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이 ㉠ 고도(故都)에 있을 때 실로 ㉡ 동남 지역 의 재부(財富)에 의존하였는데, 오중(吳中) 지역이 또 동남의 근간이다. ㉢ ‘소주(蘇州)ㆍ상주(常州)가 풍년이 들면 천하가 풍족하다.’고 하였다. …… 천자가 ㉣ 임안(臨安)에 머무르고부터 행정ㆍ재정ㆍ군정 및 사방의 조세 운송, 역참, 군대 이동, 상인의 물류 이동 이 이 길[분우갑]을 통한다. 천하의 열 가운데 일곱을 차지하니, 그 관계된 바가 어찌 더욱 중요하지 않겠 는가.
<보 기>
ㄱ. ㉠ - 와자(瓦子) 또는 와사(瓦舍)로 불리는 오락 시설이 밀 집된 구역이 여러 군데 있었다. ㄴ. ㉡ - 일조편법을 통해 국가 재정에 충당되었다. ㄷ. ㉢ - 우전(圩田) 혹은 위전(圍田)이라 불리는 농지의 개간이 뒷받침이 되었다. ㄹ. ㉣ -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의 배경이 되는 도시이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답 2
<문제분석>
<지문근거>
- ㄱ. 지문 근거
문화 면에서도 새로운 서민문화의 기운이 일어났다. 특히 송대가 되어 도시에서의 규제와 야간통행금지 가 해제되었기 때문에 도시를 중심으로 한 서민문화 가 성장했고, 북송의 수도 변경과 남송의 임안 등은 그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 내의 각처에는 종합 연예시설인 와자(瓦子) 혹은 와사(瓦舍)가 생겨났 고, 구란(句欄)이라는 연예 공연장이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수천 명을 수용하는 것도 있었는데, 구란 에서는 가창에 대사를 섞은 잡극(雜劇)과 각종 설화 와 잡기가 연출되었다. 이것들은 후대까지 이어져 한 층 세련된 고전연극으로 발전한다. 이런 도시생활의 일면을 잘 보여 주는 것이 ‘동경몽화록’과 장택단이 그린 ‘청명상하도’란 그림이다. 또, 향촌에서도 지방 의 소시장과 정기시가 발달하면서 배우에 의한 연극 이 상연되었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221p-222p
- ㄴ. 지문 근거 (오답)
외국인이 들어오면서 국내교역에서도 은이 광범위 하게 사용되고 조정에서도 은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 다. 조세를 은납화 하면서 지주에게도 공평하게 세금 을 부담시키려는 의도에서 여러 항목의 조세와 요역 을 통합해, 토지와 성인 남자 수에 따라 할당하는 일 조편법이라는 세역상의 개혁을 명조에서 실시한 것 도 은의 유통이 확대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일조 편법은 획일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하고 16세기 중반 부터 지방에 따라 제한적으로 실시되었지만 청조에 들어와 18세기 중엽 지정은제도가 성립되면서 철저 한 조세개혁이 이루어졌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267p-268p
- ㄷ. 지문 근거
당송변혁기 농업의 발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방이 이른바 강남이라 불리는 양자강 델타 지대이다. 이 일대는 고래로 저습지가 많아 거주나 농경에 매우 불 리했다. 그런데 남북조시대 이래 개간 작업이 진척되 기 시작하여 송대에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한다. 강남 지방의 개간 방식은 저습지에 둥그렇게 제방을 쌓고 그 내부의 물을 제거한 다음 경작지화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농토를 우전(玗田) 혹은 위전(圍 田)이라 불렀다, 우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 동력과 경비가 필요했지만, 일단 건설되기만 하면 극 히 양호한 농토가 안정적으로 확보될 수 있었다. 수 리의 걱정도 없을뿐더러 토질 또한 매우 비옥했기 때 문이다. 송대가 되면 강남 일대가 거의 대부분 이런 경작지로 탈바꿈했다. 그리하여 송대 강남지방의 농 업 생산량은 중국 최고의 수준이 되었다. “소주와 항 주는 지상의 천당이다”라든가 “소주와 호주만 풍년 이 들면 천하가 풍족해진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 였다. 수도의 엄청난 인구라든가 서북변경 지방에 밀 집적으로 분포한 군대를 뒷받침하였던 것도 사실상 이러한 강남지방의 높은 농업 생산력이었다. <아틀 란스 중국사> 110p
- ㄹ. 지문 근거 (오답·개봉)
중국 풍속화의 한 화제(畵題). 청명절(淸明節, 춘분 을 지나 15일 후인 4월 5, 6일경 되는 날로 교외에서 노닐고 성묘를 하는 명절)에 흥청거리는 도성의 인파 를 화권형식(畵卷形式)으로 그린 것이다. 북송北宋 의 장택단張擇端(즈앙 치뚜안)이 <청명상하도> (1120년경, 북경 고궁박물원)를 그린 것에서 비롯된 화제이다.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는 수도 변경汴京 (개봉)을 흐르는 변하汴河를 사이에 두고 교외 시내 (川) 배 다리 성문 시가 등이 순서대로 보이고, 술집 상점 노점 상인 우마차 및 군중 등이 배치되는 형식 으로 이루어졌다. 원근법을 이용하여 사진처럼 정확 하고 사실적인 풍경을 재현해냈다. 중국 풍속화의 대 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그림은 송대(宋代)의 인물풍정과 사회적 번영을 사실주의적 화풍으로 그 려내고 있다. 당시 및 후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원 元 명明 청淸을 거쳐 수많은 모본(摹本)이 성행하였 다. 특히 명, 청대에 제작된 것이 많은데, 이 작품들은 소주蘇州 부근의 불특정한 풍경으로 변화되어, 점포 를 늘어놓는 방식 잡기(雜伎) 황성내의 용주탈표(龍 舟奪標) 등 세부적인 도안의 모양이 정해져 있다. 명 의 조절趙浙이 그린 작품(岡山美術館), 구영仇英 (처우 잉)의 작품(東京 大倉集古館), 청의 심원沈元 의 작품(대북 고궁박물원), 화원합작본(대북 고궁박 물원) 등이 있다. <세계미술사전>
<보충자료1> 청명상하도와 개봉 (7차 교과서 교학 사)
송의 수도 카이펑은 당시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였다. 카이펑에서는 대운하를 통해 운송된 쌀 과 각지의 특산물 등이 활발히 거래되고 있었다. 당 나라 때의 장안에서는 정부가 지정한 장소에서만 거 래를 할 수 있었으나, 카이펑에서는 그런 규제가 전 혀 없었기 때문에 상업 활동이 좀더 자유롭고 활기차 게 이루어졌다. 다음은 이 곳에서 젊은 날을 보낸 맹 원로라는 인물이 당시 카이펑의 모습을 묘사한 기록 이다. “새벽 4시, 절에서 들려오는 목어 소리와 종소리가 새벽을 알리면 마을의 하루가 시작된다. 성문이 열리 고 시장이 선다. 행상인들은 수레를 끌고 먹을거리나 물을 소리 높여 팔러 돌아다니고, 성 밖에서는 고기 나 과일은 실은 마차가 줄줄이 시장으로 들어온다. 마을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하여 깊은 밤까지 계속되 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여기저기서 선술집의 등불이 켜진다. 그 많은 선술집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손님에게 돈을 요구하는 악사들의 풍경이 매우 낯익 게 느껴진다. 도시 안에는 와자(瓦子)라고 하는 여러 개의 번화가가 있는데, 와자마다 ‘구란’이라 불리는 수많은 극장이 모여 있으며, 심지어는 한 번에 수천 명씩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도 있다. 극장에서는 유 행가, 꼭두각시 인형극, 곡예, 씨름, 만담, 수수께끼 맞추기 등 여러 가지 볼거리를 상연되었고, 극장 부 근에는 술집, 음식점, 이발소 등 다양한 가게들이 있 어서 이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해가 지는 것도 잊 고 놀았다.”
<보충자료 2> 동경몽화록
눈을 들면 보이는 것은 온통 그림 같은 妓樓에 아름 답게 수놓은 문과 주렴들 뿐.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 들 천자가 다스리는 변경의 거리를 경주하듯 달리고, 천리마는 임금님이 다니시는 거리를 다투어 달린다 네. 금과 비취의 화려한 빛깔 눈을 어지럽히고, 화려 한 비단은 향기로운 냄새를 흩날린다. 홍등가는 최신 유행가와 교태 로운 웃음으로 시끌시 끌하고, 찻집과 술집에는 악기들의 연주소리가 가득. 주위의 미개한 나라들은 다투어 조공을 바치고, 모든 나라는 서로 통하고 있다네. 온 세상의 진기한 것들 모두 (동경의) 시장으로 모여 교역이 되고, 천하의 진미 또한 모두 (동경의) 주방에 있다네. 꽃소식 온 거리에 가득하니 봄놀이하는데 무 슨 거리낌이 있으랴? 음악 소리 하늘을 채우니 분명 몇몇 집에서 밤잔치를 벌이는구나. 정밀하고 기교가 뛰어난 공예품 사람들 을 놀라게 하고, 사치함은 사람들의 정신을 번쩍 들 게 할 정도라네. <동경몽화록 서>
… 준의교의 서쪽에 이르면 바로 개봉부이다. 황제의 길은 쭉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주교(州橋)를 지나면 길 양쪽에 모두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황제의 길 동쪽에는 차씨네 석탄집, 장씨네 술집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 왕루산 동매화 만두, 이씨네 향수집, 조 할머니네 고기 부침집, 이사네 분차집이 있었다. 주 작문길 서쪽에 이르러 다리를 건너면 바로 서쪽으로 향하는 큰 길이 나오는데 이를 술집거리라고 불렀다. 그 거리의 남쪽에는 ‘신선을 만나는 가게’가 있었는 데, 앞에는 층집이 있고, 뒤쪽으로는 누대(臺)가 있 어 그 도시 사람들이 이를 “대상”이라고 불렀다. 이 집은 최고급 술집으로 은병주의 경우 일각에 72문 (文)이었고, 양고주(羊羔酒)는 일각에 81문이었다. 거리의 북쪽으로는 설씨네 분차, 양반(羊飯), 익힌 양고기집가 있었다. 서쪽으로는 모두 기생집이었는 데 그 도시 사람들이 이를 “기생집 골목”이라고 불렀 다. 어랑의 서쪽은 녹씨네 만두집으로 나머지는 모두 국집, 차, 술, 음식들을 다 파는 큰 식당, 술집, 향과 약을 파는 가게), 일반 백성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
<동경몽화록 2권>
마행가에서 북쪽으로 가면 구봉구문(舊封丘門) 밖 천묘사가(祆廟斜街)와 개봉의 북쪽 와자(瓦子)에 다다랐다. 신봉구문대가(新封丘門大街) 양쪽에는 백성들의 가게들이 있었고, 그 외에 황제 친위부대들 의 군영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신봉구문 대가 까지 가는데) 약 십 여리에 걸쳐 있었다. 그 밖의 마 을과 거주지는 가로와 세로로 만 단위로 수를 세어야 할 정도로 많아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곳곳마다 대문 이 몰려 있고, 각각의 다방과 주점, 기예를 하는 사람 들의 공연장과 음식점들이 있었다. 시내에서 장사하 는 집들은 왕왕 거리의 점포에서 음식을 사 먹고, 집 에서는 음식을 해먹지 않았다. 북방 음식점으로 반루 (礬樓) 앞 이사가(李四家), 단가(段家)의 오물(爊 物), 석봉(石逢)과 파자(巴子)가 유명하였고, 남방 음식으로는 사교금가(寺橋金家), 구곡자주가(九曲 子周家)가 가장 유명하였다. 야시장은 새벽 1시(三 更)가 되어서야 끝났다가 새벽 5시(五更)도 안 되어 다시 개장을 하였다. 번화한 곳에서는 밤새 영업을 하기도 하였다. 보통 사방의 제일 외지고 조용한 곳 에서도 야시장이 섰는데,…
<동경몽화록3권> 변경의 인구는 무척 많아 10여만 명이 더 늘었다 해 도 크게 많아졌다는 표시가 안 나고, 10여만 명이 줄 어들었다 하더라도 줄어들었다는 느낌이 안들었다. 소위 꽃이 지천으로 널려있고, 술로 연못을 이룬다거 나 향(香)으로 산을 이루고, 약으로 바다를 이룬다는 말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변경에는 또 골목과 연회용 식당 및 가루(歌樓) 등이 만을 위로 하는 숫자가 있어 세세하게 다 기록하지는 않는다. < 동경몽화록3권>
☞ 동경몽화록 은 1103에 선친을 따라 東京(=변경, 현재의 하남성 개봉시)에 왔던 저자 맹원로가 금나라 의 침입으로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살면서 이전 동경 의 번화함을 추억하며 당시 상황을 기록한 작품이다. 모두 10卷으로 이루어졌는데, 북송의 도시 생활, 풍 속, 그리고 사람들의 사는 이야, 도성의 범위와 황궁 의 건축, 관청의 위치에서 성안의 거리, 음식 및 일용 생활에서 세시 및 절기, 가무곡예에서 관혼상례에 대 한 습관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소개한 글은 2002 년에 김민호가 번역한 글로, 중국소설연구회 회보에 실린 글에서 발췌하였다. 김민호가 역주한 이 글들은 2010년 소명출판사에서 동경몽화록 이란 단행본으 로 간행되었다.
<보충자료 3> 우전
우전이라는 것은 강남, 양절(兩浙), 회남(淮南)의 여 러 로(路)에서 볼 수 있다. 수면이 밭보다 높기 때문 에 제방을 쌓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의주(宜州, 현재 안휘성 宜城縣)의 화성(化成)· 혜민(惠民)의 두 우 전의 제방을 연결하면 80리(약 44km), 무호현(蕪湖 縣, 현재의 안휘성 무호현)의 만춘(萬春)·도신(陶 新)·정화(政和)의 세 우전의 제방을 합치면 145리 (약 80km), 당도현(當塗縣, 현재의 안휘성 당도현) 광제(廣濟)의 우전 중 관전은 길이가 93리(약 51km), 사전은 50리(약 28km)에 이른다. 건염 년 간(1131-1162) 초에 지방관에게 수리하도록 하명 했다. 건강(建康, 현재 강소성 남경시)의 영풍우(永 豊圩)에는 1000경의 밭이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한세충(韓世忠)에게 하사되었다가, 나중에 진회(秦 檜)의 것이 되었고, 지금은 행궁(行宮)에 소속되었 다. 회서(淮西)의 화주(和州, 현재의 안휘성 화현)· 무위군(無爲軍, 현재의 안휘성 무위현)에도 우전이 있다. 소흥(紹興) 30년(1160년)에 장기(張祁)가 처 음으로 회남 전운판관(轉運判官)이 되었을 때 백성 들을 장강의 강가로 이주시켜 우전의 제방을 증축하 게 하고 소와 종자를 나누어줘 그곳에서 경작하도록 하였다. 우전의 제방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가 줄 지어 심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그림과 같다. (이심전 (李心傳), 건염이래조야잡기(建炎以來朝野雜記) 갑집(甲集) <우전>)
☞ 이심전은 남송의 학자이다. 우전이라는 것은 저습지에 제방을 쌓 아 제방 내부의 물을 바깥 쪽으로 배출시켜 내부를 경지화한 것을 말한다. 우라는 것은 그 제방 을 가리키며, 경지의 주위 를 제방으로 둘러쌓았기 때문에 <위전(圍田)>이라고도 한다. 사료에 서 알 수 있듯이, 장강 하 류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에서 송대 특히 남 송 시대에 거대한 우전의 건설이 이루어졌다. 관이 주도하는 대규모 공사에 의해 건설된 관우 (官圩) 외에 민간에서 만들 어진 소규모 사우(私圩)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