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구간은 광덕산 아래 장안리에서 방아재까지다. 장안리를 출발하여 262봉, 332봉, 덕진봉(384m), 88 올림픽 고속도로를 지나 봉황산(236m), 서암산(450m), 시흥부락도로(210m), 설산어깨(400m), 삼봉부락재(210m), 무이산(305m), 과치재(130m), 남해고속도로(130m), 연산(505m), 방아재(290m)까지다.
이제부터는 경각내장추월산 군을 벗어나 호남의 영산 무등산을 안고 있는 무등산 군으로 들어서게 된다. 도상 거리는 24km 정도로 근래에 들어 비교적 거리가 짧다. 버스에서 이형도 팀장의 안내를 들으니 지난 구간은 실거리가 40km 정도였단다. 이 거리면 솔직히 무리가 따른다. 한 번에 많이 간다고 절대로 능사가 아니다.
월간산에서 창간 45주년 기념으로 6월호에 ‘무박산행기준 호남정맥 21구간 가이드’를 실었다. 거기에는 제7구간인 광덕산에서 과치재까지 21km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번 구간의 주요 포인트를 짚어주고 있다.
「이제 마루금은 88고속도로를 지나 설사 부근에 이르면서 전북 순창군을 버리고 온전히 전라남도 안으로 들어와 잠시 곡성군과 담양군의 군계를 따라 진행한다. 200~400m 정도를 오르내리는 높이에서 보듯 별 특징 없는 마루금의 연속이다.
다소 무료하지만 서암산을 지나 마루금에서 살짝 벗어난 설산을 오르고 괘일산을 지나면 이런 우려를 한 번에 다 씻어 버리게 된다. 과연 정맥은 정맥이다.
방축재를 지나 88고속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진행다다 안개 잦은 지역 1km 안내판이 나오면 오른쪽 산길로 접어든다. 2등급 삼각점(순창22)을 확인하고 과수원을 따라 내려오면 다시 88고속도로를 건너야 하는데 반드시 왼쪽 암거를 이용해야 한다. 차량통행이 뜸한 틈을 타 무단횡단하는 위험한 행동은 절대금물이다.
봉황산을 지난 마루금은 오죽이라고 불리는 검은 대나무 숲을 지나 목동리 송지농원을 지나게 된다. 물 보충이 가능한 마을이다. 정맥에서 조금 벗어난 서암산을 다녀오는 것도 잊지 말자.
민치를 지나 마지막으로 전라북도의 숨결을 느끼고자 도계를 따라 역시 정맥 밖에 있는 설산도 다녀와야 한다. 정상석과 1등급삼각점이 있는 설산에서 보는 조망은 대단하다.
이 설산 아래에 있는 신비의 샘 ‘금샘’을 다녀오는 것도 빠뜨리지 말아야 할 이번 구간의 하이라이트다. 그후 3봉으로 이루어진 괘일산을 조심스럽게 진행하면 또 다른 무이산(306m) 이번 구간의 날머리인 13번 국도가 지나는 과치재로 떨어지게 된다.」
이 자료를 더 보면 과치재에서 방아재까지는 3km 남짓이다. 나는 사전 구간 검토를 위해 진혁진 님의 싸이트를 주로 본다. 그는 정맥 마루금을 2만 5천분의 1 지도에다 표시했다. 그러다 지도에 나타나는 능선의 길이와 실 거리 간 차이를 종잡기 어렵다.
지난구간과 이번 구간만 보더라도, 강천산과 광덕산 구간과 과치재에서 방아재 구간은 지도상 능선표시 거리가 cm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실 거리는 전자가 15km, 후자가 3km다. 이 부분에 대해 누가 속 시원하게 답 좀 주었으면 한다.
# 무슨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11월에 들어서 세 번째 산행이다. 당연히 지난주에 이너 연속이다. 실거리 100km를 육박하는 거리다. 내 개인사정으로 불참했던 지난 구간엔 19명, 이번엔 19명이 참석했다. 25명에서 30명이 다니던 불과 보름전과 비교해 볼 때 빈자리가 많다. 시누대 님은 마친 구간이라 무등산에서 보자는 얘기를 나눴던 터라 그랬지만 늘 보던 너와나 님, 부뜰님 부부, 판종 씨, 석규 씨 등등이 보이지 않아 조금은 의아했다. 과일촌 부부 본 지도 제법 되었다.
이번엔 출발에 앞서 종로 관철동에 있는 3.1 빌딩에서 시간을 보냈다. 신춘문예 중편소설에 도전하기 위해 며칠째 밤을 새는 권영우 시인을 보기 위해서다.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시계는 어느새 오후 9시 30분을 가리켰다. 이 팀장에 문자를 보내니 양재 10시 50분 출발이다. 서둘러 나와 근처에서 미니김밥과 달걀말이 김밥, 도넛과 땅콩바 몇 개를 배낭에 넣었다. 이사 뒤처리로 바쁜 집에다가 도시락 운운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이런 식의 식사준비를 벌써 두어 차례나 하고 있다.
서초구청에 도착하니 다행히 출발 20분 전이다. 이 팀장이 여자 회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 보니 이 분은 백두대간 종주 중이었다. 조금 뒤 주차를 하고 오는 블랙홀 대장과 악수를 나눴다.
“차를 가지고 오면 어떡하나. 산에서 몇 잔은 하는 거 같던데.”
“조절하면서 마시고 하산 후에는 자제한다.”
아직 시간이 남아 마음을 다지며 심호흡도 여러 번했다. 차 한 대가 들어와 시선을 고정시키는데 내린 이는 짐작대로 정상교 회장이었다. 정 회장 역시 지난 구간 가족 수술로 불참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었다. 우리는 보름 만에 다시 손을 잡았다.
기흥휴게소에서 커피를 나누다 이번 수술 당사자가 장모님이란 걸 알았다. 내 기억으로는 정 회장의 장인어른 49제 지난지가 한 달 남짓이다. 평소 건강하시던 장모님의 이런 결과에 가족들의 충격이 더 크다고 한다. 지음(知音)이란 고사가 있듯 홀로 남은 이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다. 깊게 생각해볼 부분이다. 이런 와중에 회장이라는 책임감에 길을 나섰고, 그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평상시 와 같이 회원들을 대했다.
새벽 2시 경에 들머리에 도착했다. 각자 준비를 하고 몸을 풀었다. 30분쯤 들머리로 향했다. 임도를 지나 능선으로 접어들면서 인원 확인에 들어갔다. 18로 번호가 끝이다. 이 팀장이 다시 번호를 외친다. 역시 18로 끝이다. 회비를 입금한 2명과 오늘 분명히 17명분을 걷었는데 하나가 모자란다며 한 번 더 하잔다. 역시 18이다.
“할 수 없다. 그냥 출발”, 이 팀장
“곱하기 5하면, 이번엔 점심이 없다. 아니면 하나 씩 더 데리고 와라.”, 정 회장
어제 내린 비로 낙엽 쌓인 길에 물기가 많았다. 먼지가 날리지 않는 대신 가끔 미끄러지는 게 신경이 쓰였다. 거기다 시작부터 내리막길이 상식으로는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경사가 있고 내려가기도 한참이다.
“불고, 몇 도냐.”
“60도 정도다.”
이럴 정도로 마을 근처 들머리와 어울리지 않게 내리막이 길었다. 거기다 초반부에 등산로가 희미하고 가로 질러 쓰러진 나무 장애물이 많았다. 특히 가시나무 종류에 옷이 자주 긁힌다. 앞선 이가 머리조심 하면서 주의를 줌에도 이마를 세게 부딪쳐 정신이 나기도 전에 다시 오른쪽 눈 아래에서 귀까지 눈에 띨 정도로 긁혔다. 이걸 훈장이라 해야 하나는 모르겠지만, 자기 나이에 맞는 얼굴 관리가 절대 필요한 때에, 술로 눈이 동태가 되지 않나 이마와 눈 주위에 반창고가 붙어 있지 않나 아무튼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한 시간 정도나 걸었나, 이번엔 그 유명한 일기예보까지 정확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니 오전 비 소식이 새벽으로 당겨졌으니 틀린 건 틀린 거다. 다들 우비를 준비해 왔다. 어둠에 얼듯 봐도 종류도 많고 기능도 여러 가지다. 소설(小雪)이 어제다. 눈이 와도 시원찮을 시기에 비를 맞고 산행을 하고 있다. 이런 걸 누가 설명해 주겠나.
산에 다니면서 고수들의 차림새를 곁눈질로 배우기도 여러 번이다. 이번에는 등산화에 비닐 씌우는 것을 배웠다. 한술 더 떠 등산화 위를 덮는 장비, 마치 매미가 아니 등산화가 허물에서 나온 거 같은 것을 덧신는 이도 있었다. 부지런하게 장비점을 다니는 모양들이다.
전라북도 순창군을 벗어나 남도 담양으로 들기 전 비닐하우스 안에 앞서던 일행들이 모여 있었다. 핑계 삼아 배낭을 다시 내리고 간식도 하고 점검도 다시 했다. 주민들의 곤한 잠을 깨우고도 남을, 계속 짖어대는 개 두 마리만 아니면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기 딱 좋은 곳이다. 가로등 불빛 아래 마을이 깨끗하고 푸근해 보인다. 천방지축인 가 천방인 가하는 안내문이 있는 마을이었다.
“이게 전라북도의 보편적인 시골집 모습이다. 집집마다 감나무가 한 그루씩 있다.”
“이제 보니 그렇다.”
“따다가 못 딴것은 까치밥이란 구실로 몇 개 남겨둔다. 토종감은 이런데 요즘 개량종은 다 떨어진다. 감나무는 가지가 약하다. 나무에서 떨어져 여럿 다친 걸 봤다.”
마을을 지나 다시 산으로 향하는 길은 황토다. 이 지역 핏빛 황토가 유명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몇 발 떼기도 전에 무게가 느껴진다. 우중 곳곳에 급조된 작은 웅덩이만 나오면 씻어내고 해도 그때뿐이라 한참을 황토반죽과 씨름했다. 작은 능선 몇 번을 지나고 확장 공사 중인 88고속도로에 내렸다.
“광주에서 1985년부터 10여년을 근무했다. 그때 이 길을 다녔다. 당시 동서화합이란 구실로 만든 걸로 알고 있다. 2차선이었다.”
말이 고속도로지 요즘 숱하게 만들어지는 자동차 전용도로 수준보다 더 나을 것이 없어 보인다. 통행량도 새벽이라 가뭄에 콩 나는 정도다. 이 도로가 끊은 정맥 길을 잇 방법은 두 가지다. 위험을 감수하고 도로경계 벽을 넘거나 지하통로다. 판단은 자유였다. 위험을 피해 배수로 길을 택했다. 중심을 잃으면 배수로 아래나 황토 웅덩이로 빠진다. 이런 어둠속 빗길이 쉽지 않았다. 와중에 심심찮게 들린 말이다.
“왜 이러고 있지”
도로도 안전하게 건너고, 비도 피하고, 휴식 취하기 딱 좋은 지하통로 아니 육교 아래에 다시 배낭을 내렸다. 섬진강 종주 자전거 도로 표시가 있다. 차 한 대만 지나도 울림이 크다. 아침 식사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다. 강화도령이 가지고 온 탱자 술과 도넛, 초코바로 허기를 달래고 개솔린도 보충했다. 담배도 한 대씩 피워 물었다. 20년 이상 즐기다 끊은 담배다. 우연히 몇 대로 다시 시작한 게 이제는 정말 끊기 힘들다. 특히 산에서는 진통제 이상이고 맛도 구름이다. 정맥 마치고 진지하게 고민하려고 한다.
GPS를 보니 자전거길 끝부분과 정맥길이 만난다. 아직은 비가 제법 내리고 그리 높지 않은 지척의 봉우리는 먹색 그 자체다. 이런저런 판단 끝에 자전거 길로 조금 더 걷기로 했다. 다시 우중 어둠길을 걷는 이들은 정 회장 포함 5인이다. 항상 선두를 이끌던 블랙홀 대장이 이번엔 후미에서 함께 해 든든했다. 편한 길에서는 일상의 대화가 주로 나온다.
“장모님이 치매에 드신 모양이다. 전에 그리 깐깐하고 몇 번 대립까지 하던 분인 데”
“직접 옆에서 보니 어떤가.”
“장인은 분명히 알아보고, 자식들은 몇 번에 한 번 알아보는 정도다.”
“책에서나 말로만 봤지 직접 보진 못했다.”
“다른 거 아무리 있어야 소용없다. 건강이 최고다. 나도 이런 와중에 참석했다. 그러면서 이런 빗속을 걷고 있다.”
불과 5분 걷기도 전에 앞에 불빛이 환하다. 나는 가로등이라 했고 정 회장은 터널이라 했다. 가보니 FM(야전교범)대로 길을 찾아온 일행들이 비를 피해 간식을 하고 있었다. 또 비닐하우스 안이다. 오늘 같이 비오는 날엔 그만인 시설물이다. 앞으로 한 번 더 비닐하우스 신세를 지게 된다. 아침식사 자리에서다. 이런 시설이 때맞춰 있어줘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이미 통로 아래서 충분한 휴식과 간식을 한터라 그들을 두고 다시 산길로 들었다. 여명기임에도 산속은 칠흑의 어둠이다. 거기다 안개가 짙었고 흔적뿐인 등산로는 낙엽이 점령했다. 어쩌다 하나 날리는 리본도 시계 제로에서는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잠든 도시 불빛이 내려다보이는 무덤가에서 여러 군데 난 길을 하나씩 확인하는 사이 도착한 후행과 길을 찾았다. 5미터 정도 전 좌회전이다. 리본 하나가 외롭게 날리는 좁은 통로였다. 들어가 보니 모처럼 완벽한 길이다. 무척 반가웠다.
앞서는 일행들의 능력은 출중하다. 잠시 스치는 듯 나가는 가 싶으면 어느새 흔적도 없다. 오래전 국가대표 간 축구경기에서 우리 선수들은 비만 오면 맥을 추지 못했다. 외국 선수들은 비단길 걷듯 했다. 해설가나 선수들은 장마만 있는 우리나라 기후 탓을 했다. 그땐 그 말에 먹혔으나 지금은 어림도 없다. 전천후가 되도록 자신을 연마해야 통하는 시대다. 지금 앞서나가는 일행들을 보니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배낭 아래에 둔 방수 옷을 꺼내기 귀찮아 우비 없이 걷다 보니 다 어느새 다 젖었다. 시계는 아직도 제로다.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라 몇 발 나가다 의심을 하고 확인한다. 이래서 가벼운 알바가 몇 번에 그치고 큰 알바는 없었다. 이런 날씨에 경험 없이 덤비다가는 크게 헤매기 십상인 길이다. 제대로 가다 내리면 대체로 대나무 숲이 있었다.
이번엔 정 회장, 불고, 강화 나 넷이 맨 뒤에서 걸었다. 너와나 님이 없어서 그렇지 평소에는 중후반이다. 최규철 후미대장은 누가 되었든 늘 맨 뒤에서 특유의 온화한 미소와 구수한 목소리로 함께한다. 그 역시 출중한 등반 능력의 소유자다. 어느 정도에서 됐다 싶으면 앞으로 나간다. 그리고 앞서던 이와 하산을 함께한다. 이러니 고생이 뻔하다. 술자리를 만들어 한 번 잘 모실 생각이다.
매번 10시간 이상을 걸으며 정 회장을 중심으로 불고님, 판교님 등과 많은 얘기를 나눈다. 피로를 잊고 장거리를 걷기에 이만한 거는 없다. 특히 이 지역에 해박한 정 회장은 시야가 틔면 사방에 얽힌 이야기를 해준다. 산 아래가 좋으면 조직에 누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리로 간다. 다른 이는 어떨지 몰라도 이래서 나는 늘 보물섬에 내린다. 이런 여행이 살아있고 맛이 있고 멋이 있다. 해설사 아니 동네 토박이와 함께한다는 건 이렇듯 효과 백배다.
이번엔 삿갓 김병연 선생을 모셨다. 우선 아는 범위에서 그분의 행보를 따졌다. 그는 57세의 평생을 두고 팔도강산을 몇 차례씩 두루 방랑한 화려한 걸인이었고, 이백(李白)에 필적할 만한 시선(詩仙)이었지만, 인생으로서는 두보(杜甫)만큼이나 불우했던 분이다.
걸인 시인으로, 자연 시인으로, 인생 시인으로, 역사 시인으로 김삿갓 선생의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은 인생을 우리가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그 만에 한 부분 걷는 흉내만 조금 내보기로 하면서 길을 이어갔다.
김삿갓은 풍월이나 자연의 경관을 읊은 종래의 한시에서 벗어나, 우리 생활과 밀접한 주변에서 시제를 찾아 예민한 관찰과 심오한 착상, 감정의 미묘한 표현에 뛰어났던 혁명적인 시인이었다. 특히 금강산에 대해 많은 시를 남겼다. 그 중 압권은 단 14자로 일만 이천 봉우리를 그려낸 시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다.
송송백백암암거(松松栢栢岩岩去) 솔과 솔,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도니
수수산산처처기(水水山山處處奇) 물과 물, 산과 산이 곳곳마다 기이하도다.
하나 더 본다.
첩첩금강산(疊疊金剛山) 우뚝 솟은 금강산
고봉만이천(高峯萬二千) 높은 봉이 일만 이천
축래평지망(遂來平地望) 평지를 향해 내려오나니
삼야숙청천(三夜宿靑天) 삼일 밤을 푸른 하늘에서 머문 것일세.
김삿갓은 본래 권문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기구한 운명으로 일생을 문전걸식하며 돌아다녔기 때문에 세상의 온갖 천대를 받고 인생의 어두운 면을 체험하게 되었다. 한문을 약하고 몇 편을 보자.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망할 놈의 집에선 쉰 밥을 주는구나
네 다리 속 소반 위 죽그릇 속을/ 하늘 빛 구름 그리메 어리는도다
하늘 높기 만리라도 고개 못 들고/ 땅 넓기 천리라도 두 다리 못 펴네
흔히 김삿갓은 없다고 하면서 세간에 그의 시로 일컬어지는 시는 김삿갓이 아니고 누가 이런 시를 지으랴 싶은 것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영월 소재 김삿갓 묘를 발견하여 보고한 바 있는 박영국이란 분이 1987년 김삿갓의 3회갑을 기념하여 전국에 김삿갓 시를 공모했던 바, 무려 690수가 제보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함경도와 경기도 등지에서 서당 훈장, 한학자 등을 널리 찾아본 ‘김립시인’의 편주자는 아무리 촌에 들어가도 김삿갓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시골 서당 출신의 한 학자 역시 영남과 강원도 산골에서까지도 김삿갓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점을 봐서 지방에 남긴 작품들도 삿갓의 유작임을 인정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래서 비평에서는 원전을 찾아내는 게 우선이다.
아무튼, 대천재요, 기인(奇人)이자 광인(狂人)이며 철인, 주가(酒家), 걸인, 방랑시인 김삿갓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간에 알려진 이상으로 그가 불우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문열의 ‘시인’을 일독하길 권한다. 그의 삶을 가장 근접하게 그린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책이다.
봉황산을 지나 이목고개에 내렸다. 날도 완전히 밝았다. 내리다 보니 앞선 일행들 목소리가 들린다. 크게 말하면 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 언덕 비닐하우스에 자리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우중한 날씨에 20여 명이 편하게 행동할 수 있는 고마운 시설이 또 있었다. 이런 걸 적재적소라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이름 없고 그저 지나기 쉬운 이목 고개를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내 고향 수원에도 이목리가 있기 때문이다. 갈비하면 수원을 알아준다. 수원에서 갈비구이를 처음 판매했던 게 그 이유로 알고 있다. 지금이야 수원 각지에 갈비집이 퍼져있으나,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수원을 대표하는 갈비집이 이곳에 여러 집 모여 있었다. 정조 때 심은 우거진 노송을 바라보며 넓은 정원에서 갈비 맛보기 좋은 곳이었다.
아직도 수원을 대표하는 생갈비집 하나는 그곳에 남아있다. 이북 사람들이 오면 대접하던 곳이다. 그들은 잘 먹고 나서 늘 냉면맛이 떨어진다는 말을 해 수도권 인근에서 찾아낸 식당이기도 하다. 그 집 현관에는 다녀간 북쪽 사람들 사인을 액자에 넣어 자랑하고 있다. 요즘 갈비 값이 아무리 비싸도 수원에서 만나면 조금은 대접해 드릴 요량은 있다.
이런 이목리 끝 고개가 다른 말로 지지대고개다. 한자를 풀어보면 느리게느리게 넘는 고개다. 수원에는 세계문화유산 화성이 있다. 효심 지극했던 정조대왕이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한양 천도까지 생각하고, 요즘식의 신도시를 수원에 조성했다.
거두절미하고 아버지를 참배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아버지 무덤이 육안으로 보이는 이곳에서 머뭇거렸다 한다. 이 고개를 넘으면 보이지 않기에 지지(遲遲)하게 머물렀다 해서 오늘의 지지대 고개가 되었다. 이곳엔 6.25때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도 있고 광교산을 넘는 들머리이기도 하다. 아마 한남정맥길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비닐하우스 주인은 콩을 수확하다 미루고 들어간 모양이다. 콩 털어놓은 멍석을 접어 경계 삼아 안과 밖 두 군데로 상이 차려졌다. 불고 님이 양쪽을 오가는 수고 덕에 산해진미를 맛봤고, 라면과 어묵탕이 끓기 전에 강화 님이 캐온 어른 손바닥 크기 잎에 도라지 뿌리만한 냉이 두 개를 넣으니 그 향의 조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즐거운 식사 자리에서 이 팀장이 웃으며 안내를 한다.
“출발할 때 19명이 맞았다. 한 분이 여기계시다.”
“해드랜턴이 없던 분 아니냐.”
“그렇다. 마을까지도 다녀왔고 입구 바닥지를 보고 왔다.”
이런 분위기에 국화주 한 잔 따라놓고 서로 권하는 반찬을 안주 삼으니 이태백의 ‘별유천지비인간’ 한 구절이 또 찾아왔다. 식사를 마칠 무렵 비도 그쳤다. 만 원 정도 사례비를 두고 가자는 불고 님의 의견을 이 팀장이 수용했는지는 모르겠다.
비가 그치니 구름에 덮여 신비스러움을 보이던 서암산의 자태가 드러났다. 정확히 2등분된 삼각형이다. 산 아래에는 마을이 있었다. 주변엔 싱그럽고 건강한 여러 종류의 초목들이 절묘한 조화 속에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원래 이 땅의 주인은 저들이다. 저 하나 하나에서 뿜어내는 생동감을 봐라. 사람들 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 이 땅을 지켜왔고 지켜 갈 거다. 우리는 잠시 스쳐가는 나그네다. 자연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산을 걷는 것도 인생과 같다. 오른 만큼은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 욕심을 부리고 오르기만 고집해 봐라. 결과가 어떨 것인가. 더 내려와도 더 올라가도 안 되는 게 인생과 닮았다. 즐겁게 걷자.“
서암산을 바라보던 정 회장이 의미 있게 던진 말이다. 탐욕과 성냄이 벗어진 이 순간 누구나 이 말을 공감하나 선뜻 표현하기는 힘들다. 이왕 버린 거 사랑도 미움도 벗어던지자. 필요한 만큼만 얻어 쓰고 돌아가자. 결국엔 시지프의 신화까지 나왔다. 오늘의 이런 식의 대화가 많이 오갔다. 다음부턴 녹음기를 준비해야겠다. 기억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서암산은 삼각형이다. 이런 산을 오행에서 목(木)형이라 한다. 흔히 문필봉이라 부른다. 이런 산의 기운을 받은 터에서는 문필가나 귀인이 많이 태어났다. 이 주변을 살펴보면 인물을 많이 나왔을 거다. 목형이 주산인 도시의 장날은 3일과 8일이다.
앞서 오르던 불고 님이 서암산을 피해간다는 말을 한다. 좋다는 톤이다. 나 뿐 만이 아니라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일 거다. 산은 정상에 오르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전체 분위기로 인해 얻는 게 결코 적지는 않다. 연봉을 지나며 그 아래 지방을 아우르는 것도 산에 오르기 전엔 결코 느낄 수 없는, 오른 자들만의 특권이다.
# 설산 갈림길에서 후미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 회장과 셋은 설산을 택했다. 여기서 최 대장과 헤어졌다. 정 회장이 현역시절 직원들과 오르던 산이라며 결코 후회는 없을 거란다. 이런 자신감으로 추천한 산이다. 문제는 정상이 보이지 않는 다는 거다. 이래서 배낭끈을 다시 조이고 옷매무새도 다시 했다.
설산은 서암산보다 70m가 더 높다. 최 대장과 헤어진 안부에서 거의 20분 가까이를 계속 올랐다. ‘저 산만 넘으면 살구나무가 있다’며 물 한 방울 없이 목마른 병사들을 일시에 가라앉히고 산을 넘은 조조의 수법을 우리에게 쓴 정 회장을 믿고 남은 힘을 쏟았다. 계단을 크게 오르듯 세 봉우리 정도를 이어야 정상에 닿는 구조다.
오르는 길엔 손톱보다 작은 잎들이 많았다. 등산로 주변 나무 밑둥치에서 자주 보였다. 그 잎들이 노랗게 단풍이 들어 마치 잘 기른 화초를 보는 거 같았다. 아니 아주 선명했다. 도시인 불고는 궁금하면 자주 묻는다. 다행히 일행 중 하나는 알고 있는 것만 물었다.
“빨간 열매가 뭐냐.”
“맹감나무 열매다. 먹기도 한다. 맛은 없고 그저 시큼하다.”
솔직히 오르면서도 반신반의했다. 눈앞에 보이는 거라고는 그냥 오름뿐이니 그럴 만도 했다. 반전은 두 번째 봉우리 암봉 직전에서다. 그간 수없이 보던 기암괴석과 그리 차이는 없었으나, 산 아래 사람 사는 모습과 아래로 흐르는 산줄기의 매력에다, 사방이 탁 틔는 전망 조건 즉 주변과의 조화가 일단 끝내줬다.
일단 여기서 몇 장면 좋은 그림을 얻었다. 청명했던 날씨가 갑자기 구름이 몰려온다. 순식간에 시계가 사라졌다. 정 회장은 이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정상 쪽으로 재촉하며 나간다. 다시 힘을 썼다. 오르면서 혹시 이 길로 다시 내려가는 불상사가 없길 바라면서도 혹시나 하고 마을로 내리는 탈출로 하나를 유심히 기억하며 올랐다.
정상 얼마 전에 이정표가 있다. 거기만 해도 내리는 방향이 3군데다. 정맥길인 괘일산 방향도 있었다. 이러면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수고는 덜어졌다. 우리가 오른 길을 제외하고는 등산로가 선연이 나있었다. 주변엔 설산 하나만 오르는 흔적들이 많았다. 정 회장은 이 흔적을 디카에 담았다.
마침내 정상이다. 정상에는 곡성군에서 세운 앙증맞은 표지석이 있고 그와 붙다시피 삼각점이 있었다. 그 삼각점은 순창이고 1981년에 개설한 1등급이다. 흘린 땀에 대한 보상인 지 얼마 뒤 구름이 겉이고 사방이 틔기 시작했다.
“저기가 무등산이다. 저기는 노고단 그 옆 희미한 게 반야봉이다. 저쪽이 곡성이고 그 옆 산에 있는 절이 우리나라 유명한 사찰 중 하나인 태안사다. 저기는 추월산이고 저쪽은 순창군이다.....”
참고로 태안사는 동고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이다. 불교 선문 아홉 가지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본사지로 선암사, 송광사, 화엄사, 쌍계사 등을 거느리고 꽤 오랫동안 영화로움을 누렸던 사찰로 혜철선사와 도선국사가 득도한 정량수도의 도량이다.
정상에서 2개 도와 여러 개 시군을 한 자리에서 봤다. 불과 500m급 정상에서 이만큼을 볼 수 있다는 게 평야가 주를 이루는 호남지역의 매력 아닌 가 한다. 호남정맥 전체가 뫼 산(山)자 형상이라는 게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내 눈에는 무등산 정상부근이 초가지붕같이 완만한 곡선으로 보였다. 이러면 나도 호남길 어디에서나 무등산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무등산과 추월산이 있으면 혹시 금성산도 아냐.”
“그건 저 정도일 거다. 왜 그러냐.”
“그러면 담양이 저쯤이라는 얘기고 근처에 소쇄원이 있다는 말 아닌가.”
“그렇다.”
“혹시 송순의 면앙정가를 아는가. 그 내용 중에 지금 말한 산들이 다 들어있다.”
“그러냐.”
“분명하다. 그럼 당시 송순이나 기대승, 양산보, 정철 같은 이들이 이곳을 노래했다. 그 현장이라니 뜻밖의 큰 선물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조선의 사림(士林)은 영남사림과 기호사림 이외에 호남사림 또한 큰 학맥을 이루고 있었다. 영남사림이 안동과 예안, 기호사림이 파주와 해주, 호남사림은 담양과 장성에서 학맥을 형성했다. 성리학 관점에서 보면 영남과 기호사림에 비해 호남사림은 그 비중이 크지 않다. 그 이유로 영남과 기호사림이 성리학 연구와 실천에 힘을 쏟은 반면 호남사림은 시가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멋있게 살았다는 뜻이다.
당시 이들은 주변의 빼어난 산세와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삼아 창작활동을 했다. 청풍명월 속 안빈낙도다. 요즘 말로 힐링이다. 송순, 김성원, 임억령, 양산보, 정철, 고경명, 임제 등 31명 사대부들이 모였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들은 사제 관계나 친인척관계를 형성했으니 독점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한국가사문학관이 담양에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 주변에 면앙정, 석영정, 소쇄원, 환벽당, 송강정 등의 정원과 정자의 주인이 그들이다. 가사(歌辭)는 간단히 말해 4음보(音步)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율문 형식으로 우선은 이해하자. 음보는 시가의 운율을 이루는 기본 단위다. 쉬며 넘어가는 주기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지금은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 MBC 라디오 ‘지금은 라디오시대’에서 ‘4음보로 말해요’라는 코너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우리나라 가사는 우리말을 섞은 까닭에 중국의 악부와 더불어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근세에 송순과 정철의 작품이 가장 훌륭하다. 그러나 회자되고 마는 데 불과하니 애석한 일이다’라고 적혀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송순에 대해 더 들어가 본다. 송순은 1493년 담양에서 태어났다. 호남사림의 종조(宗祖)인 ‘박상’의 학통을 이어받아 고봉 기대승,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과 같은 대학자들의 스승이다. 지금도 쉽지 않은 92세까지 살았다. 나이 87세때 과거급제 60주년을 기념하는 회방연까지 기념하는 잔치를 열기도 했다. 의학과 영양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도 금혼식이나 회혼식은 보기 드물다.
맹자는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군자삼락(君子三樂)이다. 첫 번째가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가 아무 탈 없는 것, 두 번째가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에 부끄럽지 않은 것, 세 번째가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다. 참고로 요즘 ‘교육’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두 번째를 한자로 옮기면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이다. 송순이 맹자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면앙정의 이름을 맹자 진심장에서 가지고 온듯하다. ‘앙(仰’, 우러를 앙)이 그렇고, ‘면(俛, 구부릴 면)’은 뒷부분 ‘부(俯, 구부릴 부)’에서 부를 쓰지 않고 같은 뜻인 면을 사용해 면앙정이라 명명했다는 말과
다른 하나는 ‘송순’이 앙은 백이숙제의 ‘백이’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뜻을 길렀던 것에서, 면은 ‘유하혜’가 땅을 숙여 보며 자신의 화평함을 길렀던 것을, 소년시절부터 책장에 적어두고 삼가고 특별히 여기며 마음에 잊지 않았다는 데서 정자명의 유래를 두기도 한다.
암울한 일제 말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다 가신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된다. 여기서도 맹자 진심장을 응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면앙정을 이렇게까지 들먹이는 이유는 우리가 걷고 있는 호남정맥과 연관성이 있고, 지금 설산 정상에서 어렴풋이나마 그 전체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번이고 그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나름대로 감상에 젖었다. 이왕 시작한 김에 그 부근을 노래한 부분을 더 본다.
웃독이 셧ᄂᆞᆫ 거기 추월산 머리 짓고
용귀산 몽선선 불대산 어등산
용진산 금성산이 허공의 버러거든
원근 창애의 머는 짓도 하도 할샤
설산에 대해서는 매일신문 기사에서 발췌해본다.
「주옥같은 명산이 줄지어 이어지는 호남정맥 능선길. 무명에 가까운 산 하나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높지 않지만 소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지고 아기자기한 바위능선이 뒷마무리를 한다. 높이 441m의 정상부는 거대한 바위성벽, 철옹성을 연상케 한다. 해가 산에 걸렸다는 뜻의 괘일산(卦日山)이다.
설산(雪山)은 괘일산과 이웃해 있다. 호남정맥에서 살짝 비껴난 산으로 전남과 전북의 경계에 솟았다. 곡성군과 담양군, 순창군의 경계가 되며 담양의 산성산에서 맥을 이어받아 광주의 무등산으로 이어 주는 명산이다. 해발이 526m로 곡성 팔경에 동악조일(動樂朝日), 설산낙조(雪山落照)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곡성의 10명산 중에 동악산 다음으로 설산의 경승이 손꼽힌다.
설산 정상에 서면 사면팔방으로 조망이 터진다. 주변의 들녘과 마을들이 아래로 내려다보이고 남쪽으론 무등산, 서쪽으로는 괘일산 암봉이 머리를 내민다. 동으로는 남원의 문덕봉과 고리봉, 동악산과 최악산 줄기들이 선명하고 북으로는 순창 아미산이 지척이고 그 너머에 강천산과 내장산의 줄기들이 아련하다.」
이런 정상이니 쉽게 내려가면 안 된다. 여기서 찍은 사진만 족히 30장은 넘을 거다. 일행들에게 천천히 즐기고 내려가자고 억지에 가까운 부탁을 하니 모두 좋단다. 덕분에 정 회장은 지도를 꺼내 독도를 한다. 내려가는 길은 많다. 심사숙고 끝에 0.9km 아래 수도암 길을 결정하더니 오면서부터 여러 차례 말한 창평에 소재한 ‘슬로시티’ 걷기 계획을 구체적으로 말해준다.
대설(大雪)을 일주일 앞둔 11월 말이면 찬바람이 불어야 하나, 2014년 11월 30일엔 비가 왔다. 정상에서 부는 바람도 찬기가 덜해 부담을 덜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나 우리는 경후식을 했다. 아니 경과 식을 동시에 했다. 이미 일행과 만날 길이 없으니 이곳에서 정상주가 나온 게 자연스러웠다.
이번에는 오키나와 전통 명주 포성(泡盛)이다. 매번 하산 직전 얻어 세계 각국의 명주를 맛보니 한편으로 죄송하고 한편으로 기분이 최고다. 바둑을 좋아하다 보니 일본과 인연이 제법 된다. 교류전 형식으로 여러 차례를 오갔다. 지금은 일본 측 사람들이 나이가 평균 70세가 넘어 서로 안부를 묻는 관계지만 그래도 잊을 만하면 두어 명이 개인적으로 찾아와 수담도 나누고 잔도 나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포성이라는 술이다. 우리나라 증류식 소주로 보면 된다. 40도 정도까지 맛본 기억이 있다. 백년을 넘긴 것도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안주는 변함없이 치즈와 과일이다. 우리가 매번 산행에서 보는, 금속으로 만든 휴대용 술병은, 20여 년 전 독일에서 18만 원을 주고 구입한 것이란다. 각자 앞으로 돌아오는 술잔을 음미하여 마시고 주변 경관을 1차 안주로 하고 치즈와 과일을 2차로 안주로 했다. 막걸리 한 잔 겨우 마시는 강화까지 두어 잔 받을 정도였으니 아마 이 자리에 술이 한 박스 있었어도 다 비웠을 거다.
설산 정상을 몇 번 내려다보니 어디서 본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답은 의외로 간단히 나왔다. 강화 전등사 뒷산 정족산에서 내려다보는 강화 모습이다. 규모에 좀 차이가 있고 바다가 없을 뿐 닮아도 많이 닮았다.
“강화 한 번 온다더니 언제가 좋은가.”
“12월 중 한 번 가자.”
“주말이 아니라도 좋으니 말 나온 김에 결정하자. 외포리에서 갈매기를 벗 삼아 한 잔 하자. 그간 원수도 갚을 겸 인삼을 무처럼 썰어 놓겠다.”
강화에게는 조심스럽게 어란(魚卵)을 부탁했다. 조금 귀한 거라 쉽지는 않을 거라 하면서도 알아보기로 했다. 강화 오는 조건은 각자 노래 세곡 준비다. 여러 말이 나오다 내가 진행 중인 히말라야 트래킹 계획을 말했다. 역시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도 가까운 시일 내에 이루어졌으면 한다. 멋들어진 시간은 이렇게 흘렀다.
정좌처반다향초(靜坐處茶半香初) 조용히 앉아 차를 마셔도 그 향기는 처음과 같고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이런 오묘함 속에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하산을 위해 일어선 시간은 11시가 넘었다. 수도암까지 비교적 짧은 하산 거리라도 있을 건 다 있었다. 급경사에 기암 봉우리도 있었고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낙엽도 운치 있게 널려 있었다. 이러면서도 사진 두 어장을 더 남겼다.
결국 취흥이 터졌다. 산속에는 노랫소리가 울려 펴졌다. ‘푸르은 파아도를 가르는 히인 돋단배처럼 그대 그리고 나.... 우리 헤어져어 서로가 그으리운 그대애 그리고오 나아.....’ ‘나암쪽 나아라 바다 머얼리 무울새가 나으르고 뒤이 똥산에 동백꽃도오오...’ ‘백마아 가아앙에 고요한 다알바아아아암에 고라안사에 종쏘리이이가 드을리어어 오며어언....’
나도 모르게 산행 경력이 쌓였는지 볼 거 다보고 느낄 거 다 보며 이젠 내리다 노래까지도 부른다. 막 떨어진 듯한 싱그러운 낙엽이 이끼긴 시멘트 길과 잘 어울리는 길을 끝으로 일단 이번 산행은 끝이다. 조금 따라 오르니 수도암이다.
설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수도암은 신라의 고승 설두화상이 수도했다고 전해지나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200년이 넘는 매화나무와 잣나무 고목이 문화재자료 제14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하나 찾을 수 없었다. 암벽 석굴 속의 샘에서 물이 나온다고 하나 용머리 조각 입은 마른채로 있었다. 나는 이렇게 잠깐 아주 잠깐 수박겉핥기 식으로 외부만 스치고 수도암을 나왔다.
얼마 걷기 전에 도착한 마을에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정 회장이 다가가 물었다.
“옥과 가는 버스가 있나”
“오후 1시 20분에 있을 거다.”
“택시는”
“부르면 바로 온다. 7천 원이면 갈 수 있을 거다. 번호를 알려주겠다.”
허리가 반쯤 굽고 연세가 드신 법한 할머니가 막힘없이 택시 번호를 알려준다. 이런 분들을 뵈면 기분이 좋다. 두 분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옆 작은 냇가에서 등산화와 바지에 묻은 흙을 닦았다. 마을 입구 정자 가기도 전에 택시가 들어온다. 정 회장이 창평 슬로우시티까지 2만 원에 합의했다며 타란다.
택시가 초겨울 옥과면 빈 들판을 달린다. 넷 중 몸무게가 많이 나가 앞자리를 선택받았다. 당연히 시야가 좋았다. 드문드문 남은 억새에서 나오는 은빛과 추수 끝난 논바닥 반사 빛이 합치면서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불과 몇 분되기도 전에 소재지가 나왔다. 그래서 택시비가 7천 원인가 보다.
“여기서 곡성역까지는 얼마나 되나.”
“24km 정도다. 옥계는 곡성과 담양 경계지다.”
주차한 승용차 본네트에 고양이 한 마리가 터를 잡았다.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정 회장은 저 고양이가 동네 암고양이를 다 차지할 거라 했다. 암수도 모르면서 그랬다. 세대 차이다. 요즘이 여성 상위 시대인 데 고양이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 바꿔 말하면 저 고양이는 암고양이고 동네 수고양이를 다 차지할 수도 있다.
얼핏 지난 학교가 벌써 둘이다. 우리나라 교육열이 이렇다. 외국 같으면 이 정도 크기 마을이면 벌써 여러 개를 합쳐 하나로 만들었을 거다. 자주 보이는 또 하나는 정자다. 이곳뿐 아니라 오늘 지나온 길에서도 심심찮게 서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 노인회관이 필수로 들어서듯 남도에서는 마을 정자가 당연히 있어야 할 시설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일찍부터 정자문화가 발달해온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 정자는 무엇인가.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해 본다.
「정자는 휴식처이자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다. 한가할 때 홀로 거기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마음을 정리해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럿이 오붓하게 모여 정서를 교감하고 흥을 돋우었던 장소인 것이다.
재미나는 이야기로 길고 무더운 여름밤을 보내기도 했고, 정치적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 기분이 나면 노래 한 곡 뽑기도 했다. 게다가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흥이 나면 언제고 시 한 수쯤은 거뜬히 지어낼 수 있을 정도로 문학이 생활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마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유행가를 부르듯이 그들의 시작(詩作)은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옛 정자는 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정자문화라고 부르는 내용인 것이다. 이러한 정자를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말할 것도 없이 위치 설정이었다. 마을 어귀 사람들이 편안히 모일 수 있는 한쪽켠, 전망이 좋은 언덕, 강변의 한쪽.... 우리가 지나가다 잠시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에는 여지없이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맥길에서 내리는 과치재도 택시로 순간에 지났다. 그 너머 방아재가 오늘 목적지라 하니 기사가 금방 알아듣고 며칠 전에 혼자 호남정맥을 종주하는 여자 분을 태웠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줄기를 보며 어디 어디라고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이러면서 도착한 곳이 창평면 소재지다.
# 우리 일행이 뒤풀이를 하는 식당(전통창평국밥)도, 힐링 하러 가는 슬로시티도 창평면 소재지에 있었다. 일석이조다. 창평은 백제 때부터 형성된 도시다. 1914년 담양군에 통합되어 지금까지 창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번 구간을 하면서 금과도 지났고 옥과와 창평이란 지명도 수없이 들었다. 이러니 나도 모르게 호남가를 중얼거리며 걸었다. 잊은 부분은 몇 번 반복하고 보니 오늘만 해도 광주, 담양, 남원, 옥과, 화순, 구례, 곡성, 장성, 옥과, 창평 등을 어떤 방식으로 만났다.
창평은 지금은 면단위 급이나 예전에는 호남가에 들어올 정도로 큰 도시였다. 오히려 지금 큰 도시인 목포나 여수는 호남가에 없다. 이런 창평이니 당연히 남아있는 역사와 문화가 깊고 이중 고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양반가가 지금은 슬로시티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에 먹거리도 발달했다. 쌀엿과 국밥이 유명하다. 우리 일행이 뒤풀이를 한 전통 창평국밥집에서 맛본 국밥의 맛은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시내에서 국밥집은 많이 눈에 보인다. 허나 이런 명품 식당을 현지답사 없이 찾아내는 이 팀장의 능력도 보통은 아니다. 마침 장날이라 장 구경에 들어갔다. 기대한 담양의 죽세공품과 토산품은 눈 씻고 봐도 없었다. 먹거리와 입을 거리 중심으로 변한 시골장날 모습이 못내 아쉬웠다.
장구경을 마치고 예약한 뒤풀이 집을 찾아 짐을 맡기고 슬로시티로 향했다. 가기 전 막걸리로 출출함을 달래자며 포장마차로 들었다. 일부러 이 지방 색깔이 강한 곳을 물어 찾았다.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이 아닌 60대 후반에 손톱만 예쁘게 물들인 아주머니가 반겨줬다.
처음에 주문한 안주는 닭발이었다. 냉동에 만 오천 원이나 받는다. 반 만 부탁하니 그럴순 없다고 해 애초 찾던 두부로 결정했다. 옆에 앉아 계시던 검은 뿔테안경의 할아버지가 해주라 해도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우리도 냉동된 뼈 없는 닭발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두부 한 모를 시켰다. 감자채 볶음과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덤이다. 배보다 배꼽이 컸다. 옆에 계신 할아버지는 1944년 생이고 광주 충장로에서 오셨다면 간간이 본인 얘기를 한다. 느끼는 풍모나 말투에서 왕년에 한 가닥 한 폼이 가끔 나온다. 정 회장이 큰 형님 연배라며 여러 말을 나눈다.
막걸리 병이 하나 둘 늘어간다. 세 병이 넘을 무렵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커피를 대접하고 가셨다. 다음에 오면 화순 온천 옆 농장으로 오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커피 4잔 모두 다른 모양 잔이고 양촌리 스타일이다. 작은 배려가 큰 감동으로 잔잔하게 다가왔다.
이런 저런 얘기에 친근함을 느낀 주인이 합석했다. 1948년생이란다. 막걸리를 권하니 맥주를 마신다며 유리잔과 병을 가지고 온다. 몇 순배 돌고 흥이 더해졌다. 한 잔을 걸친 할머니 아니 아주머니는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불나비 등을 구성지게 불러댔다. 노래만 70년대가 아니라 모든 분위기 자체가 그때다.
바로 이웃한 산 너머에서 가사문학이 탄생했다. 그 후예들이 이어가는 건 자연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말이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송강의 장진주사(將進酒辭)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셈하면서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에
지게 위에 거적 덮여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꽃상여에 만인이 울고 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쌀쌀한 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양철 원탁에다 젓가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뽕짝, 폴카, 고고 리듬이 섞여 나온다. 완전히 째즈 페스티벌이다. 정 회장이 왕년의 솜씨를 발휘하며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를 연속해 두드리기에 나는 참지 못하고 일어나 아주머니 손을 잡고 육박자로 돌렸다. 이런 건 즐기고 입을 딱 닦아야 하는데 불고 님이 핸드폰을 여러 차례 눌렀다.
결국 아들이 사왔다는 낙지젓이 추가 서비스로 나오고 빈 접시에 안주가 더해지고 막걸리 병도 보태지면서 유랑극단의 막은 내렸다. 다음에 다시 오라하다가 언제 또 오겠냐는 아주머니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다시 무대는 5분 정도 거리의 슬로시티다. 입구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에서 달콤한 인생의 미래를 염려하여 출범시킨 운동이다. 공식명칭은 ‘치타슬로’로 유유자적한 도시,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 말이다. 출발은 느리게 먹기와 느리게 살기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2010년 현재 20개국 135개 도시가 슬로시키에 가입되었다.
이 운동은 빠르게 변화하면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연환경 속에서 자연을 느끼며 그 지역의 먹을거리와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삶은 표방한다. 지역 정체성을 찾고 지역민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동시에 급변하는 도시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이른바 마을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기계에 끌려가는 요즘 귀담아 들을 부분이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창평슬로시티는 고택과 돌담사이로 시간도 쉬어가는 삼지내 마을이다. 백제 시대에 형성된 마을로, 동편의 월봉산과 남쪽의 국수봉이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펼쳐 감싸안은 형국이다. 월봉천과 운암천, 유천이 마을 아래에서 모인다하여 삼지내라고 한다. 전통가옥과 아름다운 옛 돌담장이 마을 전체를 굽이굽이 감싸고 있다. 아늑한 돌담길을 걷다보면 장말로 시간마저 쉬어 가는 듯 한다.
삼지내 고택은 조선 후기 전통적인 사대부 가옥으로 남방 가옥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여러 채의 전통 한옥이 잘 보존되어 있어 전통마을의 가치를 더한다. 옛 돌담길은 등록문화재 265호로 역시 조선시대에 축조되었다. 둥글게 자리 잡은 한옥 집들을 둘러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둥글게 모나지 않게 조성된 돌담의 길이는 약 3,600km에 이른다. 돌담에 쓰인 화강석은 강 상류의 돌로 알려져 있어 깨끗한 물이 흐르는 마을임을 상징한다.
이 마을에는 종가집 종부로 전통 한과 ‘박순애’ 명인과 쌀 엿 ‘유영군’ 명인 그리고 고씨마을 10대 종갓집 종부인 간장 ‘기순도’ 명인 등 세 명의 국가 명인도 계시다. 전통 효소집도 있고, 직접 체험을 통해 양가집 호흡을 느낄 수 있는 민박집은 여러 군데 있었다. 이 중 한과는 정 회장의 배려로 선물로 한 상자를 받았다. 맛을 본 집사람이 말보다 탄성이 먼저 나왔다.
이곳 역시 직접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정 회장 덕분에 마련된 자리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남산 한옥마을과도 느낌이 달랐고, 용인 민속촌은 격에서 비교가 어렵다. 유성룡 선생의 안동 하회 마을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겠으나 이미 그곳은 사람들이 베려버렸다. 하회마을 인근 그 병산서원마저도 몇 년 사이에 완전히 폭탄을 맞았다. 제발 이곳만은 그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초심을 지켜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러다 방아재에서 버스를 탔다는 이 팀장의 전화를 받았다. 한 족은 걷는 즐거움을, 한쪽은 힐링을 즐겼다. win-win이다. 거의 세 시간만의 재회다. 고진감래라고 뒤풀이 자리는 항상 웃음과 힘이 넘친다. 건배사는 기억이 없다. 요즘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총명불여둔필(總名不如鈍筆, 아무리 총명해도 무딘 연필만 못하다)이라고 앞으로는 메모지나 녹음기라도 준비해야겠다.
이 자리에서 비광 님이 누군지 알고 잔을 권했다. 항상 버스 옆 자리에 있던 분이 비광이었다니 등잔 밑이 너무도 어두웠었다. 한문희 총대장도 얘기를 많이 했던 분이다. 혼자 뒤늦게 출발하여 합류하신 분에게도, 이 팀장에게도 잔을 권했다. 맥주가 떨어져 조금 적게 넣은 잔을 이 팀장을 단번에 알아낸다.
권영우 전화를 받고 깨보니 고속도로 위다. 시간을 보니 7시 경이다. 순수하게 산술적으로 시간을 판단하고 퇴고 술을 사기로 했다. 이 정도 시간이면 강화까지도 10시 전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성환 휴게소로 들어가는 애마를 보고 내 계산이 엉터리임을 알았다. 도로 위는 전체가 차다. 아차 싶었다. 결국 늦게야 양재에 내렸다. 권은 이미 집에 들어가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강화 도착 시간도 자정을 넘겼을 거다. 이게 10구간의 마무리다.
# 등산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전국등산학교 교재를 중심으로 아주 간략히 정리해본다. 참고로 알피니즘(Alpinism)은 등산을 말하며, 마운티어링(Mountaineering)은 전반적인 등반 행이라 말하고 있다.
‘알피니즘’이라는 말은 스위스를 가운데 두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다섯 나라에 걸쳐 있는 유럽 알프스의 고산 지대에 그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등산가를 ‘알피니스트’, 등산학교를 ‘알파인 스쿨’, 산악회를 ‘알펜 슈톡’이라고 하는 것도 모두 알피니즘에서 시작된 말이다.
알피니즘은 등산의 역사적 기원 때문에 생겨난 말일뿐 ‘알프스 등산이라는 좁은 뜻이 아니라 널리 일반적인 등산을 뜻한다.’고 프랑스 등반가 ‘뽈 베시에르’가 그의 저서 알피니즘의 첫머리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알피니즘, 다시 말해서 등산(登山)이란 무엇인가? 등산은 산을 오른다는 뜻이지만 원래 서구인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에서 온 서구적 개념이다. 즉 등산은 알피니즘을 번역해서 만든 말이다. 등산에는 고전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가 있는데, 전자는 모험과 도전의 의미가, 후자는 탈출 수단의 의미가 그것이다.
영국에서 나온 등산백과사전에는 알피니즘을 ‘눈과 얼음이 덮인 알프스와 같은 고산에서 행하는 등반’으로 풀이하고 있다.
1760년 스위스 제네바의 대학 교수인 ‘베네딕트 드 소쉬르’가 샤모니에 가서 하늘 높이 솟은 알프스의 초고봉 몽블랑(Mont Blanc. 4,807m)을 보고, 정상에 오르는 길을 아는 자에게 상금을 내걸었다. 몽블랑의 몽(Mont)은 프랑스어로 산이며 블랑(Blanc)은 흰빛으로 ‘언제나 하얀 만년설을 덮인 산’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몽블랑의 정복은 미지의 세계, 그 공포와 곤란함에 대한 도전이었다. 여기에는 알프스에 대한 숭고한 등산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를 일컬어 알피니즘이라고 한 것이다.
등산은 산과 사람과의 만남에서 비롯하지만, 사람과 산의 만남이 모두 등산은 아니다. 도를 닦으러 입산하거나 약초를 캐며, 짐승을 잡을 목적으로 산에 가는 것은 등산이 아니다. 승려나 심마니, 사냥꾼이 제 아무리 산을 잘 오른다 해도 우리는 그들을 등산가라고 하지 않는다. 등산은 행위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알피니즘에는 알피니즘을 실현하기 위한 고유의 특수한 세계가 있다. 그것은 무형 또는 유형의 세계이며 일정한 테두리가 없는 것이다. 알피니즘의 무대는 대자연이다. 이 자연은 고산과 칼날 능선, 깎아지른 암벽, 눈과 얼음 그리고 넓은 공간과 허공 등으로 펼쳐지는 별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장시간에 걸쳐 극한적으로 벌어지는 알피니즘 활동은 한마디로 정신적이고 육체적이다. 심한 육체적 노력을 넘어서 정신적인 것을 얻는 것이 등산의 특권이고 본질이다. 등산은 지식욕과 탐험욕 그리고 정복욕의 소산이며, 이때 알피니스트는 진정 자기를 알고 자기를 지배하며 자기를 이긴다.
알피니즘에는 또한 알피니즘만이 가지는 특수성이 있다. 그것은 일반 스포츠와 비교할 때 더욱 확실해진다. 일반 스포츠에는 심판과 규칙과 승부와 관객이 있으나 등산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나아가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 등산가 ‘리오넬 테레이’가 말한 ‘무상의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등산은 자기 과시가 아니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이며, 자연에 댛산 가장 순수하고 가장 가혹하며 가장 신중한 도전이다.
등산은 250년 가까운 시간의 흐름 속에 그 역사를 기록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안내 등반에서 안내자 없는 등반으로, 등정주의, 등로주의와 머메리즘, 벽 등반 시대, 대원정 시대, 무산소 단독 연속 등반, 알파인 스타일과 속공 등으로 역사를 바꿔가고 있다.
여기서 등정주의(Peak Hunting)는 비교적 등반하기 수월한 산등성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산행이었다. 이런 등정주의 산행 방식은 알프스 4,000m급의 마지막 봉인 마테호른(4,478,m)의 초등정인 1865년까지 계속되었다.
등로주의는 산등성을 따라 정상에 오르던 등반의 한 시대가 지나면서, 이번에는 산허리나 가파른 절벽에 길을 내며 오르는 모험이 시작되었다. 또한 난이도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자연히 보조 수단이 필요하게 되어 ‘인공 등반’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험로 개척을 주장하고 나선 등산가가 바로 ‘머메리’였다. 그리하여 그가 주장한 산행 형식이 등정주의에 대한 등로주의로 그의 이름을 따서 ‘머메리즘’이라고 하였다. 이것도 숲길 교육에서 주관식 문제로 나왔었다.
끝으로 등산과 인생을 논해보자. 영국의 등산가 ‘조지 훤치’는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방법’이라고 했다. 등산은 외형상 의식주(衣食住)의 이동이며, 내적으로는 그 자체가 인생이다. 높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스스로 노력하며 고생하는 그 과정은 인생과 다름없다.
프랑스의 등산가 ‘샤뗄리우스’는 ‘등산은 길이 끝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여기에 등산만이 가지는 특색과 특권이 있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며 온갖 어려움과 싸우며 이를 극복하는 정신과 행위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1950년 인류 최초로 8,000m의 정상에 오른 프랑스 등산가 ‘모리그 에르조그’가 그의 저서 ‘안나루르나 등정기’의 결론으로 한 말에서 우리는 등산과 인생의 문제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안나푸르나에 빈손으로 갔지만, 안나푸르나를 오름으로 인생에 새 장을 열었다.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있다.’
미국의 등산 교본에서 ‘등산가는 산의 자유를 추구하는 자로 대자연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권에는 특권과 보답도 따르지만 책임과 의무 또한 따른다.‘고 했다.
알파니즘이 무엇인가 알려는 자, 그리고 알피니스트가 되려는 자는 남다른 특권과 책임과 의무가 어떤 것인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등산은 여가를 보내는 방법으로는 매우 힘든 선택이다. 그래도 등산을 하고자 한다면 폴란드의 철인 크라이머 ‘보이텍 쿠르티카’가 털어놓은 다음의 고백을 음미해야 할 것이다.
‘알피니즘이란 고통 또는 자기 극복의 예술이다.’
첫댓글 소설같은 소설을 읽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그길을 ,느낌을 ,흥을 ,여유를 즐겼습니다
산행기로 9구간을 대신 합니다 고맙습니다 ^^
아쉽게도 뵐수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다다음 구간에서는 인연을 기대해보렵니다.....
호남정맥이 다음구간 이면
이제 허리를 돌아 무등산을 향해갑니다.
우중의 산행길을 김삿갓이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었고
창평 장날 그 주막집 아낙네의 "보고 싶은 얼굴"이란 노래가
누구였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준 산행 이었습니다.
오래된 묵은 지(김치) 처럼 호남정맥 길은 숙성되어 갑니다.
山의 정의/알피니즘/등산의 역사/
자유롭게 생각이 미치는 데로 솔직하게 살아있는
기행을 써준 우리 이영호 동지에게
감사드립니다.
영호님께 다시한번 감사 드립니다
회장님과 벗하시니 그다운 소설이...
혼자서는 할수없는 ... 회장님 감사 합니다 ^^
소설의 주인공이 된듯~,깨알같이 느낌으로 읽었음다. 우중산행 수고하셨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