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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전라도 사람들(1)
글쓴이 신재욱 HIT 145
글쓴이 소개 교사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도 창녕(昌寧)땅이고 성장한 곳도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백사장 위에 자리잡은 남지(南旨)라고 하는 소읍이다.
그 동안 살아온 곳을 열거하자면 마산과 남지의 고등학교를 잠시 다녔고 청년시절, 서울에서의 재수(再修)와 대구에서 대학생활을 거친 뒤 군대생활을 포함하여 부산에서만 줄곧 25∼6년, 이제 50대 초반에 이르렀다.
부산에 오기전 한 1년 남짓 전두환의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생활한 적이 있지만 어쨌거나 전라도 땅에서는 단 한 달도 살아본 적이 없다.
따라서 소위 호남인들에 대한 편견을 구비하기엔 손색없는 조건을 갖춘 셈이다.
비록 전라도 땅에서 생활한 적이 없다지만 50년을 넘게 살다보면 필경 숱하게 만나고 스쳐갔을 호남인들.............
과연 나는 내 기억의 밑바닥에 어떤 편견을 깔아놓고 있는가? 전형적인 영남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어떤 편견도 없이 기억에 남아 있는 호남인들을 한번 회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억을 되살려 천천히 검색을 해보자......
▲ 전라도 말씨의 완벽성
1960년대는 전국 어디라도 그러했겠지만 내가 살았던 시골 소읍도 모두들 먹고살기가 고달팠다.
이웃에 빵집가게 하나가 새로 생겼는데 그 집 식구들, 경상도 말씨가 아닌 낌새로 보아 아마도 빚을 지거나해서 자신들의 고향 땅에서 가만히 이주해온 듯 하였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고등학교를 갓 나온 그 빵집 큰아들은 다방면으로 재주가 뛰어났었다.
탁구면 탁구, 당구면 당구 못하는 게 없었다. 바둑과 장기도 고수였고 특히 기타솜씨는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남의 기타를 가지고 [쟝고]니 [마이 블루 헤븐]을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모습에 나는 열광하였다.
여름밤이면 평상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며 그 어렵다는 곡 [그린 필드]를 하모니카로 멋들어지게 불곤 하던 그 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은연중에 그 형이 쓰는 말씨조차도 완벽한 재주를 지닌 사람들의 말씨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듯 싶다.
지금도 나는 전라도 말씨에서 허술함보다는 어떤 완벽성을 느끼곤 한다.
▲뜬구름에 싸인 순천의 휴가병
몇 학년인지는 잘 모르지만 우리가 배운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동명아, 남해 지도를 펴보아라....]
기행문에 관련된 단원으로서 남쪽바다 -다도해 -의 풍광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는데 당시 나는 순전히 상상이긴 했지만 다도해의 절경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기필코 남해의 다도해를 여행해보리라 작심하였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통영에서 도내 중·고등부 사생대회가 열렸는데 나는 사생대회 참가를 빌미로 아예 여장을 꾸려서 출발하였다.
사생대회 작품일랑은 얼렁뚱땅 그려서 제출한 다음 여수행 여객선을 타기 위해 부두로 내달았다.
충무항을 벗어나자 약간은 우수에 젖은 기분으로 뱃전에 기대어 다도해에 떠 있는 섬들을 바라보았다.
초등학교 교과서의 내용이 너무 인상적이었던 탓이었을까,
남해바다는 생각만큼 푸르지를 않았고 섬들도 기대한 만큼 오밀조밀 하지도 않았다. 고독하면서도 화려한 감상으로 넘쳐나는 여행을 예상했던 나는 풀이 죽은 채 이윽고 낯선 항구, 여수에 도착하였다.
오동도를 거쳐 시내를 한바퀴 둘러본 다음 아무 생각 없이 투숙한 여인숙의 옆방에서는 밤새도록 남녀의 거친 신음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것은 내 순수한 여행의 환상을 질펀한 점액질이 범벅된 현실로 바꾸어놓았다.
다음날 씁쓸한 기분인 채로 나는 순천역 대합실에서 마산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개통된 경전선을 이용하기 위해 대합실은 제법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군인 하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학생도 미술부원인가?
그 군인은 화구박스를 가리키며 말을 걸어왔다. 검은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심한 편이었다.
-나도 학교 다닐 때 미술부원이었는데.....
군인답잖게 그는 쓸쓸한 분위기 그 자체였고 내 곁에 놓여져 있던 화구박스는 미술부원이었던 그의 학창시절을 새삼 돌아보게하는 적절한 구실이 되어 준 셈이었다.
명(明)씨 성(姓)이었던 그 군인은 예상한대로 내가 적어준 주소지로 사흘 간격으로 편지를 보내왔는데 뭐랄까,
특이한 필체하며 편지의 내용이 대한민국 육군 병장의 정서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감상적이었다.
대수롭잖은 일상 중에도 곧잘 감상의 늪에 빠지는 것이 나의 특기였건만 전라도 순천 출신의 그 군인은 말하자면 아예 처음부터 감상의 늪 바닥깊이 가라앉은 병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일일이 그에게 답장을 쓰기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서로간의 연락도 저절로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는데 돌이켜 보니 사실은 좀 궁금하다. 지금도 감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뜬구름과 더불어 살고 있는지........
개인적인 경험일지라도 한 개인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전라도 말씨를 쓰는 조폭의 설정은 이런 이유로 내겐 낯설다.
내 기억의 저변에는 그보다도 예민한 감수성의 한 전형으로 호남인들은 남아있다.
▲수도승 같았던 재수생
70년대 벽두, 주먹만한 눈송이가 쏟아지는 새벽에 나는 청운의 뜻을 품고 이 나라의 수도 서울에 그 첫발을 내 디뎠다.
비록 시골에서의 독학에 가까운 수험 준비였지만 국립대학에 응시원서를 낸 이면에는 나름대로의 기개를 흉중에 품고 있었다.
--서울놈들, 얼마나 잘났는지 어디 한번 겨뤄보자구.--
적어도 나는 고향 땅을 떠나 올 때 '남아입지출향관(男兒立志出鄕關)하야' 식으로 비장한 출가(出家)를 한 뒤끝이라 웬만한 서울의 경쟁자들과의 첫 대면에서 주눅들지 않을 각오 하나는 대단하였다.
시험 전까지 최후의 15일 정도는 잠을 자지 않고 아예 밤을 새울 요량으로 일찌감치 상경하여 미아리 근처의 독서실에다 거처를 정하였다. 까짓 것, 정 잠이 오면 잠깐씩 엎드려 눈을 붙이면 될 것 아닌가.
그러나 며칠도 안되어서 나는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루종일 엎드려 눈을 붙이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종아리는 퉁퉁 붓기 시작하였고 머리 속은 희미한 안개 같은 것으로 뒤덮여 꿈인지 생시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였다.
그런 나의 꼬락서니가 보기에 애처로웠는지 내 옆자리의 재수생이 독서실의 의자를 나란히 붙여서 침상을 만들더니 거기에 누워 자라고 권유하였다.
며칠째 수평으로 누워본 적이 없던 나는 '옆으로 눕고 싶은 강력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염치 불구하고 의자침상에 눕자마자 그 즉시로 코를 골았다.
얼마를 잤을까,
눈을 떠보니 그 재수생은 여전히 꼿꼿하게 앉아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재수생이야말로 자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경지에 달한 수도승은 앉아서도 숙면을 취한다던데 혹시 오랜 독서실 생활을 통하여 득도라도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서 나는 그 형을 알게되었는데 이미 경희대에 다니고 있으면서 3년째 서울대를 목표로 입시준비를 하는 잠재적 재수생이었다.
광주일고? 아니면 전주고 출신이었던 그 형의 식견은 한마디로 놀라운 것이었다.
어느 날, 아무 생각도 없이 퇴계(退溪)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물어본 나에게 율곡(栗谷)의 주기설(主氣設)과 대비해가며 퇴계(退溪) 학설의 주리적(主理的) 측면을 거침없이 설명해주었고 급기야는 이(理)와 기(氣)의 호발적(互發的) 관계인지 공발적(共發的) 관계인지 내로서는 종잡을 수 없는 관계에 의해 4단(四端)과 7정(七情)이 생겨난다고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그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도 몇 년씩 낙방하고 있는 사실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었다.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나는 그때까지도 합격의 가능성을 꿈꾸며 약간은 기고만장하던 중이었는데 밤을 새워가며 책을 독파하던 그 형의 진지한 모습을 통해 공부란 한때의 객기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지금쯤은 높은 공직자가 되어 성공적인 업적을 쌓고 있으리라 믿어지지만 한편으론 그런 형의 성실과 높은 식견을 제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회가 아닌 점을 감안해보면 일말의 불안도 없지는 않다.
▲물똥 싼 바지를 빨아준 전라도 아주머니
대학시험에 떨어진 후 그 즉시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죽을 고생을 해가며 재수를 한답시고 서울서 버텨낸 것은 집을 떠나올 때 '아버지 어머님, 성공해서 돌아오겠습니다'며 큰소리를 쳐놓은 데에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격언에 힘입은 바도 컸었다.
젊음 하나만 믿고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해서라도 서울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하여 끝내는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아집으로 그야말로 내 젊음은 하루하루 피골이 밀착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해볼만하다는 감언이설에 절대로 속아서는 안 된다. 고생은 원천적으로 사고 팔 수 없는 비매품이다.
운명적으로 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세 치 혀끝으로 위로하기 위한 헛소리일 뿐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내 영육이 끝없이 소진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기꺼이 고생을 감수하던 중이었다. 굶는 것은 예사였고 한 끼 식사를 위해 길음동에서 서교동까지 걸어가기도 하였다.
어느 여름날, 목도 마르고 무지하게 배가 고팠던 나머지 충무로에서 어떤 할머니가 파는 단술 한 그릇을 사서 마셨다. 단돈 10원으로 갈증과 허기를 한꺼번에 해결하려한 심보가 잘못이었을까, 세종로를 지나면서부터 속이 메슥거리더니 기어코 굴레방 다리에다 노란 똥물까지 쏟아내고 말았다.
할머니가 손수 제조했다는 그 단술의 주성분은 아마도 생체 실험용으로 쓰이는 독극물이었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월세 삼천원 짜리인 사다리꼴 다락방에서 사흘 밤낮을 반송장이 되어 데카르트식 인식론을 체득하게 되었다.
나는 설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실제로 나는 내가 살아있는 상태인지 죽은 상태인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분명한 사실은 항문으로 오줌 같은 것이 쉴새없이 새어나오는 증세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설사를 계기로 각박하기가 짝이 없던 서울바닥에도 사람다운 사람이 살고 있다는 중대한 발견을 하게되었다.
폭 50센티의 복도 맞은편의 직사각형 셋방은 월세가 오천원이라 아무래도 나보담은 형편이 조금 나은 젊은 부부가 세들어 있었는데 정비공인 남편보다 15센티쯤은 더 컸던 전라도 아주머니가 물똥으로 곤죽이 된 속옷과 바지를 빨아주어서 엉금엉금 기어서나마 아래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고 소뼈를 고은 국물에 밥을 말아 술을 팔던 아래층의 이북 아주머니가 피골이 상접한 나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라서 떠 준 곰 국물을 몇 모금 얻어 마시고서야 극적인 회생을 하게되었다.
당시에 나는 낯가죽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모욕적인 서울의 냉대에 시달리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기골이 장대했던 전라도 아주머니, 그리고 이북 출신의 국밥집 아주머니는 내게는 정말로 감동적인 이웃이었다.
▲보길도에서 보내온 편지
개교 기념 축제기간 중 남녀 기숙사를 개방하는 날이었을 것이다. 여자 기숙사 앞을 얼쩡거리다가 나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발산하는 강력한 유혹에 이끌려 특정한 방으로 인도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그녀의 방이었고 나를 유혹한 여학생들 역시 같은 방에 있는 그녀의 추종자들이었다.
-언니가 있어야 하는데 오데 갔노? 하필 이런 때 언니가 안보이네?
문제의 언니는 남자 기숙생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여학생으로서 아침저녁으로 식당에 나타날 때에는 항상 일단의 추종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녀가 구사하는 걸걸한 전라도 사투리에 식당 안은 한바탕 웃음꽃이 흐드러지곤 하였다.
요즘에 와서는 너나 없이 아무나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카리스마'이지만 내가 대학에 다녔던 당시에는 스탈린이나 카스트로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갖출 수 있는 어떤 절대적 권위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여자 기숙생들에게 둘러싸여 추앙을 받고 있는 느낌이 확연했던 그녀를 볼 적마다 나는 이미 묘한 카리스마를 느끼곤 하였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녀를 따라 다니는 추종녀들이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것으로 봐서 대단한 유모어를 구사하는 일종의 카리스마를 느끼곤 하였다.
그런 언니를 나와 맺어주려는 징후가 눈앞에 펼쳐진다 싶으니 나는 나대로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한 여학생에게 완전히 일신이 얽매여 있었던 처지로서 그런 분위기를 수용할 만한 배짱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여학생에게 한 눈을 판다는 미세한 기미라도 포착되는 날에는 또 다시 지긋지긋한 자살소동을 온몸으로 겪어야하기 때문에 나는 극도로 조신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의 어정쩡한 행태의 본질을 얼마 후에 나타난 그녀는 꿰뚫고 있었다.
-너거들 생사람 잡을 일 있냐? 이 사람 빨리 풀어줘라이.
내가 다녔던 지방대학은 전교생의 얼굴을 다 알아볼 정도로 그 규모가 단출한데다가 유별난 캠퍼스 커플의 주인공이기도 한 까닭에 어쩌면 그녀의 나에 대한 배려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해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내려간 고향에서 그녀로부터 보내온 한 통의 두툼한 편지를 받았다.
발신지가 보길도인, 양면괘지 10장 가량의 장문의 편지였는데 대부분 고산 윤선도의 흔적을 남다른 애정을 갖고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그녀의 성이 윤(尹)씨인 점으로 보아 아마도 고산의 후손일 것이었다. 편지 끄트머리에는 보길도의 달빛과 파도가 어째서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우며 소나무 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유난히도 허전하게 들리는 까닭을 모르겠노라고 적혀 있었다.
그 서러움과 허전한 까닭을 모르지 않았던 나는 그러나 개학 직후 기숙사 식당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지극히 무미건조한 한 마디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편지, 잘 읽었습니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30년이 지난 지금 생각이 잘 안 나지만 아마도 이렇게 나를 꾸짖었을 것이다.
-잘 읽었으면, 답장도 못해? 사내자식이........
▲애인복수극을 처절하게 연기하던 김일병
사령부의 본부 내무반에는 영어의 몸이 됨으로서 쓰라린 실연을 당한 온갖 유형의 청춘들이 군복을 걸치고 있었다.
광주 출신의 김일병도 그 대표적인 실연파였다. 그는 고참병들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무반원들 앞에서 소위 고무신을 바꿔 신은 자신의 애인을 휴가 나가서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실감나게 연기해 보였다.
-부대서 휴가 출발한 지 정확히 사흘 뒤에 신문의 사회면을 보시면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주인공으로 제 얼굴이 커다랗게 나와 있을 거입니다잉.
그는 휴가 나가는 즉시로 철물점에 들러서 칼과 톱을 구입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드린 뒤 변심한 애인을 불러내어 선친의 산소로 데리고 가겠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애정을 확인하는 절차는 일단 밟아보겠지만 결과는 뻔할 것이라고 하였다.
-왼손으로 머리채를 후왁 낚아챈 담에 요 칼 끄트머리가 그년의 심장을 어떻코롬 찢어뿐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여 줄 챔이여.
김일병의 애인 살해 공연은 인기가 높았다.
애인의 사지를 톱으로 썰어서 영광 굴비 엮듯이 로프로 엮어 소나무 가지에 매달아 까마귀밥이 되게 한다는 대목에 이르면 동병상련일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군바리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쳐댔다.
그들의 대부분은 면회 올 날짜가 훨씬 지나도록 소식이 없는 애인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었으며 아예 소식이 끊긴 애인 때문에 이를 가는 축도 있었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청천벽력같은 통고에 미치기 직전의 사병도 있었다.
김일병의 실연은 그들 모두의 공통된 상처였다.
때문에 애인 살해극은 무려 일 년째 장기 공연이 되고 있었다. 매 공연마다 살해 방법이 달라졌다.
그러나 첫 휴가 나가기 직전의 김일병은 애인 살해극이 아니라 감동적이고도 환희에 넘치는 애인과의 극적인 상봉 장면을 연출하여 내무반의 인기를 휘어잡았다.
희망에 부풀었던 김일병이 휴가를 다녀 온 이후로 어깨는 천근의 무게로 내려앉았으며 드디어 애인을 저주, 살해하는 일과가 시작되었고 날이 갈수록 저주의 농도는 짙어져서 급기야는 교살(絞殺)에서 척살(刺殺), 척살에서 토막사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김일병의 비련을 알 리가 없는 전입병들이 멋모르고 덩달아 박수를 쳤다간 그 불쌍한 전입병은 즉시로 김일병 앞으로 불려나가 정신없이 얻어터져야 하였다.
-요 새까만 쫄따구 새끼가 싸가지도 없이 박수를 쳐? 니가 이 새끼야, 우리 애인과 무슨 원한이 있기라도 해?
나의 경우는 박수를 치지 않고 덤덤하게 관람했다는 죄목으로 김일병 앞에 불려 나갔다.
-요 새낀 사회에서 선상님을 했대니까 내가 하는 짓이 우-씁다 이거지? 비웃긴 왜 비웃어 새끼야!
-아닙니다.
-그럼 뭐야, 이 캐같은 놈의 새끼야!
번개같은 동작으로 명치를 강타당했다. 복부의 격렬한 통증은 차라리 섬뜩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해소할 길이 없던 김일병의 저주와 울분, 절망이 결집된 주먹질이었다. 한이 맺힌 주먹질이었다.
-시정하겠습니다.
-뭘 시정해? 이 좆겉은 새끼야!
또 다시 복부를 강타당했다. 그들이 설정해놓은 애인 살해극의 공감대에 동참하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은 여유를 보인 대가로 나는 김일병의 광란에 가까운 주먹질의 표적이 되어야 하였다.
한밤중에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김일병이었다. 불침번을 서고 있던 김일병의 그림자가 내무반의 희미한 조명에 투영되어 음울한 분위기를 벽면에 비치고 있었다.
-이것 마셔.
차고 있던 탄띠에서 수통을 풀어서 나에게 디밀었다. 뚜껑을 여니 소주 내음이 확 풍겼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만에 맡아보는 냄새였던가. 오아시스를 발견한 조난객마냥 나는 수통을 입에 물고 꿀꺽꿀꺽 갈증을 씻어내렸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소주가 든 수통은 김일병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어쭈, 요 새끼 봐라? 나는 아직 입도 못 댔는데 다 마실 참이네?
장교 식당에서 소주 2병을 몰래 사다가 수통에 채워 두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반이나 마셨다며 화를 내었다.
관물대 안에 숨겨 두었던 콩나물이 담긴 라면 봉지를 꺼내어 안주 삼아 김일병과 나는 수통에 든 나머지 소주를 비웠다. 모처럼 얼큰한 취기를 즐길 수 있었다.
-나도 졸업하고 입대했응께 같은 신세야. 나이가 들어 군대생활 하자니 애로가 많제? 낮엔 미안했다.
김일병은 사범대에서 만난 애인 이야기를 하였다. 입대할 적엔 그토록이나 서럽게 울어준 여자였다고 했다.
광주 시내의 여중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데 김일병이 근무하는 부대에까지 면회도 두어 번 다녀갔다고 했다.
-진짜로 죽일 작정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면회를 온다면 그땐 어떡하실 겁니까?
-남자가 군대에 갇혀있는 동안 배신하는 계집년들은 모조리 죽여야만 돼. 휴가병을 바람맞히고 선보러 다닌 년이 미쳤다고 면회를 오겠어.
애인의 배신에 반응하는 양상은 여러 가지였다. 상대방의 행복을 비는 순정형이 있는가 하면 의기소침한 비관형에다 일체 말을 않는 침묵형, 애써 초연한 척하는 달관형 등 각양각색이었다. 김일병의 경우는 악담저주형의 대표적 경우였다.
그러나 차라리 김일병과 같은 악담저주형이 탈영 기도형이나 사고뭉치형으로 발전하는 일이 드물었다.
오히려 침묵형이나 달관형의 사병들이 사고를 치거나 탈영을 자주 하였다.
어느 날 문서수발 업무로 상급부대에 공문을 접수시키고 돌아오던 나는 위병소에서 김상병(세월이 흘러 진급했다)을 찾아 온 눈부신 여자를 목격하였다.
김상병에게 광주에서 아가씨가 면회왔다고 전해달라는 위병의 말을 듣는 순간 김상병보다 내가 먼저 감격할 지경이었다. 청사에 도착하여 즉시 인사과 김상병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김상병님, 왔어요.
-오다니, 뭐가 임마?
-위병소로 내려가 보세요. 광주서 왔다니까요?
-광주서 누가?
-누군 누구겠어요.
-새끼, 너 고참한테 장난치는거냐?
-꾸물대면 꾸물댄 만큼 후회할걸요. 소문대로 정말 미인이던데요?
김상병의 커다란 입이 단박에 벌어지더니 닫혀지지를 않았다. 행정실까지 쫓아와서 내 멱살을 잡고서 벌어진 입으로 정신없이 다그쳤다.
-정말로 네 눈으로 보았지? 거짓말 아니지? 응?
김상병은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앉았다 섰다만 되풀이할 뿐 위병소로 달려갈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간절한 사랑이 재생되는 순간은 일종의 충격이다. 그 충격파는 의식의 진공상태를 유발할 것이고 그래서 김상병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얼굴에 여드름 자국만큼이나 수줍음도 많았던 김상병님. 지금 그 아가씨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겠지요...
기억을 더듬고 보니 내 20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 만나거나 스쳐간 호남인들은 주로 정감이 풍부하고 심성이 고운 사람들뿐이었다. 내가 일부러 그런 사람들만 골라서 기억한걸까? 고백하건대 나는 일부러 편향되게 기억을 더듬지는 않았다.
E-mail : afbug@hanmail.net
homepage : http://afbug.com
저자 컬럼방 가기 본 기사의 관련 컬럼
내 기억에 남아있는 전라도 사람들(1)
사족 달기
잔잔한 감동을 느껴서 퍼왔다.
우리 전라도 출신들의 젊은 시절 경험과 이 경상도 선생님의 그것에
무슨 차이가 있냐? 이 땅의 서민들은 영호남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착하다.
한나라당 기득권층의 지역감정 선동과 사주에 물든 일부 영남 사람들은
자신이 사악한 정치권력의 악선전에 이용당하는 피해자임을 스스로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도 마음문을 열고 이들을 사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