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현실 직면하기
신애가 의지하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유괴당하고 정신을 다 잃고 있을 때 아들이 다녔던 웅변학원 원장 딸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게 되는데 경찰은 강가에서 준이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들을 부정하면서 남들에게 오히려 강하고 흔들림이 없는 딱부러진 여자로, 혹시나 남들이 자신을 없수이 여길까 하여 돈 많은 여자처럼 행세하였지만 신애가 의지하고 있었던 것은 오직 어린 아이인 아들 준이었다. 그 아들이 죽게 되자 그의 인생도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아들 살인범인 웅변학원 원장이 체포되어 끌려올 때 빤히 쳐다보는 범인 앞에 신애는 도리어 고개를 돌리고 눈길을 피한다. 화장장에서 본인은 종찬에게 독백하듯 묻는다. “나는 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가? 마음 같아선 죽이고 싶은데...” 비로소 자신의 문제를 묻기 시작한다.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를 하러 가서 주민등록 번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지갑을 땅에 떨어뜨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신애는 그 자신을 인정하지 못한다. 종찬이의 도우려는 시도를 번번히 내친다. 동사무소에서도 도음을 주려는 사람에게 자기가 하겠다며 소리를 지른다. 약국 김 집사가 다시 전도를 시도하지만 오히려 조롱한다. 지금 신애는 도움이 필요한 자신과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신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다. 신애처럼 다른 이들에게 과시하면서 살 수록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기 힘들어 한다. 자신에게 솔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신애는 그 피할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선 것이다.
자기 현실 인정하기
동사무소에서 정신을 다 잃고 나와 맞은 편에 있는 교회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를 알리는 현수막을 보고 교회로 발걸음을 옮긴다. 약국의 김 집사가 몇 차례 마음에 찔러준 말이 이럴 때 효과를 나타낸다. 흘려버린 말이긴 하지만 자신이 필요하게 될 때 기억하게된다. 광고의 효과도 이런 데 있다. 감성적인 음악과 목사의 멘트를 따라 신애는 통곡을 한다. 자신의 문제를 처음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통곡해야만 하는 현실을 인정하게 되고 자신이 거부하던 교회 공동체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게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보자(마가복음 8:35)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자신을 부인하고”는 신애가 버려야 할 위선적인 삶이다. 자존심 세우려 스스로 이웃과 위선의 관계를 유지해온 그 위선의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 그리고 “제 십자가를 지라”는 아들을 잃고 자신이 직면한 아픔과 고통 절망과 분노를 피할 것이 아니라 끌어안고 인정해야 하는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살인범을 죽이고 싶다고도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이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다. 아픈 걸 아프다 하고 힘든 걸 힘들다고 인정해야 한다. 비참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신앙으로 거듭남
영화는 이제 후반부를 전개한다. 기독교신앙을 시작하는 신애는 크리스찬으로서 살아갈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물론 신애를 보살피는 마음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종찬이도 함께 신앙의 길을 가게 된다. 신애의 신앙, 그리고 종찬이의 신앙을 따라가보자.
신애가 변화된 자신의 느낌을 신앙고백으로 말하는 것으로 영화의 후반부가 시작된다. “가슴의 답답함이 사라지고 평안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불행하지 않고 날마다행복하다”고 고백한다. “마치 연애하는 느낌과 같다”고 교회 다니는 즐거움을 고백한다. 신애는 ‘느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이창동 감독은 신애의 신앙이 느낌이라는 감정에 많이 의존되어 있음을 보여주려는것 같다. 또한 이 영화가 한국기독교 신앙이 느낌이라는 감정, 찬양과 감성적인 언어에 의존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앙은 감정을 필요로 하지만 느낌에 의존된 신앙은 매우 위험하다. 사람의 감정은 절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감정의 발달이 7세 수준에서 완성된다고 본다. 그 이후에는 이성이 발달한다. 그런 점에서 감정의 신앙을 지나 성서를 이해하는 이성의 신앙으로 발달해야 한다. 감정과 이성은 서로 균형을 지켜야 한다. 기독교의 신앙은 성서의 진리에 근거하여 그 뜻을 이해하며 믿는 것이다. 단순히 느낌이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신애의 신앙은 느낌이라는 감정에 전적으로 의존 되어 있지만 성서의 텍스트(Text)에는 접근하고 있지 않다. 이 점은 영화 후반부에서 신애의 신앙이 파국을 맞게 되는 원인으로 지목해도 좋을 것이다.
거듭남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사람들은 신애의 신앙고백에 감동하고 신애는 감사한다. 교인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신애는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보여진다. 신애는 거듭난 삶이 이런 것이라고 자신 있게 고백한다. 하루 아침에 신앙의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신애의 확신에 대하여 의심을 하고 지나간다.
하나는 집에서 혼자 밥을 먹다 눈물을 그렁그렇 맺으며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장면이다. 연애하는 감정으로 행복하게 보여지지만 혼자 있을 때 그는 아들 준이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약해지지 않으려고 주기도문을 암송하며 애쓰지만 피아노학원 아이를 자신의 아들 준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여전히 신애는 아들을 잃은 아픔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신애의 아름다운 신앙고백 뒤안에 여전히 아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화려한 신앙고백만 보지 말아야 한다. 여전한 아픔에도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지적이다. 행복한 느낌만이 인생이 아니라 아픔과 슬픔도 인생이다. 그러나 신애는 또다시 위선의 유혹에 걸려든다. 아픔은 감추고 박수 받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에 매달리는 것이다. 거듭났지만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야 한다. 신앙은 한 순간에 천사가 되는것도, 초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울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했지 않은가?
또다른 하나는 피아노학원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다주는 사랑 가득한 모습과 아이들을 내려주고 가는 길에 아들 준이를 살해한 범인의 딸이 골목 길에서 불량배들로 부터 폭행을 당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눈이 마주치게 된다. 신애는 약간의 갈등을 겪지만 도움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신애의 눈에는 복수심이 가득하다. 이 장면에서 신애의 두 얼굴을 본다. 아름다운 신앙고백과 아이들에게 천사같은 모습 그리고 자신의 가장 아픈 상처의 흔적인 범인의 딸에 대하는 복수심이다. 이 모순된 감정이 또한 인간실존이다. 과연 신애의 그 아픈 감정이 아름다운 신앙고백으로 치유가 되었는가 하는 물음을 이 영화는 제기하고 있다.
신애의 새로운 삶, 기독교 신앙을 의지한 새 삶에는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그렇게 호락 호락 정리되지 않는다. 이제 시작에 불과한 새 삶에 과거의 삶이 끈질기게 따라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욕망과 이기심이 일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긴 싸움이 필요하다. 신앙의 영웅 바울도 그런 자신을 곤고한 인생이라 불렀고 두 개의 자아가 자신 안에서 싸운다고 고백했다(로마서 7:23). 신애는 이 싸움장에 들어선 것이다. 이 싸움을 다 싸워야 신앙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신애는 영웅이 아니라 갓 태어난 영적 아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다음에 계속)
심용섭(2008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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