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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 50주년 기념 제26회 전국백일장 우수 입상작품(중등부 산문)
<장원>
극장을 나오며
양덕여중 1학년 박은미
극장을 나오면 사람들은 제각각 한 마디씩 한다. 비난 또는 칭찬, 짧은 감탄사까지.
처음 극장에 갔을 때 무척 신기했다. 대형 스크린에 크게 잡힌 사람들의 모습,....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 일상생활과 다른 것이 없는 모습이라 더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재미있는 장면에는 깔깔 웃기도 하고 슬픈 장면에는 눈물짓고....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영화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너무 많이 닮았다고.....
사람들은 살면서 단맛과 쓴맛을 본다고 한다. 쓴맛만보다 다시 일어나서 단맛을 보는 사람, 한 번에 잘못된 실수 때문에 영원히 쓴맛을 보는 사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픈 경험과 행복한 경험을 한번쯤은 겪어본다. 아직 14살 밖에 안 된 나이지만 나도 언젠가는 좌절과 아픔을 배울 것이고 행복이라는 단어가 더 절실하게 느껴질 때가 올 것이다. 한 편의 영화같이 파란만장한 사람들의 삶은 항상 나를 지켜보는 관람자들이 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면서 실패하면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면서 나를 비판할 것이고 내가 무척 힘들 때 사람들은 나를 보면서 동정을 할 것이다. 내가 무척 행복할 때는 사람들은 나를 보며 다시 희망을 가질 것이다.
극장을 나오면서 사람들은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말하듯이 내 일생을 담은 짧은 영화에 대해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며 엄지손가락을 펴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비판을 하며 야유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책에서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있었다. “성공한 인생은 돈을 잘 버는 것이 아니다. 풍족한 생활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후회 없이 살았던 인생이다.” 나 또한 그럴 것이다. 내가 실패한 인생을 살아도 내 자신에게 부끄럼 없는 인생이 진정한 멋진 영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한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스태프들과 감독 등 여러 명의 땀방울이 들어간다. 우리도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부모님, 곁에 있는 친구들, 나를 지지해주는 친구들 덕분이 아닐까..... “국가대표”처럼 우리나라를 빛내는 영화가 못되더라도 “해운대”처럼 쓰나미를 이겨낸 영화가 못 되더라도 나의 짧은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정말 멋진 영화예요. 나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극장을 나오면서 사람들은 말 할 것이다. 비판도 하고 칭찬도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극장을 나오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우뚝 설 수 있는 영화를 만들거라고.
<차상>
극장을 나오며
제일여중 2학년 김연주
퉁퉁 부었다. 엄마도 눈이 퉁퉁 붓고 나도 눈이 퉁퉁 부어 고개를 들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우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부끄러운 웃음만 흘렸다. 겨울방학 끝자락에 내가 휴식을 선택한 것은 극장이었다. 2학년 때의 필승을 다짐하며 거의 한 달 동안 책과 씨름해서 앞만 달렸다.
암과 싸우듯 나는 영어단어와 사투하며 수학문제와 씨름을 하는 동안 어느새 달력은 2010년을 지나고도 1월 한 장을 넘겼다. 개학이 다가오며 나는 나의 지친 몸을 극장에 맡기고 싶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스크린에 눈을 고정시킨 채 무념무상에 빠지고 싶었다.
극장 게시판에 걸려있는 여러 영화 중 우리는 ‘하모니’를 선택했다. 왠지 노래를 통해 나에게 웃음을 줄 수 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티켓을 끊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팝콘과 음료수를 손에 들고 가장 구석진 곳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아뿔사! 엄마가 오늘도 사고를 쳤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팝콘을 우르르 쏟아 버렸다. 우리는 팝콘의 고소하고 달콤한 맛에 미련을 두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죄수에 대한 내 편견 때문에 보기에 꺼려졌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내 편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너 평의 작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삶을 포기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사람만은 아이를 위해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 왔지만 그 아줌마에겐 희망이 있었다. 바로 ‘아이’
아이의 행복이 아줌마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아줌마 덕분에 작은 방안속의 사람들에게는 목표가 생겼고 희망이 생겼다. 최선을 다해 부른 노래는 아이에게 새 부모를 찾아주는 행운을 안겼고 다른 죄수들에게는 행복과 감동을 전달해 주었다. 죄수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어느새 내 눈에서 눈물을 뽑아냈다. 콧물도 뽑아냈다. 엄마가 가끔 말씀하시는 ‘가슴 저미네’ 라는 말이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내 자리에 눈물 한 방울을 살짝 떨어뜨린 채 극장을 나왔다. 오늘 극장을 나오며 보는 하늘은 매우 슬프도록 아름다운 것 같다.
극장은 내가 어떤 영화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마음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 같다. 2학년 국어 교과서에 보면 개미는 ‘페로몬’이라는 냄새로 많은 의사소통을 한다고 하는데 나도 극장을 통해 나에게 부족한 삶을 배우고 진실을 조금씩 담아간다.
오늘 난 ‘하모니’란 한편의 영화를 통해 뜨거운 모정을 느꼈고, 어려운 악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배웠다. 나는 그들에게서 배운 또 다른 삶을 내 머리 속에 남겨 두고 극장을 나왔다.
<차하1>
극장을 나오며
광려중학교 1학년 이효영
인생은 한편의 영화이다. 사실 맨 처음에는 이 ‘영화’에 대하여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 ‘초등시절’이라는 한편의 영화를 보고 막 극장에서 나오게 되었다.
나는 주연이기도 했고, 관객이 되기도 했다. 영화의 시작은 너무나도 거인 같았던 ‘초등학교’의 운동장에 한발 들어선 것이었다. 1학년의 영화는 너무나도 짧았다. 그 영화를 연기하면서도 엄마, 아빠와 함께 날마다 운동했던 도로 - 지금은 개통되어 차들속에 묻히고 있지만 - 그리고 운동 뒤 바라보았던 산 뒤로 숨어드는 태양과 그 순간 마음이 뭔지 모르게 울적해진 석양 빛. 비탈길에서 타고 내려왔던 나의 인라인 스케이트와 귀 뒤로 지나가는 빠른 공기, 친구와 함께 했던 게임, 기억이 많이 없어 서서히 그 줄거리를 잊고 있는 나의 관객들.
2학년의 영화는 감동이 없었다. 자연의 오색 빛깔은 사라지고, 아이들이 가득한 교실이 나타난다. 조연은 선생님. 나의 대사는 감명이 없었다. 기억속 영화에서는, 선생님이 나를 칭찬하며 ‘아가씨’라고 불러주었고, 옷을 잘 입었던 아이에게 ‘공주님’이라고 불러 주었다. 영화가 빈약해서 새로 연기해 내었다. 지금도 불쑥불쑥 상영도중 나타나는 그 이미지들을 보며 왠지 뿌듯했다. 관중석에서는 팝콘 먹는 소리가 들렸지만, 영화속 그 희미한 기쁨에 묻혀 내게는 오직 나 자신만이 있었다.
3학년 영화에는 즐거운 기억이 없던 것 같다. 아무리 필름을 다시 봐도 검은 화면에 ‘생략’이라는 글자만 희미한 선생님 얼굴, 피아노대회 위로 지나간다. 관객들이 잠깐 쉬러 나간 사이, 4학년의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전과는 달리, 평화보다는 드라마처럼 박진감이 넘치는 공부 이야기가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성적이 100→99→100→99로 계속 변하면서, 관객들은 나를 응원하거나 무시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공부 잘 한다’는 나의 수식어가 최초로 붙게 되었다. 박진감이 넘쳐 손에 땀까지 나게 했던 나의 영화에서, 나뿐만 아니라 관객들이 딱 한번 웃었다. 외모를 위해 쉬는 시간마다 상어기름을 쪽쪽 빨아 드시던 선생님 모습. 영화는 거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1등을 지키기 위해 나는 끝까지 절벽을 기어올랐다. 기대가 어긋나면 한번 인상을 쓰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고 있던 관객과는 달리, 나는 마음 속 깊이 그 실망감이 자리 잡았다. 그럴수록 힘차게 튀어 올랐다. 어릴 적 갖고 놀던 탱탱 볼처럼 모든 일들이 심한 굴곡 속에 지나갔다.
6학년의 영화는 너무나도 길었다. 나는 수많은 느낌을 영화속에 담아내었지만, 졸던 사람들도 있었고 결국은 나 혼자 그 사소한 느낌들을 가슴속 한 구석에 간직하게 되었다. 나는 늘 전교 1등이었지만 마음은 고독했다. 봐주는 사람이 엄마밖에 없었던, 평화가 깨어지고 쓸쓸하게 눈물을 떨어뜨리던 나는 영화속에 그 내용을 담지 않았다. 아직도 피 흘리고 있는 기억, 엄마․아빠에 대한 기억은 우리가족, 그중에서도 부모님을 위한 영화였다. 영화의 끝은 졸업식 후 울던 나의 모습이었다.
길디긴 이 6년 동안 상영된 영화가 내 얼굴, 엄마․ 아빠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끝난 뒤에 극장을 나오며, 이 짧게 느껴지는 나의 유년시절의 절반을 아쉬워 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팝콘 쓰레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 ‘거위의 꿈’ 노래와 함께 검은 자막이 떴다. ‘인생은 한편의 영화입니다. 짧지만 말 그대로 6년의 긴 세월이 흐른 뒤, 저는 이제 중학교에 교복을 입고 미소 짓고 있습니다. 모두가 극장을 나가도, 그것은 이 영화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영화를 위해 날개를 추스르는 과정이겠지요. 극장을 나간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스타트입니다.’ 박수소리가 났다. 극장을 나가며, 나는 새 영화를 찍기 위해 힘차게 한발을 내딛었다.
<차하2>
극장을 나오며
부산 분포중학교 3학년 박수민
하늘이 너무나 눈이 부셨던 날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극장’이라는 곳에 가본 날을 기억한다. 옛날이지만, 내가 어렴풋이나마 기억하는 건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것을 가르쳐 준 날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기억에 남을 첫 극장에 들어갈 때, 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날은 가장 슬픈 날이었다. 극장에 오기 전, 우리집에 한 통의 전화가 왔었다.
“수민아, 용훈이 오빠가 병원에 입원했단다. 급성 신부전증이래.”
엄마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나는 오빠가 입원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전화통화로 원수 마냥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던 오빠였는데...
용훈이 오빠는 나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사촌 오빠였다. 사촌 오빠들 중에 가장 무뚝뚝해서 나랑 가장 많이 싸우던 오빠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날 아껴주던 사람이었는데 입원을 했다니, 괜히 나 때문인 것 같아 울음이 터졌다.
“오빠 잘못되면 어떡해. 난 몰라. 오빠”
엄마도 우는 내 모습에 놀라셨는지 나를 달래려고 극장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렇게 나는 내 생애 첫 극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극장에서 보게 된 영화는 ‘안녕. 형아’였다. 솔직히 나는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온통 오빠 생각에 눈물만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 인상 깊게 남는 장면이 있다. 병에 걸린 형을 보면서 그제서야 형의 소중함을 깨닫고, 형이 살아남기 만을 간절히 기도하는 동생의 모습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가슴 한켠이 뭉클해졌다.
‘영화 속 저 아이도 지금의 나처럼 이제야 오빠의 소중함을 느끼는구나.’ 영화가 끝나고 나는 어두운 극장에 사람들이 다 나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극장을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어두운 상태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서 나중에, 정말 나중에 깨어나게 되면 오빠도 좋아질 것 같았다. 나는 엄마와 함께 극장을 나오며 마지막 한 방울 눈물을 흘렸다. 오빠의 존재가 나에겐 너무나 크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소중한 사람이란 사실도.... 그런데 극장 안에서 모든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을 때 비로소 나는 오빠의 소중함을 알았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늘 곁에 있고 쉽게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
나는 극장을 나와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외숙모께서 받으시더니 다행히 상태가 좋아져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감사의 눈물이 내 볼에 흐르고 있었다. 오빠를 잃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시간이 흘러 나는 중3이 되었고, 오빠는 고3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오빠랑 나는 티격태격 싸운다. 하지만 난 이 싸움이 좋다. 힘든 고비를 넘기고 체력이 좋아져서 싸우기도 하니 즐겁고 고마운 싸움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옛날을 생각해 보면 극장에서의 경험이 나에겐 가장 소중했던 경험이었다. 어두컴컴한 극장을 나오면, 밝은 빛이 나를 비추듯이 나도 어두컴컴했던 슬픈 시간이 지나 지금처럼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밝은 빛의 시간이 왔다. 그러나 난 굳게 믿는다. 어두웠던 극장 안에서의 시간은 결코 슬픈 시간이 아니라고. 극장 밖으로 한걸음씩 내딛으며 맛보는 소중한 시간과 결실을 위해, 잠시 스치는 과정일 뿐이라고. 극장을 나오며, 밝은 빛의 소중한 시간을 얻기 위해 나는 지금 이 소중한 시간을 만끽 할 것이다. 또다시 내딛게 될 극장의 문 앞에서.
<참방1>
극장을 나오며
팔용중학교 2학년 김혜리
벌써 작년의 일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꿈과 희망을, 그리고 ‘할 수 있다’ 는 자신감을 준 것이. 작년 여름, 더위가 지글지글 끓던 어느 날 ‘국가대표’라는 감동적인 영화가 개봉되었다. 포스터의 사진은 내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스키점프’였다. 이 영화는 나를 울고 웃고 가슴이 뭉클한 그리고 내가 대한민국 이 땅 에서 태어난 사실조차를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해주었다. 누구도 몰랐고 관심 없었던 비운의 스포츠 종목 스키점프 그러나 우리나라만의 끈기와 열정으로 기적을 일궈낸 선수들, 그 과정은 너무 고달팠다. 그 당시 스키점프를 지원해주는 단체는 아무도 없었으며, 제대로 된 코치도, 환경도 열악했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인 누구도 가지지 못한 한국인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이겨냈다. 그들이 처음부터 뭘 바란 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돈을 위해, 가족을 위해 스키점프대에 올랐지만 그들은 점점 그들을 위해 스스로 스키점프대에 올랐다. 그리고 노력은 하늘도 기억하는지 비록 메달권 진입은 실패했지만 생애 첫 번째 올림픽에서 놀라운 결과를 보여 주었다. 순간 극장은 모두 숨을 죽이고 마른침을 삼키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 순간은 가슴이 뜨거워 터질 것 같았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한국인에 대한 긍지를 내 마음에 심어 주었다.
극장을 나오며 뜨거운 가슴의 국가대표들은 잊혀 지지 않았다. 순간, 나는 이제껏 나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했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난 내 꿈을 위해서, 내가 스스로 원해서 땀방울을 흘린 적이 있던가... 난 외부의 압박, 부모님, 선생님의 강요로 학원을 다니고 책상에 붙어 앉아 있고 연필을 쥐었다. 한 번도 그들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나를 외친 적이 없다. 나는 나보다 뛰어난 아이들에게는 비교도 되지 못 할 거라 스스로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포기한 것 일지도, 죽을 용기가 있으면 목숨 걸고 덤비라 했던, 포기할 용기가 있으면 최선을 다해 덤비겠다. 어제 읽은 책이 생각난다. 김규환 명장님은 용기를 잃으면 죽은 거라 하셨다. 모두들 건강을 잃으면 죽은 거라지만 건강도 용기로 극복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대표는 용기가 무기였다.
나도 이제 날아보려 한다. 도전해보려 한다. 그들처럼 꿈을 가지고 그들처럼 용기를 가지고, 그리고 그들처럼 나 자신을 믿고. ‘국가대표’란 영화는 내 인생의 멘토라 하겠다. 이 땅에 삶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말한다. “포기할 용기가 있으면 최선을 다해 덤비세요. 용기를 가지세요.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처럼 높이 날수 있을 겁니다.”
<참방2>
극장을 나오며
광려중학교 3학년 박성문
사람은, 적어도 이 지구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위치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자신에게 한 가지 업을 정하자면 사람은 주연을 택한다. 모두가 각자에게는 “주인된 삶을 살자”라고 말하지만, 극장의 연극이 주연만으로 이루어 질수 없듯이 ‘각자가 주연인 주연과 조연’이 있어야만 유지 될 수 있다. 인생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극장에서 그 누가 조연을 택할까? 그러나 그들이 있어 세상은 움직인다.
나는 예곡이라는 촌에 살고 있다. 촌에 살다보니 자연히 문밖에 나서면 베어진 벼 밑단이 늘어져 있고 산으로 둘러쌓여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농사철이 되어도 젊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주인집 할머니는 허리가 굽어서 네발지팡이가 아니면 거동조차 못하시지만 같은 연배의 할아버지와 벼를 심고 물을 댄다. 그렇게 집에 오셔서는 지쳐서 오셨냐는 내 위로의, 수고의 인사를 받아주신다. 듣기로는 아드님도 계시고 따님 분들도 계사던데 난 본적이 없다. 시내로, 사업 터로 나가서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들 생각에는 힘들고 돈 안 되는 농사는 조연이 되는가? 쌀과 생선 생산한 그들의 노력을 사먹는 것이 주연인가? 대부분은 주연의 일을 찾아서 멋지고, 인정받는 일을 찾아 나선다. 그게 주연이고, 농촌의 농부는 그들을 돕고 먹여주는 조연이니까.
나는 우리주변에서 ‘국가성장률, 성장도’라는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왜 세상은 발전만을 지향하고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 뒤처지는 것일까? 발전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인류가 지향하는 발전은 편한 것, 안락한 것,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숲이 사라지고 강이 오염되지만, 그것을 발전의 전유물로 여긴다. 주연이 돼야 하니까. 조연이 하는 것은 돕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지금의 세상은 편해졌지만 좋아진 것은 결코 아니다. 전쟁을 해도 발전된 만큼 죽어가고 사라진다. 그러면 그들, 주연이 없애놓은 것을 조연이 다시 쌓아간다. 이 세상의 극장은 서로가 받쳐주고 도와주며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사리사욕을 채워가는 대표들, 타국을 침범하고 언어를 소멸시켜 취하려는 제국주의의 국가들은 자신이 주연이고 그들이 하고 있는 연극이 성황리에 방영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주인이 있어서 지구를 지켜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이 지구극장을 보고 나오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나는 모두가 조연이고 주연이면 좋겠다. 주연으로써 주도하고 조연으로써 받쳐주는... 언젠가 이 극장을 나오며 몸서리치는 전율과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세상을 살다보면 세상이 좀 더 밝아지지 않을까?
<참방3>
극장을 나오며
마산 제일여자중학교 2학년 허재희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이야기이다. 내가 6학년 때 YMCA 근현대사에 다니며 근대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며 흠뻑 젖어 있을 때, 엄마는 나를 데리고 영화관에 갔다. 관객 수가 엄청난 수를 돌파했을 때 아빠는 근대 역사에 빠져있는 나에게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를 보여주었다. 광주 5․18 민주항쟁에 대한 이야기였다. 배우의 연기도 연기였지만 시민을 보호하고, 감싸줘야 할 경찰, 군인들이 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총을 쏘고, 죽이고, 자신의 의견과 의사를 고등학생이나 시민들이 몇몇이 모여 내세웠을 뿐인데, 총살을 하고, 근대역사를 배우고 알게 되면서 울분이 터지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러한 이야기를 실제처럼 영화로 보니 가슴에 더 와 닿았다. 영화를 다보고 나오면서 아빠는 말씀 하셨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야. 아빠가 재희에게 역사를 더욱 더 알게 하고 공부할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도 6․25와 일제 강점기 같은 슬픈 역사도 우리는 역사이기 때문에 바르게 알고... 저번에 아빠가 말했지?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라고... 슬픈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야...”
나는 아빠의 말씀을 들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우리 마산에도 광주민주항쟁과 같은 슬픈 역사가 있다. 3․15의거이다. 그 역사도 시위운동으로 인한 슬픈 역사이다.
전국 우리나라 사람들은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 광주민주항쟁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냥 마산의 역사로만 남아있는 3․15의거에 대해서는 마산 사람이 아니라면 거의 알지도 못하고 있다. 3․15의거에 대해 알리고, 관심받기 위해서 우리의 마산 3․15역사도 영화로 한편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내가 중2가 된 2010년 드디어 마산 3․15역사가 마산의 역사만이 아닌 전국의 역사로서 국가기념일 제정이 되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기쁜 이야기를 마음속으로만 기뻐하지 않고, 얼른 일기를 썼다. 한 자 막힘없이 일기가 술술 써내려져 갔다. 그 기쁨... 지금 생각하려니... 감정이 북받쳐 오를 것만 같다.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때로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때로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새로운 정보를 분류하여 흡수하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는 나는 9시 뉴스를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보곤 하는데... 그날도 아빠와 나란히 앉아 동생들과 9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어! 어! 아빠 저거... 저거... 우와~ 국가 기념일 제정하더니 3․15 역사가 영화로?”
“조용해 봐라.. 좀 들어 보자...”
3․15역사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3․15에 대한 영화를 찍고 있는 모습이 화면에 비춰졌다. 6학년 때 극장을 나오면서 생각했던 그때 그 일이 실현된 것 같아, 너무 기쁘다. 제목은 ‘누나의 3월’ 이라고... 3․15의거 이 영화도 화려한 휴가처럼 대박나서 많은 사람이 이 마산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고 알아주는 것이 지금 나의 조그마한 소원이자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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