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후원 탐방기
후원의 얼굴이라할 수 있는 주합루와 부용지
코 스 - 부용지와 부용정 - 규장각과 주합루 - 영화당 - 금마문 - 영춘문 - 애련지 와 의두합 - 연경당과 선향재 - 관람지 와 관람정 - 존덕정과 폄우사 - 옥류천일원 - 향나무 일 행 - 이근환, 홍영표, 박한구, 김진구, 배병인, 하정식, 기민욱 김경채, 임영수, 박장열, 이주선, 이철규 (12명) 위 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창덕궁 좌측에 북촌과 현대건설빌딩 우측에 창경궁이 있다) 일 기 - 한여름의 땡볕이 내려쬠 일 시 - 2011, 7, 6, AM 11:30 ~ PM 16:00(4시간 30분소요) 입장료 - 창덕궁 3,000원 후원5,000원
옛 것을 보며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좌로 3번 째부터 이철규,박장열,김진구.이주선,이근환,홍영표, 김경채,기민욱,배병인,박한구,하정식,임영수
탐방기 불볕더위 속 한여름의 무더위는 예나 지금이나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선조들은 피서법으로 탁족을 하거나 느티나무아래에서 장기를 두거나, 등목을 하였겠지만 현대에 사는 광운인 10명은 선조들의 얼이 살아 숨 쉬는 고궁에 와서도 에어컨으로 시원하게 냉방이 된 휴게소를 찾아 엉덩이를 붙이곤 뗄 줄을 모르니 조금은 송구스럽기도 하다. 김진구부장님의 애제자 이며 이곳 창덕궁에 근무하는 기민욱이 여기에서도 시원한 음료로 대접을 하니 그의 후덕한 마음씨에 짜증나는 더위 속에서도 청량감을 느끼게 된다. 오후1시30분 구중궁궐 속, 왕과 왕비의 애환이 서려있는 후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낙선재입구를 지나 자시문에 이르니 궁궐과는 어울리지 않게 잘 포장된 도로와 입장을 막고 서있기에 다소 생소한 바리케이드를 만나게 된다. 입장을 위해 잠시 기다리는 사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안내인으로부터 후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박정희 대통령 때 공원의 관리를 위해 닦아 놓은 도로를 밟으며 작은 고개를 넘으니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형상을 표현한 전형적인 연못이 눈앞에 보인다. 남, 서, 북이 작은 언덕으로 둥그렇게 둘러 쌓여 아늑하며, 가운데엔 크지도 작지도 않아 땅의 크기에 딱 맞는 연못이 자리하여 있고, 기가성하는 동쪽으로는 넓게 열려 있어 풍수사상을 극대화하여 조성한 곳임을 알 수 있겠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고요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것이 언덕을 넘어오기 전 까지와는 전혀다른 세상이 펼쳐져있음을 알수있다. 주합루와 부용정 사이에 자리한 연못은 사각형으로 만들어져 사방 30 미터 정도인데 남쪽에 위치한 부용정이란 정자는 현란한 단청과 기둥2개를 물속에 담그고 있어 그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무릉도원의 신선이 노니는 곳과 같은 착각을 자아내게 한다. 남쪽에 비해 북쪽은 제법 높은 동산인데 어수문(魚水門)이란 문과 주합루(宙合樓)라는 현판의 2층 건물이 동산 위에 우뚝 서있음을 볼 수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각이져 있으니 과히 천원지방의 형상이라할 수 있겠다. 잠시 쉰다는 안내인의 소리에 우리는 부용지 동쪽의 영화당 건물 안으로 올라갔다. 과거를 관리하는 관원들처럼 가부좌를 하고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 사진도 찍으며 선조들의 흉내를 내어보니 재미가 쏠쏠하다. 이리저리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다 북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든 불노문, 한반도의 모양을 남북을 거꾸로 하여 만들어 놓은 애련정을 지나 창덕궁의 후원 북쪽 깊숙한 곳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개울 옥류천에 이르게 된다. 인조 14년(1636년)에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둥근 홈을 만들어 옥과 같이 맑은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는 이곳은 임금과 신하들이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 한다.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얼마나 따라다녔을까? 옥류천의 경치와 안내인의 설명은 참으로 좋으나 이제는 다리에 힘이 빠져 안내원의 설명을 듣는 것조차 힘이 들 지경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였든가? 점식으로 먹은 김밥 한 줄로는 양이 모자랐던가 보다. 이제는 빨리 끝내고 어디 시원한 곳에서 냉면이나 한 그릇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양 뜨거운 한여름의 오후에 김진구부장님, 기민욱의 도움으로 좋은 추억을 가슴에 안고 돌아갑니다. 2011년 7월 11일
영화당에서 과거시험을 관리하는 고관들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위엄 있게 한장 찍으려 하였으나 오늘의 시대 정신을 살려 활기찬 모습으로 담았습니다.
후원 탐방에 대한 나의 소고 창덕궁 후원. 그 옛날 임금님과 왕비 왕실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었던 조선의 풍수사상이 살아 숨쉬는 정원, 창덕궁 후원 또는 비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경복궁 동쪽 1Km 지점에 있으며 북쪽에는 성균관대학교, 동쪽에는 창경궁과 붙어 있는 한국 최대, 최고의 궁중 정원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궁원, 또는 후원, 비원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임금의 산책지로 설계된 정원으로 1405년(태종5년) 10월에 경복궁의 별궁으로 지은 것인데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24년)에 천민이나 노비들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1609년 광해군에 의해 중건되었다. 많은 전각과 누각, 정자가 신축 또는 보수되어 조선전기, 중기의 건축이나 생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원에는 왕실도서관이었던 규장각과 더불어 영화당, 주합루, 서향각, 영춘루, 소묘정, 태극정, 연경당 등 여러 정자와 부용지, 관람지, 애련지 등 연못이 자연 그대로 어울려 있으며 북으로는 옥류천이 있고 잘 가꾸어진 잔디, 정원수, 꽃나무 등이 조화를 이루며 있어야할 곳에 절묘하게 존재하여 보는이로 하여금 그 아름다움에 탄식을 자아내게 하는 곳이다. 여기에 한 여름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공원관리에 여념이 없는 관리인들과 한복을 곱게 차려입어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는 안내인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우리의 문화가 살아 있음을, 우리의 자존이 살아 있음을, 외국인을 비롯한 내국 탐방객들에게 알리어 주고 있으니 후원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빛을 발하리라 생각한다. 조선의 5대 궁궐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 운명을 같이해온 우리 역사의 동반자이다. 시대가 바뀌어 차차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가고 있기는 하지만 지나간 그 역사는 궁궐 각 건물의 공간 안에 현존한다. 그러기에 고궁 탐방은 단지 휴식을 취하고, 눈으로 즐기는 눈요기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역사 현장으로의 초대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2011. 7. 11
장로님은 설명을 듣는 것인지? 아름다운 자태와 낭랑한 목소리에 취해 정신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내인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개의치 않고, 후원에 대한 설명을 멈추지 않습니다.
조선5대궁궐 1. 경복궁 - 1394년에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경복궁을 지었다.2. 창덕궁 - 1405년에 3대 태종 이방원은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지었다. 3. 창경궁 - 1418년에 세종이 태종을 위해 현재의 터에 수강궁을 지었다. 1484년에 성종이 수강궁 터에 세분의 왕후(세조, 덕종, 예종)를 위해 전각을 더 지어 창경궁이라 하였다. 1910년 일제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고쳤다. 4. 덕수궁 -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이후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 한 후 경운궁이라 하고 7년 동안 왕궁으로 사용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위 순종에게 양위하자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5. 경희궁 - 1623년 광해군이 지었으며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1760년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73,000평의 부지에 10여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세 채 의 건물만이 남았으며 서울고등학교, 경희대학교는 경희궁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렬로 서서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후원에선 개별행동을 금지하며 1시간 30분정도의 관람 시간을 갖습니다.
2시간 정도를 기다린 끝에 입장을 하는데 나올 땐 파김치가 되어 나옵니다.
주합루(宙合樓)
주합루는 1776년(정조 즉위년)에 지은 2층 누각이다. 아래층은 왕립도서관인 규장각 서고이고 위층은 열람실이다. 초기 왕실도서관으로 출발한 규장각은 점차 정책연구기관으로 기능하여 정조의 개혁 정치와 조선 중기 문예 부흥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다양한 인재들이 여기서 활동하였다. 주합루라는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에는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다. 어수문은 임금이, 그옆의 작은 문으로는 신하들이 출입했다.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 조선의 궁궐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에 의해 조성됐다. 부용지도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 속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만들었다. 연못의 동남쪽 모퉁이 돌에는 뛰어오르는 형상의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영화당과 주합루 영화당은 인재등용을 위한 과거를 치뤘으며, 주합루는 1층은 규장각, 2층은 주합루로 나뉘어 있으며 왕립도서관의 역할을 하였다 합니다.
부용정(1792년 건립) 건물의 형태가 十자형을 기본으로 하되, 남쪽으로 양쪽에 한 칸씩 보태 다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이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 녀온 뒤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영화당(暎花堂)
영화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재 건물은 숙종 18년(1692년)에 재건한 것이다. 왕족의 휴식공간이자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하였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가 친히 쓴 어필이다.
어수문 왕은 물고기이고 백성은 물이라는 의미라 한다. 임금이 다니는 문은 크고 높아 당당하게 드나들라는 뜻이고 좌우에 신하들이 다니는 문은 좁고 낮으니 허리를 굽히고 낮추어 생활하라는 뜻이라 함
부용정 풍광 좋은 이곳에서 연산군은 주지육림의 향연을 벌였다 합니다.
규장각과 부용정의 배치도 배산임수의 전형을 갖추었습니다.
금마문 효명세자가 머물렀던 기오헌과 의도각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안쪽 전각에 왕세자가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문짝이 없고 기와지붕 위에 용이 두마리 있는 것이 특이하게 보인다. 마주 보이는 문에는 문짝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불로문(不老門)
불로문은 바위를 통쩨로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의 무병장수를 바라며 세웠다 합니다.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돌문으로 당시에 어떻게 저와 같은 문을 만들수 있었는지....
의두합(倚斗閤) 효명세자가 지은 건물로 단청을 칠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다. 효명세자는 1830년 대리청정 3년 만에 22세의 나이에 죽었다.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다.
기오헌(寄傲軒)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이때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 할아버지인 정조였으므로 주합루 뒤쪽에 집 을 짓고 이곳을 나라 일을 생각하는 장소로 삼았다.
연꽃 더러운 진흙탕 물에서 순백의 순수한 꽃을 피우기에 의미가 있다는 꽃입니다.
궁궐이 아니라 여느 대가 집에 온듯한 느낌의 장락문에 이르러 주의깊게 설명을 듣습니다.
과거의 우등생은 지금도 열심히 듣습니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일행들입니다.
연경당 왕세자였던 효명세자가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120여칸 민가형식의 집이다.
애련지(愛蓮池) 안내인의 뒤만 쫒아 다니다 주유시간을 주니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주변의 경관이 너무 좋아 사방을 조망하고 있는 관람객들
선남선녀의 만남 풍광과 잘 어울리는 한 장의 사진에 피로감조차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이장로와 홍박사 물 흐르는 아치형 다리 위에 서있으니 주변의 풍광과 제법 잘 어울리는 듯합니다.
존덕정(尊德亭) 육각정자 형태로 겹지붕이 특이하다. 내부에는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정조의 글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다. 옛날에는 다리 남쪽에 일영대(日影臺)를 설치하여 시각을 측정했다고도 한다.
존덕정 앞에서 관람정을 바라보며 지친몸을 쉬고 있는 일행들
김진구, 기민욱, 이근환 오늘의 행사를 주도한 세 사람이 옛 추억을 더듬고 있습니다.
옥류천으로 향하는 길 많은 왕과 왕비가 산책했던 길을 따라 우리도 걸어봅니다. 지나간 세월을 상고하며....
옥류천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북쪽 깊숙한 곳에 흐르는 개울을 가리킨다. 인조 14년(1636년)에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둥근 홈을 만들어 옥과 같이 맑은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여기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
정면에 보이는 바위가 소요암인데 인조 대왕이 오언절구를 새겼다 합니다. 飛流三百尺 폭포는 삼백척인데 遙落九天來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 看是白虹起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 飜成萬壑雷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漪亭) 등과 함께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여 많은 임금들에게서 특히 사랑받았던 곳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부들의 고충을 알기위해 임금이 직접 논 농사를 체험하기 위한 곳이라 합니다.
어정 바위를 뚫고 만들었습니다.
무슨 용도? 다같이 생각해보시죠. 이것의 용도를 두고 설왕설래 하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 했습니다.
창덕궁의 향나무 천연기념물194호 수령 700년으로 추정되는 이 향나무의 크기는 높이 6m, 가슴높이 줄기둘레4.3m, 가지퍼짐은 동쪽 5.5m, 서쪽 6.0m, 남쪽 2m, 북쪽 3.5m이다. 이 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은 313.5 m2 이다. 용트림하는 모양의 줄기가 꼬여 있는 것이 특이하다. 풍운아 대원군이 살던집 운현궁. 창덕궁과 후원을 관람하고 맛있는 집을 찾아 가던 중에 대원군이 살던 집 운현궁을 지나며...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 우리나라 풍수사상을 극대화 하여 조성한 건물과 못이 참 잘 어울리는 곳입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9988234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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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뭐니 뭐니 하여도 선남선녀가 제일이라... 극동궁마마의내락은 득하였소 ? 쌤 ! 그리 고생고생하더니 한건 잡으셨소이다 핸펀은 따 오셨는지 몰라...ㅋ 역사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고마워요 .
역시 미녀 옆에 서 있을 때는 행복합니다.
사진을 찍을 땐 가슴이 쿵쾅거려 혼났습니다.
왕 회장님께서도 세월이 더 가기 전에 좋은 추억 쌓을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