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 틔다
화려한 무용복 속의 무희들이 신이 났다. 드림스틱으로 짐볼을 난타하며 신명을 돋우자 관객들이 모두가 흥에 겨워 들썩였다. 늦게 합류하여 단원들에게 누를 끼칠까 봐 노심초사하던 나도 스트레스를 확 날려버린 무대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 넓은 실내체육관을 달군 우리 팀의 평균 연령은 고희를 훌쩍 넘겼다.
노인복지회관을 찾은 것은 달포 전이었다.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수년 동안 지척에 두고 살면서 얼씬도 하지 않았던 곳이다. 신불산과 간월산, 가지산을 두르고 사는지라 몇 걸음만 하여도 싱그러운 산 속이니 복지회관에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지공파가 되어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도 노인으로 분류되는 것에 은근히 마음이 불편한 것도 이유였다. 유엔에서 체질과 평균수명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발표한 것을 보면 일흔은 아직 중년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아직은 중년이라고 최면을 걸면서 함께 복지회관에 가자는 친구들의 권유에도 손사래만 쳤다.
그랬던 내게, 띠동갑 보다도 세 살이나 더 많은 할머니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친목모임에서 그녀는 장윤정의 ‘어머나’를 경쾌한 율동을 곁들여 불렀고, 댄스 차차차에서 탱고까지 추었다. 저 나이에 저렇게 유연한 몸놀림으로 모임을 이끌어가는 그 열정이 몹시도 부러웠다. 하여 그녀가 솜씨를 갈고닦은 곳을 수소문 했더니 바로 이웃하고 있는 노인복지회관이었다.
대부분 회원들은 노인복지회관 개관과 더불어 입학을 했다니, 처음에는 그들의 축적된 십 년 내공을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조금 믿는 구석도 있었다. 소싯적 운동회 마스게임을 지도해 본 경험을 살려 볼 심산이었다. 아무리 오래 된 일이지만 적어도 따라는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강당을 들어섰다.
그러나 들어서자마자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젊은이들에게도 난도가 높은 율동을 사십여 명이 한 사람인 듯 공연을 하고 있었다. 치매예방을 위해 같은 같은 동작이 반복되지 않았고 회전 횟수와 회전 방향도 변화무쌍하여 신출내기인 나는 혀만 내둘렀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입력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의 시범도 볼 때뿐이었고 머리와 손이 각각 놀았다. 회원들과 함께하지 못한 체 허둥대기만 하는 나는 상 바보였다.
며칠을 흉내만 내며 바보로 지내다가 겨우 회원들과 어울리게 될 즈음, 새로운 작품을 배우게 되었다. 광역시 경연대회에 출전할 작품이었다. 오래된 회원들도 처음 접하는 동작인 때문인지 익히는 속도가 나와 비슷했다. 이틀 뒤, 선생님은 하던 동작을 멈추더니 학생들만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게 했다.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기교는 두고라도 군무의 생명인 동작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동작도 방향도 중구난방이었다.
선생님은 어처구니없어서 차라리 웃고 마는데 나는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새로운 학습에는 오랜 기간 숙달된 저들도 나와 같다는 동질감이 생겼다. 어쩌면 아득하기만 했던 십 년의 간극도 메울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첫 대면인 무대에서 회원들이 보여주었던 멋진 군무는 오랜 기간 흘린 땀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그때서야 ‘나도 하면 되겠다.’ 는 생각에 움츠려 들었던 마음이 다소 누구러졌다.
경연대회가 며칠 남지 않았다. 선생님은 맨 앞줄에 세 사람을 센터로 세우고 피라미드형으로 대열을 구성해 나갔다. 자리배치를 시작할 무렵, 나는 제일 뒷줄에 설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순서를 익히는데 둔감한 내가 약간 실수를 해도 앞사람을 보고 눈치껏 따라하면 무난히 넘어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맨 앞줄 오른쪽에 서야했다. 겁이 덜컥 났다. 선생님께 뒷줄에 설 수 있게 배려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했다. 내가 틀리면 뒷사람 대부분이 틀리기 마련이어서 막중한 사명감에 잠이 오지 않았다.
산에나 설렁설렁 다니고 말 것이지 사서 이 고생을 한다싶어 후회막급이었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지 않는가? 쇠해진 기억력 보다는 손발을 고생시켜 작품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했다. 평소에도 학습에는 왕도가 없다고 믿었기에 우선 검은 콩 한 사발을 꺼내왔다. 전신 거울 앞에서 처음엔 구령을 붙여가며 사 분짜리 공연을 마치고 콩 한 개를 대접으로 옮겼다. 열 개의 콩이 이동되었을 때는 파김치가 되었다. 땀에 절은 윗옷을 벗어던지고 마라톤 선수 차림이 되어 두루뭉술한 몸뚱이를 흔들어댔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서너 번을 반복하고 다시 쓰러져서 잤다. 퇴임 이후 공식적인 일로 이리도 무섭게 책임감이 옥죄어 오기는 처음이었다.
반복되는 연습에 조금씩 문리가 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벽한 연습이었음에도 장소가 바뀌면 또 틀리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그럴수록 연습횟수를 늘리며 타는 속을 풀어냈다. 숨어서 지켜보던 남편이 애가 탔던지 불쑥 나서며 칭찬인지 핀잔인지 모를 한 마디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 바보도 도가 틔겠다.”
사흘 만에 콩 한사발이 대접으로 이동이 되었다. 더불어 나도 자신감이 생겼다. 집에서도, 강당에서도 온전히 내 것이 된 동작과 율동으로 신나게 짐볼을 두들겼다. 실수를 할까봐 두렵던 앞자리가 비로소 편안해졌다. 다른 조에게 순서를 익히게 할 양으로 선생님은 우리 조의 시범모습을 밴드에 올렸다. 휴대폰 속에서 나풀거리며 신나게 짐볼을 두드리는 모습은 국립무용단원이나 진배가 없었다.
넓은 체육관 안은 열기로 후끈거렸다. 참가팀의 공연이 모두 끝나고 시상식이 있었다. 참가에 목적이 있다고 그렇게 내숭을 떨던 선생님과 회원들이었다. 그러나 대상에 우리 팀이 불려지자 약속이나 한 듯이 함성을 지르며 중앙으로 내달았다. 나는 객석에 서서 막춤 세리머니를 해대는 동료들을 휴대폰에 담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칭찬을 잊지 않았다. ‘김여사, 수고했어. 드디어 너도 도가 트인겨?’ 힘들게 얻은 성취감을 심호흡으로 가슴 깊이 몰아 넣었다. 두고두고 만끽할 예정이다. 행복했던 무술년 봄을 배웅하는 오월 끝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