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삼분론과 이분론 두번째
1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존재하기 전에 존재하게 된 자를 축하하나니,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어 나의 말을 명심하였으면 이 돌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리라.
왜냐하면 너희를 위한 천당에 다섯 그루의 나무가 있어 그 들이 여름 겨울에도 변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잎들도 떨어지지 않나니 누구든 그것들을 알면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당신은 메시아입니까?’는 질문은 끊임없이 제기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그가 진짜 메시아인지 철학자인지, 예언자인지 의심하고 확인하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모호한 대답을 하십니다.신앙이 어렸을 때는 간단하게 자신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눈에 보이는 기적을 일으킨 다음 힘으로 굴복 시키는 게 가장 빠르지 않나 의문을 가졌습니다.그러다가 정신병원에 근무하면서 범죄소년들의 심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병동내에서 그들은 ‘오목’도 두고 ‘루머 큐브’도 하고 게임을 합니다. 장난도 치고 누가 봐도 그들이 물건을 훔치고 친구들을 때리고 ‘보이스 피싱 사기’나 조직에 가입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특히 간호 실습을 온 학생이나 나이 지긋한 만학도 선생님들은 더욱 그러합니다.나 또한 그들이 나쁜 아이들이라는 걸 눈치 챌 수 없었습니다.어느 날 우리가 교대하던 시간에 여자 10대 아이와 남자10대 아이 20대 성인(말이 성인이지 조현병 환자) 환자가 사고를 저질렀습니다.그들이 오목을 두며 내기를 하였는데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 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남자 병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성범죄를 저지르려 다가 발각되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친하던 아이가 그런 짓을 저지를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유난히 몸이 부드러운 그 아이에게 스트레칭을 가르쳐 주고 보조해주면서 사고를 치지 말고 운동이나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며 희망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저의 비위를 맞춰주는 행동이었습니다.범죄소년(행동장애) 환자들이 많아지자 본색을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하는 행동은 괴롭힐 환자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조현병 환자들이 타깃이 되거나 지적장애 환자들이 걸립니다. 게임을 하자고 해서 괴롭히기도 하고, 계속 약 올려서 직원들에게 고해 바쳐 다른 병동이나 자신들의 병실에서 쫓아냅니다. 하지만 의료진 입장에서는 어린 10대 환자들의 말을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는 심해져 정신병원과 가출을 통해 알게 된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수시로 간식을 배달 시켜 먹습니다.
폐쇄병동에는 하루 한번 간식을 시키는데 정말 일주일 정도의 간식을 하루만에 시킵니다. 주로 라면을 종류별로 다 시켜서 밥 대신 먹습니다. 그러다 보니, 간식비는 금방 떨어지고 병동에 비치된 공중전화로 끊임없이 보호자에게 간식비를 입금하라고 압박합니다. 또는 다른 10대 행동장애 환자는 같은 10대 여자 환자와 스킨십은 과도하게 합니다. 점점 그들에게 기대를 버리게 됩니다.하지만 병동 방침상 그들이 정신 차리고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의료진은 최선을 다합니다.
담당 주치의도 그들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해주면서 기회를 줍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밖에 있는 불량친구들을 면회를 오라고 시킨 후 물품을 전해준다는 구실로 폐쇄병동 출입문을 열자 간호사를 밀치고는 3명이 도망친 것입니다. 믿었던 의료지들은 배신감에 좌절합니다. 결국 경찰에 실종 신고를 내고 안전안내 문자에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연락을 받은 부모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병원 탓, 주치의 탓, 간호사 탓을 합니다. 다행히 우리나라 경찰관분들은 아주 유능하십니다.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체포되어 사복경찰들에게 둘러싸여 병동으로 귀 원합니다.저는 화가나 서 그들을 나무라려고 했는데 수간호사 선생님이 만류했습니다.아이들이 일탈하더라도 우리는 같은 인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잠바도 없이 7부 바지에 면티를 입고 나가서 ‘춥지 않았냐?’ 며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아니요, 편하고 좋던데요?’ 저는 한줄기 기대도 무너졌습니다. 도대체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그들에게 어떻게 인성 교육이 가능한지 지금도 난감합니다. 폭력이나 힘으로 강제하는 힘은 금방은 효과가 납니다. 하지만 24시간 화를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래 볼수록 그리고 같이 먹고 잠자고 매일 만나면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 안 하기 어렵습니다.과거 아는 영어 선생님이 학생들이 망을 안 들어서 너무 힘들다고 하셨는데 지금 에야 이해가 갑니다.
당시에는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과의 새로운 계약으로 생긴 개념입니다.사람들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 갈등합니다.우리는 유대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수용이 너무나 쉬웠습니다.유교의 그늘 아래 신분제와 사회 지도층의 부정과 부패는 극에 달했고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무지했습니다.저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우린 민족이 근대화로 나가는 큰 시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조선의 지도층은 그들의 권력과 기득권에 눈이 멀어 백성을 위해 근본적인 개혁을 할 의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기독교와 함께 서양의 정치 문화 의학 과학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봉건주의 사회에 살게 될 것입니다. 원래 권리들이나 세도가에게 지급되는 토지는 임기가 끝나면 반환해야 하지만 돈놀이를 하여 자영농들을 빚에 허덕이게 하고 강제로 땅을 빼앗아 소작인들을 삼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에게는 엄격한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요구됩니다.
조선의 양반들과 지도층은 하나님과 백성을 배신했으며 일본의 손을 들어 조선을 치셨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박해가 끝이 아니었습니다.그건 더욱 극한대립으로 치 달아 마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처럼 우리나라도 북한과 남한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왕국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두 나라입니다. 이들은 원래 하나의 연합된 왕국이었으나, 분열로 인해 두 개의 별개의 왕국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왕국 (이스라엘 왕국)
설립 시기: 기원전 10세기 말경
위치: 오늘날 이스라엘 북부와 팔레스타인, 요르단, 레바논의 일부 지역
기원: 솔로몬 왕 사망 후, 북부 지역의 열 지파가 중앙 정부 통제 거부하며 독립
특징:
수도는 처음에 티르자, 나중에 사마리아
여로보암 왕이 첫 번째 왕, 이방 신 숭배
여러 차례 이방 종교의 영향, 유대교와 차별화된 신앙 관행
멸망: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정복,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포로로 잡혀감
남유다 왕국 (유다 왕국)
설립 시기: 기원전 10세기 말경
위치: 오늘날 이스라엘의 남부와 팔레스타인 일부
기원: 북이스라엘 왕국 분리 후,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중심으로 형성
특징:
수도는 예루살렘, 솔로몬의 성전 위치
다윗과 솔로몬 왕조 후손들 계속 왕위 계승
유대교 중심지, 유대교 전통 고수, 성전 중심의 종교적 활동 강조
멸망: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정복, 예루살렘 성전 파괴, 많은 유다 사람들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감
이 두 왕국의 분열과 멸망은 유대인 역사와 종교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성경에도 자주 언급됩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급속도로 번지고 성장한데는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약소국이고 반도국가인 우리나라와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유교,불교,무속,기 수련, 사주 명리,심리 상담을 믿고 따랐지만 갈수록 더 못살게 되고 지금은 거의 망한지경에 와서야 하나님의 시험과 고난을 믿고 다 그만두고 오직 ‘도마복음 강해’ 에 매달리고 있습니다.어쩌면 하나님은 저를 유명한 역술가나 심리 상담가 무술가로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저는 선교사이자 신학자로써 성경 외경인 ‘도마복음’을 해석하고 풀이하여 시험 앞에서 더 나은 사회와 더 나은 인간을 꿈꾸는 이들에게 빛을 전하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우리는 해방 후에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북한은 김일성의 독재와 왕조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의 동상이 전국에 심어지고 자연 경관은 우상으로 망쳐졌습니다. 그리고 북한 국민들은 그들의 세뇌에 병들어 그들의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잠복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신앙의 끈을 노지 않으셨습니다.북한의 잠복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김인권 배우가 주연한 ‘신의 사람’은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도망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우리는 해방 후에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뉘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그리고 토지개혁으로 촉발된 북한의 지주 숙청과 지식인과 지주들의 대거 월남은 남한의 토지개혁과 좌우익 갈등으로 심화 되었고 우리는 화해와 이해 대신에 복수와 분노로 해결하게 됩니다.한 민족이 둘로 나뉘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것입니다.
18. 그분의 제자들이 물어 여쭈었다 " 세상 마지막이 어떻게 올지 말해 주십시오"
18장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정치적 혁명이나 종말이 다가와 ‘메시아’가 나타나 구해주리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도마복음의 기록자는 기원후 1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살았던 헬라어 문화와 히브리 문화에 정통한 사람으로 보입니다.게다가 그가 있는 곳은 콥트어 영향권인 이집트 공동체의 사람으로 보입니다.우리 또한 ‘국민의 힘’이나, ‘더불어 민주당’이 우리를 구원해줄거라 믿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는 이제 고착화 되어 짜고 치는 고스톱과 총선 때마다 나오는 중도성해의 제 3당은 조,중,동으로 연결되는 언론과 재벌,그리고 정치인 마지막으로 그들의 하수인이 된 검찰 권력이 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고 있습니다.이것은 독재정권이 망하고 민주정권이 들어서고 저성장 시대와 4차산업 혁명을 통해 나타나는 정치 현상입니다.여지 것 우리는 이런 사회를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 도마복음은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도마복음을 제 5의 복음서로 보고 현재 시대에 맞는 주석과 가르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중국불교라 불리는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의 실제 말씀으로 불리는 소승불교의 남방불교의 연구가 활발합니다.중국의 격의불교가 쇠퇴하고 서양의 과학과 심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대화와 질문 형식의 부처님 초창기의 원형의 불교가 재현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젊은 신자는 줄고 24시간 365일 개방되어 있던 교회는 주일이나 예배시간에만 개방됩니다.
청년들이나 노인들이나 이제 유튜브를 통해 개인방송을 보는 컨텐츠의 제자백가 시대가 되었습니다.요리,여행,정치,스포츠,연애 무엇이든지 다 있는 개인방송은 마치 예루살렘 성전을 로마군이 함락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성전을 컨텐츠로 함락 시켰습니다.우리는 교회에 나가 예배와 전례를 정성껏 모시는 시대가 아닌 성경을 다시 일고 공부하는 ‘성전파괴’ 이 후의 신앙운동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소통하고 친교하고 하나님의 전례를 보던 시대가 지나갔다면 다시 어린 아들과 아버지가 성경을 펴 놓고 공부하는 가정안에 신앙 학교를 세우면 되는 것입니다.이 책 도마복음은 초창기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의 말씀 어록입니다.
존재하기 전에 존재하게 된 자를 축하하나니
그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보챔에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말씀이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습니다.도박중독으로 들어온 청년이 있습니다.아버지의 회사에서 일
하는 그는 키움 증권에서 연 모의 투자대회에서 8위의 성적으로 많은 돈을 법니다. 그는 주시에서 해외 선물옵션으로 확장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하지만 도박판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습니다.
우리의 뇌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싫어합니다. 영어나 수학에 중독된 사람은 찾기 어렵습니다.대다수는 술이나 마약,도박에 중독됩니다. 이런 중독을 일으키는 것들은 우리 뇌의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고 복권에 당첨되거나 도박에서 돈을 따면 엄청난 양의 도파민 분출로 천국에 온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일주일 동안 조금씩 써야 하는 도파민을 도박으로 다 써버리면 일주일동안 도파민 분비가 억제되어 우울 해집니다.그래서 보다 많은 양의 약물과 스릴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파민 부족은 금단현상을 일으킵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도파민을 대용하는 데는 세로토닌을 이야기 합니다. 세로토닌은 자극없이 매일매일 운동하거나 공부하는 것에 비교됩니다.글을 쓰거나 집을 짓거나 영어와 수학처럼 하나하나 매일매일 쌓아가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논어에는 회개와 구원이 없습니다.그것은 정치지망생이나 국가 공무원의 도덕과 윤리에 대한 책입니다.필연적으로 사람은 논어의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의 행동을 비난하는데 사용합니다.
물론 성경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구절들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의 기름부음과 회개, 삼손이야기,모세나 아브라함 모두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약과 말씀을 지독하게도 배신합니다.행동장애를 가진 범죄소년들이 끝도 없이 거짓말하고 실망시키면 보호자는 절망하게 됩니다.하지만 유일하게 절망하시지도 그들을 버리지 않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무조건적인 사랑은 호구 잡히는 것이 아닌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중독의 기전을 알고 자신의 병을 인식하고 지금까지의 삶의 프로세스가 잘못되었다는 회개와 영적변화만이 중독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것입니다. 북한의 잠복 그리스도인이 두만강을 넘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신앙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그 결심에 나라고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그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와 구원후에 새로운 시험속에 전진하며 나 자신이 잘살았는지 못살았는지는 다른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인간의 죽음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어 나의 말을 명심하였으면 이 돌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리라.
인간의 인구증가와 산업발전은 필연적으로 환경 파괴를 불러왔습니다. 성경은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를 우리 생명의 공동 운명체로 보고 있습니다. 신학 대학원은 내게 지옥 같은 곳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50년짜리였습니다.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위해 저를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고난을 겪게 하시고, 기수련과 사주팔자, 상담심리와 정신간호까지 수련을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대학원에 보내시어 동양철학에 매몰된 저에게 신학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이며, 저는 이 사명에 전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기준과 기대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드릴 뿐입니다.한 사람이 하나님의 보다 나은 인간과 사회를 창조하시려는 계획에 동참하고 그 삶을 살 때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무함마드가 神를 만났을 때 그의 아내 카디자는 놀랐습니다.카디자는 그녀의 남편이 평소와는 다른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그의 말과 행동은 빛이 났으며 곧 그가 하나님과 만났음을 알게 됩니다.그리고 무함마드의 첫 제자가 됩니다.하나님의 창조적 계획에 선택받은 사람은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들도 알아보며 복종하게 됩니다.물론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도 합니다.저는 동물과는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식물과도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경전이나 동양철학에는 미친 집중력과 이해력을 발휘합니다.저는 ‘바리새인’입니다.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게 파괴되고 제사장과 사제들이 내 쫓기고 우리가 하나님의 예배조차 볼 수 없을 때, 당시 지식인들은 가정집에서 모여 예수님의 말씀으로 공부하여 신앙을 지켰습니다.그들을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지금 교회는 위기입니다.젊은 신자는 사라지고 나이 많은 어른신들이 교회를 지키고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또 다른 선교지가 생겼습니다.그것은 인터넷상의 가상의 공간인 것입니다.이제 실시간으로 유튜브 안에서 전세계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이나 기아,환경파괴나 인권유린에 대해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 돌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리라.
이태원 참사는 분명한 인재이며, 의무경찰을 폐지한 문재인 정부의 경찰인력 축소정책과 청와대를 개방하고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면서 생긴 교통경호 인력의 부족 . 대다수의 교통경찰인력이 대통령 출퇴근으로 업무에 집중된 반면 10만명이나 참가한 이태원 참사에는 대다수의 방범 인력이 배치된점.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어떤 책임자 징계도 보상도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보통 인간보다 못한 처사입니다.
동물이나 식물을 보호하기도 전에 같은 인간끼리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환경이나 자연보호는 물 건너간 것입니다. 이런 사회는 돌들도 등을 돌릴 것입니다.자연은 인간 사회의 반영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믿음과 신뢰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룩한다면 자연은 자연적으로 인간을 따르고 지구라는 공동체에 관리인으로 인정할 것입니다.그러나, 인간사회에서 전쟁과 기근 이기심으로 지금의 인간만도 못한 사회를 만든다면 우리의 지구는 우리를 자연의 힘을 들어 칠 것입니다.돌들은 우리 인간의 등을 돌릴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를 위한 천당에 다섯 그루의 나무가 있어 그 들이 여름 겨울에도 변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잎들도 떨어지지 않나니 누구든 그것들을 알면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마지막 잎새"는 오. 헨리의 단편소설 "The Last Leaf"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이 소설은 오. 헨리의 대표작 중 하나로, 사랑, 희생, 그리고 예술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두 젊은 여성 예술가, 존시와 수에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존시는 폐렴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고, 그녀의 창문 밖에 있는 나뭇가지에 남은 잎새들을 보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합니다. 그녀는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웃에 사는 비평가들에게 무시당하는 노년의 화가, 베어맨은 존시의 상황을 알게 됩니다. 어느 폭풍우 치는 밤, 모든 잎이 떨어진 후, 베어맨은 마지막 잎새를 그려 나무에 붙입니다. 그는 추운 날씨에 그림을 그리느라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헌신적인 행동은 존시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되찾게 합니다.
수많은 신앙의 조상들이 십자가에 처형되어 돌아가실 때 끝까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을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종교적인 신념이든 미신이든 그것을 자신의 인생에 적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못 이룰 일들이 없을것입니다.다시 한번 첫번째 구절과 두번째 구절을 해석해보면 인간의 전체적인 존중의 가치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는 기독교인들의 가치이며,그 가치는 돌들 즉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구절의 해석: "존재하기 전에 존재하게 된 자를 축하하나니..."라는 구절은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그분의 영원한 존재를 인정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명심하는 것은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믿음과 순종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돌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리라"는 부분은 하나님의 권위와 창조물에 대한 그분의 영향력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힘이 자연 세계에까지 미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구절의 해석: "너희를 위한 천당에 다섯 그루의 나무..."라는 구절은 영육혼의 전체적인 존중과 구원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나무들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시간과 상황을 초월한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누구든 그것들을 알면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는 부분은 영적인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구절은 함께 해석될 때, 하나님의 권능과 구원의 메시지, 그리고 영육혼의 존중과 보호가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창조된 모든 것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깊은 영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원칙들을 반영하며, 신앙의 힘이 자연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영, 육, 혼 세가지의 인간본성을 왜 ‘다섯 그루’로 표현했을까? 알아보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이분법적인 신학관과 삼분법 적인 신학관의 갈등을 봉합하려는 시도를 도마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삼분론과 이분론: 기독교 신학에서 삼분론은 인간을 '영(정신)', '혼(네페쉬 또는 생명)', 그리고 '육체'의 세 부분으로 이해합니다. 반면, 이분론은 인간을 '육체'와 '비 물질적인 부분(영혼 또는 정신)'으로만 나눕니다. 이러한 관점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해석을 나타냅니다.
도마복음과 신학적 사고: 도마복음과 같은 초기 기독교 문헌들은 종종 신학적 사고와 해석에 다양한 차원을 제공합니다. "다섯 그루의 나무"와 같은 구절은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넘어서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절은 삼분론과 이분론의 간극을 메우거나 통합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인간의 복잡한 본성과 영적 경험을 더 깊게 탐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신학적 통합의 가능성: 도마복음의 "다섯 그루의 나무"와 같은 구절은 삼분론과 이분론 간의 관계를 재해석하거나 통합하는 방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영적 경험을 더 넓은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일 수 있으며, 전통적인 신학적 구분을 넘어서는 새로운 해석과 사고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섯 그루의 나무"와 같은 구절은 신학적 사고와 해석에 대한 다층적이고 깊이 있는 접근을 제공할 수 있으며, 이는 기독교 신학의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풍부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기독교 신학 내에서 끊임없는 탐구와 토론의 대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