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없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모여서 한 문장을 이루고, 문장이 모여서 문단을 이루고 문단들이 모여서 의미를 갖는다. 종이 위에 쓰여진 까만 활자를 읽으면서 의미를 찾아내는 독서는 상당한 인내가 요구되어진다. 그것도 쉽게 이해되는 심심풀이 책이 아닌 다음에는 더 강도 높은 인내가 요구되어진다.
부피가 얇든 두껍든, 선생님께서 미리 딱딱하다고 겁을 주셨든, 재미있다고 사기를치셨든(?) 글두레에서 읽는 책들이 만만하지 않다.
한달에 한 권씩 선정해서 책을 읽는데, 성질 급하게 일찍 읽었다가는 독서토론 하는 날엔 거의 생각나는 게 없다. 그래서 벌써 요령이 생겨서 정기모임 다가올 무렵 쯤 읽는다.그런데 만약 글자만 줄줄 읽고 넘어갔다가는 토론할 때 꿀먹은 벙어리 역을 해야 한다. 그래서 시험공부하는 학생처럼 밑줄 쫙 긋고, 메모까지 하면서 정독을 한다.
물론 나도 예전에는 책장 넘길 때 침 바르는 것까지도 금기시했으니 감히 고귀한 책의 얼굴에 줄을 긋는 행위는 불경죄 내지는 서적모독죄였다. 그러나 책에 대한 태도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책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한 이후였다.
'만약 내가 책이라면, 내가 작가라면 메모하나 없이 색깔 밑줄 하나 없이
구부러진 페이지 한 장 없이 슬쩍 훑고 책꽂이에 꽂아두는 독자에게 감사할까?'
이런 유치찬란한 철학적 고민 끝에 난 대단히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만 아는 어떤 분께,시집을 선물했다. 내가 좋아하는 시 밑에는 감상을 달고, 멋진 구절에는 밑줄을 그어서....그랬더니 그 분은 내가 그 시집을 선물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읽어 보시라고 보냈는 줄 아셨나보다.아이편에 잘 읽었다면서 돌려보내셨다.
아무튼 열심히 책을 일고 의미를 찾고 메모를 하면서 읽는다. 그런데 혼자서 읽을 땐 별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이상한 일은 글두레 회원들이 모여서 독서토론을 시작하면 책이 갑자기 자체 생명력을 갖기 시작한다. 그 책의 숨어있는 의미들이 여기 저기에서 드러나기 시작하고, 내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 부분에서 감동의 숨결이 느껴진다. 또한 연결시키지 못했던 경험과 연결되면서 새롭게 창조되는 부분이 있다. 또한 선생님은 생각지 못했던 문제를 제기하면서 날카롭게 "왜"를 지적하신다. 그리고 이 책의 가치와 이 책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문제를 정리해 주신다.
그러면 의아해질 때가 있다.
'내가 읽었던 책이 지금 토론하고 있는 책 맞나?'
토론의 가치를 느낀다. 싸움만 있고,토론은 없는 나라. input만 넘치고 output은 가르치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나서 자란 우리가 토론을 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가치있고 멋진 일 아닌가?
요즘 대학 논술 시험 덕분에 논술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결국 논술이란 세상에 대한 문제제기와 문제 해결 방법이다.그러므로 갑자기 이루어질 것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논술마저 암기로 가르친다. 원래의 취지는 그게 아닐진데 안타깝다.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설득력있게 말하려면 참으로 여러가지 요소가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설득의 기술"아닌가? 논술이 대학 시험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논술 즉 토론의 기법은 그 후 살아갈 세상에서 더욱 필요하다.
이쯤되면 글두레의 가치에 무게가 실린다. 난 글두레 회원임에 자부심을 가지고, 다음달 도서 "선인들의 공부법"에도 밑줄을 쫙 그을 것이다.
첫댓글 아비용 님, 좋은 얘기임다. 글두레 끝나고 돌아갈 때 제일 글두레 회원들이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근데 새해엔 진짜 말 좀 줄여야 하는데....
그래요, 맞아요. 그래서 여기 회원들은 내 선생님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