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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料보관소 스크랩 박정희전대통령 일본인들에게 집단린치당하고 민주행
성헌 추천 0 조회 28 11.02.25 13: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반일교사 찍혀 일본인에게 집단린치 당했다”“만주군 장교 시절 광복군 탈출 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 제자 이순희씨, ‘숨어있는 집사’ 이진화씨 본격 증언
cover story modern history controversy
조 우 석

박 전 대통령이 만주 군관학교 사관 견습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기 전에 찍은 사진(1944년).

안정된 교사생활을 접은 채 만 스물셋 나이에 결행했던 1940년 초 만주군관학교 늦깎이 입학, 해방된 조국에 세워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제2기생 입교 전까지 1년 1개월 동안 사회활동의 완전 공백, 바로 이때 남로당에 가입했다

는 혐의 때문에 피할 수 없었던 생애 최대 시련과 복권(復權)의 긴 드라마…. 박정희 전 대통령(1917~79)의 생애, 참 만만치 않다. 놀라운 건 따로 있다.

이 드라마에 숨겨진 진짜 동기와 배경은 지금껏 알려진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극과 극을 오갔던 박정희 삶을 흔히 ‘비약과 단절의 생애’라고 하지만, 실체를 잘 몰라 얼버무려 표현한 건 아닐까?

20대 폭풍의 시절, 뜻밖의 선택을 거듭해야 했던 박정희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 혹은 삶의 결정적 매듭이란 과연 무엇일까? 5·16 이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 언제까지 그를 둘러싼 논쟁을 거듭해야 하나?

혈서 지원서를 보도한 옛 신문 사본 이 공개됨에 따라 지난해 ‘친일파 박정희’ 논쟁이 벌어졌지만, 숨어있는 당시의 진실을 밝혀줄 제3의 증언이나 물증은 과연 없을까?

70년, 64년 만에 입을 연 두 증언자


뉴스위크 한국판에 증언하는 이순희씨.
예기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의 문경초등학교 시절 여제자 이순희(81·한국극빈아동선도회장)씨가 그의 만주군관학교 입학 직전에 벌어졌던 ‘교무실 린치 사건’을 공개했다.

70년 만의 이 증언은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제기되지 않았다. 더없이 생생한 그의 말을 종합하면, 교사 박정희는 학교 재직 기간 내내 반일사상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불령선인(不逞鮮人, 일제에 비협조적인 인물)으로 찍혀 있었고, 이를 조사하려고 나온 시학관(視學官, 장학관) 일행이 학교를 방문하던 날 불미스러운 일이 터져 일본인 교사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했다.

1939년 10월께 벌어진 상황이다. 피투성이가 된 채 “복수할 거야!”라고 외치며 학교를 떠났던 박정희는 그 길로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했으며 그 사건이 돌연한 만주행의 동기라는 주장이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 못지않게 이전 상황도 중요하다.

왜, 무슨 활동 때문에 그가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혔을까? 의문을 잠시만 접어두자. 다른 증언도 경청해야 한다. 또 다른 각도에서 반일주의자 면모를 확인해주는 얘긴데, 박정희의 ‘숨겨진 집사(執事)’ 이진화(83·전 중앙정보부 부산대공분실장)씨도 64년 전 고향 구미에서의 대화를 공개했다.

그의 증언 역시 해방 이듬해 만주에서 돌아와 무위도식하던 ‘낙향거사’ 박정희를 말해주는 전에 없던 자료인데, 지금까지 공백 기간으로 남아있던 1946년 여름 상황을 복원시켜준다. 당시 사회활동 공백은 각종 전기·평전의 사각지대이자, 박정희 전기적 생애 구성에서 ‘잃어버린 연결고리’였다.

이걸 메워줄 증언은 박정희가 당시 구미면사무소 호적계장으로 있던 이진화씨의 집을 방문한 자리에서 나눈 대화다. 그의 아버지(이원기 노인)가 지역 유지였기 때문에 인사차 찾아왔다. 놀랍게도 셋째 형 박상희가 주선한 자리였다. 일제시대 때 신문기자로 활동하던 박상희는 여운형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 계열로 읍내에 ‘선산인민위원회’ 간판을 내건 채 활동하고 있었다.

대구·경북 지역의 청년 엘리트 박상희와, 만주군 장교 출신의 동생이 함께 움직였다는 증언 자체가 이례적이다. 통설과 다르기 때문이다. 통설은 연세대 박명림 교수의 말대로 “중도좌파 성향의 박상희가 만주에서 돌아온 뒤 무위도식하는 동생을 소 닭 보듯 했고, 황태성 등 지역 유명 좌파인사와의 관계 때문에 되도록 멀리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날 자리의 중요성은 형제애 확인, 그 이상이다. 박정희가 이원기 노인과 나눈 대화가 지닌 각별한 무게 때문이다.

“물어볼 게 하나 있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위탁교육을 받고 장교생활을 했던 자네가 광복군과 총을 마주 대고 전쟁을 벌인 적이 없었던가?”

“반일교사 찍혀 일본인에게 집단린치 당했다”“만주군 장교 시절 광복군 탈출 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 제자 이순희씨, ‘숨어있는 집사’ 이진화씨 본격 증언
cover story modern history controversy
조 우 석

뉴스위크 한국판에 증언하는 이진화씨.

당시 누구라도 품었음 직한 궁금증이다. 세상이 바뀌어 해방 직후의 상황이 아니던가? 더구나 이원기 노인은 지역 유력인사인 데다가 그의 아버지(이우인· 전 ‘만주일보’ 발행인)가 문중 재산을 털어서 1920년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점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었던 사람의 하나다. 초점이 분명한 그의 정교한 질문에 박정희가 입을 열었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던 즉답이다.

“전혀 없습니다. 저는 전투행위 자체를 한 적이 없거든요. 만리장성 북쪽 러허성(熱河省)에서 만주군 제8단(연대) 소속으로 근무했는데 보직이 부관 겸 기수였습니다. 만일 제가 광복군과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에 계속 몰렸더라면 광복군 진영으로 탈출했을 것입니다.”

박정희 생애 재구성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이 대화는 20대 청년 박정희의 만주활동 실체와 당시 내면의 갈등을 말해주는 자료다. 6년 전 문경초등학교에서 린치를 당했던 불령선인 박정희만큼이나 그의 반일 성향을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대화는 만주군 장교 시절의 그가 비밀 독립군이었다거나, 독립투사를 잡으러 다니던 정보 장교였다는 식의, 극과 극의 억측이 모두 무효임을 보여준다. 증언의 진실성은 주변 정황으로 확인된다.

우선 박정희가 이원기 노인과의 사이에서 쌓았던 신뢰는 이후 오래 계속됐다. 한국전쟁 때 서울 수복 직후 박정희는 그를 찾아가 아들의 장래를 상의했다. 어차피 병역을 마쳐야 한다면 장교가 좋을 것이라고 설득을 해 이진화씨의 소위 임관(1952년 4월)을 관철했다. 당시 이원기 노인은 “군자는 군인과 멀다(好人不當兵)”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전형적인 양반 가문 사람인데, 그걸 꺾고 박정희 말을 따랐다면 그만큼 서로를 신뢰했다는 얘기다.

81세 제자가 전하는 린치 사건의 전말

박정희 논쟁에 새 국면을 열어줄 두 증언 중 교무실 린치사건이 시기상으로 먼저다. 이를 증언하는 이순희씨는 ‘우리 선생님’(그가 박정희를 지칭하는 말)으로부터 3년을 배웠다. 2학년 개학 날 학생들과 첫 대면했던 교사 박정희의 첫 인상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선생님은 무섭고 근엄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이 작은 키에 까만 얼굴, 검정 운동화 차림이었다. 당시에는 4월 초에 새 학기를 시작했다. 추위가 남아있는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옷가지도 초라했지만, 그래도 왠지 친근한 모습이었다. 더없이 섬세한 기억력을 가진 그는 문경초등학교 시절 박정희를 말하는 다른 증언은 대부분 정확하지 않다는 점부터 지적했다.

일본인 교장 아리마(有馬近芳)와 크게 충돌한 박정희가 그를 두드려 팬 뒤 만주로 도망갔다는 말이 각종 박정희 전기에 등장했지만, 그건 근거 없다. 자기처럼 2~3m 코앞에서 린치 사건을 지켜봤던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더구나 부임 직후 박정희는 문경읍내 자기 집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그가 보기에 조갑제의 책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도 잘못된 증언을 토대로 했다. 출간 당시 저자를 찾아가 오류를 지적했고, 새 책을 펴낼 때 고치겠다는 약속까지 직접 받아낸 적이 있다.

“하숙시절 우리 선생님은 한량이자 제재소 사업을 하던 우리 아버지(이춘동, 1980년 사망)와는 술친구 사이로 발전했습니다.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막걸리를 앞에 놓고 대청마루에 앉아 새벽녘까지 두런두런 말씀을 나누시곤 했어요. 그때 선생님은 평소와 달리 잘 웃었고, 때론 박장대소도 했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자기만의 공부를 하곤 했는데, 제재소를 겸한 살림집이 전기톱 소음으로 시끄럽다며 6개월 뒤 하숙을 옮겼다. 이순희씨는 하숙을 옮기기 전까지 매달 찾아오던 박정희 부친 박성빈의 모습도 기억한다. 봉급을 건네 받으려고 오는 그는 무명저고리에 파나마모자를 눌러쓴 채 트럭이 출입하던 큰 대문으로 거침없이 들어오는 휘적휘적한 걸음걸이가 특징이다.

허리 아래의 저고리 양끝을 위쪽의 양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차림도 별났다. 저고리가 때 탈까 해서 접고 다니던 당시 풍속이다. 그러고는 자전거로 퇴근한 박정희와 얘기를 나눈 뒤 “바쁘다” 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다.

“4학년 진학을 앞둔 1940년 초 저를 포함한 학생들은 우리 선생님을 모시고 과외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진학 준비인데, 남자 셋 여자 셋의 과외 멤버들은 선생님이 하숙하던 주막집에 놀러 가서 공부했습니다. 우리 선생님은 할머니가 지어준 제 어릴 적 이름을 부르며 ‘석룡아, 경성 구경이나 시켜줄까?’하면서 제 귀를 잡고 번쩍 위로 들어올리기도 했습니다. 교무실 린치 사건이 벌어진 빌미가 바로 과외공부 때문이었습니다.”

과외 시작 얼마 뒤 박정희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내용을 가르쳤다. “오늘 들은 말을 밖에서는 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일본이 조선역사를 모르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크레용으로 일장기의 아랫부분을 파랗게 칠해 태극문양을 만들고 네 귀퉁이에 사괘까지 그려 보였다. “이게 우리 태극기”라는 말에 꼬마들 가슴이 떨렸다. 그러고 며칠이 지난 뒤 사달이 생겼다. 운동장에서 놀던 한 학생이 어린 마음에 우쭐해서 친구에게 속삭였다.


(맨 위부터) 박정희가 스물두 살 되던 해인 문경보통학교 교사시절 여학생들과 함께(1939년 3월). 일본육사 본과 시절 가나가와현 소재 상무대 (일본육사의 이름)에서 동기생들과 함께한 박정희(앞줄 왼쪽에서 셋째, 1943년). 대만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1966년 2월).

“야, 너 알아? 저기 걸린 게 우리 국기가 아니래.”

이 말이 일본인 교사의 귀에 들어갔고, 진원지가 박정희라고 드러났다. 사실 전부터 박정희는 일본인 교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기시(大岸)·시마디(島田) 두 교사와 특히 으르렁댔다.

돈이 없어 머리 깎지 못한 학생들 머리칼에 마구 가위질을 한 뒤 복도에 무릎 꿇리는 것을 보고 그때마다 항의한 탓이다. 당시 복도는 새로 지은 시멘트 건물이라서 바닥이 딱딱하고 차가웠다.

시비가 붙을 때는 “칙쇼” “바가야로” 등의 거친 말도 튀어나왔다. 박정희의 반일 성향은 다른 제자들이 제기하기도 했다. 1937년 학교 첫 부임 때는 조선어 교육이 허용되던 시점이라 박정희가 조선어를 가르쳤지만, 그때도 태극기 교육을 종종 시켰다. 학생 한 명을 보초 세운 채 비밀 교육을 실시했다. 이게 과외시간 때 태극기 교육과 얽혀 문제가 커졌다.

“문제의 그날 도교육청 시학관 일행이 학교에 감찰을 나왔습니다. 그날 저는 시학관 일행 차 심부름 조에 뽑혀 교무실에서 있었습니다. 저보다 1년 위인 학생으로, ‘김약국 딸’로 불리던 김경숙, 면장 딸이던 박순애 그리고 저 등 모두 세 명인데, 옷 잘 입고 깔끔하다고 해서 일찍부터 대기중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시학관을 영접한다면서 역전에 도열했는데, 그날 웬일로 교감 가토(加藤)가 영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에요.”

당시 박정희는 학생 5~6명에게 트럼펫을 가르친다며 뒷산으로 올라갔다. 가토가 고즈카이(소사) 한씨(2008년 작고)에게 “시학관 일행이 왔으니 내려오도록 하라”고 일렀지만 허탕을 쳤다.

한 씨는 “트럼펫 교육도 엄연한 교육인데 나중에 내려간다”는 박정희의 말을 대신 전했다. 화가 치민 가토가 “지가 감히 오라면 와야지!”하며 와다닥 올라갔다. 10분 뒤 둘이 함께 들어섰다. 박정희는 가토의 우악스러운 손목에 멱살을 잡힌 채 질질 끌려왔다.

“조센진은 사람도 아냐. 모두 돼지나 개의 먹이로 줘야 해.”(조센진다치와 닌겐자나이. 부타토 이노누 에사니 아케다라 조도이)

가토의 욕설에 박정희가 지지 않고 “도둑놈들은 너희들이 아니냐?”(도로보다치와 오마에 다치자나이카?)고 맞고함을 쳤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찰나 가토가 “나니 구소?(제기랄. 이 거지 같은 놈)”라는 말과 함께 박정희를 업어치기로 메다꽂았다. 코피가 터졌다. 가토는 당시 서예와 유도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 일본인 교사들이 바닥에 쓰러진 박정희에게 덤벼들어 손찌검을 했다.

당시 한국인은 여교사 박옥희와 남자 교사 하나가 더 있었으나 대적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5~10분 내내 얻어맞던 박정희가 운동장으로 도망치듯 내려갔다. 소리소리 질렀다.

“언젠가는 내가 복수할 거야!”

큰소리로 울며 외치던 박정희는 하숙집으로 달려갔지만, 일본인 교사들이 그곳을 찾아가 다시 린치를 가했다. 최악의 사태 이후 박정희는 만주로 갔다고 이순희씨는 말했다.이 대목은 선후 관계가 다소 부정확하다. 박정희는 1940년 3월 말 학생 통지표에 서명했다는 기록이 문경초등학교에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자신의 입으로 린치사건의 성격과, 불령선인으로 찍혔던 당시 배경까지 확인해준 셈이며, 둘 사이의 인연은 계속됐다. 4년 뒤인 1964년 이순희씨는 충주여고 교사로 근무했다. 마침 충청북도를 찾은 박정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는 서로 여유가 있었다. 한량이던 아버지가 요즘도 술을 좋아하시느냐며 안부를 물으며 함께 웃었다.

한참 뒤 이순희씨는 ‘대통령 선생님’이 타계한 뒤 추모사업을 시작했는데, 문제의 하숙집을 어엿한 박정희 사적지로 만들었다. 그게 1982년에 세운, 지금의 청운각(靑雲閣)이다. “청운각이란 이름은 청년 박정희가 푸른 꿈을 안은 채 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했고 일본인의 항복을 받아낸 통쾌한 장소라서 내가 직접 그렇게 지었다”고 그는 말했다.

한 가지, 박정희는 대통령 자격으로 문경을 방문했을 때 하숙집을 일부러 찾았다. 린치 사건 28년 만인 1967년도의 일이다. 첫 부임지이자 마지막 근무지였던 학교 귀향, 그때 2차 린치의 현장이던 하숙집 주변을 묵묵히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번졌던 만 가지 심회를 헤아릴 수 있던 이는 많지 않았다.

고향 후배인 광복군 출신 박일상

1946년 여름 박정희 고향에서의 움직임을 밝혀준 이진화씨 증언은 64년만의 언론 첫 공개이지만, 지난해 법정 자료로 제출됐었다. 박지만씨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를 대상으로 발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을 때 ‘1946년 여름’의 진실을 자필로 써서 제출했다. 법정 자료라고 해서 진실성이 바로 보장되지는 않는다. 진정성은 오히려 증언의 디테일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상희 형제의 고향 어른 방문 인사는 최소한 세 곳이다.

“옛말에 조선 인재의 8할은 영남에서 나오고, 그중 8할이 선산(구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구미 지역은 선산(善山) 김씨, 청송(靑松) 심씨, 벽진(碧珍) 이씨 세 집안이 쥐고 있었는데, 박정희 형제는 이 집안 어른을 모두 찾아뵈었습니다. 선산 김씨 집안의 김준용 어른이 먼저입니다. ‘이관 어른’으로 불렸던 그는 우리 선친보다 10년 연상이지만 서로 맞담배를 태웠지요. 하지만 명절이면 우리 부친이 몸소 세배를 가셨습니다.”

그 다음 박정희 형제가 인사 간 게 같은 선산 김씨 가문이지만 노론 쪽이 아닌 남인 계열의 김성동 어른이다. 그는 당시 ‘구면장 어른’으로 불렸다. 그리고 벽진 이씨 집안을 대표하는 자기네 집을 박정희 형제가 찾아왔다. 이들은 모두 구미역 근방에 모여 살았는데, 일제 말 박상희는 명절 때 꼬박꼬박 세배를 올렸다.

1946년 여름의 그 자리는 동생의 귀향을 알리는 새로운 자리였다. 분위기도 좋았다. 귀한 손님을 맞을 때 풍속대로 닭 국물로 만든 손칼국수가 대청마루 식탁에 올랐는데, 당시 만 19세이던 이진화씨가 동석했다. 박정희와 아버지 사이의 대화도 직접 들었다. 그날 이후 박정희는 이진화씨를 아끼고 좋아했는데, 벽진 이씨가 애국자 가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이진화씨의 할아버지(이우인)가 종중의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간 뒤 애국활동의 일환으로 ‘만주일보’를 경영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만주일보’는 혈서설에 등장하는 ‘만주신보’와는 다르며, 박준규 전 공화당의장의 6촌형 박인규를 전면에 내세워 만주 봉천에서 발행됐다.

애국자 집안 젊은이를 좋아했던 박정희가 아꼈던 또 다른 인물이 박일상(1923년생, 육군 소령 예편)이다. 구미 출신 박일상은 일본 릿쿄(日本)대 유학 중 1944년 1월 탈출해 광복군이 된 인물로, 박정희보다는 여섯 살 아래다. 그런 박일상과의 오랜 교유와 우정은 “만주군을 탈출한 뒤 광복군에 합류하려 했을 것”이라는 박정희 발언의 진실성을 간접적으로 가늠케 해준다.

“박일상은 당시 박부잣집 아들로 통했더랬습니다. 구미 시청이 있는 형곡동이 그의 집인데, 동네 사람들은 인물이 나온다면 박일상이라고들 생각했지요. 그렇게 자부심이 크고 많이 배웠던 박일상 형님은 박정희를 무척 존경했습니다. 깍듯하게 모신 배경에는 같은 젊은이였고, 생각도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셋이 자주 어울렸고요.”

박일상은 1947년 말 구미중학교 교사로 취직하기 전후해서 박정희와 우정을 다졌다. 1950년대 군에 투신, 소령으로 예편을 한 뒤 부산에서 활동했을 때도 어울렸다. 박정희가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재직하던 무렵이다. 둘은 1963년 총선 때 다시 얽힌다. 그가 야당 공천으로 구미 국회의원에 출마해 공화당 김봉환과 대결하는 구도였다. 이를 뒤늦게 안 박정희는 이진화씨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서로 뜻을 같이했던 사이가 엇갈릴 수 없으니 당장 출마 포기를 시키고, 원하는 걸 들어준다는 뜻을 전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선산에 내려가 제가 몰고 간 중앙정보부 지프에 그분을 태운 채 메시지를 전했더니 일상이 형님이 꺼이꺼이 흐느끼시는 거예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해서 그랬던 것이죠. 이미 당 자금도 꽤 끌어다 썼기 때문에 도의상 출마 포기는 안 된다는 건데, 저도 따라서 울었죠. 대통령께 그걸 보고하니 ‘박일상의 이력서와 신원조회 서류를 갖춰놓으라’고 지시하더군요. 그건 박 대통령의 스타일입니다. 언젠가 중용하겠다는 건데, 서류를 지금도 제가 모두 보관하고 있습니다.”

박일상이 박정희 집권 때 이렇다 할 공직을 맡은 기록은 없다. 하지만 둘 사이의 우정과 신뢰는 오래 유지됐다. 만주군 출신 박정희와, 학도병을 탈출한 광복군 박일상은 가는 길이 외양만큼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그의 아들 박찬규(54·부산 명호고등학교장)씨의 최근 증언과도 일치한다. 고인은 죽을 때까지 박정희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아들에게 종종 전했다는 것이다.

광복군 장준하와 만주군 출신 백선엽

물론 ‘만주군 중위 출신의 대통령’이란 해방 직후 신생 대한민국에 썩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었다. 항일투쟁 경력이야말로 정치적 정당성이 컸다. 바람 잘 날 없었던 친일파 논란에는 이런 아픔이 묻어난다.

그 점에서 박정희는 이런 모순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역설적인 인물이다. 2차 대전 이후 등장한 제3세계 지도자 중 박정희와 비슷한 이력을 가진 이는 없다. 유례없는 경제적 성공을 거둔 인물도 박정희가 거의 유일하다.

“박정희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만주군 장교가 되어 우리의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눴다.”

박정희에게 퍼부어진 그런 공격은 광복군 출신 장준하로부터 나왔다. 장준하는 학도병 징집 6개월 만에 광복군에 합류해 김구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잡지 ‘사상계’를 운영했다. 1967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 지지연설을 계기로 반박정희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그건 사실에 근거를 둔 비판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공격이었다. 이진화씨가 이번에 증언을 결심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본래 이씨는 박정희가 제1군사령부 참모장(소장)이던 1958년 6월을 전후해 박정희 사람으로 활동했다. 1군 산하의 병력 30만 명에게 제공되는 부식(반찬)에서 핵심이 되는 콩나물·두부공장을 맡은 사연도 그 맥락이다. 5·16 이후 중앙정보부 부산 부책임자로 내려간 이유도 마찬가지다. 당시 “중정을 보는 여론이 좋지 않아 다른 데서 근무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런 풍토를 바꿔라”며 강권했다.

결정적으로 그의 기여는 부산지역 밀수품을 근절한 점이다. 이순희·이진화씨 둘의 증언은 거의 기억의 물리적 한계를 넘나드는 수준이다. ‘살아있는 화석’으로 평가될 만큼 정교한 이 증언을 신뢰할 경우 청년 박정희의 삶의 ‘결정적 고비’에 숨겨진 진실 파악에 요긴해지며 진실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 때문에 20대 시절 박정희의 선택을 기회주의적이라고 비판하거나, ‘박정희=식민화된 군인’이라고 단정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가를 보여준다. 그런 그가 왜 하필 만주행을 고집했을까? 사실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생도 대부분은 만주 출신이었다. 이북 출신 약간 명을 빼고 이남 지역 출신은 박정희가 거의 유일하다.

사범학교 출신으로 군관학교에 입학한 케이스는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이다. 그는 평양사범을 나온 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3년간 의무적으로 교단에 서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했다. 이 경우 재학 시의 장학 혜택을 현금 500원으로 환산해 반납하라는 최후통첩까지 받았다. 백선엽은 당시 은행원·교사 등의 1년 연봉이 넘는 큰돈을 학교에 낸 다음 만주행을 선택했다. 그만큼 흔치 않은 기회였다. 최근 여러 차례 만났던 백선엽은 이렇게 말했다.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를 친일파라고 합니다. 일제시대 한복판에 한창 젊은 나이였던 우리 세대 중 몇몇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배웠다면서 그걸 탓하는 모양새인데, 우리가 그렇게 배우려 했던 건 알고 보면 참 눈물 나는 과정이었습니다. 중국어·일본어·영어 등 어학과 군사지식을 배우지 않았던들 해방 이후 어떤 전문가가 남아있었을까요?”

[필자는 문화평론가이며 ‘박정희, 한국의 탄생’의 저자다.]

조 우 석

“박정희의 과거 억측, 이제는 접을 때”
‘증언 이후’에 남는 의문과 반론
의문 1 린치 사건과 혈서설은 어떤 관계? 혈서설은 조갑제의 책에서 처음 등장했다. 만주군관학교 입학 연령 제한(16~19세)을 뚫으려고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을 다짐하는 혈서 편지를 만주군관학교 측에 보냈다는 것이다. 보낸 시기는 1939년 초다.

이걸 ‘전시하의 미담’ 기사로 다룬 ‘만주신보’ 보도가 그해 3월 31일자였다. 문제의 혈서설은 당시 문경초등학교에 근무했던 교사 유증선의 증언을 토대로 한다. 혈서설은 ‘설’에 불과하지만 정황적 증거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훗날 최고회의장 비서였던 이낙선이 정리한 1962년 자료에도 상당 부분 암시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혈서와 교무실 린치 사건은 어떤 관계일까? 둘은 당시 박정희의 삶을 설명하는 증거로 서로 보완적이다. 즉 교무실 린치 사건은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에 전혀 뜻이 없다가 돌발적으로 만주로 떠났다기보다 이전부터 준비해오던 목표를 앞당긴 계기다.

당시 혈서가 만주지역 신문에 보도됨에 따라 특별응시 자격이 주어진다는 식의 연락을 이미 받아놓았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배수진을 친 채 응시했을 것이다. 1939년 10월 만주군 6관구사령부현지에서 치른 입학시험에서 그가 15등으로 합격했다는 사실이 만주국 공보(1940년 1월 4일자)에 실렸다. 그걸 확인한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서류를 마무리했다고 보는 게 앞뒤가 맞는다.

문제는 우리의 인식이다. ‘만주신보’ 사본을 공개한(그래서 아직 진부 논란이 없지 않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혈서 자체를 소신파 친일의 명백한 증거로 보지만, 그 자체가 억측이다. 당시 나이 많은 시골 교사 박정희로서는 입학을 위한 편법으로 대일 충성의 수사(修辭)를 발휘했다고 보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즉 제스처에 불과했다. 교사 시절의 유다른 반일성향을 염두에 두자면, 면종복배(面從腹背)의 트릭이었다. 일제 앞에 복종하는 척하며 다른 꿈을 품었던 경우다. 박정희가 두 차례에 걸쳐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을 요즘 트집 잡는 이도 있지만, 이것도 면종복배의 사례로 풀 수 있다.

의문 2 광복군 합류, 과연 가능했을까? “만일 제가 광복군과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에 계속 몰렸더라면 광복군 진영으로 탈출을 했을 것입니다”는 말은 청년 박정희의 흉중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언이 분명하다. 그러나 의문이 없지 않다. 그게 혹시 ‘해방된 조국이라는 변화된 상황에서 꾸며진 자기변명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제 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광복군 대열에 합류한 경우는 장준하를 비롯해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씨, 그리고 경북 구미 출신의 박정희 고향 후배 박일상 등 꽤 많지만,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광복군에 합류한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 1944년 만주계 만주군관학교 출신 두 명이 장제스 군대로 탈출한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 일본 육사에서 위탁교육을 마친 박정희가 동기생들과 함께 만주로 막 돌아왔던 1944년 5~6월의 일이다. 자대배치 직전 견습사관 훈련을 받던 참에 터진 이 사건으로 박정희 일행은 꽤나 혹독한 대접을 받아야 했다.

또 박정희 동기생으로 같은 제8단(연대)에 소속됐던 만주군 소위 방원철도 자신의 미공개 회고록에서 “일본 패망이 뚜렷해진 당시 팔로군으로 탈출할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도 실행했던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박정희의 “광복군 진영 합류 용의” 발언의 공개로 친일파 논란이 완전히 수그러든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박정희의 복잡했던 속마음을 보여주는 증언으로 훌륭한 자료다. 그가 일제 말 상황에서 ‘식민화된 군인’이기는커녕 누구보다도 큰 심리적 불화를 겪었음을 보여주는 단서로 두고두고 음미할 만하다.

결론은 이렇다. 일제에 맞선 당시 조선 사람의 반일·생존의 방식은 크게 보아 1)무장투쟁형 반일주의 2)실력양성파 반일주의 3)노골적인 부일 협력 등 셋으로 분류된다. 물론 수동적인 관망파가 다수였을 것이다. 박정희는 이런 통념상의 분류를 크게 뛰어넘는다. 그를 ‘면종복배형 반일주의자’로 봐야한다.



그 이전 박정희는 만주에서 시험을 치른 게 분명하고, 직후 학교에 돌아와 서류를 정리했다. 문제의 린치 사건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2~3년 뒤 역전 드라마가 뒤따랐다.

“제가 여학교 2학년이던 무렵인데, 하루는 밥하는 아주머니가 흥분한 채 말해요. ‘읍내에 일본 경찰이 쫙 깔렸다. 옛날 그 일로 박정희 선생을 잡으러 온 것 같다’는 거예요. 부랴부랴 뛰쳐 나갔더니 아주머니 말과 달리 긴 칼 찬 박정희 선생님이 저쪽에 계시잖아요? 문경에 잠시 들른 것이겠지요. 지금도 선한 게 양쪽 어깨 붉은 견장 위에 달려있는 노란 별과 붉은 띠가 둘러진 모자 정중앙에 달린 노란 색 별입니다. 왼손으로 쥔 긴 칼은 뒤쪽으로 살짝 들어 끌리지 않게 했는데, 정말 위풍당당했지요.”

박정희의 극적인 문경 귀환은 다른 증언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순희씨 증언은 더욱 상세하다. 시내를 거쳐 예전 하숙집에 간 박정희가 정좌를 한 채 방문을 활짝 열었다. 옆에는 긴 칼을 뽑아 문지방에 콱 찔러 넣었다. 대단한 위용 앞에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서슬에 놀란 파출소장과 학교 교장(가토는 당시 타교로 전근을 갔고, 다른 이가 대신 찾아왔다),

그리고 면장 등 문경의 일본인 권력자 셋이 박정희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용서해 달라” “우리가 잘못했다”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그들을 한참 내려다보던 박정희가 한마디를 던졌다.

“됐다.”

그게 하이라이트이지만, 증언을 뒷받침해주는 스토리가 있다. 그로부터 꼭 20년 뒤 그는 ‘우리 선생님’을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4·19가 나던 1960년 한참 더웠던 여름 갓난아이를 등에 둘러 업은 채 당시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를 찾아갔고, 그 끔찍했던 옛일부터 회상했다.

“선생님이 그렇게 피투성이로 두드려 맞으신 채 사라졌는데, 저는 그날 그 일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석룡아, 내게는 군인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었단다. 군인이 아니면 도저히 행세할 수가 없었거든. 전부터 요시찰 인물로 찍혀 있었던 상황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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