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선생은 일제시대 우리의 문화유산을 수집했던 분이다. 그리고 서울 보성중고등학교를 운영하신 분이다. 최근 간송 전형필이라는 책이 간행되어 화제가 되었다.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문화유산이 적지 않다. 청자나 그림이나 고서를 구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 모습은 세월이 지나서 그 의미를 헤아리게 되었다. 우리 골동이나 미술품을 수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형필 선생을 존경한다. 1940년 7월에 입수된 훈민정음 해례도 마찬가지이다. 막강한 권력과 금전을 가진 일본사람들이 훈민정음을 입수하여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면 우리는 그 원본을 보기위해 일본의 박물관이나 개인집을 가야한다. 그런데 전형필 선생이 입수하여 잘 보관했기에 다행이다. 우리 민족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형필 선생은 1960년대에 돌아가셨지만 그 뜻은 전승되고 있다. 경학원(經學院)은 일제시대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데 이 학교에 퇴계의 후손이며 안동 출신이 이용준(李容準) 학생이 다니고 있었다. 이용준은 안동군(현재 안동시) 와룡면 주하동 출신이었다.그는 후촌 이한걸(後村 李漢杰) 선생의 세째 아들이었다. 이한걸 선생은 와룡면지를 간행할 정도로 지역 유지였다. 이 집안에서 나온 훈민정음 원본이 나중에는 바로 간송 전형필 소장본이 되었다.그 책인 훈민정음 해례의 가격은 어느 정도인가하면 경성(서울)에서 한옥 한 채 가격인 3000원 정도에 거래되었다는 후문이다.그 당시 경성제대 김태준 교수는 학문적 시각에서 연구를 해야된다는 마음으로 그 훈민정음을 안동에서 가지고 올라온다. 가장 먼저 민속학자인 송석하 선생에게 보여주고나서 조선어학회 회원인 최현배 선생 등에게 보여준다. 최현배의 <한글갈>(1940)에는 경북 의성의 고가에서 발굴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실상은 안동군 와룡면 주하동이다. 왜 이러한 실수가 생겼는가 하면 안동이라고 하면 그 실체가 드러나면 가문에서 항의하기 쉽기때문이란다. 그러나 실상은 떳떳하지 못한 훈민정음 거래 때문이다. 금전적으로 환산하여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 고서가 실은 진성이씨에 보관되던 것이 아니라 광산김씨 집안에서 소유하던 것을 사위가 되는 이용준이 빌려왔다가 반환하지 못한 형편에서 매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위인 이용준은 연민 이가원 교수와 연배가 비슷하였는데, 평소에는 이기범이라고 불리었다고 증언하였다고 김계곤 경인교대 교수는 밝혔다.
첫댓글 성북동에 위치한 '간송미술관'은 가끔 갑니다만 ... 간송님은 문화재사랑 대단하셨죠 . 특히 6.25전란때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일화는 너무 유명하지요
김보명 님도 마찬가지로 간송 전형필 선생님처럼 문화재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느껴지는군요. 우리 상주인 중에도 문화재 사랑이 두터운 분이 많이 나와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