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열여섯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16-1 강우규 - 조선총독 처단
출생 - 사망
1855.7.14. ~ 1920.11.29.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
-1920년 11월 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대한의 청년들에게 남긴 유언-
강우규(姜宇奎, 1855.7.14~1920.11.29) 선생은 1855년 7월 14일(음 6월 1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호는 왈우(曰愚)이다. 선생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님 집에서 성장하였지만, 어려서부터 총기가 남달랐으며 의기 또한 대범하여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청소년기 친형에게 한학과 한방 의술을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다.
하지만 전통적 학문으로는 개항 이후 점증하는 사회의 근대화 요구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개화사상으로 기울어졌고 기독교 장로교에도 입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집안 어른들과의 갈등도 생겨 1883년에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홍원에서 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인술(仁術)을 베풀면서 읍내 남문 앞 중심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선생은 교육 계몽운동을 펼쳤다.
선생은 한말 함경도 일대에서 민족 교육과 기독교 전도 사업을 통하여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국운은 계속 기울더니 급기야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50대 초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화룡현 두도구로 망명하였다. 이후 선생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면서 박은식·이동휘·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도를 모색하여 갔다. 특히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당시, 계봉우가 선생의 집에 2개월 동안이나 유숙하기도 하였다. 이때 계봉우는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저술하였는데, 선생은 이를 보면서 안중근 의거를 다시금 가슴 깊이 새긴 것 같다. 즉 자신도 독립운동 전선에서 안중근과 같은 인물로 산화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선생은 1915년 우수리강 대안의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북만주에 위치한 이곳은 남만주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평소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구상하던 선생이 눈여겨보아 둔 곳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이곳에 한인 동포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신흥동(新興洞)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선생이 이곳에서 한민족을 새롭게 발흥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노력으로 신흥동은 불과 1년여 만에 100여 호의 한인 마을로 성장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선생은 크게 세 가지 일을 추진하여 갔다. 첫째는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소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교회를 세워 한인들에게 기독교 박애주의에 입각한 동포애와 민족적 일체감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셋째는 노령과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신흥동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국제 정세가 변화하여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게 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집권한 레닌 정부가 약소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공언하였던 것이다. 특히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의 분위기 속에 국제사회에는 민족자결주의와 인도주의가 크게 부상하고 있었다. 이 같은 국제사회의 정세 변화를 파악하고 민족 역량을 결집하여 일으킨 것이 바로 1919년 3·1운동이었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당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장을 맡아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번져 갔다. 이 소식은 해외로도 퍼져나가 만주·노령·미주·일본 등 한인 동포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선생이 건설한 북만주의 신흥동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 광동학교 학생들과 동포들을 모아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요하현 일대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만세 시위운동만으로 조국독립이 이뤄지리라고 믿지 않았기에 무엇인가 다른 독립운동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서 이동휘가 활동하고 있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선생은 여기에서 3월 26일 이동휘의 부친 이승교와 김치보·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요하현 지부장을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강우규 [姜宇奎] - 조선총독 처단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