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얽힌 시 모음> 이기철의 '맑은 날' 외 + 맑은 날이렇게 하늘이 푸르른 날은 너의 이름 부르기도 황홀하여라 꽃같이 강물같이 아침빛같이 멀린 듯 가까이서 다가오는 것 이렇게 햇살이 투명한 날은 너의 이름 쓰는 일도 황홀하여라 (이기철·시인, 1943-)+ 이름 부르는 일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문밖은 적막강산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박남준·시인, 1957-)+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그리운 이름 하나 가슴에 묻고 산다지워도 돋는 풀꽃 아련한 향기 같은그 이름눈물을 훔치면서 되뇌인다어머니(박시교·시인, 1947-)+ 주소록을 다시 만들며해마다 정월이면수첩을 사서주소록을 다시 만든다.출석을 부르듯한 명 한 명 호명하며 생각한다.버려지는 이름들버려지는 주소와 전화번호새로 올리는 이름들새로 올리는 주소와 전화번호누군가도 내 이름을 이렇게 버리고 있겠지누군가도 내 이름을 이렇게 새로 올리고 있겠지버려지지 않으려고갈림길에서 떨고 있던 이름다시 끼워 넣으면불씨 한 점 가슴에 안은 듯내 두툼한 수첩주소록 호주머니가 따뜻해진다.(전영관·시인)+ 부르지 않은 이름이름은 있지만아무도 부르지 않았습니다.불러 주지 않는다고고개 숙이지 않았습니다.등 돌리지도 멈추지도 않았습니다.부르지 않아도자랐고 꽃피웠고열매 맺었습니다.이 가을!부르지 않아도자기 이름으로 대답하는 삶,가지마다 열매 맺은 삶들이 아름답습니다.(정용철·시인)+ 흙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흙은 생명의 태반이며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은 있다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흙의 일이므로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정희·시인, 1947-)+ 고마운 일누가 처음에 그렇게 이름을 불렸을까 돌 모래 풀 이런 고운 이름을 생각해 냈을까 돌, 하고 이름을 불러주면 입 속에서부터 구르기 시작하고 풀, 하고 이름을 불러주면 풀잎 흔들리는 바람이 입술 가득히 인다 누가 써걱거리는 그 느낌에 맞도록 모래를 모래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시인들은 모두 그 이름으로 콩줍기 놀이를 하듯 시를 쓰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김상현·시인, 1947-) + 이름을 지운다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멀면 먼 대로가까우면 가까운 대로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살아온 날보다 살아 갈 날이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안경을 끼고도 침침해지는데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나의 이름을 지우겠지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별 하나가 별 하나를 업고내 안의 계곡 물안개 속으로 스러져가는 저녁(허형만·시인, 1945-)+ 이름 때문에쥐똥나무 꽃에서는 쥐똥 냄새가 날까?향수 냄새가 나는데며느리 밑씻개 잎은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했을까가시가 돋쳤는데개불알꽃은 정말개불알만을 닮았을까? 아름다운 야생난인데어항 속 이끼 자국처럼 남아잘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름값이란 바로 가슴 떨림이다 잘못된 이름 때문에진실이 감추어진 어둠이다(노태웅·시인)*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출처: 바람에 띄운 그리움 원문보기 글쓴이: 정연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