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의 친필유묵입니다… 풍루라…. 시원하게 바람을 즐기는 누대란 뜻인가???
퇴계선생께서 생전에 사용하셨던 벼루 매화연梅花硯과 방비….
역시 퇴계선생께서 훈증 좌욕기로 사용하셨다던 매화등입니다… 해설사의 말씀에 따르면 매화등 안쪽에 숯을 넣어 그 열기로 좌욕을 하는 기구라는데..
퇴계선생 고종기考終記에 따르면
“퇴계선생께서는 1570년 70세로 운명하시기 5일전인 12월 3일. 병세가 위중하여 설사를 하셨는데 이 때 평소 아끼시던 梅盆이 방안에 있었다.. 이에 선생께서는 “梅兄에게 불결하여 내 마음이 미안하다” 시며 매분을 옮기라 하셨다.. 또한 운명하시던 12월 8일 아침에는 梅兄에게 물을 주라 하셨다.”
매화를 두고 마치 산 사람 부르듯 梅兄이라 부르기에 서슴지 않았던 선생께서는 평소 즐겨 사용하시던 물건에 까지 이렇듯 매화를 넣어 이름을 짓고 부르신 것이지요..
퇴계선생께서 요즘의 쿠션용도처럼 기대어 사용하시던 안석입니다.. 문득 서당의 마루였던 암서헌이 떠오릅니다.. 20세 이전까지 청량산과 봉정사에서 공부를 하셨던 선생께서는 20세 되던 해에는 용수사에 들어가셔서 침식을 잊고 주역공부에 깊이 심취한 탓에 그만 건강을 잃어 평생을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으로 고생을 하셨는데.. 선생께서 평생을 곁에 두고 사용하셨을 헤어진 이 안석을 보고 있자니 바위에 기대어 머문다는 암서헌이라는 마루 이름에 선생의 건강에 대한 깊은 아쉬움이 베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渾天儀…혼천의
계절의 여왕 5월… 그 신록의 푸르름은 400년 역사와 더불어 절묘한 조화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나물반찬으로 먹는 쇠비름 나물을 별칭으로 오행초라고도 부르죠.. 그 잎은 푸르고, 줄기는 붉으며, 꽃은 황색을 띠고, 뿌리는 흰색에, 씨는 검은 색이라.. 이렇게 청,적,황,백,흑의 다섯까지 오행색을 한 몸에 지닌 풀이라 하여 오행초라 하죠..
서원을 돌아 나오는 길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봅니다….
푸르른 신록은 靑이니 木이요 仁이라
밝게 빛나는 돌담과 벽면은 白이니 金이요 義..
드문드문 홍단풍은 赤이니 火요 禮라 하고..
정갈한 모습의 기와지붕은 黑이니 水요 智니라..
대지는 黃이니 土라 하고 信이런가
뭐라 이름하여야 하나….나그네의 마음이 애처롭다..
한낱 풀 한 포기에도 오행초라는 근사한 이름이 붙어 있는데,, 하물며 눈 앞에 펼쳐진 이러한 풍광을 두고도 마음 속에서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는다면 퇴계선생을 찾아 뵌 의미를 너무나 가벼이 여긴 탓은 아닐는지??
퇴계선생의 千年幽宅천년유택이 모셔진 건지산 아래 하계下溪마을의 전경입니다.. 안동댐 수몰지역인 이 곳 하계의 마을이름은 퇴계退溪라는 이름의 시냇물에서 유래된 것으로 퇴계선생의 태실이 자리한 용두산 온혜 마을의 온계천이 上溪를 거쳐 이 곳 下溪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 가는데 이 시냇물의 이름이 바로 퇴계입니다. 퇴계의 상류지역을 上溪마을이라 하고 하류지역을 下溪마을이라 부른 것에서 연유된 것이라 합니다..
퇴계 묘소로 가는 산길 초입에 서 있는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입니다..독립운동가 25명을 낸 안동 하계마을…
역시 산길 초입에 위치한 퇴계의 셋째 손자인 東巖 이영도선생의 불천위 종택입니다.. 현재 이 동암종택에는 15대종손 이재영선생께서 살고 있다네요..
퇴계란 아호는 양진암 정착시기에 시냇물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퇴계 묘소로 올라가는 산길 초입 바로 우측에 놓여 있는 양진암 표지석입니다. 양진암은 선생 나이 46-49세 시기에 생활 하셨던 집으로 지금은 그 흔적은 사라지고 이렇게 표지석만 남아 그 터를 짐작케만 하고 있습니다..
퇴계선생께서 이곳 양진암에 정착하셨을 때 선생께서는 양진암 앞쪽의 시냇물인 토계를 퇴계로 고쳐 부르고 이 퇴계라는 이름을 자신의 아호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퇴계라는 호가 바로 이 곳 양진암 앞을 흐르고 있는 퇴계로부터 유래된 것이지요..
퇴계의 사주에는 군왕의 가마인 地殺과 학문의 별인 문창성이 살아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퇴계선생은 1501.11.25일 생으로 나와 있습니다.. 태어나신 시간은 찾을 수가 없더군요.. 왕조실록 연산군일기를 토대로 년,월,일 간지를 만들어 사주명식을 뽑아보니… 辛酉年, 庚子月, 己亥日 생으로 나옵니다.. 추운 겨울인 子月에 태어난 己土라는 얼어붙은 土의 사주입니다.. 평생을 건강문제로 고생하셨다는 대목이 퍼뜩 떠오릅니다.. 가뜩이나 약하게 타고난 얼어붙은 토의 사주에 토의 기운을 설洩하는 金이 너무 많습니다.. 외형이 마르고 마른기침이 끊이지 않으셨다는데… 또한 사주에는 군왕의 가마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역마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 地殺과 학문의 별인 문창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음… 퇴계선생께서 한 곳에 오래도록 정착하시지 못하고 유달리 거처를 자주 옮기신 까닭이 이해가 되는구나 …’
20세 이전에는 낙동강 상류지역인 청량산,봉정사,용수사 등지에서 수학하셨고 이후 삼백당,지산와사에 거하셨다가 인생 중년기에는 관직에도 잠시 나아가셔서 서울 서소문의 경저와 이곳 양진암을 왔다갔다 하셨고, 단양군수,풍기군수 시절 역시 이곳 양진암을 왔다갔다 하셨다네요..이후 한서암,계상서당 등 이곳 상계와 하계를 왔다갔다 하시다가 60세 되시던 해에는 낙동강 쪽으로 더 내려와 정착하셨는데 낙동강 본류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陶山 자락의 도산서당이 선생의 마지막 거처가 되는 셈이죠..
초년에는 청량산 호랑이 같이 무섭고 매몰차게 공부에 전념 하셨고, 중년에는 상계,하계를 흘러내리는 저 맑고 조용한 시냇물처럼 벼슬을 정중히 사양하며 이리 저리 세속의 부름을 피하는 삶을 사시다가, 말년에는 낙동강이 본격적으로 넓어지고 사방이 툭 터진 터의 도산서당에 정착하시고는 뚜껑 없는 우물 ‘열정,몽천’처럼 자신의 학문을 넓게 밝히고 아낌없이 후학양성에 매진하신 것이지요…
태백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청량산을 끼고 돌면서 충분한 수량을 얻고 이 곳도산서원 앞을 휘돌아 흘러 1,300리 큰 물길을 이룹니다. 낙동강을 끼고 청량산,상계,하계,도산서당으로 이어지는 선생께서 머무르셨던 많은 거처들이 낙동강의 흐름과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요??
이 바위가 바로 東巖입니다… 이 동암 바로 곁에 양진암과 동암종택이 자리하고 있죠..
一川 선생님께서도 이 곳 동암 실개천에서 一川이란 이름을 얻으셨다.
제가 지금 “禮”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전통예절원 원장님이신 一川 이동후 선생님의 생가가 사진 속 동암 바로 앞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림 속의 동암 앞에 푸른 선 방향으로 자그만 실개천이 하나 흐르고 있었는데 바로 선생님께서는 이 시냇물에서 一川이라는 이름을 얻으셨다 하셨습니다… 퇴계선생 역시 이 곳 동암 양진암에서 퇴계란 이름을 얻으셨고,, 우리 일천 선생님께서도 이 곳 동암 곁 실개천에서 一川이라는 이름을 얻으셨으니…. 진성 이씨 문중의 선대 할아버지와 후대 할아버지 답습니다…
“同氣感應동기감응”이라 했습니다..
1570년 12월 8일 군자유종君子有終
선비문화수련원 이동수 이사님으로부터 퇴계 묘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이네요..
퇴계선생 고종기考終記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봅니다..
“1570년 12월3일 병세가 위중하여 선생께서 설사를 하다. 이때 방안에 梅盆이 있었는데 ‘梅兄에게 불결하여 내 마음이 미안하다’ 하시며 옮기라 하셨다. 자제들에게 빌려온 책을 기록하게 하고 잊지 말고 돌려 주라 명하셨다.
4일에는 조카에게 유계遺戒를 받아쓰게 하셨다.
1. 국가에서 예장禮葬을 하려 하거든 고사하고 예장을 하지 말라
2. 상사에 유밀과油蜜菓(약과와 강정류)를 쓰지 말라.
3.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만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 쓰고 鄕里와 世系, 志行과 出處 등을 간략히 쓸 것.
4. 장례 절차는 많은 사람에게 물어서, 시속에도 맞고 고례에도 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날 제자들에게 ‘내가 평소에 잘못된 소견으로 제군들과 더불어 종일 강론하였는데,, 이 또한 범연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7일 제자 간재 이덕홍이 점을 치니 지산겸괘謙卦의 군자유종君子有終의 점사가 나오자 김부륜 등이 곧 얼굴빛이 변하였다..
8일 아침에 매화분에 물을 주라 하셨고 이날 날씨는 맑았다.. 오후 5시쯤 갑자기 지붕위로 구름이 몰리고 눈이 한치쯤 내렸다.. 잠시 뒤 몸을 일으키자 앉아서 좌서坐逝하였으며,, 구름은 흩어지고 눈은 개였다…”
흔히 묘소 앞 비석에 망인의 일생을 추모하여 타인이 100자 이내로 쓰는 글을 묘갈명墓碣銘이라 하고,, 죽기 전 본인이 직접 일생을 겸허하게 회고하여 정리한 글을 자명自銘이라 하는데 퇴계묘소의 비석에는 퇴계선생께서 손수 지은 자명과 제자인 고봉 기대승의 묘갈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산중턱에 위치한 人穴이다. 그렇다면 소나무 가지 위의 솔잎을 보고 바람을 읽어라.
풍수학인의 입장에서는 퇴계선생의 천년유택을 한번 觀山해 본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죠.. 이동수 이사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잠깐이지만 자리를 이탈해 유택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답사의 성격상 패철을 꺼내서 좌향을 살펴보기엔 부담스러운 점도 있고 해서.. 形局論형국론에 근거하여 몇 가지 눈에 띄는 주변 산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건지산(559m)은 북쪽으로 만리산, 북서쪽으로는 용두산 그리고 동북쪽으로는 청량산과 인근하고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낙동강에 의해 분리된 청량산의 용맥과는 다른 용맥이라 볼 수 있으며 홀로 서 있는 獨山의 형국을 하고 있는 산입니다…
혈장의 상부에서 내려다본 퇴계선생의 묘소입니다.. 북쪽인 뒤편으로 혈처로 이어지는 마지막 입수일절룡入首一節龍을 살펴볼 수가 있었는데 이 곳 마지막 入首龍은 生龍의 氣運이 매우 출중한 직룡입수의 형국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生氣의 전달이 강하고 빠르다 하여 발복이 신속하고 크게 나타나는 특징을 보이는 입수룡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제법 산 중턱까지 올라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높은 곳에 서 있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습니다.. 이는 묘소가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지만 주변의 산 그리고 멀리 낙동강 건너편의 산들과 높이라는 측면에서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그러한 느낌을 받는 것인데,, 이처럼 주변의 산들과 높이에 있어 잘 조화된 위치에 혈자리가 맺혀 있는 것을 보고 인혈人穴이라고 하죠.. 이처럼 산 중턱에 마련된 인혈의 경우는 자칫 바람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변 산들에 의해 바람을 잘 갈무리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답니다.. 바람을 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소나무를 보는 것입니다.. 주변 소나무 가지에 얹혀 있는 솔잎을 보면 된답니다..여기 퇴계 묘소의 경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소나무의 건강상태가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았습니다.. 솔가지 위에 죽은 솔잎이 두툼하게 덮여 있는 광경이 많이 목격되었는데 비록 소나무의 건강은 좋지 않아 보였지만 죽은 솔잎이 떨어지지 않고 솔가지에 잘 얹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자리는 바람이 무척 잘 갈무리 되어지는 터라는 점을 알 수가 있죠.. 그리고 이 곳 소나무들의 수형을 잘 살펴 보면 유달리 또아리를 틀 듯 꼬여 있는 나무들이 많이 발견 되는데… 이 또한 명당터라 불리는 生氣處에서 잘 발견 되어지는 소나무 수형의 특징들이죠.. 生氣가 응결되어 있는 터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가지들이 위로 곧게 자라기 보단 땅과 거의 수평을 이루거나 심지어는 땅을 향해 자라는 경우도 있고 간혹 한쪽 방향의 가지들이 특정 지점을 향해 길게 뻗는 경우도 있는데 왕릉 주변의 소나무들을 보면 능쪽으로 뻗은 가지들이 능 바깥으로 뻗은 가지들 보다는 더 길게, 아래쪽으로 자라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해당합니다..
꼬여 있는 소나무,,, 가지런히 잘 얹혀 있는 솔잎의 상태로 보아 모아진 생기가 바람에 의해 흩어지지 않고 잘 갈무리 되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퇴계묘소가 자리한 용맥은 아래쪽으로 직룡하강 하여 동암에 이르러
마지막 餘氣를 동암이라는 큰 바위에 응축하고 그 기운을 마감하게 되는데 동암 바로 아래에 퇴계(시냇물)와는 별개로 또 하나의 실개천이 흘렀다 하니 용은 물을 만나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는 풍수론에 잘 부합되는 형국입니다..
퇴계선생 묘소 약간 아래 쪽에 퇴계선생의 맏며느리인 봉화금씨 부인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살아서 내가 시아버님을 모시는데 여러가지 부족함이 많았다.. 그래서 사후에라도 다시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들랑 반드시 아버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 유언을 하셨다네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형국 300 여 년이 지나 안동댐이라는 거대한 물을 만났다..
북현무,남주작, 좌청룡,우백호를 살펴보고 멀리 안동댐 수몰지역인 하계,남계마을의 형국을 살펴보니 겹겹의 산과 물이 퇴계선생이 모셔진 건지산 남쪽 용맥의 기운이 뻗치고 분산되는 것을 잘 갈무리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물 역시 동암아래 실개천,,퇴계천,,낙동강 명당수들이 동암 앞을 겹겹이 싸고 돌아 하계마을에서 합수를 이루고 멀리 안산들 사이 파구터로 돌아나가는 좋은 형국을 보이고 있습니다…
東巖쪽으로 머리를 주욱 내밀은 목마른 말이 낙동강에서 합수 되어지는 여러 명당수의 물을 먹는 형국이라 본다면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형국이라 칭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햐~~ 하여튼 옛 사람들의 안목이란… 1571년 3월에 퇴계는 이 곳에 묻히셨는데 그로부터 300 여 년이 지나 이 지역에 안동댐이 세워지고 선생의 묘소 아래자락의 동암 앞쪽 마을까지 안동댐 수몰지역이 되었지.. 목마른 말의 입장에서는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않은가???’
방치된 옛 비석 참암살巉巖殺이 걱정된다
퇴계 유택에서 두 가지 의문점을 발견했습니다..
그 첫 번 째는 사진 속 붉은 원안에 보이는 옛 비석인데 비문이 심하게 마모되어 1905년에 새 비석과 교체를 하면서 아마도 그때부터 이 자리에 그냥 방치를 해 두었나 봅니다.. 일반 민가에서도 혈장 내에는 봉분, 망주, 비석, 상석 등을 놓을 때 그 혈장의 기운을 능압凌壓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중하게 기물들을 취사선택하여 사용하는데 하물며 퇴계선생의 유택 혈장 내에 이렇듯 불필요한 바위가 방치되어 있다는 점은 상당히 걱정스러운 점입니다.. 풍수에서는 크고 무겁고,,무서운 돌이 용맥을 누르거나 혈장을 누르고 있는 것을 참암살巉巖殺이라 하여 꺼리죠..
두 번째 역시 일종의 참암살의 작용을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인데.. 혈장 주변을 빙 돌아가며 돌로 경계석을 쌓아 놓은 점입니다.. 마지막 일절입수룡이 혈로 들어가는 그 중요한 입수자리에도 돌을 얹어 놓았던데… 뱀 모가지에 돌을 얹어 놓는 격인데 생기를 품고 혈처로 머리를 숨기는 용의 목덜미에 돌을 얹어 놓았으니 생룡의 기운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뒤에 안 사실이지만..
퇴계선생 종택에는 15대 종손 이동은 옹(99세), 16대 종손 이근필(76세) 선생께서 생존해 계시나 두 분의 종부님 되시는 분들은 현재 아니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반가운 것은 최근 17대 종손 되시는 이치억님께서 결혼을 하셨다는 소식…
주문왕의 후천 팔괘에서 연유된 남녀의 서차序次에 대한 말 중 男左女右란 말이있죠… 이 말은 풍수에서도 그대로 통용이 되는 말입니다… 묘소를 등지고 섰을 때 좌청룡은 남자,, 우백호는 여자.. 곧 男左女右입니다..
옛 비석은 우측에 방치되어 있죠..
또한 풍수에서는 나무를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 하는데 낚시에서 찌를 통해 물속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땅 속 기운의 상태를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찌처럼 땅 밖으로 전달해주는 매개체로 바로 나무를 삼을 수 있기 때문이죠… 분명 퇴계선생의 유택 주변 소나무는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모습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옛 비석의 능압현상과 생기 잃은 소나무를 통해 퇴계선생유택의 地氣를 어느 정도 감지 할 수는 있었으나 타 문중 조상 묘를 두고 사적인 글에서 이러쿵 저러쿵 깊이 언급하는 것은 큰 결례라 생각되어 이쯤에서 마무리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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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도산으로 물러나 긴 시간 은자의 삶을 사셨던 진성 이공의 묘
많은 분들이 큰절을 올렸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 순간만은 심신을 최대한 정갈히 하여 큰 절을 올렸습니다… 때늦은 후회지만 그래도 간단히 酒果脯정도 만이라도 올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제사상의 음식을 제사도 모시기 전에 집어 드셨다던 퇴계선생의 두 번째 부인 안동권씨의 묘소
퇴계 묘소 약간 아래쪽에 자리한 선생의 맏며느리인 봉화금씨의 묘소에서 퇴계천 건너편 산자락을 바라보면 소나무 숲으로 둘러 싸여 있는 퇴계선생의 두번 째 부인인 권씨 부인의 묘소가 보입니다..
퇴계는 27세에 첫 번째 부인인 김해허씨 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부인과 결혼을 하였으나 백년해로 하지 못하고 46세에 권씨부인과도 사별하게 되는데 바로 그 권씨부인의 묘소가 건너편 산자락에 보이는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만,, 권씨부인은 친정 집안이 사화에 연루된 이후로 그만 정신질환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자료들에서 권씨부인에 대한 일화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참고로 대표적인 두 가지 일화를 옮겨 봅니다..
“한번은 일가친척들이 제사를 지내려고 모두들 종가에 모여 제사상을 차려놓았는데, 권씨 부인이 제사도 지내기 전에 상 위에 놓인 음식을 집어먹었다. 일가친척들이 무언중에 퇴계를 힐난하는 빛을 보이자, 퇴계는 ‘제사도 지내기 전에 며느리가 먼저 음복하는 것은 예절에 벗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조상께서 후손을 귀엽게 여기실 터이니 손자며느리의 행동을 노여워하시지 않을 겁니다’라고 감싸주었다.”
“또 한번은 상가에 조문을 가려다가 흰색 도포자락이 해어진 것을 보고 그곳을 좀 꿰매 달라고 했더니, 권씨 부인은 흰 도포에 빨강 헝겊을 대어 기워왔다. 퇴계가 그것을 그냥 그대로 입고 갔더니,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며 ‘흰 도포는 빨강 헝겊으로 기워야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예학에 정통한 퇴계가 옷을 그렇게 입고 오자 그것이 예법에 있는 것인지 확인하려 한 것이다. 퇴계는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왜 그러셨을까요??
곰곰히 생각해보면 많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일화입니다..
이육사 시인은 나의 모교인 대륜의 전신인 옛 교남학교시절 선생님이셨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는 이육사 선생입니다.. 퇴계묘소에서 당재고개를 넘어서면 낙동강 물줄기가 S자형으로 심하게 굽어 흐르는 지역에 원천리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마치 다섯 개의 손가락 형상으로 산줄기가 낙동강을 향해 길게 뻗어 내린 형국의 이 마을(원천리 이전에는 원촌으로 불림) 손가락 사이 깊은 지점에 해당하는 산골 마을에서 이육사 선생은 태어나셨지요.. 풍수의 형국론으로는 다섯 손가락으로 거문고를 튕긴다는 뜻의 오지탄금형五指彈琴型으로 불리는 명당마을입니다.. 다섯 줄기의 산이 五指이고 마을 앞의 낙동수가 거문고 줄인 셈이지요..
이육사 시인은 眞城李人으로 퇴계선생의 14대손입니다.. 본명은 이원록,아호는 李陸史인데 다들 아시다시피 이는 대구형무소 수감시절 수감번호 二六四에서 취음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무려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바로 이육사 시인을 기리는 이육사 문학관이 그의 고향인 이 곳 원천리 불미골에 세워져 있죠..
개인적으로 저의 모교인 대륜중,고 졸업생들은 이육사 선생께서 대륜의 전신인 교남학교 시절 교편을 잡으셨다는 내용을 잘 알고 있죠.. 현 대구 대봉교 대백프라자 대각선 건너편의 수성벌에서 십 수년 전 현재의 만촌동으로 옮긴 대륜의 새 교정에도 이육사 시비가 자랑스럽게 세워져 있답니다..
하늘로 승천하는 飛龍을 만나다
풍수학인들은 산과 물을 대면하면 직관적으로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하여 임,자,계,축,간,인,갑,묘,을,진,손,사,병,오,정,미,곤,신,경,유,신,술,건,해라는 24방위를 머리 속에 띄워놓고 시야에 들어온 山水를 일차원의 점, 이차원의 직선, 삼차원의 공간으로 왔다갔다하며 순간적으로 인수분해와 이차방정식을 돌려 버리는 고약한 버릇을 지녔답니다.. 물론 내공이 튼실한 고수라면 사차원의 고차방정식까지 돌려보겠지만..
이육사 문학관에 다다를 쯤..
우측 차창 밖으로 보여지는 기묘한 산세에 놀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답니다.. 토계,상계,하계 등 낙동강을 끼고 도산면 일부 지역을 다녀본 금일 답사 중 가장 강렬한 기운이 감지되는 순간이였죠..
‘허걱~~’
강 건너 보이는 산의 한 용맥이 산정상에서 산아래 내살미 마을 들판까지 상하,좌우로 몸을 비틀면서 힘차게 내려오는 그 흐름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굵고 무겁게 뻗어 내리던 용맥이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다해 힘차게 용트림을 하며 만들어 놓은 제법 높은 마지막 산봉우리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인수분해,,방정식 가동….
‘아.. 이런 곳에서 비룡飛龍를 만나다니.. 산에서 내려오던 용이 때를 만나 여의주를 입에 물고 飛龍昇天하는 순간이다… 아.. 저 산엔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걸까?? 왕일까??… 아니 장수겠지….. 도대체 저 산… 뭐야!!!!’
그 비밀은 이내 쉽게 풀어 집니다…
이육사 문학관 2층 영상실에서 영상물을 보고 난 뒤 스크린이 올라가면서 동시에 장막이 걷힙니다.. 장막이 사라진 공간에는 대형 통유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유리를 통해 멀리 아까 그 산이 내 눈 앞에 다시 나타납니다..
유리를 통한 사진이어서 산세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아 많이 아쉽군요..
이동수 선생님의 설명이 이러 했습니다..
“1361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 안동일대로 피난을 왔을 때 공민왕의 어머니와 왕비인 노국공주가 피신한 산이라 하여 王母山이라 불리고 산 정상부에는 지금도 당시의 왕모산성이 일부 남아 있으며 공민왕은 이 곳에 70 여 일간 임시수도를 설치 했죠..,, 산 아래 마지막 봉우리에는 왕모를 모신 왕모당이란 성황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왕모산의 낙동강 쪽 절벽 5부 능선에 있는 뾰족한 암봉을 칼선대라 부르는데 이육사의 시 ‘절정’을 낳은 곳입니다..”
설명은 계속 이어집니다..
“또한 우측으로 보이는 쌍봉 윷판대는 육사의 시 ‘광야’의 시상을 떠올리게 한 곳이죠. 그리고 마을 하류지역에 안동댐이 들어서기 전에는 강변에 시무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고 그 시무나무에는 유난히 다래덩굴이 많았답니다.. 아마도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시상을 만들어 낸 것도 이 다래덩굴인 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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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백마 탄 초인은 구인토룡 장수였다
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랬습니다… 그 산이 왕모산이였습니다..
한때 홍건적이 이 곳까지 진격해 들어와 공민왕이 위태로워 졌을 때.. 어디선가 거대한 몸짓의 백마 탄 장수가 나타나 공민왕을 위기로부터 구해주고는 다음날 진영 내 소금포대 옆에서 크다란 지렁이로 변했다가는 서서히 녹으며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네요.. 그 장수의 이름이 ‘구인토룡’이라 전 한다는데… 구蚓,土龍 모두 한의학에서는 지렁이를 뜻하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문득 짚이는 구석이 있어.. 만세력을 펴놓고 1904년 4월 4일생(음)의 사주를 뽑아 보았습니다… 태어난 시간에 해당하는 기둥은 알 수 없는 탓에 甲辰년,己巳월,壬子일의 세 기둥만이 나왔습니다..
십이지를 동물로 환치하면 辰은 룡이요, 巳는 뱀이요,,子는 쥐가 되죠.. 지렁이,뱀이 살아 천 년이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 살아 천 년이면 룡이 된다 하였는데,, 사주에서는 생일에 해당하는 지지를 좌坐라고 보아 그 글자를 깔고 앉았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이육사의 경우 용의 해, 뱀의 월에 쥐를 깔고 앉은 채 태어난 사주라고도 표현할 수 있죠..
공민왕 이후 1,000년 뒤에 백마 탄 구인토룡이 또 다시 나타나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한다는데…
학창시절 시험출제 빈도가 높아 그렇게 암송하고 다녔던 광야의 ‘백마 탄 초인’이 다름아닌 구인토룡 장수 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 이였습니다…
‘왜… 당시 국어선생님께서는 백마 탄 초인이 구인토룡 장수였음을 가르쳐주시지 않았을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런가.. 이곳 원천리 王母山을 몰라서일게다...’
퇴계천 상류 상계리에 위치한 퇴계선생 종택입니다…
퇴계선생의 아호인 퇴계의 유래가 되는 퇴계천입니다…
양진암 시절 앞쪽으로 흐르던 토계라는 이름의 시냇물을 퇴계라 고쳐 부르고 자신의 아호로 삼으신 것이지요…
퇴계선생의 15대 종손이신 이동은 옹(99세)으로부터 퇴계 종택의 내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추월한수정이라는 현판이 보입니다..
소실되었던 건물을 1715년 겨레의 스승인 퇴계의 유지를 받든다는 의미에서전국 유림의 한결 같은 뜻에 의해 다시 중건된 건물입니다..
추월한수정은 ‘퇴계의 인품이 가을 달이 찬물에 비친 듯 하다’는 뜻이라네요..
퇴계선생의 16대 주손이신 이근필 선생(76세)의 친필 입니다.. 금일 답사에 참석한 예절원 3기생 전원이 이근필 주손의 글씨를 선물 받았습니다..
道德救國, 心性導正, 譽之樂之, 滴水成川, 啓曉伴征
전 이 중 ‘남의 좋은 점을 찾아내어 칭찬하고 배우는 일을 낙으로 삼자’는 뜻의 ‘譽之樂之예지낙지’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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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아도 온혜마을 최고의 명당은 노송정 퇴계태실이다.
아…… 안타깝게도 디카의 배터리가 기력을 다했습니다.. 백만스물 하나,,백만스물 둘 하는... 그 어마어마하다던 힘은 다 어딜가고…
아래의 사진은 ‘봉화 천삼골’이라는 이름의 블로그에서 퍼온 사진입니다..
온혜리 마을 입구에서 모두 버스를 내려 퇴계태실을 찾아 걸어 들어갑니다..태실이라 함은 아기를 출산하는 방을 일컫는데 산실이라고도 하며 옛 전통이 살아 있는 종택들에는 이러한 형태의 산실을 따로 갖추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산온천이 있는 바로 그 마을이며,, 예로부터 온천이 있어 주변에 많은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에서 온혜溫惠라고 불렸다고 하네요.. 마을 앞의 시냇물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하여 온계溫溪라 불리며 이 물은 토계에서 퇴계와 합수를 하여 상계,하계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갑니다..
버스에서 땅을 딛고 내려서는 순간… 또 한번 기막힌 명당의 형국을 만납니다..
‘음..그렇군..마을이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의 입지로군.. 가만 보자… 서 있는 자리를 기준점으로 하여 한 바퀴 360도 주변을 둘러보니 7-8개의 산자락이 낮게 깔리면서 이 마을의 어느 한 특정지역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형국이구나.. 그러고 보니 모든 산들이 머리를 조아린 방향에 집이 한 채 있고 집 바로 뒤 용맥을 보니 온혜마을의 낮은 산들 중 가장 힘 있어 보이는 용맥이군.. 게다가 반쯤 꺽인 모습의 半回龍入首의 형국이네..그렇다면 물어볼 것도 없이 저 산자락 아래에 있는 건물이 퇴계태실이 틀림 없으렸다…’
그렇습니다..바로 그곳이 퇴계선생께서 태어나신 태실이였던 것입니다..
“퇴계 선생이 엮은 온계전거사적(溫溪奠居事蹟)에 의하면 공(이계양)은 처음 예안현 동쪽 부라촌(浮羅村, 지금은 예안면 부포)에 살았는데 봉화현교도(奉化縣敎導)가 되어 봉화로 가는 길에 온계를 지나게 되었다. 공이 이곳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에 취해 이리저리 거닐다가 신라현(新羅峴) 고개에 이르러 잠깐 쉬었는데 어떤 스님이 온계로부터 오다가 함께 쉬면서 대화가 온계의 풍수(風水)에 이르게 되었다. 공은 서로 본 것이 부합됨을 기뻐하여서 드디어 스님과 손잡고 다시 온계로 돌아오니, 그 스님은 위 아래로 오가며 두루 살피다가 현재의 종택자리를 선정해 주었다고 한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반드시 귀한 아들을 얻으리라"고 하여 공이 그 말을 따랐다고 한다. 그 때에는 온계의 시냇가에는 한 집만이 살고 있었는데 둘레에 묵은 땅이 많아 농사지을 농토가 넉넉했고 물을 끌어 논을 만들 수 있었으며, 나무숲이 울창하고 깊은 골짜기가 있어 항상 맑은 냇물이 흘러 물고기도 많았다고 한다. 공이 이 곳에다 세거지를 마련하고 은거한 후 두 아들을 낳으니 독실한 지행(志行)에 한 생애를 학문에 침잠한 진사 식(埴)과 참판에 관찰사를 지냈으며 시문에 뛰어난 송재공(松齋公) 우( )이다. 특히 진사 식의 7남 1녀 중 막내인 퇴계를 배출함으로써 영남의 명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퇴계태실로 불리는 이 곳 老松亭 종택을 방문했을 때 때마침 이곳에 잠시 들리신 대구의 00전문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신 종손으로부터 직접 이 집의 내력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종손어른신의 말씀 중… 딱 한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군요..
“우리 집안은 이 곳 온혜마을 노송정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대과급제가가 전무했습니다만,, 노송정에 정착한 후 태어난 인물부터 처음으로 대과급제자가 나오기 시작했죠..퇴계태실(노송정)터의 영험함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노송정과 퇴계태실 사이 건물 뒤편에서 半回龍入首하는 용을 보았거든요.. 이 집안사람들은 알고 계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집 뒤편 경사면을 잘 살펴보시면 유달리 볼록하게 솟아오른 채 퇴계태실이 있는 방 뒤쪽을 향해 뻗어 내려오는 입수룡이 있거든요..
하회마을의 충효당 안채 뒷마당에도 볼록하게 솟아오른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는 빈 터가 있습니다.. 풍수에서는 이 곳 역시 화산의 혈이 내려와 뭉친 곳이라 하여 중히 여겨 나무도 심지 않고 어떠한 기물도 그 주변에는 놓아 두지 않은 채 빈 공간으로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노송정의 경우는 입수룡이 다소 소홀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집의 어른 되시는 분의 생각이 가장 존중되어야 할 터이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조상님들께서 풍수에 따라 이 터를 잡으셨고,, 이 곳에 뿌리를 내린 이후 나라 안 최대 명문가로 크게 일어섰다는 자명한 사실도 있고 하니 좀 더 자문을 받으셔서 집 뒤편의 반회룡입수처를 좀 더 세심하게 관리를 하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퇴계태실,노송정 성임문聖臨門입니다… 퇴계의 어머니 춘천 박씨가 퇴계를 가졌을 때 공자가 문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하여 성임문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사진 속 노송정 현판이 보이는 뒤쪽에서 좌측 사선 방향의 퇴계 태실 뒤편으로 흘러내리는 입수룡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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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께서 태어나신 태실입니다… 바로 이 방에서 퇴계선생을 비롯하여 친형인 온계 이해를 비롯한 여러 형제가 태어났죠…
답사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태실의 좋은 생기를 받고픈 마음이 앞선 탓인지… 여러분들이 방으로 들어가 앉습니다… 근데 남자분들은 아무도 안 들어 가시네요…
‘아… 피곤하다…’
끝으로 퇴계선생께서 자신의 묘비에 새겨 넣을 自銘을 생전에 직접 지어 놓으셨는데… 그 퇴계 자명을 한번 적어보고 글을 마무리 하렵니다...
生而大癡(생이대치) 壯而多疾(장이다질)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장성하여서는 병도 많았네
中何嗜學(중하기학) 晩何叨爵(만하도작)
중년에는 어쩌다가 학문을 즐겨했고 만년에는 어찌 벼슬을 받았던고.
學求猶邈(학구유막) 爵辭愈嬰(작사유영)
학문은 구할수록 아득하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
進行之跲(진행지겁) 退藏之貞(퇴장지정)
나아감에는 잘못도 있었고 물러나서 갈무리는 곧게 하였네.
深慙國恩(심참국은) 亶畏聖言(단외성언)
나라의 은혜에 심히 부끄럽고 성현의 말씀이 참으로 두려워
有山嶷嶷(유산의의) 有水源源(유수원원)
산은 높이 솟아 있고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구나.
婆娑初服(파사초복) 脫略象訕(탈략중산)
처음의 뜻대로 자유롭게 소요하니 뭇사람의 비웃음을 벗었지만
我懷伊阻(아회이조) 我佩誰玩(아패수완)
내가 품은 생각 누가 알 것이며 내가 지닌 패옥 누가 즐겨줄 것인가.
我思古人(아사고인) 實獲我心(실획아심)
내 옛사람을 생각하니 진실로 내 마음과 부합하는구나
寧知來世(영지래세) 不獲今兮(불획금혜)
어찌 오는 세상을 알리요마는 지금에도 얻은 것이 없는 것을
憂中有樂(우중유악) 樂中有憂(락중유우)
근심속에 즐거움이 있었고 즐거움 속에서도 근심은 있었네
乘化歸盡(승화귀진) 復何求兮(부하구혜)
천명으로 살다가 돌아가니 이 세상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요.
좋은 인연 지으세요..
풍경 송은석 두손모음..
참고자료
안동문화유적답사자료집(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육사 문학관 안내 팜플릿
인터넷 사이트 ‘퇴계이황 공부방’
안동시청홈페이지
기타 등등…… |
첫댓글 성마른 체질이라 부랴부랴 읽었건만, 글쓴이의 노고에는 끝이 없는 격려와 감사를 올리고 싶소.
와우..이제서야 다 읽었습니다..몇번이나 보다가..다른일을 하다가..주말오후..맘먹고..다 읽었네요..ㅎㅎㅎ 읽기 아까운 글입니다.. 두고두고 계속 봐야 겠습니다... 지금도 정확하게 뜻은 잘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동안 숨겨져 있던..아주 중요한 것을 살짝 엿본듯한..느낌이 듭니다.. 선배 수고하셨어요^^
준언아.. 음... 이 답사기를 예절원 카페에도 올렸었는데.. 좋은 글이라며 댓글을 많이 달아 주시더라구.. 어느 분이 그렇게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글 다 읽는데 1시간 조금 더 걸렸다고.. 그 말씀을 듣고.. 내가 한번 정독을 해 봤거든... 딱 1시간 20분 걸리더라.... 나도 이 글을 읽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하하~~ 준언이 자네가 다 읽었단 말이지?? 존경스럽다.... 요즘 시간 많은 가봐????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글을 읽으니 가슴이 찡하게 울리네요...
시간은 늘 없지만..너무 좋은 글이라서..ㅎㅎㅎ 제가 선배아니면 어디서 이런 좋은 내용을 배우겠어요.. 이제 슬슬 준비하세요.. [송은석의 풍경산책기]아님 [풍경의 대구유산답사기]..ㅎㅎ .요즘 낚시도 몬가고..ㅎㅎ 조만간 속닥하게 한잔 할까요? 산중대작은 힘들어도.. 기수선배 오실때 날 잡아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