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작가, 서벌 시조시인의 첫 시집 『하늘색 일요일』
6월 경남문학관 스토리텔링 주제는 ‘경남의 작가들 ➁ - 서벌 시조시인’편입니다. 시조문단에 끼친 영향에 비해 그 연구나 조명이 미미한 서벌 시조시인에 대해 그의 첫 시조집 ‘하늘색 일요일’을 중심으로 작가를 집중 조명함으로써 지방문학의 활성화와 함께 경남의 작가를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1. 서벌 시인의 생애
서벌 시조시인은 1939년 경남 고성군 영현면 봉발리에서 3남 2녀 중 첫째이자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서봉섭(徐鳳燮), 호는 평중(平中), 필명은 서벌(徐伐)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봉발리는 그 당시 오지 중에서도 오지였는데 1939년은 일제의 수탈로 인해 우리 민족의 삶은 피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진 것 없는 몰락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시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다섯 살 무렵 봉발리에서 새띠이로 이주하였으나 형편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서벌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머슴살이를 하러 떠나고 오두막 단칸방에는 어린 서벌과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집안의 숙모들이 궁핍한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김열규 평론가는 「서벌시조론」에서 ‘그가 직접 들려준 그의 소년기는 고난과 인고의 기록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시인의 부모님은 밥 굶는 일이 다반사인 아들이 안쓰러워 1945년 만 6세가 되던 해 해방을 맞아 외가가 있는 남포 바닷가로 이주하고 마을의 훈장으로 있던 외할아버지의 잔심부름꾼으로 보내게 됩니다. 시인은 ‘만 6세의 직장인’(『자연과 어린이』, 1989)이라는 글에서 ‘나는 그 무렵 어엿한 직장인이었다. 외가에 맡겨진 나는 공밥을 먹지 않으려고 마을 훈장이셨던 외할아버지의 비서로 채택되어 긴 담뱃대에 불을 붙여드리고, 벼룻물에 먹을 갈아 드리고, 마실 물을 떠 드리고, 요강을 비워 드리고, 5리 밖에 있는 당신의 벗을 불러오라는 심부름 등...... 내가 맡았던 일들은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7살 어린 나이에 이미 철이 들어버린 소년은 외할아버지를 첫 스승으로 삼아 ‘사자소학’, ‘천자문’, ‘동몽선습’을 모두 익히고 ‘명심보감’, ‘논어’, ‘소학’까지 학습하면서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은 시조들은 서벌을 시조시인으로 살게 한 자양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19세가 되던 해 가정형편이 어려워 더 이상을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고성농고 2학년을 중퇴하게 되지만 20세 때 시전문지 『신시학』에 자유시 2편이 뽑혀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꾸준히 시동인지나 시전문지 등을 직접 펴내면서 『이호우 시조집』을 통해 시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마침내 23세 때 첫 시조집 『하늘색 일요일』을 출간합니다. 이 시조집을 『시조문학』 1회 추천 과정으로 간주하고 이때 처음으로 서벌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후 1963년 25세 때 ‘연가’, ‘가을은’으로 2회 추천되고, 64년 26세의 나이로 ‘관등사’가 천료되어 등단을 합니다. 이후 32세 때 출향하기 전까지 경남 고성에 살면서 결혼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영현중학교와 야간공민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1970년 32세 때 서울로 상경한 시인은 2005년 66세로 사망하기까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출향문인으로 활동을 합니다. 시인은 『하늘색 일요일』 이후 모두 7권의 시집을 상재하였고 경남문학관에는 『하늘색 일요일』, 『휘파람새나무에 휘파람으로 부는 바람』, 『간이역에서』, 『걸어다니는 절간』, 『습작65편』의 초간본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2. 서벌 시인의 작품과 세계관
시인의 첫 시조집 『하늘색 일요일』은 시인이 23세가 되던 단기 4296(196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한 끼를 해결하는 것도 버거운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한 시인은 실의에 빠져 있다 운명처럼 『이호우의 시조집』을 읽게 되고 이후 여러 동인지를 만들고 동인들과 함께 문학활동을 하면서 가난에 대한 절망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이때 출간한 시조집이 『하늘색 일요일』이었습니다.
고2 중퇴생 열여덟 살의 뜰에는 정말 못살겠다는 어머니 고함소리와 병들어 누우신 아버지 신음소리만이 찌들리고 찌들린 가난에 범벅이 되어 늘 어지러운 시간들’, ‘복학은 아득하기만 하고, 이래저래 내, 시를 몰래 쓴다.
몰래 다듬을 수밖에 없는 나의 시간이 시켜서 하는 짓’, ‘새벽이 꼭두새벽이 그의 시계의 태엽을 쪼로록 쪼로로록 감으면서 “벌이가 신통잖은 네 어머니, 병든 네 아버지, 늙으신 네 할머니, 어린 동생들 두고 어디로 가려느냐”하신다. “그럼 난 어쩌고 말이요?” 한다 - 서벌의 ‘시간과 시계에 관한 삽화 여섯’ 중에서, 『휘파람새 휘파람으로 부는 바람』 1991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에 대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시인이 열정적으로 여러 동인 활동을 활발하게 한 것은 어쩌면 문학만이 시인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에게 시조는 위로이며 위안이고 내일의 아주 작은 희망이었습니다. 이태극의 서문을 받아 1961년 첫 시조집을 발간하고 이 시조집을 《시조문학》 1회 추천 인정을 받아 이때부터 ‘서벌’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스물 셋의 나이에 첫 시조집을 발간하면서 시집 맨 처음에 수록한 작품인 ‘하늘색 일요일’은 그가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어떤 길을 가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는 작품입니다. 현실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래도 시라는 등대가 있어 방향을 잡고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집 끝 ‘후기’에서 밝힌 시인의 말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등에 괴로움을 한바지기 지고 두렁길도 좋고, 신작로도 좋습니다. 가면서 이정표 하나씩 꽂아 보렵니다. 겹겹 구멍한 심장이거나, 피젖은 나래거나, 찢어진 사랑 노래거나, 바스라진 우리들의 열망 같은 것은 모두 빛나는 분노로, 혹은 찬란한 통곡으로, 질고운 사과를 씹듯 연연한 미소로, 담담히 갈앉은 고른 숨결로 표현을 새기면서 나의 이정푤랑 꼭꼭 세워 두렵니다.’
『하늘색 일요일』은 모두 7개의 카테고리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시집 처음에 쓴 서(序)와 마지막에 쓴 ‘후기’ 이외에 모두 5부로 나누었는데, 시인이 후기에서 밝혔듯이 제1부에 수록한 4편의 작품 중 ‘하늘색 일요일’만 최근작으로 나머지는 ‘산사에서 세상을 멀리할 당시에 쓴 것들’로 초기작들입니다. 제2부에는 모두 3편이 수록되었는데 ‘민족의 고유한 얼과 정조를 찾아내어 새로운 틀을 짜려고 무척 애를 켠’ 것들이지요. 제3부는 2편이 수록되었는데 ‘여행 중 경주를 지나 잠깐 스케치’한 것과 ‘고향의 체취를 뼈아프게 맡아본’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제4부는 6편이 수록되었고 ‘역사의식에 눈을 돌려본 것’으로 ‘아픈 내장의 얘기와 통곡과 전율이 서리고 피의 상황이 젖어있’다고 한 시인의 말에서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제5부는 3편이 수록되었고 ‘시조의 보다 현대화와 진격한 형태 변혁을 꾀해본다고 별렸으나 성공 여부는 보시는 이들의 판가름에 맡길 일이요, 나는 나대로 좋든 굳든 피나는 작업을 계속할 따름’이라고 시조에 대한 자신의 굳은 결심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첫 시조집 『하늘색 일요일』에는 앞으로 서벌 시조시인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시조를 쓸 것인가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향과, 역사의식과 민족의 얼뿐만 아니라 시조의 형식적인 면에서도 고민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이후에 발간한 시조집들은 한국 시조문단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면서 시조의 현대화를 이루는데 일조합니다.
서벌 시조시인은 등단 이후 43년 동안 끊임없는 창작활동을 통해 시조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누구보다 큽니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정형의 시조뿐만 아니라 사설시조를 꾸준히 창작 발표하면서 시조의 변혁을 꾀하는 동시에, 내용이나 표현적인 면에서는 시조라는 고전적인 이미지를 깨기 위해 보다 참신하고 현대적인 시어 선택에서 늘 고민하면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애쓴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서벌 시조시인에 대한 조명이나 연구는 미미하여 작품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서벌 시조시인과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재조명되고 그로 인하여 제대로 된 연구가 병행된다면 좋은 작품들이 보다 가까이 독자들 곁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