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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所在地) :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光州廣域市 北區 梧峙洞)
주 조(主 祖) : 방필(邦弼)(17세)
자(字) : 공보(公輔),
호(號) : 읍취(挹翠),
관(官) : 승사랑(承仕郞)
생졸(生卒) : ~1592 임란(壬亂)
연 혁(沿 革) : 1813년(광해군,10) 후손(後孫)의 성역(誠力)으로 창건(創建)
1996년 건창(建昌) 주간하(主幹下)에 창건(創建)
2002년 대지(垈地) 대지(競賣)로 훼철(毁撤)되다.
행상(行狀)
공(公)의 휘(諱)는 방필(邦弼)이며 자(字)는 공보(公輔)요 호(號)는 읍취(挹翠)이시다.
기성군(箕城君) 긍(兢)의 7세 6세손이다.
공(公)은 지조(志操)와 행실(行實)이 고결(高潔)하여 일찍이 하서(河西) 김인후선생(金麟厚先生)과 더불어 정의(情意)가 매우 두터워 서로 종유(從遊)했으며 마을의 서편 작은 산에 올라가 일산(日傘)처럼 생긴 소나무가 있자 이름을 읍취(挹翠)라 짓고 그 소나무 아래에 정자(亭子)를 지어 현인(賢人)들은 사모(思慕)하여 봄, 가을에 강회소(講會所)로 삼았고 그로 인(因)하여 호(號)를 읍취(挹翠)라 하였다.
하서(河西) 김선생(金先生)의 후손(後孫) 김경조공(金景祖公)이 머리말을 지었고 계유년(癸酉年)(1873년)에 낡은 집을 중수(重修)하여 노사(盧沙) 기정진 선생(奇正鎭 先生)이 기록문을 지었다.
공(公)은 충의(忠義)가 순수(純粹)하고 독실(篤實)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선조(宣祖)25년 1592년.4월.13일)에 건재(健齋) 김천일장군(金千鎰將軍)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 막하(幕下)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누차(屢次) 적침을 막았으며 적선(敵船)을 사로잡아 많은 공(功)을 세웠는데 전쟁(戰爭)중 흉탄(凶彈)에 순절(殉節)하여 초혼(招魂)으로 장사(葬事)을 지냈다.
전투(戰鬪)에서 공(功)을 세운 기록(記錄)의 철권(鐵卷)이 있고 삼강록(三綱錄)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공(公)은 선조공신3등(宣武功臣三等)으로 임진왜란유사지(壬辰倭亂遺史誌)에 등재되었으며 1998년.11월에 충남(忠南) 보령시(保寧市)성주면(聖住面) 성주리(聖住里) 호국사(護國祠)에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고 제사는 매년 음력 4월 13일에 지낸다.
읍취정 중수기(挹翠亭 重修記)
광산(光山)은 옛날부터 사족(士族)의 연해(淵海)이며 오치(梧峙)는 광산(光山)의 명촌(名村)이라고 불리어졌다. 오치(梧峙)는 명현(名賢)의 세거지(世居地)라는 말이 부래(傅來)하고 있다. 중년(中年)에 친영(親塋)을 방석저(放石底)에 이장(移葬)하느라 래왕(來往)하는 길에 처음으로 마을을 볼수 있었다. 마을은 대나무 울타리가 이어지다가 끊어지기도 하여 완연(宛然) 옛날 듣던 그대로였다.
나는 그간에 옛 풍속(風俗)을 알만한 인사(人士)를 만나 자세히 알려고 했으나 동내인사(洞內人士)가 모두 생면부지(生面不知)여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 이모삼,사명(李某三,四名)의 청년(靑年)이 다행이도 찾아와 읍취정(挹翠亭)의 구적(舊蹟)을 가져와 읽어보니 옛날의 풍속(風俗)이 거기에 쓰여 있었다. 정자(亭子)에 대하여 상고(詳考)하니 처음 건립(建立)은 만역(萬曆) 이전(以前)이였다.
하서(河西) 김선생(金先生)이 일찍이 임어리(臨於里)에 올라 읍취(挹翠)라는 이름을 지었고 이사성(李司城)이 서문(序文)을 지었는데 정자(亭子)는 본디 읍취정각(挹翠亭閣)이었다. 이씨(李氏)가 망어동(望於洞)에 온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처음 건립(建立)은 이씨(李氏)의 노력(努力)이 많았고 선현(先賢)의 발자취를 두루 찾았던 것도 이씨(李氏)였다. 임진왜란후건립(壬辰倭亂後建立)하려고 힘썼던 이도 사성이씨(司成李氏)였으며 금년(今年)의 중수(重修)도 사성(司成)과 그 아우 참봉 후손(參奉 後孫)이 합심(合心)하여 정자(亭子)를 새로 단장하여 동리(洞里)를 빛나게 하려고 하였다.
咸平李氏 光州宗親會誌에서 발취 箕城君派 31세 30세손 建煥
1992년 광주광역시에서 발간(發刊)한 누정제영(樓亭題詠)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에 자리해 있다.
이 정자는 원래(原來) 이 마을 함풍이씨(咸豊李氏)의 주도(主導)에 의해 이 지역 주민들의 향약소(鄕約所)로 창건된 아주 오래전의 건물이다.
이 정자의 자세한 사적은 알수 없으나 조선조 중(朝鮮朝 中).명종(明宗) 당시의 유현(儒賢)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이곳을 찾아 그의 취미를 즐기었고, 또 읍취(挹翠)라는 이 이름이 그의 소감(所感)에 의(依)해 창출된 김인후(金麟厚)의 명명(命名)이라는 점에서 이 정자의 창건이 만력 이전(萬歷 以前)인 중(中).명종(明宗) 때에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의 읍취정 중수기(挹翠亭 重修記)에 이미 나타나 있고 또 이 정자의 중창(重創)이 임란후(壬亂後)에 있었다는 「임란중창」(壬亂重創)과 이 정자의 중수가 위 사성 이함일 형제(司成 李涵一兄弟)의 후손(後孫)들에 의해 금년(今年)에 이루어졌다는 「금년중수우출사성형제지손」(今年重修又出司成兄弟之孫)등의 관련기록이 있다,
이 정자의 이러한 창건연대로 보아 수십차례의 중건(重建) 및 보수(補修)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이러한 사실을 고증할만한 관계문헌이 없고 오직 위에서 이미 말한바 있는 만력 이전(萬歷 以前)의 창건(創建)과 임란 이후 중창(壬亂 以後 重創) 그리고 기노사 생존당시(奇蘆沙 生存當時)인 1873년대의 중수(重修), 그리고 고종(高宗) 24년인 1887 정해년(丁亥年)의 중수(重修)가 있었다는 상량문(上樑文)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 이 정자의 소유(所有)관계를 살펴보면, 함풍이씨(咸豊李氏)의 문중(門中)이나 또는 그의 선조 이방필(先祖 李邦弼)의 단독소유(單獨所有)가 아닌 오치마을 전체 주민들의 공동소유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사성 이함일(司成 李涵一)의 원서(原序)를 비롯한 기노사(奇蘆沙)의 중수기등(重修記等)에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곁들여 있다. 즉. 「이 정자는 원래 오치마을의 향약(鄕約)을 시행한 집으로서 한 성씨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다」라는 뜻인 정본(亭本) 오치향약지각비일성지사(梧峙鄕約之閣非一姓之私)라 는 사성 이함일(司成 李涵一)의 원서(原序)가 있고 또 이미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이 정자의 창(創),중건(重建) 및 보수가 모두 함풍이씨의 주도에 의해 이뤄졌다.
이러한 경로로 인하여 오늘의 이 정자는 이씨문중(李氏門中)의 단독소유로 변하게 되었고 또 이 문중의 선조로 김하서(金河西)의 연배(年輩)이며 초창(初創)당시의 주력자(主力者) 이방필(李邦弼)의 소건(所建)이라는 추측(推測)기록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승사랑 이방필소구」(承仕郞 李邦弼所 )라는 일부문헌(一部文獻)의 기록은 사실과 다른 잘못된 기록이다. 오늘의 이 정자가 비록 이씨문중(李氏門中)의 소유(所有)로 되어있다 할지라도 당초의 소유는 어느 문중(門中)이나 또는 개인이 아닌 이 마을 전체의 공유(共有)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위에서 말한 바 있는 원서(原序) 중수기(重修記)의 기록뿐 아니라 1879년 발행의 광주읍지(光州邑誌)의 1964년 발행의 광주지(光州誌) 등에도 이의 사실이 기록되 있다. 위 광주읍지(光州邑誌)의 경우는 「재광북십리향 동인 강약지소(在光北十里鄕 洞人 講約之所)라는 표시(表示)가 있고 또 광주지(光州誌)의 경우는 「재서방면오치리(在瑞方面梧峙里)하니 동인 강약지소(洞人 講約之所)라는 승사랑함평이공방필(承仕郞咸平李公邦弼)의 후예극력수호(後裔極力守護) 누차중수(累次重修)」라고 보다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관계기록에 의하면 이 정자를 지을 당시만 하더라도 청산록수(靑山綠水)의 푸른 산수(山水)가 앞뒤로 둘어있고 창송록죽(蒼松綠竹)의 푸른 송죽(松竹)이 경내(境內)에 가득하여 거의 청취일색(靑翠一色)의 승지(勝地)를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곳의 이러한 푸름을 감상하여 즐긴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읍취(挹翠)라 하였고 또 이 이름의 창명자(創名者)가 당시(當時)의 유현(儒賢)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라는 점에서 더욱 깊은 의의(義意)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재에 있어서는 읍취(挹翠)의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변화한 시가지(市街地)로 변하여 옛날의 이러한 흔적을 엿볼 수 없다. 단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옛날의 목조(木造)건물인 이 정자가 옛 모습 그대로 전래(傳來)되어 당시의 풍미(風味)를 풍겨주고 있다는 것 뿐이다.
이 정자의 형태를 살펴보면 도리 석초(石礎), 도리 기둥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정면(正面) 4칸, 측면(側面) 2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고 대부구조가 방이 없는 판자마루로 트여 있다. 정자의 정면에 정문형식(旌門形式)의 양주(兩柱) 출입문(出入門)이 설치(設置)되있고 그의 좌측(左側)에 조그마한 정원이 그리고 그의 석측(石側)에 조선유민(朝鮮遺民) 오산이공지비(梧山李公之碑)라는 구비일기(舊碑一基)가 자리해 있다.
이 정자로부터 한 계단 높은 곳에 함평이씨종회각(咸平李氏宗會閣)이라는 대형(大型)건물이 서있고, 또 그 옆에 도로(道路)로 통하는 철제대문(鐵製大門)이 달려있다.
정내에는 읍취(挹翠)라는 대서(大書)현판이 정면에 걸려있고 40여개의 각종시문(各種詩文)이 게벽(揭壁)되 있어 옛날의 훈훈한 문기(文氣)를 느낄 수 있다.
咸平李氏 先祖文化遺産總覽에서 발췌 建煥 31世 30世孫
함평이씨기성군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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