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황혼의 노래, 영혼의 숭고 -김화자 시집 『침묵의 뒤』(작가마을)
구모룡(문학평론가)
때론 노년의 지혜를 찬양하고 노경(老境)에 상응하는 관조와 청담(淸淡)을 경배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늙어감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듯이 사람에게도 삶의 가을은 오게 마련이다. 천지의 자연은 순환하면서 영원하지만, 인생은 한번 가면 오지 않는다. 여기에다 병과 고통이 따르고 이별과 고독이 수반된다. 살과 뼈와 피로 구성된 몸은 세월을 지나면서 닳고 낡기 마련이다. 노화와 죽음은 누구도 받아들이기 싫지만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자아에 대하여 저항하는 자아가 생기는가 하면 늙어감을 수락하는 자아를 형성하기도 한다.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갈등하고 분열하는 시간이 노년이다. 덧없이 흐르는 시간의 한 가운데서 글쓰기는 노년의 자기를 표출하는 방식이자 치유의 한 형식이 된다. 피할 수 없이 닥쳐온 가족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갈구하는 기도가 시 쓰기와 함께 한다. 김화자의 시집 『침묵의 뒤』는 질병의 침입으로 몸져누운 남편을 간호하는 병상의 일지이자 이러한 남편이 세상을 뜬 뒤에 부르는 애도의 노래이다. 나아가 혼자됨의 시간을 이겨내는 인고의 기록이자 새로운 삶과 사랑을 갈구하는 기도이다. 4부로 구성된 시집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배치되었다. 시집의 1부의 첫머리에 놓은 「안착」은 “두 촉짜리 난 화분”에 노부부의 모습을 투영한다. “그 많던 온실의 난이며/마당의 나무들/몽땅 흩어버리고” “옛집 자리”에 새로 들어선 집(아파트로 짐작되는)의 거실에 안착한 “풍란 하나”을 마주하면서 시적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 무엇을 바라리/닳아져 가는 우리들 마주 보다가/하늘 올려다보고/별 보다가/내리는 빗줄기/구름의 의미를 익혀가야지
나이 듦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의 이치를 익혀가겠다는 화자의 태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황혼의 미학으로 흔히 내세우는 미적 범주가 담(淡)이다. 비우고 맑아지는 상태를 지향한다. 화자가 말하는 ‘구름의 의미’와도 맥락을 같이 하지 않을까. 정념의 구름을 비워내면 푸른 하늘빛이 다가오듯이 ‘더 무엇을’ 바라지 않고 시간을 받아들이는 데서 담의 미학은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에 침입한 돌연한 사건은 삶을 다시 어둠으로 끌어내린다. “이사 와서 미처 돌 볼 사이도 없이/그가/위암이 식도로 전이되어 손도 쓸 수조차 없다는 벼락같은 소리”를 듣는다. 이로써 남편의 고통을 직면하게 되면서 “통증만은 끝까지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벼락」에서)라고 기도한다. 나눌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하면서 서로 연민하며 염려하는 마음은 「체중」이 말하듯이 더욱 커진다. 하지만 “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그와의 거리”(「입원」에서)를 좁히긴 힘들어진다. 예고된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봉사자들에 의해 관리되는 남편을 바라보는 시인의 감정은 그들의 사정으로 인해 자신이 남편을 수발하게 되면서 “나에게 이런 시간을 만들어 준/이에게 감사한다”(「감사」에서)는 진술로 표출된다. 이처럼 시인에게 노년은 삶에 대한 경고뿐만 아니라 소망으로 받아들여 진다. 시인은 노년에서 만나는 삶의 역설을 담담하게 전한다. “불꽃같이 번져나던 벚꽃 길/하루 비에 폭삭/교회 대신 병원으로 간다/나의 하나님은 지금 병원에 계신다”(「나의 하나님」에서). 치유의 길이 끊어진 환자에게 보살핌과 함께 있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독하게 죽어가는 이에게 어떤 위로가 필요할까? 시인은 남편의 임종까지 병원에서의 생활 과정을 세심하게 시로 표현한다. 환자의 상태가 나빠짐에 따라서 병원에만 머물러야 하거나(「금족령」에서), “이젠 죽 두어 숟갈 데워놓고/먼 산만 보다 밀쳐내기가 일쑤”인 환자를 바라보면서 “아직도 크게 진통을 느끼지 못하는데 감사할 뿐”인 상황을 받아들인다. “하나님 아버지 편히 쉬게 하여 주시옵소서”(「무통증」에서)라고 환자의 무통증을 간구하지만 “온몸 가려움과 통증에” “내가 할 수 있는 건/그저 손으로 쓰다듬을 수밖에”(「4월 24일」에서) 없음을 안다. 오직 사랑의 감정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기억이 흐려져 가는 당신/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당신의 눈동자/젖어있다”(「흐려져 가는 기억」에서)는 진술이 말하듯이 육신의 죽음에 다다른 영혼의 슬픔이 전해져 온다. 암죽조차 넘기지 못하는 지경에서 죽음에 다다를수록 환자의 무통증을 간구하던 시적 화자는 “최소한 당신 본연의 모습과 정신으로/눈 감을 수 있도록 지켜주시옵소서”(「4월 28일」에서)라고 기도한다. 달리 말해서 ‘기품있는 놓아주기’를 염원한다. 하지만 생명에 대한 집착은 쉽게 빛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4월 29일」의 정황처럼 연신 환자는 “엄마”를 부르면서 고통을 호소하지만 “수녀님이 위로의 말 뒤에/아픔도 스스로 이겨나가야 함을 일러주면서/아버지 하나님 곁으로 갈 마음은 없느냐고 물었을 때/도리질을” 한다. 보살핌의 과정은 타자를 대상화하는 일이 아니며 자신의 내면으로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오후부터 한 발 짝 한 발 짝/임종이 다가옴을 예감하면서/정신 차려 목구멍에 밥을 넣는다”(「5월 3일」에서)라는 화자의 진술은 환자와 교감하는 자아의 견결한 자세를 알 수 있게 한다.
오늘은 생각보다 진통의 폭이 순해 보였다/흔드는 손을 잡고 불러도 이젠 고개 흔들지 않는다//나도 몰래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너무 고통 받지 말고 하늘나라에 먼저 올라가서/어머니를 만나고 있으면/내가 당신보다 7년이나 어리니 좀 더 살다가/당신 따라 갈 테니 미리 내 자리도 잡아놓고/기다리고 있어요. 알았지요?/그의 귀에다 또렷또렷 속삭였다//알아들은 듯 그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져 왔다/차례대로 아이들 모두 와서 만나고/마지막 막내가 도착 감겨지던 눈이 다시 떴다가/스르르 영영 감겨졌다 저녁 8시 30분//당신의 모습이 너무나 편안하게 보였다 (「임종」 전문)
보살핌은 환자를 향하지만 자기로 회귀하는 마음의 문제이다. 긍휼은 가난한 심정에서 자란다. 임종을 맞으면서 긍휼의 대상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의 ‘존재하지 않음’은 나의 존재 안에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각인한다. 시집의 1부가 남편의 임종에서 끝난다면 2부는 부재하는 그에 대한 회상과 애도를 표현한다. 병상의 에피소드가 ‘긴 이야기’(「긴 이야기」에서)로 남아 시인의 내면 안에 남기도 하고 “마지막 잦은 신음 속에/난데없이 묻어오는 엄마”라는 “당신의 목소리”(「엄마」에서)는 오래도록 슬픈 울림이 된다. “웃는 듯 눈에 선한/그대 너무나 편한 마지막 모습”은 시인에게 “편안”(「편안을 주고 간 당신」에서)을 준다. 하지만 여전히 들려오는 “나직한 당신의 음성”(「음성」에서)은 시인을 지속적인 슬픔으로 이끈다. 이러한 슬픔은 순전히 부재하는 ‘당신’을 향한다. “아무도 없네/참말로 아무도 없네//변명 반 섞어/보고 할 때도 없이/빈방뿐이네”(「빈방」에서)라는 진술이 함의하는 바처럼 시인이 꾸려야 할 새로운 삶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외롭다 생각되는 날」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그의 죽음과 부재는 오히려 존재에 대한 자각과 각성을 더하고 있다. 노년의 삶에 대한 인식이 깊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도가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타 노바(Vita nova)의 길이 열린다.
한 며칠 당신이 출장 갔을 때/홀가분하게 여기던 그때처럼/외롭다 생각지도 말고/쓸쓸해하지도 말고/당신이 마지막으로 내게 준/최대의 휴가라 생각하자//지금 으스름 내리고 밤이 오는 까닭도/내일 새날을 위한/휴식의 시간/욕심부리지 말고/주어진 건강에 감사하며/눈도 마음도 건전하게 채워 갈 수 있는 일/어딘가에 있을 터/부축하며 스스로 날 일으켜/내 안을 채워가자/수시로 떠오르는 당신의 모습 바라보며/날 지켜준다 생각하자 (「외롭다 생각되는 날」 전문)
이처럼 시적 화자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이겨내면서 혼자 늙어감을 어둠으로 통하는 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을 애도하면서 휴식과 건강을 유지하면서 자신을 일으켜 내면을 채워가는 삶의 충일(充溢)을 염원한다. 애도의 슬픔은 존재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푸른 문고리”(「푸른 문고리」에서)가 되어 존재를 일으켜 세우고 사유를 깊게 한다. 물론 이 모든 게 당장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가야/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을까”(「거짓말」에서)라고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깊은 고요”의 “어둠”(「독한 약」에서) 속에 고립된 자아와 만나기도 한다. 체념과 포기의 상념도 오갈 수 있다. 하지만 “외벽이라고 쌓아가야지/터득하며 배워가야지”(「혼 밥」에서)라는 다짐을 멈추지 않는다. 내면 안에 머물거나 혼자 있을 때 의지의 피로가 다닥친다. 슬픔의 고통을 딛고선 의지적 자아는 다르다. “생각이 생각을 바꿔놓는 종이 한 장 차이의 생각/푸근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종이 한 장의 차이」에서)는 구절처럼 자기를 긍정한다. 시인은 「기도」의 마지막 연으로 ‘요한 3서 1장 2절’을 배치한다. “사랑하는 자여/네 영혼이 잘됨같이/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내가 강구하노라.” 애도와 기도의 변증법이 진행된 대목이다. 신과의 대화를 통하여 시인은 의지를 강화하고 대긍정의 삶을 지향한다. 이를 단지 신앙의 힘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애도와 슬픔으로 연단된 존재의 변화라 하겠다. 「기억 속의 감포」, 「완행열차」 그리고 「등산화」에 이르면 일상이 전면화되면서 슬픔이나 애도가 후면으로 밀려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만큼 시인이 주체로서 자기의 삶에 직면하고 있다. 부재의 대상이 추억으로 전환하면서 자아의 내면을 채우는 기제로 작동한다.
3부의 시편들은 일상성을 회복한 자아가 지닌 생의 감각을 표출한다. 그 첫머리에 놓인 「탈출」은 “촘촘히 박혀진 바늘구멍 틈새로/삐죽삐죽” 빠져나오는 “하얀 오리털”을 묘사하는 경쾌함을 보인다. 시집의 표제시인 「침묵의 뒤」는 시 속의 주인공이 환자가 되어 입원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코골이가 심한 옆 병상의 환자가 떠난 뒤의 병실 풍경을 서술한다. 타자에 대한 사소한 감정의 문제를 반성하는 자아의 모습은 더 큰 사랑을 생각하게 한다.
시련이다/나에게 내리시는 시련의 시간/눈 감고 외우고 또 외우는/저의 옹졸함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용서하여주시옵소서/오전까지 그녀가 누웠던 병상/내가 누워 긴 밤 뒤척이고 있다 (「침묵의 뒤」 부분)
이처럼 시적 자아가 섬세하다. 아픈 몸이면서 타자를 환대하지 못한 자기를 질타한다. 연민과 공감은 김화자 시인의 시적 마음이다. 「외톨이」가 낯선 타자에 대한 연민을 말한다면 「지침서」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표출한다. 물론 “보이지 않는 바람이었으면 좋겠다/흔적 없이 사라지는 바람이었으면 좋겠다”(「이럴 때는」에서)와 같이 “내 몸 천근으로 일어날 수 없을 때”의 무게를 한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시인은 “기다림의 미학”(「기다림의 미학」에서)을 견지하고 새로운 “사랑법”(「이제야」에서)을 깨치고자 한다.
하루 이틀 기다리다가/일 이주일/기다림의 초조함 토닥이며/어디쯤에서 매듭이 꼬였을까/나 아닌 네가 되어도 본다.//돌아보며 한 달 두 달/다시 기다려보기/기다리다가 영영/어둠에 묻혀버릴지라도/각진 모서리를 갈고 있는/내 안을 위해/계절 위에 장대 하나 세워놓고/기다려 볼 일이다 (「기다림의 미학」 전문)
기다림의 미학은 기다림 그 자체에 있다. 이는 “나 아닌 네가 되어도” 보는 경험의 과정이다. 그리하여 그 대상에 영영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내 안을 위해” 기다림은 지속된다. 바로 새로운 사랑이 발명되는 모습이다. 시인은 이를 “깨닫지 못했던 사랑법”(「이제야」에서)이라고 한다. 기다림은 타자에 대한 사랑이고 관심이다. 그것은 고통에 동참하면서 희망을 찾는 생의 감각을 의미한다. “긴 밤이 가고/또 한 밤들이 가서/환하게 웃을 날 있으리/꼭 있으리”(「오뚝이」에서). 이와 같은 시인의 염원은 사물과 구체적인 삶을 대하는 섬세한 정신으로 이어진다. 「통도사 가는 길」에서 만난 “감나무”나 「세모에」에 등장하는 “키다리 아저씨”는 사물과 사람에의 관심과 지각을 잘 보여준다. 시인은 “나에게/너에게/은은한 향기로 번져나갈/사랑의 반전이”(「눈물」에서) 되는 열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는 나와 너, 주체와 타자, 내면과 외부를 오가면서 교감과 공감을 이끌면서 기다리는 일과 다름이 없다. 시인의 기다림은 “내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내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에서)이자 “빛은 빛대로/안개 속 내 안의 무거움도/바람에 삭혀 정제시키는/그늘”(「그늘의 쉼터」에서)과 같이 시간의 리듬과 공명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시집의 4부는 생에 대한 긍정과 생성, 기쁨과 희망을 말한다. 더불어 즐거운 삶인 공환(共歡, conviviality)에 대한 지향이 뚜렷하다. 이러함에도 시인은 시집의 가장 끝자리에 유년 시절의 가난을 추억하는 「유년 시절 한 때」를 배치하는 의도를 감추지 않는다. 가난한 마음에 깃드는 영성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벌써 시인은 자아의 삶에서 영혼의 슬픔을 지각한다. 삶의 고통스러운 미궁을 통과한 노년의 경지가 아닐까 한다. 여전히 생명에 대하여 놀라고 사물의 생태가 경이로운 감각을 확장한다. “아직 엄동/기상 이변에 봄 전령사/정신이 어질어질 하시는지/마안산 성벽 귀퉁이/그냥 퍼질러 앉아/화다닥 펑 튀기/매화나무 활 활짝/입 딱 벌어졌네”(「범 전령사」에서)라고 놀람과 환희를 표출하거나 “뚫어진 낙엽 하나가 별 밭이”(「낙엽 하나가」에서) 되고 “웃고 있는 제비 꽃”이 “치유의 약”(「제비 꽃」에서)이 되는 생명의 관계를 표현한다.
어디서 오신 소복의 군무인가/적막이 흐르는 달빛 아래/파르르 일렁이는/넓은 밭의 비단 물결//언제나 낮은 자세/가는 잎줄기 모여/군락을 이루는/새파란 부추 밭인 줄만 알았는데//맑은 영혼/먼 곳 그리움을 향한 부활의 몸짓인지/위로 뻗어 올린 가는 꽃대/일제히 터뜨린 하얀 꽃들의 행렬/이 새벽 /새롭게 각인시키는 숭고한 부추 꽃이여 (「부추 꽃」 전문)
낮은 지평에서 “맑은 영혼”을 피워올리는 “부추꽃”의 형상에서 우리는 시적 자아의 모습과 만난다. 영혼의 숭고를 갈망하되 삶이 뿌리내린 대지의 존재를 망각하지 않는다. 황혼의 미학이 영혼의 숭고를 직면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시인이 그려내는 숭고는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발의 찬사」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가장 낮은 데서 부활과 구원의 징표를 찾는다. 자아에서 영혼으로 가는 길목에는 경험과 침묵의 시간이 있다. 간난과 곤경, 고통과 고독의 시간을 지나면서 시인은 의연하게 자기의 삶을 바라보고 타자를 기다리는 여유를 얻는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와 요구로부터도 벌써 자유롭다. “새순/다시 돋아나지 않는/오랜 황혼의 길/스스로 부축이며/걸어가는 길 아름답다.”(「아름다운 걸음」에서) 그렇다. 시인은 이미 이같이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다. 김화자의 시는 상실과 부재를 경험하면서 늙음이 어둠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관념을 깨트린다. 오히려 분리와 적막,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 빛으로 이어지는 노경을 생성한다. 그가 시로써 표출하고자 하는 자아의 면모나 이러한 자아의 미로를 통과하는 ‘영혼의 길’은 결코 평이하지 않다. 애도를 완전한 새로운 삶으로 상승시킨 과정 또한 경이롭다. 그의 시편들을 통하여 우리는, 황혼의 미학과 만나는 한편, 노년의 참된 가치를 다시 인식하게 된다. 늙어감의 의미가 체념과 저항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소외되는 현실에서, 김화자의 시는, 헨리 나우웬이 지적했듯이, ‘나이 든다는 것이 퇴락이 아니라 새로운 소망의 계기임’을 일깨운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적어도 노년이 우리 속에서 빛나는 경계임을 인식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