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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書記(백제서기)
百濟者大神水之義也 百濟之俗重武而不修文 且多忌諱 故久無史至近肖古王時 高興始作史曰書記
百濟(백제)라는 것은 大神水(대신수)의 뜻이다. 百濟(백제)의 풍속은 武(무)를 중시하고 文(문)을 닦지 않았다. 또한 忌諱(기휘)가 많았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역사가 없다가 近肖古王(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高興(고흥)이 비로소 역사를 지었으니 書記(서기)라고 불렀다.
優臺王(우대왕)
北夫餘解夫婁王之庶孫也 解夫婁王以日神降靈之後布德 北方天下泰平 分遣王子于列國以監民疾苦
時卒本太守延陀勃有女曰召西奴甚美 優台聞之請往卒本 王以優台母徵不許 優台乃私行至卒本與山西奴相通 延陀勃以王不許欲禁之乃相逃避太伯山谷沸流川上(今白頭山?河) 祀河神而生子曰沸流 延陀勃聞之使人迎皈遂以卒本之地皈之 時漢元年初元二年甲戌歲也 時解夫婁王太子金蛙立 卽優台之父也 命優台王于卒本 時解夫婁王太子金蛙立 卽優台之父也 命優台王于卒本
북부여 해부루왕의 서손이다, 해부루왕이 태양신이 강령한 후 덕을 베풀어 북방 천하가 태평하게 되었다. 왕자를 나누어 열국으로 보내어 백성들이 병들고 고통에 빠져있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이 때 졸본태수 연타발에게는 딸이 있는데 소서노라고 하며 대단히 아름다웠다. 우태가 그 소리를 듣고 졸본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해부루)왕이 우태의 모를 불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우태는 사사로이 졸본에 가서 산에서 소서노 더불어 정을 통하였다. 연타발은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결혼을 금지하고 허락치 아니하니, 둘은 이내 태백산 골짜기 비류천 위로(지금 백두산?하) 도피를 하였다. 하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비류라 하였다. 연타발이 그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졸본의 땅에 맞이하였다. 때는 한 효원제 초원 2년(B.C.47) 갑술년이다. 이 해에 해부루왕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즉, 우태의 아버지다.
우태에게 명하여 졸본의 왕노릇을 하게 하였다.
元年 甲戌 五月 立召西奴爲妃 立東明廟於沸流川
원년(B.C.47) 갑술 5월 소서노를 왕비로 삼았다. 비류천에 동명묘를 세웠다.
四年 丁丑 三月 次子溫祚生 七月分國爲東西南三部, 使乙氏吃氏解氏分長其州
4년(B.C.44) 정축 3월 둘째아들 온조가 태어났다. 7월 나라를 나누어 동, 서, 남 3개부로 나누고, 그 땅을 을씨, 흘씨, 해씨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七年 庚辰 正月 王母乙氏薨於夫餘, 王往迎其喪而皈之得疾而薨 四月 王遺腹女阿爾生
7년(B.C.41) 경진 1월 왕모 을씨가 부여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이 모친상을 치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4월 왕의 유복녀 아이가 태어났다.
= 유복녀 아이는 후에 유리의 정실이 되었다가 유리왕 13년(B.C.7)에 사망
참고 : 박창화님 유고 '고구려사초' pdf파일에서 6페이지
十三年 甲寅 正月 阿爾崩 春秋三十三 后皇后 前夫仇台女也.
性溫慈貞敏生都切(土刀)太子及三公主.
13년 갑인 정월 아이가 붕崩하였으니 춘추는 33세 后皇后(소서노)의 전남편 우태왕의 딸이다. 성격은 온자하고 정민하였으며, 도절都切태자와 3명의 공주를 낳았다.
五月 以妃召西奴爲女君.
5월 소서노 왕비를 여군(장)으로 하였다.
八年 辛巳年 七月 慕漱王太子朱蒙自北夫餘逃來.
8년(B.C.40) 신사 7월 (해)모수왕태자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쳐서 졸본으로 들어왔다.
年十九而英雄無比, 召西奴迎之置于賓堂侍之甚厚, 朝暮用浴朱蒙誘以甘言曰女君年才二十七能爲先王守貞乎, 召西奴曰非敢, 曰貞也無可以爲夫者也. 朱蒙乃知其意遂挑而通之恐國人不悅而諱之.
나이는 19세 비교가 되지 않는 영웅이었다. 소서노는 그들을 환영하여 손님을 모시는 방에 모셔두고 이침 저녁으로 대접하였는데 대단히 후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주몽 주몽이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자 하였다. 말하기를 “여군의 나이 이제 27세인데 선왕의 정조를 지키는 것이냐”고 하자 소서노가 말하기를 “(감히) 어찌 할 수 있겠소” (소서노가), 또 말하되 “정조를 지키는 것은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오.” 주몽은 곧 소서노의 그 뜻(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싫어한다)을 알고 따랐으나 정을 통하였다.
十月 朱蒙與召西奴出獵獲神鹿. 朱蒙曰此天將祚我夫妻也. 召西奴曰今汝與我潛通以不告於國中奈何. 朱蒙曰吾善射汝宜擇夫以善射者. 何如召西奴諾之. 乃令國中曰吾年少而寡不可空房能善射者可以夫之各以其技來試吾前. 令下應募者甚衆皆不及於朱蒙. 召西奴大喜遂與朱蒙相婚於廟中. 不及者怒作亂朱蒙使其臣俠夫等捕而治之.
10월 주몽이 소서노와 더불어 사냥을 나갔다가 신록을 잡았다. 주몽이 말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장차 이곳의 왕(천자)은 우리 부부가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소서노가 말하였다. “지금 당신과 나는 몰래 정을 통하였는데 나라 안에 알리지 아니 하니 어쩌면 좋은가” 주몽이 말하였다. “나는 활쏘기를 잘한다. 당신은 마땅히 활을 잘 쏘는 자를 남편으로 선택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소서노가 허락하였다. 나라 안에 영을 내리기를 “나는 나이가 어리고, 과인(과부)이 홀로 사는 것이 가하지 아니하니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남편으로 맞아들이겠다. 각기 시험장에 와서 그 재주를 내 앞에서 발휘하라” 이러한 명령에 따라 응모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소서노가 크게 기뻐하며 주몽과 더불어 사당 안에서 혼인을 하였다. 시험에서 탈락한 자들이 노하여 난리를 일으켰으나 주몽이 협부(보) 등 그 신하를 부리어 난리를 일으킨 자를 체포하여 다스렸다.
= 此:이것 , 祚=복, 천자의 자리
‘朱蒙曰此天將祚我夫妻也’을 '주몽이 이르길, 이것은 하늘이 장차 우리 부부에게 복을 내리려는 구나!'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주몽은 임금이 되시는 분이므로 ‘祚’을 왕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九年 壬午 四月 朱蒙說召西奴曰吾爲汝夫而國人多不腹者以吾無功於國家也.吾欲養精兵以攻隣祁之已傲慢無禮者.何如召西奴曰吾爲汝妻惟命是從.而己於是朱蒙選民壯丁使習弓馬分署部回以其心腹臣領之.
9년(B.C.39) 임오 4월 주몽이 소서노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남편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데 많은 나라사람들이 내게 복종하지 않으니 이것은 내가 국가에 공이 없기 때문이요. 나는 정병을 양성하여 인근의 성하여 오만무례한 자들을 공격하겠소.” 그래서 소서노가 말하되 “나는 당신의 처로서 오로지 명을 따를 뿐이오.” 그래서 주몽은 몸소 민간의 장정을 선발하여 활쏘기와 승마를 훈련하고, 부서를 나누고, 부락을 돌면서 심복인 부하를 그 곳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十年 癸未 二月 召西奴生朱蒙女甘兒
10년(B.C.38) 계미 2월 소서노가 주몽의 딸 감아를 낳았다.
= 감아는 온조의 동복동생으로 온조와 결혼하여 다루를 낳는다.
是年朱蒙盡平卒本諸部落威振一國. 召西奴曰吾以女子不識時務, 但居內育兒主饋可也. 天下奉惟卽君主之朱蒙大喜曰汝眞吾妻也, 奈汝旧臣不服何. 召西奴曰郎君以我爲妻以吾子爲太子則吾臣豈有不服之理哉. 朱蒙曰善
이해는 주몽이 졸본의 모든 부락을 평정하여 위엄이 떨쳐 일국을 이룬 해이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나는 여자로써 그 때 그 때 할일을 알지 못했다. 이제 단지 집에서 거주하면서 아기를 기르고 먹이는 것을 해야겠다.” 천하가 오로지 주몽을 군주로 받들자 주몽은 크게 기뻐하며 “당신은 나의 진실한 아내다. 그러나 당신의 옛 신하가 복종하지 아니하니 어찌할까?” 소서노가 말하기를 “낭군이 나를 처로 인정하고 아들을 태자로 인정하면 즉 나의 신하들이 어찌 복종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주몽이 말하기를 “이치에 맞다.”
= 識時務 : 그 때 그 때 할일을 앎.
十一年 甲申 正月 召西奴立朱蒙爲王 而沸流爲太子 溫祚爲王子 命憂臺旧臣卒本諸臣與朱蒙之臣相婚爲親戚 改國號曰高句麗
11년(B.C.37) 갑신 1월 소서노는 주몽을 세워서 왕으로 삼았고, 비류를 태자로, 온조를 왕자로 삼았다. 우대의 구신과 졸본의 모든 신하와 더불어 주몽의 신하는 서로 혼인하여 친척이 되길 명령 하였다. 國號(국호)을 고쳐서 고구려라 하였다.
= 이 해가 바로 고구려가 개국을 한 해.
= 이 때 고구려에는 세 부류의 신하가 존재한다.(우대, 소서노, 주몽계열)
十二年乙酉六月平沸流國以其主松瀼爲多勿候. 沸流本屬卒本. 今復皈故也.
12년(B.C.36) 을유 6월 비류국을 평정하여 그 땅의 임금 송양을 다물후로 삼았다.
비류국은 본래 졸본에 속하였는데 이제 다시 찾은 것이다.
十四年丁亥七月城郭宮室始大成. 王與后飮酒極樂賞賜內外宗戚及諸臣.
14년(B.C.34) 을유 7월 성곽과 궁실의 건축을 시작하여 완성하였다. 왕과 왕후가 술을 마시고 매우 기분이 좋아서 내외종과 친척, 모든 신하들에게까지 상을 하사하였다.
= ‘城郭宮室始大成’에서 ‘始’에 중심을 두느냐 ‘大成’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성곽궁실이 완성되는 것으로 되어 있고, 다음 문장도 성곽궁실이 완성된 후의 모습으로 보인다.
十六年乙丑丁月將軍烏伊芙芬奴分兩道攻太伯山南東荇人國取其地爲城邑.
16년(B.C.32) 을축 정월(丁月) 장군 오이와 부분노에게 양쪽 길로 태백산 남동쪽 행인국을 공격하여 그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十九年壬辰五月以荇人國王女碧蘿爲太子沸流妃. 賜脯群臣.
19년(B.C.29) 임진 5월 행인국 왕녀 벽라를 태자 비류의 비로 삼았다. 군신들에게 포(말린 고기)를 선물로 하사하였다.
二十一年甲午十一月將軍扶尉厭寄?攻滅北沃沮國以其地置滿(또는溝)婁爲城邑.
21년(B.C.27) 갑오 11월 장군 부위압에게 맡기어(寄) 북옥저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 치구루를 성읍으로 삼았다.
= 寄: 맡기다, 奇:기이하다, 騎 : 말을 타다
二十四年丁酉王母柳花后薨於扶餘. 王與后發喪擧哀于鴨宮水上迷. 使于扶餘獻賻.
24년(B.C.24) 정유 왕의 어머니 유화가 부여에서 돌아가셨다. 왕과 왕후(주몽과 소서노)가 발상하여 압궁의 물위에서 애통해하여 혼미하게 되었다. 사신을 부여에 보내어 부의를 하였다.
是年王嫡子類利自扶餘來謁王于獵途. 王畏后不悅不亘率皈使. 寄多勿候松瀼家而巡行國中恤民窮乏者而醫其疾人稱其賢召西奴聞而怪之謂王曰夫婦一身郎君之子來居吾國而不來謁者何也. 王曰彼雖慕父而來我以沸流溫祚爲子何可戀戀于已棄之子乎.
이해 왕의 적자 유리가 부여에서 와서 사냥 가는 길에서 왕을 만났다. 왕은 왕비가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 두려워하여 거느리고 온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갔다. 다물후 송양에게 맡기었는데 나라 안을 돌며 나라 안의 궁핍한자를 구휼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현자로 칭해지는 자가 있다는 소리를 소서노가 듣고 괴이하여 왕에게 알리어 말하기를 “부부는 한 몸이요. 낭군의 아들을 우리나라의 사는 곳에 오게 하고, 어찌하여 오게 하여 만나지 아니 한가” 왕이 말하기를 “유리가 비록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나를 보기 위해 왔지만 비류와 온조를 아들로 삼았는데 어찌 연연할 수 있겠소. 이것이 내가 아들을 꺼리는 사유요.”
召西奴曰父子天倫之親也. 安可紊?之哉. 且妾與大王相婚二十餘年只有甘兒一人. 郎君之子乃妾之子也. 何不召來而置於宮中. 王曰吾妻之曰善矣若以阿爾妻之而共子是子則好. 莫甚矣. 后曰夫婦之間有何所惜惟汝所慾者是妾之心矣. 王大喜乃召類利置於阿爾宮中而妻之類利乃與阿爾(?)媚于父王母后外結執政大臣暗畜奪嫡之志.
소서노가 말하기를 “아비와 자식은 천륜이 정한 친함이 있는데 , 어찌 이것을 어지럽힐 수 있으리오. 또 첩(부인의 낮춤말)과 대왕과 결혼한 지 20여년이 되었지만 단지 감아 한명이 있을 뿐이다. 낭군의 자식은 첩의 자식이기도 하다. 어찌 불러 궁중에 불러 들어오게 하지 아니한가.” 왕이 말하기를 “나의 부인 말이 이치에 맞지 않소(矣:반어적인 표현임에 유의). 만약 아이(우태와 소서노의 유복녀)를 처로 하면 공동의 자식이 되므로 이것이 좋도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왕후가 말하길 “부부사이라면 어찌 아까운 생각이 들겠는가. 당신의 바라는 것이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유리를 불러 아이의 궁중에 두어 아이를 처로 삼게 하니, 유리가 아이와 함께 부왕과 모후에게 아양을 떨고, 밖으로는 암중으로 집정대신과 결탁하여 적자의 자리를 뺏을 생각을 하였다.
= 고대시대의 결혼 풍속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나중에 온조와 감아(주몽과 소서노의 딸)도 결혼을 한다.
二十九年 壬寅 四月 右輔烏伊等上言曰自古帝王莫不立其子以爲太子今大王辛苦創業而不立己子臣等不取千秋萬歲之後沸流若立宜以其父優台配于吾后矣. 大王安得血食于此國乎, 若以類利爲太子而阿爾爲太子妃則阿爾今矣娠他日大王聖后之孫永久王于此土. 大王聖后哀在相配食苦吐(원문은 土)是非俱美之道哉. 王曰立子以賢者以重社稷宗廟也. 今沸流仁而有德. 吾何敢私其所生乎. 群臣曰沸流雖仁非帝王之器. 守成之人也. 類利才德雙全万姓. 答曰吾王之子. 以皈之今若不立悔之晩矣. 王不聽.
29년(B.C.19) 임인 4월 우보 오이 등이 위에 말하기를 “예로부터 왕은 그 자식을 태자로 세우지 않은 적이 없다. 지금의 대왕은 나라를 세우는데 어려운 일에 고생을 한 공이 있는데 만약 신들이 왕의 자식(유리)을 (왕)위에 세우지 못하면 천추만세(오랜 세월) 후에 만약 비류가 왕이 되면 마땅히 그 부와 우태의 처인 우리의 왕후에게 창업의 공이 넘어가게 되지 않으리오. 대왕이 이 나라의 제사를(血食) 편안하게 받으려면, 유리를 태자로 삼고 아이를 태자비로 삼아야한다. 즉 아이는 지금 임신 중이므로 다른 태양 대왕과 성후의 (자)손으로 왕의 지위가 이 땅에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다. 대왕과 성후가 서로의 배우자를 슬퍼하여 밥을 먹어도 써서 토하니 이것은 함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왕이 말하길 “사직과 종묘(종묘사직)를 중요시하는 현명한 아들을 세우겠다. 지금 비류는 어질고 덕이 있다. 내가 어찌 사사로이 所生(자기가 낳은 자식)을 세울 수 있겠느냐”
군신들이 말하기를 “비류는 오직 어질기만 할뿐 제왕의 그릇이 아닙니다. 단지 수성(조상들의 이루어 놓은 것을 이어서 지킴)의 그릇입니다. 유리는 재주와 덕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왕이) 답하여 말하길 “과연 내 아들이다.”
“지금 돌이키지 않으면 만약 (유리를 태자로) 세우지 않아 후회해도 늦습니다.”
왕이 듣지 아니하였다.
= 他日 : 다른 태양, 다른 날
= 주몽과 소서노가 다른 태양의 후손이라고 했다.
앞에 주몽이 ‘慕漱王太子’라고 했으니 주몽은 해모수의 자손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소서노가 고무막한 동명의 후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서노가 고두막한과 어떤 관계인지는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 血食 : 나라를 보존함, 제사를 지냄
類利亦自辭讓而群情一動不可禁止. 王與同枕而憂之后曰吾子沸流雖仁而不及於汝子類利人所共知也. 阿爾若生好孫而能繼(?)邦. 吾於前夫後夫皆盡婦道矣. 汝何固執而憂之乎. 王曰建國之道莫如捀嗣以賢吾實不知吾子之賢若如汝言明日可試而. 爲之乃立幟於宮之左右而令曰欲立沸流者右而欲主類利者左伴. 左者三倍于右主, 嘆曰吾非不欲立沸流父(원문은 夫)也. 奈何乃立類利爲太子而使分三部也. 沸流夷其東南, 溫祚夷其西南, 類利其北部, 以慰后心, 自是國政多歸類利, 沸流溫祚漸懷不平之志
유리 또한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무리의 뜻이 같이 움직이는 것을 금하지는 못하였다
왕과 더불어 베게머리에서 왕후가 근심하여 말하기를 “나의 아들 비류는 오직 어질기만 할뿐 당신의 자 유리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만약 아이가 손자를 낳아 능히 ??방(큰 나라)를 이루면 좋은 일이고, 나는 전남편과 현 남편 모두에게 도리를 다하는 것이 된다. 어찌 당신은 고집을 부리어 근심을 하는가.”
왕이 말하기를 “건국의 도리(이념)는 어진사람을 후계자로 정하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식이 어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만약 당신의 말과 같은지 내일 시험을 해 보겠다.”
(다음날 왕이) 그렇게 하였다.
이내 궁의 좌우에 깃발을 세우고 령을 내려 말하기를 비류를 따라가려는 자는 오른쪽, 유리를 따라가려는 자는 왼쪽에 (서도록 하였다)
좌에 있는 (따르는) 자가 오른쪽에 있는 자보다 3배가 많았다.
왕이 한탄하며 말하길 “내가 비류의 부를 세우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찌 유리를 태자로 세워야 하는가. 삼부로 나누어 다스리겠다.”
= 이 말은 주몽이 창업의 공을 우대에게 돌리겠다는 뜻이다.
‘沸流夫’는 비류의 남편이 되므로 ‘沸流父’의 오기이다.
비류는 夷의 동남을, 온조는 夷의 서남을, 그 땅의 북부(고구려)는 유리가 다스리게 하겠다.
이로써 후의 마음을 위로했다. 이로부터 국정이 유리에게 다 돌아가게 되었다. 비류, 온조는 점점 불평의 뜻을 품게 되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 의하면 유리가 어머니 ‘예씨’와 단 둘이서 도망쳐 졸본으로 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따르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유리를 따르는 무리란 비류수의 송양의 무리와 어머니 ‘예씨’의 무리로 보여진다.
어머니 ‘예씨’가 대한 내용이 백제서기에 누락되어 있으니 남당 박창화님의 유고 중 ‘고구려’ 쪽에서 찾아서 보완해야 할 것임.(죄송)
= 이 기사는 다음 기사와 함께 고구려가 고구려, 비류백제, 온조백제로 나뉘는 주요원인이 되었다.
九月 王薨. 后哀痛欲殉. 三群臣止之曰大王忽棄聖后亦從臣等何歸. 后曰太子在汝等奉之可也. 於是類利卽王位奉后位太后以阿爾爲后以沸流溫祚爲左右爲王.
9월 왕이 돌아가셨다. 왕후가 애통하여 따라 죽으려고 했다. 세 무리(우태,소서노,주몽의 구신)의 신하들이 왕후를 말리며 말하기를 “대왕은 홀연히 떠났다, 성후(소서노)는 역시 신하들을 따르지 않고 어찌 돌아가려(죽으려) 하느냐(반어적 표현)”. 소서노(后)가 말했다, “태자와 여기 있는 너희들은 가히 받들어야 한다, 이제 유리를 왕으로 봉하고, 후를 태후로, 아이는 후로, 비류와 온조는 좌.우왕에 봉한다.”
= 주몽이 특별한 질병도 없이, 전쟁 중의 사망도 아닌데 홀연히 죽었다는 것이 이상하다.
혹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다음의 기사에 주목해 보자.
= 주몽의 죽음을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주몽 재위시는 동부여와의 관계가 좋았는데 유리가 왕이 된 이후에는 갈등관계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리왕의 태자즉위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태왕 11년(고구려 동명왕 원년에 해당)에 비류가 태자로 즉위하는 데 비류와 동부여의 금와왕과는 조손관계입니다. 주몽이 의붓아비 노릇을 하고 다음 왕위는 자신의 손자한테 물려주겠다고 하는데 굳이 주몽과 갈등관계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볼모신분에서도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럼 결론으로 들어가 유리가 태자로 즉위시키고 나서 주몽은 동부여와 갈등관계를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외손녀가 태자비에 있으니 안심은 되지만 그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결국은 유리에게 태자에 세우고 주몽은 아들을 위해 죽었습니다.
하지만 유리는 계속 잘못을 행하고 맙니다.
첫째는 비류와 온조를 내쫒고, 두 번째는 아이를 후비로 격하 후 사망, 셋째는 도절태자를 죽게 만듭니다.
이렇게 계속되는 잘못들이 결국엔 동부여와의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丁月 阿爾后生太子都切 大赦
정월 아이후가 태자도절을 낳았다. 대사면을 했다
類利初在宋讓之時潛通其女宋花至是阿爾産臥而無, 浚宮宋花入開(또는 曰)浚通之如故. 太后不悅曰吾女産君之子而臥爲人之夫者當旦夕在其側而分勞之, 安可網?慾納不美之女哉. 類利曰人君當廣其嗣孫, 不可無一二浚宮, 況宋花者吾之糟糖餠母, 言不可棄也. 太后乃怒曰汝爲太子時欺吾夫妻示以仁賢今汝父沒而忽敢如此乎. 乃召沸流溫祚議曰吾爲類利所欺汝等宜早爲之計各往所封之地. 沸流曰大王生時愛吾等如子今則未免贅不如奉母南行開創新國矣. 溫祚曰諾.
유리가 처음에 송양의 집에 있을 때 송양의 딸 송화와 몰래 간통하였는데 아이가 출산하여 누워있는 때에 이르러 궁궐에 없을 때에 송화가 궁궐로 들어와 말하기를 “옛날과 같이 간통하였다.” 태후는 기뻐하지 않으며 이야기하길 “내 딸은 임금의 아들을 낳아 누워있는데 남편이라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그 옆에 있으면서 노고를 나누어야 하는데, 불미스런 여자를 거두니 편안한가?”
유리가 말하길 “사람의 임금은 마땅히 그 후계자인 자손을 널리 퍼트려야 하고, 불가결하게 한두 번 궁 안에 (깊숙이) 들어왔다. 더군다나 송화는 나의 조강지처(糟糖餠母)로 맹세했다. 버릴 수 없다” 고 말했다. 태후가 노하여 말하길 “너는 태자가 되려고 할 때 나의 남편과 나를 (네가) 어질고 현명하게 보이게 하여 속였다.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없는 지금 이와 같이 소홀히 할 수 있느냐.” 이에 비류와 온조를 불러 의논하여 말하길 “나는 유리를 왕으로 세웠는데 너희들을 버리는바 마땅히 각자의 봉해진 땅으로 갈 계획을 세워야겠다.” 비류가 말하기를 “대왕이 살아있을 당시 우리들을 마치 자식처럼 귀여워 해주었는데 지금은 군더더기 살을 면할 수 없으니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 새 나라를 열어 창업하는 것 같지 않다.” 온조가 승낙하였다.
*송화는 소서노의 입장에선 하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유리에겐 아버지가 있는 궁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5년을 살았으니 조강지처가 분명하지만 찾지는 못했다.
沸流王(비류왕)
優台王長子 爲人柔仁孝友
우태(優台)왕의 장자다. 사람됨이 순하고 인자하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우애가 있었다.
元年 癸卯 正月 沸流東行 南渡帶水 至彌鄒忽 欲居之 溫祚與烏干馬黎 蓴西南行 而渡浿河 亦會于彌鄒忽 立沸流爲王 五月 立東明廟 七月 類利以松化爲后 阿爾妬之 與太后欲奔歸彌鄒忽 乙音諫之 曰 “小不忍亂 大謀爲 后之道 莫若承順 夫王之志” 乙音者優台母乙氏通其私夫而生者也 沈重有識見 曾諫 召西奴之迎朱蒙爲夫 又諫納類利 至是留古都 以慰太后
원년 癸卯(계묘, BC18년)
1월, 비류(沸流)가 동쪽으로 가다가 남으로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온조(溫祚)는 오간(烏干), 마려(馬黎)와 순서(蓴西)에서 남으로 가다가 패하(浿河)를 건너 역시 미추홀에서 모였다. 비류를 세워 왕으로 하였다. 5월, 東明廟(동명묘)를 세웠다. 7월, 유리가 송화를 후(后)로 하였다. 아이(阿爾)가 시새움하여 태후와 급히 미추홀로 돌아가려 하였다. 을음(乙音)이 (소서노에게) 간하여 말하기를 “소인은 어려움을 참지 않습니다. 큰 계책은 후(后)의 도리로 부왕(夫王, 남편인 왕, 여기서는 주몽)의 뜻을 순종하여 따름과 같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乙音(을음)이라는 사람은 優台(우태)의 어머니 乙氏(을씨)가 私夫(사부, 새남편)와 통하여 태어난 사람이다. 침중(沈重)하며 식견(識見,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일찍이(曾) 소서노에게 주몽을 맞이하여 남편으로 삼으라고 간언하였고, 또 유리를 받아들이도록 간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도(古都, 졸본)에 머무르며, 태후를 위로하였다.
*癸卯, BC18년, 5월, 東明廟(동명묘)를 세웠다. (온조왕 1년, 백제본기와 시기가 같음)
二年 甲辰 三月 太后與乙音歸彌鄒忽 是年 正月 王以末曷在北界 勇而多詐 欲繕兵績穀 以究拒守之計 群臣皆曰 “若非乙音不可” 乃召乙音 爲右輔 太后亦以此機歸我 而重其勢 舊臣之奔來者 陸續不絶 乙音總執內外兵馬事 王以親妹甘兒 妻王弟溫祚 甘兒朱蒙王之女也 能騎馬善射 類利欲通之 爲後宮 阿爾后 曰 “我已見欺 悔之無及 汝宜從太后 歸依胞兄” 甘兒亦心鄙 類利無義多詐 從太后歸彌鄒忽 至是與溫祚相婚 於東明樹下 大宴群臣 太后飮酒樂之 命王與后 起舞而歌 其歌 曰 “奉吾母爲王 吾大愛吾弟 爲抱吾妹 願我子孫 樂無窮而不盡 後人論孝友者 必以此歌爲訓”
2년(BC17년) 갑진
3월, 태후와 을음이 미추홀로 귀의하였다. 이해 정월에 왕이 말갈이 북쪽 경계에 있고, (말갈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므로, 병장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모으고, 막아 지킬 계책을 연구하였다. 군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을음이 아니면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을음을 불러 우보(右輔)로 삼았다. 태후 역시 이 기회로 우리에게 귀의하였다. 그 세력에 보태져 구신(舊臣)들 중에 도망하여 온자가 육지(陸, 뭍, 길, 땅)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을음에게 나라의 안팎의 병마사(兵馬事, 군대, 무기, 전쟁에 관한 일)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왕이 친여동생 감아를 왕의 동생 온조의 처로 하였다. 감아는 주몽왕의 딸이다. 말을 타고 활쏘기에 능숙하였다. 유리가 감아와 통하여 후궁으로 삼고자 하였다. 아이(阿爾후)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속이는 것을 보았으나,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悔之無及). 너는 마땅히 태후를 따라서 같은 어머니의 오빠에게 돌아가 의지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감아 또한 마음속으로 유리가 의롭지 않고 속임이 많음을 더러워하였다. 태후를 따라서 미추홀로 귀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온조와 더불어 동명수(東明樹) 아래에서 혼인을 하였다. 군신들과 큰 잔치를 벌이고, 태후가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고, 왕과 황후에게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도록 명하였다. 그 노래의 가사는 “나의 어머니를 받들어 왕으로 하고, 나는 나의 동생을 매우 사랑하여, 나의 여동생을 품도록 하였다. 우리의 자손들에게 즐거움이 무궁(無窮, 공간이나 시간 따위가 끝이 없음)하여 없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후인들아, 효도와 우애를 논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 노래를 교훈으로 삼아라.”고 하였다.
三年 乙巳 五月 甘兒生子多婁 時王后碧蘿 生三女而無子 太后命取多婁爲王子 妻以碧蘿之女蛙氏 九月 末曷來侵北界 王命溫祚擊退之 甘兒亦被甲從之 選勁師出 間道忽擊 大破之 賊之生還者 十之一二 王乃賞王弟王妹 曰 “好 吾弟妹國之雙宝也” 夕食于太后宮 十一月 類利遣使 獻方物 於太后 而請還都 太后曰 “聞汝王喪松花 而更娶禾雉兩女 以傷吾女之心 如此好色之人 吾不願見也 先王英雄無比 而惟與我好 不用他色 汝王其宜知之” 使者恐懼而歸
3년(BC16년) 을사
5월, 감아가 다루를 낳았다. 당시 왕후 벽라는 딸 셋을 낳았으나 아들이 없었다. 태후가 다루를 취하여 왕자로, 벽라의 딸 와씨(蛙氏)를 처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입하여 왕이 온조에게 말갈을 격퇴하도록 명하였다. 감아 역시 갑옷을 입고(被甲) 온조를 따라갔다. 굳센 병사를 선택하여 출병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부딪쳐 적을 크게 깨뜨렸다. 적들 중에 살아 돌아간 자는 열 명중 한두 명이었다. 왕이 이에 온조와 감아에게 상을 내리며 말하기를 “아름답구나! 나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나라의 쌍 보배로다.”라고 하였다. 태후궁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
11월, 유리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태후에게 바치며 환도하기를 청하였다. 태후가 말하기를 “듣자하니 너의 왕이 송화의 상을 당했다고 하더니 이번엔 화(희)와 치(희)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이 때문에 나의 딸의 마음이 다쳤다. 이와 같이 호색한이니 나는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선왕(先王, 주몽)은 비교할 것이 없는 영웅으로, 오로지 나만을 좋아하여 다른 여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너의 왕은 마땅히 그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신은 몹시 두려워하며 돌아갔다.
四年 丙午 春夏大旱 而民饑且疾 王與后巡撫部落 而慰恤之 八月 遣使于樂浪 而修好 樂浪者辰韓也 在我東南界 共拒末曷 而事馬韓故也
4년(BC15년) 병오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병이 들었다. 왕과 후가 부락(部落)을 돌며 인심을 달래어 어루만지고,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휼했다.
8월 사신을 낙랑(樂浪)으로 보내어 사이좋게 지냈다. 낙랑은 진한(辰韓)이다. 우리의 동남쪽 경계에 있으면서 함께 말갈을 막았는데, 마한(馬韓)을 섬겼던 연유에서다.
五年 丁未 四月 遣王弟溫祚於馬韓 借地 時馬韓政衰 畏末曷樂浪加耶之漸盛 欲使王制末曷樂浪 乃許東北百里之地 且許採鐵鑄兵戈 優待王弟而歸 十月 王巡撫北邊 獲神鹿 十一月 馬韓使來 請王女 王謝以年幼 馬韓君臣耽樂 不恤國民 樂浪加耶年年納美女 侵入其封疆 疆域日縮 而不以爲意 甘兒生子馬婁
5년 丁未(정미, BC14년)
4월, 왕의 동생 溫祚(온조)를 馬韓(마한)에 보내어 땅을 빌렸다. 당시 馬韓(마한)은 정세가 쇄락하여 末曷(말갈), 樂浪(낙랑), 加耶(가야)가 점점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왕으로 하여금 末曷(말갈), 樂浪(낙랑)을 제어하기를 바랐다. 이에 동북 100리의 땅을 허락하였다. 또 철을 캐내어 兵戈(병과, 무기)를 주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왕의 동생을 우대하고 돌려 보냈다. 10월, 왕이 북쪽 변경을 순무하다가 신록(神鹿)을 잡았다. 11월, 馬韓(마한)의 사신이 와서, 王女(왕녀)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고 사양하였다. 馬韓(마한)의 임금과 신하들은 耽樂(탐락)하여 국민들을 구휼하지 않았다. 樂浪(낙랑)과 加耶(가야)가 해마다 미녀를 바치며 그 封疆(봉강)를 침입하였다. 강역이 날마다 줄어 들었는데, 개의치 않았다. 甘兒(감아)가 아들 馬婁(마루)를 낳았다.
六年 戊申 王后碧蘿薨 王痛哀之 群臣請納繼后 王不忍之曰 "夫婦之道宜相從 雖不得相從 安忍骨未冷 而忽復再娶乎?" 太后聞 而悲之曰 "吾有罪於沸流矣" 溫祚慰之曰 "母之再嫁豈其罪哉 兄之不再娶者亦何嘗善之善哉 盖其愛嫂之情猶有未已故也" 碧蘿以荇人王女有傾國之色 而太妊之德孝友慈愛能使沸流浹洽于心 當大難而不惑 南來以後親執饋事 以慰將士 夙興夜寐 疲勞益甚 盖其遂得疾而薨 故群臣上下莫不痛之 春秋三十四 有三女皆絶美 馬韓王數遣使求之 而不許 以溫祚子多婁爲子欲傅其國 臨薨謂王曰 "我死勿更娶以若兒輩 國政可委溫祚 而內事可委女輩" 王許之 時王長女葱姬年已十六 能代后視內事故也 三月 王與葱姬北巡郡邑 以慰戍卒 命甘兒入內視事
6년 戊申(무신, BC13년) 왕후 碧蘿(벽라)가 죽었다. 왕은 애통해 하였다. 群臣(군신)들은 繼后(계후, 새왕후)를 맞아 들이길 청하였다. 왕이 참지 못하고 말하길 "부부의 도리는 마땅히 서로 따르는 것인데 비록 서로 따르지 못할망정, 어찌 차마 骨(골)이 식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再娶(재취)를 다시 한단 말입니까?" 라고 하자, 太后(태후)가 듣고서 비통해하며 말하길 "내가 沸流(비류)에게 죄가 있도다." 라고 하니, 溫祚(온조)가 위로하여 말하길 "어머니가 재가한 것이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형이 다시 장가들지 않는 것은 또한 어찌 최선이겠습니까? 아마도 그가 형수를 사랑하는 정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라고 하였다. 碧蘿(벽라)는 荇人王(행인왕)의 딸로서 뛰어난 미모를 지녔고, 太妊(태임)의 덕을 갖춰서 효도하고 우애하고 자애로와서 沸流(비류)로 하여금 마음에 흡족함을 줄 수 있었다. 큰 어려움을 당해도 당황하지 않았고,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 몸소 식량공급을 담당하여, 장사를 위로하였고,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부지런히 일해서, 피로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마침내 병을 얻어서 돌아 가신 것이다. 이 때문에 군신상하가 모두 애통해 마지 않았다. 나이는 34살이였고, 세 딸을 두었는데, 모두 절색이라서, 馬韓王(마한왕)이 자주 사신을 보내 딸들을 요구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溫祚(온조)의 아들 多婁(다루)를 아들(子)로 삼아, 나라를 전하고자 하였다. 임종에 이르러 왕에게 말하길 "제가 죽거든 젊은 애들처럼 다시 장가들지 마십시오. 국정은 溫祚(온조)에게 맡길 수 있고, 內事(내사)는 딸들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이 때 장녀 葱姬(총희)가 나이가 이미 16살로 왕후를 대신하여 內事(내사)를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3월, 왕과 葱姬(총희)가 북으로 군읍을 순수하여 戍卒(수졸)들을 위로하였다. 甘兒(감아)에게 명하여 視事(시사)를 받아 들이게 하였다.
*七年 => 六年으로 수정함.
*內 = 納.
八年 庚戌 二月 末曷三千來 圍慰禮城 王經旬閉門不出 待其糧盡而歸 簡銳卒 追及大斧峴 殺虜五百余人 七月 築馬首城甁山柵 與樂浪失和.
8년 庚戌(경술, BC11년)
2월, 末曷(말갈) 3천명이 와서 慰禮城(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10일 동안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식량이 다하여 돌아가기를 기다려, 날랜 군사를 선별하여 大斧峴(대부현)까지 추격하였다.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500여명이었다.
7월, 馬首城(마수성)과 甁山柵(병산책)을 세워, 樂浪(낙랑)과 우호를 잃었다.
十年 壬子 王出獵獲神鹿 以送馬韓 十月 末曷寇北境 王遣兵二百拒戰 於昆彌川上 而敗 積依靑木山 而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救之 賊乃退
10년 壬子(임자, BC9년)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록을 잡아 마한에 보냈다. 10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여 왕이 병사 200명을 보내어 곤미천(昆彌川) 상류에서 막아 싸웠으나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장수가 되어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하니, 적이 이내 물러갔다.
十一年 癸丑 四月 樂浪唆末曷 襲破甁山柵 殺掠百余人 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來侵之路
11년 癸丑(계축, BC8년)
4월, 樂浪(낙랑)이 末曷(말갈)을 부추겨서 甁山柵(병산책)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100여명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7월, 禿山(독산)과 狗川(구천)의 두 책(柵)을 세워 이로써 樂浪(낙랑)이 침입하는 길을 막았다.
十三年 乙卯 二月 嫗化爲男 五虎入城 王禳之於東明樹王 未幾太后得疾 而薨 春秋六十一 國人立召西奴祠 而祀之 后以延陁勃大王第三女 身長而美 旦有權 數養卵人 與優台王經營卒本國 得其人心 且與朱蒙王 經營高句麗國 亦得衆望 及類利背叛 不與之爭 委之以國 又與二子 南渡經營百濟國 太后三國人皆 尊之如神
13년 乙卯(을묘, BC6년)
2월, 늙은 할멈(嫗, 소서노)이 남자가 되었다.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으로 들어왔다. 왕이 東明樹王(동명수왕) 아래에서 제사(禳)를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太后(태후)가 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춘추 61세였다. 나라사람들이 召西奴(소서노)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后(후)는 延陁勃大王(연타발대왕)의 셋째 딸로 키가 크고 이뻤다. 일찍이 권력이 있어 수차례 卵人(란인)들을 길렀다. 優台王(우태왕)과 더불어 卒本國(졸본국)을 다스려 人心(인심)을 얻었으며, 일찍이 朱蒙王(주몽왕)과 高句麗國(고구려국)을 다스렸고, 또한 민중의 신망을 얻었으며, 類利(유리)가 背叛(배반)하자, 그와 다투지 않고 그에게 나라를 맡겼다. 또한 두 아들과 함께 남쪽으로 건너가 百濟國(백제국)을 다스렸다. 三國人(삼국인)들 모두 太后(태후)를 神(신)처럼 존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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