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그 여행
손수영
가을이 떠나가고 있었다. 나도 가을 따라 어딘가로 떠나가고 싶었다.
가뭄 끝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 같은 내 얼굴주름살이 여행을 망설이게 했으나 그것이 더 여행을 감행하게도 했다. 대책 없이 떠난 여행이었다.
캐나디안 제인Jane에게 한 달쯤 있다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얼씨구나 생각 없이 선뜻 비행기를 탄 것은 지금생각해도 잘했다. 주구장창晝夜長川 밴쿠버 시내만 구경할 작정이었는데 다른 건 못해도 로키산맥은 봐야 한다고 제인이 패키지여행을 신청했던 것이다. 제인의 딸 소냐가 선물한 빅토리아에서, 세상모르고 있다오기도 했다.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
로키산맥은 밴프 국립공원을, 밴프 국립공원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절경 ‘레이크 루이스’를 보유하고 있다. 취록색 비단 폭을 펼쳐놓은 듯 아름다운 호수를 마주 한 순간 와우! 외마디 말고는 말이란 말은 모조리 잊었다. 물빛으로 끝장을 내고 있었다. ‘모든 색체는 햇빛의 고통에 의해 이루어진다,’던 괴테의 말을 빌리면 물이 저토록 선명하고도 깊은 옥빛을 띠는 까닭은 빙하 수에 함유된 석회질 성분을 햇빛이 끌어올린 때문이다. 호수 이름은 영국 빅토리아여왕의 넷째공주 이름을 땄다고 한다. 호수 맞은편에 있는 산이 빅토리아여왕일까.
샤토 레이크 루이스Fairmont Chateau Lake Louise호텔로 우리일행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도 호텔커피를 마시자 했다. 로비에 들어섰다. 높고 둥근 천장 어디선가 들릴 듯 말 듯 알 듯 모를 듯 긴가 민가 피아노 소리가 흘러내린다. 갈고리 손에 머리끄덩이라도 잡혔는지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바람에 풀린 명주옷고름 같은 바이올린선율이 안개에 싸인 듯 아득하고 맑디맑은 피아노음은 호수에서 튕겨진 물방울인양 옥빛으로 영롱하다. 유키 구라모토의 'Misty Lake Louise'였다. 음악은 미열처럼 전신으로 퍼지고 나는 한숨 같은 여운에 잦아든다. 어쩌다 듣는 음악 레이크 루이스, 안개속의 레이크 루이스는 아련한 비취색으로 내게 스며들고 있었다.
제인이 사라졌다. 아무도 없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큰일이다. 영어도 못하는데. 어느 통로를 통해야 제인한테 갈 수 있을까. 용케 사람이 나타난다. 커피숍? 통했다.
커피숍 근방에는 ‘사단법인50플러스코리안’ 회장 한주형 부부, 우리를 멋진 모습으로 사진을 찍어준 사진예술가부부와 마주서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는 제인의 환한 미소가 보인다. 제인의 미소는 커피 향을 타고 모란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그 전설을 기억하며 깎아지른 듯 직립한 거대한 바위산들, 몸집으로 이름값 하는 짐승들과 도도하게 흐르는 계곡물과 급격한 폭포, 하늘을 찌를 듯 커다란 침엽수들을 거느린 웅장한 로키산맥은 마치 거칠지만 덩치 큰 산골총각같이 순수하기만 하다. 생생한 야생의 표식인 이빨 드러내는 포효도 없고 눈알 부라리는 엄포도 없다. 품은 넓어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손맛은 품안에 안았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게 길들여져서는 안 되고 길들일 수도 없는 로키산맥이다.
고속도로길가에 불에 타서 시커멓게 그슬린 채 서 있는 앙상한 나무들은 방치되어 있었다. 정부방침은 자연치유. 그대로 두면 몇 년 후 살아 날거라고. 자연의 힘을 믿는 그 여유도 대자연을 닮았다. 어렴풋한 기억 한 자락에 의지해 시 한 조각을 나무의 정령에게 바친다.
- 타죽은 나무가 내 안에서 자란다. 시커먼 나무 위에 열사흘달이 떴 다.
<캠루프스>
동요를 비롯하여 수많은 고향의 노래 중 특히 좋아하는 노래는 이수인 곡 ‘고향의 노래’다. 포기할 수 없는 또 하나는 베르디의 ‘프로벤자 내 고향으로’. 이 아리아를 들으면 나를 키워준 고향 경남사천이 떠오르고 네 살까지 외할머니와 살았던 본태本胎고향, 원산이 생각난다. 외할머니와 엄마에게 이야기만 듣던 곳, 아버지가 살던 그곳이 그립다는 건 그들이 그립다는 거 아닌가.
불현 듯 엄마가 생각나면 ‘프로벤자 내 고향으로’를 듣게 된다. 몇날 며칠 듣는다. 사교계의 여왕에게 마음 준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네 마음속 고향의 바다와 흙을 누가 네 마음에서 지워버렸느냐 고향으로 돌아가자’ 애끓는 심정을 절규하듯 토해내는 아버지의 절박한 하소연은, 엄마 살아생전에 이 딸년을 걱정하는 그 절절함으로 내 심장에 콱 박힌다. 엄마 심정에 내 심정을 접붙이고 눈물콧물 짜면서 듣는다. 신파도 그런 신파가 없다. 눈물 닦고 코풀고 나면 진정된다.
소금사막호수Salt Lake로 준사막지형인 까닭에 와이너리가 유명하다는 곳, 송어의 서식지이며 남부내륙의 행정중심지, 노스톰슨강과 사우스톰슨강이 만나는 지점이 캠루프스Kamloops다. 지명의 뜻도 두물머리. 제인은 여행시작 얼마 후부터 캠루프스는 사위 브랜트의 고향이라고 말하고 또 말한다. 좋아하는 커피도 캠루프스에 있단다. 캐나디언 커피 팀 홀튼을 젖히고 캠루프스 커피라니. 드디어 캠루프스의 커피숍 A&W에서 제인의 커피를 마신다. 쓰기도 싱겁기도 상큼한 듯 묘했다.
모든 걸 다 이룬 이 시점에서,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몰랐던 자신의 본태本胎고향, 알게 모르게 사위의 고향이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제인에게 다가왔음직하다. 법과대학 졸업 후 훌쩍 캐나다로 이민을 간 제인이다. 젊디젊은 시절 아닌가. 공부하고 직장생활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콧물인지 눈물인지 땀인지도 모르면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터. 타국을 고향으로 살아가는 기량을 지혜롭게 터득했을 것이다.
‘제일 어려웠던 때가 제일 행복이더라.’는 제인의 말에 내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가슴이 먹먹해 왔다.
애벌레를 벗어난 나비의 날개 짓은 용기, 그것 아닌가. 나비의 용기로 제인은 또 하나의 고향을 가질 수 있었다. 나의 부모님이 그랬듯. 동양의 장자, 서양의 리차드 바크가 나비의 날개 짓을 그리 생각했듯.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제인이다. 정서적으로 단단해 보이는 그의 부드러움은 힘과 설득력을 가졌다. 어디 봄바람이 부드럽기만 하랴. 꽃바람일 때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하지 않던가. 제인을 생각하면 루이제 린자의 ‘생의 한가운데’가 생각난다. 주인공 니나처럼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했을 듯싶어서다.
내가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날저녁에 제인의 피아노가 푸른 물결로 일렁이며 우리모교의 교가를 불러내고 있었다. 3절까지 불렀다, 제인이 교가를 부르며 피아노반주를 하고 음치인 나도 3절까지 불렀다. 음치 아니라는 칭찬까지 받으며 불렀다. 교가가 우리를 우리이게 하던 것이다.
<빅토리아여행>
모든 색이 섞인 세상에서 유독 하얀 태양과 파란 대양大洋이 눈부시다. 하늘은 맑고 바다는 푸르렀다. 빅토리아여행은 A~Z까지의 모든 경비를 댄 제인의 딸 소냐의 선물이다. BCBritih Columbia주의 주도州都이며 행정중심지인 빅토리아여행의 첫 삽은 수상비행가 떴다. 빅토리아로 갈 때는 수상비행기로 35분, 돌아올 때는 620번 버스와 1시간 반쯤 걸리는 페리호를 이용했다,
빅토리아의 대표적 관광명소이며 랜드마크로서 캐나다국기가 펄럭이는 엠프레스호텔Empress Hotel National Historic Site of Canada에서 사흘간 머문다. 건물꼭대기에서 펄럭이는 캐나다국기는 이유가 있었다. 이 호텔이 ‘캐나다국립 역사적 유산’지정을 받은 때문이다. 고풍스러우며 아름다운 외관은 외국영화에서 본 영국건축물의 오래된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기대에 부풀어 호텔 문을 밀었으나 프런트에서 방 열쇠를 주지 않고 기다리게 한다. 프론트 직원과 제인이 한참동안 말을 주고받더니 제인이 카드를 내밀고서야 방 열쇠를 받을 수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우리는 걱정하지 않았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전통적 분위기 때문인지 복도는 어둑했지만 내실은 고급스럽고 집기들이나 소모품까지도 품위 있다.
호텔 부대시설 선물가게에서 제인이 손녀의 선물을 샀다. 나는 여기서 큰 실수를 한다, 소냐의 선물을 준비해야했는데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잃은 기회가 두고두고 아쉽다. 동창생 평자가 나를 보고 항상 2%부족하다더니 정확한 인물평 아닌가. ‘2%부족’은 언젠가부터 관용구처럼 쓰이는 개념용어다. 나는 어디서 언제쯤 2%의 개념을 찾게 될까.
예약되어있었던 호텔 측에서 자신들이 실수했다는 정중한 사과의 편지를 쓴 호텔카드와 함께 ‘에프터눈 티’, 오후 간식과 와인 한 병, 저녁 룸서비스를 무료로 제공받았다. 제인은 사과 편지를 쓴 호텔카드를 받았을 때 아주 인상적이었고 상했던 마음이 많이 풀렸다고 한다.
전신마사지와 혈액순환에 좋다는 월풀whirlpool을 이용했다. 인생의 한마당을 선경仙境에서 한바탕 놀다온 느낌이다. 아직도 얼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