이 난 경우도 있고, 땀으로 축축한 피부는 곰팡이 균에 인하여 무좀의 원인이 된다며 발톱무좀 경험담까지 들려주었다.
장경환의 <발건강과 인생>은 발을 세 번씩이나 삐어 불편했던 경험을 토대로, 발에 대한 건강지식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불편한 몸으로 서너 달을 고생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게 군살이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삐죽 볼록 나온 군살이 가관이다. 염치도 없이 부풀은 몸은 두루뭉수리로 굼떠지다 못해 운동신경마저 후퇴하게 된다.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정형외과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아도 호전되지 않아 마음마저 침체되어 고통스러웠다.”는 경험을 들려주며 발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해 진다고 하였다.
미국의 소올(Dr. William M. scholl)은 모든 병의 원인은 발에 있다고 밝히면서 그 근거로 환자의 95%이상이 발의 고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고, 일본 니시도 발의 모세관 작용의 구조를 밝히며 발의 고장은 반사의 체계에 의해서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고 발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음도 들려주고 있다.
또한 발의 부종은 전신에 반사하면서 일으키는데, 머리카락에서부터 발가락 끝에까지 이르러 눈도 빨리 고장 나는 원인이 되며, 올빼미는 다리를 다치면 동공과 홍채에 출혈을 일으킨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머리카락이 일찍 세거나 대머리 탈모증까지도 발의 고장에서 오는 증상이라니, 근래에 급속도록 나빠진 내 눈과 탈모증이 바로 그 원인인가 싶다고 하였다.
‘소올’은 발의 고장은 발이 떠받치고 있는 신체각부의 두통, 허리와 목의 병, 소화기계의 장해, 만성피로, 피부, 치아, 목(식도), 경추, 갑상선샘의 고장, 하지 등 얼굴에 달린 모든 기능은 물론 사소한 잘못에 이르기까지 전반적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고 적고 있다.
또한, 죽음의 직전까지 마더데레사 성녀의 발을 떠올리고 있다. 걷지도 못하면서 일생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수녀의 발을 들려주고, 몸 부위 중에서 가장 천대를 받는 발이지만 인생의 걸어온 길에 따라 거룩하기도 하지만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며, 추구하는 대로 걸을 수 있는 발이 있음은 축복이라고 하고 있다.
김진돈의 <발건강과 인생>은 발마사지는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인체 에너지순환장애를 제거해주고 인체각기관의 조직활동을 원활하게 해주면서 긴장을 완화시켜준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건강한 발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첫 번째는 발가락에 힘을 주고, 발뒤꿈치를 들어 몸을 곧추 세운 다음 몸을 상하로 천천히 유연하게 일어섰다 앉았다를 자주 한다. 그리고 난후에는 몸을 이완시키고 종아리 중간쯤에 근육이 갈라진 부위를 손가락으로 꼭꼭 눌러준다. 이 부위가 항상 뻣뻣해 있으면 하반신에 노화의 적신호로써 전신권태나 등의 근육이 경직되고, 굳어 있으면 스태미나도 떨어지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단다.
두 번째는 발가락이 서로 팔자모양처럼(발끝이 안쪽으로 모아지게)하는데 어깨 넓이 정도로 다리를 벌리고서 천천히 앉았다(몇 초간 기다리다) 일어났다를 천천히 수 회 실시하되,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면 안된다고 하였다.
세 번째는 계단을 단순한 계단으로 보지 말자는 것이다. 계단 등을 오르내릴 때에 이만큼 좋은 운동도 없다며, 발끝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엄지발가락 밑에 있는 뇌하수체의 지압점이 눌려서 뇌의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근력과 호흡기, 순환기 계통을 단련시켜 온몸의 지구력을 길러주고, 뇌의 활성도도 촉진된다고 하였다.
네 번째는 발을 씻은 뒤에는 완전히 물기를 없애주는 것이다. 항상 발을 청결히 해주고 씻은 뒤에는 반드시 발가락 사이사이의 물기를 완전히 닦아주고, 최소한 15분 이상은 자연 통풍을 시켜주는 것이 좋다.
다섯 번째는 의자에 오랫동안 앉을수록 허리는 펴고 무릎의 굴신 운동을 하는 게 좋다.
마지막으로 발뒤꿈치부터 걷는 습관으로 발뒤꿈치부터 바닥에 닿도록 착지하면, 달릴 때 온몸의 충격을 완화시켜줄 뿐 아니라 내장의 기능이 강화되고 활성화된다. 또한 발뒤꿈치 부분에는 간장, 대장, 방광, 신장이 연결되어 있고 혈액순환과 관련되는 경혈점들이 있기에 발의 피로가 덜 하고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게 된다고 알려주고 있다.
황영조의 <어머니를 위해 세상을 달렸다>는 “세계적인 선수가 되겠다.” 고 꿈을 갖고, 발 하나로 달려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한, 화자에게 마라톤이 얼마나 힘드냐고 물었을 때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죽고 싶었다”고 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 세계를 제패 하도록 어머니는 학교나 연습장에 한 번도 오시지 않고 일을 하셨단다. 이런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고 싶었다고 하였다. 자신이 흘린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며, 발로 가는 삶을 추구한다고 들려주었다.
윤영남의 <발로 뛴 선거>는 자신의 낙선된 23표 차이의 쓰라린 경험담을 들려주고 있다.
“그렇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운동선수가 아니라도 내 인생의 운동장은 광활하기만 하다. 가장 낮은 자세와 최선을 다하는 열정으로 뛸 수 있는 그라운드는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인생이란 넓은 운동장에서 결코 단거리 경주가 아닌 장거리의 마라토너가 되어야 한다고 응원의 함성이 내게 지금도 들려온다. 거짓 없는 진실과 오만하지 않는 겸손으로 뛰고 또 뛰라고 나를 향해 사랑의 메시지로 주문을 보낸다. 그들은 화를 내면 진다고 가르쳐 준다. 조금은 참고 잠시만 너그러운 아량으로 뛰다보면, 인생역전의 환희와 승리의 순간이 내게서 외면만 하겠는가. 진정, 내가 23표 뒤에 숨겨진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말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나에게 몸에 좋은 약은 달기보다 쓸 때가 더 많았으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직 가슴의 상처는 만신창이로 깊어 웃음이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이제는 용서하고 또 용서 받고 싶다며, 승리에서 보다 패배에서 훨씬 값진 것을 얻게 될 것임을 알고 있는 내 발을 본다고 하였다.
심성구의 <손과 발>에 대한 수상과 족상으로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하는 말에는 엄지발가락이 둘째 발가락보다 길면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더 오래 살고, 둘째 발가락이 더 길면 어머니가 더 오래 산다고 한다. 꼭 그런지 안 그런지 알 수는 없으나 들어 온 말이다. 손가락에는 잠두란 것이 있다. 엄지손가락이 누에 대가리 같이 생긴 손가락을 말한다. 보기에는 그리 예뻐 보이지는 않지만 생활력이 강하다고 한다”고 하였다.
그런가하면 손과 발의 우화도 덧붙여 주기도 했고, “소인족덕(小人足德) 대인덕행(德行)”이지만 소인은 발의 덕으로 생을 원만히 할 수 있다며, 소인은 부지런히 움직이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거란다는 의미도 더해주었다.
이경구의 <전족(纏足)의 여인들>은 중국의서방지역의 청해성(靑海省)의 성시(省市) 서녕(西寧)의 곤륜사(崑崙山) 민속학술탐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전족(纏足)이란 얽어맨 발이라는 뜻이다. 도대체 발을 얽어매다니! 여자는 발이 작아야 예쁘고, 발이 작아야 시집을 잘 간다는 그 발상이 남성의 머리에서 생겨났을 법한데, 그러나 당사자인 여자들 스스로도 자신과 딸, 손녀의 대를 이어오며 이 말문이 막히는 어처구니없는 풍습에 따르며 아픔을 참아내었다”고 하였다.
1987년에 발표된 중국의 펑지차(馮驥才)이 소설 ‘삼촌금련(三寸金蓮)에는 전족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며 들려주었다.
‘전족의 과정은 여자아이에게 더할 나위없는 잔혹한 짓으로 그 고통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아직 뼈가 유연할 때 작은 발을 만들기 위해 발을 얽어맨다. 서너 살에서 늦어도 일곱 살에는 이 작업을 착수한다. 먼저 엄지발가락 외의 다른 네 발가락을 발바닥 쪽으로 구부리고 뼈와 근육의 성장을 철저하게 억제하기 위해 빳빳하게 풀을 먹인 긴 천으로 꽉 조여 묶는다. 그것을 실로 튼튼히 꿰매고, 미리 만든 작은 신발에 집어넣는 고문이 되풀이 된다. 이렇게 하면 마치 쫑즈(綜子:찹쌀을 삼각형으로 대마 잎에 싸서 찐 떡)처럼 조그만 삼각추 모양의 발로 교정되어 가는 것이다. 전족이 완전히 만들어지기까지 그 아픔은 지옥의 시간이며, 발을 감은 헝겊은 피로 얼룩져 화상을 입은 것 같은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을 친다. 헝겊을 바꿔 감을 때마다 악취가 코를 찌르고 살과 피부가 벗겨진다. 아무리 아이가 울부짖어도 부모들은 헝겊을 풀지 못하게 한다. 게다가 강제로 그 발로 보행 훈련을 시키므로 아이는 거의 죽을 지경이 된다.--(중략) 그리고 고대의 유물에는 쇠로 만든 전족신발이 발견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왜 이들은 발 고행을 시켜야만 하였을까.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가졌던가. 전족을 하게 되는 이유는 이러 하단다. 전족을 하면 장래 좋은 결혼 조건을 갖추게 되고, 작은 발은 남성들을 성적으로 흥분을 시킨다는 변태적 발상으로 전족을 금연(金蓮)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하게 되었다는 일설까지 더해주었다. 이글을 통해 전설 같던 중국여인들의 전족을 잘 알게 했다.
마광수의 <발과 손톱의 미학>은 여자가 발톱을 길게 기르고 다니는 것을 상상하는 일은 기가 막히게 절묘한 상상적 황홀감을 내게 가져다준다며, “우선 발톱을 길게 기르려면 스타킹을 신을 수 없을 것이다. 삐죽한 발톱이 스타킹을 뚫고 나올테니까. 그래서 반드시 맨발에다가 샌들형의 구두만을 신어야 한다. 여름이라면 그게 가능하겠지만 추운 겨울이라면 불가능하다. 겨울에도 맨발에 샌들을 걸치고 다닌다는 것은 도무지 추위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도 살아갈 수 있는 귀족계급, 길거리를 걸어 다닐 필요가 없이 언제나 따뜻하게 난방 된 고급 자동차만을 타고 다닐 수 있는 계급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긴 손톱이나 긴 발톱이 상징적으로 시사해 주는 것은 귀족이나 유한계급의 우아한 게으름과 사치스런 권태이기 때문에, 화자는 그런 식의 긴 손톱이나 긴 발톱을 상상하면서 일종의 황제망상(皇帝妄想)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고 하였다. 독수리나 매 발톱 같은 곡선으로 길게 휘어들은 여인의 발톱을 상상한다는 이야기다.
* 사색의 뜰
정명숙의 <신발굽 이야기>는 신발의 굽 높이와 역사적인 여러 내용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어쨌든 신는다는 것은 혼자 자유롭게 신고 벗을 수 있어야 하고 보행할 수 있는 실용성이 우선이라고 한다. 걷는다는 것은 신발의 범주를 벗어난 행위인 것이고, 키가 커 보이고 싶어 하는 욕구를 채우기 위함에서 만들어 진 아이디어가 하이힐일 것임을 이끌어냈다.
화자는 어느 날밤에 눈길에서 넘어진 젊은 여자의 청바지 밑 10센티 넘는 구두 굽을 보고 놀라 언젠가 재미있게 읽었던 걸 기억해 냈다. 그 옛날처럼 시중드는 여종 남종들이 없는 현대여성들은 남자들에게 안기듯 붙어 다니고 있는 그들의 걸음걸이를 보며 “서양 사람들은 차밍하고, 섹스어필이라 한다. 남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자들이 힘들게 걷고 있는 걸 보며 즐기는 악취미를 가지는 모양이다”라고 꼬집었다.
국토가 물에 잠기는 화란 같은데 나막신은 몰라도 굽 높은 것을 신고 곡예 하듯 걷는 그 마음이 가엾다며, 그러나 우선 그들의 건강이 걱정이라고 하였다. 늘씬한 외모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정신적인 내면이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라며. 외모중시 사회가 빚어 낸 웃지 못 할 현장을 보았다면서, 이제 남의 걱정할게 아니라 내 신발장에 굽 높은 신발을 정리할 때가 됐다고 끝을 맺었다.
이 작품은 신발을 돌아보게 하면서 인생의 신발장을 정리하는 저녁노을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듯한, 서글픔을 은연중에 들려주고 있는 글이다.
이종화의<갚지 못 할 빚>은 어머니의 기일에 와서 지난날 어머니께 오해 했던 잘못의 후회와 윤모촌 선생님에 대한 베풀어주심에 대해 끝내 보답하지 못한 부채감도 담고 있다. 그러면서 화자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무엇이 어렵고 무겁다고 해도 마음의 빚만큼 힘들고 무거운 것은 없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빚은 나의 양심을 더욱 죄어 온다. 갚을 수 없는 빚을 만들지 않는 것이 인생을 선량하게 다스리는 일이라고 이제사 깨우친다. 속담에 ‘철들자 망령’ 이라는 말이 있듯 뒤돌아보면 한 가지 한 가지 철이 없어서 진 마음의 짐들이 많다.
어째서 깨달음이란 이리도 늦게 찾아오는 것일까. 바로 그 점이 삶의 고통이라고 요즈음은 깊이 생각한다.” 고 하였다.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라고 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뉘우친다하지 않던가.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고, 자식을 많이 둔 부모는 풍수지탄(風樹之歎)과 같다고 하였다.
누구든 살아계실 때는 깨우치지 못하기 마련이다. 이 또한 인생이 아니던가.
강나루의 <그렇게 살다 간 사람들>은 상가에 조문을 갔다가 고인이 안타깝게도 이기적으로 살다간 생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화자의 매부가 훌륭하게 살다간 귀감의 발자취를 쏟아내며 국립묘지에 안치 후 이렇게 들려주고 있다.
주변에는 오직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몸부림 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며, 그들은 남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숱하게 끼치면서 기어코 목적은 달성했는데, 얼마 누리지도 못하고 일찍 떠나갔다. 많은 일화만 남겨놓고, 공금횡령, 착복 등으로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거물급 범죄자들도 많았고, 평생을 사기, 도박, 절도, 폭행, 험구를 일삼는 등 온갖 악행만 일삼다 생을 마친 사람들도 많다고 하였다.
그런가하면, 재능으로, 땀 흘려 몸으로, 평생을 인술로, 평생 모은 재산으로 불우 이웃을 돕고 떠난 사람들, 청백리들, 일생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다 간 범부들, 학문에만 전력투구했던 학자 등 남의 귀감이 된 사람들도 참 많았다며 인생의 삶을 다시금 느끼게 하고 있다.
“얼마나 인간답게 살았는가, 한 인간의 한 살이를 평가하는 기준은, 얼마나 정직하게,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베풀며 살았는가 일 것이다. 자신도 정답은 알 것 같은데, 이미 거의 다 써버린 내 삶이 몇 점짜리였을까? 또 여생은 몇 점짜리로 살다 갈지 참으로 두렵다” 라며 끝을 맺었다.
사회가 점점 개인주의로 흘러가는 요즈음, 자신의 삶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유해자의 <고향, 나의 만화경>은 나만이 들여다보는 만화경 같은 고향 그 속에는 그리운 얼굴들과 아름다운 사계(四季)가 보석이 되어 반짝거리고 있다며 지난여름 친정에 갔다가 30년이 넘은 세월을 거슬러 이웃에 살던 영재 오빠의 모습을 떠 올릴 수 있었다. 고향의 모든 것들을 사진 속에 멈춰있는 순간들처럼 그곳을 떠났던 날로부터 지금껏 내게 정지 되었다며, 풀이 죽어 혼자 살던 영재오빠, 물동이를 이고 집 앞을 지나다니던 영자고모를 회상하였다. 지금도 수돗물을 받다가도 고향의 모든 것들은 만화경속의 아름다운 재료가 되어 보석처럼 반짝인다했다.
지난날의 어린 시절을 정감 있게 들려주었다. 작품을 통하여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이들에게 동경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다.
김대욱의 <치아가 건강해야> 이가 아파서 고생하다 사람의 오복이 중요함을 생각해 보고 병원에 가서 치료한 내용이다.
“다섯 가지 복은 수(壽). 부(富). 귀(貴). 치(齒) 외에 고종명(考終命). 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 자손중다(子孫衆多) 중 어느 것을 중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모두가 다 중요한 것이나 시대와 사람에 따라 그 종류와 순위가 다를 수도 있으니 각자의 생각대로 하면 될 것 같다. 이것들 중 하나라도 더 가지면 더 행복해질 수 있으니 더 많이 가지도록 노력해야 될 것이다.”라고 들려주고 있다.
병원에 갔더니 실습을 나온 치과 대학 학생이 칫솔질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만 닦는 것이 아니라 잇몸도 닦고, 혓바닥도 닦고, 치간 칫솔질도 하는 등 이삼십 분가량 해야 된다고 하였다. 화자는 이제까지 삼분도 안 걸리게 쉽게 해왔는데 요즘 좀 신경을 써서 해도 십 분을 넘기가 어려웠는데 최선을 다해 칫솔질과 치간 칫솔질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사람은 고희(古稀)를 접어들게 되면 생로병사(生老病死) 문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유교적인 생활 속에서 수복강령(壽福康寧)고종명(考終命), 유호덕(攸好德) 이란 말을 자주 들어왔다. 사람이 나이가 들게 되면 도덕을 지킴을 낙으로 삼고, 건강하다가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일을 오복으로 안다. 오복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예전에는 수(壽). 부(富). 귀(貴). 치(齒) 외에 고종명(考終命)으로 하였지만, 지금은 오복(五福)이라는 것도 그 의미와 내용을 달리 하고 있다. 우선 건강하고, 재물이 있어야 하고, 자신과 말벗이 되는 아내가 있고, 다정한 친구와 일거리나 취미를 가져야 한다하여 건(健), 재(財), 처(妻), 우(友), 사(事. 藝)라고 까지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齒)처럼 중요하고 아픈 곳도 없다. 이는 경험해본 사람만이 그 아픔을 알게다. 이 글을 통하여 구강(口腔) 건강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김고경의 <달빛 목욕>은 자원봉사를 하고자 새로 개원한 불교병원의 실내 장식으로 만들어 놓은 연못에 피어 있는 연꽃을 바라보고, 청하산 자락의 백련도 떠 올려보고, 병원내의 연꽃 감상과 자신의 마음을 그려낸 글이다.
“물이 너무 맑아 잘 살아내지 못하는 연이나 수련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진흙 속에 뿌리가 시련을 딛고 있는 거라면 우리 모두는 얼마큼의 시련과 아픔을 필수로 감내해야 하는 것인가. 맑은 물을 견디고 시들지 않는 싱싱한 꽃잎을 피우기 위해 얼마큼의 진흙을 깔고 앉아 있어야 하는 걸까? 내가 무겁다고 느끼던 짐들은 꼭 져야만 하는 내 시련의 무게일까 가늠해본다
연꽃이 앉아있는 진흙의 양에 비례해 시드는 속도가 정해진다고 나에게 말한다. 그래서 나도 대답했다. ‘좋은 꽃과 싱싱한 잎을 위해서 더 많은 양의 진흙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고’고.” 하였다.
그러면서 화자의 자원봉사 시간은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달빛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며 이미 저버린 연꽃이나 수련도 마음을 밝히는 달빛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병원 실내의 연못 속에 심겨진 연꽃감상과 관찰까지 덧붙여 병든 생명의 가련함과 자연의 이치를 통하여 진찰까지 그려주면서 자원봉사를 아름다운 달빛으로 맺어놓음이 마음을 머물다 가게 하고 있다.
방극인의<경로석 유감>은 어느 날 안양역에서 헤화역까지 전철을 타고, 차의 좌석표시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생각을 들려주면서 오늘 의 현실을 살며시 꼬집은 이야기다.
“젊은 사람의 하는 행동이 모두 그른 게 아니다. 그들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야한다. 충성이나 효심은 강요해서 되는 게 아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젊은이는 새 역사를 창조한다. 새 역사는 찬란해야 한다. 구태의연해서는 새 역사라고 할 수는 없다.
경로석이 없을 때는 우리의 젊은이들은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이 있었다. 분명 노약자를 위한 경로석이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자신의 자리를 양보할 줄을 모른다. 늙기도 서러운데 일반석으로 가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경로석이 있는 한 일반석을 젊은이가 양보를 해준다 해도 앉을 수 없는 게 노인들의 마음이다. 노인은 많아지는데 노약좌석은 그대로이니 나이가 많아지는 게 죄라면 할 말은 없다.”
사회 문화는 변천해가도 공직자들은 변화하는 상황을 행정은 얼른 따르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의 현실삶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사회문화와 행정이 함께 이어 갈 때 행복한 복지사가 이루게 되지 않을까 ?
우리는 늘 버스나 전철을 타고 다니지만 이런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형식에 불과한 생활에서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냥 지나쳐 버릴 평범한 사회생활 속에서 화자는 남다른 새로운 삶의 눈으로 바라본 마음을 들려줌이 돋보인다.
이은영의 <숲속의 우물>은 우연한 기회로 시골에다 집을 짓게 되어 이로 하여 일어난 이야기다. 숲 속 언덕위에 우물을 팠더니, 질도 좋고 수량도 풍부하게 물이 콸콸 터져 이를 사용함에 물의 고마움이 새삼 컸고 갈증도 금방 해소됐다고 했다. 그러나 풍요로움과 그 행복도 잠시뿐 그건 화자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집 마당에 난 잡풀은 뽑고 또 뽑아도 끝이 없자, 옆 산주가 제초제를 뿌리라 알려줌에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달려가 제초를 사다가 시골 마당에 온통 뿌렸다. 여름밤이면 온갖 벌레 나비 나방이 모여들고,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없는 반딧불과 장수하늘소가 사는 청정과 고요의 땅에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 셈이다. 잡초는 독약을 먹고 벌겋게 독을 품게 되었고, 그 독은 결국 땅속 생수에 흘러들어 화가 먹게 될 거라는 생각에 그 물을 먹지 않고 생수를 사다먹었다는 내용이다.
옛날에는 인력이 많아 김매기작업을 하여 왔다. 그러나 오늘의 농촌은 젊은 인력이 부족하고 고령화되어 옛날과 같이 김매기를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에 제초제에 의존하여 농사를 짓는 경우가 태반이다. 농약은 토양중의 생명들을 멸종시키기도 하고 유용 미생물의 생장을 억제 또는 토양활성을 잃게 만든다.
농약은 자연을 훼손시키고 잔유 된 유해물질을 결국 사람이 또 먹게 된다. 화자는 이런 중요함을 알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자연환경을 지키려는 마음을 들려주고 있는 글이다.
정희천의 <인간은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존귀(尊貴) 해야 한다.> 라는 작품은 동네에는 산으로 조성된 조그마한 그린공원이 있다. 작은 공원에는 여름이되면 매미울음소리로 가득 찬다. 미물(微物)들은 이세상에 태어나 한여름을 살기위해 4년에서 7년의 세월을 기다려 살다간다며 하물며 인간도 매 한가지임을 피력하였다. 인간이란 인간답게 살다가야지 그렇지 못하면 천한동물들도 “같이놀자”고 할 것이며 인간사를 속속들이 알면 “같이 못놀겠다” 할지도 모른다며 이렇게 들려주고 있다.
“사람노릇 제대로 하기도 빠듯한 한 평생인데, 미물들도 아껴 쓰는 그 귀한 시간을 이렇게 마구 갈 갈이 찢어 놓아도 되는 것인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함께 살아가면서 같이 사는 이 세상을 이렇게 더럽혀도 되는 것일까. 우리 인생의 한평생, 백년도 어려운데 몇 천 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을 언제까지 헤매다 말 것인가. 나도 별수 없이 인간인지라 하늘보고 침 뱉기 식의 이런 푸념이라도 하게 되나보다. 분명 이순간도 인간임을 확인시키려는 듯 온갖 사건들을 저지르고 있을 테니까.”
이 작품은 화자가 무엇인가 독자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뜻은 충분히 담고 있지만 구성이 다소 미약하게 느껴진다. 또한 제목이 수필로서는 적합하지가 않다. 보다 함축성 있게 함이 더 좋을 듯하다.
수필은 문학이전에 작가가 살아온 인생의 체험과 우주만물로부터 남다른 관찰과 지식을 쌓은 인생그릇에서 퍼낸 사색적 이야기다. 인생의 그릇이 적다보면 글도 역시 빈약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그릇에는 늘 새로운 많은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 작품을 읽고 나면 우선 남는 게 있어야 하지 않는가. 독자는 오감(五感)으로 담아낸 생명이 있는 글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호에 발표된 ‘사색의 뜰’ 작품은 크게 감동을 주는 작품이 부족한 느낌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송나라 때의 구양수(歐陽修)가 말한 다작(多作), 다독(多讀), 다사(多思)를 다시금 떠 올려봄도 좋겠다.
첫댓글 "수필은 문학이전에 작가가 살아온 인생의 체험과 우주만물로부터 남다른 관찰과 지식을 쌓은 인생그릇에서 퍼낸 사색적 이야기다. 인생의 그릇이 적다보면 글도 역시 빈약함을 느끼게 된다."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