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자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특히 전국시대의 횡행한 침략과 정복, 사회적 분열과 혼란을 제거하는 것을 자신의 실천적 과제로 삼았던 순자에게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지독히도 관념적인 주장에 불과할 뿐이었다.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하면서 순자는 소위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하는데, 그 주장의 핵심은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며, 선(善)이란 인위적인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이 본성에 그대로 따르면 사회적 쟁탈과 혼란이 생기므로,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禮)라는 사회적 제도에 따라 악한 성(性)을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주장이다.순자의 이와 같은 사상은 유가(儒家)로부터 이단시되었다. 또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법가의 인간 본성론과 일맥상통한다. 예(禮)를 사회적 제도로 하여 인간과 사회를 다스리려 한 것도, 법(法)을 사회적 제도로 하여 인간과 사회를 다스리려 한 법가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와 같은 추론은 순자의 문하에서 법가의 대표적 사상가인 한비자와 이사가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순자는 유가와 법가의 경계선상에 서 있는 사상가였던 것이다.
2. 한비자
1. 生涯
한비(韓非, 기원전 280년 경 - 기원전 233년)는 《한비자》를 저술한 전국 시대 중국의 정치철학자이다. 한비자는 전국시대 한왕(韓王) 안(安)의 서자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비록 왕족이었지만 왕실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불운한 처지였다. 이 같은 불행한 소년기를 가졌기에 일찍부터 학문연구에 눈을 돌렸다 그가 태어난 한나라는 전국7웅(秦, 楚, 燕, 齊, 韓, 魏, 趙) 중의 하나로 가장 문화수준이 낮은 소국이었다. 한비(韓非:한비자의 본명)는 당대의 석학인 순자에게 배우기 위해 제나라의 수도 임치로 그를 찾아갔다. 순자는 조나라 출신으로 이곳에 와서 학자의 우두머리인 제주에 초빙되어 있었다.
한비는 순자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동안 후일 진나라의 재상이 된 이사는 물론, 이곳에서 유가, 도가, 명가, 법가, 묵가 등 여러 학파의 학문을 두루 흡수, 비판하면서 부국강병의 설을 체계화했다. 그의 학설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려면 국왕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는 말재주가 없어 자신의 뛰어난 문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문장을 모은 저서 [한비자]는 55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이 한비자의 저서 중 [고분]과 [오두]를 우연히 진시황이 보게 되어 "이 책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감탄했다 한다. 이때 이사가 진시황에게 "한비를 얻고 싶으면 한나라를 공격하라, 그러면 반드시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올 것이다"고 건의하자 예상대로 한나라는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빌었다. 이때 한비는 진시황을 움직여 위험에 빠진 한나라를 구할 기회를 보고 있었다. 한편 이사는 진시왕이 한비를 중용할 것을 두려워하여 왕에게 모함했으나, 진시황은 그의 인물됨을 아껴 투옥시키는 데 그쳤다. 그러나 옥에 갇힌 한비에게 이사는 독약을 보내 자살할 것을 강요하자, 한비는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진시황을 만나볼 기회를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시황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에게 석방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그가 자살한 후였다. 이처럼 한비자는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나 조국의 멸망을 바로 눈앞에 두고 죽어간 사상가로서, 중앙집권적 봉건 전제정치체제의 확립을 위해 "형명(刑名)"과 "법술(法術)"이론을 집대성한 자이다.
한비는 먼저 정권의 천하통일에 유리한 준칙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법"이었다. 그는 사회가 모두 반드시 "법"을 준수해야 하며 누구든지 "법"을 위반하면 징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법령을 "명(名)"이라 하고 법령에 의거하여 상벌을 가하는 것을 "형(刑)"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형명지술(刑名之術)"이다.
사상적 배경
법가사상은 춘추전국시대의 전환기적 사회변혁에 가장 잘 부합되고, 실시할 경우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각국의 군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춘추전국시대에 법가사상이 발전한 지역은 주로 제나라와 한 위 조 삼진(三晋)지역이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발전한 법가사상은 주로 경제적 발전을 위한 부국정책에 그 목표를 두고 있는 데 반해 한, 위, 조에서는 법가사상이 중앙집권적 왕권의 강화와 강병정책에 초점을 맞추면서 기존의 사상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제나라 법가학파의 정치사상은 그 중심이 경제에 있었다. 제나라의 관중이 지은 [관자(管子)]에 보면, 군주는 백성을 위해 경제적인 부강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농정책을 실시해야 하고, 또 검약한 생활과 물품의 원활한 수송으로 궁핍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백성의 도덕심도 경제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의식이 족해야만 예절을 안다고 했다. 공업과 상업은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국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위나라는 먼저 변법을 시행하여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법치주의자들이 삼진에 많은 것은 바로 진(晋)의 분가와 분가된 3국의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진의 법가사상은 3파로 나뉘어지는데, "법치주의(法治主義)", "술치주의(術治主義)", "세치주의(勢治主義)"가 곧 이것이며, 이는 한비자에 의해 "법술(法術)"이론으로 집대성되었다.
"법치주의"를 내세운 자는 상앙으로, 이들은 법률을 제정하여 이를 근본으로 삼고 엄한 형벌과 큰상을 수단으로 하여 엄격히 백성을 통제하고 군권을 강화하여 부국강병책을 추진했다. 상앙은 진나라 효공(孝公)을 도와 2차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여 진의 통일기반을 마련했다.
"술치주의"는 한나라 신불해(申不害)가 주장한 것으로 권모술수를 이용한 일종의 통치기술이다. 신하를 통솔하고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여 상벌을 가하고 임금을 두렵게 여김으로써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한나라의 재상으로 발탁되어 한나라 발전에 공을 세웠다.
"세치주의"를 내세운 사람은 조나라 출신 신도(愼到)다. 신도는 군주의 절대적 세력이 곧 군주세력의 원천임을 강조하고, 신하가 군주에 복종하는 것은 군주의 세력이지 결코 군주의 덕행이나 재능 때문이 아님을 주장했다.
이상과 같은 전국시대의 법가주의 사상을 종합하고 이를 사상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한비자다. 한비자가 죽은 지 15년 후에 전한의 사가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한비는 "형명(刑名)", "법술(法術)"을 좋아했는데 그 돌아감은 황로사상(黃老思想)에 근본한다. 이사와 더불어 함께 순자를 섬기었다”고 기록했다.
한비자는 한나라 공자(公子)로 진시황 때 재상이 된 이사와 함께 순자의 제자로서 성악설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한비자는 유가의 "덕치주의"나 "예교주의"를 배척하고 법치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법치의 기본은 "엄형주의(嚴刑主義)"와 철저한 "신상필벌"을 원칙으로 했다. 군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강한 나라이고 이를 위해서는 강한 군대(强兵)가 필요하고 부국을 위한 농업생산의 발전을 내세워 상업과 공업을 말업(末業)으로 억압했다. 한비자는 法치의 운영 방법으로 術치와 勢치를 함께 사용해야 함을 강조했다. 즉,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고 관리를 부리기 위해서는 '술'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法 , 術 ,勢'는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라고 했다.
한편 한비자는 "형명동참(刑名同參)"이란 용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신하들이 하는 말(名)과 실제의 공로(刑)를 비교하여, 서로 부합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없이 벌을 주어 신하들의 망언이나 악행을 방지하고 그 책임을 분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한비자의 "형명론(刑名論)"은 명가(名家)의 실재론(實在論)과 상통한다.
정치사상
한비자는 정치제도란 반드시 역사적 상황과 함께 변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유가처럼 과거의 낡은 제도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의 풍습은 도덕적 감성이 아니라 그 사회의 경제적 여건에 의해 변화하며, 정치제도는 당연히 이것에 따라 조정되어야 한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은 그 친척에게도 양식을 주지 않지만, 반대로 풍년이 들면 낯선 사람에게도 음식을 대접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인색하거나 관대하기 때문이 아니고 구할 수 있는 양식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자가 풍부했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재물을 가볍게 여겼으나, 인구가 점점 증가하여 물자가 부족하게 되자 사람들은 재물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따라서 군주는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려고 노력하기보다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막도록 해야 한다. 백성들은 이기적이면서도 무엇이 진정 자기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군주는 그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백성들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아서 믿을 것이 못 된다.
유가의 이론에 따르면 덕이 있는 왕만이 다스릴 수 있으며, 덕이 없는 왕은 그 지위를 잃게 된다. 그러나 한비자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통치자의 도덕적 품성이 어떻든 또 그가 어떻게 다스리든 상관없이 권력(그는 이를 愼到의 이론에 따라 勢로 설명했음)을 가졌다는 것은 이에 대한 절대 복종을 요구할 권리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하가 군주에게 복종하며, 아들이 아비에게 복종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변함없는 대원칙 중의 하나이다. 군주가 비록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도 신하는 군주의 자리를 감히 넘보아서는 안 되며, 정치적인 의무는 다른 모든 의무에 우선되어야 한다. 어떤 병졸이 그가 전사하면 부모를 봉양하지 못할까 두려워 싸움터에서 도망쳤다. 한비자는 이에 대해 "효자는 그 군주를 배반하는 신하가 될 수 있다"라고 평했다.
권력은 변덕스럽게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공포하면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만 하는 법(法 : 商의 법 이론을 따름)을 통해 행사되어야 한다(→ 법철학). 현명한 군주는 법에 따라 사람을 고를 뿐 절대 자신의 마음대로 고르지 않는다. 법에 의해 그 대상자의 장점을 평가하고 군주 자신이 판단해서는 안 된다. 군주는 어떤 법을 폐지할 권한은 있으나, 그 법이 살아 있는 한은 군주 자신도 그 법에 따라야 한다. 신하들이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게 하기 위해, 또 그 신하들의 반역을 막기 위해 군주는 술(術 : 申不害의 술 이론 계승)을 써야 한다. 전국시대의 통치자들은 정치·외교 및 전쟁에 능한 사람을 쓰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많은 유세객 속에서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직위를 준 후에 군주는 그가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는가를 감시하여, 의무를 다하지 못하거나 권력을 남용하는 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 군주는 어떤 신하의 제안을 승인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게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결과가 계획에 못 미치거나 또는 목표를 넘어설 때도 벌을 주어야 한다.
한비자는 많은 왕들의 왕권을 잃게 한 반역의 문제에 대해서도 “술”로써 대답했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이해관계는 일치할 수 없다. 위에 있는 자와 밑에 있는 자는 하루에도 100번씩 싸운다. 그러므로 군주는 아무도 믿지 말고 아첨꾼을 경계할 것이며, 누구라도 지나치게 많은 권력이나 세력을 가지게 하지 말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첩자를 이용하여 반역 음모를 적발해내야 한다. 왕권이 확립되고 질서가 제대로 잡힌 뒤에 군주는 무력을 사용하여 영토확장에 나선다. 나라들 사이의 관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나라가 가진 군사력이며, 이는 경제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농업만이 유일한 생산적 일이므로 다른 모든 직업들, 특히 학자의 일 같은 것은 억제되어야 한다. 빈민을 구제하는 것은 어리석고 공평하지 못한 것이다. 부자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빈민을 돕는 것은 부지런하고 검소한 사람의 것을 강탈해서 게으르고 낭비하는 자들을 기쁘게 만드는 것이다.
2. [한비자]의 내용
[한비자]는 한비의 저서로 처음 한자(韓子)라 불렀는데 당(唐)의 한유(韓兪도 한자(韓子)라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송대 이후 한비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비자]는 총 55편으로 총 10만 어로 엮어져 있으며, 논문체 문답체 문장과 설화, 우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은 한비가 저술한 것이나 일부는 그의 후학들이 쓴 것도 있다. 55편 중 한비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몇 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비자의 사상은 "법술론"으로 대표된다. 여기서 '법'이란 법령을 뜻하고, 이 법이야말로 국가통치의 근본이 된다고 강조했다. 법은 백성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며 아무리 평범한 군주라도 법의 운용만 잘 터득하면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술'이란 법을 운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술은 군주의 가슴에 품고 이것 저것을 비교하여 남 몰래 신하를 제어하는 것으로서, 술은 남에게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하의 말이 진실인가를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신하를 실험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말을 하여 속여도 보고 알면서도 모르는 체 시험도 해본다. 이렇게 하여서 신하의 본성을 알아볼 수 있으며 간계를 부리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 [이병(二柄)]편
밝은 임금은 刑과 德 두 대의 손잡이를 잡고 신하를 다스려야 한다. 신하된 자는 벌을 두려워하고 상 타기를 기뻐하는 데 그 원리를 둔다. 여기서 벌이란 刑이요 상이란 德이다. 이 형과 덕의 두 개 손잡이만 있으면 신하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 만약 군주가 상벌의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지 않고 신하에게 맡기게 되면 백성은 그 신하를 두려워하고 군주를 만만히 본다. 이렇게 되면 백성의 인심은 군주에게서 신하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군주는 이 두 개의 손잡이를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된다.
2) [비내(備內)]편
군주는 남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남을 믿으면 자기가 남에게 눌린다. 신하는 위엄있는 기세에 눌려 부득이 명령에 따를 뿐이지 같은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하란 것은 언제나 군주에게 달려들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신하 위에 앉아 편안히 생각하기 때문에 군주의 지위가 위태로워지고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군주가 아들과 아내를 덮어놓고 믿으면 뱃속 검은 신하는 아들이나 아내를 이용하여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아들과 아내까지도 믿어서는 아니 되니 세상에 누구를 믿을 것인가. 나라에서 조칙으로 태자를 봉하면 그 태자를 옹립한 자들은 임금이 일찍 죽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아내란 원래 같은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하면 가까워지고 사랑하지 않으면 멀어진다. 재난은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 의사가 환자의 상처를 빨아내는 것은 육친의 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수레를 갖기 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가 만든 수레를 팔 수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3) [고분(孤憤)]편
중신(重臣)이란 군주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고 법을 무시하고 제 욕심을 채우며 국가의 재산으로 제 배를 채우고 군주를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자다. 그러므로 임금된 자는 중신의 비밀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곧 '術'이다. 한비자는 계속하여 '군주여 눈을 뜨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군주의 눈을 가리는 중신을 제거해야 한다고 [고분]편에서 일깨우고 있다.
4) [설난(說難)]편
의견을 말하기 힘든 것은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내 편의 의견에 맞추기 어려운 데 있다. 진언하는 자는 계획을 비밀히 진행시켜야 성공하며 비밀이 새면 실패한다. 그러므로 군주가 비밀히 계획하는 일에 말이 미치면 그 의견을 말한 이는 몸이 위태롭다. 진언할 때는 그 상대의 의견에 맞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비자는 남을 설득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설난편(說難篇)을 지어 매우 자세하게 설득의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한비 자신은 마침내 진나라에서 비명에 죽게 되어 스스로 그가 말한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5) [오두] • [십과(十過)]편
오두란 다섯 마리의 해충을 말한다.
나라를 좀먹는 다섯 마리의 해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1) 옛 성현을 칭송하며 인의(仁義)를 빌어 차용해 쓰고 복장과 말을 꾸며하는 자.
(2) 거짓말을 꾸며 외국의 힘을 빌어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유세가.
(3) 사재를 모아 유력자에게 아부하며 전사의 공로를 묵살하는 측근자(地緣).
(4) 무리를 모아 의협을 내세우며 그것으로서 이름을 얻으려 하며 국법을 어기는 협객(政治人)
(5) 변변치 못한 그릇을 만들어 팔아서 사치품을 사 모았다가 때를 보아 폭리를 얻고 농민이 애써 얻는 것과 같은 이익을 힘들이지 않고 한 순간 얻는 상인(不勞所得)들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십과란 임금이 몸을 망치는 열 가지의 잘못을 말한다.
(1) 조그만 업적을 세우는 데 정신을 잃는 것
(2) 조그만 이익에 얽매이는 것(小貪大失)
(3) 감정이 나는 대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
(4) 음악에 빠지는 것
(5) 지나친 욕심
(6) 여락(女樂)에 빠지는 것
(7) 본거지를 비워놓고 놀러 다니는 것
(8) 충신의 의견을 듣지 않는 것
(9) 외적인 힘에만 의지하는 것
(10) 힘이 없는 주제에 남에게 무례하게 하는 것.
이상의 열 가지는 임금된 자가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의의 및 영향
유가와 도가 그리고 법가사상을 살펴보면, 비교적 성격이 온화한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노자와 장자의 낭만적 자유주의가 어울리고, 중앙평야의 사람들은 공자와 후학들이 창도한 중용의 인도주의적 교리에 마음이 끌렸으며, 완고한 북방사람들은 법가의 이론과 실천에 집착했다. 법가의 사상가들 중에서도 한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결코 독창적이지 못했지만, 그는 부지런한 학자기질과 날카로운 사색가의 자질을 겸유했고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한비자의 사상은 관료제도를 통한 절대군주 정치와 신상필벌을 통한 엄격한 법의 시행, 그리고 속국의 경제적 자족 등의 특색을 지닌다. 크고 작은 모든 사회적 갈등의 궁극적 해소를 위해 한비자는 '절대국가의 공권력'의 창출을 요청했다. 그는 현명한 군주는 고대사회를 모범 삼아서는 안되며 현실상황을 직시하여 봉건제를 타파하고 관료제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명히 법제와 폭정을 구분하고 형벌로써 형벌을 없애자는 그의 주장은 뛰어난 점이 있다. 부역의 경감을 제창한 것도 빈민들에게는 유리했다.
그러나 상벌만능을 고취시켜 윤리도덕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것은 오류였다. 그리고 통일된 법령에 의해 학술의 발전을 저해하고 인심을 억압한 것은 반문명적이었다. 군주는 최고 입법자이자 또한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공법(公法)"은 사실상 가장 큰 사법(私法)이었다. 그것은 결코 평등이 아니었으며 심각한 불평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군주 전제제도에 대한 한비의 구상은 민중의 희망에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그 주된 목적은 군주의 통치를 보호하고 유지하며 강화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민중의 목숨은 완전히 군주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러한 학설은 중국의 군주 전제제도의 기본형식을 구축했으며 또한 역대 제왕들에게 행위의 기준을 제공했다. 진나라의 정치가 법가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나라 때에는 유가와 법가를 개조하여 양유음법(陽儒陰法)의 통치정책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유가로서 교화를 장악하고 법가로서 관리들을 다스렸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유가의 사상을 제창했으나 현실정치에는 법가의 제도를 실행했다.
이후로도 역대왕조는 기본적으로 이를 계승하고 바꾸지 않았다. 비록 한비자의 이름은 아주 적게 취급되었고, 취급되었을 때도 계속 비판받았으나, 제왕통치와 강화에는 한비자의 사상이 오랫동안 막강하게 존재해 왔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전제제도가 중국역사에 있어 반드시 지나가야만 되었던 길이었다면 이 멀고 긴 길을 가는데 한비자의 정치설계는 커다란 생명력과 재생력을 부여했다.
전국시대에 있어 제자백가가 나와 제각기 천하평정을 외쳤지만,
결국은 한비자의 '형명법술(刑名法術)' 정치가 주효하여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하여 천하통일을 달성하게 된 礎石을 제공하였다고 본다.
3. 한비자의 고사성어
1) 구맹주산 狗猛酒酸
개가 사나우면 술이 시어진다. 한 나라에 간신배가 있으면 어진 신하가 모이지 않음
군주가 위협을 당하며 어질고 정치를 잘 하는 선비가 기용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한비자(韓非子)는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송(宋)나라 사람 중에 술을 파는 자가 있었다. 그는 술을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고 손님들에게도 공손히 대접했으며 항상 양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팔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보다 술이 잘 팔리지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마을 어른 양천에게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양천이 물었다.
"자네 집 개가 사나운가?"
"그렇습니다만, 개가 사납다고 술이 안 팔린다니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사람들이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어떤 사람이 어린 자식을 시켜 호리병에 술을 받아 오라고 했는데 술집 개가 덤벼들어 그 아이를 물었소. 그래서 술이 안 팔리고 맛은 점점 시큼해지는 거요."
이와 같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어진 신하가 아무리 옳은 정책을 군주께 아뢰고자 해도 조정 안에 사나운 간신배가 떡 버티고 있으면 불가능함을 강조한 말이다. [출전] 韓非者 外儲說右
2) 역린 逆麟
임금님의 노여움.
중국에는 용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가 많다.
용은 물론 가상적 동물이지만 봉(鳳), 인(麟), 귀(龜)와 더불어 사령(四靈) 이라 하여 영물로 실재화하여 생각하였다.
용은 특히 비늘 달린 짐승 중 으뜸가는 것으로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몰고 온다고 여겼다. 그리고 군주를 용에 비겨서 용상(龍床)이니 용안(龍顔)이니 하여 그 권위와 존엄성을 높이기도 하였다.
그의 저서「한비자(韓非子)」설난편(說難篇)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용은 상냥한 짐승이다. 가까이 길들이면 탈 수도 있다. 그러나, 턱 밑에는 지름이 한 자나 되는 비늘이 거슬러서 난 것이 하나 있는데, 만일 이것을 건드리게 되면 용은 그 사람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만다. 군주에게도 또한 이런 역린이 있다.”
그러므로, 이 말에 연유하여 군주의 노여움을「역린(逆麟)」이라 한다. [출전] 韓非子 說難篇
3) 장수선무 다전선고
소매가 길면 춤추기가 수월하고 재물이 많으면 장사를 잘 한다는 뜻으로 조건이 좋은 사람이 성공하기도 쉽다는 말의 비유. (長袖善舞多錢善賈)
비언에 말하기를 鄙諺曰(비언왈)
긴소매는 춤을 잘 추고 長袖善舞(장수선무)
재물이 많으면 장사를 잘한다. 多錢善賈(다전선고)
이는 자본이 풍부하면 공업에 쉬움을 말한다. 比言多資之易爲工也(비언다자지역위공야)
따라서 다스림에 있어서 강하면 도모하기 쉽고 故治强易爲謨(고치강역위모)
약하고 어지러우면 계획하기가 힘들다. 弱亂難爲計(약난난위계) [출전] 한비자(韓非子)
4) 노마지지(老馬之智). 늙은 말의 지혜란 뜻으로 하찮은 인간일지라도 나름대로의 경험과 지혜가 있음을 비유한 말. 성인의 지혜를 소중히 여길 것을 말함. -한비자
춘추 시대, 오패의 한 사람이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 재위 B.C.685∼643) 때의 일이다. 어느 해 봄, 환공은 명재상 관중(管仲:?∼B.C.645)과 대부 습붕(柝朋)을 데리고 고죽국[孤竹國:하북성(河北省) 내]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런데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그 해 겨울에야 끝이 났다. 그래서 혹한 속에 지름길을 찾아 귀국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全軍)이 진퇴 양난(進 退兩難)에 빠져 떨고 있을 때 관중이 말했다.
"이런 때 '늙은 말의 지혜[老馬之智]'가 필요하다."
즉시 늙은 말 한 마리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전군이 그 뒤를 따라 행군한 지 얼마 안 되어 큰길이 나타났다. 또 한번은 산길을 행군하다가 식수가 떨어져 전군이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습붕(柝朋)이 말했다.
"개미란 원래 여름엔 산 북쪽에 집을 짓지만 겨울엔 산 남쪽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산다. 흙이 한 치[一寸]쯤 쌓인 개미집이 있으면 그 땅 속 일곱 자쯤 되는 곳에 물이 있는 법이다."
군사들이 산을 뒤져 개미집을 찾은 다음 그곳을 파 내려가자 과연 샘물이 솟아났다. 이 이야기에 이어 한비자(韓非子:韓非, ?∼B.C.233)는 그의 저서《한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관중의 총명과 습붕의 지혜로도 모르는 것은 늙은 말과 개미를 스승으로 삼아 배웠다.
5) 견마난(犬馬難): 개나 말을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 개나 말은 누구나 보아서 쉽게 알 수 있으므로 이것을 잘 그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귀신이나 도깨비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그려도 사람들은 그런가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기가 쉽다. -한비자
6) 고택지사(枯澤之蛇): 물이 말라 없어진 못에 있는 뱀. 남의 위력을 빌어 자기의 위력을 부리려고 하는 것. -한비자
7) 모순(矛盾): 창과 방패라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을 뜻하는 말. -한비자
8) 백성이 굶주리면 전쟁이 일어난다. 백성이 고달파서 병이 되면 전쟁이 일어난다. 백성이 너무 노고에 시달려도 전쟁이 일어난다. 민심이 흩어지면 전쟁이 일어난다. 진(秦) 나라 강공(康公)에게 신하 임망(任妄)이 간한 말. -한비자
9) 사람을 등용하는데 자기의 일족이라고 해서 사양할 필요도 없거니와, 또는 원수라고 해서 그것을 피할 필요도 없다. 모두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발탁해서 써야 한다. -한비자
10) 쇠뇌의 힘이 약해도 화살이 높이나는 것은 바람의 세력을 타기 때문이다. 세력의 힘을 주장한 신도(愼到)의 말. -한비자
11) 약은 지식을 쓰고 있으면 세상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런 지식은 버리는 것이 좋다. 약고 영리함이 있으면 오히려 실적이 오르지 않는다. 이것도 버려야 할 일이다. 또 필부의 용기 같은 것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런 용기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대용(大勇)이 나타나는 것이다. -한비자
12) 예의가 지나친 사람은 속마음이 쇠(衰)한다(예의도 지나치면 아첨이 된다). -한비자
13) 임금된 자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밖으로 나타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랫사람들이 여기에 영합하기 때문이다. 그 좋아하는 것을 멀리하고 싫어하는 것도 멀리할 때 비로소 신하된 사람들은 자기 본심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한비자
14) 집에 일정한 가업이 있으면 비록 기근을 당해도 굶는 일은 없다. 한비자(韓非子)가 인용한 고어. -한비자
4. 리더의 조건과 국가운영방법
1)개혁자 - 용의 등에 올라타라 '리더는 기득권을 꺽기위해 모든것을 건다.
2)문제해결자 - 움직이며 생각하라. '리더는 대안없는 비판대신 문제 해결에 집중한다.
3)조직자 - 억센 말을 붙잡아 고삐를 채우다. '리더는 부하의 충성심에 의지하지 않고, 냉철하게 움직인다.'
4)집행자 - 사랑과 미움을 넘다. '리더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냉철하게 움직인다.'
5)경청자 - 자기를 버려 꾀를 빌리라
'리더는 스스로 나서지 않고, 주위에 인재를 배치한다.'
6)방향탐지자 - 무리를 이끌어 어둠을 건너라 '리더는 어떤 상황에도 길을 잃지 않는다.'
7)무한책임자 - 홀로의 외로움을 이겨낸다. 리더는마지막까지 책임을 진다.
국가를 안전하게 하는 방법은,
첫째 상과 벌은 옳고 그른 것에 따라 주어야 한다.
둘째 화와 복은 선과 악에 따라 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셋째 죽이고 살리는 것은 법령에 따라서 시행해야 한다.
넷째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그가 현명한 사람인가 불초한 사람인가를 살필 뿐이고
사랑하고 미워함을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그가 어리석은 사람인지 슬기로운 사람인지 실증을 가지고 살필 뿐이고 남의 비방이나 칭찬에 끌리지 말아야 한다.
여섯째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하지 말아야 한다.
일곱째 믿음성이 있고 속임수가 없어야 한다.
국가를 위태한 데로 몰아넣는 길은
첫째 법을 안으로 굽혀서 일을 처리하는 것,
둘째 법을 법 밖으로 확대하여 처리하는 것,
셋째 남의 해를 자신의 이로 삼는 것,
넷째 남의 화난을 즐거워하는 것,
다섯째 남의 편안한 것을 위태하도록 만드는 것,
여섯째 사랑해야 할 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미워해야 할 자를 멀리하지 않는 것이다.
5. 한비자의 유언
“모르면서 말 하는 것은 무지요.
알면서도 말 하지 않는 것은 불충이다.
신뢰에 목숨으로 이름을 새길 수 있을 때가 지극한 삶!
어렵고 난해한 문제의 해답은 순리와 진실 뿐이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얻고 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를 이룬다.
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말 것이며
배수진에 버티고 서서
적을 기다리는 당신답게 행동하라.
실정을 인식하여 행동으로 옮길 때
순간에 이루어지는 승리가 피를 멎게 하고
죽어야 사는 이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럼 현대판으로 한 번 바꿔보면,
“모르면서 말하는 것은 더 큰 화를 부르는데,
모르면서도 말하기에 바쁘니 이는 무지고,
알면서 말하지 않는 것 역시 화를 부르는데,
알면서도 감추기에 바쁘니 역시 무지로다.
모름지기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삶을 살되,
다른 것이 아니라 신뢰를 목숨으로 갚는 삶이여야 한다.
살면서 복잡고 난해한 문제를 만날 때는,
거스름 없이 소신껏 진실하게 살면 거리낌이 없겠다.
크고 영원한 것을 위해서는 작고 순간적인 것을 버려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도망치지 않고 작은 것을 죽여야 하며,
스스로의 주체성을 인식하고 이익에 급급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이치를 알고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더 큰 화를 막고 참된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모르면서 말 하는 것은 무지요.
모른다는 것 자체가 무지인데, 한비자는 그 상태로 말하는 것도 무지라고 했습니다.
결국 모르면서 말을 하게 되면 어떤 사태를 초래하는데,
그 사태를 유발시킬 것을 알지 못하고 말을 하게 되니 바로 그것이 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정직과 신념을 지키라는 가르침보다는,
대충 말했다가 나중에 진실이 들통나면 큰 망신을 당하고,
또 잘못된 이야기로 자신이나 상대방이 큰 화를 입을 수 있을 수 있음을 경고하는 문장으로 보입니다.
정리하면 지금 당장 잘난 척 하거나 어물쩡 넘어가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면,
나중에 수십 배 큰 망신이나 화로 돌아오기 마련이니 그냥 바른대로 말하라는 문장입니다.
이는 말에서만 해당되지 않고 일상생활의 모든 '정正'으로 일반화시킬 수 있습니다.
욕심 내고, 거짓말 하고, 도둑질 하고, 싸우고,
지금 작은 탐욕과 바르지 못한 것들을 행하게 되면 나중에 더 불려져서 돌아오는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순간에 집착하니,
그래서 '모르면서 말 하는 것은 무지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유언이 '크게 보고 멀리 보라'는 의미이다.
2)알면서도 말 하지 않는 것은 불충이다.
이는 당시 시대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듯 합니다.
아는 건 둘째치고, 말 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봅시다.
누구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불충이란 말일까요.
불충이라고 했으니 대상이 군주일 때와 불특정다수일 때로 나누어 생각하기로 하지요.
신하가 군주에게 알고 있는 것을 왜 숨기면 안 될까요.
우리는 이를 '사사롭다'라고 부릅니다.
신하가 군주의 안위를 염려해 보고하지 않고 알아서 일을 처리할 때 화평이 깨집니다.
이런 귀찮은 일까지 전하가 신경쓰시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알아서 처리해야겠다,
신하된 자로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조정의 질서가 유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신하가 숨기는 것이 있으면 왕의 의심을 사기 마련입니다.
의심이 있는 관계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오륜에도 어긋납니다.
따라서 의심을 사서 화평을 깨지 않으려면 신하된 자로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해석입니다.
신하의 첫 번째 자세가 사사로이 일을 처리하지 않는 것이라면,
두 번째 자세는 임금의 정사가 정도를 걷지 않을 때 충신으로써 간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왕이 잘못된 길을 가는 걸 알면서도 제 안위를 염려해 몸을 사려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일신의 부귀에 집착해서 온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망하니,
이도 순간의 이익을 따르면 나중에 더 큰 화를 부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 정직과 신념과는 무관한 일이며,
실제적으로 신하가 왕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이치로부터 나오게 된 말입니다.
셋째로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밀을 가짐입니다.
비밀을 있기 전에는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것'이었지만,
비밀이 있고서부터는 '나는 알지만 너는 모르는 것'으로써 차이가 생깁니다.
너와 나가 구분지어지고 경계가 생김으로써 인간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것이 비밀입니다.
물론 숨겨서 좋은 비밀도 많겠습니다만,
나중에 비밀을 숨겼던 대상이 내가 비밀을 가졌었다는 걸 알게 되고,
'너 그때 왜 나에게 말 안해줬어'라는 식으로 싸움이 일어나고 반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싸움의 근원이니 그냥 털어놓으고 해석할수도 있습니다.
3)신뢰에 목숨으로 이름을 새길 수 있을 때가 지극한 삶!
지극한 삶이라는 것은 이 경우 아름답고 훌륭한 삶이라고 받아들이면 되겠네요.
'극'이라는 말 자체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신뢰에 목숨으로'와 '이름을 새기다'라고 쪼개서 해석하는게 편합니다.
우선 한비자는 '사내라면 모름지기 역사에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자기 이름이 후세로 전해지는 것을 더없는 영예로 여기는 가치관과 동일합니다.
다만 한비자는 '어떤 업적으로' 역사에 남는 것이 바람직하냐고 구체적인 질문으로 들어가서,
그것은 전쟁에서 이기고 나라를 건국하고 높은 벼슬에 이겨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신뢰에 목숨으로'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뢰에 목숨으로 답한다는 것은 먼저 신뢰가 와야 가능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신뢰를 보내올 때 이를 목숨으로 대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신뢰를 보내오는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왕입니다.
왕이 자신을 신임할 경우 그 신뢰에 대한 답으로 목숨 잃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얘기지요.
앞 부분이 다소 구체적이고 실학적인 측면이 있었다면,
이 문장은 주로 가치관을 포함해서 '신뢰'의 가치를 높게 치는 데 주력하고 있는 듯 합니다.
주의할 점은 신뢰는 감정인데 목숨은 실천이라는 점입니다.
신뢰엔 신뢰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답하라는 거지요.
이는 현대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르침으로써,
상대가 아플 때 말로 괜찮냐고 하지 말고 죽 한 그릇 사들고 찾아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생일에 말로 축하한다고 하지 말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걸 선물하라는 말입니다.
아무 관계도 없는 사이에 먼저 신뢰를 보내온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자기에게 오는 신뢰에 신뢰로 답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신뢰에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써 상대방을 유익하게 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의 신뢰를 모른 체 해서는 안 됨은 물론입니다.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취급하는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기 마련인데,
하늘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이 자연 그에게서 멀어진다는 이치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신뢰에 답해주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은 사귀어도 소용없겠구나'하고 떠난다는 가르침이지요.
그런데 목숨으로 답하게 되면 오히려 사람들이 곁으로 모이기 마련입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지요.
4)어렵고 난해한 문제의 해답은 순리와 진실 뿐이다.
순리는 자연의 이치를 따름을 말함이고,
진실은 있는 그대로를 숨기지 않고 내보임을 말함입니다.
여기서 순리는 그릇됨 없이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무리 어렵고 난해한 문제라 하더라도,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고 아는 것만 말하며 소신껏 순리에 따라 행동하면,
후에 문제나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얘기지요.
그냥 '사필귀정' 이나 '정의는 승리한다'로 이해하시면 될 듯 합니다.
5)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얻고 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를 이룬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 것을 취하자면 작은 것을 희생해야 된다는 얘기지요.
눈 앞의 작은 이익에 집착하면 큰 이익을 놓친다는 이치입니다.
폐쇄적 민족주의나 전체주의에서 흔히 나타나는 사고로써,
전체를 위해서는 작은 것이 희생해도 괜찮다는 논리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괜찮다기보다는 필요악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텐데요.
이 역시도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꽃을 버려야 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즉, 신하들이 개인의 영달을 우선 포기해야 대업을 이룬다고 할 수 있지요.
수많은 강들이 강이기를 포기하고 흘러 바다가 될 경우 '대동'이 됩니다.
유언을 꿰뚫는 '크게 보고 멀리 보라'는 가르침을 되새겨 볼 만하다다.
6)우리가 누구인지 잊지 말 것이며
나라를 팔아먹는다던가, 가족을 팔아먹는다던가,
주체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이익에 따라서 움직이지 말라는 얘깁니다.
또한 여기서는 말의 끝이 '말라'가 아니라 '말 것이며'로 끝나는데,
이는 뒤에 나오는 문장의 단서로 작용합니다.
이 경우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책임과 의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지요.
7)배수진에 버티고 서서 적을 기다리는 당신답게 행동하라.
책임과 의무를 알기 때문에 도망쳐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의지를 굳게 다지기 위해서 배수진에 버티고 설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사료를 보면 전투에서 배수진을 칠 경우 극적으로 승리한 사례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잊지 않는다면 전쟁에서 도망쳐서는 안되며,
오히려 배수진에 버티고 서서 의연하게 사기를 가다듬어야 한다는 가르침인 듯 합니다.
여기서 단순히 전쟁으로 파악하지 않고 '인간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고민이나 화두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삶의 고통과 맞서 싸우라는 의미로 말이지요.
이 경우, 6)의 주체성은 자연히 의무나 필요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으로써의 자각을 뜻합니다.
나의 삶을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대적하라는 가르침은,
세상을 살아가는 주체는 나 자신이며 내 인생의 주인은 고통이 아닌 나 자신이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주체로써 지배할 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핵심입니다.
8)실정을 인식하여 행동으로 옮길 때 순간에 이루어지는 승리가 피를 멎게 하고
'실정을 인식하는 것→행동으로 옮기는 것'
이는 유가의 '수기와 안인'과도 상통합니다.
“실정을 인식한다”는 것은 세상의 흐름과 논리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을 말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그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맥락을 고려했을 때, 실정을 인식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모든 이치를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작은 것에 집착하면 큰 것을 잃고 순간에 집착하면 뒤의 것을 잃는다는 이치가 그것이지요.
열매를 피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꽃이 져야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실정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강을 버리고 꽃을 버리라는 말이겠지요.
알았으면 작은 것과 순간적인 것을 희생함으로써 보다 크고 영원한 것을 취하라는 말입니다.
이를 통한 순간의 승리가 더 크고 많은 피를 막아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논리는 희생의 논리로 둔갑하기 쉽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한비자는 '실정을 인식하여'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실제로 그것이 이 순간 희생해야 할 것인지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를 인식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발적인 실천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실정의 인식과 행동의 실천은 한 몸이며 어느 하나를 떼어놓고는 성립이 불가능합니다.
9)죽어야 사는 이치를 알게 될 것이다.
생즉사 사즉생,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이는 너무나 잘 알려져 따로 해석을 붙이기도 참 민망한 말입니다만,
이 경우는 전쟁만이 아닌 윤리관과 인간관 까지도 포함하니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중간에 '크게, 멀리보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씀드렸는데,
한비자의 유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크고 영원한 것을 위한 작고 순간적인 것의 희생'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죽어야 사는 이치란 단순히 이를 악물고 싸워야 이긴다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순간적인 내가 죽어야 진실하고 참된 내가 태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나며,
이를 기독교에서는 성령을 통해 몸나에서 참나로 거듭나는 과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많은 사상과 가르침에서 기존의 자신을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라는 이치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죽어야 사는 이치란 작은 것이 죽어야 큰 것이 산다는 이치이기도 하고,
기존의 내가 죽어야 참된 내가 태어난다는 이치이기도 합니다.
“한비자리더쉽” 에서
성격유형이 주도형인 경우 의사소통 과정에서 타 유형에 대해 어떻게 응대해야 하는지 쓰시오.
1. 주도형은 전체적인 업무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이끌어가거나 통제하는 일에 뛰어난 리더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구성원들의 생각을 잘 이끌어내고 활용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주도형의 특징은 도전적이고 독립심이 강하고 자신감, 결단력, 모험심 및 책임감이 있는 반면, 고집이 세고 타인의 배려가 적으며 무모하고 거칠면서 참을성이 적은 단점이 있다.
따라서 의사소통은 개인 혹은 조직간 서로의 생각이나 강점을 소통하는 것으로서, 주도형의 단점을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상사와 부하간 의사소통, 조직내 업무기능간 의사소통을 통하여 팀의 업무를 원활하게 추진을 하여야 한다.
주도형의 단점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은 적극적 경청이라 할 수 있다.
올바른 의사소통을 위해서 I메시지법과 피드백 기술을 사용하고 대화하여야 한다.
상대방의 성격유형(주도형, 표현형(감정형), 수용형(안정형), 신중형)을 감안해서 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표현형은 끈임없는 변화를 추구하고 자기신념과 원칙으로 구성원을 이끌고 너무 감성적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3. 신중형은 내향적이고 이성적인 단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적정한 시점에 필요한 의사결정을 하여야 한다.
4. 수용형은 마음과 귀를 열고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우유부단한 단점을 해소하고 중요한 시기에 결단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현대의, “리더는 經營者이며 구성원들을 통하여 成果를 創出시키는 사람이다."
현대의 리더(leader)는 “사랑”의 바탕 위에 共感帶와 配慮를 몸소 實踐하는 “서비스리더”로서,
“팀웍을 발전시키고 조직에 활력을 불어 넣으며 팀원들이 自發的이고 能動的으로 일하게 만드는 經營者”라고 定義하고 싶다.
배려는 상대와 눈높이를 함께 해주는 것.
공감은 내가 그에게 다가가 함께하는 것.
사랑은 단 한 사람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라도 찾으로 나가는 목동의 마음같은 내리사랑을 말한다. (아가폐적 사랑)
3. 진시황
1. 生涯
진시황제(중국어: 秦始皇帝, 병음: Qín Shǐ Huáng Dì,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는 진나라의 제31대 왕이며,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이름은 영정(嬴政)이며, 조나라에서 출생하였기에 조정(趙政)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사건을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목차
가. 초기 생애 / 나. 여불위와의 분쟁 / 다. 중국 통일 과정 / 라. 최초의 황제
마.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사 / 바. 불로장생의 꿈 / 사. 전국 순행
아. 병마용(시황릉) / 자. 진시황의 죽음
가. 초기 생애
영정은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공자 영자초와 그 부인 조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다. 여불위는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영자초는 조희를 아내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원래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영자초에게 바쳤다는 설도 있다.
어쨌건, 영정은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나,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기원전 250년, 영정의 증조부인 소양왕 영직이 동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소양왕은 얼마 후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효문왕 영주가 즉위했다. 이에 영자초는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효문왕은 즉위한 지 1년 뒤에 사망하고, 태자 영자초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이다.
영정은 곧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이 훙서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왕에 즉위하였다. 정은 6국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으며 뒤에 호랑(虎狼)이라 불리운 진시황이 되었다.
나. 여불위와의 분쟁
영정은 왕위에 올랐으나,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기에, 아버지때에 승상이 된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둘렀으며, 심지어는 영정의 모친 조태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한다. 이에 여불위는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처럼 꾸며 조씨의 처소로 보냈고, 조씨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에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38년에 영정은 성인식으로 잠시 함양을 비우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영정은 곧바로 군사를 파견하여 노애를 능지처참에 처하고 어머니 조씨를 감금하였다. 또한 노애와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2명을 환관에게 시켜 목을 졸라 살해하였다.
그리고, 영정은 여불위를 승상의 자리에서 내치고, 자결을 강요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에 여불위는 결국 자결하였으며 영정은 비로소 친정을 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다. 중국 통일 과정
기원전 230년부터 영정은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한 통일 작업을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진나라는 가장 세가 약했던 한나라부터 멸망시켰다.
기원전 228년에는 조나라까지 멸망시켰다. 그 때, 연나라의 태자 희단이 자객 형가를 시켜 잔치자리에서 영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라, 기원전 223년에는 진나라 다음으로 세가 가장 세었던 초나라, 기원전 222년에는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영정의 나이 39세에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하였다.
라. 최초의 황제
영정은 왕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다. 그리고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였고, 자신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황제로 시작하여,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천만세까지 이어 나가도록 하자는 원대한 꿈을 품었지만, 겨우 2세에 이르러 멸망당해 15년의 짧은 왕조로 끝나버렸다.
진시황제 영정은 승상 이사의 의견을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었다. 또한, 모든 결재는 자신이 직접 챙겼으며,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다. 시황제는 남쪽으로도 군사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신설 하였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중국을 위협하자, 대장군 몽염을 변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정벌, 내몽고의 땅 일부도 편입시켰다.
마.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사
기원전 213년, 어느 연회 때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사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이 때,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올렸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수상한 학자가 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학자들은 모두 자기가 아니라며 잡아뗐으나 시황제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니, 그 수가 460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이다. 그리고 이를 모두 합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렀다.
이에 분개한 황태자 부소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부소는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이 있는 국경 근교로 쫓겨났다.
한편 통일 천하를 이룬 진시황에게도 계속 부담을 주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흉노족이었다. 그래서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 국경에 거대한 장성을 쌓도록 하고 몽염장군에게 30만 병사를 주어 그 임무를 맡도록 했다. 몽염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요새를 구축했으며, 그리하여 10여년만에 임조(臨兆)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는 총 길이 1만여 리의 대장성을 완성하였다. 이 공사를 위하여 30만 명의 군사 아닌 잡역부들이 동원되어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 했으며 몽염 자신도 10여 년 동안 밖을 나오지 못했다. 이 대공사는 백성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렇게 무리한 사업이 원인이 되어 진나라에서는 각 지방에 반란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후에 진나라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진승·오광의 난도 사실은 만리장성을 쌓은 고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아방궁의 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약700m, 남북의 길이가 115m로서 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는 약 11.5m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만큼이나 높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곧바로 남산으로 통하는 고가도로를 만들었으며 수위를 건너 함양으로 연결되는 복도도 만들었다.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법을 매우 엄히 하여 백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친족을 몰살시켰고, 나아가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의 모든 가구들도 그에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죄인들의 행렬이 즐비했다 전해진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아방궁이 완성되기도 전에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바. 불로장생의 꿈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진시황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황제는 자신이 무병장수 불로장생하길 간절히 빌었다. 그리하여, 전국의 명산에 방사들을 보내 불로장생의 약을 얻으려 하였으나 없었다. 그리하여 죽으면서까지 그 약에 매우 집착을 하였는데, 그 중 서복이라는 사람이 시황제에게 왜국에 그 약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시황제는 많은 돈을 서복에게 내주고 왜국으로 가 어서 그 약을 가져오라 명했다. 하지만, 몇 년이 다 되도록 그 약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시황제는 서복에게 독촉을 했고, 서복은 소년소녀 3000명을 데리고 왜국으로 건너가 다시는 진나라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 전국 순행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다섯 차례씩이나 전국 곳곳을 순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때에 많은 협객이 폭군 시황제를 죽이려 하였다. 그리하여 시황제는 순행 시, 언제나 5개의 수레를 군사들이 호위토록 하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에 탔다. 시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협객을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시황제는 길가에 자신의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도 했다.
<사기(史記)>에는 아니지만 다른 사료 등에 나와 있는 이야기에 의하면 금릉(金陵;지금의 남경)에 갔을 때 역시 방사(方士)였겠지만 '이 근방에는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왕기' 즉 왕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은 그 지방에서 왕이 나온다는 것이다. 왕은 나 혼자면 충분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왕이 나온다는 것은 자기를 대신하는 자가 이 지방에서 나올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지방의 기맥에 의한 것이므로 기맥을 단절해야겠다고 시황제는 산을 파서 무너뜨렸다. '연강굴단(連岡掘斷;연속되어 있는 언덕을 잘라 버림)'해 버리면 왕기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장소는 진회(秦淮)라고 일컬어지며 지금도 남아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수로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리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그것은 인공의 하천이 아니고 자연의 하천이라고도 한다. 금릉은 한 때 삼국 시대까지 말릉(枺陵)으로 불리었다.
이렇게 시황제는 거의 온 중국 대륙을 돌아다녀 자신이 성공한 군주임을 천하에 과시하였다. 사실 진시황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강력한 추진력으로 역사상 가장 거대한 통일 국가를 실현시켰던 것이다. 진시황의 왕성했던 정력은 대단해서 하루에 1석(약30kg)의 서류를 결재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시찰만 해도 통일 후 다섯 번이나 강행군하였다. 교통편도 변변치 못했던 그 시대에 중국 대륙을 다섯 번 시찰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 할 것이다.
아. 병마용(시황릉)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 진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이 능묘는 1974년 우물공사를 하면서 부장품인 병용(군사모양의 인형)과 더불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 중이다.
진시황은 죽음을 그렇게 피하려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열세살 즉위할 때부터 자기가 죽어서 들어갈 묘자리를 파고 있었다.
시황릉(일명 여산릉)은 높이가 116m, 주위의 길이가 2.5m, 사방이 각각 600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로 무려 70여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어 공사를 했다. 관은 동으로 주조하였으며 무덤 내부는 궁전과 누각 등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리고 수은으로 황하, 양자강 및 바다를 본 떠 만들고 수은을 계속 흐르게 하였으며 천장에는 진주로 아로 새긴 해와 달과 별들이 반짝이게 하여 지상의 세계를 그대로 펼쳐 보이도록 했다. 아울러 고래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조명시설도 해놓았다. 또한 내부에는 활을 설치하여 도굴자가 침입할 때는 즉시 자동 발사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진시황이 죽어 시황릉에 매장되게 되자 후궁들도 모조리 생매장되었으며 매장 직후에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능 안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어 매장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서 생죽음을 당하도록 하였으며 무덤 위에는 나무를 심어 산처럼 보이도록 위장하였다. 또한 무덤 안에는 진시황을 모시는 시중과 신하 그리고 호위병과 군마 등 수만개의 도용을 배치하였으며 심지어 산채로 끊는 구리물을 뒤집어 씌워 만든 것도 있었다.
사. 진시황의 죽음
시황제 37년 10월(기원전 210년), 황제는 다섯 번째 지방 시찰에 나서 회계산에 다녀오는 길에 해안을 끼고 북상하고 있었다. 황제의 시찰에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가 수행하였으며 조고가 옥새를 관리하는 일을 겸임하고 있었다. 시황제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맏아들 부소(扶蘇)는 황제가 하는 일에 여러번 반대한 적이 있어 멀리 북쪽의 상군 지방으로 쫓겨나 변경 지방의 군대를 감독하고 있었다. 당시 상군 지방의 군사를 지휘했던 사람은 명장 몽염이었다. 한편 시황제는 작은 아들 호해(胡亥)를 귀여워하여 이번 시찰에도 아들 중 유일하게 동행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시황제가 사구 지방에 이르자 갑자기 병이 깊어져 위독하게 되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자 그래도 믿을 건 장남뿐이었든지 황제는 조고를 시켜 맏아들 부소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편지는 봉해졌으나 사자를 보내기도 전에 황제는 죽고 말았다. 황제의 편지는 옥새와 함께 조고가 쥐게 되었다.
시황제의 죽음은 일체 비밀에 부쳐졌으며 오직 호해와 이사, 조고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사는 여행 중에 황제가 죽었고 또 태자도 정식으로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죽음을 발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비밀에 부치게 했던 것이다. 유해는 수레에 안치된 채 시찰이 계속되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신하가 정사를 아뢰고 황제의 수라상도 올려졌다. 결재도 수레 안에 있는 환관이 수행하였다.
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210년에 시황제는 마지막 순행에서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그 운석에 누군가가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즉,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고 써놓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시황제는 사구 지방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해졌으며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 하고 그 내용은 옥새를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하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 명하였다.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으며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황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부소는 자결하였으나 몽염은 이 명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체포당해 압송된 후 처형당했다. 얼마 뒤, 시황제의 26남 호해는 황제에 오르니 그가 진 이세황제이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써, 군현제도를 확립한 절대적 왕권 중심의 통치자였다. 진나라 멸망이후에도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 모두 채택한 탁월한 행정제도 였다. 후대의 관점에서 진시황을 보는 시각은 다분히 여러 면이 부각되지만 가장 많이 얘기 되어지는 면은 불로장생을 꿈꾸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방궁과 시황릉을 세우고, 분서갱유를 일으킨 유례없는 독재자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진시황의 진면목이 많이 가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시황은 중국 전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각 군에 황제가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해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꾀하였으며, 동시에 도량형, 화폐, 거궤, 문자를 통일하는 등 사회, 경제, 문화제도까지 정비 통합하였다. 이렇듯 강력한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7국으로 병립해 있던 전국시대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적 개편을 단행함으로써 중앙집권 대제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마도 탁월한 합리주의자이자 가능주의자인 시황제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대업적을 단기간에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시황은 극단적인 합리성과 동시에 극단적인 비합리성이 기묘한 형태로 어우러져서, 아주 꼼꼼하게 정무에 힘쓰는 반면에, 거대건축을 세우거나 선약찾기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 부어 부질없이 낭비를 거듭하는 양극단을 오고 가는 극과 극의 이중성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秦始皇(진시황)의 업적
진시황제는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업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국역사상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통일제국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폭군으로 부각되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전국 7웅에 의해 분열되어 서로 각축을 벌일 때는 기원전 259년에 태어난 그는 불과 13세의 어린 나이에 진왕에 즉위하였으나 親政(친정)에 들어가 본격적인 영토 확장작업에 착수한 것은 23세 때였다. 놀랍게도 그의 통일사업은 기원전 230년부터 221년까지는 아주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기원전 8세기부터 분열된 중국이 하나의 통치체제 밑에서 역사를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그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황제라는 존호를 최초로 제정하고 二世(이세)나 三世(삼세)는 물론 萬世(만세)까지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스스로 始皇帝(시황제)라 칭했다. 또한 전국을 하나의 통치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해 郡縣(군현)제도를 실시했다.
황제를 정점으로 西周(서주)(기원전 1122-1771)시대의 봉건체제를 대신하게 됐다. 이후 중국은 2천년 이상 군현제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不老長生(불로장생)에 대한 집착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영원하기를 원하듯 통일제국이 영구히 존속하도록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집념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가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얼마 못되어, 진제국의 長壽(장수)도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왜 진이 이렇듯 단명하고 말았는가? 우선 통일과업을 완성시킨 진시황제가 사망한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뒤를 이었던 泰二世(태이세)황제는 정통성 시비에 말려들기도 했다.
더욱이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은 탄생했지만, 아직도 봉건제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세월을 거쳐 중국은 봉건적인 정치질서에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전환해왔다. 또한 통일후 진은 전국시대에 서로 자웅을 겨루던 나머지 6국의 지배층 1만호를 강제로 수도 咸陽(함양)으로 이주시켜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제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결국 진제국 말기 지방 토호와 6국의 귀족세력이 전국각지에서 봉기하여 진왕조를 전복시켰다.
진시황제부터 시작된 무리한 토목공사도 진의 단명을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인공위성에서 욱안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1만2천7백리의 만리장성, 사치의 상징으로 거명되는 길이 6백90m, 폭 1백14m의 아방궁, 무수한 호화유적을 남긴 진시황제 무덤(높이 약 70여m, 동서 약 6백m, 남북 2백여m), 그 외에도 무수한 건축물이 조성됐다. 당연히 이를 위해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어, 통일된 후에는 세부담이 무려 20배로 늘었다고 백성들이 불평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국토나 도량형, 문자 따위의 통일 뿐 아니라 사상의 통일까지 이루려고 했던 진은 결국「통일작업」의 무리한 추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단명을 초래했다. 焚書坑儒(분서갱유)야말로 사상통제가 낳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모두 4백60여명의 선비를 생체로 매장하여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식인들을 단숨에 제거했다. 또한 진나라 외에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는 물론, 농업 등 실용적인 목적을 지닌 책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 책을 불사르는 문명파괴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는 지식분자, 특히 유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는 중국은 물론 동양문화 전체에 너무나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업되는 최초의 선례가 됐던 셈이다. 이로 말미암아 동양인은 전통적으로 획일적인 사고에 길들여졌으며,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중국인은 물론 동양인 전체가 다원화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다.
진시황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괴물(怪物)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현재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대륙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중국(中國)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전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중국이라는 단어는 단지 '나라의 중앙' 또는 '수도'라는 뜻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대륙 통일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같은 나라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대륙의 사람들에게 생겨났다. 그로 인해 삼국(三國) 분립시대나 남북조((南北) 분열시대의 중국인들은 이것은 이상사태(異常事態)다. 언젠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던 것이다. 창작으로 가공할 괴물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대사업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 처음으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쓰다
'황제' 라는 말은 영어로 emperor라고 한다. emperor는 로마 제국의 황제 emperialt에서 유래된 말이나 '皇帝' 라는 두 개의 한자로 칭호를 최초로 쓴 사람은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 시황제의 시대, '전국칠웅(戰國七雄;중국 전국시대의 일곱 제후)' 이라고 해서 중국에는 일곱 개의 강국이 있었고, 진(秦)은 그 중의 한 나라였다. 시황제는 나머지 여섯 개 나라를 잇따라 멸망시켰는데 BC 221년에 최후까지 남아 있던 산동(山東) 반도의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비로소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진시황은 태황의 태(泰)를 떼어내고 황(皇)만을 취하고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오제(五帝)에서 제(帝)를 택해서 '황제'로 칭하기로 했던 것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란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것으로 삼황(三皇)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복희(伏羲)씨, 여와(女蝸)씨, 신농(神農)씨 세 사람의 지도자를 말한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 왕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친 왕으로 전해진다. 오제(五帝)는 황제, 전욱, 곡, 요, 순이라는 다섯 사람의 성군을 가리킨다. 따라서 '황제'라는 말에는 진시황 자신이 3황 5제의 덕을 겸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 동문(同文)--문자의 통일
진시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제정했는데, 그 중에서도 누구의 생각에나 쉽게 떠오르는 것은 '동문(同文;문(文)을 같이 하는 것)' 즉 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다. 전국시대의 7웅은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었다. 그 근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자체(字體)가 달랐고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소전(小篆)이란 글자의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을 폐지시켰다. 그 폐지된 문자를 육국문자(六國文字)라고 부른다. 이 육국문자는 분서(焚書;죽간(竹簡)등의 책을 불태운 사건)으로 소멸되었다. 진시황제의 사후에 항우(項羽)가 함양(咸陽)으로 들어왔을 때 문서들을 버렸기 때문에 사료(史料)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그러나 가끔 지하에서 특히 사막에서 출토되는 인장에서 이 육국문자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인장이 돌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며 그 당시는 모두 금속을 썼다. 훌륭한 사람은 금, 그 다음 사람은 은이나 구리를 썼다. 이것을 끈으로 매서 목에 걸었다. 전쟁시에는 이것이 인식표(認識票) 역할을 했다. 전사한 유체(遺體)를 판별할 수 없을 때에는 목에 걸었거나, 혹은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금속의 인장에 의해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 인장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국문자 즉 진시황제에 의해서 폐지되었던 문자였던 것이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국토통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참된 뜻으로의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다. 동궤(同軌)-차륜(車輪) 폭의 통일
진시황의 통일정책으로 또하나 유명한 것은 '동궤(同軌;궤(軌)를 같이 한다)' 즉 바퀴 폭의 통일이다. 당시 각국은 제각기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달리 하고 있었다. 수레는 대부분 전차(戰車)였다. 말이 끄는 전차는 도로에 깊은 바퀴자국을 만들고 그것이 레일같이 되어 있었다. 그 레일에 차륜을 넣어서 수레를 달리게 했던 것이다. 전차는 싸움을 위한 것이므로 타국의 전차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자국의 폭을 다르게 해 두면 적의 침입을 막는데 효과가 컸다. 그런데 이제는 천하가 통일된 것이다. 바퀴자국의 차이는 전국적인 교통의 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긴 시황제는 전국에 '치도(馳道)'라는 도로를 만들고 차륜의 폭을 통일시켰다.
라. 치도(馳道)의 건설
치도에 대해서는 진(秦)나라가 멸망하고 30년이 채 되지 않은 무렵 한(漢)나라의 문제(文帝) 시대의 가산(賈山)이란 사람이 글을 남겼다. 그것이 도폭은 50보(步)였다고 한다. '보(步)란 길이의 단위이며, 1보는 지금의 1.35m 정도이며, 50보의 폭이면 67m 정도이다. 그리고 3장(丈)마다(당시의 1장은 2.25m이며, 3장은 6~7m) 수목이 심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성들이 동원되어 도로가 만들어지고, 그 도로가 비에 의해 유실되면 보수를 해야 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관리가 파견되어 오면 그 관리의 식량이나 주거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역(驛)에는 말을 비치하여 그 말을 사육하는 것도 모두 그 지역 백성들의 일이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고통이 대단했다고 한다. 한(漢)나라 때 다시 길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으나 이것을 간(諫)한 사람이 가산(賈山)이다. 가산은 진나라의 시황제가 길을 개척했으니 다시 만들 필요가 없으며 진나라는 그 때문에 멸망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황제가 죽자 갑자기 나라가 멸망한 것은 도로 건설로 시달렸던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 때문이며 한나라는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진나라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그 당시는 시황제가 만들었던 길이 남아 있었다. 치도는 정말 훌륭한 도로였다. 폭이 67m, 그리고 6m마다 큰 가로수가 심어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구원(九原), 만리장성 근처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황해 연안까지, 남쪽은 양자강(揚子江)에 이르기까지 길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지 하나의 수레로 갈 수 있게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까지 가려면, 한(韓)나라에서 수레를 바꾸어 타고, 위(魏)나라에서도 바꾸어 타야만 했다. 그 외에도 곳곳에서 바꾸어 타야 했지만 진시황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번거로움이 없어졌고 한 대의 수레로 전국 방방곡곡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도로로 인해 각지의 교역(交易)이 번창하게 되었고 산업경제가 활성화되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
마. 도량형(度量衡)의 통일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는 점도 아주 중요하다. 한 홉[合], 한 되[升], 한 말[斗]이라든가, 길이의 단위인 보(步), 장(丈) 등이 각국에서 약간씩 달랐다. 되나 말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 어느 나라에서는 한 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전국의 도량형을 엄격히 통일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바로 그 해에 실시되었다. 한 홉이라는 표준 용기를 제작하여, 전국에 그것을 따르도록 명령했다. 중앙에서 보내온 한 홉짜리 용기가 동북 지방 근처에서 출토(出土)된 것으로 보아 사실상 전국에 배당되었던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업과 경제가 발달했다. 이제까지는 각지에서 다시 하나하나 환산해야만 했던 것이 그러한 수고를 면하게 되었다. 화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진(秦)의 화폐가 전국에서 통용되었다.
시황제는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천하통일 같은 것은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누구나 신선을 믿고 있었다. 시황제도 믿고 있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가 되었으며 '황제'라는 말 그 자체가 그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칭호였다. 또 그때까지 누구나 다 쓰고 있던 '짐(朕)'이라는 말을 황제 외에는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등 황제의 절대화를 도모했다. 황제의 절대화는 국가를 운영해 가는데 필요한 것이었지만 시황제는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천하통일의 대사업을 완수한 자신은 보통인간이 아니며 절대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절대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로불사의 인간, 즉 신이나 선인과 같은 존재이다. 스스로를 절대자라고 자임했던 시황제는 이제 자기 자신이 선인(仙人)이 되겠다, 신선(神仙) 되겠다고 원하게 되었다. 신선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시황제는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았는데 도사(당시는 방사(方士)라고 불렀다)가 여러 가지로 수상한 짓을 가르쳐 주었다. 예컨대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모습을 너무 보여 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인주(人主)는 미행(微行) 하여 체중(體中)의 사기(邪氣)를 피(避)하라.'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사기(邪氣)가 몸에 들어와서 신기(神氣;몸 속에 있는 신의 기운)에 해가 된다고 해서 시황제에게 당분간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말했다. 더구나 자신이 있는 곳을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도록 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거처가 알려지고 말았는데 시황제는 매우 노하여 누가 알렸느냐고 조사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그 때 곁에 있던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소주(蘇州)에 호구(虎丘)라는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춘추시대 오(吳)나라 왕의 무덤이 있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는 명검이 많이 나왔던 곳으로 왕이 사망하면 검을 무덤 속에 넣었다. 그런 명검이 몇 천 개나 있다고 들은 시황제가 그곳을 파헤치게 했다는 것이다. 파헤친 자리가 검지(劍池)라는 곳이다. 파 보았지만 범이 나타나서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파헤치려 했던 곳에 범이 있어서 검으로 바위를 쳤던 그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설명서에 쓰여 있기도 한다. 검을 차지하려 했던 것 역시 검이 갖는 영력이 탐이 나서 그랬을 것으로 생각된다.
3. 시황제의 평가
중국 북서부에 위치한, 전국시대 진나라의 군주인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장양왕은 조(趙)나라에 볼모로 붙들려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이었다. 여불위는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원래 후계자로 지명되지 않았던 장양왕을 재위에 올려놓았다. 정은 13세이던 BC 246년 재위에 올랐다. 이때 진은 가장 강력한 나라였고, 중국의 나머지 나라를 지배하에 두려고 했다. 중원의 국가들은 진을 야만국으로 여겨 멸시했지만 산지로 이루어진 서부 변방에서의 강력한 위치 때문에 진은 법가, 즉 전체주의적인 국가 철학을 바탕으로 강력한 관료체제를 갖춘 정부와 군사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BC 238년에 공식적으로 친정(親政)을 선언하기 전까지 사실상 여불위가 정권을 담당했다. 왕으로서 그가 취한 첫번째 행동은 자기 어머니와 정을 통한 반대파의 신하를 살해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것이었다. 뒤에 승상(丞相)이 된 이사(李斯)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능한 조언자들을 왕 주변에서 떼어냈을 수도 있는 이방인 추방 법령을 폐지했다. 진나라는 첩자, 많은 뇌물, 재능 있는 장군들의 가혹하고 효과적인 지도력 덕택으로 나머지 여섯 경쟁국을 차례로 점령하여 마침내 BC 221년에 제(齊)나라를 멸하고 최후의 승리를 얻었다. 이로써 중국은 최초로 통일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신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그는 전설적인 지배자의 신성한 칭호를 취해서, 자신을 시황제라고 선언했다. 또한 무한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나라가 만세(萬歲)를 지속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황제로서 그는 중앙집권화를 확립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여 지방관리의 독립된 통치지역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또한 그 이전 진나라에서의 사례와 이사의 제안에 따라 봉건세력을 철폐하고, 각지의 부호(富豪)들을 강제로 수도 셴양[咸陽]으로 이주시켰다. 전국을 36개 군·현(郡縣)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임명한 수(守:행정)·위(尉:군사)·감(監:감찰)을 파견하여 각 군·현을 통치하게 했다. 군은 다시 몇 개의 현으로 나뉘었다. 또한 도량형을 비롯하여 마차바퀴의 폭과 법률·문자를 통일했다. 도로와 운하망도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북방 변경에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요새가 세워졌는데, 훗날 이것들이 연결되어 만리장성을 형성했다.
BC 220년에 시황제는 각지를 순행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조직을 감독하면서 신성한 여러 지역에서 제사를 올렸으며, 자신이 마침내 제국을 통일했음을 알리고 각지에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웠다. 시황제가 전국을 순행한 또 다른 동기는 마술과 연금술에 관한 자신의 관심 때문이었고, 나아가 자신을 불로장생하게 해주리라고 여겼던 연금술사와 마술사를 찾기 위함이었다. BC 219년 동쪽 바다에 있는 어느 섬(일본으로 추측됨)에서 이러한 것을 구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후 그는 계속 조정으로 주술사들을 불러들였다. 유가들은 그 조치들이 사기성이 짙은 행위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는데, 이로 인해 그들 가운데 460여 명이 처형되었다. 옛 봉건적 질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유가와 황제와의 끊임없는 논쟁은 213년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분서갱유는 시황제가 이사(李斯)의 제안을 받아들여 의학·점술·농경에 관한 책과 진나라의 역사기록 및 황실도서관에 있던 책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사건이었다.
시황제의 말년은 측근들의 증대하는 불만과 백성들로부터의 고립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실제로 그에 대한 암살기도가 3번이나 있었다. 거대한 황궁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되었고 그는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서의 생활을 영위했다. BC 210(또는 209)년 그는 순행 도중에 죽었고, 우주의 상징적인 형태를 본떠 만들어진 산을 깎아 만든 거대한 능에 묻혔다(→ 진시황릉). 약 51.8㎢ 규모의 이 능은 1974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발굴 초기에 죽은 황제를 보위하기 위한 군대라고 추정되는 실물크기의 토우(土偶)가 6,000점 이상 발견되었다(→ 진시황릉). 강력한 지배자가 사라진 후 각지에서 옛 봉건 파벌의 지지자들간에 항쟁이 발생하여 결국 BC 206년 진은 붕괴되었고, 황족들이 제거되었다.
시황제에 대한 대부분의 기사는 진을 계승한 한(漢)나라에서 나온 것이다. 한나라는 유교를 숭상했으므로 법가를 중시한 진을 비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아마 그 시대의 조작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그가 지나치게 잔인했다거나 인격파탄자였다고 비방하는 얘기 등은 법가 철학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에 의해 각색되었을 것이다. 시황제는 확실히 위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제국을 강화하려는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의 전제적인 지배와 가혹한 형벌은 법가사상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전통적인 역사서에서 그를 악하고 비도덕적이며 교양없고 미신적인 사람으로 취급했다. 반면에 근대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가 실시한 제도화된 관료 행정구조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역대 국가들은 이 제도를 공식적으로 부인했으나, 사실상 후대 국가들의 통치기반이 되었다.
“중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역사인물은 누구인가?” 중국에서 이런 설문을 해보면 거의 언제나 진시황과 마오쩌둥 두 사람이 1, 2위를 다툰다. 마오쩌둥은 오늘날의 사회주의 중국을 만들었고, 진시황은 그 중국 자체를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시황 이전에도 중국 역사는 오래 이어져 왔다.
하지만 그가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마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뉜 채로 발전해 왔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중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 뜻에서 마이클 하트가 펴낸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 랭킹 100>에서는 진시황이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을 제치고 18번째로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꼽혔다.
이처럼 중요한 인물임에도, 진시황에 관한 역사 기록은 많지 않으며 확실히 믿기도 어려운 점이 있다. 진왕조 자체의 역사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상태에서 진시황 관련 자료는 사마천의 <사기>와 유향의 <전국책> 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책들은 모두 진시황의 시대보다 백 년 이상 지난 뒤에 씌어진데다 사실과 전설의 구분이 모호하고, 일부는 의도적인 왜곡을 했다는 의심마저 들기 때문이다. 이따금 출토되는 진나라의 죽간이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보태 주지만, 진시황이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일을 했는지 지금 정확히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튼 남아 있는 자료에 따르면, 진시황의 탄생은 매우 위태로웠는데다 모종의 음모까지 깃들어 있었다. 그는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진나라의 왕족 자초(子楚)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자초는 조국 진나라에서 그리 세력이 크지도 않았고 관례상 죽을 때까지 조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다면 자초나 그의 아들 영정(嬴政)이나 역사에 단 한 줄도 채우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진나라의 상인인 여불위가 조나라에 갔는데, 우연히 자초를 만나보고는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특이한 상품(奇貨)이다. 사 놓으면 큰 이익을 보겠구나!”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초에게 거금을 주어 조나라에서 인기를 끌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자초를 당시 진나라의 유력자였던 안국군의 양자로 들어가도록 공작했다.
여불위의 투자는 멋지게 성공, 안국군이 즉위하여(효문왕) 불과 사흘 만에 죽자 조나라에서 돌아온 자초가 왕위를 계승한다(장양왕). 이로써 최고권력의 으뜸가는 후원자가 된 여불위는 이후 3년 간, 그리고 다시 장양왕이 죽고 영정이 왕위에 오른 한동안 진나라의 최고실권자로서 세력을 떨친다.
<사기>에는 여불위가 이처럼 대담한 도박을 했을 뿐 아니라 세상을 몽땅 속이는 음모까지 꾸몄다고 적혀 있다. 자초에게 자신이 총애하던 무희를 보냈는데, 그 무희는 이미 여불위의 자식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낳은 아들이 바로 영정, 미래의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 교묘한 이야기로, 여불위와 자초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여불위의 세도에서 비롯된 뜬소문이 아닌가 하고 요즘에는 의심받고 있다. 사마천이 이를 <사기>에 기록한 것은 진시황을 폄하하기 위한 의도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애초에 진나라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 자초가 대권을 잡는 과정도 기이하다. 여불위의 억지스러운 음모가 그렇게 척척 통할 만큼 당시의 진나라 왕실이 허술했다면 과연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 실제 역사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아무튼 13세에 왕이 된 영정은 10년 뒤에 태후(기록대로라면 본래 여불위의 애첩이었다고 하는)와 손잡고 역모를 꾀하던 노애를 처단하고 태후는 옹이라는 고을에 유폐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여불위까지 숙청했다. 1년 뒤 여불위는 자살한다. 이제 진나라는 명실공히 영정의 천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천하’가 진짜 ‘온 천하’로 확대되기까지는 불과 15년이 더 걸렸다.
기원전 230년에 진나라 군대가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고부터 221년에 제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한, 조, 위, 초, 연, 제 6개국이 잇달아 진나라에게 무너졌다. 평균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한 나라씩. 이들 나라가 수백 년 동안 할거해 왔음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역시 기록에는 전하지 않는 사정이 있었으리라 여겨지지만, 기록으로만 볼 때 우선 진나라가 중국의 서쪽 외곽에 떨어져서 험준한 지형에 의존해 외침을 잘 받지 않으며 오랫동안 실력을 키웠던 점, 진효공 시절 상앙의 변법(變法)을 비롯한 과감하고 실용주의적인 개혁이 미친 부국강병의 효과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진시황이라는 지도자가 보여준 리더십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됨이 몹시 잔인하고 냉혹했다고 한다. 그를 폄하하기 위한 역사왜곡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도, 모든 기록이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는 점이라 실제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한편으로 헛된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소중히 여겼으며, 실수를 했다고 깨달으면 체면에 아랑곳없이 곧바로 시정했다. 운하 건설을 책임지고 있던 정국이라는 사람이 한나라의 첩자임이 밝혀지자 국내에 머물던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도록 했지만, 후일 승상이 되어 천하통일의 일등공신 역할을 할 이사(李斯)가 “진나라는 대대로 외국인들을 우대하여 발전해 왔다”고 반론을 올리자 곧바로 취소하며 전보다 더 외국의 인재를 중시했다. 한비자의 경우 그 한 사람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한나라와 전쟁을 벌였다고도 한다. 또 장군 왕전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좌천시켰다가, 왕전의 말이 맞았음을 알고는 곧바로 몸소 왕전의 거처로 달려가 용서를 빌고는 재기용했다고 한다.
진시황(진왕 정)은 이처럼 여러 국보급 인재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시켰고, 병사들에게도 전공을 세울 경우 최대한의 혜택을 보장함으로써 용맹하게 싸우게끔 부추겼다. 그리고 여러 나라의 정치에 은밀히 공작을 해서 안으로 내분에 휩싸이게 하고, 밖으로 여러 나라가 단합해서 진나라에 대항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한 번에 한 나라씩 전력을 기울여 단번에 적의 수도를 함락시키는 방법으로 무너뜨려갔다. 또 자료를 잘 살펴보면 진시황이 잔인무도하다는 점에서 폭군이라는 비방은 숱하게 있지만, 사치향락을 일삼았다는 쪽의 비방은 별로 없다(적어도 통일 이전까지는 그랬고, 이후에도 죽기 직전까지는). 주지육림이나 삼천궁녀 같은 이야기는 전설로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반면 도무지 의심이 많아서 신하들이 일을 잘하나 계속 감시하므로 괴롭다는 푸념이 많이 보이고, 스스로는 죽간으로 지어진 공문서를 매일 120근씩 처리하지 않고는 먹지도 쉬지도 않았다고 하니, ‘일 중독자’로서 부하들을 매섭게 다그치는 ‘호랑이 같은 관리자’였으되 자기 개인의 쾌락을 위해 국가와 국민을 희생시키는 폭군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고, 때로 비정한 결단도 숱하게 내려야 하는 정복-통일 군주에게는 적합한 성격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이런 진시황과 진나라를 막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서로 힘을 합쳐 공동 대응하는 합종(合縱)은 과거에 진나라의 야심을 저지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진시황 시대인 기원전 241년에 마지막으로 연나라를 제외한 5개국이 진나라를 공격했다가 패배한 후로 다시 합종이 성사되지 못했다. 남은 방법은 단숨에 진나라의 중추를 파괴하는 방법, 즉 암살이었다. 227년에 연나라의 형가(荊軻)가 암살에 거의 성공할 뻔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며 연나라의 멸망만 가져온다. 기원전 221년, 진왕 정은 천하통일을 선포하면서 스스로 전설의 성군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따온 ‘황제’라고 칭했다.
황제가 된 진시황은 무력 통일을 뒷받침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통일 또한 강력하게 추진한다. 여러 나라의 화폐를 모두 폐지하고 정부에서 주조한 통일 화폐를 쓰도록 하며, 나라마다 제 각각이었던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했다. 그리고 북방민족을 막기 위한 북부의 장벽(이것이 증축 보완 과정을 거쳐 만리장성이 된다)만 남기고는 국내의 성벽들을 헐어 버리고, 로마의 아피아 도로에 비할 만큼 넓고 잘 포장된 도로를 건설하여 중국이 두루 하나로 이어지도록 했다. 무엇보다 오랜 전통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 것은 혁명적인 조치였다. 그때까지 국가는 중앙의 군주 직할지 외에는 여러 제후의 분봉지로 나뉘어져 분봉지마다 독립된 왕국에 가까운 자치를 누렸다. 지방행정의 단위로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이 있었으되 그 역시 지방관의 세습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진시황은 전국을 일체 군현으로 나누고는 모두 지방관을 파견해 관리하고, 세습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다면 세계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중앙집권이었다.
혁명적 조치였던 만큼 반발도 많았으리라 여겨지는데, 기록상 두드러진 반발은 봉건제를 이상적인 정치형태로 보는 유학자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문화적 통일’, 즉 자유 언론과 사상 탄압을 촉발하는데, 진시황 최대의 악행으로 거론되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그 일환이었다. 그런데 분서갱유가 말 그대로 “기술서적 외에 모든 경전과 역사서를 불태우고, 모든 유학자를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리는”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 많다. 일단 지금까지 살아남은 경전 사서도 많으며, 유학 역시 죽지 않고 머잖아 중국의 지배 이념이 된다. 또 <사기>에 따르면 분서갱유를 제안한 사람은 승상 이사인데, 그의 표현에는 “국가에서 인정한 박사들 말고 사사로이 경전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빼앗아 불태우고….”라고 되어 있다. 떳떳이 경전을 갖고 연구해도 되는 박사(유학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또 한문제 때의 인물인 가의(賈誼)는 진나라의 멸망 원인을 돌이켜 보며 이를 거울삼아 올바른 정치를 하기를 권하는 <과진론>을 올렸는데, 여기서 진시황의 여러 악행을 지적하면서도 분서갱유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 갱(坑)이라는 한자를 문자 그대로 ‘파묻어 죽인다’로 읽을 수도 있지만 다만 ‘처형한다’ 또는 ‘직업을 그만두게 한다’로 읽을 수도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된다. 이를 볼 때 분명 언론과 사상을 탄압하는 조치가 취해졌지만, 보통 ‘분서갱유’에서 연상되는 정도의 잔혹함이나 철저함은 없지 않았을까 한다.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이 애써 천하를 통일해 놓고도 겨우 50세의 나이로 객사했으며, 곧바로 제국이 무너지고 천하가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된 것은 그가 당치 않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세운 나라가 영원불멸하리라 주장했고, 자신은 1대 황제(시황제)이며 다음은 2대, 3대…로 무궁토록 이어지리라 했다. 수백 년 이어진 주왕조도, 춘추전국의 나라들도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본, 아니 그렇게 무너뜨린 장본인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나라가 있으리라고 여겼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그는 한 술 더 떠서 그런 주장과 스스로 모순되는 꿈을 꾸었다. 바로 불로불사를 염원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2대, 3대 따위는 없이 자신이 영원히 황제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연나라 출신의 노생에게 불로장생한다는 영약을 구해 오게 하고(노생은 “진나라는 호(胡) 때문에 멸망한다”는 예언만 전해주었다), 서복(徐福, 서불(徐巿) 또는 서시(徐市)라고도 한다)에게 어린 남녀 수천 명을 주고는 멀리 동쪽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했다(서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가 일본에 정착해서 일본 왕실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말년에 접어든 그는 점점 죽음이 두려웠던지, 암살을 피하기 위해(218년에 박랑사에서 암살을 모면한 적이 있다. 이 암살 음모를 꾸민 사람은 나중에 한고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장량이었다고 한다) 수도 함양 인근에 궁전 270개를 짓고 지하도를 통해 드나들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비밀로 했다. 이 밖에 거대하고 화려한 본궁을 지었는데, 그 일부인 아방궁만 완성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거대함과 화려함을 갖고 있어, 이후 ‘사치스러운 건물’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또한 여산 기슭에 자신의 능묘를 조성하고, 거대한 지하 궁전을 만들어 죽어서도 생전에 못지않은 영화를 누리고자 했다.
아마도 과장이 섞였을 수 있지만, 정말 이처럼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이며 세월을 보냈다면 이미 과거의 ‘일 중독자’다운 근면함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통일 제국이라고 해도 민생에 커다란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진시황은 지식인들과 백성들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가혹한 법률에만 의존했는데, 이는 당장은 폭정을 유지시켜도 끝내 종기가 터지듯 반정부적 힘이 터져 나오게끔 하는 방법이다. 앞서 말한 가의는 <과진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천하를 정복할 때는 사술과 무력을 중시하며, 천하가 통일된 후에는 백성에게 권력이 잘 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천하를 취할 때와 지킬 때의 방법은 다른 것이다. 그러나 7국이 할거하던 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천하의 임금 노릇을 하면서도 예전의 방법을 답습하고 혹독한 정치를 거두지 않았으니, 그만큼 빠르게 멸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기원전 210년 9월 10일, 진시황은 다섯 번째로 천하를 순행하는 길에 나섰다가 사구(沙丘)에서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사기>에 따르면 이 때 진시황은 북방에 가 있던 태자 부소에게 황위를 물려준다고 유언했으나,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음모를 꾸며 다른 황자인 호해(胡亥)를 내세우고는 부소와 그를 지지하던 공신들을 살해하고 2세 황제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 사이에 진시황의 시신이 함양으로 돌아오는 길이 지체되어 심하게 썩어 냄새가 나므로, 절인 생선을 실은 마차를 써서 은폐했다고 한다. 전무후무한 통일제국을 세운 황제의 어이없는 마지막이었다. 제국 자체도 그 뒤 겨우 4년 만에 어이없이 멸망해 버린다.
다시 말하지만 진시황 관련 자료는 크게 부족하고, 의심스러운 부분도 많다. 어찌 보면 그의 일생은 유학자들이 군주가 결코 행해서는 안 되는 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유교적인 모범 군주는 효성이 지극해야 하며(진시황은 “친아버지를 핍박해 죽게 하고” “친어머니를 유폐했다”),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늘 수양과 학문에 힘써야 하며(진시황은 “분서갱유를 했다”), 거대한 토목공사를 비롯한 불필요한 사업으로 백성을 괴롭히지 말고(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짓고, 거대한 능묘를 만들었다”), 스스로 국사를 챙기기보다 훌륭한 신하를 기용해 그에게 매사를 위임해야 한다(진시황은 “신하들을 믿지 않아 일일이 참견했고,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려고 했다”). 여기에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환관이 날뛰게 한” 점까지 본다면 진시황이야말로 후대의 제왕이 결코 본받아서는 안 될 모델인 셈이다.
따라서 이런 ‘교훈’을 주게끔 그의 일생이 어느 정도 왜곡되고 변형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드는 것이다(불로초 이야기도 뜬소문을 적당히 가공한 것이며, 서복 등은 동방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뭐라 해도 결국 진시황은 이후 수천 년간 중국의, 아니 동양 군주들의 모델이었다. 결국 한왕조를 비롯한 역대 왕조는 진시황의 군현제를 유지하고, 황제라는 이름과 지배원리를 답습했으며, 사상을 통일하려고 했다(이 경우에는 유교가 핍박 받는 쪽보다는 핍박하는 쪽에 서는 경우가 많았지만). 진시황이 수립한 강력한 동양적 군주제는 천하가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국가적 사업이 의욕적으로 추진되는 장점을 낳은 반면, 폭정이 행해질 가능성과 사상의 자유가 심하게 억압될 가능성도 낳았다. 그리하여 군주 제도를 인정하고 옹호하면서도 한편으로 견제하고 구속하려는 정치사상의 모순된 입장이 생기지 않았을까. 진시황에 대한 사실의 왜곡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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