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킬로 블록 일당들을 조사하던 형사들과 수사관들은 이들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찾기 위해 이곳 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곤 했다. 이들이 크립스나 블러드의 다른 점조직이 아닐까? 아님 마피아 같은 조직의 원조를 받고 있진 않을까? 하면서. 하지만 이내 그들이 진실을 파헤쳤을 때 그런 거창한 연결고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데릭 데이비스가 그를 중심으로 그의 친구들과 창시한 여느 조직들과 다를 바 없는 볼품없는 갱단이었다. 분명 그들은 실망 내지 안도하면서 이 작은 패거리가 반년도 못 가서 와해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결국 그 볼품없는 갱단은 로스 산토스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사고의 중심으로 서게 될 만큼 성장하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도 여기까지 순탄하게 흘러온 것은 아니다. 킬로 블록엔 그동안 많은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다. 개중에는 안정적인 교체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이들이 무슨 일을 겪어왔는지 간략하게나마 설명토록 하겠다. 킬로 블록이라는 함선을 이끈 함장은 여러 명이 있겠지만, 여기선 C4로 잘 알려진 커비 쿠퍼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볼 생각이다.
커비 쿠퍼는 그의 쌍둥이 동생인 윈디 쿠퍼와 함께 브루클린 동부에 있는 브라운스빌에서 태어났다.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렇듯, 쿠퍼 또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만도 않았던 것이, 그의 부모님은 그들의 형편이 좋지 않음에도 쿠퍼 형제가 장차 변호사나 판사, 검사 같은 권위 높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을 갖을 수 있게 하기 위해 교육에 열을 올렸고, 없는 환경 속에서도 쿠퍼를 성공적으로 고등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쿠퍼 형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미국 전역에 인종차별주의가 들끓었던 시기였다. 이는 브루클린이라고 다를 게 없었는데, 그들 같은 흑인 학생들은 항상 백인 학생들의 따돌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교사에게도 그런 대우를 받곤 했다. 따돌림이라고 해봐야 커비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간 부모님께 좋은 아이로 자라왔던 커비와 윈디는 오히려 그 좋은 아이로 살아왔던 지난 삶에 의한 반동으로 조금씩 다른 곳으로 새기 시작했다.
커비와 윈디는 학교에서 어울린 흑인 친구들과 작은 패거리를 형성해 자신을 괴롭히는 백인 학생들을 흠씬 두들겨 팼고, 때로는 더 심각한 보복을 가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소매치기나 강도, 도둑질 등 범죄까지 저지르기도 했다. 커비와 윈디의 비행을 알게 된 그들의 부모는 외출금지 같은 벌을 내리곤 했지만, 커비와 윈디는 외출금지 기간 동안에도 번번이 집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어울렸다. 이미 삐딱선을 탄 그들을 원상태로 돌려놓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결국, 부모님은 쿠퍼 형제를 집 밖으로 극단적인 조치까지 취했지만, 이는 오히려 그들을 고삐 풀린 말처럼 날뛰게 하는 기폭제가 될 뿐이었다.
집에서 쫓겨난 쿠퍼 형제는 친구들과 함께 인근 공동주택가에 집을 구해 그곳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그들처럼 빈민층 시
민만이 가득했고, 이런 사람들은 으레 마약 같은 약물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려고 했으니 커비와 윈디에게 있어서 이곳은 그야말로 금광이 따로 없었다. 우선 그들은 이전에 도둑질한 마약을 소량씩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클립튼 번즈라는 남자와 마찰을 빚게 된다. 사실 브라운스빌을 넘어 브루클린 동부의 마약 유통은 이미 티렐 베이커가 꽉 잡고 있었고, 번즈는 베이커의 조직원이자 그의 조카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커비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고, 한창 자기만의 패거리를 꾸리고 있던 번즈는 커비와 윈디가 계속 마약을 판매해 돈을 벌 수 있게끔 해주는 대신 자신의 밑에서 일하며 일정 금액을 상납할 것을 요구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커비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번즈가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거리에서 사라졌을 때, 베이커는 주택가 관리를 커비에게 맡긴다. 그리고 번즈가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을 때 커비는 이미 번즈와 함께 베이커가 신뢰할 만한 조직원으로 성장한 뒤였다. 뛰어난 수완으로 베이커의 눈에 들은 커비는 더는 번즈 밑에서 상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팀을 만들어 상납금을 받으며 조직원들을 관리하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커비는 이곳에서 로드니 킹을 만난다.
베이커 파의 흥망
이때 베이커의 조직은 브루클린 전역 뿐만 아니라 브루클린에서 미국 서부의 산 안드레아스로 이어지는 거대한 마약유통망을 관리하는 거물로 급부상하였다. 이들은 산 안드레아스 곳곳에 암약하던 범죄 조직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는데, 이때 커비는 레이몬드 킹이라는 중요한 인물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때부터 베이커의 세력은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베이커는 미국의 거대 마약유통망을 관리하는 조직의 두목이었던 만큼, 뉴욕 경찰과 FBI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 베이커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어 최대한 몸을 사리며 조직을 관리했지만, 경찰은 베이커가 아니라 그의 조카인 번즈를 노렸다. 경찰은 번즈의 마음 약한 점을 노려 심문 중 그를 달달 볶았고, 번즈는 죄책감과 자신이 충성한 삼촌에게서 받아왔던 홀대들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베이커에게 받아왔단 명령과 마약유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간부들이 맡은 역할 등에 대해 실토하고 만다. 경찰은 번즈의 증언과 그가 제시한 증거들을 기초로 하여 티렐 베이커와 그의 간부 조직원 총 15명을 체포한다. 이들은 제각각 살인, 살인 미수, 마약 유통 등으로 투옥됐고, 이들 중 특히 베이커는 가석방 없이 최고형인 20년형으로 수감됐다.
명실상부 브루클린 최대 범죄조직인 베이커 파는 이렇게 와해했다. 조직의 모든 경영진이 교도소에 투옥되거나 다른 도시나 주, 심지어 외국으로까지 도피했으며, 모든 사업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몰락으로 덕을 본 차례가 된 것은 그간 베이커 밑에서 억눌려 살던 경쟁조직들이었다. 커비와 윈디는 다행히 체포 목록에서 빠질 수 있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커비와 윈디는 당장 가지고 있는 모든 마약을 버리고 그간 마약을 보관하던 창고들에 불을 지르고 로드니와 함께 그의 형인 레이몬드가 있다는 로스 산토스로 도피했다.
로스 산토스
로드니의 권유로 그만 믿고 로스 산토스로 온 커비와 윈디는 막막한 심정으로 공항 밖으로 나왔다. 커비와 윈디, 로드니가 공항 주차장으로 걸어갈 즈음, 검은 헌틀리에서 체격 좋은 흑인 남자가 나오더니 로이드와 인사하더니 차에 타란 듯이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영문 모를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던 커비와 윈디는 로이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차에 탄다.
헌틀리는 엘 코로나와 아이들우드, 제퍼슨을 지나 펠튼으로 들어가 6번가에 멈춰섰다. 말없이 차에 내린 남자는 혼란스러워 하는 커비와 윈디를 바라보며 손짓하고 근처에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따라 들어온 로이드는 소파에 앉아 있는 한 흑인 남자를 보더니 들고 있던 가방도 집어던진 채 달려갔고, 그 남자도 놀란 표정으로 일어나서는 로이드와 포옹했다. 공항에서처럼 멍청하게 윈디만 멀뚱멀뚱 바라보던 커비는 그 남자가 선글라스와 비니를 벗자 그제서야 그가 전에 만난 레이몬드 킹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고, 커비와 레이몬드, 윈디는 서로 웃는 얼굴로 가볍게 인사했다.
레이몬드는 커비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듣더니 커비, 윈디와 로드니를 데리고 펠튼이나 제퍼슨, 아이들우드 근처를 돌며 로스 산토스 물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커비와 윈디에게는 그런 것보다 당장 먹고 살 생계수단이 필요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약을 파는 일이나 도둑질 말곤 없었다. 그 사정을 들은 레이몬드는 6번가 집 근처에 빈 집을 가리키더니 로드니를 따로 불러 한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그와 대화하던 로드니는 커비와 윈디에게 다가와 본격적으로 돈을 만져보기 위해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라는 레이몬드의 말을 전한다. 또 누군가의 밑에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쾌하기도 하고 탐탁치 않아하던 커비였으나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에 이내 백의종군하는 하는 장군처럼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커비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아야 했다. 그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도둑질이든, 강도든, 무엇이든 했지만 결코 살인만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게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건 커비가 모범시민이어서가 아니라 결코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닥쳐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은 매우 빨리 찾아왔다. 커비가 로스 산토스에 지낸 지 세 달이 다 되어갈 때 레이몬드의 호출을 받아 6번가에 처음 도착했을 때 들어갔던 그 집에 들어간다. 소파에 앉아 있던 레이몬드는 커비가 들어오자 아무 말 없이 탁자에 사진 한 장과 어떤 이의 이름과 '버던트 블럽스'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를 올려놓는다. 그러더니 어리둥절해하는 커비를 바라보며 또다시 아무 말 없이 탁자를 똑똑똑하고 세 번 두드린다. 그제서야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커비의 표정은 순간 굳어졌다. 레이몬드는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커비는 탁자 위에 있는 사진과 종이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집에 돌아온 커비는 로드니의 인사도 무시하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 TV를 바라보며 온종일을 기계처럼 그의 권총을 닦기만 했다.
다음날, 커비는 윈디와 로드니를 데리고 버던트 블럽스 굴다리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점심부터 하루종일 그 남자를 기다렸다. 커비는 윈디와 로드니가 징징대는 것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과 사진을 번갈아 보기만을 반복했다. 그리고 저녁 10시 반쯤, 포기하고 슬슬 돌아가려던 참에 갈색 종이봉투에 넣은 술병을 들고 건들건들거리며 굴다리를 걷는 한 남자가 커비에게 발견된다. 커비는 그만 반사적으로 "저 새끼다!"하며 소리치고 마는데, 이 말을 들은 윈디는 과도 크기 정도의 칼을 꺼내 돌연 밖으로 뛰쳐나간다. 몸을 낮추고 천천히 그 남자를 뒤따라가던 윈디는 남자가 굴다리의 으슥한 곳에서 소변을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자 곧바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왼팔로 남자를 끌어안듯 부여잡고 들고 있던 칼로 목을 긋기 위해 오른손을 뻗었지만, 남자는 재빨리 윈디의 오른팔을 막고 그대로 윈디의 왼팔을 꺾었다. 당황한 윈디는 칼로 남자의 오른쪽 허벅지를 찌른다. 남자는 윈디의 왼팔을 놓고 소리지르며 주저앉았지만, 곧바로 바닥에 내려둔 술병을 집어들어 도망치려는 윈디의 겉옷을 잡고 끌어당겨 그대로 술병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리고는 윈디가 놓친 칼을 집어들어 내리찍듯 그의 양 팔을 윈디를 향해 내리치고, 윈디는 양 팔로 있는 힘껏 남자의 양 팔을 막는다. 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커비는 정신을 차리고는 겉옷을 위로 올리고 숨겨둔 베레타를 꺼내 들더니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복부에 총구를 겨누고 그대로 총을 발사했다. 남자가 칼을 놓치고 그대로 땅바닥에 뒤집어져 고통스러워 할 때 커비는 남자의 목에 세 번을 발포한다. 그때 커비는 지나가던 여자가 남자의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것도, 윈디가 자기가 맞을 수도 있었다고 소리치며 징징대는 것도, 로드니가 가자며 소리지르는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고통스런듯 왼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목에 피가 찬듯이 내뱉는 남자의 작은 신음소리 말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윈디가 커비의 왼팔을 끌어당길 때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차를 타고 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커비는 비틀거리듯이 터벅터벅 걸어가며 침대에 누워 그대로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레이몬드는 그의 조직원들을 모두 한 데 모으고 그들 앞에서 커비를 소개해주었다. 레이몬드는 커비에게 앞으로 조직원 중 하나로서 받을 수 있는 혜택들과 책임져야 하는 것들을 설명하고는 커비와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누었다. 비록 마피아처럼 손가락을 따지도, 다른 갱단들처럼 조직원들을 시켜 커비를 두들겨 패지도 않았지만, 커비 쿠퍼는 이미 단순한 흑인도, 꼬봉도 아닌 킬로 블록 조직원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조직원이 된 커비의 성장세는 무시무시했다. 커비가 조직원이 되고 나서 2년이 채 되지 못했을 때 그는 이미 자신만의 소조직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뛰어난 수완과 추진력으로 레이몬드의 성가신 문제들을 여럿 해결해주었으니 레이몬드가 그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순조롭게 앞으로 나아갔고, 킬로 블록도 그러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삶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레이몬드 킹이 체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법원에선 그에게 마약유통 혐의와 살인방조 혐의로 12년 형을 언도했다. 경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아예 나무를 베어버리고자 레이몬드의 측근들까지 체포했다. 개중엔 무죄로 풀려나기도 했지만, 경찰의 이러한 예고도 없는 습격은 많은 조직원들이 두려움에 떨게 만들기 충분했다. 대다수 조직원들이 조직 생활을 다른 곳으로 도피하거나 아예 조직 생활을 그만두기까지 했다. 커비 또한 항상 불안에 떨어야 하는 이런 생활에 염증을 느껴 이대로 그만둘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가 레이몬드의 면회로 교도소에 방문했을 때 레이몬드가 그에게 해줬던 말은 그런 생각을 싹 다 없애주기에 충분했다.
차를 타고 6번가로 돌아온 커비는 윈디와 로드니, 그리고 당장 눈에 밟히는 조직원들을 모두 한 데 끌어 모았고, 머리를 맞대며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커비는 우선 킬로 블록이 위축된 틈을 타 그들을 위협하는 인근 세력들을 깨부숴 킬로 블록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천명하기로 한다. 이런 메시지를 들은 옛 조직원들은 다시 하나 둘씩 6번가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커비는 상황이 안정되기 시작할 즈음에 킹의 뜻에 따라 엘 코로나의 토착 세력인 수레뇨스와 사업 관계를 이룬다. 이제 커비는 돈과 신뢰라는 두 마리 토끼 뿐 아니라, 힘과 존경심이라는 여우들까지 쫓을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커비가 펠튼에서 세력을 불리고 있을 때, 엘 코로나에는 헥터 리안데즈가 이끄는 일명 '로코츠'가 있었다. 이 로코츠도 킬로 블록과 마찬가지로 여러 세대 교체와 흥망성쇠를 겪어온 조직이다. 이들과 킬로 블록간의 연결고리는 꽤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는데, 보통 데릭 데이비스 때부터를 시작으로 본다. 데이비스는 세력을 정돈하기 위해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그들을 믿을 수 없던 테런스 뱅크스, 일명 '트랜스'는 그가 데이비스의 자리를 차지하자 곧바로 로코츠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레이몬드 킹의 시대까지 이 연결고리는 끊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킬로 블록과 로코츠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서로에게 각자의 피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커비 쿠퍼의 시대가 되었을 때, 적은 적을 수록 좋다는 뜻에 따라 화해와 함께 새로운 사업 관계를 이루었고, 마침내 이 전쟁은 영원히 종식될 수 있었다. 아니, 종식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오후, 6번가에 옷에 파란색 치장을 한 히스패닉 남자 셋이 발을 들인다. 커비는 그들을 반갑게 집 안으로 맞이한다. 집에 들어온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커비와 긴 대화를 나눈다. 모두 다 적을 순 없고 굳이 요약하자면, 엘 디아블로라는 로코츠 일원이 몇몇과 함께 헥터를 끌어내리고 세력을 차지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고 피식 웃은 커비는 이내 그들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한동안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휘저으며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그로서는 굳이 지금의 상호 이익 관계를 끊어버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터이다. 그 남자들은 분노와 실망이 섞인 복합한 표정으로 인사조차 하지 않고 집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돌아갔다.
그리고 이틀 뒤, 리안데즈를 포함한 몇몇 로코츠 일원들이 야밤에 6번가로 찾아와 근처에 있는 킬로 블록 조직원들에게 총알을 흩뿌리듯 총을 갈겨대며 습격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이 소식을 들은 커비는 화보다도 의구심으로 머릿 속이 가득찼다. '리안데즈가 이틀 전 그 얘기를 알게 된 걸까?', '그렇담 혹시 날 그놈들과 한통속인 걸로 오해한 건 아닐까?'하며 머리 속에서 질문만을 되풀이하던 커비는 우선 리안데즈에게 전화를 걸어보도록 하기로 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커비의 전화를 받은 리안데즈는 관계가 깨지기 전의 그 친근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매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커비는 전날 있었던 일을 추궁했고, 디아블로라는 조직원과의 일을 밝히며 무의미한 싸움을 멈추자고 제안했으나, 리안데즈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그대로 끊어버린다. 열이 뻗칠 만큼 커비는 그의 조직원들을 불러 무장시키고 엘 코로나에 다녀오라며 지시한다. 그리고 그날 밤, 엘 코로나에서는 무수한 총성과 함께 그곳에 있던 로코츠 일원 몇몇이 쓰러져 나갔고, 킬로 블록 조직원들은 멀리 동떨어져 있던 주택가에 불을 지르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렇게 전쟁은 커비가 눈치 채기도 전에 시작됐다.
양 측은 서로 관계를 단절했고, 서로 인사 대신 피와 총알만을 나누었다. 이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오로지 상대 측을 절멸하는 것 뿐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양 측 모두 자신의 뜻에 동의하는 같은 편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헥터 리안데즈가 이끄는 남쪽의 로코츠는 서쪽의 '몽골스'라고 알려진 폭주족 갱단과 '모레티오 패밀리'라고 알려진 마피아와 손을 잡았고, 레이몬드 킹과 커비 쿠퍼가 이끄는 킬로 블록은 서쪽의 또다른 거대 세력인 '오다하라 구미'와 손을 잡았다. 그저 동부의 한 조직과 남부의 한 조직간의 싸움일 뿐이었을 터인 것이 이젠 범도시적인, 그것도 더는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이 된 것이다.
이들의 싸움은 템플, 마켓, 리치맨, 아이들우드, 엘 코로나, 제퍼슨, 펠튼을 가리지 않고 산발적으로 벌어졌고, 이는 이 전쟁과는 관련 없는 다른 조직과 경찰 같은 제3자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할 만큼 규모가 큰 것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충돌 후에 로코츠 연합은 오다하라 구미의 적대 세력으로 알려진 '오쿠마 카이'와 윌로우필드의 '대명회'까지 연합에 끌어들이기에 이른다. 그들은 오로지 오다하라 구미와 킬로 블록을 억누르고 무너뜨린다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로 어떠한 교류도 없이 그저 만나기만 하면 서로에게 주먹질과 총질만을 일삼았다. 때로는 킬로 연합이 우세했고, 또 때로는 로코츠 연합이 우세했다. 그리고 4개월 정도 지났을까, 전쟁 도중 알 수 없는 이유로 헥터 리안데즈가 사망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테오도르 가르시아, 일명 '고스트'는 전쟁을 중단하고 킬로 블록과의 화해를 원했으나, 아직 분을 삭힐 길이 없던 커비는 리안데즈가 저지른 만행의 대가는 이보다 무겁다며 단칼에 거절한다. 이에 실망하고 끝 없는 전쟁에 염증을 느낀 가르시아는 조직원들에게 짧은 인사를 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의 자리는 데오발드 페필로, 일명 '솔'이 차지한다. 그는 커비에게 찾아가 전쟁을 끝나는 대가로 킬로 블록의 편에 설 것을 약속했고, 이미 두 번의 세대 교체를 겪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커비는 분을 가라앉히고 그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하지만 이미 전에 쓰디 쓴 경험을 한 커비는 페필로에게 기존의 연합에서 탈퇴하라고 요구했고, 페필로는 고개를 끄덕여 제안을 수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필로가 연합에 각자 몽골스와 모레티오를 대표하여 나온 간부급 조직원들의 시체를 들고 커비 앞에 나타난다. 하지만 커비는 고개를 휘젓고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클리버 나이프를 집어들어 페피요의 발바닥 앞에 던진다. 그리고는 페필로더러 직접 몽골스, 모레티오 패밀리의 대표자들의 목을 베어 발로 차라고 요구했다. 페필로는 한동안 뜸들이더니 이내 커비의 요구대로 그들의 목을 베어 직접 걷어찼다. 이제서야 만족한 듯이 웃은 커비는 페필로, 오다하라 구미의 대표와 인사를 나눈다. 이렇게 로스 산토스 암흑가의 대전쟁은 조기에 막을 내린다.
연합을 해체한 반동으로 크고 작은 저항이 있었으나, 개중 몇몇은 사라졌고 몇몇은 다시 조용히 은둔생활을 지속했다. 이 잠잠한 시기에 커비는 온 조직원들에게 그간 킬로 블록에 충성해왔고, 자신의 입증한 클라렌스 셰퍼드, 일명 '셰퍼드'를 자신과 동등한 계급에 앉힐 것을 천명하였고, 모두 조직 내 셰퍼드의 입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1년 전에 커비와의 의견 차이로 다투로 조직을 이탈한 존 브릿지스, 일명 '브로커'가 셰퍼드와 함께 6번가에 나타났다. 커비는 그를 몇 번 훑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그와 포옹함으로 화해했다. 뿐만 아니라, 셰퍼드의 커다란 빈 자리를 메꿀 적임자로 브로커를 지목했고 모든 조직원도 이에 동의해 마지 않아하였다. 집 나간 탕아가 돌아온 것이다.
이 세 달 동안은 커비에게 있어선 황금 같은 시기였을 것이다. 자신이 이 킬로 블록이라는 너덜너덜해진 함선의 함장이 되었을 때 잡고자 했던 돈, 힘, 존경심, 신뢰라는 두 마리의 토끼와 여우를 마침내 잡았을 뿐만 아니라, 그 함선까지 고장난 곳 없이 정비해 놓았으니 기쁨을 감출 길이 없었을 터. 하지만 그 세 달은 그저 과도기에 지나지 않았다.
몽골스의 퇴장과 함께 동쪽에는 '그로브 스트릿 패밀리즈'와 '깔레(Calle) 페로스 니뇨스 13(이하 CPN)', 서쪽에는 '향촌동 파'와 '청방', 남쪽에는 '브라운 프라이드 로코스 21612' 등 신세력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킬로 블록의 커비 쿠퍼와 오다하라 구미의 야시로 와타나베는 그 신참들에게 고참들을 알릴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커비는 그의 모든 조직원들을 피그펜 클럽에 불러모아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고, 오다하라 구미 또한 그러하였다. 킬로 블록은 동부와 남부를, 그리고 와타나베는 서부를 담당해 다시 한번 힘의 차이를 절감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킬로 블록이 먼저 행동에 나섰다. 커비는 곳곳을 찾아가 자신의 의도를 천명했다. 개중엔 그의 뜻에 마지못해 동의한 이들도 있었으나, 이에 거부 의사를 표명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커비는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기 앞서, 그의 뜻에 함께한 이들을 한 데 불러모아 집회를 개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킬로 블록의 커비 쿠퍼, 스티븐 윌슨(일명 '로우디'), 라힘 라이든과 로코츠의 데오발드 페필로가 가장 먼저 집회 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머지를 기다리던 중 커비는 그의 조직원 중 한 명인 '지니'의 전화를 받는다. 지니는 CPN 일당이 킬로 일원들을 습격했다는 내용의 전화였다. 말그대로 맨 얼굴에 침을 맞은 꼴이 된 커비는 집회를 해산하고 그대로 로우디와 몇몇만을 이끌고 윌로우필드로 향해 눈에 밟히는 CPN 일원들은 닥치는대로 하나하나 처리해나갔다. 하지만 거리 근처에서 총성을 들은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이 도착했고 커비는 그대로 현장에서 체포당하고 만다. 다행히도 증거 불충분을 사유로 살인이 아닌, 살인방조 혐의로 가석방이 가능한 2년형을 언도받고 수감된다.
이 소식을 들은 브릿지스는 한숨을 내쉬며 집 밖으로 나오다 매우 뜻 밖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통화 내내 놀란 표정으로 일관했고,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공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 밖으로 나온 브릿지스는 발을 동동 구르며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공항 출입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구 점퍼를 입은 뚱뚱한 흑인 남자가 나오자 그에게 다가가 짧은 포옹을 나누었다. 둘은 한동안 웃기만 하다가 주차장에 세운 브릿지스의 차로 발걸음을 옮긴다.
남자는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로스 산토스 풍경들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자신의 마지막 고향에 도착한 참이었다. 짐을 갖고 내린 남자는 브릿지스와 다시 한번 포옹을 하고 브릿지스와 함께 그가 살던 옛집에 들어섰다. 먼지 투성이인 침대에 짐을 올려놓고 너덜너덜한 데다 먼지까지 가득한 소파에 앉은 남자는 얼굴을 양 손으로 쓸어내리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브릿지스는 그 남자에게 맥주캔을 건네며 그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3시간 정도 지났을까, 그 남자는 얘기를 마치고 현관에 앉아 그의 집 근처를 가만히 둘러보았다. 지나다니는 흑인들 중 몇몇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반면, 몇몇은 브릿지스와 함께 찾아온 이 이방인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그런 시선을 의식한 듯 또 다시 복잡한 표정으로 웃어보인 남자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한편, 커비는 한창 교도소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던 참이었다. 집회까지 개최하며 거창한 계획을 세웠건만 이런 날벼락이라니, 분명 크게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윌슨과 라이든이 면회를 위해 교도소로 찾아왔다. 면회석에 앉은 셋은 각자 웃으며 유리벽에 주먹을 맞대어 인사했다. 커비는 한동안을 그들과 농담 따먹기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윌슨이 라이든에게 눈치를 줬고 이를 의식한 라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트랜스라는 놈이 찾아왔어."라는 라이든의 한 마디의 위력은 커비를 놀라게 하기 충분하고도 남을 만했다. "브로커한테 나 없을 동안 잘 견디라고 전해."라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커비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거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운 커비는 소등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디 갔다 왔을까?', '지금의 킬로 블록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날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이 긴 글을 쓴 필자는 이 글을 반도 안 읽으실 분들이나, 빠짐없이 다 읽어주실 분들께 질문하겠다. 옛 리더가 돌아온 킬로 블록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또 한번 세대 교체가 이루어질까?... 뭐가 되었든간에 킬로 블록과 커비 쿠퍼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