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 정맥의 꼭지점인 칠장산에 서는 순간을 떠올리면서 정각 새벽3시에 집을 나섰다. 그동안 정성을 다하여 한발자국씩 걸어온 금북정맥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다.
중부고속도로 진천나들목에서 내려 백곡저수지를 돌아간다. 저수지의 규모가 대단하다. 곳곳에 밤을 지새운 낚시꾼들이 보인다.
불켜진 텐트, 어둠이 드리운 물빛, 낚싯대 끝에 매달린 찌, 이런 호수의 풍경은 바로 옆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숯 굽는 연기와 어울리면서 새벽을 더욱 새벽답게 멋진 정취를 만들어 낸다.
엽돈재로 오르는 34번 국도는 새롭게 포장이 되어있다. 엽돈재 고갯마루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숯 굽는 마을을 내려다본다. 마을은 옅은 연기에 덮여있어 신비로움이 묻어난다.
06:15 금북정맥의 마지막 날인 만큼 옥정현부터 같이 걷겠다고 하는 채미에게 옥정현까지 오기 힘들면 칠장사에서 그냥 칠장산으로 오르라고 말하고 산으로 오른다.
충청남도는 뒤로 멀어져가고 이제 충청북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밟아나간다.
06:37 오른쪽으로 방향을 살짝 바꾸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은 진달래는 연방 꽃을 피워낸다. 영상6.5도 걷기에 딱 좋은 온도이다.
06:40 왼쪽으로 산을 내려가는 길이 뚜렷하고 오른쪽으로는 내려가기 힘들어 보이는 재를 지나간다.
07:30 걷기 좋은 산길을 따라 진달래를 따먹으며 나무이정표(서운산정상 0.9km, 청룡사 2.2km)가 서있는 곳까지 왔다. 청룡사로 내려가는 길은 넓고 평탄해 보인다. 청룡사는 지난 산행을 끝내고 둘러보았다. 아직도 역사
깊은 청룡사의 단아함이 눈에 선하다.
살짝 치받이를 가는데 오른쪽에 보이는 다락논에는 물이 조금 고여있고 잡초로 뒤덮여있다. 부지런한 우리민족은 남방지역의 작물인 벼를 경작하려고 산골짜기까지 개간을 해서 벼농사를 해왔었다. 평지의 찰배미논마저 다른 용도로 바뀌어가고 있는 지금에 와서 이런 천둥지기를 누가 돌볼 것인가.
07:39 헬리포트에 세워져있는 스테인리스 안내판의 그림이 이상하다 오른쪽 구석에 그려져 있는 방향표시를 잘 봐야한다. 북쪽이 땅을 향하고 있으니 완전히 거꾸로 놓고 봐야 하는 것이다. 자칫하면 방향을 엉뚱하게 잡게 된다.
서운산 정상은 정맥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나무이정표(좌성사·청룡사, 배티고개·석남사, 서운산정상)를 지나면 곧이어 서운산 정상이 나온다.
07:44 서운산 정상에는 서운산성에 대한 안내판이 서있고, 대리석 기단에 자연석으로 만든 표석(해발 547.4M, 산불조심 산지정화)이 있고, 나무표시판이 두 개 서있다. (서운산 정상 해발 547.4M를 표기해둔 것과 석남사 2.6KM를 표기한 것) 석남사 방향으로 가면 안되고 다시 돌아서야 한다.
** 서운산성
경기도 기념물 제 81호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북산리 산2
서운산성은 '북산리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차령'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누군가 지운 것 같다.)산맥에서 우뚝 솟아오른 서운산 언저리의 산봉우리를 둘러싼 토성이다. 남쪽에는 차령산맥을 관통하여 직산에서 진천으로 넘어가는 지름길인 협탄령이라는 고갯길이 있는데, 산성은 이 교통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이 지역의 의병장으로 활동한 홍계남(洪季男)장군이 북쪽으로 올라오는 왜적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알려져 있다. 성은 산봉우리 2개를 연결하여 쌓아 말안장 같은 모습이다. 성벽은 토축 또는 토석혼축으로 쌓았으나 남벽과 동벽의 일부구간에는 가파른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성벽을 쌓지 않아 성의 전체 둘레는 1,228m이지만, 성벽을 쌓은 곳은 450m 정도이다. 성안에는 지휘하던 곳으로 이용된 장수바위가 있고 북쪽가(과의 오기인 듯)남쪽에 문터가 있는데 주로 남쪽으로 출입을 하였던 것 같다. 남문터 옆에는 편평한 터가 있고, 북동쪽의 흙으로 쌓은 높다란 곳은 관측을 하던 장소로 추정된다. 성안에는 우물터가 5개나 있어 물은 비교적 풍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성은 해발고도가 높아 접근이 어렵고 험준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기법으로 보아 방어용의 산성으로서, 대략 고려시대에 쌓아 사용되다가 조선시대에 다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하단에 도지정 문화재 마크가 있다.)
07:53 다시 삼거리로 돌아 나와서 배티고개로 향하는데 넓은 공터에 삼각점(진천 21, 1984, 재설)이 박혀있다.
07:57 나무이정표(서운산 정상 0.4km, 석남사 1.3km, 배티고개 1.5km)를 지나는데 나무에 표지가 달려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수종이 다른 나무에 국립한경대학교에서 수종(굴피나무, 가래나무과, 쪽동백, 소나무 등)을 적어 달아 둔 것이다. 까투리 두 마리가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힐긋 힐긋 바라보며 경계를 하면서 뒤뚱이며 달려가는 모습이 우습다. 나는 못 본척하고 지나간다. 연이어 이정표(서운산 0.5km, 배티고개 1.4km, 석남사 1.3km)가 세워져 있는데 많은 이정표를 보면서 낭비가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배낭도 없이 빈손으로 남자 둘이서 가까이 다가온다. 서로 인사를 하고 지난다.
08:02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내려서는데 지나온 능선과 첩첩이 포개어진 산들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보면서 지나온 길을 떠올려 본다.
08:16 높게 세워져 있는 나무이정표(배티고개 0.7km, 서운산 정상 1.2km, 배티성지 충정묘)를 보면서 둥근 나무로 가로막아 놓은 곳을 지나는데 또 하나 이정표(무명순교자 6인묘)가 눈길을 끈다.
08:19 '6인 무명순교자의 묘'가 가까이 보이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내려가서 묘지를 둘러본다. 봉분(封墳)은 작지만 단아한 무덤 6기와 대리석으로 만든 하얀 십자가가 무덤 앞에 자리하고 있다.
** 6인 무명순교자의 묘
이곳 성재의 순교자들은 "목천에서 고개너머 안성땅 잿님골로 이주해 살다가 순교하신 분들"이다. 신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1975년 당시에는 7인 묘였다. 1977년 순교자들의 후손들이 나타나 2기를 백곡공소로 모셨고, 그 후 조사과정에서 1기가 새로 발견되어 6인묘가 되었다. 무덤 이장시 숯과 진토, 미량의 유해가 나왔다. 전해오는 구전에 의하면, 포졸들에게 쫓기던 교우들이 이 근처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무덤이 이 외진 곳에 줄줄이 놓여 있게 된 이유는 박해의 와중에서 급하게 시신들을 끌어 모아 순교한 장소에 안장하였기 때문이다.
라는 글이 적혀있고 무덤을 중심으로 주변 천주교 성지를 그려놓았다.
배티고개가 보이면서 오른쪽 경사면으로 내려서는 길이 나오고 능선을 따라 표시기가 붙어있다. 능선을 따라 가보았으나 결국 한바퀴 돌아서 경사면으로 내려가는 비탈길과 만나게된다.
08:33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313번 도로 위 배티고개에는 표시판(이티재(梨峙) 해발 370m)과 자연석 표석(生居鎭川, 백곡면. 뒷면에 안녕히 가십시오 1999. 3 백곡번영회)이 있고 서운산 정상을 향해 방향을 표시한 이정표가 서있다. 넓은 아스팔트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은 거의 중앙컨트리클럽으로 들어간다. 골프장간판 앞에는 삼거리 길이다.
건너편 끊어진 능선의 단면에 희미한 길이 보인다. 무척 가파르다. 골프장 포장도로를 따라도 되겠지만 나는 선답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절벽을 오른다.
** 생거진천에 대한 전설
[생거진천 사거용인: 生居鎭川 死居龍仁] : 살아서는 진천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이 좋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한 기막힌 사연이 베어있다. 옛날. 진천 땅에 추천석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의 아내 옆에서 잠시 잠이 들었다가 애절한 통곡 소리가 들려 잠이 깨었다. 그 통곡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자기 아내였는데 이내 자식들도 따라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웬 갑작스런 울음이냐며 물었지만, 아내는 우리를 두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시다니 라고 하면서 목놓아 울었다. 그는 곧 싸늘하게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이내 지금 상태는 혼백이란 걸 알아차릴 때쯤 저승사자들이 와서는 그를 데려갔다. 결국 염라대왕 앞에 엎드린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디서 왔느냐." "예, 소인은 진천에서 온 추천석이라 하는 자입니다." "뭐라고?" 염라대왕은 대경실색하며 놀랐다. 용인 땅의 추천석을 불러 들여야 했는데, 저승사자들의 실수로 진천 땅의 추천석을 데려온 것이었다. 염라대왕은 데려온 추천석을 풀어주고 용인 땅의 추천석을 데려오라고 명을 하였다. 일이 꼬이려 했던지 두 사람은 이름과 태어난 날 또 시간이 같았던 것이다. 즉 이름과 사주팔자가 같았던 것이다. 추천석은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쏜살같이 집으로 향했다. 그랬으나 이미 육신은 땅에 묻히고 집에는 위패만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내를 연이어 불렀지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용인의 추천석 몸을 빌리려는 생각이었다. 그는 이내 용인으로 갔더니, 다행히 추천석의 몸엔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얼른 몸을 빌려 용인 추천석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렇게 슬프게 통곡을 하던 가족들은 꿈틀대며 일어나는 모습을 보자 환희의 눈물로 바뀌었다. "여보, 다시 살아났구려!" 깨어난 그는 여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여인과 아들딸은 죽음에서 깨어난 사람의 헛소리라고만 여겼다. 어떠한 말도 먹혀들지 않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바로 진천으로 향했다. 아내라는 여인과 자식들은 그런 그를 실성한 사람인양 생각하였는지 잡으려고 뒤따라 왔다. 진천에 도착한 그는 상복을 입은 아내에게 외쳤다. "여보, 나요 내가 돌아왔소." "뉘신지요, 여보라니요..." 그녀는 돌아온 남편이라 외치는 남자에게 모멸감을 느끼며 동네사람들을 불렀다. 그러자, 뒤따라 온 용인 추천석의 아내는 남편이 잠시 미쳤다며 계속 용서를 구했다. 그는 계속 자신의 처지를 필사적으로 설명하였지만 동네사람들에게 매질을 당하고는 결국 관가로 끌려가게 되었고, 원님도 그가 설명하는 사연을 쭉 들었다. 그리고, 원님의 판결은 이승엔 혼이 문제가 아닌 육체가 인정되니 용인으로 가서 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그는 체념한 듯 용인으로 향했다. 가족들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다시 회생하자 이전보다도 대우를 더욱 잘 해주게 되었다. 그러한 세월이 지나자 그도 서서히 새로운 생활에 적응이 되었다. 용인의 추천석은 재산과 땅이 많았으며 아내도 더 젊었다. 그는 이미 그렇게 된 이상 새 삶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이내 곧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어서인지 그 이후부터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이런 내용으로 보면 생거진천이라는 말이 그리 썩 좋은 말은 아닌 듯도 한데.....
08:57 능선과 골프장으로 진입하는 도로는 나란히 이어진다. 봉우리도 아닌 곳에 엉뚱하게 삼각점을 박아두었다. 골프장을 조성할 때 필요에 의해 박은 것 같다.
09:01 헬리포트를 넘어서니 골프장이 넓게 펼쳐진다. 오른쪽은 골프장이요 왼쪽은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그리 조화로운 모습은 아니다. 머리 위에서 휘파람새가 휘-익 휘이-익 정신차리고 빨리 가라고 한다.
09:12 시멘트 포장도로 삼거리 장고개에 내려섰다. 왼쪽에는 굵기가 고른 나무가 무척 많이 쌓여있고 오른쪽에는 건물이 서있다. 곧바로 도로를 따라 오른다. 잔디가 곱게 깔려있고 그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납골묘(연안이씨)가 호화롭고 짚을 엮어 지붕을 인 원두막이 한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납골묘를 지나 숲으로 들어선다. 오래 전에 친 것으로 보이는 그물 망은 찢어져 있다.
09:17 53번 송전철탑(154kv)을 지나면 곧이어 또 다른 송전철탑이 기다리고 있다.
09:24 송전철탑 위 갈림길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골프장을 등뒤에다 버리고 가볍게 정맥을 이어간다.
09:45 왼쪽 앞에 세븐힐컨트리클럽(골프장)과 칠장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고 왼쪽 뒤에 안성시에 들어서 있는 아파트단지가 빼곡하다. 오른쪽에는 성대저수지가 아담하게 물을 담고 있다.
09:51 약식 삼각점(측량점)으로 보이는 사각 시멘트가 깨어진 곳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09:54 작은 4거리 안부를 지난다. 나무는 빼곡하지만 멀리까지 조망이 좋다. 완연한 봄이다. 나른함이 밀려온다. 옥정현에서 만날 채미를 생각하면 나른함이 달아나고 힘이 솟는다.
09:57 머리 위 헬기장에 헬기가 내려앉아 심한 바람과 소음을 일으키고 있어 헬기가 이륙하기를 기다린다. 7분을 기다렸다. 드디어 헬기가 서서히 이륙한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나무로 잘 만들어진 헬기장(470.8m)에 올랐는데 헬기가 선회하더니 다시 헬리포트로 다가오는 것이다. 재빨리 내려가다가 삼각점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올라가서 기어코 삼각점을 확인하고 헬기를 보니 나를 향해 공격이라도 할 듯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공군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10:08 헬기에 쫓기어 봉우리에서 내려선다. 봉우리에서는 왼쪽으로 내려야 한다. 수많은 헬기장을 지나왔지만 실제로 헬기가 이착륙하는 것을 목도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다.
10:15 돌무더기가 있는 재를 넘어선다. 헬기는 같은 코스를 돌고 또 돌고 헬기장에 앉았다가 날아가기를 반복한다. 헬기에 정신을 빼앗겨 한동안 아무생각 없이 걸었다.
10:21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나비는 진달래꽃에 앉아 꿀을 빨아먹고 있다. 산과 산 사이 다락논을 보면서 작은 재를 지나서 쓰러져 가는 움막으로 향한다.
10:40 거대한 송전철탑(본765kv, 765,000볼트, 한국전력공사)이 어깨에 지고 있는 굵은 전선은 칠장산을 향해 이어진다. 옥정현으로 오르는 도로가 보인다. 철탑을 지나 약간 내리받이를 가는데 오른쪽에 천룡골프장이 산 아래까지 가깝게 들어와 있고 골프장 뒤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저수지가 보인다. 왼쪽 능선 뒤로는 안성시 아파트단지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10:49 왼쪽으로 내려가면 포장된 임도로 내려설 수 있는 곳이다. 임도가 가깝게 보인다.
10:59 삼각점(79만 보인다)이 박혀있는 409.9m봉에 올라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골프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멀리까지 시선이 닿는 데까지 조망이 된다.
11:01 봉우리 바로 밑에는 잡목이 가득한 헬리포트이고 헬기장을 지나 옥정현으로 간다.
11:04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는 임도에 내려서니 옥정현이 바로 앞이다.
11:08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신계리와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의 경계 387번 지방도 위 옥정현에 내려서니 한복을 입힌 남녀아이모형 앞에 채미가 오도카니 앉아있다. 반갑다. 주변을 둘러본다. 오른쪽에 조립식건물에 기와를 이고 있는 집이 있다. 진천군 월면에서 세워둔 표석[안녕히 가십시요(오의 오기)]과 표시판[옥정(玉井)재, 해발 390m]이 서있다.
11:15 채미가 사온 만두를 나누어 먹고 옥정현과 작별을 한다.
11:18 배가 부르면 오르막이 힘들다. 첫 번째 봉우리에 힘겹게 올랐다.
11:49 무이산 오르기 전에 만난 재에는 작은 돌을 수천 개 쌓아 만든 제법 높은 돌탑이 서있다.
11:55 무이산 전 봉우리는 가파른 치받이를 올라야 한다. 정맥에서 벗어나 있는 무이산을 둘러보려고 배낭을 내려놓고 무이산으로 향한다.
12:00 무이산 정상에는 삼각점이 있고 반듯하지 못한 자연석으로 만든 표석이 서있는데 무슨 내용을 적어 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골프장과 광혜원면소재지를 내려다보고 돌아선다.
12:12 가랑이를 두 번 벌리고 서있는 특이하게 생긴 굵은 소나무를 그냥 지나치기 거시기 해서 사진을 찍었다.
12:33 충청북도 광해원면 구암리 무술마을과 안성시 금광면 옥정리 연대동을 이어주는 작은 재 무치(무위치)에 내려서니 수많은 잔돌로 쌓아 올린 돌탑이 서있다. 누군가 소원을 빌면서 돌을 하나씩 쌓아 올렸을 것이다.
['김용진'님 반가웠습니다. 저는 금북정맥을 마무리하는 중이었고 님은 막 금북정맥을 출발하셨습니다. 우연은 아닌 듯 합니다. 토요일에 그것도 홀로 정맥을 이어가는 동지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답니다. 하기에 더욱 반가웠습니다. 단독으로 외로움을 벗삼아 먼 길을 이어간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지기를 만난 듯 반가운 것입니다. 님은 한북정맥과 한남금북정맥, 그리고 한남정맥을 마치고 금북정맥에 들어섰다고 했지요. 또,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능선이니 모든 정맥을 백두대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실천한다고 했지요. 일대간구정맥 무사완주를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12:51 454.6m봉을 향하는데 왼쪽 비탈은 나무가 하나도 없고 능선에만 소나무가 일렬로 서있는 것으로 보아 불이 난 것은 아닌 듯 하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나무를 베어낸 것 같다.
12:59 삼각점[76, 9 건설부 306(6자는 정확하지 않다.) 재설]이 있는 454.6m봉에 올랐다. 쉴만한 그늘이 없다. 채미는 관절이 아프다며 굵지 않은 나무가 드리운 좁은 그늘에 주저앉아 앞길을 걱정한다.
제비꽃(꽃이 병아리처럼 귀엽다고 하여 병아리 꽃이라고도 부르며 풀 종류 중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해주는 꽃이다. 봄이면 여러 종류의 제비꽃이 각각 다른 모양과 색깔로 길가나 언덕을 수놓는다.)이다. 그 옆에는 병아리를 닮았다는 제비꽃 보다 더욱 병아리 같은 양지꽃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현호색도 빠지지 않고 무리 지어 피어있다. 봄이 무르익고 있다.
13:52 나무이정표(병무관 3.5km, 무술마을 2.2km, 칠장사 5.2km, 생거진천)가 서있는 곳이다. 덕성산 정상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채미를 남겨두고 덕성산으로 향한다.
13:55 덕성산 정상에는 표석(519m, 뒷면에 광혜원산악회 100회 산행기념으로 세우다)과 돌탑과 덕성산 등산 안내판(스테인리스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세움)이 서있다. 다시 나무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덕성산을 지나면서 충청북도와도 이별을 하고 경기도로 들어선다. 칠현산과 칠장산이 가깝게 보인다. 끝이 보이는 이때가 되면 없던 힘도 솟아나야 하는데 채미는 관절의 통증으로 인해 더욱 힘들어한다. 소염진통제를 바르고 무릎보호대를 착용했지만 통증은 여전하단다.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이리라 시간은 더디게 흘러간다.
호남정맥을 종주하면서 무수히 보아왔던 목포노적봉산악회의 노란 표시기를 봤다. 무척 반갑다. 표시기가 새것이다. 종주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광해저수지 위에는 낚시꾼들을 위해 물위에 띄워놓은 방갈로가 보인다. 이런저런 것들을 보지만 영 흥이 나지 않는다. 마음은 온통 채미의 관절로 향하고 있다.
14;26 자연석으로 세워둔 표석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면서 표석을 살핀다. 표석에 적혀있는 글씨(흰색 페인트로 광혜원, 곰림정상)는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어 정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14:36 칠현산 바로 직전에는 잡목으로 덮여있는 헬리포트가 있고 곧이어 칠현산 정상이다.
칠현산은 11세기경 혜소국사가 7악인을 제도한 고사에 따라 산 이름을 7현산(七賢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칠현산 정상을 둘러본다. 죽산산악회에서 2001. 4. 15일에 세운 이정표는 덕성산·칠장산·명적암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돌탑 바로 옆에 박혀있는 삼각점(1976 건설부)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정상 표석(칠현산 516.2m, 뒷면에는 광혜원산악회 200회 산행기념, 2002년 11월 24일)은 검은 돌로 되어있다. 경기도 소방재난본부에서 119표시판[현위치 : 칠현산 1-2(정상), 676-0119]도 세워 두었다. 칠장산까지 갔다가 온다는 산객을 만났다. 그는 명적암으로 내려갔다. 영상19.5도 그래도 바람이 많이 불어 그리 덥지는 않다. 건조한 공기에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데 침을 바르면 더욱 빨리 건조해진다.
내리받이가 시작되면서 채미는 더욱 힘들어한다. 신갈나무의 껍질은 보기 흉하게 떨어져서 허물을 벗고있는 뱀과 같고 그 옆에 팽나무로 보이는 굵은 나무들이 이어진다. 왼쪽 세븐힐 골프장은 넓기도 하고 그 너머 금광저수지도 물이 많고 무척 규모가 크다. 오랜만에 조릿대군락을 만난다.
15:04 조릿대군락에서 내려서니 칠순비부부돌탑이 서있는 중현이다. 규모가 큰 돌탑 앞에는 표석(칠순비부부탑, 뒷면에는 중고개·광혜원·임경순·김성기, 2002년 11월 24일)이 서있는데 돌탑만으로 만족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석까지 세운 것은 아무래도.....
15:11 짧은 오르막을 올라 헬리포트에 올라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15:13 벼락을 맞았는지 아니면 무게를 못 이겨 찢어졌는지 굵은 소나무의 한쪽 가지가 밑둥치가 찢어져 쓰러져 있다.
오른쪽 산아래 칠장사가 보인다.
15:24 칠장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119 긴급안내판[칠현산 1-1(갈림길)지점]이 서있고 죽산산악회에서 세워둔 이정표(칠현산정상, 칠장사 하산로, 칠장산 정상 2001, 4, 15)도 서 있다.
칠장사 갈림길에서 조금 올라가니 오른쪽 숲 속에 삼정맥분기점을 표시한 이정표가 보이지만 나중에 돌아와서 기념촬영을 하기로 하고 칠장산 정상으로 간다.
15:31 칠장산 정상이다. 헬기장이라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곳이다. 헬기장이 시작되는 곳에 칠장산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칠장산 492.4m, 011-257-5183)이 나무에 달려있고 이정표(칠현산정상·녹배고개)가 서있다. 기대를 잔득하고 올라온 칠장산 정상인데 삭막한 헬기장이 자리하고 있어 허전함이 밀려온다. 앞에 좀더 높아 보이는 봉우리가 궁금해 올라가 본다.
15:34 관해봉이다. 허술하게 생긴 표석과 삼각점(308 재설 86, 3 건설부)이 있고 한남정맥 완주를 기념하는 작은 현수막(홍성산꾼과 전주김, 한남정맥 완주, 김포 보구곶-안성 칠장산 2004. 2. 15- 2004. 10. 31)이 나무에 걸려있다.
골프장(세븐힐CC와 안성CC)이 둘러싸고 있는 칠장산은 마치 골프장이라는 바다에 떠있는 섬같이 느껴진다.
관해봉 다음 봉우리까지 올라섰다가 돌아선다. 관해봉에서 기다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채미는 듣지 못하고 아픈 다리를 이끌고 안부까지 내려왔다가 돌아간다.
15:55 부산건건산악회에서 세워둔 3정맥분기점을 알리는 이정표 앞에서 채미가 직접 만든 현수막을 들고 기념촬영을 했다.
[2004년 11월 6일 상큼한 바다향기를 맡으며 태안반도 안흥방파제에서 첫 발을 내 디딘 후 13번으로 나누어 금북정맥 단독종주를 마쳤습니다. 걷는 것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아내에게 먼저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 2005. 04. 17(일) 맑음. 최저 영상6.5도 최고 영상19.5도
◎ 산행 기점과 종점 :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과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의 경계 34번 국도 위 엽돈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에서 산행을 마침.
◎ 홀로 걸음(지원 : 임채미)
◎ 도상거리 : 약 26.2km
◎ 산행시간 : 9시간 40분(엽돈재에서 옥정현까지 약15.4km를 가는데 4시간 53분 걸렸다. 여기까지 정상속도로 걸었고 이후 칠장산까지 약10.8km는 아내 관절이 아파 천천히 걸었고 칠장산을 넘어서서 관해봉을 둘러보고 다음 봉우리까지 답사하고 돌아온 시간을 가만해야 한다. 쉬지 않고 정상적인 속도라면 8시간 30분이면 충분할 듯)
정맥을 끝내고 나서 : 칠장사로 내려가는 길은 조릿대군락이 함께 한다. 채미는 아픈 다리를 끌면서 힘들게 내리받이를 걷는다. 장기 한 마리가 큰 소리를 내면서 날아올랐다. 채미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칠장사를 두루 둘러봤고 주지스님과 대화도 나누었다. 이 절에는 병해대사(갓바치스님)와 임꺽정에 대한 실화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절에는 차우차우(chow chow)와 시베리안허스키 등 족보 있어 보이는 개들이 네댓 마리 있었다.
동자 석상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절을 나섰다. 절 앞 가까운 도로변에 철제 당간이 높이 솟아있었는데 보존상태가 좋았다.
광혜원저수지 위에 가로놓여있는 허술한 다리를 지나 저수지를 돌아 나오는데 낚시꾼들이 저수지를 따라 빈자리 없이 앉아있다. 저수지의 규모가 대단했다.
광혜원면소재지로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해장국을 먹고 중부고속도로 음성나들목을 통해 고속도로로 차를 올렸다.
*** 칠장사 ***
위 치 :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
칠장사는 칠현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신라 7세기 중엽에 자장율사에 의하여 개기 하였다는 사찰로서, 문헌에 보면 사찰이 번창할 때는 건물이 대웅전을 비롯하여 총 56동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칠장사에는 국보, 보물급 등 다량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로 11세기경 혜소국사가 7악인을 제도한 고사에 따라 산 이름을 7현산(七賢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칠현인이 오래 머물다 하여 칠장사로 명하였다. 특히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역사 소설의 일곱 도적과 병해스님 얘기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신라47대 협안왕 서자인 궁예가 13세까지 칠정사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활연습을 한 활터가 남아있고 고려시대 혜소국사에의해 칠악인이 칠현인으로 제도된 일곱 현인을 화신인 나한전는 어사 박문수가 기도를 드리고 장원급제를 했다고 전해지며 당시의 과거 시제인 "몽중등과시"의 현장이며 옛날에는 과거 시험에 장원을 꿈꾸던 선비들이 많이 찾았고, 현재도 수험생자녀를 둔 사람들의 공양이 많이 있는 곳이다. 사찰 주위로 숲이 우거져 경관이 화려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특히 칠장사 주변에 있는 마을에서는 옛날부터 대나무 수공예품 만들어 왔는데, 이 공예품들이 좋은 관광상품이 되고 있다. 칠장산은 높이492m의 낮은 산인데 아담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기슭에는 칠장사가 있고, 절 주변에는 울창한 숲이 둘러싸여 있어 경치를 즐기며 가벼운 등산을 하기에 알맞은 산이며 특히 가을단풍이 절경이다.
* 칠장사 설화
1) 신라 47대손 현안왕의 서자인 궁예가 10세까지 칠장사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활연습을 한 활터가 남아있다
2) 칠장사에서 열반하신 '여인천하' 드라마의 갓바치스님(병해대사, 갓바치란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조선시대 장인은 하층의 계급이라 천하게 여겼다.)과 제자인 임꺽정 이야기의 발원지이며, 천민으로 등용 될 수 없는 사회제도를 바꾸려했던 두 사람의 실화 이야기와 스승에게 조성해 바친 속칭 '꺽정불'이 전한다.
3) 고려시대 혜소국사에 의해 7악인이 7현인으로 제도된 일곱 현인의 화신인 나한전은 어사 박문수가 기도를 드리고 장원급제를 했다고 전하며 당시의 과거시제인 '몽중등과시(夢中登科時)'의 현장이다. 시험 합격을 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많은 곳이다.
** 칠장사는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다.
**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
경기 안성시 이죽면 칠장리 칠장사에 있는 고려시대 혜소국사의 묘탑비.
보물 제488호. 비신 높이 227cm, 폭 127cm. 1060년(문종 14) 건립. 화강석과 흑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비석의 글은 좌복야(左僕射) 김현(金顯)이 짓고 전중승(殿中丞) 민상제(閔賞濟)가 썼다. 전액에는 “贈諡慧炤國師碑銘” 8자를 가로 2단으로 신석 상부에 새겼다. 아래로 비문이 가는 글씨로 새겨졌으며, 전액 글자는 지름이 9cm, 본문 지름은 2cm로 해서이다. 비신 중앙부가 절단된 것을 1975년 비각 복원과 함께 보수하였으며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승려 혜소국사(972-1054)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고려전기의 우수한 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혜소국사는 안성 출신으로 10세에 출가하여 17세 때 승려 융철(융철)에게 배웠고 영통사에서 계(계)를 받았으며, 말년에 칠장사에서 수도하며 절을 크게 고쳐 세웠다. 혜소국사비는 귀부·비몸·이수를 모두 갖추었으나 현재는 비각 안에 따로따로 두었다. 비문은 김현(김현)이 지었고, 글씨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구양순체로 민상제(민상제)가 썼다. 비몸은 중간이 절단되어 심하게 파손되었지만, 비몸 양옆에 새겨진 용조각이 화려하며, 귀부와 이수의 조각도 힘차게 느껴진다.
** 인목대비친필족자(仁穆大妃親筆簇子)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에 있는 인목대비(1584∼1632)가 쓴 칠언시(七言詩) 족자.
1973년 7월 10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억울하게 죽은 친정아버지와 영창대군을 생각하며 칠언시를 직접 써서 김광명(金光明)에게 준 것이라고 한다. 크기는 길이 110㎝, 폭 50㎝, 1폭으로 28자의 칠언시 시구가 적힌 족자이다.
쓰여진 시기는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잃고 폐모의 위기에 몰려 용주사의 암자였던 칠장사에 피해 있을 때, 혹은 1623년(인조 원년) 전후로 추정한다.
<노우용력이다년(老牛用力已多年) 영파피천지수안(領破皮穿只受眼) 이파기휴춘우족(犁杷己休春雨足) 주인하야우가편(主人何若又加鞭)>이라 적혀 있다. 그 내용은 <늙은 소는 힘을 쓴 지 이미 여러 해/목이 찢기고 가죽이 뚫려 다만 부처의 자비스러운 눈뿐이로구나/쟁기질과 써레질이 이미 끝나고 봄물은 넉넉한데/주인은 어찌 심하게 또 채찍질인가?>이다. 칠언시 아래에 족자의 내력을 적은 배길기(裵吉基)의 글이 있다. 명필은 아니라 해도 유약하지 않고 유연한 필치이다.
인목대비(1584∼1632)는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태어나 1602년(선조 35) 선조의 왕비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친정아버지는 사사(賜死), 아들 영창대군은 소사(燒死) 당하고 자신은 유폐되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호(復號)되고 대왕대비가 되어 영창대군과 친정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며 살았다.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도 친필인 보문경(普文經) 일부가 전한다.
** 칠장사 삼불회괘불탱 [七長寺三佛會掛佛幀]
1997년 8월 8일 보물 제1256호로 지정되었다. 1710년(숙종 36)에 제작되었다. 영산회상도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과 아미타불, 그리고 그 권속들이 복잡하게 에워싼 2단구도로 되어 있다. 석가불은 팔대보살·십대제자·사리불·제석천과 범천·사천왕·금강역사 등으로 겹겹이 에워싸여 있다. 최상단에는 용왕·용녀·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 등이 배치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반원형의 광배 안에 9구의 보살과 좌우 5구씩의 십방제불(十方諸佛)이 천상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단은 영산회상도, 상단은 노사나불과 아미타불을 묘사하고 있어 상단을 떼어내어도 단독의 영산회상도를 보여주는 독특한 도상인데 삼신불과 삼불화를 가장 간략하게 묘사한 것으로, 이러한 구성은 조선시대 후기에 유행한 양식이다.
** 칠장사 오불회괘불탱 [七長寺五佛會掛佛幀]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七賢山) 칠장사 대웅전에 있는 1폭의 괘불탱.
1997년 9월 22일 국보 제296호로 지정되었다. 세로 길이 6.56m, 폭 4.04m. 견본채색. 제작연대는 1628년(인조 6)이다. 그림에는 《용화회도(龍華會圖)》라고 표기되어 있다. 구조 형식은 군집도(群集圖)이며, 주조색은 녹색이다. 형태는 삼단구도로서 상단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불·노사불, 중단은 아미타불·약사불, 하단은 지장보살·관음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억울하게 죽은 영창대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화사(畵師) 영관(靈貫)과 법문(法門)으로 하여금 완성하게 하였다고 한다.
**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 [安城奉業寺石佛立像]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竹山面) 칠장리 칠장사(七長寺)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보물 제983호. 전체높이 198cm, 입상높이 157cm. 원래 봉업사 터인 죽산면 죽산중학에 있던 것을 칠장사로 옮긴 것으로, 입상과 광배(光背)가 같은 돌로 조성되어 있다. 소발(素髮) 위에 큼직한 육계(肉)가 솟아 있고, 눈 ·코 ·입은 마모가 심하여 전체적인 인상이 잘 드러나지 않으나 대체로 원만하다. 양쪽 귀는 길게 표현되어 어깨에 닿을 듯하며, 목의 삼도(三道)와 어우러져 위엄을 자아낸다. 통견법의(通肩法衣)의 옷주름은 여러 겹의 원호(圓弧)를 이루어 자연스럽게 흐르며, 그 아래에는 군의(裙衣)가 양 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룬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가슴부분까지 들어올려 손바닥을 가슴에 붙이고 있으며,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려 법의자락을 잡고 있다.
전체적인 신체표현은 손이 다소 큰 편이기는 하나 머리 ·어깨넓이 등의 신체비례가 좋다.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의 거신광(擧身光)으로 주위에는 화염무늬를 두르고 있다. 2중 테두리의 두광과 신광에는 바탕무늬가 전혀 새겨져 있지 않으며, 단지 두광 내에 여러 모양의 수인을 취하고 있는 화불(化佛) 3구가 배치되어 있다. 광배의 뒷면은 평평한 판석(板石)으로 아무런 조각도 새겨져 있지 않다. 당당한 어깨, 발달된 신체표현, 'U'자형의 유려한 옷주름,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초기에 유행하였던 불상으로서, 이 지방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칠장사 대웅전.
1983년 9월 19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매우 오래된 양식이며 그 위에 세운 목조건물은 조선시대 말기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기단은 4단의 장대석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으며 제일 윗부분과 아래 장대석의 사이는 깊은 홈을 파서 단을 구획하였다. 이 부분은 궁궐건축의 기단에서는 약간 턱을 두는 정도로 처리하는데 이 건물의 경우는 그 기법이 독특하다. 기단 중앙에 있는 계단의 좌우 우석은 위를 약간 둥글게 돌렸으며 우석 측면에는 구름 모양을 돋을새김해 넣었다.
주춧돌은 전면의 4기와 제2열의 양 측면의 2기는 잘 다듬은 것이고 나머지 것은 자연석이다. 전면의 다듬은 주춧돌들은 전체를 네모나게 가공하고 위에 원형의 주조를 두었으며 주좌에는 둥글게 홈을 넣었고, 고맥이까지 뚜렷이 만들었다. 주춧돌의 형상을 보아 칠장사의 창건 때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주춧돌은 대개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중기까지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건물은 약간의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다포식의 공포를 짰는데, 공포의 형상은 조선시대 말기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살미첨차가 수평으로 뻗으면서 그 끝에 연꽃을 조각한 장식이 가미되고 내부의 끝은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지붕은 간단한 맞배지붕인데 지붕 용마루 양끝에 취두를 두었다. 법당 건물에 취두를 올려놓은 것은 대개 조선시대 말기 고종 때의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 조선시대의 철제 당간.(칠장리 801-1번지)
1973년 7월 10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칠장사에서 약 700m 앞 길가에 세워져 있다. 당간은 높이 9.9m, 지름 43cm, 총높이 11.5m이고, 지주의 높이는 3m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간과 지주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두 지주 사이에 철제 당간을 세웠다. 원래 원통 모양의 당간이 30개였으나 현재 15개만 남아 있다. 지대석은 없고 축대만 남아 있다. 칠장사 지형이 배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당간지주를 세워 돛대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는 설이 전해지는데, 조선시대의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은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당(幢)을 달아 두는 기둥으로 당간을 달기 위하여 보통 2개의 지주를 세웠다. 공주 갑사(甲寺)에는 신라 유일의 철제당간이 남아 있으며, 청주 용두사지에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41)이 남아 있다.
첫댓글 재형씨 추카합니더 1대간 9정맥 완주하는 그날까지 화이팅 하시길!
감사합니다. 벌써 속리산 천황봉이 보이는데 큰 일이죠^^ 선배님도 1대간 9정맥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