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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선원장님 기고글
현대 명상문화와 한국 선의 과제 원고
아래는 2011년 9월 28일 조계종에서 개최한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대토론회에서 발표한 김태완 선생님의 원고입니다.
김태완 (무심선원장)
수불스님의 발제문에서 제기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대중들이 선을 공부하도록 할 수 있을까? 둘째,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선체험을 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 두 문제에 대한 저의 의견과 그밖에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어떻게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선공부를 시킬 것인가?
이 문제는 조계종에서 행하는 출가자와 재가자에 대한 기본 교육이 그 열쇠라고 생각됩니다. 조계종이 선(禪)을 종지(宗旨)로 삼는 선종(禪宗)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교육과정을 보면 선에 대한 교육이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조계종이 선을 종지로 삼고 있는 만큼 출․재가자에 대한 기본교육 과정에서 선을 중심으로 교육해야 선을 공부하는 저변이 확대된다고 봅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다.
①조계종에 소속된 출․재가의 수행자들은 모두 종지에 따라 선을 공부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함을 분명히 주지시킨다.
②출․재가의 기본교육 과정에서 육조혜능 문하의 주요한 선사들의 어록(語錄)과 전등록(傳燈錄)을 읽게 하여 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선을 공부할 기초적 소양을 갖추도록 한다.
2. 어떻게 보다 효과적으로 선체험을 할 수 있는가?
①선지식의 안목과 지도력이 기본 바탕이다.
수불스님도 말씀하셨듯이 수행자가 깨달음을 효과적으로 얻는 데에는 지도하는 선지식의 역할이 가장 큽니다. 깨달음에 목마른 수행자라면 안목과 능력을 갖춘 선지식을 믿고 그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기만 하는 것으로써 어렵지 않게 선에 입문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②선에서 깨달음이 어떤 조건에서 일어나는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선 수행자는 선의 체험이 어떤 조건에서 발생하는가에 대해 개략적으로라도 알고 있어야 잘못된 길에서 깨달음을 찾는 오류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선에서 깨달음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조건 혹은 환경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혜종고가 “생각이 없고 조작이 없음에 이러한 공덕이 있음을 참으로 알아야 한다.”(주1)라고 말했듯이, 알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어떻게도 할 수 없을 때에 문득 저절로 깨달음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에서 깨달음의 체험은 언제나 수행자의 마음이 어떻게도 손을 쓸 수 없는 앞뒤가 꽉 막힌 막다른 상황에서 때가 되면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수행자의 마음이 어떻게도 손을 쓸 수 없는 진퇴양난의 막다른 곳으로 수행자를 밀어 넣습니다. 어떻게도 손쓸 수 없는 곳이란, 헤아려 알 수 없는 곳이고, 취하거나 버릴 수 없는 곳이고, 은산철벽의 감옥이고, 쇠뿔 속이고, 금강권(金剛圈)(주2)이고, 율극봉(栗棘蓬)(주3)이고, 의단(疑團)입니다. 수행자가 선의 체험이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취하고 버린다든지, 신통한 경계를 추구한다든지, 공안과 어록을 열심히 연구한다든지, 오로지 고요한 선정 속에만 빠진다든지 하는 잘못된 길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선어록이나 전등록에서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들을 읽어보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도 선어록이나 전등록을 미리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3. 선체험 뒤에 법안(法眼)을 갖추는 공부에 대한 안내도 있어야 한다.
수불스님은 발표에서 생사해탈이라는 불교의 근본목적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명상프로그램의 한계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보통 선체험을 한 사람들은 말하기를, 문득 찾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는 그대로 만족스럽다든지, 모든 것이 이전 그대로인데 또한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든지, 안팎의 경계가 없어진 듯하다든지, 자기가 없어진 듯 하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체험만으로 곧장 불교의 근본목적인 생사해탈이 성취되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불교에서 생사해탈을 성취한다는 것은 이런 체험에 바탕하여 법계의 본성인 불이법(不二法)을 보는 법안(法眼)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불이(不二)의 법안을 갖추지 못하면, 여전히 분별심에 부림을 당하여 허망한 견해와 차별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법안은 체험 뒤에 시간이 지나면서 체험한 자리에 익숙해질수록 저절로 갖추어지는 면도 있으나, 선지식과 불조(佛祖)의 가르침에 힘 입어야 어긋남 없이 잘 갖추어집니다. 법안을 갖추는 것에 대하여 대충 말한다면 두 가지 정도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①마음이 곧 경계여서 마음과 경계가 따로 있지 않고, 분별망상이 곧 불이의 실상이어서 망상과 실상이 따로 있지 않은 불이(不二)의 법성(法性)을 보는 눈이 갖추어져야, 분별 속에 있으면서도 고요한 적멸이고, 생로병사 속에 있으면서도 생로병사로부터 해탈한 열반입니다.
②법과 깨달음을 말하는 불교의 모든 언어는 망상과 희론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일 뿐 실재가 아님을 알아야 털끝만한 개념에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주4)
비록 어떤 초월적이고 영적인 체험을 하였더라도,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을 구한다든지 분별망상을 버리고 적멸인 실상을 구한다든지 생로병사를 버리고 해탈열반을 구한다면, 이들은 취하고 버리는 이법(二法)에서 벗어나지 못한 외도입니다. 또한 경전과 어록에 나오는 방편의 말을 분별된 경계에 대한 설명이라고 이해하여 불법에 대한 개념과 견해를 세워서 있느니 없느니 옳으니 그르니 하고 따진다면, 이들은 방편의 말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잘못에 빠진 사람이요, ‘부처님의 말씀을 분별심으로 이해하면 모두 마구니의 말이 된다’(주5)고 하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법성(法性)을 보는 불이(不二)의 눈을 갖추었느냐, 아니면 이법(二法)인 분별개념과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느냐가 바로 외도와 불교가 구분되는 지점입니다. 통밑이 빠지는 선체험 뒤에 선지식의 가르침이나 경전과 어록에 있는 불조(佛祖)의 가르침에 의하여 법성을 보는 불이의 눈이 확실히 자리잡지 않는다면, 여전히 분별심의 부림을 받아서 제멋대로의 견해에 빠질 우려가 높습니다. 그러므로 선체험 뒤에는 유무(有無)가 둘이 아니고 진망(眞妄)이 따로 없는 불이(不二)의 눈으로 법을 보는 불조(佛祖)의 안목(眼目)을 갖추도록 가르치고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4. 조계종의 선은 조사선인가? 간화선인가?
수불스님께선 수행체계 정립과 간화선 수행프로그램 개발이 종단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과제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와 관련하여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계종 종헌 제1장 제2조에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을 종지(宗旨)로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직지인심․견성성불이라는 종지는 조사선을 나타냅니다.(주6) 그러나 오늘날 조계종에서 가르치는 선은 간화선입니다. 간화선은 조사선에 화두참구(話頭參究)라는 방편을 새로 도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간화선은 조사선의 직지인심을 간화(看話) 즉 화두참구로 대치한 것으로서, 화두참구하여 견성성불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지인심이든 화두참구든 이법(二法)인 분별을 배제하고 곧장 불이법(不二法)의 감옥(금강권) 속으로 마음을 밀어 넣음으로써 스스로 깨닫도록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만, 그래도 수행체계를 정립할 때에는 교단의 종지인 조사선은 어떤 것이고 간화선은 어떤 방편을 도입하였다는 것이라는 정도는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대승불교가 뿌리라면, 조사선은 그 뿌리 위에 우뚝 선 줄기이고, 간화선이나 묵조선은 조사선이라는 줄기에서 뻗어나온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라는 뿌리 없이 조사선이 성립될 수 없듯이, 조사선이라는 줄기가 없이는 간화선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조계종에서 조사선을 말하지 않고 간화선만 말한다면, 우리나라 선의 토양을 너무 협소하게 만들 것이니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저희 무심선원의 공부는 기본적으로 직지인심․견성성불의 조사선이라고 할 수 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간화선의 특색도 가지고 있습니다.
5. 『몽산법어』는 간화선의 올바른 지침서인가?
오늘날 한국 간화선 수행자들의 공부를 방해하는 주요한 병통은 다음 두 가지라고 여겨집니다.
①오로지 좌선(坐禪)에 의지하여 선정(禪定)의 힘을 빌려야 공부가 된다.
②꿈속에서도 화두가 앞에 나타나는 경계를 보아야 비로소 깨달음에 가깝다.
이 두 가지 견해는 그 출처가 『몽산법어』인데,(주7) 이들은 삿된 견해라고 판단됩니다. 첫째, 육조혜능 문하의 조사선에서나 대혜종고․무문혜개․고봉원묘의 간화선에서나 좌선하여 공부하라거나 선정의 힘을 빌려 공부하라는 가르침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좌선하거나 선정에 드는 것을 공부로 삼으면 잘못이라는 지적은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주8) 좌선에 의지하여 공부하는 사람들이 좌선에서 약간의 힘을 얻으면 그곳에 발목이 잡혀서 도리어 참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주9) 둘째, 꿈속에서 화두가 나타나야 깨달음에 가깝다는 주장 역시 육조 문하의 조사선에서도 대혜․무문․고봉의 간화선에서도 전혀 찾을 수 없는 주장입니다. 육조혜능이나 대혜․무문․고봉 등은 공통적으로 진퇴양난의 손쓸 수 없는 상황인 금강권(金剛圈) 율극봉(栗棘蓬)을 깨달음에 가까운 상황이라고 말합니다.(주10)
몽산 자신이 선정에 의지하여 공부하고 꿈속에서 화두가 나타난 뒤에 깨달음을 체험한 것도 아니면서(주11)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만약 깨달음을 얻는 데에 의지해야 할 것이 있고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법(二法)이고 차제법(次第法)입니다. 조사선이나 간화선은 차제법이 아니라 돈오법이고, 이법이 아니라 불이법입니다.(주12) 그러므로 『몽산법어』가 말하는 이 두 가지 주장은 삿된 것이라고 판단됩니다.(주13)
우리나라에서 간화선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몽산법어』를 간화선의 지침서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몽산법어』의 이런 견해에 방해를 받아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므로 불이법이요 돈오법인 조사선의 종지를 바탕으로 하여 대혜종고, 무문혜개, 고봉원묘의 간화선과 몽산덕이의 간화선을 비교함으로써 『몽산법어』의 이런 가르침이 삿된지 올바른지를 면밀히 밝혀 그 병통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특히 조계종에서 수행지침서로 발간한 『간화선』이라는 책에서도 대혜․무문․고봉․몽산의 간화선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정리되어 있지 않고, 마치 이들이 모두 동일한 간화선을 말하는 듯이 두루뭉술하게 뒤섞여 있는 점도 문제입니다.(주14) 간화선의 바탕인 조사선의 본질을 밝히고 그 위에서 간화선의 본질을 명확히 밝힌 좋은 수행지침서가 다시 나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에 내놓을 만큼 잘 정리된 간화선을 먼저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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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信知無念無作, 有如是功德.(『大慧普覺禪師法語』 卷第二十二. 示妙心居士)
(주2)금강권(金剛圈) : 금강(金剛)은 결코 부서지지 않는 견고한 것이고, 권(圈)은 울타리를 나타내는 말이니, 금강권은 결코 부서지지 않는 울타리나 장벽을 뜻한다. 즉, 분별심으로는 결코 부술 수 없는 언어를 방편으로 시설하여 두고, 배우는 자가 그 언어의 장벽을 스스로 뚫고 나가기를 바라는 것. 선사(禪師)가 학인(學人)을 인도할 때에 사용하는 방편. 율극봉(栗棘蓬)과 같은 뜻.
(주3)율극봉(栗棘蓬) : 가시투성이인 밤송이. 밤송이라는 뜻의 율봉(栗蓬)에 가시를 강조하여 율극봉(栗棘蓬)이라 함. 입안에 밤송이를 넣으면, 삼키려고 해도 가시가 찔러 아프고 뱉으려고 해도 가시가 찔러 아프니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태를 가리킨다. 사가(師家)가 학인에게 율극봉같은 화두(話頭)를 시설해 놓고 분별로 이해하지도 못하게 하고 버리지도 못하게 하는 것, 혹은 마치 쥐가 덫에 빠진 것처럼 학인의 공부가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는 상태에 봉착한 것을 가리킴. 금강권(金剛圈)과 같은 것. 『원오불과선사어록(圓悟佛果禪師語錄)』 제2권에 “율극봉을 삼키고, 금강권을 뛰어넘어서, 분수 밖에서 가풍을 펼친다.(呑底栗棘蓬, 跳底金剛圈, 分外展家風.)”는 구절이 있다.
(주4)사리불(舍利弗)이 문수사리(文殊師利)에게 물었습니다. “모든 부처님이신 여래께선 법계(法界)를 깨닫지 못했습니까?” 문수가 답했습니다. “모든 부처님도 오히려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부처님이 법계를 깨닫겠습니까? 법계도 오히려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법계가 모든 부처님에게 깨달아지겠습니까?”(『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所說般若波羅蜜經)』) “부처님이 모든 법을 말씀하신 것은 모든 마음을 제도(濟度)하기 위함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마음이 없으니 모든 법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황벽희운선사전심법요(黃蘗希運禪師傳心法要)⌋)
(주5)부처님께서는 “그대가 인연(因緣)을 상대하는 마음으로 법(法)을 들으면, 이 법도 인연(因緣)일 뿐이다.”(『수능엄경』 제2권)라고 하셨습니다.
(주6)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이심전심(以心傳心)․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은 조사선의 특징을 나타내는 문구들이다.
(주7)“좌선하는 가운데 힘을 얻기가 가장 쉬우니, 처음 앉을 때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체는 단정하게 하여라. 등은 굽히지 말고, 머리는 곧게 세우고, 눈꺼풀을 움직이지 않고, 눈은 평소처럼 뜨고,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몸과 마음이 모두 고요해질 것이다. 고요해진 연후에 정(定)에 들면, 정 속에서 도리어 화두가 앞에 나타나도록 하고, 정을 탐내어 화두를 잊지 않도록 하라.”(『몽산화상법어』 ‘몽산화상시유정상인’) “애써 화두를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화두가 앞에 나타날 때에 이르면 경계와 심신(心身)이 전혀 이전과 같지 않게 되고 꿈속에서도 역시 화두를 기억할 것이니, 이와 같은 때에는 큰 깨달음이 가깝다.”(『몽산화상법어』 ‘몽산화상시고원상인’)
(주8)“이보세요 사리자님. 앉는 것을 좌선이라 여기지는 마십시오. 무릇 좌선이라는 것은, 삼계(三界)에 있으면서도 몸과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곧 좌선입니다. 멸정(滅定)에서 나오지 않으면서도 모든 행동거지(行動擧止)를 나타내는 것이 곧 좌선입니다. 모든 깨달은 모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중생의 온갖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곧 좌선입니다. 마음이 안에 머물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 것이 곧 좌선입니다.”(‘唯舍利子, 不必是坐爲宴坐也. 夫宴坐者, 不於三界, 而現身心, 是爲宴坐. 不起滅定, 而現諸威儀, 是爲宴坐. 不捨一切所證得相, 而現一切異生諸法, 是爲宴坐. 心不住內, 亦不行外, 是爲宴坐.)(『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제2권. ⌈제3 성문품(聲聞品)⌋ 1. 사리자(舍利子)의 문병) “도는 마음으로부터 깨닫는 것인데, 어찌 앉는 것에 있겠습니까? 경전에서 말했습니다. ‘만약 여래가 앉거나 눕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삿된 도(道)를 행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여래의 깨끗한 선(禪)이요, 모든 법이 텅 비어 고요한 것이 여래의 깨끗한 좌(坐)입니다. 결국 깨달음도 없는데, 하물며 앉겠습니까?”(『육조대사법보단경』) “그대는 좌선을 배우고자 하는가, 좌불(坐佛)을 배우고자 하는가? 만약 좌선을 배우고자 한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며,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습이 아니다. 머묾 없는 법에서는 취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대가 좌불을 따른다면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니, 만약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에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사가어록』 ⌈마조어록⌋) “어떤 눈먼 중은 배불리 밥을 먹고는 곧 좌선관행(坐禪觀行)을 하며, 생각을 꼭 쥐고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며,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고 고요한 곳을 찾으나, 이것은 외도(外道)의 법이다. 조사가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마음을 붙잡고 고요함을 살피며, 마음을 들어 밖으로 비추고,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깨끗이 하며, 마음을 집중시켜 정(定)에 든다면,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가 조작하는 짓이다.’라고 하였다.”(『사가어록』 ⌈임제어록⌋) “옛 성인(聖人)이 말씀하셨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다만 오염되지만 말라.’ 내가 말한다. ‘마음을 말하고 본성을 말하는 것이 곧 오염이고, 현(玄)함을 말하고 묘(妙)함을 말하는 것이 곧 오염이고, 좌선(坐禪)하여 선정(禪定)을 닦는 것이 곧 오염이고, 일부러 생각하는 것이 곧 오염이다.”(『대혜보각선사법어』 제24권. 40. 묘총선인에게 보임)
(주9)『몽산법어』에서는 좌선하여 선정이 힘에 의지하여 공부하되 선정에 머물지 말고 깨달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마치 자동차를 타고서 자동차에 의지하지 말고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이다. 좌선의 힘에 의지하여 설사 깨닫는다고 하여도, 그 깨달음이 조건인 좌선을 버릴 수가 있을까? 실제로 좌선에 의지하여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평생 좌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임을 알 수 있다.
(주10)“그대가 마음의 요체를 알고자 한다면, 단지 모든 좋고 나쁨을 전혀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저절로 깨끗한 마음의 바탕에 들어가, 맑고 늘 고요하면서도 묘한 작용이 끝이 없을 것이다.”(『육조대사법보단경』) “문득 헤아림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이 한 생각이 부서진다면 곧 삼세를 깨닫는 곳입니다.”(『대혜보각선사보설』 제13권. 1. 설봉에서 보리회 만들 때의 보설) “화두를 말하고 또 말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가면, 문득 마음은 갈 곳이 없어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단번에 확 깨달을 것입니다.”(『대혜보각선사법어』 제20권. 11. 나지현에게 보임) “밤낮으로 ‘무!’를 자신에게 일깨워 주다가, 마치 한 개의 뜨거운 쇠구슬을 삼킨 것과 같아서 토해내려고 하여도 토해내지 못하게 되면, 종전의 나쁜 지식과 나쁜 깨달음을 모두 없애게 된다. 이렇게 오래오래 순수하게 익어가면, 저절로 안팎이 한 덩어리가 된다. 그리하여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꾼 것처럼 다만 자신만이 알 뿐이게 되면, 갑자기 폭발하면서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진동시킬 것이다.”(『무문관』)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곧장 안팎이 한 조각이 되어 온종일 털끝만큼의 틈도 없게 하여 가슴에 생선뼈가 박혀서 마치 독약에 중독된 듯하고, 다시 금강권(金剛圈)을 반드시 뚫으려 하고 율극봉(栗棘蓬)을 반드시 삼키려 하여 다만 일생의 솜씨를 다하여 분개하여 나아가면, 저절로 깨달을 곳이 있을 것이다.”(『고봉화상선요』 ‘시직옹거사’)
(주11)『오등전서』의 기록에 의하면, 몽산덕이의 깨달음은 다음과 같다. “처음 승천고섬형(承天孤蟾瑩)을 찾아가니 섬형(蟾瑩)은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를 살펴보라고 시켰다. 하루는 섬형이 몽산에게 물었다. ‘스님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느냐?’ 몽산은 어쩔 줄 몰라서 분발하여 참구(參究)하였는데, 수좌(首座)가 승당으로 들어와 향합(香盒)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서 활짝 트이며 깨닫고는 게송을 지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앞길이 막혔다가, 밟아서 뒤집으니 물결이 곧 물이로구나. 중생을 벗어난 조주의 면목이, 다만 이와 같도다.’ … 뒤에 퇴경허주(退耕虛舟)의 권유로 환산응(皖山凝) 선사를 찾아뵈었는데, 환산응 선사가 물었다. ‘밝은 빛이 온 세계를 고요히 비춘다고 하니, 이것은 장졸수재(張拙秀才)의 말이지?’ 몽산이 대답하려고 하는데 환산응이 ‘악!’ 하고 힘차게 소리쳤다. 이에 몽산은 즉시 의문이 풀려 개운하게 되었다.”
(주12)의발을 물려받은 뒤에 혜능은 한동안 사냥꾼들을 따라서 숨어 살다가 광주(廣州)의 법성사(法性寺)에서 『열반경』을 강의하는 인종(印宗) 법사(法師)를 만나 자신이 의발을 물려받은 육조(六祖)임을 밝혔다. 그때에 인종이 오조는 어떤 법을 가르치느냐고 혜능에게 묻는데, 혜능은 말하기를 “다만 견성(見性)을 말할 뿐이고, 선정(禪定)과 해탈(解脫)은(유루(有漏)․무루(無漏))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인종이 왜 선정과 해탈을 말하지 않느냐고 묻자, 혜능은 “(선정과 해탈을 말하면)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인종이 불이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혜능은 “불성은 선하지도 않고 선하지 않지도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불이(不二)라고 한다.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自性)에 둘이 없음을 밝게 안다.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이다.”라고 한다.
(주13)필자는 조사선의 일반적인 특징과 대혜종고, 무문혜개, 고봉원묘, 몽산덕이의 간화선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밝힌 책을 저술하였는데, 올해 10월에 출간할 예정이다. 일반적으로 선어록에서 선사의 설법이 법을 보는 안목을 위주로 말하고 있는데, 반하여 『몽산법어』에서 몽산의 말은 주로 수행의 방법과 수행의 과정을 말하고 있는 점도 보통의 선어록이나 대승경전과 『몽산법어』가 다른 점이다.
(주14)『간화선』에는 이밖에도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대한 잘못된 해석 등의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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