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수주의 성서관
1. 계시성 - 성서는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계시다.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기에 성서는 곧 예수님이시다.(요5:39)
2. 권위성 - 성서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인격적 말씀이니
이것은 성서가 신적기원(神的紀元)을 갖는 권위이다.
즉 성서의 실제저자는 하나님자신이다.
3. 영감성
a. 성경기자에 관한 영감
- 기계적 영감설
- 유기적 영감설 : 하나님은 인간 기자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고자 할 때에
인간저자의 모든 능력을 최대한 이용하시고
또 그것들에 성령충만함을 입혀서 완벽한 글이 완성되도록 하셨다.
b. 성서자체에 대한 영감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경의 인간기자는 모두가 성령의 초자연적 감화를 받아썼기 때문에
모든 글자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영감이 깃들어있다. (딤후3:16)
완전 축자영감설, 성서무오설 - 성경의 역사는 신화와는 거리가 멀다.
성경은 백퍼센트 사실(벧후1:16)
c. 영감의 결과
- 성경의 영원성(요10:34-36)
- 성경의 신뢰성(시119:160)
- 성경의 무오성(마5:18)
- 성경의 권위성(마4:4-10)
(2) 진보주의 성서관
- '성서란 어떤 책인가'의 문제는 성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성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성서는 역사서가 될 수도 있고,
과학서가 될 수도 있고, 교리서가 될 수도 있다.
즉 성서에 대한 시각에 의해서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의 성서를 보는 눈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에 대한 이스라엘의 고유의 신앙경험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책이다.
성서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삶의 척도, 표준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그릇과도 같다.
즉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그릇)로 기록한 책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지만
인간의 언어는 충분히 오류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이 그릇이란 부분도 문자 그 자체적으로 성서화(=우상화)된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유심히 성서를 살펴본다면 여러가지 이상한 점과 모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상한 걸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서를 올바로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1. 성서에 나타난 오류와 모순 투성이들
a. 모세오경에 관한 의심할만한 점들
예컨대, 상반된 두 가지 창조이야기(창1~2:4, 창2:4~ 창조순서가 다르다),
시대착오적인 지명들(창14:14, 단이라는 지명은 아브라함시대에는 물론이고
모세시대에도 없는 지명이며, 야곱의 후손인 단 지파들이 살던 곳이 아주
후대에 불려진 지명임) 등등.. 이외에도 그 사례들을 언급하자면 수두루 빽빽하다..
자세한 성서공부를 하고 싶다면 언능 기독교서점으로 달려가
「구약성서개론」(대한기독교출판사)을 뒤져보고 반론할 것..!
(참고로 그 책은 장신대 / 감신대 / 한신대에서 구약학개론에 공동 채택되고 있는 교재임)
신약에서도 예를 하나만 들자면, 예수탄생 연대의 불일치성을 들 수 있다..
마태복음의 탄생에 따르면 예수는 해롯의 사망 이전에 태어난 걸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헤롯은 이미 BC 4년경에 죽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 의한 예수탄생은 BC 4년경을 넘을 수 없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탄생은 인구조사 때 태어난 걸로 씌어있다..
하지만 그 인구조사는 AD 6년의 일이다.. 즉, 10년이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신약성서를 좀더 폭넓게 공부하시길 바란다면
「함께읽는 신약성서」(한국신학연구소)를 권하고 싶다..
이 책은 여러 교수님들과 목사님들의 공동집필로 엮어저 있다..
b. 그 외 성경의 이상한 구절들
2. 진보가 말하는 보수측의 성서관
- 성서를 영의 눈 또는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성서를 볼 때는 어떤 특
수한‘안경’같은 것을 끼고 보면은 안된다. '인간 대 성서의 만남'의 만남에 있어서 그 사
이에는 어떤 무엇도 끼여서는 안되며 투명하게 정면으로 마주서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인간
은 이성적 존재이기에 당연히 성서에 대한 의문(나쁘게 말하면 의심)을 갖게 된다. 근데 흔
히들 얘기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성서를 본다면 아무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서를 펴기도 전에 이미 성서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기에 거기에는 아무 의
문이나 비평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나름대로의 성서에 대한 전이해를 가
지고 성서를 보게 되는데, 이 전이해는 바로 우리들이 다니던 기존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형
성된 것으로 소위 <주일학교 신학>Sunday School Theology이라고 한다.
- 보수주의 기독교는 성서를 성서로 보는 게 아니라 성서를 교리에 대한 시녀로 본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신앙고백(=사도신경)은 기독교교리의 축약이며 핵심적 결론이다.
<교리>dogma의 핵심은‘예수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가 다
시 부활하셨는데, 이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받고 천당 갈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갈
것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읽기도 전에 이미 기독교 교리
(=사도신경)를 은연 중에 전제하고서 성서를 읽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성서를
읽은 것이 아니라 내 머리 속에 있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재확인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성서는 교리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3. 진보적인 성서관
성서를 열기도 전에 믿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철저하고도 치열한 검증 뒤에 성서를
받아 들여야 한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문점을 갖고 거리낌없는 솔직
함으로 성서를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성서는 열린 책이다. 거기서 키워낸 믿음이야말로
오히려 더욱 값진 신앙이 아닐까?
믿음은 인간의 이성을 파괴시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 자신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면 결코 우리 인간의 이성의 희생을 요구하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
이 가진 이성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구원(해방)사건을 담고 있다. 성서의 내용이 사실이냐 비
사실이냐를 따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하다. 애초에 성서기자는 그것이 사실이냐 비사실이
냐에 신학적 관점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구원의 메세지를 선포하는 데
에 중점을 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의 자리에서 나온 체험적
인 신앙고백이다. 즉 성서의 문자 그 자체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바
로 성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서는 성서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후자
의 성서가 있었기에 전자의 성서에 권위가 있는 것이다.
이제 성서를 읽을 때 이성에서 도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그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서려면 정
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분석, 비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비판은 부정이나 비판
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확신어린 이해를 위한 성서비판이다. 성서는 사람이 읽고 이해하도
록 씌어진 것이다. 이해없는 신앙은 맹목적이며 맹목적인 신앙은 불신앙이다. 즉, 성서를 잘
못 대하는 태도 그 자체가 불신앙이며 죄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서에 대한 철저한 해부작업 곧 인간의 이성이라는 메스를 들고 이
리 까보고 저리 까보고-쬐끔 심하게 말한다아∼- 그러다가 신앙인으로서 방황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과정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진정하고도 크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으리
라 본다.
이제 우리는 성서 안에 있는 오류와 모순들을 은폐하지 않고 정직하게 우리의 의문들을 들
고 질문할 때 그 모순과 오류 뒤에 계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성서본문이 왜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그 시대적 배경과 사회학적인 의미를 밝
히는 연구를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확실한
참 진리라면 아무리 비판해도 아무리 까뒤집어도 참 진리가 아니겠는가! 이런 확신을 갖고
성서공부에 임한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조건 믿습니다"라는 기도보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기도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어여삐 보실 것 같다고 생각한다. 성서는
닫힌 자들의 것이 아닌 열린 자들의 것이기에!
▷ 월요신학서당 「신약성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한다」/ 안병무 「역사와 해석 」참조
(3) 성서경전의 역사
- 지금의 성서는 원본에서 번역된 것이 아니다. 원본은 지금 신,구약 통틀어서 남아있는 것
이 하나도 없다.
1. 구약성서
구약성서의 원래의 히브리어 이름은 '토라(Torah), 네비임(Nebiim), 케투빔(Kethubim)'이
며, 번역하면 「율법,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집」이다. 경전화된 연대는 모세오경이 B.C 400
년경에, 예언서가 B.C 200년경에, 성문서집이 A.D 100년경(또는 A.D 90년경)의 유대 랍비들
의 얌니아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정경으로 인준 받았다. 개신교는 이 얌니아 회의를 존중하
여 이때에 인정받은 39권의 구약성서만을 오늘날까지 정경으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알아야 할 점은, 종교개혁이전의 약1500년간은 개신교가 말하는 외경도 정
경으로서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카톨릭은 외경이라고 하지 않고 제2정경이
라고 하여 구약성서에 포함시키고 있다. 원래의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와 약간의 아람어로 씌
어져 있다.
2. 신약성서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미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또 다른 책들
을 지어서 포함시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초대기독교의 분위기가 예수의 재림을
대망한 종말론적 신앙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자 예수사
건의 목격자들이 예수의 사건을 문서화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또한 당시에는 바울을 비롯한
초대기독교의 신앙의 글들이 여러 교회에 영향을 끼쳤기에 구약성서에다가 신약성서를 새롭
게 정경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신약성서의 정경화 작업이 너무나도 많은 책들로 인해 혼란스러웠으나,
A.D 367년경의 아타나시우스의 서신에 나온 정경목록을 지지하여 27권의 신약성서를 확정지
었다. 그 후 제롬의 라틴어 번역이 이러한 정경목록을 따라서 서방교회에 유포하여 오늘날
에 신약성서가 우리 손에 들어 온 것이다. 원래의 신약성서는 '코이네'라는 헬라어로 씌여
져 있다.
-출처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 한국기독교연구소
http://freeview.org/christ/christ-2.htm에서-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도 그 고유의 자율성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무전제의 觀을 거부하고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내세워
더 이상의 의심과 의문과 탐구를 가로막고 또는 단념하고 그 모든 것을 신께 귀탁해버린다.
그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의 한계성을 주장하면서
오히려 전지전능한 신을 인간화(인격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전제는 무소불위의 위엄으로 진리가 된다.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것은 삶의 전 영역에서 우리의 활동의 규범이 된다고 한다.
그것이 전 인류를 대변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 근본적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의 특수한 인식으로서 신앙고백이란 경험들이 누적되어 쌓아올려지고 세워진
인류의 한 전통적 유산에 기초한 상대적가치임을 인정하려않는다.
물론, 그 신자들에게 이 땅에서 많은 할 일을 주고,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라는 친밀감과 감사의 의욕과 희망을 주고있다.
이웃을 사랑하며 적극적인 나눔과 사랑을 실천을 강조한다.
다만, 그 교리적인 함축이 나 이외의 신에 대해선 파괴적인 야수성이 있기에
바리게이트가 쳐져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마음 먹기에 달라지는 진리를 말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달라지게 받아내고 보고있는 그 마음의 작용과 근원에서
절대의 보편적 진리의 구현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무소불위의 위엄이 진리가 되는 것은
그 신이라는 무소불위 위엄이라는 그 자체로서 진리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진리이다.
믿음을 서게하고 믿음을 무너트리는 그 마음...
그로부터 자유롭고 자연한 진리를 궁구해보자 하였던 것이다.
이레네오
참, 이렇게 어려워서야....늘 자신의 인식의 한계성을 보아야 된다고 이야기 하건만....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상의 틀을 다시한번 확인해보시길....그리고 그 틀안에서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늘 잊지마시길...결국, 불교의 신앙을 가진 사람눈에는 온 세상이 불도의 원리로 보이는게 당연한게 아닌가?
2005/05/15
이레네오
위의 사료들은 개신교(프로테스탄트)사료입니다. 일부 가톨릭(천주교)와 같은 내용들이 있지만, 신학적으로 입장이 다른 부분이 있기에, 용어의 차이가 생깁니다. 보수주의니 진보주의니 하는 것은 개신교들의 성서신학적 입장이지요. 성서 텍스트들이 서로다른 모순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것은 성서가 저술되고 편집될 때
2005/05/15
이레네오
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학적 편집기법을 이해해야합니다. 우선 성서는 한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은 아닙니다. 헤브라이즘 문화권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Antologie라는 편집기법을 썼습니다. 그것은 성서의 여러구전 전승들을 책으로 편집할 때, 서로 모순이 되는 이야기, 즉 똑같은 내용의 서로 다른 두개의 이야기들을
2005/05/16
이레네오
동시에 기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두다 조금 다르고, 동시에 기재하면 헷갈릴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문화적인 배경안에서는 모두다 하느님(유일신)을 드러내는 이야기였기에, 서로다른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전승들을 모두 존중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단편적로 한가지만 이야기를 드립니다.
2005/05/15
이레네오
성서가 모순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일괄된 내용이 아닌 경우, 서로 충돌하는 경우,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경우,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현대인의 눈으로 모순이다. 잘못되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 단편적인 예로 편집기법 중 하나를 제가 이야기
2005/05/15
이레네오
드렸습니다. 성서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한 역사서가 아닙니다. 고대 근동지역의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 안에서, 그들의 시각으로 그들이 믿고 고백한 유일신과 그들과의 관계를 기록한 책이지요. 그러므로 성서는 일종의 신학사상을 편집해 놓은 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2005/05/16
이레네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신학사상을 편집해 놓은 것안에는 신의 섭리가 있다고 믿고 있고, 그 안에 신의 계시가 들어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를 저술하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고 한순간에 쓴 것이 아니라, 장구한 역사(약1300년)동안에 저술 편집되었습니다. 그 역사안에 신의 현존이 있다고 믿는거죠
2005/05/16
이레네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자료를 가지고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을 이야기 할때, 그 자료 또한 저술한 사람의 사상적 배경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자료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자신의 틀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이청향님의 글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저도요.^^ 이게 마음 공부 아니겠습니까?
2005/05/16
이레네오
위의 이청향님의 사견은 만약, 살아계신 신을 직접 체험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그건 단지 신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의 머리로 이해한 지식이게 되는 거죠. 이처럼, 서로의 인식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결국 무신론도 자신이 신이 없다고 믿는 신앙심이 아닙니까?
2005/05/16
이레네오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논리 차원으로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교의 신비신학적 영성 전통 안에 숨쉬고 있는 것을 단 하나의 이론으로 무시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들이 살아계신 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면요.......
첫댓글 이레네오님의 결론은 결국 신의 체험이군요. 체험이란 무엇일까요? 경험되어진 동일한 것들이 반복되어져 나타날때 실제한다고 믿는 생각들일 것입니다. 갑자기 만동자가 영혼의 유무를 묻는것에 대하여 침묵으로 답하시는 부처님의 14무기가 생각나네요.
존재란 동일성이 있을때 상정되는 말입니다. 한순간도 동일함이 없다면 과연 존재란 있을 수 있을련지요.자기동일성이 없는데 영혼의 유뮤나 신의 유무는 토끼 뿔이 몇개냐는 생각아닐까 생각되는군요.
하여 동일 한 무엇으로 생긴 체험 ,이레네오님의 체험이란 즉 신을 체험 했다는 생각이 실제한다고 생각하는 실체론과 흡사하군요.호령을 하셨지만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존재란 이미지인가 봅니다. 헌데, 이 이미지가 정적인 것만이 아니고 나고 자라고 변한다는 동적인 그 유동성을 우리는 함께 인정하고 그 토대(패러다임 : 이 패러다임도 하나의 상이겠지만...)에서 우리는 나와 너를 불러주고 있기 때문인가 합니다. 실체인가 아닌가? 그에 대한 옳고그름에 대하여 무기가 아닐지...
불교란 정말 너무 잔인 한지 모르겠습니다.우리의 인식을 통째로 뭉글러 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