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소금길 자료>
-------------------------출처 : 그리움이 묻어나는 울산의 옛길(189 페이지부터~)
지은이-이창업, 이철영 , 2009년 12월 27일 발행
울산의 옛길을 따라 걸으면 새삼 느끼는 것은 어느 길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고, 저마다의 사연을 하나 둘씩은 다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단순히 지나가고, 빨리 가기 위한 길이 아니라 그 길을 이용하였던 옛 사람들의 삶에 맞게 적당히 조절되고, 가꾸어졌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역시! 울산 소금
[소금길]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울산은 토지가 비옥하고, 날씨가 온화하여 산물이 풍부하다고 하였다. 그 중 바다를 낀 소금을 생산하는 염소 3개소가 있으니, 모두 울산의 남쪽에 위치하여 있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소금 창고는 읍성(邑城)안에 있으며, 염장관(鹽場官)을 따로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즉 그만큼 소금 생산량이 많았다는 뜻이다.
이 소금은 일제강점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삼산동과 여천의 저두산(猪頭山, 일명 돋질산) 아래, 선암동의 염분포(鹽盆浦, 현재 태광산업 일원), 청량면 하개(상남리) 일원의 마채들 등에서 생산되었다.
이처럼 동해를 끼고 있으면서, 소금 생산량이 서해 연안의 마을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지역은 극히 드물었다. 이러한 지역적 특수성 때문인지, 문경 이남에서 울산소금을 먹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하며, 그 때문에 울산과 접한 내륙지역의 사람들이 울산 장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소금을 사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염전(鹽田)의 풍경은 내륙에서는 보기 드문 풍광이기도 하며 묵객들의 시상을 자극하는 주제로 종종 등장하기도 하였다. 고려 말에 울산을 들린 설곡(雪谷) 정포(鄭誧)는 삼산동 일원에 있엇던 울산염전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시 한 수를 읊고야 말았다. 그의 문집인 설곡집에는 울주팔경이라는 울산의 대표적인 경치를 다룬 8수의 시가 있고, 그 중 벽파정 시에 삼산(三山) 염전(鹽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벽파정
삼산 봉우리에 푸른 바위 솟았고
이수(二水) 안에는 파란 섬이 가득하네
행인이 벽파정을 가리켜 주는데
비영은 없어져 읽을 수 없구ㅏ
고깃배 불빛이 어둠속에 비치는데
염호(鹽戶)의 연기는 동튼 뒤에 푸르구나
긴 휘파람 소리는 어룡(魚龍)이 들어주고
비바람은 강 언덕에 가득하네.
* 여기에서 이수(二水)는 여천강 또는 여천천의 다른 이름으로, 옥동의 격동에서 발원하여 신정동과 달동을 지나 저두산 서쪽에서 태화강과 합류하였던 강이다. 일제강점기에 군사용 비행장을 만들면서 두 강이 만나는 합수부를 메워 버렸고, 저두산의 남쪽 언저리를 깎아 물길을 돌려놓았다.
이 시에 나타나는 삼산은 일명 외오산(外鰲山)이라 불리는 산으로 태화강과 이수가 합수하는 곳에 외로이 솟은 산을 말하며, 염전은 바로 이 삼산 주변에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삼산에는 벽파정(碧波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이 정자에 오르면 염전이 훤히 내다 보였다고 한다.
이 시에서도 그와 같은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염호의 연기는 동튼 뒤에 푸르구나’라고 한 것은 소금 굽는 연기가 삼산 일원에 낮게 깔려 있는 상태에서 해가 비쳐 난반사를 일으키고 그 빛이 푸르게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세종실록』에 기록된 울산팔경 중에도 삼산 염전에 소금 굽는 연기가 오르는 것을 묘사한 ‘염촌담연’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염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이유는 울산의 소금 생산 방식이 서해안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서해안에서 생산하는 소금은 염전에 바닷물을 가두어 놓고, 물을 지속적으로 증발 시켜 얻는 천일염(天日鹽) 방식을 따르는 반면, 울산의 소금은 개펄에 물을 가두어 놓고 수차례 증발 시킨 다음 흙과 함께 뭉쳐진 소금 덩어리를 가마에 넣고 구워서 얻어 내는 전토염(煎土鹽)의 방식을 따랐다.
이 때문에 염전 주변에는 염막(鹽幕)이 설치되었고, 무거운 소금덩어리를 가져다가 뜨거운 가마에 넣어 구웠고 그때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염전은 울산 동헌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태화강 하구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민초들의 뜨거운 삶의 현장은 당시 상류층들이 머물고 있었던 울산부 주변에서 볼 때, 한낮 시상이나 불러일으키는 풍경거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당시 울산의 상류층들은 이 염전을 단순히 시의 주제로만 본 것이 아니라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도 본 듯하다.
울산의 대표적인 서원이었던 구강서원의 건립 과정을 기록한 『구강서원고왕록』에는 울산 지역의 유림들이 기본금을 내고, 그것으로 소금을 매입하여 저장하였다가 적당한 시깅에 팔아 차익을 남겨 서원 건립비용을 마련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그만큼 매매가 빈번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하며, 그 수요자는 울산의 내륙으로 길이 통하여 있는 밀양, 청도, 자인, 경주 등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더 위쪽으로 판로를 개척하였다면, 앞서 말한 문경사람들까지 울산의 소금을 먹었다는 것이 단순한 농담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울산 소금의 3대 생산지였던 삼산과 염분개, 마채는 모두 바다로부터 움푹 들어온 만의 끝자락이었고, 이들은 얕은 고개로, 염분개와 마채(청량면 하개 일원, 현재 울산공단 내)는 돋치고개로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마채(마채는 ‘마채강’이라고도 하며, 소금이 난다고 하여 ‘소란강’이라고도 한다)는 개운포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어 신라 헌강왕이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삼산-선암동-개운포로 잇는 소금길은 그 옛날 헌강왕이 들렀던 길과 동일하니, 길은 그대로이되 역할은 달라졌음이라! 이렇게 연결된 길을 삼산에서 나루를 건너 그 북쪽의 내황으로 이어지고, 울산읍내까지 이어졌다.
울산 장날이면, 밀양과 청도, 자인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서 나는 산채와 숯 등 산곡의 산물을 가득지고 언양 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밀양 사람들은 가지산을 넘어서, 청도 사람들은 운문재를 넘어, 자인(경산시 자인면) 사람들은 산내를 거쳐 소호를 지나 소호재를 넘어 왔었다.
그리고 고개를 넘자마자 가쁜 숨을 고르고, 밀양 사람과 청도 사람은 상북면 궁근정 석남원 주변의 주막에서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들이킨 뒤 언양으로 향했고, 자인 사람들은 소호재를 넘어 두서면 구량리 송정마을 일원에 있었던 구량화촌원 주변의 주막에 들렀을 것이다.
그 옛날 궁근정리 일원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줄을 잇고 있었는데, 사라들은 이를 황정자라고 물렀다. 황정자(皇亭子)는 이름 그대로 황제의 정자이므로 정자 나무 중에서 최고라는 뜻이 되며, 서울 이남에서는 제일가는 곳이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지산 아래 황정자에는 사람들이 늘 넘쳐났고, 가장 주된 이용객이 바로 가지산과 운문재를 넘어온 밀양과 청도의 등금장수(다른 이름으로 ‘등금쟁이’라고도 하는데, 그들이 사는 곳의 생산품을 꾸려 등에 지고 인근의 장에 내다 팔고, 그곳 물건을 사서 등에 지고 곳곳에 팔아 차익을 남기는 장수들을 일컫는다)들이었다. 그리고 울산의 북구 달천의 철장에서 토철을 망태기에 담아 청도로 나르던 태가꾼들도 종종 들렀다고 한다.
비록 울산은 아니지먄, 경주시 외동읍 석계리의 석계마을에도 이와 같은 시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경주의 남동쪽에 위치하였던 마을의 사람들이 울산장에 들리기 위해 구어리에서 석계리 쪽으로 와서 한 부류는 척과쪽으로, 또 한 부류는 달천동 만석골로 향하였고, 되돌아올 때, 석계마을에서 합류하여 경주로 향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석계마을에는 사람들이 북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막이 여럿 생겨났다고 한다. 그 때문에 ‘경주의 돈은 석계마을에 다 있다’라는 말이 아직도 전하고 있다.
한편 구량리 송정마을의 촌로들은 그들의 윗대 어른들에게 들었던 구량리 주막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새는 찬바람이 시게 부는 심심한 동네 같지만, 예전에는 째법 사람들이 뽁짝거맀다 그라데. 요 마을 앞 거랑 가에 소호사람들하고 저기 어레다 카더라……그래, 산내 사람들하고 그 우애 영천 어데 사람들이 저기 안꼴짝 너메로 와가 좀 쉿다 가고 그랬다 크데.”
“혹시 그 사람들이 머 팔로 간다꼬 물건들을 가지고 왔다 안카등교?”
“그런 말은 몬 들어 봤꼬, 머라 카더라……숨 묵꼬 술값 없시먼 소금 한 되 주고 가고 그랬다 크데.”
“그러먼 이 동네에 주막 거튼 거 있었능교?”
“몰라, 술묵고 갔다커이 주막 거튼 거 안 있었겠나.”
“그라먼 요새도 소호 쪽으로 사람들이 자주 다니능교?”
“그래. 요지납새도 소호 사람들이 세멘 멧 포대 사가꼬 가더라꼬.”
“세멘요?”
“요새 소호 넘어가는 길에 털석거리는데 멧군데 포장 해났다 아이가.”
“소호 넘어 가는 길이 잘 남아 있능교?”
“그래, 잘 딲아 났다. 근데 자네는 어디 사노?”
“울산 삼더.”
“고향이 울산이가?”
“예.”
“울산 어데?”
“무거동 삼더.”
“무거동? **어른 아지메 친정이 무거라 카던데.”
“아! 그런교. 어르신 말씀 고맙심데이. 날도 찹찹한데 건강 조심하이소.”
“온 짐에 밥이나 묵꼬가재.”
“아임더. 해 떨어지기 전에 소호고개 함 넘어 가볼라꼬요.”
“그래, 어두분데 길조심하고. 머 궁금한거 있시만 또 들리라.”
“예, 가 보겠심더. 고맙심데이.”
초면에 구량리 송정마을에 사는 어른께 몇 가지 여쭈어 보았다. 그리고 글로 적어보니 무슨 암호 같지만, 오랜만에 섞어 보는 사투리가 옛길만큼이나 정겹다. 어른이 전해준 내용이 구량리에 있었던 굴량화촌원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동네에 있었던 주막을 말하는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구량리와 소호 고개로 영천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소금과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밀양, 청도 사람과 자인 사람들은 궁근정리로, 구량리로 넘나들었고, 서로 다니는 고개가 달랐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는 고헌산(해발 1032.8m)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길은 둘로 또는 셋으로 나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궁근정을 떠난 사람들은 언양을 지나면서 가지고 간 물건의 일부를 팔고, 다시 울산장을 향해 동쪽 태화강 방면으로 가다가 어음리의 보통원 근처에서 간단히 요기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강(南川, 언양 일원의 태화강 상류)을 두 번이나 건너가는 반송길을 두고, 조금 급하지만 고모재를 넘어 소먹이골로 갔다.
한편 자인 사람들은 소호재를 넘어 구량리로 내려와 대곡천을 따라 사연댐 아래의 관서정쪽으로 향하였다.
여기서의 사연댐 아래 관서정은 김경의 별서이다. 지난 2001년 때만 하더라도 고색창연한 것이 기품 있었는데, 지금은 관리의 소홀로 퇴락하였고, 주변에 잡초도 무성하다.
관서정에 관한 일화 하나를 떠올리며, 울산과 반구대 사이의 길을 잠시 생각해 본다. 1734년에 울산부사로 부임하여 왔던 청대 권상일(1679~1759년)이 하루는 반구대의 경승을 감상하기 위하여 울산동헌으로부터 입암을 지나 곡연리 토골마을 앞에 다다랐다. 토골을 지나 막 대곡 쪽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길 옆의 정자에서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권상일은 그 소리에 이끌려 정자를 찾아 들어갔고, 그것이 바로 김경과 권상일의 첫 대면이었다. 그 후로도 권상일은 반구대로 오르면서 김경과 자주 교우하였고, 그를 계기로 김경에게 정자 이름과 함께 관서정이라는 호를 건넸다.
지금 관서정을 감싸고 있는 담장 바로 옆에는 좁은 오솔길의 흔적이 있는데, 이 길이 바로 권상일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이 반구대로 향하였던 산길의 시작부분에 해당한다. 즉 관서정-반구대 사이의 길은 소금길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한 때 울산을 거쳐 갔던 관원들이나, 울산의 문인들이 줄기차게 드나들었던 풍류길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관서정-반구대 구간에는 아홉 구비(구곡)가 있었는데, 그 구곡을 가장 사랑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은 구한말의 문인이었던 송찬규(1838~1910)로 그의 시를 통하여 사연댐에 수몰도기 전 대곡 골짝기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포은 정몽주 선생께서 헌양에 유배도 오시니
반구대 아래에는 반계의 아홉 굽이가 길다랗다네
몇 번이나 물줄기를 따라서 찾아 이르러
거문고를 연주하며 두어 장을 노래하였던가?
일곡은 시내가 깊어 곡연을 거슬러 오르는데
남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와서 북으로 흐르는 시내와 만나네
징검다리는 들쭉날쭉하고 바위는 연기에 싸여 있으니
누가 물이 발원하는 곳에 별천지가 있음을 알리요?
이곡은 기이한 바위이니 백옥을 간 듯한데
높은 곳의 꽃은 웃음을 머금고 고움을 자랑하며 비치네
저녁바람이 불기를 그치고 가벼운 구름이 흩어지니
물외(物外)에 푸른빛이 떨어지는 봄 산이 높네
삼곡은 무성한 숲을 지나 구불구불한 도는 곳이니
가는 말을 멈추고 푸른 개울가에서 오래 동안 머무네
문득 두려운 살모사 같은 속세의 일을 안타까워하면서
머무는 차가운 못에 또 마음을 비추네
사곡은 동구에 아지랑이 끼어 충절을 숭상하는 곳인데
바위틈의 약수는 맛이 맑고 달콤하네
연화산 한 줄기가 신령한 땅으로 통하니
옥정선원은 완연한 지남(指南)이 되네
오곡은 세연이라는 이름이 흘러 전해지는데
선생께서는 당시에 맑은 물결을 즐겼으리
바람을 쏘이며 마음에 기약한 일을 만나고 싶은데
유수와 고산은 만고불변의 뜻이라네
육곡은 옹태를 둘러싼 봉우리인데
하늘에 가득한 바람과 달빛이 물가에 내려오네
한 해 봄의 풍광이 시내와 산 속에 있으니
새들이 즐거워할 때에 꽃은 절로 피어나네
칠곡은 멀리 깊숙한 대곡이 바라보이는 곳인데
언덕 동쪽머리의 뽕나무와 심은 봄빛이 한창이네
아침안개가 걷히면 푸른 산이 우뚝하고
밤비가 내리면 계곡 물이푸르네
팔곡은 긴 물줄기가 학곡으로 통하는데
연고산이 서쪽으로 흰 구름 속에 솟았네
선도를 찾느라고 속된 마음이 씻기는 줄 모르는데
시내와 산에는 상쾌한 기운의 바람이 절로 있다네
구곡은 옥을 씻은 듯한 물가의 맑은 물결인데
선생의 돈대가 옛날의 반구대에 우뚝하네
비래봉에서 내려온 바위산이 천 길인데
심헌의 영모비가 백세토록 이어지리
일곡의 곡연은 반구대 쪽에서 내려오는 대곡천과 언양에서 내려오는 남천이 서로 만나는 곳이다. 관서정 일원의 토골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곡연에 뛰어들어 멱을 감았다고 한다.
이곡의 기이한 바위는 지금의 관서정 바로 동쪽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관서정의 종녀 김위선씨의 말에 의하면, 지금은 바위 아래에 흙이 퇴적되어 바위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대곡에서 물이 흘러내려 왔을 때는 그 높이가 3m는 족히 넘었을 것이라고 한다.
삼곡은 관서정 뒤에서부너 본격적으로 대곡 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어디를 설명하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그 길은 말을 타고 다닐 정도의 폭은 확보되었던 모양이다.
사곡은 대곡천의 지류인 봉두천과 합수하기 직전의 골짜기 어디쯤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세연은 반연리의 세연마을을 지칭하는데, 세연마을이 바로 봉두천과의 합수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곡은 세연마을 일원으로 시에서도 표현하였다 시피 물이 정말 깨끗하였다고 한다.
육곡은 세연마을 앞산으로 봉두천의 북쪽 산능선 일원을 뜻한다.
칠곡은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곳으로 반곡천과 만나는 합수부 바로 아래쪽이다.
팔곡은 반곡천과 만나는 부분으로 이곳에서 북쪽을 보면, 반구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구곡은 대곡천 풍류길의 종점부가 바로 반구대가 있는 곳이다.
이렇게 좋은 경치는 소금을 이고 지고 나르던 등금장수들에게도 잠시나마 피곤을 덜어 주는 청량제가 되었을 것이다.
대곡천을 빠져 나온 자인 사람들은 안마을을 지나 태화강을 건너 범서읍 입암리 진목마을의 가주개원에서 밀양, 청도 사람들과 만났다. 여기서부터는 울산장에 동행하였다. 천상리의 솔고개(송현)을 지나면, 백천에 다다르고, 여기에는 또 굴화원이 있다.
그들은 계속 길을 걸어 삼호에서 강북으로 건너 태화동(멍정마을)으로 갈지, 아니면 ‘와와마을’을 거쳐 남산 밑으로 가 월평(이휴정 인근 마을)에서 태화나루를 건널지 고민했을 것이다. 여하튼 그들은 소금을 사기 위하여 울산장에서 부단히 그들의 물건을 팔았을 것이다. 그리고 돈을 손에 쥐고 학성관 증성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황에 도착하여 이내 나룻배를 타고 태화강을 건너고 염전의 염막에 도착하여 소금을 매입하였다.
이 때 소금을 매입하러 온 사람은 등금장수들 만은 아니었다. 『구강서원고왕록』의 구강서원창건기를 살펴보면, 조선 숙종(1674~1720년) 때에 서해와 북쪽 지방의 상선들이 선단을 이루고 와서 양곡과 소금을 매매하여 갔던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울산소금이었다.
얼마나 질이 좋으면, 서해의 사람들까지 울산소금을 사러 왔다는 말인가!
역시! 울산소금이 최고였던가 보다.
이 소금시장의 모습은 조선중기 울산의 문인이었던 이동영이 읊은 염시청연(鹽市菁煙)이라는 시에 잘 묘사되어 있다.
아득한 모래밭은 점점이 가지런하고
공중에 뜬 비낀 그림자 아득한 가운데를 바라보네.
바람 따라 흩어져 바람 따라 갔다가
섞여서 들어오니 없는 집 부엌 한빛 낮아지네
그 곱고 하얀 소금을 얻기 위하여 그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기를 수 십 차례.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원이 있었고, 그 원 주변에는 어김없이 주막이 있었다. 그 곳의 막걸리 한 사발이 없었다면 그들은 무슨 힘으로 그 먼 거리, 그 높은 재를 넘을 수 있었을까?
오늘도 고모재 아래에는 무성한 잎을 자랑하는 오동나무가 바람에 휘날린다. 그들도 고모재를 넘으면서 흘린 땀을 이 바람에, 그늘에 식혔을 것이다.
첫댓글 글을 읽으니 어릴적 겨울방학이면 고무재(고모재가 아니고)를 넘어 나무하러 가고 사이나(독극물)를 열매에 넣어 토기, 꿩을 잡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토꼴까지 칠기(칡) 캐러 가던 때가 생각납니다. 오동나무는 1970년대말에 삼도물산 김만중 회장 일가가 심은 것인데 많이 우거졌네요
고모재는 현재 KTX 역쪽 맞은 편 고개 인가 보던데요.
<소금길 정리>
*삼산염전/염분포염전/마채염전 => 학성=>굴화원=>범서
<1코스> 가수개원=>반계구곡=>구량화촌원=>소호령=>자인(경산 영천)
<2코스>고모재=>보통원(어음)=>언양=>석남원
=>(2-1코스) 운문고개=>운문산=>청도
=>(2-2코스) 석남고개=>가지산=>밀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