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 냉천리(冷川里)
외동읍 소재지 입실리와 연안리, 구어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기봉산 북서쪽에 소재하는 냉천리(冷川里)는 ‘조별방’이라는 선비가 약 350년 전에 마을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당시 숲과 모래 사이에서 찬물이 많이 솟아 나와 ‘찬내’라고 했으며, 이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냉천(冷川)’으로 명명되었다.
냉천리(冷川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으나, 최근에 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빠르게 공단지역(工團地域)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그리운 내 고향 냉천리
마을 남쪽에 ‘냉천’이 흐르고 있고, 동쪽과 북쪽으로도 하천이 이어져 흐르고 있다. 하천 주변에 들판이 조성되어 있으며, 비옥한 토지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 서쪽에는 마석산(磨石山)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냉천, 지초, 덕동마을 등이 있다. 경주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울산방면으로 가다가 연안리에서 내남면(內南面)으로 넘어가는 904호선 지방도를 따라 우회전하여 곧 폐선(閉線)될 동해남부선 철길을 건너면 산기슭에 자리한 마을이 ‘냉천(冷川)’이다.
904번 지방도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은 다른 파일에서 소개한 대로 이미 폐선을 결정한 상태이며, 지금은 4량짜리 RDC(Refurbished Diesel Car)열차가 하루에 몇 번씩 운행하고 있으나, 경주역과 불국사역에만 정차하고 입실역과 모화역을 그냥 지나쳐 울산의 태화강역(전 울산역)에만 정차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RDC’열차는 코레일에서 지난 2008년부터 기존의 CDC(Commuter Diesel Car ; 차량 통근형 디젤동차)를 개조하여 무궁화호로 운용중인 차량을 말한다.
입실역을 지나쳐 지나가는 RDC열차
‘RDC'는 결국 CDC의 무궁화호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용어의 유래는 ‘일신하다’, ‘재단장하다’라는 영단어인 ‘Refurbish’에 수동태인 ‘-ed’를 붙이고, 뒤에 ‘Diesel Car’를 그대로 붙인 것이다.
CDC를 개조한 차량이지만, CDC 자체가 NDC(New Diesel Car)와 기술적 사양이 동일한 차량이므로 승차감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지난 4월 7일, 경주시내에서 개최한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 제7회 동기회에 참석하고, 울산공항으로 가는 길에 55년 만에 다시 들린 입실역(入室驛)에는 전원카페와도 같은 역사(驛舍)를 지키는 코레일 직원 한 사람만 있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듣다가 시간에 쫓겨 서둘러 떠난 발걸음이 어쩌면 입실역에 대한 마지막 발걸음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입실역의 마지막 모습
9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을 폐선하는 이유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역사지구(歷史地區)를 동해남부선이 관통하고 있어 이전이 바람직하다는 ‘유네스코’의 권고에 따라 경주 도심구간을 피하기 위해서다.
폐선하는 지금의 노선 대신 설치하는 새로운 동해남부선 복선전철 노선은 경부고속철도(京釜高速鐵道) 신경주역사(新慶州驛舍)가 들어선 건천읍 화천리 마을구간을 터널로 통과하고 모량리, 고란들 구간은 교량을 건설하며, 광명동 구간을 터널로 지나도록 계획되어 있다.
포항-울산 복선전철 노선도
그리고 이 계획에 따라 기존의 정거장 중 외동읍 구간의 모화(毛火驛), 죽동역(竹東驛), 경주시내구간의 불국사(佛國寺), 동방(東方), 경주역(慶州驛)은 폐지되고 입실(入室), 부조, 나원, 안강역은 이전 신설된다.
그리고 외동읍(外東邑) 구간 동해남부선의 경우 복선전철(複線電鐵)로 형태를 달리하여 남아 있게는 되나, 지금의 역사(驛舍)마다 수북하게 담겨있는 출향민(出鄕民)들의 애틋하고 정겨운 추억들은 그 역사(驛舍)들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2013년 10월, 코레일은 철도문화재심의위원회를 열고, 기존 동해남부선의 동래역, 경주역, 불국사역, 포항역 등 동해남부선 4개 역사(驛舍)는 철도기념물로 지정․보존하는 것으로 결정함으로써 경주역(慶州驛)과 불국사역(佛國寺驛)은 영구보존을 위해 지속적으로 관리하도록 되었다.
철도기념물로 지정된 불국사역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 서둘러 본론으로 돌아간다. 냉천리(冷川里)의 동쪽은 연안리와 입실리, 서쪽은 제내리, 북쪽은 북토리, 남쪽은 석계리, 구어리에 인접해 있다.
‘찬내’, ‘지초’, ‘거산’, ‘대밭골’이 냉천1리. ‘덕동’, ‘새터’가 냉천2리를 이루고 있다.
냉천1리는 최근까지 102가구에 36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면서 주로 벼농사와 ‘정구지(부추)’를 경작해 왔고, 한우(300두)와 돼지(5만두)를 사육했었다.
냉천리 마을회관
냉천2리는 71가구에 150여명의 주민이 벼농사를 짓고 살고 있는데, 10여 년 전부터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해 지금은 80여개의 공장이 들어선 공장지대(工場地帶)로 바뀌었다.
냉천2리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집성촌으로 지금도 13가구가 살고 있다. 냉천리의 자연부락과 중요 지형지물을 살펴본다.
냉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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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내
이 마을은 숲과 모래 사이에서 찬물이 많이 솟아 나왔다고 하여 ‘찬내’ 또는 ‘냉천(冷川)’이라 불렀다고 한다.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이라 ‘큰마을’, ‘대리(大里)’라고도 한다. 거산(巨山)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찬내 버스정류소
지초(芝草)
토질이 약초재배에 알맞고 약초재배를 많이 했다고 해서 ‘지초’, ‘지초리(芝草里)’라고 했다고 한다. ‘냉천(冷川)’ 북쪽에 있다.
안에 있는 마을을 ‘안지초’, 바깥에 있는 마을을 ‘바깥지초’라 부른다. 예로부터 ‘에헴! 지초, 돌메 못안’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북토리(돌메), 제내리(못안)보다 ‘지초’가 더 살기 좋다는 말이다. 지금은 약초 재배가 거의 없다.
냉천리 노인회관
거산(巨山)
냉천리(冷川里)에서 가장 큰 산인 독점산(獨占山 또는 獨芝山)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거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거산마을’에는 ‘효열비각 일국당’이 있는데, 이는 제내리 사일(士逸) 출신 김봉학(1935~2000) 여사의 효행(孝行)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7년에 세워진 비각이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다시 소개한다.
냉천리
대밭골
대나무밭이 있는 마을이다. 독점산 밑(동편)에 있다.
당목(堂木)
이 마을 ‘당나무’는 느티나무로 제당(祭堂) 옆에 있다. 본래 당목(堂木)이 죽고 새로 당목을 정해서 옮긴 게 30여 년 전이라고 한다.
덕동(德洞)
이 마을은 덕(德) 있는 인재가 많이 나왔다고 하여 ‘덕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덕이 있는 마을이 되라는 뜻에서 ‘덕동’이라 불렀다는 얘기도 있다. ‘자지밭’, ‘자지전(紫芝田)’이라고도 하는데, 터가 자라형국의 마을로 ‘냉천(冷川)’ 남쪽에 있다.
덕동 표지석
여기에서 말하는 ‘자지(紫芝)’는 지칫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줄기는 높이가 30~60센티미터이며, 잎은 어긋나고 피침 모양이다. 5~6월에 흰색 꽃이 총상(總狀) 꽃차례로 피고, 열매는 작은 견과(堅果)를 맺는다. 뿌리는 약용(藥用)하거나 자주색 염료로 쓰인다.
덕동(德洞)마을 주요 출향인사로는 서울법대를 나와 경상남도와 부산직할시 기획관리실장, 내무부 지방개발국장을 거쳐 경상남도 부지사, 전라남도 부지사, 국가보위입법회의 내무위원(지금의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고, 사단법인 지방행정연구소(地方行政硏究所) 이사장에 재임한 권순복(權純福)씨 등이 있다. 권순복씨는 우리 재경 외동향우회의 고문으로 추대된바 있다.
권순복 이사장
권순복 고문이 운영하는 (사)지방행정연구소는 1981년 5월 16일에 발족하여 그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지방행정(地方行政)과 지방자치제도(地方自治制度) 발전을 위하여 꾸준한 연구활동을 전개해 왔다.
특히 1984년 8월 31일에 창간된 「월간 자치행정」은 지방자치 관련 민간 전문지(월간)로서 지금은 권이사장의 은퇴로 폐간되었지만, 그동안 최장의 지령(誌齡)을 자랑하면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유일한 정보매체가 된바 있다. 필자의 사무실도 이 건물 8층에 있었다.
지방행정회관
새터
100여 년 전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새태’, ‘신기(新基)’라고도 한다. ‘덕동’의 서쪽에 있다.
새터마을 당목
이 마을의 당나무는 1962년에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젓나무이다. 이 마을이 사방공사를 잘해서 전국에서 1위를 했고 박정희대통령이 이를 기념해 이곳에 나무를 심었다.
처음엔 길머리에 있었는데, 40년 전에 도로가 나면서 당집부근으로 옮겼으나 태풍에 쓰러져 3년 전에 다시 제당(祭堂) 옆으로 옮겼다.
냉천리
효열비각(孝烈碑閣)
일국당 김봉학(1935~2000) 여사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2007년 거산마을에 세웠다. 여사는 경주시 외동읍 제내리(堤內里) 사일에서 태어나 17살에 이 마을 최석두와 결혼한다.
그러나 6.25 전쟁에 참전한 남편이 전사한다. 홀로 된 여사는 유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며 시댁어른들을 잘 모시고, 시숙모(媤叔母)까지 병구완하며 평생을 봉양하는 등 남다른 효행을 실천하였다.
장한 어머니상, 삼성문화재단 효행상, 한국보훈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나원역장을 역임한 최해암씨가 그녀의 아들이다.
호열비각
심강서당(心岡書堂)
‘지초’에 있는 서당으로 1970년에 일청 최명교(一靑 崔明敎)가 선조를 위해 세웠다고 전한다. 3칸 건물에 가운데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무의정(武宜亭)
밀양박씨의 재실로 호군(護軍)을 지낸 조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8세손 복수(福洙)가 세운정자이다. 울산(蔚山)에 공단이 개발되면서 1975년에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지었다.
냉천리
혜리원(惠利院)터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낸 조선 태종 때의 문신 하륜(河崙)이 울주(울산)에 다녀오다가 천왕사 승려로부터 경주와 울주(蔚州) 사이에 있는 덕방동(德方洞)에 여행자를 위한 원집을 지어 오가는 길손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훗날 원집을 짓고 ‘혜리원’이라는 현판을 써 주었는데, 지금은 매몰된 냉천지(冷川池) 위에 원(院)집이 있었다고 한다.
위에서 말한 부윤(府尹)은 조선시대 지방관청인 부(府)의 우두머리로, 종2품 문관의 외직(外職)이며 관찰사와 동격이다. 경상도의 경주부, 전라도의 전주부, 함경도의 영흥부(후에 함흥부로 고침), 평안도의 평양부, 의주부를 두었다.
경주부 위치도
1895년 을미개혁으로 전국의 부, 목, 군, 현의 명칭을 군(郡)으로 통일하면서 잠시 사라졌다가, 1년 뒤 다시 부활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에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그 수장을 부윤이라고 하였다. 광복 및 정부 수립 후에도 부윤이라는 관직은 계속 존재하다가 1949년에 부(府)를 시(市)로 바꾸기까지 존재하였다.
광복 당시 전국에는 22개의 부(경성, 인천, 개성, 대전, 전주, 군산, 광주, 목포, 대구, 부산, 마산, 진주, 해주, 평양, 진남포, 신의주, 함흥, 원산, 청진, 나진, 성진, 흥남)가 있었다.
경주부 관아
광복 이후 서울이 특별시(特別市)가 된 데 비해, 1946~7년 사이 춘천, 청주, 이리부를 설치하고 1948년 8월 15일 수원, 여수, 순천, 포항, 김천부를 설치하여, 1949년 당시 남한에는(개성 포함) 19명의 부윤이 있었다.
쓸데없는 주석으로 냉천리(冷川里)를 한참 지나치고 말았다. 다시 냉천리로 돌아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혜리원(惠利院)이 “경주부(慶州府)의 동남쪽 32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뒤가 다 산(山)이고, 초목이 무성하고 시냇물이 그 가운데를 흐르며, 나그네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에 알맞은 곳”이라고 적고 있다.
냉천리
독짐절
냉천 ‘독지(獨芝)산’ 중턱에 있는 절로 1852년에 창건했는데, 일명 ‘영지암(靈芝庵)’이라고도 한다. 30여 년 전에 산기슭으로 이전했다.
북녘산 새터
북쪽에 있는 산으로 지금은 공장부지(工場敷地)로 개발되었다. 이산에 ‘부엉이골’이 있다.
점안산
‘덕동(德洞)’ 북쪽에 있는 산으로 ‘쇠부리터’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냉천 휴게소
(904번 지방도의 휴게소다)
큰갓뻔디기
‘가방골’ 동쪽, ‘아기봉산’ 서편 아래쪽에 있다. 냉천리(冷川里)에서 제일 크고 넓은 편편한 산이다.
진등
‘독지산’에서 동으로 길게 뻗은 등성이다. ‘다리목거리’에서 ‘바깥지초’까지의 고갯길로 ‘진들길’이라고도 한다. ‘진등’의 ‘진’과 ‘진들길’의 ‘진’은 ‘길다’의 형용사인 ‘긴’과 같은 말이다.
당심(堂心)이
‘안 지초’에서 ‘바깥지초’로 연결된 길로 고갯길이다.
냉천리
못골고개
‘덕동(德洞)’ 북쪽에서 연안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그 아래에 못이 있다고 하여 ‘못골고개’라고 한다. 내남면(內南面)으로 넘어가는 도로변에 있었는데, 몇 년 전에 메워져 지금은 없어졌다.
못안고개
‘새터’ 남쪽에서 구어리(九魚里)로 넘어가는 고개로 못의 안쪽에 있다.
문고개 새터
서쪽에서 ‘덕동(德洞)’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덕동’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된다고 해서 ‘문고개’라고 한다. ‘문고개’의 ‘문’은 한자로 ‘門’을 말한다.
서낭고개
‘덕동(德洞)’ 서쪽에서 제내리(提內里)의 사이로 넘어가는 고개로 ‘서낭당’이 있었던 곳이다.
서낭당
점안고개
‘덕동(德洞)’에서 ‘찬내’로 넘어오는 고개로 ‘점안산’에 있다.
가방골
‘덕동(德洞)’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산 가운데 들이 있다.
갓짱골
‘냉천(冷川)’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갓을 쓰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고, 바위 아래 약수터가 있다. 이 약수터에서 환자(患者)들이 많이 나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양이 조금 뿐이라고 한다.
냉천리
골새
‘갓짱골’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새들이 많이 서식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골이 좁아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지초마을’ 남쪽에 있다.
덕동 뒷골
‘덕동(德洞)’ 뒤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덕동 앞골
‘덕동(德洞)’ 앞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덕방골
‘새터’ 남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논이 많다.
냉천리
막닥골
‘냉천(冷川)’ 서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로 다랑논이 30여 마지기가 있고, 더 올라가면 골짜기가 막혀 있다.
밖골
‘냉천(冷川)’ 서편 골짜기로 ‘성지골’ 옆이 된다. 지금은 현대중공업 물류센타가 들어서 있다.
부엉이골
부엉이가 둥지를 틀고 살던 골짜기로, ‘새터’ 서쪽에 있다. 지금은 공장부지(工場敷地)로 개발되어 있다.
냉천리
새앙골
‘새터’에서 연안리로 넘어가는 골짜기를 말한다.
성지골
‘냉천’ 서편에 있는 골짜기로 ‘막달골’ 남쪽이 된다.
암자골
‘절터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점안산’에 있다.
냉천리
절터골 밖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점안산’에 있다.
점안골
‘쇠부리터’가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로, ‘덕동(德洞)’ 서쪽에 있다.
물층층
물이 층층으로 폭포를 이루는 바위로, ‘찬내’ 서쪽 ‘점안골’에 있다.
거산골
‘거산마을’ 앞에 있는 들인데 골짜기에 있다.
냉천리
남녘들
‘찬내’ 남쪽에 있는 들이다. 옛날에 경주와 울산을 오가는 영남좌로(嶺南左路)가 이곳을 통과했는데, ‘다리목거리’에 주막(酒幕)이 있었으며 ‘장승배기’라고도 한다.
덕배이
‘덕방지’의 북쪽에 있는 들이다. 남쪽은 ‘못안들’이다. 여기에서의 ‘덕방지(德方池)’는 ‘냉천지(冷川池)’를 말하며, 지금은 위에서 소개한 대로 토사(土砂)로 매워져 저수지 형태가 없어졌다.
냉천리
뒷골
‘덕동(德洞)’ 뒤쪽 골짜기로 지금은 공장부지가 되었다.
샛들
‘냉천(冷川)’ 동쪽에 있는 논으로 옛날부터 물이 ‘샜다’고 한다. 여기에서 ‘샛다’라는 말은 ‘새고 샜다’, ‘새빌었다’, ‘새빠졌다’, '천지빼까리다'라고도 하는데, 표준어로는 ‘흔하다’, '흔해빠지다', ‘많다’라는 뜻이다.
결국 ‘샛들’은 논에 지하수(地下水)가 솟아나는 등 물이 풍부한 논이라는 말이 된다.
냉천리
자명들
‘냉천(冷川)’ 동북쪽에 있는 논들로 ‘찬내’와 ‘거산’ 사이에 있다. 지형이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제일 먼저 해가 뜨는 밝은 곳이라 ‘자명들’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명’은 법당에 켜 두는 ‘인등(引燈)’의 다른 말인 ‘자명등’을 말한다. ‘인등(引燈)’은 부처상 앞에 켜는 등이다.
황산골
‘독지산’에서 둑으로 흐르는 물이 큰 거랑이라 비가 잦으면, 황토물이 흐른다 하여 ‘황산골’이라고 한다.
냉천리
특골
‘당심이’ 너머에 있는 골짜기의 논으로 ‘안 지초’와 ‘바깥지초’ 사이 북쪽에 있다.
덕방골못
‘덕방골’에 있는 못으로 ‘덕방지(德方池)’라고도 한다. 덕방저수지는 산골짜기에 위치한 저수지(貯水池)인데, ‘덕동(德洞)마을’ 주민들은 냉천2리에 있는 현 덕방지를 냉천지(冷川池)로 부르고 있으며, 덕방지는 구어리에 소재하는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덕방지(德方池)는 도로에서 약 40M 산 쪽에 위치하며, 현재는 산(계곡)에서 내려온 토사(土砂)로 그 모양이 없어졌으나, 둘레 약 70M, 폭 15M, 깊이 1M 정도의 물웅덩이가 있고, 동쪽으로 오르면 평지가 나타나는데, 그곳에 혜리원이 있었다고 한다. 옛 덕방지 소재지는 냉천리 산12-5이다.
냉천리 덕방지(德方池)와 덕동못 위치도
뒷골못
‘덕동(德洞)’ 뒤쪽 골짜기에 있는 못인데, 지금은 공장부지(工場敷地)가 되어 있다.
남녘들보
남녘들에 물을 대는 ‘보(洑)’로 지금은 없어졌다.
황산천
‘독점산’에서 흘러내리는 거랑으로 ‘거산마을’ 뒤에 있다.
냉천리
구(舊) 모티
‘지초마을’ 북쪽 입구에 있는 들이다. 큰 당수나무(150년)가 있어 여름이면 그늘이 짙어 마을 사람들이 나와 쉬었는데, 1982년 경지정리(耕地整理)를 하면서 없어졌다. ‘지초마을’ 옆에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 여기에서의 ‘모티’는 ‘모퉁이’라는 말이다.
다리목거리
‘지초마을’ 앞에 있는 도랑에 옛날 한길에서 동리 입구까지 큰 바위로 다리를 놓았는데, 섬채만한 바위를 들판에 깔아놓았다고 한다. 이 도랑에 물이 많아 귀신(鬼神)이 비만 오면 물소리 때문에 제 목소리가 안 들린다고 “목 잡는다”고 소리쳤다고 전한다.
위에서 ‘섬채만한’이란 말은 돌이 ‘섬(石)’만하게 컸다는 말이 된다. 또한 ‘섬’은 곡식을 담는 ‘섬(두 가마니)’을 말하는데, 우리들의 고향에서는 아주 큰 것을 ‘집채’만하게 크다고 하고, 그보다 조금 작은 것은 ‘섬채’만하다고 표현한다.
섬
이곳에는 큰 객사(客舍)가 있었는데, 일제시대(70여 년 전)때 없어졌다고 한다. 말과 가마가 늘 대기하고 있을 정도로 이용객도 많았다고 한다.
구어리(九魚里)에 있던 영남좌로의 역참(驛站)과 일본으로 향하는 통신사(通信使)들이나, 지방관들의 휴게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냉천리 석불(石佛)
냉천2리 ‘새터마을’ 옆으로 작은 개천이 흐르고, 그 동쪽으로 제법 너른 들이 있는데, 절터로 전해오는 곳이다. 그러나 언제 어떤 절이 있다가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이곳 밭 한쪽에 석불(石佛)이 남아 있어 이곳이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다.
냉천리 석불
이 석불(石佛)은 심하게 훼손되어 원래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머리는 떨어져 나갔고, 가슴 아랫부분은 땅속에 묻혀 있다. 그리고 등 뒤로 석불 머리로 보이는 돌이 놓여 있다.
석불(石佛)은 깨어졌고, 닳을 대로 닳아 원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 땅 위로 드러난 것만 보아도 이 석불(石佛)은 꽤 크고 당당한 모습으로 추정되고 있다.
냉천리 석불
석불(石佛)이 서 있는 밭에는 지금 마늘이 재배되고 있고, 주위로는 공장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 어디에도 절터의 호젓함이나 적적함은 없어졌고, 어수선함과 삭막함만 남아 있다.
영지로(影池路)
904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외동읍 냉천리(冷川里) 211번지에서 7번 국도의 일부인 괘릉리(掛陵里) 1055-1번지에 이르는 도로를 ‘영지로(影池路)’라고 한다.
길이 6.610㎞, 너비 8m이다. 도로 주변에 있는 저수지 영지(影池)에서 도로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외동읍 냉천리(冷川里)·연안리·죽동리·괘릉리를 경유한다.
도로 시작 지점 인근에 냉천지방산업단지(冷川地方産業團地)가 조성되어 있으며, 도로 중간 지점에서 종점까지 아직까지는 남아 있는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나란히 이어진다.
영지로 방어리, 괘릉리 구간
(저수지 오른쪽 포장도로가 냉천리에서 시작한 '영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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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읍 냉천리(冷川里) 산69번지 일원에 소재하는 냉천지방산업단지(冷川地方産業團地)는 울산과 경주 인근의 공장부지난 해소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지난 1997년부터 1998년에 걸쳐 조성된 냉천지방산업단지는 총 6만5천280평으로, 자동차부품제조업, 강관제제업, 조립금속제품제조업 등 20여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냉천공단 기공식
단지(團地) 외에도 주변지역에는 자동차부품, 선박부품 등 100여 개 공장이 인접해 있어 업체의 협력화, 계열화, 전문화를 통한 상호 협력적 기술개발 시스템 구축이 용이하도록 되어 있다.
또 불국사(佛國寺)와 외동읍 지역 등 인근 주거단지에서 인력조달이 용이하고, 울산(蔚山)으로의 진입시간이 짧아 물류도 그만큼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냉천지방산업단지(冷川地方産業團地)에는 하루 145.4t의 용수가 공급되고, 하루 127.95t을 처리할 수 있는 오폐수 처리도 이루어지고 있어 지금은 조업과 주거요건이 많이 개선되어 있다.
냉천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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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읍의 냉천리(冷川里), 구어리, 입실리, 연안리에 걸쳐 있는 높이 227m의 산으로 마치 아기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하여 ‘아기봉’, ‘아그봉산’, ‘아암산(兒岩山)’, ‘애기봉’, ‘애기봉산’이라고도 하나, 아기봉(兒奇峰)이 맞는 말이다. 현지에서는 ‘애기봉’이라고도 한다.
필자의 모교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교가(校歌)에는 입실리쪽 ‘아기봉’이 등장한다. ‘아기봉’은 입실리 파일에서도 그 개요와 현황을 소개 드렸으므로 여기에서는 이 산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전설 한 토막을 소개한다.
아기봉(兒奇峰)
‘아기봉’은 한자로 ‘兒奇峰’이라고도 하는데, 크고 높은 바위들이 서로 얽혀 10여m 높이로 솟아 있어 마치 하늘에 닿은 마천루(摩天樓)처럼 보이는데, 특히 석양 때면 바위 봉우리가 붉게 물들어 더욱 신비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꼭 이루어야 할 소원이 있거나,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면, 이들 바위가 있는 산정(山頂)에 올라와서 치성(致誠)을 드린다.
‘아기봉(兒奇峰)’ 정상에는 ‘아암(兒巖)’이라는 기암(奇巖)이 있는데, 이 바위는 까마득한 옛날에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서 산아(産兒)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선녀(仙女)가 바위로 된 산봉우리에서 아기를 낳았으니 ‘아기봉’이 된 것이다.
아기봉
‘아기봉(兒奇峰)’이 태어난 전설을 소개한다. 아주 옛날 일이었다. 아기봉에는 날마다 새벽같이 이 바위에 올라가 치성(致誠)을 드리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오늘도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샛별을 보며 산으로 올라갔다. 바위에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워놓고 엎드려 절하려 할 때 하늘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선녀(仙女)가 보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목욕재계(沐浴齋戒)’는 ‘종교적 의식 따위를 치르기 위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쨌든 선녀(仙女)는 머리에는 황금(黃金) 꽃과 금 이파리로 장식된 관(冠)을 섰고 몸에는 비단옷을 입었는데, 어깨에는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긴 수건을 걸치고 있었다.
아기봉
선녀들이 어깨에 걸치는 긴 수건은 천의(天衣)라 하는데, 하늘을 나를 때 입는 날개옷이다. 그 천의 자락과 치마끈에 장식된 영락(瓔珞 ; 불교에서 쓰는 장식용구의 일종으로 산스크리트의 ‘묵타하라’ 또는 ‘케이유라’의 번역어로 ‘달개’라고도 한다)자락이 반짝반짝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그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룬다.
할머니는 너무 황홀하여 절할 것도 잊어버리고 정신없이 하늘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름을 탄 그 선녀(仙女)는 이 바위 봉우리로 향해서 날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두려운 생각에 근처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선녀(仙女)의 동정을 살폈다. 마침내 선녀가 바위에 다다르니 향기 짙은 오색구름이 바위를 감싸고 있어 주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기봉
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을까하여 눈을 크게 뜨고 선녀(仙女)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얼마동안 향기 짙은 구름이 바위를 감싸고 흐를 뿐 아무 인기척이 없더니 문득 “으앙 - ”하고 애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웬일일까. 할머니는 숲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바위 위를 쳐다봤다. 이 때 구름이 걷히며 바위위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선녀(仙女)의 모습이 보였다. “딱하기도 하지. 귀한 분이 혼자서 해산하셨으니 시중들 사람들도 없고 이를 어쩌나” 할머니는 걱정이 되어 혼자 중얼거렸다.
선녀(仙女)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반가워 주위를 살펴보며 말했다. “거기 누가 계십니까? 죄송한 부탁이오나 저를 좀 도와주세요”하고, 애원하였다.
할머니는 두려운 마음으로 선녀 앞으로 가서 “미천한 몸이오나 귀한 분을 도울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리 올라 오셔서 애기의 탯줄을 끊어주시고 목욕을 시켜 주셨으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할머니는 바위 위로 올라가서 아기의 탯줄을 실로 묶은 다음 가위로 자르고, 물을 길어 다가 둥글게 패인 바위 홈에 붓고 정성스럽게 아기의 몸을 씻어주었다.
아기봉
그리고 비단포대기에 싸서 선녀에게 안겨주었다. 선녀(仙女)는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하고, 가늘게 한숨을 쉬면서 자신이 지나온 사연을 이야기했다.
“나는 하늘나라 제석천왕(帝釋天王)의 막내딸로서 무한한 귀여움을 받고 자랐답니다. 그러다가 철이 들어 한 남자를 알게 되어 친하게 지냈습니다.
하늘나라의 법은 엄하여 부모님 승낙 없이는 어떤 남자와도 사귀지 못한답니다. 그래도 저는 그 남자 분을 잊을 수 없어 결혼하려 하였으나, 부모님께서는 그 것을 반대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명령이라 할 수 없이 그 사랑을 끊으려고 애썼으나 나는 그이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아기봉
그래서 부모님 몰래 만났습니다. 이번만 하고 만난 것이 여러 번 겹치어 결국은 그이의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아신 아버님께서 크게 노하여 저에게 인간세상으로 귀양을 가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하늘나라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할머니 지금 저는 귀양살이하는 몸이지만 인자하신 아버님이시니까 얼마 안 있어 귀양을 풀고 저를 하늘나라로 부르실 것입니다. 제가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해서라도 할머니의 은혜를 갚을 것이오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부탁합니다. 인간 세상 사람들이 아기를 헤칠지도 모르니까 저와 아기를 이 바위에 숨어 살고 있다는 말씀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부탁한다.
아기봉
할머니도 모든 것을 비밀에 붙일 것을 굳게 약속하고 그 날부터 선녀(仙女)의 시중을 들었다. 우선 선녀의 거처할 곳을 바위 밑에 있는 동굴로 옮기고, 밥도 지어주고, 빨래도 해주고, 아기도 봐주며, 불쌍한 선녀를 지성으로 돌봐 주었다.
어느 듯 2주일이 지나자 선녀(仙女)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밥도 짓고 빨래도 하게 되었으므로 할머니께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제가 할테니 할머니께서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하면서 할머니께 오래 폐 끼치는 것을 미안해했다.
아기봉
그러나 할머니는 예쁘고 마음 착한 선녀(仙女)가 혼자 고생하는 것을 애처로이 여겨 계속하여 바위에 올라가 선녀의 시중을 들었다. 아기도 건강하게 잘 자랐다.
그러자 아기가 태어난 지 3칠일(21일)이 되는 날 아기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걸으며 말하였다. “어머니 하늘에는 악한 사람이 없으므로 힘이 필요 없지만 인간 세상에는 악한 사람도 있으므로 힘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제부터 힘을 기르겠습니다“하고 나가더니 석굴 앞에 있는 지름 50cm 길이 1m쯤 되는 돌을 밧줄로 묶어 짊어지고 동몽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도로 석굴 앞에 갖다 놓기를 날마다 계속하였다.
아기봉
선녀(仙女)는 남의 눈에 띄는 일은 좋지 않으니 조용히 누워 잠자고 있으라고 했다. 그래도 아기는 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고 자고 일어나면, 바위 돌을 짊어지고 산정(山頂)에 갔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원 간난 아기가 바위 돌을 짊어지고 산으로 오르내리다니 보통일이 아니야” 하고 할머니는 감탄하였다.
할머니는 아기가 하는 일이 너무도 신기하여 선녀(仙女)의 간절한 부탁도 잊어버리고, 저녁 식사 때 집안 식구들 앞에서 선녀와 아기의 이야기를 해 버렸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자기 입을 막으며 식구들에게 이 이야기는 비밀이니 다른 사람한테 절대로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식구들은 각각 친한 사람들에게 절대 비밀(秘密)이라는 조건을 달고, 이야기를 퍼뜨려 그 소문이 온 나라 안에 퍼졌고, 끝내 임금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아기봉 바위
임금님은 그 소문이 잘 믿어지지 않아서 한 사람의 신하를 몰래 이곳 ‘아기봉(兒奇峰)’으로 보내서 그 이야기가 사실인가를 알아 오도록 하였다.
돌아온 신하는 “태어난 지 3칠일에 큰 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힘을 기르고 있는 아이가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고 선녀(仙女)의 아이랍니다” 하고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면 그 아이가 어른이 되면 얼마나 힘이 세어질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보통 사람이라면 임금이 불러서 장수(將帥)로 쓰면 나라의 힘이 되겠지만, 하늘나라 사람이니 인간의 말을 들을 것인가.”
아기봉
그 힘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언제 대궐(大闕)로 쳐들어와서 자신을 해치고 나라를 빼앗을지도 모를 일이다.
임금은 불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걱정하다가 몰래 군사들을 보내서 그 아기를 없애버리라고 명령했다.
깜깜하게 어두운 밤이었다. 선녀(仙女)는 촛불을 밝혀 놓고 아버님께 “하루 속히 노여움을 푸시고 아기와 저를 불러 하늘나라에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드린 후 불을 끄고 금방 잠이 들었고, 아기는 굴 밖에 있는 높은 바위 위에서 자고 있었다.
군사의 대장은 아기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바위 주위에 군사들을 배치 해 놓고 아기가 자고 있는 위치를 확인한 후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바위에 기어 올라가 잠자는 아기를 죽여 포대기에 싸서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그랬다는 증거로 아기의 시체(屍體)를 들고 가려했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이 우직근하면서 번개가 번쩍하더니 ‘으르릉 ...’ 쾅하고 하늘이 무너질듯 한 우레 소리와 함께 폭우(暴雨)가 쏟아졌다. 아기의 시체(屍體)를 옮기려던 군사는 겁에 질려 모두 도망갔다.
아기봉
우레 소리에 놀라 깬 선녀(仙女)가 아기를 부르며 아기가 자던 바위에 와 보니 아기는 죽어 있었다. “아가야!” 선녀(仙女)는 와락 달려들어 아기를 안으려 했으나, 아기는 그 바위 위에 돌이 되어 있었으므로 안을 수 없었다.
선녀(仙女)는 너무나 기가 막혀 아기 위에 쓰러졌다. 이제 선녀에게는 하늘도 땅도 보이질 않았고, 아기 없는 세상은 모두가 필요 없었다.
오직 아기를 위해 하늘에서 쫓겨 지상(地上)에까지 왔건만, 이제 아기가 없으니 더 갈 곳이 없었다. 희망을 잃은 선녀(仙女)는 아기를 부르면서 돌이 된 아기 위에 엎드린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튿날 할머니가 바위 위에 찾아갔을 땐 ‘아기’는 포대기에 묶인 채 돌이 되어 있었고, 선녀(仙女)는 싸늘한 시체로 쓰러져 있었다.
아기봉
할머니는 선녀를 부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고,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지. 비밀로 하라던 말을 왜 식구들에게.......”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쳤다.
지금도 바위 위에는 포대기에 묶인 아기의 시체(屍體)가 돌이 되어 남아 있고 아기가 태어났던 곳 탯줄을 끊은 가위 자국과 목욕시키던 대야처럼 생긴 둥근 돌 홈이 함께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동굴 앞에는 아기가 지고 다녔다는 돌이 있는데, 그 돌에는 두 줄의 밧줄자국이 있다. 그래서 그 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 봉우리를 ‘아기봉’(兒奇峰)이라 불렀으며, 이 ‘아기봉’ 부근에서는 부정(不貞)한 일을 삼가고 있다.
아기봉에서 본 입실리
‘아기봉(兒奇峰)’에는 일제시대 때부터 경주의 일부 선비들을 중심으로 해마다 9월 9일 중양절(重陽節 ; 중구절(重九節) 또는 구일(九日)이라고도 함)이 되면, 이곳에 모여 나라 잃은 안타까운 심정을 한시(漢詩)로 발표하는 문학활동을 지속하고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그 전통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기봉(兒奇峰)의 냉천리(冷川里) 쪽 산비탈은 ‘아기봉 비알’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기봉산 서쪽에 있는 산비탈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비알’은 ‘삐알’이라고도 하는데, ‘비알’은 ‘비탈’을 말하고, ‘산비알’은 ‘산비탈’을 말한다.
“산비알에 서너 호가 모애 사는 데가 우리 마실이다”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산비탈에 서너 가구가 모여 사는 곳이 우리 마을이다”라는 뜻이다.
산비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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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천리(冷川里) 출신으로는 앞서 소개한 권순복(전 경남부지사, 국가보위입법회의 내무위원), 이종길(전 울산중앙초등학교 교장), 박숙환(전 경주시청 교통계장), 이종기(월성동 사무소), 이규찬(예비역 공군 대령), 권영택(행정고시, 안전행정부), 최해암(나원역장), 이복우(전 국회서기관 현재 미국유학중), 김순덕(사법고시 합격)씨 등이 있다.
우리 외동향우회 카페의 독보적인 칼럼니스트 이상길 향우께서도 냉천리(冷川里) 출신이다.
냉천리(冷川里)
배경음악은 다른 마을의 경우와 같이 이미자(李美子)의 ‘고향의 봄’을 선곡(選曲)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마을마다 같은 곡을 실어 조금은 진부(陳腐)하게 생각될 수도 있으나, 이 가요는 국민가수 이미자(李美子)가 직접 작사하고 작곡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고 감상하시면 지루함을 덜 수 있을 것이다.
고향의 봄
작사 : 이미자
작곡 : 이미자
편곡 : 박경호
흑난초 곱게 피는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찾아와서 집을 짓겠지
내 어이 고향 두고 타향을 왔나
그리워서 불러보고 눈물을 짓는
정든 고향 찾아가자 꽃피는 고향
흑난초 눈에 어린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돌아와서 피었으련만
천리타향 머나먼 곳 내 어이 왔던가.
오늘 밤도 잠 못 들어 밤을 지새는
정든 고향 나는 가리 꽃 피는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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