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참부모님의 성탄과 소명
제4장 참어머님의 섭리적 준비시절
2절 학창시절과 참아버님과의 만남
하늘의 인도대로 살아온 학창시절
참어머님께서는 서울 효창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대구, 서귀포, 춘천 등지를 거치면서 학업을 계속하셨다. 특히 춘천 봉의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매우 정숙하고 친절하며, 어딘지 고상한 태도가 보이고, 급우 중에 가장 여자답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학교 졸업 때에는 우등상을 받으셨다. 그리고 참어머님은 1956년 4월부터 1959년 3월까지 성정여자중학교에 다니셨다. 그 후 참부모님께서 선정중학교로 교명이 바뀐 이 학교를 1987년 4월 인수하셨다. 그리고 1959년 3월에 오늘의 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 전신인 서울의 성요셉간호학교에 입학하셨다.
1 나는 월남한 뒤 서울 효창동에 방을 얻어 지내면서 효창초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대구와 제주도로 옮긴 뒤에도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대모님이 나를 더욱 정결하게 키우겠다는 의도로 1954년에 제주도로 건너간 후로는 서귀포 신효초등학교, 즉 오늘의 효돈초등학교 5학년으로 전학했습니다. 그러다가 강원도 춘천의 보급창장으로 발령받은 외삼촌이 편지를 두 차례나 보내와 춘천으로 오라고 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춘천의 효자동 외삼촌 집과 가까운 약사동에 방을 얻어 살면서 1955년 2월에 춘천 봉의초등학교로 전학하고 곧 6학년에 진급한 뒤 이듬해인 1956년 3월 2일에 제11회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외삼촌의 도움으로 1956년 4월 10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성정(聖正)여자중학교에 입학하여 1959년 3월 25일 제3회로 졸업하였습니다. 이 기간 외삼촌 식구들과 함께 돈암동과 신당동에서 생활하면서 사직동을 통학을 하였습니다.
2 내가 중학생 때 학교에서 운영위원장을 한 기억이 있는데, 그때 전교생이 있는 자리에서 단에 올라가 결정된 사항을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내려오니까 그때 국어선생님을 비롯한 몇몇 선생님들이 ‘야! 학자가 대단하다!’라고 했습니다.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는 조용하고 얌전한 학생이라는 인상을 주었고, 얼른 가까이하기도 어렵다는 느낌을 많이 주었는데, 그렇게 발표를 하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나는 그냥 설명한 것뿐인데 말입니다. 그것이 내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해 본 첫 경험이었습니다.
3 최근 나를 찾아온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함께 중학교에 다녔는데 그의 아버지가 나를 무척 사랑해 주셨습니다. 또 1년 선배가 나를 보고 단정하고 예쁘다고 관심을 많이 가져 주었습니다. 그 선배는 캐나다에 살면서 자주 나에게 편지를 보내 오기도 하고 한국에 오면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언젠가 내가 다니던 학교에 가 보니까 그 당시 국어선생님이 그대로 계셨습니다. 그 국어선생님의 얼굴이 기억났습니다. 또 수학선생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셨습니다.
4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는 전쟁이 끝난 뒤라서 거리마다 부상자가 넘쳐났습니다. 전쟁 고아와 아이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병이 나더라도 제때 치료받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그들이 너무 불쌍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간호학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5 나는 어느 학교를 가더라도 선생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착실하게 보여서 그런지 선생님들이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또 선생님들이 ‘너는 요즘 아이 같지 않다. 좀 나가 다녀 보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고민이 많다든지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좋아서 그랬던 것입니다. 사춘기라든가 성장기에도 나는 생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외할머니나 대모님께서 항상 하늘을 모시고 사는 신앙을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대모님의 엄격한 지도 아래 여러 가지 책을 숙독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맞는 한 두 명의 친구와 과일나무를 키우며 전원생활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너는 새침데기이지만 시집은 먼저 갈 것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성혼한 후에는 과거 학창시절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기억이 안 납니다. 또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최근 들어 가끔 찾아오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때의 기억이 조금 되살아나곤 합니다.
6 나는 편안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 독서와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지적인 이미지의 학생으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극히 감정적이지도 않고 극히 격하지도 않았는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좀 차가운 느낌까지 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기숙사에서 수녀와 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마치 온실 속에서 핀 한 송이의 꽃같이 완전히 바깥 환경으로부터 나 자신을 격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언젠가 주님을 만나 뵙고 주님의 신부가 되기 위한 사람으로서 성별하고자 하는 하늘의 준비과정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7 나는 1960년까지는 의복으로 감싸듯이 나 자신을 거의 나타내지 않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늘이 나를 세상과 타협 안 하는 생활로 이끄시니까 단출한 생활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사탄세계의 공기를 마시는 것도 싫어할 만큼 철저히 보호해 주셨고, 그런 환경 속에서 나 자신의 생각을 다 없애고 하늘이 인도하는 생활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항상 일기를 썼는데, 이상한 것은 생각 없이 글을 쓴 것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든가 대개 이런 문구였다는 것입니다. 훗날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그런 것들이 의미 있게 기억되곤 했습니다.
8 어머니는 단상에서도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단상에서 처음으로 노래를 부른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노래를 부르면 아주 유명했습니다. 누가 앞에 있든지 단상에 올라가면 챔피언처럼 당당했습니다.
9 어머니는 결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좋기만 한 어머니입니다. 그것이 그냥 그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남자들을 대할 때에는 아버지와 비교해봐서 ‘우리 아버지가 이러니 저 남자들도 이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니만큼, 마음이 넓어지기 때문에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과 손을 보십시오. 얼마나 예리하고 예민한지 모릅니다. 한마디 하게 되면 주어가 어떻게 되고 목적어가 어떻게 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민하지만 잘 분석한다는 것입니다. 10대 때 친구들 앞에 인상적인 여성으로서, 기억할 수 있는 표상의 여성으로서 생각했다는 말들을 듣게 되는데, 예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고 가는 길도 함부로 안 다녔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곳으로만 다니는 것입니다.
참아버님과의 만남
성주교의 김성도씨는 장남 정석천씨에게 ‘내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이 뜻을 성사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이룰 것이다. 그 대신자도 나와 마찬가지로 음란집단으로 오해받아 핍박을 당하고 옥고를 치를 것이다. 그런 교회가 나타나면 참된 교회인 줄 알고 찾아가라.’고 유언을 하였다. 그래서 정석천씨는 누님 정석온씨와 함께 어머니 대에서 이 뜻이 이루어지지 못할지라도 다음 대 아니면 그다음 대에 가서는 꼭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남하한 뒤 가정에서 열심히 예배를 올리면서 어디에서 이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고 찾아다녔다. 그런 가운데 신문에 보도된 이화여대 퇴학사건에 대한 기사를 잃은 뒤 정석온씨가 딸과 함께 장충동 서울 통일교회를 찾게 되었다. 그 후 참아버님께서 1955년 10월 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무죄로 석방되신 후 정석천씨의 소식을 듣고 대구 동성로의 정씨 집을 방문하셨다. 이로 인해 대모님과 참어머님이 참아버님을 만나게 되었다.
10 참아버님께서 서대문형무소 출감 후 부흥회 격려 차 대구에 내려오셨을 무렵인 1955년 11월경 춘천에 계시던 대모님은 정석천씨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성주교와 똑같은 교회가 서울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아버님께서 지금 대구에 내려오셔서 말씀을 하시니 빨리 와서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모님은 사정상 곧바로 대구로 내려가지 못하고 다음 달인 12월에 내려가셨습니다. 대모님이 대구로 내려가니 정석천씨가 ‘이제야 우리가 주님을 찾았습니다. 복중교에서 옷을 준비하고 맞이하려던 그분을 이제야 찾았습니다. 그분이 대구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이미 서울로 올라가셨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복중교에서 가르치던 것과 똑같은 것을 가르친다고 말하였습니다. 대모님은 이제 서울로 올라가면 그리던 분을 뵐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부족함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날 저녁 몽시에서 황금용 한 쌍이 서울 쪽을 향해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대모님은 속으로 ‘대구로 올 때에는 하얀 용이 보이더니 대구를 떠나려 하니 황금용 한 쌍이 보이니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청파동1가 전 본부교회에서 참아버님을 뵙고 인사를 올렸습니다. 놀랍게도 그분은 복중교 시절 두 번의 몽시에 뵈었던 바로 그 모습, 꿈에도 그리고 그린 주님의 모습이었다고 했습니다. 대모님은 너무나 황공한 마음이 들어서 몸 둘곳을 몰랐다고 합니다.
11 나는 북한에서는 아버님을 만나뵐 수 없었고, 남한으로 내려온 후에 서울에서 처음으로 만나 뵈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만 13세 때로 초등학교를 마치고 나서였습니다. 당시는 대모님과 함께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 무렵 나는 강원도 춘천에서 살고 있었고 아버님은 서울에 계셨기 때문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1956년 3월 대모님에게 이끌려 청파동 교회에 가서 처음으로 아버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버님과의 만남 이후 청파동교회에 다니면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12 아버님께서 학생복을 입은 나를 보시고는 눈을 지그시 감으시면서 감탄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모든 것은 하늘이 준비하셨다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내 성격으로 보나 살아온 배경으로 보나 말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과 함께 제물을 드리기 위해 산에 올라갈 때 아브라함에게 제물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셨다면서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린 이삭은 이미 거기에서 상황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나도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되는가 보다 하는 상황 판단을 어려서부터 했습니다. 재림주님의 상대로서 준비된 자신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느꼈습니다. 나는 이미 내 정해진 길을 갈 수밖에 없도록 태어난 것입니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자리였지만 나는 모든 것을 이겨 나왔습니다.
13 여러분은 아버님이 성혼을 결심하고 처음 나를 만났을 때 첫 대화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제일 궁금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모든 식구들이 아버님을 좋아하면서도 어렵게 대하는 때였지만 나는 무섭게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화를 낼 것 같지 않은 인상이었습니다. 꼭 우리 외할아버지를 뵙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 사람들 중에는 아마 ‘저 사람은 나이는 어린데 굉장히 대담하다.’라고 느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당시 할아버지로 느끼고, 아버지로 느끼고, 그다음에 신랑으로 느끼고, 오빠로 느끼고, 아들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14 아담 해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타락했는데, 그때는 하나님과 일문일답하던 시대니까 하나님이 경고를 하지 않았어도 본심의 작용에 따라 말씀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생각하면서 성장해왔습니다. 내가 만 17세에 아버님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힘들게 걸어오신 탕감복귀섭리역사를 내 대에서 끝낸다. 내가 끝낸다.’라고 스스로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 그러한 내용을 교육받은 적이 없었지만 그러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5 나는 아버님을 만났을 때 섭리역사를 알았습니다. 원리를 공부한 것도 아닌데 탕감복귀섭리역사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이 재림주로서 사명을 완성․완결했다고 선언하려면 내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는 누구한테 미루지 않겠다. 나 스스로가 책임을 다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이 뜻은 발전하고 성공한다. 사탄은 반드시 물리친다.’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나는 몸 마음을 다 바쳐 희생하였습니다.
남한에서의 신앙생활
참어머님께서는 조원모 외할머니와 홍순애 대모님과 함께 1948년 월남하신 뒤 서울과 대구, 서귀포, 춘천 등지를 옮겨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셨다. 대모님이 대구에서 지낼 때 낯선 남자 한 사람이 참어머님을 보고 ‘천지간에 신성한 분’이라고 증거를 하는 등 참어머님께서는 어디를 가든지 주목의 대상이었고 많은 영적 증거를 받으셨다.
16 성주교의 김성도씨는 옥고를 치른 뒤 타계하고 남은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명맥을 유지하다가 허호빈씨를 중심한 복중교가 그 뒤를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성주교는 북한 공산당 치하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김성도씨의 장남 정석천씨는 월남하여 광산사업을 하다가 대구 동성로에 집을 마련하고 쌀과 석유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대구에서 6․25전쟁을 거치면서 정씨 가족과 대모님 일행의 해후가 이루어졌습니다. 대모님은 정석천씨 식구들과 모여서 얘기하다가 ‘우리가 이북에 있을 때 성주교의 새주님과 복중교의 허호빈씨를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고 큰 역사가 있었다. 재림 주님은 한국에 오실 것이니 이 길을 찾기 위해 우리가 모여서 힘써 기도하자.’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정씨의 누님 정석온씨도 부산에서 올라오게 하고, 여러 식구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대모님은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17 대모님이 대구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삿갓을 쓰고 지나가던 도인이 초등학생이던 어린 나를 보더니 놀라운 증거를 하였습니다. ‘이 딸은 열 아들 부럽지 않으니 잘 키우십시오. 열일곱 살이 되면 나이 차가 많은 사람과 결혼할 귀한 딸입니다. 육해공의 재산을 가지고 부자로 살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대모님이 그 말을 듣고 놀라서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태어날 때부터 그런 운명으로 태어났다고 하였습니다. 대모님은 그 말을 듣고는 진리 말씀을 찾아 신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재림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온전하게 길러야겠다고 생각하여 제주도로 가서 생식을 하는 등 혹독한 영적 단련생활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후 참아버님을 만나서는 나를 통일교회의 중요한 일꾼으로 키우려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만큼 티끌 한 점 묻지 않도록 하여 하늘의 뜻을 위해 바치기 위한 섭리에는 극단적이고도 눈물겨운 사정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18 조원모 외할머니는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성별된 생활을 하셨으며 나에게 성경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대모님은 성경을 열심히 봉독하고 성심을 다하는 신앙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내 주변에는 늘 성경이 있었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성경을 읽게 되었고 하늘부모님이 인도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활은 대구에 피란 가서나 동란 이후 제주도와 춘천으로 전학해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대구에서 주일학교를 다닐 때에는 학생 대표로 노래도 자주 불렀습니다.
19 대모님은 피란해 있던 대구에서 성주교 김성도씨의 장남 정석천씨를 만난 뒤 새주님이 한국에 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에 힘쓰면서 솔잎을 먹는 생식을 하며 살았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는 예쁘고 공부를 잘해 주위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모님은 내가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셨습니다. 나에 대해 ‘주님의 딸’이라는 계시나 증거가 많았기에 그랬습니다. 결국 대모님은 재림주님을 만나기 위해 1954년 제주도로 건너가셨습니다. 나는 뱃길에 멀미가 심해 고생한 기억이 납니다.
20 대모님의 관심은 늘 ‘하늘의 신부’라고 축도받은 나를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이듬해 혼란한 육지를 떠나 제주도에서 약 9개월을 보내셨습니다. 당시 제주도에는 성주교 김성도 할머니의 작은아들 정석진(정평화)씨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고난을 체휼하기 위해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의 고통을 재현할 정도로 뜨거운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대모님은 이분과 함께 더욱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낮에는 밭을 갈아 농사일을 하고 생식을 하면서 밤에는 기도와 정성을 들이는 나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