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소금: 자신만이면 저주 |
소금기둥-창19:26, 소금땅 신29:23 |
*자신을 나누어 음식의 맛을 피움. |
하나님의 형상: 자신을 희생하여 창조-섭리 이루심 우리의 존재 본성 예) 연주자. ‘무아’ |
자 이제 오늘 소금과 빛으로 들어가 봅시다. 소금의 메시지는 아주 간단하죠. 소금은 자신만이면 져주지요. 성경의 소금은 자신을 나누어서 음식의 맛을 피우는 거지요.
우리가 짠맛 그러지만, 이거는 언어지요. 언어. 짠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그 맛을 표현하는 언어의 불과해요. 소금의 진정한 맛이 뭐예요?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음식 맛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을 나누어서 음식 전제의 맛을 피우는 거죠. 그런데 이 소금이 소금 자체로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전부가 저주입니다. 소금기둥, 저주입니다. 소금땅, 저주입니다. ego는 우리에게 이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 뿐이면 그건 저주입니다. 아닙니까?
남편과 아내가 있는데도 진정으로 교통이 없고 나는 나, 너는 너. 그러면 저주입니다. 이 소금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쓰시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만유에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 안 계십니다.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 모든 것에 나누어졌기 때문에 만유 속에 하나님이 충만한 것이지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더이상 없는 것이지요. 새 예루살렘에서 이것이 우리의 존재 본성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본성입니다.
우리는 지키는 삶도 필요합니다. 움켜쥐는 삶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뿐인 삶은 참으로 안타깝고 어리석습니다.
연주자의 연주가 모두를 감동시킬 때가 언제입니까? 무아. 그 연주 속에 자기를 잃었을 때입니다. 연주자의 ego가 펄펄 살아서 잘해야 된다. 감동시켜야 된다. 그게 감동이 되겠습니까? 그 음악은 저주에 가까울 것입니다.
2. 저주: 하나님 형상의 시효 소멸 |
만물이 나, not 자기 자신만 |
예) 소금 인형. |
제가 그 소금 인형 얘기를 해 드렸는데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가장 영적인 이야기 다.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금 인형이 있었어요.
수만 리를 여행해서 바다에 도착했습니다. 바다에 딱 도착하는 순간 알았어요. 내 고향이다. 그래서 바닷물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소금이 점점 녹아버립니다. 간단한 얘기죠. 그러나 소금이 없어진 건 아닙니다.
두 가지가 이루어졌습니다. 소금이 녹을 때 다 녹아 없어질 때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소금의 결정체는 남았습니다. 진정한 나 됨이 비로소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녹아졌을 때 소금은 이미 바다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된 것이지요. 저주는 결코 녹을 수 없는, 끝까지 나만. 나뿐이고,
민주 엄마라는 그 민영이가 다 회고하는 고백들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엄마는 그렇게 자식을 사랑했는데도 엄마가 아니었습니다. 엄마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삶의 안식과 열림을 결코 나누어 주지 못했습니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삶에 대한 두려움만 잔뜩 줬습니다. 네가 너를 지키지 못하면 넌 아무것도 안 돼. 모든 사람에게 무시 받을 거야. 엄마의 뜻과 정반대가 된 것이죠.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창4;11 |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기 되리라. 창4:12 |
이것이 ego가 우리에게 하는 일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이 자아를 지키기 위해서 아우를 죽이기까지 한 가인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말합니다. 너는 땅에서 저주를 받은 삶이 되었어.
그런데 그 저주의 내용이 뭡니까?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끝까지 자기를 감춥니다. 자기의 진심은 작은 것도 얘기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길은 어떻게 하든지 피합니다.
광야길 십자가길 얘기는 어떻게 하든지 피하려고 합니다. 말을 어떻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자신을 열어 본적도, 항상 컨트롤 된 자기뿐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데 이게 피어나야 되는데 이게 피는 기쁨을 모르는 항상 에고로 컨트롤 된,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까운 삶입니다.
이제 눈치가 좀 생겼습니다. 제가 7월 마지막 주, 8월 첫 주 이 두 주간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흔적들을 보면 이제는 눈치가 좀 생겼어요. 물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다 받는 건 아니지요.
이상한 이야기지만 받는 사람이 받는 것이지만은 이 산상수훈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 끝까지 나를 멸망시키고 거짓으로 허무케 하는 이 ego의 권세에서 자유 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말씀 만나기 | 피하고 유리하기의 끝 |
나의 진정한 정체성 열림 | |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 |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
말씀을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말씀이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피하고 유리하기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이 거짓된 나를, 거짓은 회개를 못 합니다. 사기꾼은 회개할 수 있어요. 거짓은 회개가 안 돼요.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전부 거짓으로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내 얘기 중에 하나도 진실이 없어요.
우리가 서로 뭐 얘기를 나눠. 뭐라고 나누지만은 그건 다 자기 가리고 나타내고 그 컨트롤 작업이지 진정한 내가 나눠지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아무런 정죄와 판단이 없는, 어떤 정죄도 없는, 이는 내 사랑하는 자여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거짓밖에 없는 나를 조금도 정죄하지 않으시는,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이 나를 너무 좋아하셔서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이 가슴을 만날 때까지 나는 나를 모릅니다. 나는 내가 열리지 않습니다.
이 산상수훈의 말씀은 제가 지금 보니 그냥 말씀이 아니에요. 정말 천국 말씀이고 예수님의 중심이고, 이걸 지나가는데 못 만난다면 이건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는 생각이 듭니다.
3. 소금=하나님의 형상=만유의 특징 |
오직 서로 通으로만 존재함. |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소금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형상이지요, 자기를 나누어서 만유와 통하게 되는, 자기를 나누어서 내가 만유와 하나가 되고 만유가 나와 하나가 되는 이런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지키고자) 하는 자기뿐이면 결국은 자기를 자기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여기 나를 위하여는 예수님의 생명은 만인을 위하여 나누어진 생명이지요. 그 나눔 속에 나를 이루시면 그것이 진정한 나를 소금 인형이 녹았을 때 진정한 자기를, 자기의 결정체와 동시에 바다임을 만난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것이죠.
4. 빛 | 본질계의 현상계로의 전환 기점 |
항상성-가감 변형 불가한 본질 | |
숨겨지지 못함. 집 안 모든 사람에게 |
빛은 본질계가 현상계로 전환되는 지점입니다. 자! 본질은 보이지 않습니다. 본질이 현상으로 나타나리라고 하면 빛이 있어야 됩니다. 빛이 없으면 없어요. 지금 우리 서로 이렇게 보는 것도 없고, 꽃이구나 하는 것도 빛입니다.
그래서 빛은 본질이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전환 기점이죠. 빛이 나타나면 숨겨지지 않아요. 그 빛에 가시권, 집안에 등불을 쓰면 그 빛에 가시권 안에 모든 사람에게 이 빛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이 빛이 바꿀 수가 없어요. 가감할 수도 없고 변형도 되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항상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하나님의 형상이 본질은 우리가 더하고 뺄 수도 없고 우리가 더 만들고 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 자체로 우리가 누릴 뿐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가 한 번도 우리에게 물론 멋진 삶을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잘 살아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옳아야 된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하고 함께함으로 내가 너에게 준 생명이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 네가 기뻐하면 네가 그걸 눌릴 때 내 기쁨이 충만하지. 그런 것입니다.
14절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 한다. |
City : polis |
동네가 숨겨지지 못한다는 이 말씀을 우리가 많이 나누었는데 저 동네라는 단어는 폴리스 간단합니다. 시팁니다. 옛날에는 영주와 권력자들은 산 위에 살았죠. 성을 쌓고.
노동자 농민 노예는 평지에 살았어요. 농사짓고 일을 해야 되니까. 적이 쳐들어오면 이 노동자 농민 노예가 사는 땅은 완충지대. 여기가 제일 먼저지요. 성이 함락되면 다 함락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산 위에 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도무지 평지에 있는 사람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무언가를 하는데 대부분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해요.
그 그런 그 사회 속에서도 빛이 임하면 그것조차도 숨겨 줄 수가 없다. 빛이 임하는 곳에 하나님의 그 본질적 형상이 드러난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빛은 드러나게 합니다.
*빛: 드러나게 하는 것 |
종교는 길, 진리 생명을 감춘다. |
이 빛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생명이 빛이 되면서부터 우리의 본질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종교는 왜 있습니까? 감추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 빛을 살고 싶지 않거든요. 광야의 길과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은, 부담스럽거든요. 진리는 너무나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감출 수 있는 길이 종교입니다.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마태복음은 23장에서 종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7번 저주를 합니다. 그 저주의 내용들이 다 무엇입니까? 천국 문을 닫고 자기도 안 들어가고 당연하죠. 다른 사람 못 들어가게 합니다.
마태복음은 교회 교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유일한 복음서입니다. 교인 한 사람 얻으면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합니다. 종교인들은 잔인합니다. 왜 잔인한 줄 아십니까? 살지 않기 때문에, 말만 하기 때문에, 사는 사람은 삶의 아픔과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잔인해지기가 어렵습니다.
종교인들은 싸움 나면 서로를 사탄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수준이에요. 어떻게 사람을 보고 사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얘기도 있잖아요. 둘이서 막 싸웠는데 10년 후에 그 슈퍼마켓에서 만났는데 싸우는 이유가 피아노를 단상에 올리자 내리자 때문에 싸웠는데, 야! 네가 내리자 그랬냐? 내가 내리자 그랬냐? 그랬다는 얘기 아니에요.
이렇게 한심한 것입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겉은 깨끗하죠. 종교인 들이야. 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사람이 안 볼 때는 무슨 짓을 하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
예수님의 최종 결론이 뭐였습니까? 바라갸의 아들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그 모든 의인에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2746
사랑하는 성도님들! 저나 우리는 지금 다 종교인들입니다. 종교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종교에 머무르시면 안 됩니다. 여기 종교 우리 義 챙겼잖아요. 우리 입장 체면 다 챙겼잖아요. 불편할 게 뭐 있어요? 그냥 살면 되지요.
그러면 안 됩니다. 종교는 넘어가야 됩니다. 이 종교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왜? 우리를 종교 속에 들어가게 했을까요? 종교에서 내가 가짜인 것을, 그것도 악한 가짜인 것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끝마다 하나님 은혜, 사랑, 할렐루야! 그럽니다. 내 삶의 본질은 세상 사람보다 다르지 않습니다. 다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의하면 더 외식 적입니다. 훨씬 더 위선적입니다. 그래서 종교에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끝까지 그러고 있든지 아니면, 나 같은 가짜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내 거짓에 하나님까지 우리는 사용하잖아요. 깨어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종교: 머무르지 말고 넘어가야 한다. |
그래서 하나님이 종교를 섭리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죠. 우리는 넘어갑니다. 우리 기북교회는 이걸 넘어가려고 어려운 길을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넘어갑니다.
16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
생명 본질: 하나님 형상. 요1:4 |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
좋았더라. 형상화된 본성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
산상수훈 17회: 우리의 본성=하늘 본성 |
들리게 하라. (아버지의 본성의 현현) |
총 결론은 16절에서 이같이 너희 위치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너희 빛을 비추는 본질의 형상이라 그랬죠? 이 빛은 사람들의 생명이라. 그 하나님 형상이 본질이 피어나면 사람들이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착하다는 말이 창세기에 좋았더라. 토브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 삶에서 나타나면서 하나님의 좋았더라를 현상화 되었으니까. 사람들이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마태복음에 독특한 표현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또는 하늘 아버지 또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 뭐 이렇게 나오는데요. 이게 산상수훈에만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만 17번이 나와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마가복음에는 딱 한 번 나옵니다. 마가복음에는 전체에 한 번 나와요. 그런데 산상수훈에서만 17번 나옵니다.
지금 마태는 무슨 얘기를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DNA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를 보고 뭘 잘해라 이런 것이 아니다. 그런 말이지요.
Ⅱ본질계(말씀)와 현상계(천지) 17-20절 |
그다음에 이제 이 말씀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나오죠. 이건 본질계와 현상계에 그 얘기를 하는 것이죠. 간단한 내용입니다.
17절 성경은 폐해지지 않는다. 반드시 완성 됨 |
18절 천지는 없어지지만, 말씀은 일점도 아니다. |
19절 천지 전체도 본질의 일 점만 못하다. |
20절 천국 자녀의 의 <<< 종교인의 의 |
17절 성경은 말씀은 페하지 않아요. 말씀은 본질이니까요. 질량 불변의 법칙. 에너지 불변의 법칙. 본질은 가감도 안 되고, 반드시 그대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천지는 없어지지만, 말씀에 일 점도 없어지지 않아요. 천지는 없어져도 본질에 일 점도 없어지지도 바뀌지도 않죠. 그래서 천지 전체가 본질에 일 점만 못 해요.
물리학적으로 이제는 우리가 다 알잖아요. 어디서 나왔어요? 빅뱅. 빅뱅의 포인트가 바늘 끝에 억만분의 하나도 안 돼요. 그러니 바늘 끝에 억만분의 1도 안 되는 그 본질은 전체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이죠.
결론이 천국 자녀의 義. 하나님의 DNA가 나타난 것은 종교인의 義 제가 부등식 부호를 세계를 붙였는데 스페이스가 더 있어서 몇 개 더 붙일 걸 그랬어요. 한 일곱 개쯤. 그래도 우리 지금 상대가 안 되는 거를 뭐라 그랬어요? 종교회의를 배설물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것이지요.
주의: not, 영웅, 성인 |
but 사람임=enpthy |
공감-너처럼-그냥 아픈 것. |
예) 자식이 부모의 아픔을 느낄 때. |
자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셔야 되는데. 이게 기독교 안에서는 이제 소금과 빛 그러면 신앙적으로 특별히 뛰어난 사람, 어떤 사회 윤리의식이 특별히 뛰어나서 사회에서도 소금 역할, 빛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처럼 가리킵니다. 아니에요. 영웅이나 성인이 되어 가는 건 아닙니다.
그냥 사람이 사람이면 된다는 거지요. 사람이면, 민주 엄마가 자기하고 그렇게 친했던 그 친구의 딸을 입양해서 무슨 훌륭한 어머니가 되는 게 아니고요. 그냥 사람이 없더라고 엄마 아빠를 졸지에 잃어버린 그 딸의 아픔을 조금만 느껴졌더라면 전혀 예기가 달라지는 거야.
이 사람임은 다른 말로 하면 공감이요. 엠프티=(EMPATHY) 우리 기북교회는 공감을 잘 아시죠. 너의 아픔을 내가 아프게 느끼는 게 공감이요. 그거 가지고 안 돼요. 너가 느끼듯이 나도 느껴야 돼요.
그런데 그거 가지고 또 안 돼요. 너가 아파하는 걸 나도 아파하는데 그게 옳은 일이기 때문에, 그게 나의 義기 때문에 아파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아프니까 왠지 나도 아파. 이게 사람 됨이에요. 그래서 종교는 영웅화시켜요. 지금 기독교 예수 베드로 바울 다 영웅이요. 신앙의 영웅입니다. 하나님은 영웅을 만들지 않아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사울과 다윗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요? 사울은 영웅의 돼야 하는 사람이에요.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 성경 기록으로 보면, 다윗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울의 결정적인 약점이 뭐요? 영웅이 돼야 돼.
그래서 적병이 쳐들어오고 사람들이 모였는데 제사를 못 지내니까 사람들이 동요하는 거예요. 자기도 불안해 어쩔 수 없어 기다려야 해. 약속했으니까. 기다려야 돼. 그런데 백성들이 약해졌는데 자기까지도 무기력한 사람이 될 수 없어. 자기가 탁 나서서 재사를 인도 해야 돼.
믹마스 전투에서 블레셋이 쳐들어오니까 도망갔어요. 요나단은 밑에서 기다려요 싸인이 없으니까. 요나단이 블레셋을 직접 치고 들어갔는데 승리하기 시작했어요. 도망갔던 사울이 다시 왔어요. 뭐라 그랬어요? 해지기 전에 밥 먹는 사람은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왜 그런 명령을 내려? 도망갔다. 돌아왔지만 왕으로서 권위를 세우는 게 중요합니다. 이 사람 자살했어요.
전쟁에 패해서 적군에게 죽었다. 이런 말은 듣기 싫은 거지요. 그래서 자살했어요. 자살은 EGO가 가장 강한 상태요. 자살에 대한 교리가 있지만 저는 교리적인 건 중요하지 않지만,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내 EGO가 극대화된 상황이라 그것만큼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자살하는 분들을 정죄하시면 안 돼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러겠어.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어. 내가 그렇게 됐을 때 나는 안 그런다고 보장하실 수 있어요?
왜? 같이 아파하고, 위해서 기도할 뿐이지, 판단하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런데 다윗은 영웅 의식이 없는 사람이에요. 도망가면서도 왕권 내려놓고 가는 사람. 도망가는데 시므이가 나와서 저주해요. 자기 최면 안 지켜요. 장군들이 가서 저거 죽이고 오겠습니다. 예! 하나님 허락하지 않으면 저 사람이 나를 저주할 수 있니? 압살롬을 이기고 승리를 했어요.
그런데 어린애 같이 웁니다. 왕에 권위가 중요해요? 아들을 잃은 슬픔이 중요해요? 모든 얘기에서 한 사람은 영웅이 되려고 하고, 한 사람은 그냥 그냥 사람이에요. 그래서 다윗의 얘기를 읽으면 사랑스러움이 있어요. 사울의 얘기에 비해서 짧지만 별로 기억이 안 돼요. 그래서 오래오래 기억이 돼요.
2. 종교: 영웅화 (예수 베드로, 바울 등) |
* 사울(자살) VS 다윗(영원한 위) |
* NO 영웅 THEN NO 악한 |
*사람임을 보면 미워할 수 없다. |
자! 우리 얘기는 달력에서 훨씬 잘 알지만 별로 기억이 안 돼. 그 참 인간은 이상합니다. 그 영웅을 꼭 만들어요. 슈퍼맨이 있기 위해서 굉장히 악한 사람이 하나 꼭 있어야 돼.
스파이더맨이 있기 위해서 이상한 하나가 생겨야 돼. 그럼 영웅이 없으면 악한도 없잖아요. 그런 얘기는 항상 불편해요. 왜냐하면, 악한은 항상 못생겼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 편입니까? 표정이 왜 그래요?
그리고 여자들도 마음에 안 들어. 꼭 슈퍼맨, 스파이더맨 편입니다. 그 어쩔 수 없이 악당 역할을 해야 되는 그 사람도 불쌍하잖아. 나 같으면 그 사람 편이 좀 돼 줄 것 같은데 절대로 아니야. 그게 세상이에요. 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기에서 사람이 피어나요? 사람임이 보이면 미워할 수 없어요. 아무리 미운 사람도 나도 연약한 사람이고. 너도 연약한 사람이구나. 이게 보이면 미워할 수가 없더라고요.
Ⅲ 진리의 역설 PARDOX |
진리의 역설이 있어요. 파라독스. 소금과 빛 얘기에서 우리는 아주 의미심장한 하나님의 도전을 받아요. 나에 사로잡혀서 진정한 나를 잃어버려요. 소금이 소금이 못 되고, 소금기둥 돼요. 소금이 소금이 되면 좋을텐데, 소금 땅이 돼.
나에 사로잡혀 나 됨을 잃어버림 |
단절의 EGO 만유의 나. |
*복: NOT 소유-내 맘대로 |
BUT 누림 harmony의 기쁨 |
모든 것에 저주가 되고 자신도 저주요. 이 단절의 에고 때문에, 만---유와 하나 되는 하나님의 유업자에 나. 하나님 자녀의 나를 잃어버리는 거지요. 복은 내가 소유에서 내 맘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복이 돼요? 자식이 내 마음대로 된다. 그 자식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 서로의 관계도 마찬가지지요. 복은 누림이에요. 그냥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하나님이 창조한 나를 특별히 옳거나 뛰어나거나 잘 나거나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누리는 거예요. 그냥 나와 네가 하모니스 샬롬의 기쁨을 누리는 거지요.
2. 에고의 기막힌 어리석음 |
1인칭 W/O 2, 3 인칭 |
*진정한 1인칭은 참된 2인칭에서 출발. |
나의 나 됨. Thou : 하나님 아버지 |
*하나님과의 관계: 존재의 뿌리 |
이 EGO는 기가 막히게 어리석어요. 1인칭밖에 없는데, 나밖에 없는데, 내가 지켜야 되는 것밖에 없는데, 이인칭 삼인칭이 없어요. 그럼 2인칭 3인칭이 없는 1인칭이 있을 수 있어요? 없어요.
그래서 마틴 부버 같은 사람은 2인칭이 회복돼야 된다. 우리는 2인칭을 잃어버렸어요. 모든 걸 이용 대상으로. 나의 나 됨. 하나님 아버지를 어디서 찾아요? 하나님밖에 없다 그래요.
저도 동감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존재의 뿌리에요. 이걸 가꾸는 것입니다. 이걸 가꾸면 만유는 저절로 누려지는 거예요. 이거는 단절시키고 이거는 가짜 만들어 놓고, 그냥 뭐 EGO의 욕심과 福. 피곤해요. 되지를 않아요. 원망만 생겨요.
3. 쉬운 행복과 어려운 행복 |
자연스럽게 억지로 |
원리: 성취(현상화)로 행복(나 됨 피움)함 |
광야 길에 이스라엘 백성이 10번을 원망한 것. 그래서 쉬운 행복을 놔두고 어려운 행복을 우리는 만들려고요. 자연스럽게 누르면 되는 행복을 놔두고 억지로 뭘 만들려고 하면 안 됩니다.
행복의 원리는 이런 거 줘. 내 안에 뭐 우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으니까. 아름다운 것, 귀한 거, 순수한 거, 이런 것들이 있지요. 그게 현상화 될 때 내가 행복한 거예요.
나에게 있는 생명의 본질이 피어났을 때. 그게 때로는 물질적인 성취로도 나타날 수 있고요. 성공으로 나타날 수 있고요. 어떤 인격적인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런 걸로 나타낼 수도 있어 행복합니다. 이들로 내가 행복합니다.
내가 뭘 열심히 해서 사회적인 성취를 이룬다. 이것도 행복이에요. 아! 내가 예수님 안에서 부족한데 하루하루 새로워져 가고 있구나. 이것도 어마어마한 행복입니다.
행복 | 단절된 에고로 | 경쟁에서 이김 |
이기고 또 이기려. 계6:2 | ||
존재에서 피는 | 서로를 누림 | |
Empathy |
그런데 행복은 그래서 두 가지 종류가 있죠. 하나는 존재 뿌리에서 단절된 에고 에고로 하는 성취가 있죠. 경쟁에서 이겨. 현상은 쓰러지는 것이 현상이에요.
1초도 똑같지 않아요. 현상은? 계속 바뀌어요. 그러니 그 단절된 에고의 현상에 성취는 절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아요. 더 목말라요. 목이 마를 때 바닷물 마시는 것과 똑같아요. 그래서 세상에 종노릇 하는 거요. 계속 목마르죠. 아무리 해도 목마르죠
그런데 존재에서 피어나는 행복은 존재에서 피어나는 성취는 서로를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 생수의 샘. 이렇게 성경이 표현하는 것이죠.
어려운 행복은 자! 다른 사람들 하든지 말든지 놔두시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저절로 피어나는 쉬운 행복을 누립니다. 쉬운 행복을 누립니다.
자! 한 가지 더 이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을 잘못 알면 본질은 중요하고 현상은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빛과 소금 특별히 산상수훈에 말씀을 보면 중요한 건, 정말 중요한 건 현상이에요.
하나님 안에 모든 아름다움 있는데도 이게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행복하시지 않아요. 이게 나타나게 하는 것이 창조고 이게 나타나는 그 과정을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이에요.
그래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로 나왔잖아요. 하나님에게로 안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마귀의 거짓이 들어온 거야. 거짓이. 그건 실체가 없기 때문에 거짓으로 속일 수밖에 없고 이 거짓이라는 사람의 생각 속에만 들어 있을 수 있는 거지요.
4. 현상의 지극히 중요하고 귀함 | ||
“깨어있으라.” | ||
중요하고 귀하면 | 가짜 | 진짜 |
단절 | 통 |
그래서 중요하고 귀한 것은 반드시 짝퉁이 생겨요. 아니 헤르메스 뭐 이런 걸 짝퉁 만들지. 기북교회 바자회 때 우리가 만든 거 짝퉁 나와요? 안 나와요? 중요하고 귀하면 반드시 짝퉁이 나와요.
거짓 웃음이지요. 하나님과 아무 상관 없이 EGO로 만들 수 있다고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 떠나실 때 계속 반복해서 하신 말씀이 깨어있으란 거지요.
Ⅳ 공감(Eapathy)의 문제 |
생명의 길: 유업이 자라는 길 |
아픔 suffrting |
다시 한번 공감의 문제를 살펴보고 우리 말씀을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공감- 십자가의 길이죠? 주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나를 아파하시는,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가슴이 안 느껴질 수 없지요.
종교는 이게 안 느껴져요. 나뿐이니까. 괴로워도 이거 내가 누구냐? 사람들이 어떻게 보냐? 이거니까.
그래서 함께함 함께 느낀다는 것은 함께 느껴질 때 함께함을 느끼는 거지요. 함께함을 파라칼레오 곁으로 부르셨다. 이걸 우리는 보혜사라고 번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나 성령님을 묘사할 때 보혜사 파라칼레오를 쓴다. 그런 얘기를 했어요.
파라칼레오. 비가 오는데 우산을 주는 사람도 고맙지만, 같이 비를 맞는 사람이 더 고맙다. 그런 얘기가 있어요. 우리가 뭐가 필요해요? 우산이 필요해요. 함께 하는 사람이 필요해요. 함께해주는 마음이 필요해요.
앞만 본 건 앞을 본 게 아니야. |
옆도 뒤도 봤어야 앞을 본 거야 |
내 아픔만 중하면 |
아픈 게 아니고 두려운 거지 |
서로의 아픔을 느끼면 |
두려움 넘어 생명을 피워 나가지 |
함께니까. |
제가 한번 나누었던 제 얘기를 다시 한번 나눕니다. 앞만 본 건 앞을 본 게 아니야 옆도 뒤도 봤어야. 앞을 본 거야. 내 아픔만 중하면 아픈 게 아니고 두려운 거지. 아픔을 느끼면 두려움을 넘어 생명을 피워나가지. 함께니까, 홀로 필 수 있는 생명은 없어요.
잡초 하나도 하늘과 땅과 공기와 이 모든 것이 같이해 주지 않으면 피어날 수 없어요. 생명은 함께함으로 피어나지요.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그래서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 이름은 십자가의 이름이지요. 나도 그들 중에 있어요. 이 함께를 모르는 나. 왜? 두려움 때문에 그래요. 두려움 때문에 그래요. 두려운 사람은 함께가 안 느껴져요.
2. 함께를 모르는 나: 두려움 |
“어떻게 볼까?” 모든 것이 거짓. |
무엇이 두려워요? 여러 가지 종류가 다 두렵지만, 그 뿌리는 이거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이것 때문에 종노릇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보는 것도 거짓.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도 거짓인데, 그 거짓 때문에 평생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 실존의 문제를 딱 하나예요. 외식 위선.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진실은 없어요. 그것이 섭리예요. 이 지독한 가짜인 나를 만날 때만 깨어질 수 있습니다.
씨앗은 깨어짐으로 피어나는 것이죠. 씨앗에다 금딱지를 붙여 생명이 피어나는 게 아닙니다.
*말씀: Not for 진리 깨달음 |
But for 가짜임 만남 |
그래서 말씀은 진리를 깨닫는 게 아니에요. 이게 우리 성경을 믿는 우리와 모든 종교와의 차이예요. 모든 종교의 경제는 깨달음을 위해서 있어요. 깨달으면 뭐 할 거예요. 인간 본질이 가짜인데.
최고봉이 나 정말 가짜로 죽는구나. 이게 최고. 성철 스님의 고백 이상. 정말 인간 고백에 그 이상은 있을 수가 없어요.
내가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는구나. 네 죄가 수미산보다 더 큰 성철 스님의 열반송 아니요? 마지막 유언 아니지. 그 이상 없어요. 진리를 깨달아야 무슨 소용이 있어요? 말씀은 내가 가짜임을 만나게 해요. 내가 가짜임을.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義 만들기가 아니에요. 그 나라와 그 의가 구해요. 내가 구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가짜인 것이 보여서 진짜로 살고 싶어요. 한 번만이라도 진실을 얘기해 보고 싶고. 진실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신앙 | Not 義 만들기 |
But 그의 나라 義 구하기 애통함 |
내가 이 부족한 나인 채로. 죄 많은 나인 채로. 아무 정죄 판단 걱정 없이 나를 그대로 받아 주는 그 나라. 그 義 피로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하듯이 애통하는 삶이지요. 애통하는 삶이지요.
거듭남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
우리는 거듭날 수 없다. 은혜의 선물이다. |
우리의 일은 애통함이다. |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도 |
추하고 거짓된 에고의 삶에 애통함이다. |
제 얘기, 하나 더 나눕니다. 거듭남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거듭날 수 없어요. 거듭남은 은혜의 선물이에요. 우리의 일은 애통함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도 추하고 거짓된 에고의 삶에 애통하는 거예요. 끝까지 욕심 부릴까? 그러다 죽을까요? 끝까지 욕심부리다가.
끝까지 사람한테 뭔가를 보이려고,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치다 죽을 거요? 그거 받으면 뭐합니까?
단순히 나의 죄인 됨 뿐이 아니다. |
역사도 절망뿐이다. |
정치와 경제가 다 거짓일 뿐 아니라, |
종교는 계13장 땅의 짐승 노릇뿐이다. |
내가 죄인인 것도 가슴 아프지만, 그 정도가 아니죠. 역사를 바라봐도 절망뿐이에요. 정치와 경제 진실이 어디 있습니까? 다 거짓뿐이지요. 그런데 종교까지 더합니다.
종교는 계시록 13장에 땅의 짐승 노릇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도 이 땅의 아픔을 품고 |
아파하시는 아버지의 가슴을 만난 것이다. |
이 땅의 아무 소망 없는 자리에서 |
절망할 수 없는 아버지의 가슴에 |
내 가슴이 깨어져 버린 것이다. |
깨어질 때까지 우리는 에고요 |
거짓일 뿐이다. |
그거보다 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땅에 아픔을 이 땅에 아픔을 보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면 싹 없어지고 새것 될 거 아니에요.
그런 그 거짓과 허위와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안에서조차도 반드시 자기가 심는 것이 피어날 것이라는 이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시는 그 아버지의 아픈 가슴을 만났을 때, 비로소 내가 깨어집니다. 에고는 그렇게 절대적이에요.
이 땅에 아무 소망이 없는 자리에서 절망할 수 없는 아버지의 가슴. 나 같으면 옛날에 버리고 새로 시작했을 텐데. 내가 나를 보면 몇십 년 전에 버렸어야 옳아요.
그런데 하루하루 걸음을 인도하셔서 도와주셔서 이만큼이라도 보고 깨닫고 이제 십자가가 뭔지를 조금 알겠는데.
하나님이 절망하기를 포기하셨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어요. 그 아버지 가슴에 내 가슴이 깨어지는 거지요. 깨질 때까지 우리는 에고요. 거짓일 뿐이에요.
나는 교회를 다닙니다. |
내 아픔만 중합니다. |
지체들의 아픔도 느껴집니까? |
주의: 긍휼은 Not 심리적 But 행동 |
오늘 우리 친교 시간에 나누면 나는 교회를 다닙니다. 교회를 다니지요. 내 아픔만 중요합니까? 지체들의 아픔도 느껴지십니까? 그만 나누어 봅시다.
성경의 긍휼은 쉬운 게 아닙니다. 불쌍하게 생각하는 행동입니다. 엑션. 아픔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권목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