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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의 법이 머무는 속리산 법주사::
도주께서 갑오년(1954년) 3월에 청주 화양동 만동묘에 가셔서 황극신도수(皇極神度數)와 대신문도수(大神門度數)를 보신 후, 보은(報恩) 속리산(俗離山)의 법주사(法住寺)에 들러 도수를 보려 하시다가 차후로 미루었는데, 이후 병신년(1956년) 3월 하순에 임원(任員)들을 거느리시고 법주사에 행행(行幸)하셨다. 이날 아침 대통령이 법주사에 온다고 수일 전부터 주민들이 총동원되어 도로와 교량을 보수하고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였으나, 도주께서 당도하시자 소나기가 쏟아져서 대통령의 행차가 연기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자 임원들은 이것은 마치 도주께서 오시는 것을 대비한 것 같다면서 신기하게 여겼다.
이날 도주께서 법주사에서 일박하시며 대웅전(大雄殿) 큰 방에서 새벽 인시(寅時, 3~5시)경에 공부(工夫)를 마치시고 임원들에게 미륵불(彌勒佛) 앞에 불공(佛供)을 드리게 하셨다.
법주사에 대해서 「동국여지승람」에는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신라의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서역에서 돌아올 때, 흰 나귀에 경전을 싣고 와서 이곳에 처음으로 절을 이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금산사(金山寺)를 중건한 진표(眞表)가 제자 영심(永深) 등을 시켜 속리산의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에 길상사(吉祥寺)를 짓고 교법을 펴게 했는데, 이에 776년(혜공왕 12년) 영심 등이 이 사찰에 이르러 중창하여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됨으로써 큰 절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영심의 중창 이래, 이 절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 되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1624년(인조 2년)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중창했다. 그 뒤 수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주께서는 앞으로 다가올 미륵세상의 도법(道法)을 짜시는 분인 도주께서 이곳 석가모니불이 봉안된 대웅전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이것은 이제 석가불의 법이 끝났으니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미륵불의 법을 짜신 한 공사로 봐야 할 것이다. 법주사(法住寺)는 법(法)이 머무는 사찰이란 의미로서, 이것은 석가불법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륵불의 법이 머문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륵불이 오셔서 새 세상인 극락을 열려면 반드시 미륵삼존불이 오셔야 하고, 그중 미륵불의 법을 마련하는 도주께서 반드시 오셔야 한다는 것이 이 법주사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도주께서 이곳에서 공부를 마치셨다는 것은 미륵불의 법을 짜기 위해 인세에 오셔서 그 법을 다 마련하셨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 공사가 바로 앞서 다녀오신 만동묘의 황극신도수(皇極神度數)와 대신문도수(大神門度數) 등일 것이다. 한편 도주께서 임원들에게 미륵불상 앞에 불공을 드리라고 하신 것은, 미륵삼존불 중 마지막으로 인세에 오셔서 극락(極樂)을 열어주실 미륵불께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보인다.
신라 말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법주사를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道不遠人 人遠道
도불원인 인원도
山非離俗 俗離山
산비리속 속리산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 속세가 산을 떠나네.
이 시의 두 구절은 대구(對句)를 이루는데, 그 중심어가 도(道)와 산(山)이다. 산(山)은 미륵삼존불이 한자리에 모셔진 모습이다.
따라서 이것을 의역(意譯)하면 다음과 같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하느님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 속세가 하느님을 떠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