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종보 내용 -
字仲通號敬庵諡文敬
洪武2年恭愍王乙酉西記1369年4月11日生
乙丑中司馬試
恭愍王庚午西記1390年登文科入李朝大匡輔國崇祿大夫行議政府左議政淸白吏入耆老社賜机杖
正統4年 世宗己未西記1439年12月28日卒享年72
配享 世宗廟庭享河陽琴湖書院正宗14年庚戌西記1790年宣額
墓坡州郡坡平面梨川2里博山內甲坐有表誌南秀文撰
配貞敬夫人寧海朴氏父大司憲良靖公經生2男3女
*자는 중통 호는 경암 시호는 문경공
홍무2년 공민왕 을유 서기 1369년 4월 11일출생
을축 중사마시
공민왕 경오 서기1390년 등문과 입이조대광보국숭록대부행의정부
좌의정 청백리 입기노사 사궤장
정통4년 세종 기미 서기1439년12월18일졸 향년72
배향 세종묘정 향 하양금호서원 정종14년 경술 서기1790년 선액
묘파주군파평면 이천2리박산내 갑좌 유표지 남수문찬
배 정경부인영해박씨 부 대사헌양정공 경생 2남3녀
* 궤장(几杖) : 70세 이상이 된 일품관으로서 국가의 요직을 차지하여 치사(致仕 : 나
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할 수 없는 신하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안석(案席)
과 지팡이. 궤장을 받을 때는 궤장연이 성대히 베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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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파 문경공파(文敬公派)
시조 12세손 휘는 조(稠),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庵),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 주세거지 : 하양,와촌, 대구, 괴산, 공주 등
- 주요 유적 : 금호서원 (부호리 114번지)
연혁 : 숙종 10년(1684) 도유림에서 하양현 금호동(금락리)에 창건하였고 경종 4년(1724) 사이동(현 서사리)에 창건하였으며 정조 14년(1790) 사액(賜額)되었다. 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인 경덕사를 훼철하고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으며 강당은 그 후 철거해 두었다가 1913년 현 위치에 이건하였다. 이어 사당인 경덕사도 복원하고 모두 여섯동의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금락리 금호서원 : 하양읍 금락1리에 있으며 문경공, 정간공, 수찬공 배향하고 있다.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3대를 모시는 세덕사이다.) 하양읍 부호2리에 살고 있는 시조20세손 부위공(副尉公) 형제의 후손들이 1924년 경 따로 서원을 세워 봉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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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庵先生實記(解)
世之稱李朝相業者輒(문득첩)曰黃許세상에서 말하기를 이조의 정승이라면 황허라고한
다 黃卽翼成황은 익성이요 許卽文敬허는 문경인데 兩公當英廟盛際양공은 영묘
성세에 당하여 翼成以器量익성은 기량으로써 文敬以禮行同문경은 예행으로써居三事贊成隆治自삼사에 동거하여 융치를 찬성하였다.當時觀之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器量之得力於事功者기량이 사공에 득력한 것은顯而易見현저하여 보기기 쉽지만禮行之受效於國家者예행이 국가에 효력을 미치는 것은微而難知故미미하여 알기 어려운 고로의 議者多先黃논하는 자 먼저 황을 말하고而後許 허를 먼저 말하는 자 적었다. 然而文敬公歿後그러나 문경공이 졸한 후에公之胤(이을윤)貞簡公공의 장자 정간공과貞簡之繼子修撰公정간공의 계자 수찬공이相繼立殣(굶어죽을 근 묻을 근)상계립하여一文風絶卓絶動人일문풍절이 탁절동인하니是蓋文敬遺訓有이것이 대개 문경공의 유훈이以薰陶垂裕而成就之者훈도수유하여 성취된것으로서不知翼成之後亦有是否於 익성의 후손은 이런 것이 없지 않은가 是乎禮行之效果 이것으로 볼 때 예행의 효과가非立朝事功之所軒輊(숙은수레지)也입조사공의 한때 우쭐하고 높이 처다보는 것보다나은 것이 아니 겠는가 不倿嘗溯(=遡거슬러올라갈소)跡불초한 내가 일찍 옛 자취를 더듬어論世而敬慕於公者 深矣 세사를 논할 때공에게 경모함이 극심한지라及來嶺藩 영번에 왔을 때에 河陽使君李候憲洛袖(소매수)一冊示不倿曰하양부군 이후헌락이 일책을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되縣許文敬桑梓鄕也 이 고을은 허 문경공의 조상무덤이 있는 고향이요 有院以沮(막을저)豆之서원이 있어 제사지냈으나自貞簡修撰禍後정간 수찬의 후로부터子姓寢弱 자손이 침체하여 遺文事蹟無以考 徵爲유문사적을 고미 할 수 없게 되니 是之慨也이것이 개탄할 바이다謹衰集公墓文及散 삼가 공의 묘비문과 見他書者타서에서 찾아본 것을 수집하여將鋟之梓 장차 이것을 인쇄 출판하여願得一言弁卷以徵信于後후세에 전하려 한다고 하기로不倿曰불초 나도 말하기를余願非其人而候之나도 저 자신을 돌아볼 때 변변하지 못한 사람이지만此擧其我者也이후의 차장거가 나를 궐기 시키는 것이므로 敢辭諸仰 감히 사양할 수 없어余又有復於侯者나도 이후에 갚음이 있으려 하는 바이다 李朝承麗李刱(=創)垂 이조가 고려 말을 이어서 창업하느라고未遑(허둥거릴황)文治. 미치 문치할 겨를이 없다가至英廟始乃영조에 이르러 비로소大闡(열천) 크게 단명하였으니 時則士이때는 사림들이之所尙多馳騁於詞章述作 모두 사장술작에만 힘썼지만其能以古聖賢經訓고대 성현이의 경훈으로律心而勵行율심려행하기를 獨文敬유독문경공만이先倡(부를창)之주장실천하였고其後寒暄(따뜻할훤)一 蠹(좀두)그후 한훤 일바靜庵晦齋退溪諸賢繼出정암 회재 퇴계제현이 계출하여大闢洙泗洛 閩之공자 맹자의 성도를 천명하고統執是論之항시 익히고 논하였으니文敬之功문경의 공이不但在其子姓而己 다만 그 자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요縣之士林 현에 사림이以尊晦退之心조봉회퇴하는 마음으로尊慕於公者공을 존모하는 것이不亦宜乎또한 마땅하니 아니 하랴今侯 지금 이후가又出晦齋先生之門또 회재선생의 문하에서 출하여而有所興起者焉故 흥기한 바 있으므로於是役如此云爾시역에 돌봄이 여차한지라고 하였다.
歲庚寅夏至 德水 李 瀰 謹序경인년 하지 덕수 이 미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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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敬公事蹟
世宗大王誠세종대왕은 진실로東方之舜湯也동방의 순과 탕이라고 할 수 있도다.三十餘年之 太平 30여년의 太平은莫不以得 賢相賢相을 得하여야만 된다는 것으로爲本故 根本을 삼았기 때문에如許敬庵之正大黃尨村之知體者出而 許敬庵의 正大와 黃방村의 知體者가 나와 爲相 승상이 되어當世人才之盛당세인재의 성다함은不容勝言승언할 수 없도다故許公之卒고로 許公이 卒하였으때에 虛其位者二年그 자리를 闕位로 둔지 2년이었다. 世宗豈세종이 어찌不知心腹之重而欲久 曠(밝을광) 其位심복이 중하므로 그 위를 오래 비울 수 없음을 알지 못 하리요 만은盖深知社稷元氣之所 係(걸릴계)대개 사직원기의 관계되는 바이기 때문에 一日或 一日이라도 혹非其人그 人材가 아니면則所損甚大 損失이 심대한 것을 깊이 깨닫고又慮賢相之難得또 현상의 난득을 염려하여審擇之爾심택에 힘쓴 관계인 것이다. 是以配享於世宗廟庭그리고 세종묘정에 배향하고賜額於 琴湖書院 금호서원에 선액을 하사하였다 朝家崇報조가가 숭보하고士林 尊慕 사림이 존모하여當永世無석也영세토록 마침이 없도록 하였다
出李評事穆集에 記載되었다.(出李評事穆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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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말하기를 이조의 정승이라면 황허라고한다 황은 익성이요 허는 문경인데 양공은 영묘성세에 당하여 익성은 기량으로써 문경은 예행으로써 삼사에 동거하여 융치를 찬성하였다.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기량이 사공에 득력한 것은 현저하여 보기기 쉽지만 예행이 국가에 효력을 미치는 것은 미미하여 알기 어려운 고로 논하는 자 먼저 황을 말하고 허를 먼저 말하는 자 적었다. 그러나 문경공이 졸한 후에 공의 장자 정간공과 정간공의 계자 수찬공이 상계립하여 일문풍절이 탁절동이하니 이것이 대개 문경공의 유훈이 훈도수유하여 성취된것으로서 익성의 후손은 이런 것이 없지 않은가 이것으로 볼 때 예행의 효과가 입조사공의 한때 우쭐하고 높이 처다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아니 겠는가 불초한 내가 일찍 옛 자취를 더듬어 세사를 논할 때 공에게 경모함이 극심한지라 영번에 왔을 때에 하양부군 이후헌락이 일책을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되 이 고을은 허 문경공의 조상무덤이 있는 고향이요 서원이 있어 제사지냈으마 정간 수찬의 후로부터 자손이 침체하여 유문사적을 고미 할 수 없게 되니 이것이 개탄할 바이다. 삼가 공의 묘비문과 타서에서 찾아본 것을 수집하여 장차 이것을 인쇄 출판하여 후세에 전하려 한다고 하기로 붗로 나도 말하기를 나도 재자신을 돌아볼때 변변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이후의 차장거가 나를 궐기 시키는 것이므로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나도 이후에 갚음이 있으려 하는 바이다. 이조가 고려 말을 이어서 창업하느라고 미치 문치할 겨를이 없다가 영조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단명하였으니 이때는 사림들이 모두 사장술작에만 힘썼지만 유독문경공만이 고대 성현이의 경훈으로 율심려행하기를 주장실천하였고 그후 한훤 일바 정암 회재 퇴계제현이 계출하여 공자 맹자의 성도를 천명하고 항시 익히고 논하였으니 문경의 공이 다만 그 자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요 현에 사림이 조봉회퇴하는 마음으로 공을 존모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니 아니 하랴 지슴 이루가 또 회재선생의 문하에서 출하여 응기한 바 있으므로 시역에 돌봄이 여차한지라고 하였다.
경인녀 하지 덕수 이 미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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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敬公事蹟
世宗大王은 진실로 東方의 舜과 湯이라고 할 수 있도다. 30여년의 太平은 賢相을 得하여야만 된다는 것으로 根本을 삼았기때문에 許敬庵의 正大와 黃방村의 知體者가 나와 丞相이 되어 當世人才의 盛多함은 勝言할 수 없도다 故로 許公이 卒하였으때에 그 자리를 闕位로 둔지 2년이었다. 世宗이 어찌 心腹이 重하므로 그位를 오래 비울 수 없음을 알지 못하리요만은 대개 社稷元氣의 관계되는 바이기 때문에 一日이라도 혹 그 人材가 아니면 損失이 심대한 것을 깊이 깨닫고 또 賢相의 難得을 念慮하여 審擇에 힘쓴 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世宗廟庭에 配享하고 琴湖書院에 宣額을 下賜하였다. 朝家가 崇報하고 士林이 尊慕하여 永世토록 마침이 없도록 하였다.
出李評事穆集에 記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