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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2A 나는 어디서 어디로(요13_36~ )
오늘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침 장례식에 가가지고 드리는 설교와 같아가지고 좀 주저스러운 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제가 요한복음 강해 설교를 드려오는 중에 고난주간 또 부활주일,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성령강림 주일 겹쳐가지고 절기 설교를 하고 오는 중에 잠깐 중지했고 계속 하는 말씀이기에 오늘은 그런 뜻으로 말씀이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예수님께서 다락방 설교 중에 너희가 조금 있다가 서언으로서 너희가 조금 있다가 나를 보지 못하겠다. 그렇게 말씀을 할 때에 그 마음 가운데 제자들이 받은 충격이 크겠지요. 한 사람은 배신하고, 한 사람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겠다. 그리고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가겠다고 하는 그 말씀 또 예수님이 한 걸음 더 나가서 어쨌건 너희가 조금 있다가 나를 보지 못하겠다고 하니까 아주 근심스러운 그런 마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렇게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책을 열심히 읽는 분들에게 책 한권을 추천합니다. 이 불어 블란스 사람 작가가 쓴 생키비치가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는 이 말씀은 불어로는 쿼바디스 도미네 그렇게 됩니다.
그 책은 유명한 역사 소설입니다. 어떤 학자가 나는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는 이 책은 여러 번 읽고 참 많은 은혜가 되더라. 그런 얘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한번 그 책을 몇 번 읽어 봤어요. 보는 가운데 물론 그것은 로마 교회 가톨릭교회의 그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고 하나 전설이라고 하나 대단히 역사적인 사실에 가까운 그런 얘기가 됩니다. 어쨌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말씀을 좀 부연해가지고 주여!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여야 되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나는 어디에서 어디로 라는 그런 좀 철학적인 그런 제목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성경 본문에 있는 말씀을 드립니다.
구약 성경 예레미야서 10장 23절에 여호와여!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오며 한번 받아합시다. 여호와여!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오며 걸음을 지도하는 자에게도 없나이다. 인생은 자기 길을 모른답니다. 인생은 자기 길을 잘 모른답니다. 혼인의 길도 잘 모르고, 직업의 길도 모르고 인간의 마지막 종착점에 달하는 그 건너편의 세계의 길도 인간은 모른다. 이겁니다. 공자님 같은 분은 조문도문 석사가라 아침에 가는 길을 알면 저녁에 죽어도 좋지 인생에 가는 길을 알았는데 죽음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그런 글귀를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들어 예화를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는 설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나라의 이조 초기에 수양대군이라는 사람이 그 임금의 자리가 탐 나가지고 조카를 몰아내서 죽이고 또 그 자리를 단종으로 하여금 다시금 복위케 하려다가 발각이 된 80여 명의 충신들이 저 서울 가면 옛날에는 노들강변 노량진이라는 그 나루터에서 목이 잘려서 죽은 얘기가 있습니다. 아주 그런 참사가 있어요. 참사가 있는데 옛날에는 사람을 죽이려면 북을 쳐서 장단에 맞춰가면서 춤을 덩실덩실 이 칼을 가진 사람이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그래가지고 사람 얼을 빼가지고 죽인다고 그르니 춤을 덩실덩실 추는데 그 대학자 성산문이라는 분이 그 지필묵을 요구를 했어요. 내가 시한수를 남기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필묵을 받아가지고 그 죽음 바로 직전의 와중에서 참 의연한 자세로 시를 한편 썼습니다.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하니
회수일욕사(回首日欲斜)라
황천무객점(黃泉無客店)에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라
북을 둥둥둥둥 치면서 사람의 생명을 재촉하는구나. 이 목이 떨어지기 전에 서쪽 하늘을 바라보니 해가 늬웟늬웟 넘어가는구나. 황천에는 집한 칸도 없다고 하는데, 오늘 밤에 내가 죽어서 누구 집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지
황천무일점에 금야숙수가라 오늘 밤에 내가 누구 집에 가서 머물겠지 하는데 목이 들럭 날아갔다.
참 그것을 제가 그 읽어 보는 가운데 특히 가슴이 안됐고 이런 대학자도 가는 길을 몰라서 성산문이는 유교의 대학자입니다. 유교가 그렇습니다. 유교는 윤리를 많이 말했지만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그리고 윗사람에게 대한 예의를 갖추십시오. 부부는 어떠한 겁니다. 이렇게 윤리를 많이 말했지만, 인생의 그 건너편 세계는 일점의 말도 없어요.
또 물으면은 미지생이거늘 지사리요 사는 것도 다 모르는데 죽은 이후를 어떻게 알겠느냐 할 정도로, 어쨌건 가는 길을 모르고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하고 충절을 바치다가 목이 달아나는 그 직전에 그 감회어린 마음에 인생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이냐? 그걸 시한수로 읊은 그 대학자가 몰랐다. 이겁니다.
이 요한복음 14장에 대해 가지고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이 성경을 주석을 하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요한복음의 14장에 있어서는 쵸이스 문제 선택 문제를 요구한다. 선택을 해라.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그런 게 아니고, 선택을 강요해 온다. 이겁니다.
왜 우리는 한번 다 죽기 때문에 선택을 강요해 오는데, 이 말씀이 거짓말이면 예수님이 종교 사기꾼이 된다. 이겁니다. 아주 끔찍한 소리를 하셨지요. 그러나 종교 사기꾼의 말을 듣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새 사람이 되고, 구원을 받고 이 복음이 미치는 국가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면의 번영을 가지고 올 수 있는 그런 진리가 될 수 있겠나? 거짓말쟁이 말이 그리 되겠나? 그렇지 않지 이 말씀은 진실로 진실로 우리의 운명을 도박해도 절대로 손해 보지 아니할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인 줄 알고 나는 요한복음 14장에다가 나의 운명을 건다. 나는 이 요한복음 14장을 위해서 산다. 이깁니다.
이 요한복음 14장을 획을 중심한 선교와 복음을 전하는 일과 숨 쉬고 먹고 마시는 일에 나의 정성을 쏟는데. 결단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줄을 믿습니다. 그렇게 결론을 맺은 글을 읽어본 것 같습니다.
사랑하신 성도 여러분들 오늘 이 설교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 자주 나와서 여러분이 듣기가 거북함을 주는지 모르지만은 그러나 어찌합니까? 제가 예언을 하나 합니다. 100년만 지나면 이 자리에는 한 분도 없습니다. 맞겠습니까? 안 맞겠습니까? 맞지, 100년만 지나면 다 우리들이 좋건 싫건 간에 다 저 건너편에 가야 할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발등에 등불이 될 이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확실히 꺼지지 않는 밝은 등불이 되고, 인생에 가는 길, 나는 어디서 어디로,
한번 받아합시다. 나는 어디서 어디로 주여! 가르쳐 주시옵소서 뭐 철학으로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과학으로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뭐 금강산에 십년 들어 앉아가 도를 닦아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말씀, 태초의 말씀이 계시니, 말씀 되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을 우리가 아멘. 하고 믿으면은 여러분 가는 길이 밝아지고 분명해질 줄을 믿습니다.
제가 너무 자주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가 모르겠습니다. 마는 교회는 또 새로 등록한 분이 계시기 때문에 합니다.
제 아는 친구 장로님 한 분이 그 장인이, 장인이 잘 안 믿어요. 전도를 해도 글쎄다. 글쎄다. 그래 어떻게 어떻게 모셔놔가지고 크리스마스 때 감사절에 그래 한 번씩 모셔 나왔는데, 병이 덜커덕 들어가지고 돌아가시는데 숨이 껄떡하고 넘어가는 것이 다시금 깨어나 가지고 하시는 말씀이 자기 부인을 보고 자기 부인을 찾으면서 여보 길이 두나 보이는데 어디로 갈고 하더랍니다. 자기 혼자만 보고 있는데 어떻게 아나 부인이 보는 것 같으면 요리가라 하든지 저리가라 하든지 할 것인데, 여보 길이 두 개가 보이는데 어디로 갈고 하니 그 부인이 참 성령의 감동으로 슬기롭게 바짝 머리가 돌아가기를 여보 예수님이 내가 길이라고 말씀했으니 예수님을 지금이라도 영접하고 주여! 하고 부르면 주님이 당신을 옳은 길로 인도할 줄을 믿습니다. 아이고 이 사람아 이때껏 안 믿었는데 염치가 있어야 되지, 지금 염치 코치 찾을 시간이 아니라 카는기라. 그러니 영접하십시오. 하니까 그래 그러면 되나 하더니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여! 해보라 하니 참 주여! 가 잘 안 나온답니다. 그래도 그래도 주여! 하고 숨이 딸가닥 끊어졌답니다. 어디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은 어쨌건 간에 어쨌건 간에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우리가 길도 가는 길이 두 개가 있어요. 천국 가는 길, 지옥 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쨌건 오늘 말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 말씀 받아하세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며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이 근심하지 마라 했지요. 우리가 이 근심하는 게 많지만은 제일 큰 근심이 뭐겠어요. 죽는 거지 뭐, 죽는 거, 예수님이 내가 가서 예수님이 죽음이란 말을 한 마디도 안 썼어요.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말을 한 말씀도 안 쓰고 내가 가서 그냥 가서 내가 가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며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 책을 읽어 보면은 그 어른은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근심하지 마라. 이 말은 죽음에 맞서라 이겁니다. 죽음을 피하지 마라 이겁니다. 아이고 안 죽을라고 안 죽을라고 근심을 해도 죽을 거고, 죽을 때가 되면 주사 놓아도 죽을 거고 유명하다는 약 다 잡수셔도 죽을 거고 다 죽는다. 우리나라 내 허준이라는 분의 전기를 읽어봤어요. 3권 상중하 있는 걸 열심히 보니까? 그분도 유명한 한의사인데 죽되, 나중에 죽을 때 그리 죽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는 말씀이 죽음을 피하지 마라 죽음을 회피하지 마라 죽음에 맞서라 이겁니다. 그런데 그냥 맞서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믿음으로 맞서라.
한번 받아합시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 중요한 말씀이 있는 겁니다. 죽음을 피한다고 피해집니까?
동쪽으로 도망갑니까? 서쪽으로 도망갑니까? 눈을 감는다고 안 옵니까? 춤을 춘다고 안 옵니까? 그렇다면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해라 이겁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정면으로 죽음을 대면합니까?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그 대면할 때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왜 하나님을 믿으라 그랬느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 약속을 당신 앞에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라. 이겁니다.
하나님의 사랑,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그 태에서 난 자를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혹시 저희들은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 그렇게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실 만큼 우리를 독생자를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할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임종할 때라고 버리겠나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니 그 뜻이예요.
받아하세요.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니 다윗이 그리 말씀했죠. 우리 부모가 나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 줄을 믿습니다. 그렇게 고백했지
또 두 번째는 나를 믿어라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니까? 멸망으로 가는 길이 또 하나 있어요. 그 멸망으로 가는 길에서 영생으로 가는 길로 인도하시는 분, 내가 길이요 받아하세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느니라. 할렐루야 아멘. 믿습니까? 믿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이게 철학이 아니에요. 수양담이 아니에요 계시의 말씀이올시다. 거기에서 오신 분이 말씀하는 겁니다. 거기에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으라
하나만 더 하십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나니라 믿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그런 뜻에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서 죽음을 피하지 마라. 죽음에 맞서라. 제가 주암산에 부흥회 가서 몇 년 전에 70이 넘어가지고 아프거든 약을 먼저 찾지 말고 기도부터 먼저 하세요. 그날에 설교가 뭐냐하면 신유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기도하면 병이 났습니다. 그런데 70살고 80 살았는데 또 무슨 신유의 능력을 구합니까? 그러지 말고 가는 준비를 잘 하도록 하고 내가 좀 유모라산 표현으로 뭐 구약 찾고 신약 찾습니까? 아들 보고 주사 안 놓아준다고 성내고 불평하지 말고, 주여! 그저 노망하지 않고 넉넉한 구원받게 이렇게 기도 안 하고 뭐 70~80살아가 더 살려고 신약 구약 찾노? 이렇게 설교를 했더니 그날 저녁에 우리집에 전화가 왔어요. 세상에 목사님요 설교를 했으면 사람 살아라고 해야 되지 어디 그래 죽으라고, 내가 죽으라 하지도 안 했는데, 어디 죽으라고 사람을 강단에 서가지고 사람을 죽으라고 내 언제 죽으라 합디까? 죽으라 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70되면 약 쓰지 마라 하는 게 죽으란 소리지 여보소 약 먹었다고 다 낫나 설교를 왜 그렇게 거꾸로 듣노 거꾸로 듣지 마세요.
그리고 또 오늘도 이 설교 듣고 나니 또 우리 어떤 성도가 목사님이 초상 설교만 한다. 그래 어떻게 합니까? 순서인데 들으셔야 되지 초상 설교
전도서 7장 1절 2절에 있잖아요. 그거 참 성경 읽으면 이상한 감을 줍니다. 사람은 나는 날보다도 죽는 날이 더 낫고, 이랬거든 왜 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더 낫노? 그렇지만은 성경이 나는 날보다도 죽는 날이 더 낫다고 한 말은 신앙 준비된 사람이야 낫지 신앙 준비 안 된 사람이야 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더 무섭지 뭐 지옥 가는데. 지금 지옥 열차 타는데 그렇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으니 받아하세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가서 있을 곳을 예비하면 주님이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해놓고 다음에는 분명하게 있을 곳이라는 말을 했어요. 이 말은 헬라말에 토포스라 그래가지고 영어로 옮길 때는 사실상 프레이스 장소를 말한다는 게요.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천당도 장소가 있다면 공간이 있다는 말 아이가, 공간이 있다면 시간이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천당도 시간 공간이 있는 피조세계가 그래 말해 가지고 천당 부인하는 신학자가 있어요. 참 그 사람들은 일생 동안 헬라어 히브리어 독일어 영어 배워가지고 천당을 부인하는 신학을 해 놓았으니 나는 그 신학 보면 불상타 불상타 그리고 또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이거는 신화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 가운데 한 것은 신화로 말한 게 많다. 있을 곳이 많다. 내가 가서 있을 곳 예비한다는 이 말은 그거는 예수를 잘 믿으면 예수를 잘 믿으면 마음이 성결해지고 심령이 평안해지는 걸 그 천국을 말하는 거다. 그래 말해요. 심령천국만 말하는 겁니다. 이 성경의 사실은 심령 천국을 말하고 있어요.
누가복음 17장 21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것이 아니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5장 3절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우리 심령에 임하는 천국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 심령에 이만한 천국으로 국한시켜 놓으면 그러면 이 기독교라는 것은 유물주의적인 그만 이 기독교의 진리의 본 중추적인 진리가 무너져 버리는 게요.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으면 마음이 평안하고 나를 믿으면 심령의 천국이 임한다. 이런 말씀이 아니고 내가 가서 받아하세요. 내가 가서 분명히 간다. 했잖아 내가 가서 있을 곳 토포스 프레이스 내가 가서 있을 곳을 예비하면은 그런 장소성을 말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스킬드라는 신학자는 지혜롭게 해석하기를 천국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장소성을 뛰었다. 장소성이 뛰어 있다는 의미를 깊게 길게 말하고 있다. 그 이후로서 천당은 개인주의적인 생활 처소가 아니고 천당은 어떤 개인적인 심령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고 그 이후로서는 천당은 사회적이요 집합적이요 그리고 가정과 같은 것이다. 천국은 좀 더 나가면 도시와 국가와 같은 것이다. 한 사람만 개개인이 심령에 갖는 개인 천국을 말하는 게 아니고 천국은 쇼셜 사회적인 성격을 띄고 천국이라는 것은 시티 도시와 같은 것이고, 천국이라 하는 것은 내셔널 나라와 같은 한 국가와 같은 것이다.
그런 공동체가 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속을 받은 성도가 사는 그런 공동체적인 토퍼스 장소를 예수님이 말씀하는 거다. 내가 가서 내가 가서 있을 곳을 예비하면 너희를 내게로 영접한다고 하셨으니 결단코 심령에 임하는 천국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가는 천국을 말한다. 굳이 말한다면 그 천국은 심령 천국을 가진 사람만이 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석한다.
한번 받아합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오. 오는 천국 더 킹덤 오브 갓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다고 하는게요. 커밍 오브 더 갓 오고 있는 나라를 우리 심령에 딱 모신 사람이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내가 가서 받아하세요. 내가 가서 있을 곳 예비하면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 할렐루야. 믿어지기를 바랍니다. 찬송 하나 부릅시다.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두 번째로 말씀은 받아하세요.
내가 가서 그 뜻이 있는 게요. 두 번째 해석이 내가 가서 예수님께서 가서 있을 곳을 예비한다는데 예수님이 가가지고 처음으로 그만 천국을 만드는 게 아니고 바르도라는 신학자가 여기에 대한 해석을 잘한 줄 압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한번 받아하세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그 천이라는 말 그 킹덤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말하고 천지
그분은 해석하기 이 천지라는 이 태초의 천지를 창조할 때에 하나님이 이 지구 물질세계만 창조한 것이 아니고 그때 동시에 천국도 창조하셨다. 이겁니다. 창조하시면 그럼 뭐가 지금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있을 곳을 예비한다. 그 뜻이 무슨 뜻이냐 이겁니다. 거기에 중요한 말씀은 내가 가서 그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겁니다.
받아하세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느니라. 그러나 여기에 가서 이 말씀은 가서는 상당히 그 계층이 있어요.
첫째로 가서 죽음을 말하는 거예요. 죽음,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받아하세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죽었었잖아요. 죽어서 부활 안 했으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어떻게 아나 그러나 3일 만에 부활하신 거 보니 하나님이 답변하신 것 같습니다.
의롭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 의를 위하여 3일 만에 부활하셨느니라. 한번 받아합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 의를 위하여 부활하시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간다. 이 말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 의를 위하여 부활하시고 그렇게 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길을 여는 것을 여는 것을 내가 가서 이런 뜻이에요.
내가 가서 받아하세요. 내가 가서 그러면 예수님으로 말미하지 않고는 천국 못 오지 베드로가 말씀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받아하세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내 이름으로 내 이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으로 또 히브리서 10장 19절에 형제들아 그렇죠. 받아하세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도다.
인도에 산다싱이라는 분이 신비가 많은데 그분이 경험한 신비는 이 개혁주의 신앙에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고로 말합니다. 참고로 전에도 얘기 한번 드렸지만은 참고로 이 40일 금식 기도를 하다가 산에 가가지고 15일 만에 입신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입신 몸에서 영혼이 나오는 거, 입신해가지고 천국에 갔답니다. 천국 들어가지는 않고 문 앞에 있으니까? 자기 동네에서 한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올라오고, 병원에서 한 사람이 죽어가지고 올라오고, 제가 오래 돼가지고요. 요 순서 병원에 있던 사람이 믿던 사람인지 동네에 있는 사람이 믿는 사람인지 그걸 내가 확실히 구분 못하겠습니다.
어쨌거나 한번 산다싱 책 한번 사가지고 읽어보면 여러분이 잘 알 겁니다. 그 보면은 한 사람은 믿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이라 그러니 믿는 사람은 세상을 떠나오니까 반가이 천사들이 맞이하고 영광의 세계에 들어가니 우렁찬 찬양이 울려 퍼지는데, 안 믿는 사람이 올라오는데 문 앞에 척 오니까 그 천사가 하는 말이 당신은 천국에 못 들어가겠는데요. 이러더라고 그리고 왜 못 들어갑니까? 왜 내가 못 들어가겠느냐? 당신 그 가슴을 한번 보세요. 대체 자기 가슴을 보니 이만한 흑점이 있더라. 그게 죄라 이게 당신 그 죄 가지고 천국 못 들어간다. 천국에는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데 당신 그 죄 가지고 천국 못 들어간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말이지 자기 손을 들어 가지고 가슴을 척 가리더라 이거 가리니까
그 손이 이상하게도 투명한 유리알 같이 돼 가지고 가리는데 훤해 보이는 거라. 그러니 또 이렇게 가리워도 또 보이더라.
이게 보여 암만 해도 그래서 산나싱이 뭐라했나? 직고하리라 그 말을 입으로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 영혼의 영체가 증거하더라. 그랬어요. 뭐 말할 거 없고 우리 영체가 증거하더라. 그렇게 해가지고 그만 몇 번 몇 번 그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슬피 울고 이를 갈면서 지옥으로 가드라 하는게요. 산다싱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들에 대한 복음이 없습니다. 묻지 마세요. 그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됐냐? 묻지 마라. 그 복음은 없다. 그렇게 그거는 우리에게 하나의 중요한 시사를 하고 가르친 바가 있지요.
제가 오늘 이거 초상집 설교 같습니다. 초상집 설교지 뭐, 제가 전에 한번 인조했는데 1975년도 네이몬드 루비 박사라고 무디 박사가 라이프 에프터 라이프 다이제스트 썼는 이생과 저생 내세의 삶이라는 글을 한번 내가 소개한 적이 있어요. 이것은 미국의 정신 의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사람이 죽어가지고 내세에 갔다왔다는 사람들의 연구가 상당히 활발한데 최근에 이번 달 다이제스트 한국판 다이제스트 빛의 아들이라는 제목의 멜번 모스 폴 페리라는 분이 8년 동안 에누디이 이거 아마 의학용어 같습니다. 이 에누디이라는 말은 죽음에 가까운 경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 그걸 에누디이라는 그래 죽은 사람들을 한 사람만 막 그랬다 하면 죽어가지고 너무 아파가지고 그만 질식 상태에서 환상을 본것 같다. 이게 아니고 이틀 사흘씩 죽어가지고 영안실에서 깨어 나왔는 게요. 살아 나왔어요. 그래 또 그렇다고 치고 어린아이들 일곱 살 여덟 살 먹은 아들이 뭐 말을 조작하겠습니까? 거기에 이번 달에는 소개된 다이제스트는 케디라는 딸 아이가 숨이 끊어졌다. 몸에서 나온 자기 영혼이 집을 한 바퀴 돌고 지극히 사랑했던 캐디 여동생을 한번 보고 그리고 그 뒤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빛이 말입니다. 몸에서 영혼이 나온 빛의 사람이라 빛이 나더라. 빛의 아들이라는 말을 그 제목에서 그래 예수 하나님 예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만나니 아주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온 것을 기뻐하시고 너 집에 가고 싶지 않니 이래 묻더라. 이겁니다. 물으시기에 아이고 하나님 아버지하고 같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 이번에는 또 한다는 말씀이 예수님이 옆에 서 있다가 아니 너 가족들 보고 싶지 않니? 아이고 보고 싶어예. 보고 싶지 보고 싶어예. 순간적으로 그 영혼이 육체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경험을 했다. 근데 그게 뭐 한 사람 두 사람이 아니고 그런 사람이 너무 많다. 하는 거라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더라.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더라.
내가 가서 그 뜻에 반대를 우리가 생각해 봅니다. 내가 가서 있을 곳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가 필요해요. 그 예수님이래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한번 받아합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받아하세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 두 번째 중보에 대한 진리를 말하는 거예요. 내가 가서 내가 가서 이 말은 십자가에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사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그리고 천국에 올라가셔서 성령을 보내셔가지고 우리를 믿음 준비케 하시는 그 주님을 그 주님이 내가 가서 있을 곳 예비하면 그런 표현으로 말씀합니다.
한번 더 합시다. 내가 가서 그 말은 예수를 믿어야 된다. 이겁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분이 우리 세상 떠나는 날 마침 산문에서 나오는 어린 아기를 덜렁 받은 산부인과 의사가 육아실에 갖다 눕히듯이 우리가 준비된 성도가 우리 몸에서 영혼이 나오는 순간 주님이 우리를 덜렁 받아서 하나님 나라로 우리를 모시게 되는 줄을 믿습니다. 그것을 두 번째 예수님이 그렇게 진리를 말씀했습니다.
두 번째 첫째로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근심하지 마라. 죽음을 맞서라. 믿음으로 맞서라 이겁니다.
두 번째로는 그 죽음 건너편에 천국에 가는 길목에 안내자 인도자는 예수님이시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그리고 마지막에 결론을 맺는 말씀은 내가 다시 와서 받아하세요.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 이 말씀은 복합적인 의미가 있어예. 예수님이 재림에 관한 말씀 장차 있을 곳 완성하고 영광중에 재림하셔서 우리를 영접해 오실 날을 말씀하는 동시에 이거는 영적으로 성도가 임종할 때 주님이 찾아오신다. 이겁니다. 찾아오셔가지고 우리 영혼을 모셔가겠다. 얘기입니다.
내가 가서 있을 곳 예비하면 한번 받아합시다,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리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번더 말씀합니다. 오시는 날에 대해가지고 그날과 그 년시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나 하나님만 아신다 하시고 밑에 있는 말씀은 언제 오는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 깨어 있고 벌거벗은 수치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그랬어요.
요한계시록 19장 7절 8절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한번 받아합시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 아멘.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부끄러운 수치를 드러내지 말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우리가 준비하면 주님이 오셔서 덜렁 우리를 모시고 가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이런 즐거움의 역사가 있음을 말씀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은혜가 되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같이 한 목소리로 통성으로 조용히 나는 어디에서 어디로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이여!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이 시간도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 빛난 약속의 말씀, 영광스러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죽음을 피하지 마라. 죽음을 회피하지 마라. 믿음으로 죽음을 맞서라 하시면서 우리에게 아주 위로의 넘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여! 진실로 우리가 나는 날보다도 죽는 날이 좋게 해 주시옵소서. 신앙 준비 안 되는 사람은 죽는 날이 큰 불행의 날이지만은 준비된 사람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날이 되겠습니다. 이 축복이 있어 우리가 다 주님이 오시면 들림을 받는 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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