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실 |
신정 |
성재 |
서재 |
가신 |
텃골 |
군머리 |
박실 |
다전 |
분지 |
중흥동 |
배정골 |
파청 |
덕산 |
양월 |
호동 |
상내 |
관기 |
전두 |
참샘이 |
서관기 |
동곡 |
안심 |
보흥 |
금평 |
강골 |
까치내 |
역전 |
유앵동 |
장서밭골 |
웃까치내 |
풀음 |
월평 |
노계 |
갈고지 |
조양 |
발금이 |
구룡 |
청암 |
선소 |
동막동 |
개산 |
고리 |
회룡동 |
호음동 |
용호동 |
석장 |
가장골 |
대화 |
학동 |
중산 |
고리골 |
마서 |
평촌 |
두터골 |
못골 |
풍경정 |
복재동 |
죽림 |
전남 보성군 득량면 행정단위 자연부락 유래
[쇠실(深松) : 득량면 삼정1리]
삼정리는 보성군 송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심송리, 신전리, 국치리, 성재리, 서재리를 병합하여 삼정리라 해서 득량면에 편입되었다.쇠실 마을은 조
선초기에 촌락이 형성되어 조선중기까지는 백씨, 강씨등이 거주하였으나 인조반정기 도원수인 김자점이 효종
왕 즉위부터 몰락해감에 따라 동족인 안동김씨가 은신키 위해 나주군 금천면(나주 소재지)에서 이주하여 지금
까지 안동김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신전(薪田) : 득량면 삼정2리]
신전(薪田)마을은 1569년 조선조 선조2년 진주정씨 진사 의 자손이 도촌면 마동리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
되었다.마을지명은 마을주위 전체가 율목과 나무가 많아 섶신(薪)자와 밭전(田)자를 따서 “섶밭몰”이라 불려오
다가 일제시대부터 신전(薪田)으로 불려오고 있다.
[성재(成才) : 득량면 삼정3리]
성재마을은 1822년 조선 순조22년에 청주한씨 한춘삼(韓春三)과 김해김씨인 김명선(金明先)씨가 함께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하고 있다.구전에 의하면 어느 노승께서 이 마을에서 백목상을 하면 재물을
이룬다고 하여 성재동(成財洞)이라 하였으나 한일합방후 마을 이름을 성재동(成才洞)이라 쓰여지고 있다.
[서재(書才) : 득량면 삼정3리]
서재마을은 1826년경에 진주강씨(晋州姜氏)가 정착하여 촌락을 형성하였다 한다. 구전에 의하면 본마을 위치
가 산자수려(山慈秀麗)하고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맑기 때문에 이곳에 어느 선비가 후진양성을 위하여 서재를
짓고 수년간 이어 왔다 하며, 그후로 마을이름이 서재라 불려지고 있다.
[가신(可信) : 득량면 송곡1리]
송곡리는 한때 보성군 송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신리, 기동리, 박곡리, 중흥리를 병
합하여 송곡면사무소가 있었으므로 송곡리라 해서 득량면에 편입되었다.가신마을은 조선초기 1543년경에 제
주양(梁)씨가 처음 터를 잡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지명은 마을 뒷산의 국사봉이 좌우로 뻗어
내려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으로 건설에 의하면 가신동 사람들은 거짓을 모르고 이웃끼리 상부상조를 잘한
다고 하여 인근 주민들이 이 마을을 가신동이라 하였다 한다.
[텃골(基洞) : 득량면 송곡1리]
가동마을은 조선초 1543년에 창년曺씨와 제주양(梁)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마을의
지명은 예부터 송곡면 행정의 중심지로 묘자리가 좋은 장소라 하여 기동(基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군머리(軍頭) : 득량면 송곡1리]
군두마을은 국도를 중심으로 1930년경에 최초로 밀양박씨가 마을을 형성하였다.마을의 지명은 마을 뒷산이 장
군대좌 형국으로 임진왜란 당시 아군의 전지와 작전본부로 사용했던 장소이며 아군의 우두머리가 이곳에 있었
다 하여 군두라는 이야기와 임진왜란 당시 아군의 진지 선두지점이라 하여 군두(軍頭)라 전해지고 있다.
[박실(朴谷) : 득량면 송곡2리]
박곡마을은 고려말엽 공민왕 워년 1352년 창녕曺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풍수지리설에 의하
면 보성군에 3대 명당중인 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을의 터가 좋은 곳이라는 뜻에서 한자 표기인朴字와 谷
자의 두자를 따서 박곡(朴谷)이라 하였다고 한다.
[다전(茶田) : 득량면 송곡3리]
다전 마을은 원래 박곡마을에 속하였으나 마을이 번창하여 1964년 행정구역을 분할하면서 다전(茶田)이라 하
였으며 예부터 마을의 뒷산에 다년생 차나무가 많이 서식하므로 다전이라 했다 한다.
[분지(分旨) : 득량면 송곡3리]
분지 마을의 형성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초기인 1410년경으로 추정되며 처음 본마을에 들어왔
던 사람들은 주로 박곡마을 부자집에서 일을 거들며 살았다고 전해지며 그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들어왔던
사람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조선시대 말엽 박곡마을등에서 몇몇 세대가 이주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마을의 형태가 사람의 손모양인 오지형이라 하여 분지라 하였다.
[중흥동(中興洞) : 득량면 송곡4리]
중흥동 마을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우리의 궁대가 왜군과 대전하고자 포진한 중군(中軍)의 진지가 이곳에
주둔한 데서 중군동(中軍洞)이라 불리워 졌으나 그후 언제부터인지 중흥동(中興洞) 또는 중동(中洞)으로 불려
지고 있다.
[배정골(梨亭) : 득량면 예당1리]
이정(梨亭)마을은 창원황씨(昌原黃氏)가 약 210년전 최초로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마을지명은 옛날에 마을앞
까지 배가 들어와 정박하였다 하여 배정골이라 하였으나 현재는 이정(梨亭)이라 불려지고 있다.
[파청(波靑) : 득량면 예당1리]
예당리는 본래 보성군 송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천리, 진천리, 적연리, 이정리, 파
청리, 덕산리, 동곡리, 호동리 일부와 조내면의 동곡리와 신촌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예장산의 이름을 따서 예
당리라 해서 득량면에 편입되었다.파청(波靑)마을은 약 250년전경에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지명은 마을 뒷산에 보살들이 절을 건립하였는데 절에 빈대가 많아 타지역
으로 옮기면서 마을이 폐할 것이라 하여 파청이라 하였다고 한다.
[덕산(德山) : 득량면 예당2리]
덕산마을은 약 270년전 탐진최씨(耽津崔氏)가 최초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지명은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 마을이 대성할 것이라 하여 덕산(德山)리하 불러지고 있다 한다
[양월(揚月) : 득량면 예당2리]
양월(揚月)마을은 여조의 관료 및 선비들의 몰락으로 이곳으로 피신키 위하여 180년경부터 은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음과 양이 상충되지 않은 안좌된 지세가 반월형(半月形)에다 현산(賢山)의 송림(松林)사
이로 일조(日照)와 월광(月光)이 충만하여 덕(德)과 부(富)를 겸비한 인재들이 배출될 것이라는 고승의 유지에
따라 양월(揚月)이라고 하였다 한다.구전에 의하면 마을 오른쪽산의 백호줄기에 흙이 빨갛게 보이면 큰 화재가
일어난다하여 항상 나무를 심어 붉은 산이 보이지 않게 푸르게 가꾸고 있으며 동풍이 강하게 불어 산이 울면
대홍수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호동(湖洞) : 득량면 예당3리]
호동마을은 조선조 초기 동북오씨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동쪽으로 조성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
고 남쪽으로 관기마을 서쪽으로 양월마을과 접하였고 북쪽으로는 방장산(方丈山)이 우뚯솟아 있으며 옛날에는
마을뒷산이 수림으로 울창하여 산짐승이 많이 서식하였는데 특히 여우가 많아 여쉬골으로 불러오다가 약 70년
전 일제시대에 마을이 물이 귀하고 빈곤하여 마을원로 김기섭옹께서 우리마을은 물을 얻어야 한다는 소원으로
마을명을 호동(湖洞)으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불러오고 있다.
[상내(上川) : 득량면 예당5리]
상내마을은 하동 정씨가 최초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나 1935년에 득량만 간척지 개발과 아울러 여러성씨가
살고 있으며 부락옆에 냇이 있는데 그 냇가로 바닷물이 밀고 올라왔다고 해서 상내라고 부르고 있다.
[관기(冠基) : 득량면 예당4리]
관기 마을은 옛날 한 고승이 고을을 지나면서 관터가 될 자리라는 예언을 하여 관터라 불리웠으며 그후 벼슬
(冠) 터(基)자를 써서 관기라 불리고 있으며 득량면에서 제일 큰 부락으로 국도2호선과 경전선 철도가 통과하
는 관계로 상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도시형태의 마을이다.1943년경 득량면 간척지사업이 완공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979년 소도읍 가꾸기 사업과 도로확포장, 주택개량 등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전두(田頭) : 득량면 예당6리]
전두 마을은 평산 신씨가 1930년경 최초로 마을을 형성하였다고는 하나 지금은 여러성씨가 모여 살고 있다.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큰 발이 있었는데 그 발머리에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전두라 불리워 지고
있다.
[참샘이(眞泉) : 득량면 예당6리]
진천 마을은 김해김씨가 1920년경 최초로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마을앞에 샘이 있는데 샘물이 맑고 맛이 좋다
하여 참샘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한자로는 진천(眞泉)이라 하고 있다.
[서관기(西冠基) : 득량면 예당7리]
서관기 마을은 일제 말엽까지 산야의 황무지로 되어 있어으나 1941년 일본이 세계 제2차대전을 일으키면서 슬
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뒷산 기슭에 신사당을 만들었던 곳이며 원래 예당4구에 속했으나 1978년 국도2호선 확
포장시 노변 주책을 개축하였고 1979년 예당 소도읍 가꾸기 사업과 취락구조 개선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예당
시가지가 형성되었고 1985년 예당4구에서 예상7구로 분구되었다.
[동곡(東谷) : 득량면 예당8리]
옛날 송곡면에 속했던 부락으로 송곡면의 가장 동쪽에 있는 골짜기라 하여 동실이라 불리웠는데 한자로 東谷
이라 하였다.이 마을은 김해김(金海金)씨가 처음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일제말 예당 간척지가 개발되
면서 번창하였다 하며 주민들은 개발된 간척지에 농업을 주업으로 영위하고 있으며 인심이 후하고 교육열이
높다.
[안심(安心) : 득량면 오봉1리]
안심(安心) 마을은 1937년 득량만 간척사업을 실시할 때 하동정씨(河東鄭氏)가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
성되었으며 득량만 간척지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어 한때는 80여호 된 부락이었으나 현재는 도시로 이주한
나머지 약 60여호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전원 마을이다.마을의 이름은 바다와 득량만 방조제를 앞에 두고 항시
불안하다 하여 이를 스스로 위안하는 뜻에서 안심촌이라 하였다.
[보흥(寶興) : 득량면 오봉2리]
보흥부락은 득량면 소재지로부터 3.7km 떨어진 동쪽에 위치하고 예당으로부터 1.5km 떨어진 남쪽에 자리잡
고 있다. 뒤로는 경전선 철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마을 중앙으로는 득량면, 조성면, 고흥군, 대서면 사이에
1,700 정보의 농경지에 이용되고 있는 농업용수로가 지나고 있으며 1927년 고흥군 대서면과 보성군 득량면 사
이의 재방을 막은 후에 형성된 논을 경작하기 위하여 흥업주식회사가 이주민 주택 27동, 가주택 9동을 건립하
여 1937년 3월 각처에서 이주하여 온 주민들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37년 3월 흥업주식회사가 관여하는 주택으로 입주하여 부락은 형성되었으나 부락의 이름이 없어서 황순일,
선갑원, 송기옥 등의 선생들께서 서봉이라고 작명하였고 그 명칭을 사용한 후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1938년 1
월 황순일, 선갑원, 송기옥, 윤태언 등 유학자들이 다시 의견을 모아 보성군을 의미하는 보배 보(寶)자와 흥업
주식회사를 의미하는 흥할흥(興)자를 사용하여 보성군내에서 가장 흥한 부락이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보흥이
라 하였다.
[금평(金坪) : 득량면 오봉3리]
금평 마을은 득량만 간천지가 형성되는 1930년대 중반에 옆 마을인 초암(草岩)에서 김해김시(金海金氏)가 이
주하여 처음으로 부락이 형성되었으며 간척지의 농경지를 경작하면서 차츰 부락민이 늘어나고 마을이 이루어
졌다.이 마을의 지명은 득량만 간척지가 형성되어 농사를 짓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들이 금싸라기와 같은 많은
곡식을 생산한다는 뜻으로 금평(金坪)이라고 명명하였다 한다.
[강골(江洞) : 득량면 오봉4리]
강동마을은 약 950년전 양천 허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후 원주이씨가 500년동안
거주하였고 광주이씨가 이곳에서 정착하게 된 것은 400년 전이다. 이 마을의 죽송이 울창하고 바닷물이 이곳
까지 들어와 백로가 서식 한다하여 강동이라 하였다
[까치내(鵲川) : 득량면 오봉5리]
작천 마을은 약 250년전에 양천 허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곳 오봉산에 백작포란 지굴
이 있어 7월 7석이면 까치가 견우와 직녀를 상봉하도록 다리를 놓아준다는 고사와 오봉산 상봉에 오작교라는
바위가 냇물을 건너가는 노디돌처럼 생겼다 하여 까지작(鵲) 냇천(川) 자를 사용하여 작천(鵲川)이라 했다 한
다.
[역전(驛前) : 득량면 오봉6리]
역전 마을은 1929년에 철도가 개통되면서 역과 마을이 형성되어 철도역이 있기에 역전이라 하였으며 득량사무
소와 각급 기관이 들어서면서 득량면 행정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유앵동(柳鶯洞) : 득량면 오봉6리]
유앵동 마을은 약(350~480)여년전에 전주이씨(全州李氏) 탐진최씨(耽津崔氏)가 처음 정착을 하여 부락이 형
성되고 나서 1800년경 고성이씨(高成李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이주하여 지금에 이르
고 있다.이 마을은 버들유자(柳)자와 꾀꼬리앵(鶯)자를 따서 유앵동이라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송곡면에 있다
가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1914년에 송곡면과 도촌면을 통합하여 득량면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득량면 오봉리
6구에 편입되었다.
[장서밭골(長田) : 득량면 오봉7리]
장전 부락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1935년경 처음 정착하면서 형성되었으며 한 풍수가 부락터를 잡으면서 산
의 지형이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국으로 이곳에 터를 잡으면 당대에 만석을 이룰 것이라 하여 장서밭골
(長田)이라 불리우고 있다.
[풀음(草岩) : 득량면 오봉8리]
초암(草岩)마을의 형성은 구한말인 1900년대 초반에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처음으로 마을을 이루었으며 1930
年代 중반에 득량만 간척지가 형성되면서부터 여러 성씨가 이주하여 마을이 번창하였다. 마을의 뒤편과 좌우
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늘 푸르름을 유지한다는 뜻으로 초암(草岩)이라 한다.
[월평(月坪) : 득량면 해평1리]
월평마을은 1933년 득량만에 간척지가 조성됨으로서 최초로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입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었
다. 1950년경 해경 유림들이 모여 득량에서 보면 이곳이 달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월평(月坪)이라 전한다.
[노계(蘆溪) : 득량면 해평1리]
노계마을은 1934년 김해김씨 김건융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부락의 뒷산이 늙은 닭의 형
태를 하고 있어 노계촌(老鷄村)이라 한다.
[갈고지(起南) : 득량면 해평2리]
기남 마을은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던 곳으로 남쪽에서 일어난 절이라 하여 기남사라 칭하였다. 절이 들어서면
서 마을이 생겨 기남이라 하였는데 소깔이 많다하여 깔고지라고도 불러지고 있다.
[조양(朝陽) : 득량면 해평3리]
조양 마을의 형성은 영조 甲 年에 장흥군 장흥읍 행원에서 장흥위씨(長興魏氏) 위기조(魏基祚)란 분이 입향하
고 정조 2년에 장흥군 장동면 전곡에서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우성(金羽聲)이란 사람이 들어와서 마을을 형성
하였다고 전한다.
발금이(金陵) : 득량면 해평4리]
발금이 마을은 400여년전 하동정씨(河東鄭氏) 김해김씨(金海金氏)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정착하여 마을이 형
성되었다.이 마을은 바닷가에 인접하고 있는 마을로서 고기잡이 발을 바다에 쳐서 돈을 얻는다 하여 발금이라
하였고 그후 일제시대인 1910년경에 금능(金陵)이라 하였다.
[구룡(九龍) : 득량면 해평5리]
구룡마을은 약 17600년경에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지명은 마을 뒷산이
아홉 용이 누워있는 형태라 하여 구룡(九龍)이라 했다 한다.
[청암(靑岩) : 득량면 비봉1리]
청암아을은 고려중엽인 1250년경에는 탐진최씨와 추씨(秋氏)가 생활하였으나 조선중엽인 1500년경에 밀양박
씨(密陽朴氏)가 들어와 살면서 자작일촌을 이루고 있다.이 마을은 득량만과 접하고 있어 멸치 어장이 성하고
고막, 바지락등의 양식장이 있어 소득증대에 크나큰 힘이 되고 있다. 청암마을의 지명은 옆산에 푸른색의 큰
바위가 있어 청암이라 불렀다 한다.
[선소(船所) : 득량면 비봉2리]
선소마을은 조선시대 최초로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마을의 지명은 1590
년 이순신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무기와 군량을 모으고 병선을 만든 곳이며 병졸들이 주둔하여 훈련한 곳으로
예부터 선소(船所)라 불려오고 있다.
[동막동(東幕洞) : 득량면 비봉1리]
정흥리는 한때 보성군 도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개산리, 동막리, 호흠리, 고리 일부지
역을 병합하여 정흥산 및 이 되므로 정흥리라 해서 득량면에 편입되었다.동막동(東幕洞)은 조선시대 진주정씨
(晋州鄭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지명은 정흥리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동막골이라 하였다
고 전한다.
[개산(開山) : 득량면 정흥1리]
개산(開山) 마을은 1800년경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최초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마을이름은
산을 개발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하여 개산(開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고리(古里) : 득량면 정흥1리]
고리(古里) 마을은 1700년경에 하동정씨(河東鄭氏)가 최초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마을의 지명은 가
장 오래된 부락이라 하여 고리(古里)라고 하였다 한다.
[회룡동(回龍洞) : 득량면 정흥1리]
회룡동 마을은 보성선씨(寶城宣氏)의 장노께서 1788年 회룡고조의 명지를 찾아 이곳에 은거하면서 마을이 형
성되었다.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의 지맥이 빙돌아 본산과 서로 대하는 회룡고조(回龍顧祖) 형국으로 되어있
어 회룡동(回龍洞)이라 한다고 한다.
[호음동(虎吟洞) : 득량면 정흥2리]
호음동 마을은 고려말엽에 보성선씨(寶城宣氏)가 송도에서 낙향하여 이곳에 기거 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지명은 마을 뒷산이 호랑이 형국으로 되어있으며 정흥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라해서 호음동(虎吟洞)이라
고 한다.
[용호동(龍虎洞) : 득량면 도촌1리]
용호동(龍虎洞) 마을은 약 300년 전에 장수황씨(長水黃氏)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마을지명
은 마을 옆에 범 형국의 범 바위와 용바위가 있다 하여 용호동(龍虎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석장(石庄) : 득량면 도촌1리]
도촌리는 한때 도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산리, 용호리, 석장리, 대화리, 월산리, 회
룡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촌면사무소가 있었으므로 도촌리라 하여 득량면에 편입하였다.석장(石庄) 마을은 조
선말엽인 1690년경에 진주정씨(晋州鄭氏)와 보성선씨(寶城宣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가장골(可庄洞) : 득량면 도촌1리]
가장골(可庄洞)은 약 210여년전 평택임씨(平澤林氏)가 정착하여 촌락이 형성되었다. 이곳은 전해 내려오는 말
에 의하면 아주 고요하고 사람사는 터로 가능하다 하여 가장(可庄)이라고 하였다 한다.구전에 의하면 장군바위
에는 장군이 출생할 때 무릎을 꿇고 낳았다는 흔적과 생모가 먹었다는 미력 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화(大化) : 득량면 도촌1리]
대화(大化)마을은 조선중엽인 1610년경에 평택임씨(平澤林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마을지
명은 지형이 큰 새우가 구부리고 있는 형태여서 대하(大蝦)라 불러오다가 현재는 대화(大化)라고 한다.
[학동(鶴洞) : 득량면 도촌1리]
학동마을은 고려말 1290년경에 보성오씨(寶城吳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뒷산이 백학형국
(白鶴形局)으로 되어 있어 학동(鶴洞)이라 한다고 전한다.조선시대 중기에는 본마을에 약 1,000여호가 살았다
고 하여 물물교환하는 장이 섰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세도가들이 너무 교만하여 어느날 노승이 시주차
들렸으나 세도가가 하는 말씀이 똥장군 속에 마음껏 가져가라고 해서 노한 스승은 백학사에 있는 사진바위를
부수어 버리면 이 마을이 흥할 것이라 하자 마을 사람들이 헐어 버린 후 폐촌이 되었다 한다
[중산(中山) : 득량면 도촌2리]
중산마을은 조선중엽인 1610년경에 남양송씨가 자가일촌일 이루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지명은 마을 뒷
산이 들 가운데 있었다 하여 중산(中山)이라 하였다.
[고리골(馬東) : 득량면 마천1리]
고리골 마을은 중종21년인 1526년에 진주경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뒷산이 목마른 말이 물
을 마시는 형국을 이루었고 마을 건너편이 냇물이 있어 마천동(馬川洞)이라 하며 또하 마을 형태가 고리처럼
생겼다 하여 고리골이라 한다.
[마서(馬西) : 득량면 마천1리]
마서(馬西)마을은 중종 21년 1526년 진주정씨(晋州鄭氏)k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다. 마을 뒷산이 목마
른 물을 마시는 형태를 이루고 건너편에 냇물이 있어 마천동(馬川洞)이라 하며 마을이 서쪽에 위치한 부락이라
하여 마서라고 한다.
[평촌(坪村) : 득량면 마천1리]
평촌(坪村)마을은 400년전에 최초로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다. 본 부락은 들판의
가운데레 위치하고 있어 평촌(坪村)이라 불러오고 있다.
[두터골(蟾洞) : 득량면 마천1리]
두터골(蟾洞) 마을은 1526년경에 진주정씨(晋州鄭氏)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앞에 두꺼비 바
위가 있어서 두터골 또는 섬동(蟾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못골(池東) : 득량면 마천2리]
1600년경 정보봉의 둘째 아들 정원이 마천리에서 지동부락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마을 앞에는 큰 못
이 있어 사계절 물이 풍부하고 깨끗하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해 식수로 사용했다 해서 지동(池東)
이라 하였다.
[풍경정(風景亭) : 득량면 마천2리]
풍경정 부락은 약 370년전에 진주정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이곳에 정각이 있었으며 이곳의 경치
가 매우 아름답고 산의 형체가 소리나는 핑경과 같다고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복재동(福在村) : 득량면 마천2리]
복재동 마을은 약350년 전에 경기도 광주에서 득량 청암에 이거한 박만말의 5대손 박한진이 청암에서 이주하
여 부락을 형성하였다.이 마을에 있는 말매등은 꿩이 엎드려 있는 형태(복치형국)로 꿩이 알매등에 알을 낳았
다 하여 복재동이라 전해진다
[죽림(竹林) : 득량면 마천3리]
고려말엽부터 조선초기에 조양임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주위에 죽림과 약 400년 이상 느티나무
가 무성하여 죽림이란 마을명이 유래하였다 한다.본부락은 정 남향으로 청룡 백호령이 부락을 감싸고 있어 동
절기에는 온화하며, 하절기에는 남풍이 불어 시원한 위치이며 특히 수원이 풍부하여 영농에 장애가 없는 전원
마을이다. 끝
죽림(竹林) (득량면 마천3리]
기본현황
인구[명] |
가구[호] |
면적[ha] | |||||||||||||||
계 |
남 |
여 |
계 |
농가 |
비농가 |
계 |
전 |
답 |
임야 |
기타 | |||||||
산업 |
성씨[호] | ||||||||||||||||
주산물 |
특작물 |
주소득원 |
조양림 |
경주이 |
탐진최 |
기타 | |||||||||||
• 고려말엽부터 조선초기에 조양임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주위에 죽림[竹林]과 느티나무[당산
나무]가 무성하여 죽림이란 마을명이 유래하였다 한다.
본부락은 정 남향으로 청룡 백호령이 부락을 감싸고 있어 동절기에는 온화하며, 하절기에는 남풍이 불어 시원
한 위치이며 특히 수원이 풍부하며 영농에 장애가 없는 전원 마을이다.
이마을에 있는 고목으로는 부락 앞에 느티나무[수령: 약 400년, 수고 25m]가 있으며 이나무는 약 400년전에
주씨[朱氏]가 거주하면서 식수하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주정자[주정자]라 불러지고 있다.
이 마을 배출 인물로는 임여홍[林汝洪 • 득량면장 역임]씨가 있다.
이고장의 특정 지명은 다음과 같다.
• 바람재 : 죽림에서 미력면 초당리로 가는 고개
• 범바우골 : 죽림 서쪽에 있는 골짜기, 범 바위가 있다.
• 죽림앞 : 풍경정(風景亭)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산의 형체가 소리나는 핑경마을이 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