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두목에서 기적과 신유의 부흥사가 된
김익두 목사(金益斗, 1874-1950)
김익두 목사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개망나니 조폭 두목이었던 사람이 복음으로 변화를 받아 일제 강점기의 암울했던 시절, 특별히 1920-30년대 한국 부흥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이적과 신유의 부흥운동가로 기억할 것이다.
1916년 당시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 邦緯良, 1876-1970, 이후 방위량) 선교사는 김익두 목사를 가리켜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로운 능력과 말씀을 전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인서는 김익두 목사를 “한국의 무디”라고 불렀다. 이런 점에서 한국 기독교 100년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순교의 피를 뿌린 김익두 목사의 생애는 마치 한 편의 소설과 같이 깊은 감동과 거룩한 충격을 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김익두는 1874년(고종 11년) 11월 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 농촌에서 부친 김웅선 씨와 모친 전익선 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안악골 기름진 땅의 제일가는 부자로 한학자의 전통적 가문에 걸맞은 정통한 선비였다. 늠름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호걸풍의 부자였던 부친은 이따금씩 가난한 사람들과 거지들을 불러 큰 잔치 베풀기를 잘하였고,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이나 과부들을 불쌍히 여겨 양식을 나누어주기를 자주했다고 한다. 후일 김익두의 인정이 넘치고 사랑이 많은 목회자로서의 정직하고 곧은 성품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익두는 여섯 살 되던 1880년에 동네 서당에 입학하여 천자문을 떼고 명심보감과 소학, 대학을 탐독했으며, 10년간의 면학 끝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그리고 약관인 16세에 한양에 올라가 과거에 응시했지만 뼈아픈 낙방을 경험하였다. 이 일로 상심한 아버지는 시름없이 지내다가 병상에 눕게 되고 그 후 세상을 떠나게 된다. 뜻하지 않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생의 무상(無常)과 공허(空虛)를 마음속 깊이 느끼게 된 그는 불교에 입문하기 위해 가까운 곳에 있는 산사(山寺)를 찾아가 속세의 정을 끊고 수도(修道)하였다. 그러나 전생(前生)에서의 돼지가 금생(今生)에서는 사람이 되고, 금생에서의 사람이 내세(來世)에서는 소가 된다는 불교의 윤회설(輪回說)에 회의와 실망을 느끼고 하산하였다. 김익두는 부친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점차 죽음의 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상가에 출입하나 득실에 무심한 이 소년은 심중에 풀 수 없는 인생 문제로 싸우고 있었다. 석가가 생로병사를 슬퍼하던 것처럼 청년 익두는 사람은 왜 죽는가? 아 인생은 너무 짧다고 탄식하였다. 불사의 도는 없는가?
한편, 절에서 내려온 김익두가 하는 일 없이 무의미한 생활을 보내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어머니가 장사를 권유하여 그는 안악장터와 평양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무렵, 김익두가 18세가 되던 해에 가까운 친지의 중매로 16세의 김익진을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 후 시름을 떨쳐버리고 새롭고 의욕에 찬 생활을 하던 그에게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친구에게 재정보증을 써 준 것이 화근이 되어 대대로 살아오던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예기치 않았던 뜻밖의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낙심과 실망에 빠져 매일 같이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매일 망나니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으로 전전하게 되었고, 무절제한 생활이 점점 더 심해져 갔다. 뿐만 아니라 유흥가를 돌아다니며 폭음을 하고 남들과 다투기 일쑤였다. 점점 행패가 심해져서 아무나 붙들고 시비를 걸고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움을 벌여 두들겨 패고 맞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안악 사람들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장마다 돌아다니면서 깡패노릇을 했기 때문에 당시 황해도 서북지방이 모두 무서워하고 겁내는 불한당이 된 것이다.
때로는 얻어맞기도 하고 고초를 겪으면서도 사흘이 멀다 하고 지서에 불려 다녔다. 몇 날씩 유치장에 갇혀 있기가 일쑤였지만 그의 생활은 여전히 방탕하고 이성을 잃은 행동으로 많은 사람의 원성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괴롭고 우울한 번뇌가 싹트고 있었다. 즉, "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어째서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가?" 등의 의문이 끝없이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1900년 음력 정월 말경의 어느 날 김익두는 안악 장터에 나갔다가 스왈론(W. E. Swallen, 1865-1954, 蘇論, 이하 소안론) 선교사 부인이 건네준 전도지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전도지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베드로전서 1장 24-25절).
김익두는 “세세토록”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몇 번이고 입 속으로 되뇌이면서 이 말씀을 음미해 보았다고 한다. “세세토록? 영원을 뜻하는 말인 모양인데...”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죽마고우인 박태환(朴泰煥)이 그를 찾아왔다. 박태환을 통해 서양인이 와서 설교한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으로 교회에 따라 갔는데, 마침 소안론이 설교한 내용이 영생(永生)에 관한 것이었다. 소안론의 영생에 관한 설교는 김익두가 그동안 고민했던 생사의 문제였다.
1900년 음력 정월 말경, 김익두는 마음에 결심한 바가 있어 기독교를 믿어보기로 하고 박태환을 따라 3주간 교회에 출석한 후 입교(入敎)할 뜻을 밝힌 그 날,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이상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천자대감을 섬기는데 어젯밤 꿈속에 귀신이 소래지르되 ‘익두가 방맹이로 귀신을 따려 죽이는도다’ 하기에 놀라 깨니 이상한 꿈이로구나.”
이러한 어머니의 이상한 꿈은 김익두의 가족 모두를 기독교로 개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1900년 9월, 그는 소안론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한 달을 기다렸지만 선교사의 안악 순례는 1년 8개월이나 지연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성경을 100회나 숙독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1901년 1월에 부인과 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소안론에게 세례를 받았다.
김익두는 세례를 받기 전 3일 간 금식기도를 하는 가운데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 뜨거운 체험을 하였고, 주님으로부터 “너는 삼천리 강산 네 조국을 회개시키고 성령의 능력으로 진동시켜 복음을 전파하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 뜨거운 성령을 체험한 그는 불신자들을 바라볼 때 영혼이 너무 불쌍하여 도무지 견딜 수 없어 노방전도에 나섰다. 술망나니 깡패로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던 그가 안악 장터에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 그의 변화된 모습에 한동안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과거 그에게 매를 맞고 괴롭힘을 당했던 상인들이 보복하려고 덤벼들어, 때리고 차고 욕을 보여도 그는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심령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주었다.
김익두가 회개하고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성경을 보급하고 전도한다는 소문이 점점 퍼져나가면서, 1901년 초에 재령읍(載寧邑)교회에서 담임 전도사로 청빙하겠다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지 2년, 28세의 나이에 한 달 사례비 30원을 받기로 하고 담임 전도사로 청빙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때 서울에 있는 큰 약방에서 월급 150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 상경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전도사 사례비 30원에 비해 5배나 많은 수입이었다. 그는 시골 전도사의 고달픈 생활과 약종상의 높은 수입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이왕 종살이를 할 바에는 돈을 많이 주겠다는 사람의 종보다는 하나님의 종살이가 옳다고 결심하고 재령읍교회로 부임하였다. 당시 재령읍교회는 남자 교인 1명, 여자 교인이 10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남자 교인 10여 명, 여자 교인이 3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때부터 재령읍교회가 회생하여 1922년에는 2천 명을 수용할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1930년대에 1,200여 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큰 교회로 발전하였다.
김익두의 열정적인 목회 활동으로 그의 이름이 신천(新川)지역 교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01년 10월, 소안론 선교사는 자신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신천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교회를 세웠지만 부흥되지 않아 고민하던 중, 김익두에게 외국 선교사의 동역 전도사로 부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재령읍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한 지 1년도 못되었던 때에 그는 신천으로 개척전도를 떠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24년간 신천에서 목회를 한 김익두는 신천의 김익두가 되었다. 그런데 신천읍교회에 부임하고 보니 교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무엇보다 신천 지역은 천주교 교인들이 많은 곳이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전도한 초기의 생활은 박해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시장 거리에 나가 전도할 때마다 돌이 날아들었고, 무뢰배들로부터 구타를 당해 쓰러진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을 겪으면서 그의 신앙은 성숙해졌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천읍교회가 성립하다 先문에 김익두의 전도로 김석조 최상식 신교하고 김익두 사저私)에서 예배하더니 당지난 본래(本來) 로마교인(人)이 다수(多)한 곳임으로 구애(碍)가 다(多)하나 김익두 열심전도로 신자가 증가되야 로마교세(勢)를 승(勝하고 점차진흥(興)하니라.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천주교의 세력이 강했던 신천에서의 전도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김익두가 신천에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전도한 결과 1903년에 신천읍교회가 세워졌고, 그가 사역한 지 1년 6개월만에 3명의 성도를 결신하게 되었다. 3명의 교인이 들어온 후 부터는 매주 10명 안팎, 혹은 20여 명, 때로는 30여 명까지 무리지어 입교하면서 교회가 갑자기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가 신천읍교회에서 사역한지만 2년 남짓한 햇수로는 3년 만에 무려 300여 명의 큰 교회가 되었다. 1910년에는 5천여 원의 건축비로 새 예배당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후에 신천읍교회는 동부교회와 서부교회로 분립했으며 김익두 목사는 본 교회인 신천서부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김익두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하루에 세 번씩 가정예배를 드렸으며, 기도와 성경을 읽는 일에 매진했다. 어느 때는 성경을 읽으며 길을 걷다가 담벼락에 부딪치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도 많았다. 이와 같은 김익두의 열심에 감동받은 교인들은 그를 신학교에 보내주기로 주선하였다.
그는 33세가 되던 1906년에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신학교에 입학하는 데는 소안론 선교사와 콜리어(Charles T. Collyer, 1868-1944, 이하 고영복) 목사의 후원이 컸다. 그리고 37세인 1910년에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함께 졸업한 학생으로는 김관근, 박정찬, 김종섭, 안승원, 우종서, 주공삼, 채정민 등 27명이었다.
그는 1910년 9월 20일 평북 선천군 염수동교회에서 모인 제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獨老會)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그 해 신천읍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700명을 넘었기 때문에 결국 교회를 건축하여 1913년에 새 성전을 완공하였다. 무엇보다 신천에서 목회하는 동안 그에게 신앙적 영향을 받아 목회자가 된 사람이 10여 명이 넘는데, 그 중에는 1950-60년대 한국교회의 대표적 부흥사였던 이성봉(李聖鳳, 1900-1965) 목사도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김익두 목사라고 하면 기적과 신유의 부흥사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39년 동안 수십만 명의 병자들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를 일으켰다. 때문에 그가 인도하는 집회는 언제나 대성황이었다. 1920년 6월 말 평양에서 개최된 연합집회는 당시 「동아일보」에서 대서 특필(1920년 7월 3일)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1920년 10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개최된 연합집회에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집회를 목격했던 로즈(H. A. Rhodes) 선교사는 집회 기간 중 2,500달러 상당의 헌금이 걷혔는데 그중에는 반지 200여 개, 비녀 200여 개, 은시계 20개, 금시계 2개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이 헌금은 4명의 전도자들을 위한 한 해 동안의 지방 전도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1919년 말 경상도 현풍 집회부터 나타난 각종 치유와 기적 현상은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20년 4월의 경산읍 집회와 대구 집회, 5월의 부산 집회와 진주 집회 등 집회 때마다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불치병을 앓던 자들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의 신유 기적의 집회는 재령에서 목회를 하던 임택권 목사가 중심이 되어 황해노회 안에 “김익두 목사 이적 증명회”라는 단체까지 만들어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적 현상을 정리하여 《조선예수교 이적 증명》(조선예수교서회, 1921)이라는 책까지 발간했다.
이후 김익두는 1920년 9월 제9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1923년에는 신천읍교회를 사임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집회를 인도했으며, 1936년 서울의 남대문교회, 1939년 승동교회를 담임하였다. 그런데 1930년대부터 일본은 한국의 영구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우리의 민족혼을 완전히 말살하고자 황국신민화 정책을 단행했다. 즉 우리말 대신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본은 한국인의 민족 말살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한국교회를 무너뜨릴 하나의 거침돌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신사참배였다. 그렇지만 김익두는 신앙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거부했다. 그 결과 그는 죽음에 이르는 고문을 당하고, 1938년 12월 28일 강제 파직으로 목사직을 박탈당하였고 목회와 설교를 금지당했다. 그리고 승동교회를 떠나 황해도(은율군 장연면 직전리)의 외딴 촌락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그는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 평신도로 이름 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김익두는 자신이 살고 있던 직전리교회에서 목회활동을 재개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가 71세였으며,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파직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개척하고 세웠던 신천서부교회에서 청빙하자 25년 만에 다시 서부교회로 부임하였다. 1947년에 신천서부교회에서는 김익두의 목사 위임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는데, 이때 김일성의 외숙으로써 최측근 참모였던 강양욱 목사가 자청하여 찬송가 “주를 앙모하는 자”를 특송했다. 그가 다닌 집회 수는 779회에 이르렀고, 설교 횟수는 2만 8000여회, 교회 신축 150처, 병자 치유 1만여 명,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 명에 달하였다.
한편, 8.15 광복 이후 우리나라는 남과 북으로 분단된 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의 남한에서는 교회가 재건되었지만, 공산주의 체제인 북한에서는 교회가 탄압과 회유 속에서 일제 강점기 때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북한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당하거나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다. 반면에 끝까지 북한에 남아 있었던 기독교인들은 더 혹독한 고난을 받아, 순교당하거나 신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김익두는 신천서부교회를 담임하면서 고령의 나이에도 복음에 관한 한 자신을 잊어버린 채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따라 행하려고 최선을 노력을 다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외숙인 강양욱(康良煜, 1903-1983)을 시켜 친(親)정부 교회 조직을 만들어 교회를 말살하려는 측면공작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교역자들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어용 교회 기관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1946년 11월 28일에 평양에서 만들어진 ‘북조선기독교도연맹’(北朝鮮基督敎徒聯盟, 조기련)이었다.
그렇지만 평양시내 교역자들은 대부분 이 연맹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강양욱은 황해도 인민위원회의 중요 간부로 있는 김웅순(金應珣, 1891-1958)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중국 산동에서 선교사로 있었던 박상순(朴尙)과 김익두를 꾀어 가입시켰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부흥사로 크게 활약하면서 남북한 전역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김익두를 1949년에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의 초대위원장으로 세웠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이렇게 김익두를 어용으로 세워놓고 자신들의 체제를 선전하는데 이용한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인 북한에서 교회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김익두는 6·25전쟁이 일어난 후 9월 28일에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자 교회로 돌아가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10월 13일 밤 9시에 북한 인민군 잔류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천에서는 반공의거가 일어났다. 신천 반공의거는 해방 이후 쌓이고 쌓였던 반공사상의 폭발이었고, 그동안 공산 치하에서 잔인무도한 압정을 겪어야만 했던 신천 사람들의 굳은 각오가 하나로 뭉친 의거였다. 다음날 10월 14일 희미한 촛불 아래서 약 60여 명의 교인들이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때 김익두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일제치하 36년간의 압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고, 또 공산당의 마수에서도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으니 이제 우리에게 더 원이 없습니다”라고 시작된 그의 설교는 여덟 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그 가운데 여덟째는 다음과 같다.
여덟째, 반공을 헌법에 명기해야 합니다. 공산주의란 비단보에 똥을 싸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허울 좋은 위장을 하고 있으나 그것이 전부 속임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공산당들이 20개 정강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론과 현실은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는 속이는 사기꾼이요 거짓말쟁이입니다.
김익두가 여기까지 말하고 설교를 마치려고 할 즈음, 밖에서는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인민군 아홉 명이 바짝 자세를 낮추고 예배당 앞쪽과 뒤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예배당 출입구 후문과 건물 옆 찬양대 창문 쪽에서 일시에 총구를 디밀고 쳐들어왔다. 인민군들은 성도들을 한쪽으로 몰아세우고 두 손을 뒷짐 지운 채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김익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눈을 감고 묵상기도를 하는 듯 의연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자신을 위협하는 인민군들을 향해 “공산주의는 허울 좋은 개살구다”라고 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했다.
그러나 광기가 서린 인민군들은 총 끝에 장착한 날카로운 대검으로 그의 등을 힘껏 찔렀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김익두는 의자에서 떨어지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최후의 기력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저들이 아무것도 모르오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는 앞으로 쓰러지기 전에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을 불렀다. “하나님이시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 잔인무도한 인민군들은 최후를 눈앞에 두고 있는 김익두를 향해 다시 총검을 들어 그의 등을 힘껏 찔렀다. 거의 동시에 앞에 있던 인민군도 그의 가슴을 예리한 대검으로 사정없이 찔렀다. 김익두는 전신의 기력을 다해 숨을 모으고 가까스로 하늘을 향해 “주여!”라는 마지막 말을 외친 후 숨을 거두고 77년의 생애를 마쳤다.
전쟁 상황이었던 당시는 산 사람의 생명도 부지하기 힘든 때여서 장례를 치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엔군 선발대가 10월 18일에 입성하는 날까지 5일 동안이나 김익두와 그날 새벽기도회 때 함께 순교당한 세 사람의 시신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경황없이 쫓겨다니다가 4일이 경과한 뒤에서야 김익두와 세 명의 시신을 예배당 뒤뜰에 가매장하였다.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이 신천에 입성하고 난 후 신천서부교회의 교인들은 김익두의 장례일자를 11월 29일로 결정하였다. 황해도 일대의 원근 각처에서 조문을 온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예배를 드린 후 김익두의 시신은 약 30명의 악대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행진하는 가운데 그의 고향인 안악의 양지 바른 아득한 언덕 기슭에 묻혔다.
1946년부터 1950년 10월 14일 새벽, 김익두 목사가 순교한 그 시간까지 5년을 신천서부교회의 사택에서 함께 했던 한춘근은 김익두 목사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한국 교회사 100년의 역사 속에 우뚝 선 거목으로서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하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생을 헌신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종신토록 몸 바쳤던 김익두 목사는 그가 평생을 통해 사랑했던 신천서부교회에서 그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마치 그의 죽음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스데반과 같이 거룩한 순교를 함으로써 복음사역의 대미(大尾)를 장식했습니다. 그는 1910년에 혼신의 힘을 다해 신천서부교회당을 설립했고 그 후, 서부교회당을 떠나 서울 남대문교회, 승동교회, 직전리교회를 거쳐 40년만에 다시 본 교회에 부임하여 5년간 시무하다가 새벽기도회 중에 순교의 잔을 마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출처
한국 초기 교회사를 빛낸 믿음의 거장들
오주철 이재열, 한들출판사, 2021, 137-1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