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 : 1822~1824년
♣ 초연 : 1824년 5월 7일,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실질적인 지휘는 움라우프
가 함
♣ 공개 초연 :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열린 전쟁 부상병을 위한 사선 연주회장
♣ 출판 : 1826년
♣ 헌정 :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편성 : 피콜로, 플루트2, 오보에2, 클라리넷2, 콘드라베이스2, 호른4, 프럼펫2, 트럼본3, 팀파니, 심벌즈,
트라이앵글, 현5부,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의 각 독창, 혼성 합창
♣ 연주시간 : 약 70분
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1970)
Symphony No. 9 in D Minor
Music by Ludwig van Beethoven
Words by Friedrich Schiller
Performed by the Vienna Philharmonic and the Vienna State Opera Chorus,
with soloists Martti Talvela, Plácido Domingo, Shirley Verrett and Gwyneth Jones
Conducted by Leonard Bernstein
A concert in Konzerthaus Wien
1. 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
2. Molto vivace
3. Adagio e cantabile - Andante moderato
4. Presto - Allegro assai
이 곡에는 『 실러의 송가 '환희에 부침' 에 의한 끝 악장에 합창을 담고 있다. 』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 곡은 <합창> 또는 <합창 붙음>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당시까지 고전적인 교향곡에는 성악을 전혀 갖지 않았는데 이 곡에서 처음으로 네 사람의 독창자와 혼성 합창단을 이용한 것이다. 또한 제4악장은 실러(1759~1805)의 「 환희에 부친다」송가의 구절을 가사로 사용하고 있다. 베토벤은 본래 이 실러의 송가 전체에 음악을 붙혔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분을 골라 사용하였다.
이 실러의 송가는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5년 드레스텐에서 씌어진 것으로 독창과 합창을 교대로 부르게 되어 있다. 당시 26세의 청년 실러는 독일의 봉건적 정치 형태와 전제적인 군주제 때문에 괴로워 하고 있었다. 이 시에서 그는 인류애와 수백만 명의 단결에 의한 인간 해방의 이상을 소리 높혀 노래하였다. 실러는 처음에는 이 시에 「자유에 부침」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지만, 엄격한 검열 때문에 '자유' 를 '환희' 로 고쳤다고 한다. 이 송가는 당시 청년이나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
▼바덴 헤레나 계곡의 산책
만년의 2대작 《미사 솔렘니스》와 《제9교향곡》은 메드링이나 바덴의 산골짜기나 숲을 산책하면서 작곡한 것이다. 메드링에는 그가 미사곡을 작곡한 집이 2채나 있고, 바덴에는 3년 계속해서 여름을 지내며 《제9교향곡》을 쓴 집이 있다. 늦가을에 빈으로 스케치를 가지고 돌아와 겨울 동안에 완성했다.
이후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출현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나고, 베토벤도 나폴레옹이 옛 전제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만주적인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호감을 갖기도 했다. 이런 성격의 베토벤이 실러의 송가를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베토벤이 이 송가에 관심을 갖게끔 한 사람은 당시 본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젊은 시인으로, 실러 부부와 친분이 있는 루트비히 피체니히(1768~1831)였다. 베토벤은 1792년 빈으로 옮겨오기 한 달 전쯤에 이 피체니히와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1793년 1월 27일 실러의 아내 살로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체니히는 베토벤이 실러의 「환희」의 각 악장에 음악을 붙일 계획을 세웠다고 알리고 있다.
이에 앞서 <교향곡 제9번>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1790년 9월부터 10월에 걸쳐 작곡한 <레오폴드 2세 대관식을 위한 칸타타>가 있다. 그 마지막 제4악장에 합창에 「엎드려라, 수백만의 사람들이여」라는 노래 부분이 등장한다. 이와 유사한 가사가 실러의 송가에도 나온다. 이 칸타타는 실러가 아니라 아벨동크의 시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이 부분에서의 성악과 관현악 처리에도 <교향곡 제9번>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
<교향곡 제9번> 제4악장의 유명한 "환희의 주제" 가 어디에서 비릇되었는지 근원을 찾은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는 1794년 또는 1795년 초에 씌어진 가곡 <사랑받지 못하는 이의 탄식> 과 <서로 사랑함>의 부분이 발견된다. 이 가사는 뷔르거(1749~1795>가 쓴 것으로, 사상적으로는 실러의 것과 관계가 없다. 또한 이 선율은 1808년에 완성된 <합창 환상곡> 작품80의 노래 주제로 다시 사용된다.
▼베토벤은 1821, 22, 23년에 이 2층을 빌어 《제9교향곡》의 작곡에 전념했다.
바덴 라트하우스가세 10)
1812년이 되면 "환희의 주제" 를 위한 또 다른 스케치가 나타난다. 이것은 3/4박자의 것으로 첫째박에만 선율음을 두고, 둘째박과 셋째박을 쉼표 처리한 것이다. 또한, 1822년에는 4/4박자의 현재의 것과 동일한 선율이 스케치 노트에 등장한다.
이 처럼 제4악장의 가사와 주제만 놓고 보더라도 <교향곡 제9번>이 완성되기 까지 작곡에 걸린 기간은 매우 길다. 다른 악장의 경우 1809년 스케치에서 첨으로 현재의 1악장 첫머리의 복안이 씌어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1811년과 1812년경에는 <D단조 교향곡>이라는 필적이 있으며, 1812년 5월말의 편지에는 『지금 3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으며, 한 곡은 이미 완성하였다.』라고 적혀있다. 이 3곡은 교향곡 제7번과 제8번, 그리고 제9번 교향곡이다.
1815년은 빈 의가 열린 해이며, 베토벤 개인적으로도 영광의 해라고 할 수 있다. 스케치 노트에서는 현재의 <교향곡 제9번> 제2악장의 스케르초 주제가 발견된다. 또한 1817년 9월경부터 1818년 5월경까지의 스케치 노트에서는 현재의 제1악장의 대체적인 윤곽과 전체의 구도도 발견된다. 1818년에는 교향곡에 옛 조성을 지닌 종교적인 노래를 도입하는 것 때문에 고민하며, 마지막 악장이나 아다지오에 노래를 삽입하기로 한다. 즉, 아다지오에는 그리스의 종교적이며 신비한 가사를, 마지막 악장에는 바쿠스의 제전을 배치하려고 한다. 그 무렵 베토벤은 2곡의 교향곡을 쓰려고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곡에 성악을 도입하려고 했는지 단정할 수 없다.
동생 요한 반 베토벤 |
조카 칼 반 베토벤 |
베토벤의 만년은 쓸쓸했다. 1826년 가을, 조카 칼을 데리고 동생 요한을 도나우 강변의 그나이크센도르프로 찾아갔으나 제수와의 불화로 실망했다. 추운 겨울에 무리해서 빈으로 돌아오다가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 이듬해 3월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1817년부터 1818년까지 베토벤은 개인적으로 행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귓병에 대해서는 완전히 체념한 상태였으며, 몸도 좋지 않아 기관지와 장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더구나 베토벤을 둘러싼 빈의 음악계는 심원한 음악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메테르니히의 철권반동 보수체제를 확립하여 자유주의가 승리하기를 기대하던 시민들을 억압하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베토벤은 이런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다. 또한 조카인 카를을 돌봐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점점 불량해지는 카를에 대해 피붙이로서의 애정을 쏟으며, 품행이 좋지 않은 카를의 엄마와 카를의 양육을 둘러싸고 재판까지 벌이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베토벤의 창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당연하였으며,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가운데 남모르게 진척시키고 있었던 것이 <교향곡 제9번> 제1악장이었다. 이 악장의 커다란 스케일과 투쟁적인 특성, 고투한느 모습은 당시 베토벤이 겪던 어려움을 이해할 때만 납득할 수 있을것이다.
병마와 육체적 피로, 마음의 아픔과 같은 악 조건에 둘러쌓인 베토벤에게 1818년 영국으로부터 최신식 브로드우드 피아노가 기증되었고, 이를 계기로 베토벤이 피아노 음악에 대한 의욕이 다시 타오르게 된다. 또한 그 해 가을에는 마음에 들지 않은 빈을 벗어나 이전부터 있었던 초청을 받아들여 런던의 필하모니 협회에서 교향곡을 초연하려은 계획도 진척시키고 있었다.(그러나 이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장엄미사>(미사솔렘니스)의 작곡에도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처럼 1818년 초여름에 베토벤은 창작의 힘을 되찾았다. 그리고 런던 필하모니 협회로부터 두 곡의 교향곡을 작곡해달라는 의뢰도 받는다. 앞서 말한 두 곡의 교향곡 작곡 계획은 이와 연관된 것이다. 베토벤은 한 곡은 기악만으로, 다른 한 곡은 성악을 함께 사용한 곡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장엄미사>는 원래 루돌프 대공의 대주교 취임을 위한 곡이었으며, 예정보다 2년 정도 늦어진 1822년에 완성되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평화와 세계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이 곡을 열심히 썼으며, 피아노 소나타로 기분을 전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곡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렇게 대곡 미사가 완성되자 중단했던 교향곡 작곡에도 눈을 돌릴 수가 있었다. 런던에 있던 제자 리스에게 새로운 교향곡 작곡료 등에 필하모니 협회와 다시 이야기를 진척시키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 결과 런던의 이 협회는 1822년 11월 작곡료를 결정하였고 베토벤도 이것을 받아들인다.
《제9교향곡》을 초연한 케른트너토어 극장(빈)
베토벤은 그때까지 구상하고 있던 <D단조 교향곡>을 협회를 위해 진행시키기로 하고 기악만 사용한 교향곡으로 작업하게 된다. 그러나 합창을 덧붙인다는 아이디어도 버린 것은 아니어서, 또다른 <독일 교향곡>이라는 작품에 합창을 삽입할 예정이었다. 이것은 당시 민족 의식의 고양이라는 흐름에서 독일인으로서의 자각에 입각하여 계획된 것으로, 그 마지막 악장에 실러의 <환희에 부침>에 토대를 두고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구축하려는 구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D단조 교향곡 제3악장은 바덴의 자연속에서 작곡되었다. 이 악장에 안정되고 따스한 분위가가 감도는 것은 바로 그런 환경 탓이었다.
베토벤은 이 두 교향곡을 함께 작곡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아이디어를 하나로 합쳐 하나의 교향곡을 쓰기로 계획을 바꾸게 된다. 현재의 <교향곡 제9번>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전곡은 1824년 2월에 완성되며, 역사적인 초연은 빈의 케른트너토어의 궁정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곡이 끝났을 때, 완전히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은 알토 독창자가 알려주어 간신히 청중의 박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 연주회에서 돌아온 수입은 예상외로 적었다고 한다.
이 <교향곡 제9번>은 확실히 베토벤의 위대한 산물이다. 베토벤은 <장엄미사>에서 자신의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평화를 기원하였고, 마지막 곡 <아뉴스 데이>에서는 내적인 평안은 확신하였지만 외적인 평화에 대해서는 스케치나 초고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을 보충하는, 또는 완결짓는 것이 바로 이 교향곡이다. 모든 인류가 함께 실현시켜야 할 평화를 이상주의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또한 베토벤의 신념이었던 「고뇌를 통한 환희」라는 말은 그대로 이 교향곡 작곡 과정에서도, 그리고 곡 자체의 진취적인 자세에서도 확실히 부각되어 있다.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불온한 반동정치도 베토벤에 의해 불멸으 예술 작품으로 귀결되었다.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뇌를 통한 환희」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앞의 세개의 악장은 제4악장의 전제로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지막 악장에서 음악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앞의 세 개의 악장을 총괄하는 새로운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제1악장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공허한 시작 방법, 충실하고 장대한 코다, 제2악장 스케스초에서의 소나타 형식과 푸가토를 혼용하는 대규모의 구성법, 제3악장의 두 개의 주제를 지닌 변주곡이면서도 자유롭게 정돈된 방법, 그리고 마지막 악장에서 변주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형식, 이 모든 것은 그 때가지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특징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끊임없이 큰 영향을 주었다. 악기 편성에서도 종래의 교향곡보다 주준이 높으며, 타악기 종류도 늘어나 있다.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자필 악보로 악보 중간에 'seid umschlungen, Millionen(백만인이여, 서로 껴안으라)'라고 씌어진 베토벤의 육필이 보인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제1악장의 신비스러운 도입부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교향곡의 첫 도입부를 듣는 순간, 베토벤 교향곡이라면 으레 크고 웅장하게 시작되리라는 우리의 추측은 여지없이 무너져버린다.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들릴 듯 말 듯한 호른의 지속음과 현악기의 살랑거리는 트레몰로가 슬그머니 교향곡의 시작을 알린다.
다이내믹은 피아니시모(pp). 10여 마디가 지나도록 들리는 음이라고는 단지 A와 E음 뿐이다. 이 텅 빈 완전 5도를 채워줄 중간 음마저 빠져있어서 대체 이 음악이 장조인지 단조인지조차 감이 안 온다.
이처럼 애매모호한 도입부는 베토벤 이전의 교향곡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파격적인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이론가들은 이 도입부를 가리켜 아무 것도 없는 혼돈 속에서 서서히 우주가 생성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또한 어둠 속에서 서서히 해가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훗날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는 거의 모든 그의 교향곡에 이러한 개시 방법을 도입해서 ‘브루크너의 모든 교향곡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이다’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Beethoven - Symphony No. 9 "Choral"
I. 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
신비로운 1악장의 도입부가 지나면 d단조의 주제가 단호한 어조로 등장한다. 쓸데없는 수사나 장식 없이 전 오케스트라가 큰 소리로 단순 명쾌한 주제를 연주하는 순간 압도적인 숭고함이 뿜어 나온다. 그러나 1악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바순과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베이스가 D에서 A로 반음계적으로 하행했다가 다시 D로 되돌아오는 선율을 반복해서 연주하며 어둡고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확신에 찬 어조를 다시금 비탄의 정서를 자아내며 1악장을 마무리한다.
태초의 혼돈과 우주의 생성으로 시작해 비탄으로 끝난 1악장은, 이런 심각한 슬픔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활기찬 2악장으로 이어진다. 베토벤 연구가 솔로몬이 이 악장에서 비극은 갑자기 익살극으로 바뀐다고 말했듯이, 2악장의 기괴한 음악은 1악장의 고뇌를 한 순간에 하찮은 농담으로 전락시킨다. 그 농담은 유쾌하다기보다는 냉소적이며 지극히 악마적인 것이다. 여기서 팀파니는 2악장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희극 배우로 활약한다. 보통 방식대로 완전 5도로 조율되지 않고 옥타브 음정으로 조율된 팀파니는 갑자기 큰 소리로 끼어들며 우리에게 섬뜩한 농담을 건넨다.
Beethoven - Symphony No. 9 "Choral"
II. Scherzo: Molto Vivace - Presto
2악장의 열광적인 무곡이 끝나면 사랑으로 넘치는 3악장 아다지오가 뒤따른다. 음악학자 조세프 커먼은 베토벤의 후기 기악곡에 ‘인간의 목소리’(voice)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아다지오야말로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 아다지오는 순수 기악곡이지만 여기에는 마치 성악곡과 같은 유려한 멜로디가 흐르며 천상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Beethoven - Symphony No. 9 "Choral"
III. Andante Molto e Cantabile
4악장이 시작되면 오케스트라의 서주를 지나 베이스 독창자가 일어나 “오, 벗이여! 이런 곡조는 아니오! 더 즐겁고 환희에 찬 곡조를 노래합시다!”라 말한다. 그러면 지극히 단순하지만 강한 설득력을 지닌 환희의 선율이 시작된다. 그 뒤를 이어 터키풍의 행진곡과 느리고 장중한 음악, 환희의 멜로디를 기반으로 한 변주, 소나타와 협주곡 형식 등이 합쳐지면서 거대한 음악적 통일이 성취된다.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는 환희의 송가를 통해 청중은 모두 하나가 된다.
Beethoven - Symphony No. 9 "Choral"
IV. Finale: "Ode to Joy"
기악을 마치 성악처럼 다루는 방식은 4악장에서 더욱 돋보인다. 9마디 상박부터 시작되는 첼로의 기악 레치타티보는 그 대표적인 예로, 이 멜로디는 후에 나타날 ‘오, 친구여’로 시작되는 베이스의 레치타티보에 해당된다. 4악장은 기악곡을 성악곡처럼 쓴 곡일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간 성악곡이기도 하다.
베토벤의 시대에는 교향곡에 성악을 사용하는 예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혁명적인 시도여서 당시의 몇몇 평론가들은 교향곡에 사람의 목소리를 넣은 것은 큰 실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애초의 계획을 그대로 고수하여 그의 마지막 교향곡을 기악과 성악을 혼합한 장엄한 대서사시로 만들어 후대의 교향곡 작곡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첫댓글 성탄절에 듣는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 감사한 마음으로 감동 넘치게 잘 감상했습니다.
기악과 성악이 어우러진 웅장한 4악장은 온몸에 전율을 느끼기에 충분하네요~~~~
꼭 성탄절이 아닌 어느때 들어도 좋은것 같아요.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년말에 듣기에 .. 감사합니다.
역시 송년에는 합창입니다.
교향곡 9번에 대한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합창교향곡 무척 좋습니다
감사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