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金煥基(1913-1974) -본관 김해김씨 삼현파
호는 수화(樹話). 추상적 조형언어로 한국적 정서를 양식화한 대표적 서양화가이다.
도쿄에서 중학교를 졸업했고 일본대학 미술부에 재학중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에서 미술수업을 하는가 하면 자유미술협회에 참가했다. 이과회전(二科會展)에 〈종달새가 울 때〉·〈25호실의 기념〉을 출품해 입선했으며, 1936년 11월 도쿄 천성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일본의 자유미술협회전 회원으로 추천되어 적극적으로 출품하면서 193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추상미술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큐비즘적 시각을 받아들이면서 순수조형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더욱 기울었고 1930년대 고전적인 화풍이 자리잡고 있었던 우리나라 화단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했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추상미술에 깊은 관심을 갖고 유영국·이규상 등과 함께 1948년 신사실파라는 그룹을 조직하였고, 한국 현대미술의 초기 시절을 장식했다. 1952년 피난시절에 부산 뉴서울다방에서 〈달밤〉·〈산〉 등으로 개인전을 열고 이어 홍익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1956~59년까지는 프랑스에서 체류하면서 몇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1962년에는 홍익대 학장에 취임하고 1963년에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에 피선되어 미술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해에 뉴욕으로 간 그는 이때부터 종전의 향토적인 서정성이 더해진 추상에서 오로지 선과 점의 질서와 균형을 표현하는 작업으로 화풍을 바꾸었다. 이때의 대표작이 한국일보사 주최의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서, 화면 가득히 점을 찍어나간 작품이다. 뉴욕에서 뇌일혈로 죽은 다음해인 1975년 뉴욕에서 회고전이 열렸으며,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는 50점의 작품으로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45A771E4BC5FD551B)
수화 김환기 선생님은 한국 추상미술의 제1세대로서 세련되고 승화된 조형언어로 한국적 서정주의를 바탕으로 한고유의 예술 세계를 정립하여 한국을 비롯, 현대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와 뉴욕으로까지 그 이름을 알리신 분입니다.
그는 1930년대 후반 경부터 가장 전위적인 활동의 하나였던 추상미술을 시도, 한국의 모더니즘을 리드하였으며 현대적이고 절제된 조형언어를 바탕으로 이룩한 그의 정서세계는 50년대에 이르러 산, 강, 달 등 자연을 주 소재로 더욱 밀도 높고 풍요로운 표현으로 한국적 정서를 아름답게 조형화 하였습니다.
그의 예술은 56년부터 59년까지 약 3년 간의 파리시대와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수상한 해인 63년부터 작고한 74년에 이르는 뉴욕시대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줍니다. 파리시대와 서울시대를 포함한 50년대까지 그의 예술은 엄격하고 절제된 조형성 속에 한국의고유한 서정의 세계를 구현하였으며, 60년대 후반 뉴욕시대에는 점, 선, 면 등 순수한 조형적 요소로 보다 보편적이고 내밀한 서정의 세계를 심화시켰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96BB61B4BC6002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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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金煥基(1913-1974) - 김해김씨(삼현파)
김환기의 집안은 고려말 김관을 중시조로 삼은 삼현파이다 삼현파는 본래 자계서원이 있는 경북 청도쪽 인맥이였다. 호남지방과 인연을 맺은 것은 김일손이 사형당한 무오사화때 ,김준손과 두 아들 김대유와 은재 김대축(1496~1563)이 순창에 유배된 데서 시작되었다.
김대유와 김대축 형제는 기묘사화 후 고향 청도로 낙향하였는데 김대축의 다섯째 아들로 진사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낸 김철이 남원을 거쳐 해남에 정착하였다. 김철의 아들 김치인이 관직에 나가 하동부사를 역임하였으며 김환기의 직계 선조로 부사공가를 형성한 주인공이다. 김환기의 선조들이 해남에서 기좌도로 들어온 시기는 병자호란(1636)때이다.
김철의 5세손인 김인기가 솔가하여 기좌도에 자리를 잡았다.김인기(1625~1690)는 중시조의 14세손이며 김환기의 9대조 할아버지이다.김인기의 후손들 역시 선대에 따라 사대부가 문풍과 충효전통을 계승하였고 주변의 모범이 되었다. 김환기의 고조부 계은 김구종과 증조부 지곡 김경락,할아버지 귤포 김용제, 큰할아버지 연암 김용효(1845~1907)는 귤포거사로 칭송되었다. 김환기 아버지 만오당 김진곤과 큰아버지 매오 김태곤 역시 격조 높은 문장의 선비로 손꼽혔다. 효행과 형제간의 우애로 널리 추앙받던 집안이다.김환기의 증조부 맏형인 청송재 김경하의 효행이 유명하여 나라에서 정려각을 내렸을 정도였다.
안좌도에 뿌리내린 김환기의 집안이 경제적으로 크게 번창한 것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였다. 1910년대 부터 부농이면서 육지와의 운송업과 상권도 갖고 있었다. 김환기의 부친은 남일 이라는 선박회사를 경영했다. 그런데다 현재 안좌도로 이름을 바뀌게 한 안창도와 기좌도를 있는 간척사업을 추진하고 완성한 집안이다.
신안 김환기 가옥 중요민속자료2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