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목적있는 삶(2)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 말씀 / 로 마 서 12장 1절 – 2절(신약성경 256쪽)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아멘!
☺ 서로를 바라보면서 최고로 행복한 표정으로, 최고의 축복 인사를 나눕시다.
“주님 안에서 형제님을 사랑합니다. 자매님을 사랑합니다.”
☺ 새로운 인사 한 번 나눕시다. / 먼저 두 손바닥을 서로 맞대며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봅니다.
한 3초 정도 바라본 후에 “샬롬” 이라고 인사를 나눕니다.
너무 살벌한 눈으로 째려보지 말고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십시요.
요즘은 손님 식사 대접을 집에서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셀 목장 심방을 하는 경우 셀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대부분 “목사님 뭘 좋아하십니까?”
제 식성에 맞추어 외식을 하게 됩니다만,
너무 고맙게도 가정에서 정성을 다해 식사대접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어느 가정에서 특별한 식사대접을 받은 적이 있는데,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밥상을 받았는데, 모든 반찬, 과일, 차 한잔까지도 정확히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제가 좋아하는 것들만 차렸느냐?” 고 물었더니,
“평소에 목사님과 식사할 기회가 있을 때, 목사님의 젓가락이 많이 가는 음식,
안 드시는 음식을 체크했다." 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감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늘 예수님을 초청하고 모신다는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사역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젓가락이 많이 가는
사역이 무엇인가를 체크했는가?” 하는 깨달음입니다.
목적있는 삶 첫 번째로 “내가 왜 사는지 알고나 삽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내 삶의 계획과 목적을 찾으라는 주제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이 땅에 왜 사는지? 첫 번째 이유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오늘 설교제목 그대로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계획되고, 설계되고, 디자인된 하늘 사람들 - 하나님의 형상들입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자주 가는 사람! 늘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사람!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는 사람!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가 왜 사는지? -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를 찬양으로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찬양 후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땅에 사는 존재 이유 중 하나를 분명히 알고 살아가는 멋진 하늘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리겠습니다. - 박수.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으앙’ 하고 울면서 태어났지만,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은 환히 웃으며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들보다 더 많이 기뻐하시며, 환하게 웃고 계신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나를 하나님 형상으로 디자인하신 분,
나의 삶을 계획하고 주관하신 분, 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다시 부름을 받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나 주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나 주님의 기쁨이 되는 우리의 모든 행동을 “예배” 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쁨으로 예배드리는, 나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요 4:23).
또 하나 우리가 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디자인하실 때,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드셨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 기쁨의 예배를 드려야 만 살 수 있도록 디자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어느 문화 어느 종교 권에 있는 사람이든지 예배에 대한 열망이 있다.” 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도 그랬다고 박수를 치며 웃어대는 분들이 참으로 많더라구요.
여러분도 공감할 것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해남으로 이사를 오신 분들이나, 전에 믿었다가 교회에서 상처 입고 쉬고 있던 분들이,
다시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를 선택할 때, 해남읍 내에 있는 이 교회 저 교회
다 둘러보고 마침내 우리 교회에 등록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저도 이해가 안 돼서 “꼭 그렇게 교회를 선택해야 하나, 교회가 골라잡는 무슨 물건도 아닌데.
그 분 참 까다로운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그 분들의 가슴속에 있는 커다란 갈증을 발견하게 되면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이미 다니고 계시는 많은 성도님들을
만나면서도 성도님들 속에 있는 영적 갈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은혜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구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 능력의 손에 붙들리지 않고는
이 험한 세상, 어려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구나.
그래서 은혜받고 싶은 열망에, 은혜 넘치는 교회가 어느 교회인가를 찾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자신이 다니고 싶어하는 교회를 단번에 정하지 않고, 은혜받고 싶은 열망에,
은혜 넘치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성도님들을 이해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는 “where is a good preaching. - 어디에 좋은 설교가 있을까?”
“where is a good worship. 어디에 은혜로운 예배, 좋은 예배가 있을까?”
가슴마다 예배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회자인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애써야 한단 말인가?
교회를 위해 첫째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가? 저는 이 물음에 분명히 대답합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힘쓸 일이 “예배입니다.” 하고 말입니다.
저뿐입니까? 여러분도 왜 사는지? 살아가면서 가장 힘써야 할 일은 무엇인지?
그 대답은 하나, 예배이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첫 번째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기쁨의 제물, 나 주님께 기쁨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첫 번째 존재 목적 또한 영광스런 예배, 주님께 기쁨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믿음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론편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복스러운 일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대단한 것인가?“ 에 대해서
말씀해 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2장 1절부터 마지막 16장까지는 실천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한 단어가 퍽 재미있습니다.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이 단어 하나에 대단히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고리가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론편과 실천편을 "그러므로" 라는 한 단어로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복되게 살아야 한다.
날 구원하신 그분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연결해 주고 있는 꼭 필요한 단어가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 단어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배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감격 없이, 눈물 없이는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커다란 믿음의 선물입니다.
이토록 대단한 구원이라는 선물을 우리가 거져 받았기에,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응답이 나 주님의 기쁨이 되어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처럼 거저 받은 구원에 감격하여 나 주님의 기쁨이 되어 드리는 예배에는,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우리 마음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언제나 마음 중심으로
사람을 보시는 분이요, 언제나 마음에만 관심을 두시는 분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면,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요구하기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
곧 너희 몸으로 먼저 예배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먼저 우리 몸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명절날 객지 생활하던 자녀들이 시골에 계신 어버이를 찾아갑니다.
손에 손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찾아가서 절을 올립니다.
그렇게 절을 올리는 자식들을 맞으면서,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뭘 싸왔나?” 하고
자식들이 들고 온 선물 보따리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자녀들의 얼굴을 살펴봅니다.
객지생활에서 병이나 들지 않았는지. 경제가 어려워 장사가 잘 안된다는데,
대기업도 무너진다는데 직장 생활은 할 만한지, 아이들은 속을 썩이지 않고 공부를
잘하는지, 요모조모 자녀들의 얼굴을 살피는 것이 어버이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이게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찾아나와 예배드리는 시간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녀 된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보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해서 이마에 도장이 찍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성화에서 볼 수 있는 뒷머리에 둥그런 후광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우리 몸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몸이 예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건, 예수님을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므로,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그 호화로운 솔로몬 성전도 너무나 추하고 작아서 계실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하늘을 보좌 삼고, 온 우주를 발등상 삼아도 좁고 모자라서 계실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겠답니다. 유혹이 있고, 고민이 있고, 미움이 있는 내 안에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면 내 몸도 구원받은 것입니다.
내가 천국에 들어갈 때 천국에 내 몸도 함께 올라가게 됩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보좌 앞에서 내 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뵈옵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먼저 너희 몸으로 예배하라.” 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교회라는 하나님의 집에 올 때, 우리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 얼굴이 예배하고 싶어 해야 합니다.
손을 들어 기도하고 찬송하므로 우리의 손도 예배하고 싶어 해야 합니다.
손뼉치며 찬송할 때, 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예배시간마다, 성령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을 요청하며,
우리의 몸이 예배하게 해야 합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이 사단의 도구로 전락할 수도 있고,
우리의 몸이 순식간에 타락할 수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들어 주면 의의 병기가 될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 아내가 부엌에서 시퍼런 칼을 들고 휘젖고 있어도 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조금 있으면 그 칼질 때문에 맛있는 음식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강도가 들어와 그 시퍼런 칼을 손에 들었다고 하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을 사단이 붙들면, 우리는 사단의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면, 우리는 의의 병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병기가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 몸이 기쁨의 제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양은 피가 흐른 다음에 제물이 됩니다.
주님께서 옆구리가 터져 피가 흐른 다음에야 이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가능하도록 독생자를 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에야,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가능해집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교회를 위하여, 이 예배를 위하여 어떤 피를 흘리고 있습니까?
어떤 희생을 하고 있습니까?
피가 묻어있는 예배, 희생이 담겨진 예배, 주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중심 축에는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중심 축이 예배가 되고, 우리가 예배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을 향해 광야에 들어섭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광야 같은 인생 길을 가는,
우리 삶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저들이 광야를 행진하는 모습을 보십시요. 법궤가 출발하면 온 백성들이 함께 출발했습니다.
법궤가 머물면 온 백성들이 법궤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각각 세 지파씩 텐트를 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는 언제나 법궤가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앞에는 언제나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 중심에, 믿음의 공동체 중심에, 예배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습니까? 아멘!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지킨 것이 아니고,
법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예배가 우리를 지켜 주는 것입니다.
예배가 험한 세상, 영적인 전쟁터에서 승리하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의 어떤 선택이 아닙니다.
구원 얻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드리기 위하여 출애굽 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예배드리기 위하여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이 땅에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를 통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복을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예배를 통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능력 있는 손에 붙들려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목적을 잃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주는 생명선입니다.
예배를 떠나면 생명줄이 막히기 때문에 실패하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날마다 영혼이 시들어 갑니다.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 죽어가는 꽃처럼 시들어 갑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도 짜증날 정도로 삶이 흐트러져 버립니다.
그러나 힘을 다하여 예배에 승리하는 사람들, 주님 전에 나올 때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왔으나 하나님이 맡아주는
통쾌함을 경험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아픈 상처를 가지고 왔으나 피묻은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쓰다듬어 주시는 주님의 손길에 어루만짐 당하고
붙들림 당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이 싱싱하게 살아납니다.
흐트러졌던 삶이 바른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예배를 잘 드려라! 이 말씀을 하는 성경 본문을 보십시오. 강력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예배 안에 풍성한 은혜가 있겠기에,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승리할 수 있겠기에,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겠기에,
예배를 통하여 내 삶이 영광스러운 삶으로 거룩한 삶으로 능한 삶으로
바뀌어 지겠기에 너희들이 예배에 성공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에 승리해야 하느니라. 예배에 은혜가 되어야 가정이 행복해지느니라.
예배에 성공자가 되어야 사업에 성공자가 되느니라.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험한 세상에서 너희들이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느니라.“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여기 '권하노니' 라는 말을 '팔을 비틀어서라도'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기를 게을러 하고, 예배로부터 멀어져 있을 때에 팔을 붙들어서라도,
다리를 묶어서라도 다리를 꺾어서라도, 예배하는 자리에서 은혜받는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만큼 하나님은 예배시간을 통해서 우리와의 만남, 우리와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기 '드린다.' 라고 되어 있는데, 드린다라는 말은 제사장이 제물을 드릴 때 사용하던
바로 그 단어였습니다. 이미 짤라놓은 제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시간은 이미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로 짤라놓은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배드리는 이 시간은 내 몸이 다른데 있어서는 안되는 천국 백성들입니다.
다른 계획할 어떤 여지도 없습니다. 이미 짤라 놓은 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준비된 예물, 다른데 쓸 수 있는 돈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짤라놓은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이 시간 또한 이미 짤라 놓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이 날은 공일, 공휴일이 아닙니다. 이 날은 머리도 꼬리도 없는 일요일이 아닙니다.
이 날은 주일입니다. Load's day 주님의 날, 주님이 원하는 대로
주님이 기뻐하는 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는 주님의 날입니다.
이 주일은 갈라지는 날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살아가는 사람들 보면 비슷하게 살아갑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저녁에 돌아오고 또 밥 먹고 그저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일 아침이 되면 예배하러 가는 사람과 세상에 남는 사람들이 갈라집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과 세상 일 하러 가는 사람들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 주일날은 이렇게 갈라지는 날입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
영원한 천국으로 갈 사람들과 영원한 멸망으로 가야 될 사람들이 갈라지는 날이 주일입니다.
주일은 갈라지는 연습을 하는 날입니다. 내 생명이 끝나는 날 영원한 천국으로
갈 사람들과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사람이 갈라지는 날이 주님의 날입니다.
산 제물로 드리라는 또 하나의 의미는 최상의 상태와 조건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앞에 내 몸의 컨디션을, 내 마음의 컨디션을,
내 영혼의 컨디션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서 예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있는 몸 그대로 주님 앞에 달려나오기보다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 날입니다.
생각을 집중해야 하는 날입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몸을 단정하게 하고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병든 몸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신 분 계십니까? 참으로 잘 나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병든 몸 한 번만 어루만져 주시면
오늘 예배하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질병이 깨끗이 나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건강할 때는 내 멋대로 살아가다가 병든 다음에야 주님 앞에 나왔다는 것,
이 얼마나 송구한 일입니까?
사업에 실패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찾아나오신 분 계십니까?
천부여 의지할 곳 없어 두 손 들고 나오셨습니까?
친구도 나를 박대했고 세상은 나를 배신했고 가족도 나를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나를 영접해 주실 줄로 믿고 이 시간 주님께 예배드리러 나오신 분,
참으로 잘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산을 세우기도 하고 흩기도 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사업을 흩기도 하고 다시 풍성하게 갑절로 열 배로 모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여러분 범사가 잘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잘 나갈 때는 내 멋대로 살아가다가 이제 드릴 것 없는
빈손이 되었을 때, 비로서 주님 앞에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송구한 일이겠습니까?
나이든 다음에 의지할 곳 없어 주님 앞에 찾아 나오신 분 계십니까? 잘 나오셨습니다.
영원한 세계를 그리워하며 달려 나오신 분 계십니까? 잘 나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해 주실 것이고, 거기는 질병도 늙음도 이별도 공포도,
불안도 없는 영원한 낙원으로 여러분을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젊어서 주의 사역을 위하여 영광스럽게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수 있을 때에,
주님 앞에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내 몸을 드릴 수 있는,
그 젊은 시절 어디에 갔다가 이제 돌아 오셨습니까? 송구한 일이지요.
그러나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건강해도 괜찮고 병들어도 괜찮습니다.
아픔을 가지고 오셔도 괜찮고 기쁨을 가지고 오셔도 괜찮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오셔도 괜찮고 감사를 안고 오셔도 괜찮습니다.
주님 앞에 예배하는 이 한 시간만이라도 최상의 상태와 조건으로, 내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
단 한번 예배드린다 할지라도 최상의 몸과 최상의 마음과 최고의 정성을 가지고
거룩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배가 내 생애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종말론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예배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가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제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드린 예배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열납되지 않으니 제물만 버림받은 게 아닙니다. 가인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가인만 버림받은 게 아닙니다. 가인의 가족이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인의 자손 만대가 버림받았습니다.
이처럼 예배에서 내가 버림을 받는 다는 게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렸습니다. 제물이 열납되어졌습니다. 아벨이 열납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벨의 가족과 그의 자손만대가 주님 앞에 열납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예배를 드릴 때에 찬송이 여러분의 찬송으로 고백되어 지십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어 진다는 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이 내 예물을 받으시는구나.” 하는 기쁨이 있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에 “저 말씀은 내게 주시는 말씀이야. 내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이야.
내 삶을 반듯하게 만들어 주시는 살아 계신 주님의 음성이야.
저 말씀은 나를 붙들어 주실 거야. 저 말씀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거야“ 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예배가 주님 앞에 열납되어 지는 줄로 믿고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예배가 열납되어 지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예배를 최상의 상태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각하지 말고 오세요. 조금만 일찍 오세요.
예배라는 것은, 내가 나오고 싶어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예요.
주님이 나를 불러주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게 예배입니다.
내가 뭐 주워 챙길게 있어서 예배드리러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예배로 불러주셨습니다.
다 같이 일어나서 서로를 축복하는 찬양으로 시작되는 예배 시작부터 참석하지 못했다면,
이미 예배 반쪽이 짤려나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축도하는데 뭐가 그렇게 급한지 후다닥 도망가는 사람이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회당에서 예배드리는 모습들을 보면, 그분들은 예배 한시간 전에
먼저 와서 교제하고, 또 끝나고 난 다음에도 함께 춤추고 찬양하고 대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하러 온 사람이 아니고 예배 끝내러 온 사람 같아요.
너무 그렇게 먼저 나가려고 서두를 것 없어요.
함께 옆에 분하고 인사도 하고, 교제도 하고, 잠깐 묵상도 하고, 받은 말씀 가지고 한톨이라도
흘릴까봐 떨리는 마음으로 그 말씀 고이 간직하여 가지고 나갈 때에
주님께서 예배를 기뻐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린 결과가 무엇입니까?
1절과 2절 사이에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이 되었습니다만 원문에 보면 "카이" - "그래서" 라는
말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라. 그러면 어떤 은혜를 주시느냐.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2절은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통나무라도 물에 둥실둥실 떠내려 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피래미라도 살아있으면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죽은 영혼들은 썩을 세상의 가치관대로 살아갑니다. 마귀의 유혹대로 둥실둥실 떠내려갑니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배 성공자들은, 예배에 승리하는 사람들은 바른 가치관 가지고 역사를 거슬러 살아갑니다.
시대의 가치관을 거슬러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프로타고라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내 삶의 중심 축을 이루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중심 축을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배에 승리하고 나면, 하나님 중심으로 중심 축이 달라집니다.
코페루니쿠스 이전에는 지구가 온 우주의 중심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넘어가는 줄로 알았지요.
모든 별들이 다 지구를 중심으로 떠돌아 다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이 지구는 위성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배에 승리하지 못하면 모든 삶의 중심에 내가 서 있습니다.
모든 판단과 가치의 중심에 내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승리하고 나면, 내 중심축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성령님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축이 달라지게 됩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이제는 무너진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순교적인 각오를 가지고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역사가 위기에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우리는 예배승리자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왜 한국교회가 이 시대를 이끌어 갈 수있는 힘을 잃어버렸습니까?
예배의 승리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리가 예배에 승리해야 될 때입니다.
어떤 희생과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우리는 예배에 승리해야 합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영국 국민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영국 황실과 위스턴 처칠 수상은 영국교회에 기도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국민이 존경하는 윌리엄 템플목사에게 설교하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전 국민에게 전해지는 방송시간에 템플목사는 지금의 위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주일날 여러분의 마을에서 예배당 종소리가 울려퍼지면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한 명도 빠지지 말고 모두 예배당에 가십시오.
지금은 온 민족이 함께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온 민족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온 국민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예배에 승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온 국민이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이 윌리엄 템플 목사님의 영적외침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위기에 부딪힌 기업가와 정치가에게 주는,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성도들아! 우리 모두 예배에 승리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사는지 알고나 삽시다. 여러분! 왜 사십니까?
우리가 이 땅 사는지, 그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 모두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나 주님의 기쁨이 되는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 모두 예배의 성공자가 되시고,
예배의 성공자가 받는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마무리 기도
♬ 간구의 찬양 드림 /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