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존로스 선교사님에 대해서..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는 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특별히 윌리암슨 선교사를 중심으로 산동반도 지역을 선교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암슨 선교사는 1866년 토마스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하였다가 , 그가 대동강 가에서 순교하자 , 순교의 아픔 속에서도 ,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1872년 윌리암슨 선교사를 돕기 위해 메킨 타이어 선교사와 , 이어서 로스 선교사가 입국하였습니다. 윌리암슨 선교사는 그들에게 조선에 대한 정보를 주고, 토마스 선교사의 조선 사랑과 순교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 선교를 위해 대동강에서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 남다른 감정으로 조선민족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1874년 10월 9일 ,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이자 양국사이에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 고려문을 방문하였습니다. 로스는 거기에서 한국 상인들을 만나 한문성경을 팔며 전도하려 하였지만, 조선 사람들이 영국에서 온 상품에만 관심을 가지고 , 복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자, 처음에는 실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스가 여관에 머물러 있는 동안 , 50대 남자 상인이 찾아와 , 로스는 그에게서 한국정세와 한국인의 발음법등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만난 한국 사람이 바로, 한국 교회 최초로 세례를 받은 백홍준의 아버지 였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1876년 3월 , 강화도 조약에 의한 한국 문호개방 소식에 자극을 받아 , 4월말에 다시 고려문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어학교사를 얻고자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의주 상인 이응찬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로스의 가슴은 온 통 조선민족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조선어를 빨리 배우고 싶은 마음과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려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계획을 하나님께서는 이루어 주셨습니다. 1877년에 이응찬의 도움으로 한국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인 코리안 프라이머 ( Corean Primer )를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이응찬과 한 두명의 한국인의 도움으로 "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변역할 수 있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만주에서 조선족을 위해 사역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었습니다. 1879년 1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 날은 한국 개신교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한국 개신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로스선교사는 이 때의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비록 현재 한국이 서구의 나라들과 어떠한 접촉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지만, 그 쇄국은 곧 무너질 것이고,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 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탐구하는 4명의 수세자와 11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고 , 현재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한국 민족을 위해 성경과 기독교문학을 준비하는 우리의 문서사업을 위해서 7 - 8 일이 걸리는 우리 선교본부까지 기꺼이 올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기독교회를 향해 열려있는 새 민족, 새 나라, 새 언어가 있는 것이다. "
2.단동에 대해서
(병)Dandong (웨)Tantung. 옛 이름은 안동(安東).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남동쪽에 있는 도시.
현급(縣級) 시로, 그 영역은 그 자치지역뿐만 아니라 북한의 국경지역에 접한 랴오닝 성의 여러 현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압록강 어귀에서 상류 쪽 약 35㎞ 지점으로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다.
1965년까지 안동이라고 불렸던 이 도시의 이름은 7세기 중반 당(唐:618~917)이 남부 랴오닝 지방에 설치했던 도호부(都護府)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16세기 후반 명(明:1368~1644)이 이 지방에 진장바오[鎭江堡]라는 요새를 세웠는데 현재 도시의 북동쪽 약 4㎞ 지점에 있다. 이 요새는 명 후기와 청(淸:1644~1911/12) 초기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단둥 주변지역은 19세기 중반까지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으나, 1862~74년에 식민을 위해 개방한 이후, 산둥 성으로부터 주민을 옮겨오게 해 급속히 개발·확대되었으며, 1876년에 정규 행정체제를 갖춘 현청소재지가 되었다. 도시가 커짐에 따라 창바이 산맥[長白山脈] 지역의 자연적인 관문이 되었으며 한반도와 만주지방 사이의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또 농산물, 특히 주변지역에서 생산되는 콩의 집산지가 되었고 목재 수출항으로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톈진[天津]·상하이[上海]와 산둥 성으로 수송하는 연안무역용 대규모 정크선단이 발달했으며, 1907년에 무역항이 되어 외국상선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초반 선양[藩陽:무크덴]과 연결되는 철도건설로 이 도시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철도는 러일전쟁(1904~1905) 중 일본군에 의해 건설되었기 때문에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일본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 철도건설로 단둥은 만주지방 생산품의 중요한 수출항구가 되었다. 그러나 이 단둥 항은 급속히 흐르는 강과 면해 있고 바다로부터 35㎞ 들어온 곳에 있어 입지조건이 좋지 못했으므로, 일본 점령기간중(1913~45) 압록강 어귀의 둥거우[東溝]에다 수심이 깊은 현대식 항구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1933년 산업개발의 중심지로 계획되어, 거대한 섬유공장들이 세워지고 제재소와 목재 펄프 공장들이 건설되었다. 1949년 이래 산업 성장을 계속하여 산업이 아주 다양해졌다. 섬유산업은 이제 면직물·합성섬유 제조 및 제사까지를 포함하게 되었다. 거대한 제지와 목재 펄프 공장이 있고, 다양한 화학공장들이 약제와 공업용 화학약품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고무 공장도 있어 다양한 공산물을 가공처리하고 있다. 인구 656,000(1980).
3.백두산에 대해서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 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 '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白),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4.윤동주에 대해서..
윤동주(1917.12.30~1945.2.16)
아명(兒名)은 해환(海煥).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北間島) 명동촌(明東村) 출생. 1932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36년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옮겼으며, 1936년 숭실중학교가 폐교된 후 용정의 광명학원에 전입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42년 일본의 리쿄대학(立敎大學)에 입학했다가,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학했다 1943년 그의 친구인 송몽규(宋夢奎)와 귀국하다가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2월 16일 옥사했다. 1948년 그의 유고를 모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면서 문단에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시 76편, 동시 35편, 수필 5편 등 총 116편의 작품을 남겼다.
윤동주의 시 세계는 동심지향(童心志向)과 실향 의식(失鄕意識) 그리고 속죄양 의식으로 특징지어지는데, 그의 많은 작품에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양심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자아에 대한 ‘부끄러움’이 내재되어 있다. 습작기라고 할 수 있는 1934년부터 1936년까지의 시 중에서는 「삶과 죽음」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에서는 삶과 죽음 또는 빛과 어둠의 갈등이 묘사되고 있는데, 시적 짜임새에 있어서는 다소의 미숙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1937년 이후의 작품에서는 어두운 현실에 대한 불안감과 자기 성찰의 시를 보여준다. 이 시기 작품에서는 내면적 자아에 대한 성찰과 민족적 현실에 대한 인식이 자전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잘 형상화되어 뚜렷한 문학적 성과를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시가 민족 저항시 범주에 속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다소의 반론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육사(李陸史)와 함께 일제 말기 민족문학의 부재 상태, 소위 암흑기를 훌륭히 극복한 민족 저항 시인으로 평가되는 것이 통설이다.
5.방천에 대해서
한강 권역의 한강 수계에 속하며, 한강의 제1지류이다. 국가하천, 지방2급하천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국가하천은 유로연장(
流路延長) 45.7㎞·하천연장 16.05㎞·유역면적 261.41㎢, 지방2급하천은 유로연장 29.65㎞·하천연장 28.95㎞·유역면적 125.6㎢이다.
가둔천 또는 가돈천이라고도 부르며, 중류 지역인
고양시 부근에서는 심천이라 부르고,
파주시 조리읍(
條里邑) 부근에서는 봉일천,
금촌동(
金村洞) 남쪽에서는 금성진, 하류의
교하읍(
交河邑) 부근에서는 방천이라 부른다. 오금천 합류지점부터 대자천 합류지점 사이는 신원천이라고도 불렀다.
양주시 챌봉(516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장흥면(
長興面)
부곡리에서 지방2급하천이 시작되며,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仙遊洞), 덕양구
내유동(
奈遊洞)을 거쳐,
일산동구 지영동(
芝英洞), 파주시 조리읍의 경계지점에서 국가하천으로 바뀌고, 파주시 교하읍
오도리 북쪽에서 서쪽을 향해 흘러 한강으로 합류한다.
공릉천에 합류되는 지류로는 고양시에서는 덕양구 선유동에서 발원하는 선유천, 덕양구
오금동에서 발원하는 오금천,
벽제동에서 발원하는 벽제천, 덕양구
대자동(
大慈洞)에서 발원하는 대자천,
원당동(
元堂洞)에서 발원하는
원당천, 옛 벽제읍 지영리에서 발원하는 장진천 등이 있고, 파주시에서는 울벌천·부곡천·
교현천·석현천·고산천·소리천·사포교천·소위지천·청룡두천 등이 있다.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
三上里) 일대 하천유역에는 수도권 주민의 1일 관광지로 유명한
일영유원지가 있고, 장흥면
삼하리의 하천 암벽에는
김정희(
金正喜)를 비롯한 조선 후기 문인들의 글씨가 새겨진
노고산 독재동 추사필적암각문(
老姑山篤才洞秋史筆蹟岩刻文:경기기념물 97)이 있다.
조선시대 예종의 원비 능인 '공릉'에서 유래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구부러진 하천의 모양을 보고 곡릉천(
曲陵川)으로 바꿔불렀다. 경기도 파주시는 하천의 명칭을
바로잡기 위해 중앙하천관리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하였고 2009년 1월 1일부터 공릉천으로 원래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방천이 이거 맞는지 모르겠어요~~
첫댓글 하늘아!
양주시의 방천이 아니라 중국의 방천을 이야기하는거란다.
방천은 훈춘시의 동남방향에 자리잡고있으며 시구역과 65킬로미터 떨어져있습니다. 훈춘시에서 차를 타고 움직이면 한시간남짓한 거리이지요. 방천에서는 러시아와 조선을 한눈에 굽어볼수 있다고 하여 일명 "동북아 금삼각"이라고도 불리였으며 한때 두만강유역개발붐이 일면서 일약 화두에 올랐던 곳이기도 합니다만 지금은 다만 조용한 유람구로 남아있답니다.
안나와~~ㅜㅠ
중국 전체 지도를 올리고, 네가 준비한 것들을 확인하면서 했으면 더 좋았겠는데.. 수고했어,
좀더 많은 자료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