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앙프라방의 깊고 푸른 밤
해 질 녘 강가에서 일몰을 기다린다. 수 개국 수 천리를 감돌아 온갖 애환과 사연을 품고 흐르는 동남아 사람들의 젖줄인 메콩 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맑고 푸른빛은 찾을 수 없고 황톳빛의 넘실대는 물결이다. 멀리 물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아쉽게도 능선에 걸린 짙은 구름 때문에 일몰은 구경하기가 어렵다. 처음 계획은 푸시 산 정상의 일몰을 감상하려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서 이 강가에서 지는 해를 보며 만찬을 즐기려고 준비 중이다.
오전에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 관광을 잠깐 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루앙프라방으로 날아왔다. 무더위로 텁텁하지만 깔끔하게 단장된 공항은 나그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곳은 메콩 강의 항구도시로 평균 고도가 높고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곳이다. 수도에서 거리가 멀고 오히려 중국 윈난 성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필요한 생필품은 윈난 성의 쿤밍에서 가져온다. 울창한 원시림을 보며 중국 남부를 여행하는 착각이 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국, 미얀마, 라오스와 삼각 국경에서 마약을 밀거래하는 장소와 가깝다.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자들이 이곳을 거쳐 태국이나 다른 나라를 통해 우리나라로 오는 지름길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 부쩍 라오스 여행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미개발국가 여행이란 사서 하는 고생이지만 그 자체가 살아간다는 존재 이유가 아닐까. 몇몇 친구들과 뜻이 맞았다. 힐링이라는 핑계로 라오스 탐방을 결정했다. 우기고 비수기라 걱정했지만, 다행히 스콜 현상이 잦았다. 금세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이내 하늘이 쨍쨍해진다. 여행의 즐거움은 장소도 문제지만 누구와 가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저 함께 하기만 해도 편하고 즐거운 사람들과의 여행이면 최선의 길이다. 때로는 티격태격도 하겠지만, 초등동기생들이라 수십 년 세월을 거슬러 간 느낌이다.
루앙프라방에서 남쪽으로 팔십 여 리 떨어진 꽝시폭포를 찾았다. 신선이 노닐다 간 곳이라 전한다. 열대림 같은 오솔길을 휘파람 불며 천천히 걸었다. 산호초가 잠긴 듯 푸른 물빛을 한 폭포가 나타난다. 대여섯 갈래로 나누어져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보라가 초록 구슬 같다. 손에 물을 담아보았다. 투명하고 맑다. 바닥이 석회암이고 층층으로 되어 얕은 곳에선 물놀이를 많이 즐긴다. 에메랄드 물빛이 소리치며 어서 들어오라고 여행객을 유혹한다. 종종 익사 사고가 나기에 수영을 금지하고 있지만 젊음에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자유여행 온 서양인들이 비키니 복장으로 느긋하게 수영을 즐기는 모습이 부럽다. 생명의 열기가 후끈 전해온다. 그들이 바로 신선이 아닌가. 내 언제 저런 날이 있었던가. 다랑논처럼 계단식으로 이어진 물길이 중국의 구체구와 많이 닮았다.
푸시 산을 올랐다. 수백 개의 계단으로 연결된 정상에서는 루앙프라방 시내 전체가 한눈에 안긴다. 여기서 즐기는 일몰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늦은 저녁이 아니고 뭉게구름 때문에 석양의 황홀함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옆 사람들이 얘기를 한다. 멀리 메콩 강의 싯누런 젖줄이 눈에 확 들어온다. 올망졸망한 산들이 분지처럼 오래 된 도시를 호위하고 있다. 마을 전체가 오밀조밀하고 장난감처럼 귀엽다. 오랜 시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기에 건물 형식이 유럽풍이다. 푸른 숲들 사이로 붉은 지붕과 흰 벽이 조화를 이룬 집들. 언뜻 보면 프랑스 시골의 한 지역을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휴가를 얻어 혼자 여행 온 L선생님과의 추억도 색다른 인연이었다. 미술과 관련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지천명을 갓 넘긴 분이다.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다. 메콩강가의 야외 천막 아래 저녁 만찬이 준비 되었다. 숯불에 구운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석양의 메콩 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은은함이 젖어 있다. 이따금 강바람이 가볍게 그녀의 머릿결을 넘긴다. 나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어색한 시선을 메콩 강으로 돌린다. 도도히 춤추듯 솟아오르고 때로는 몸을 비트는 거대한 한 마리 구렁이처럼 싯누런 몸통을 뒤척이며 넘실대는 물결을 바라본다. 물 냄새가 야자수 수액 같으면서도 비릿하다. 순간의 내 삶도 저 속에서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가볍게 부딪치는 차가운 맥주잔에 텁텁한 남국의 분위기가 물결 따라 출렁거린다. 세월의 수레를 몇 시간만이라도 멈추고 싶다. 삶의 절정만 아득할 뿐 머리는 하얗게 꿈속에서 꿈을 꾸는 순간이 아닌가.
저녁 후, 마사지를 선택하지 않은 L선생님과 나는 자연스레 야시장을 함께 찾았다. 루앙프라방의 야시장은 푸시산 아래 노천형식으로 매일 새롭게 열린다. 곳곳에서 온 소수민족들이 손으로 수놓고 짠 작은 공예품이나 옷이 주 상품이다. 불빛 아래 비치는 얼굴들이 가판대와 함께 일렁인다. 아기를 안고 느긋하게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에서 반세기 전 한국 시골의 5일 장터를 회상한다. 단단한 나무나 돌로 만든 작은 공예품도 야시장에서는 반짝이는 보물이다. 과일 광주리를 둘러멘 떠돌이 상인의 미소가 푸근하다. 덤으로 얹어주는 인심이 고향 아주머니 같다. 한참을 돌아다녀도 지겹지가 않다. 호객하지 않고 기다리며 웃는 모습이 너무나 순박하다. 편안하게 구경을 하고 손짓으로 흥정을 하는 즐거움이 여행의 기쁨이다. 한 여행지에서 한 가지 기념품만 모으는 그녀와 물건을 고르는 재미도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 한 컷이다. 시끌벅적한 시장의 풍경에서 라오스의 앞날을 읽는다. 창창하고 젊음으로 싱싱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호텔 베란다에서 먼 하늘을 바라보니 별이 총총하다. 불현듯 자신을 훔쳐보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내 삶은 어디까지 왔을까. 마음은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무슨 인연으로 이 멀리 라오스의 한 귀퉁이에서 서성이고 있는가. 모든 것이 아득하다. 삶 자체가 꿈같다. 저 멀리 어린왕자가 살고 있다는 별이 보이는 듯하다. 가족의 얼굴이 떠오르고 함께 여행 온 친구들의 수다가 하늘에서 스러진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유심초의 노래가 나를 돌아보게 한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반짝인다. 루앙프라방의 깊고 푸른 밤이 어둠 속에 시나브로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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