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선 작|
집의 마술 외 6편
김은순
서귀포항, 수평선으로 지어진 백 년 된 집
밤마다 멍텅구리배로 몸을 바꾼다
그물을 쥐고 수평선을 찾고
물결을 쥐는 멍텅구리배
맑고 고운 뱃고동을 지녔다
뱃고동은 푸르기만 해서 섶섬과 새섬으로 가고
문섬과 범섬까지 우렁차다
고등어 떼 울음소리 들린다
멍텅구리배는 먼바다를 걷는다
어제는 옥돔과 도미
오늘은 물구나무서는 삼치를 가지고 온다
파도가 박명을 휘감을 때까지
배의 둘레가 비린내로 끼얹어졌다
저 해 뜨는 집
굳게 다문 철문 하나 갖고
멍텅구리배였던 기억을 금방 잊는다
마당에 파닥이는 아가미들 숨들,
그때 신발 한 켤레가 나와 눈을 휘둥그레 뜬다
천사백 개의 비늘에 자자해지는 아침이다
서귀포항을 끼고 살아가는 집들이
밤마다 고기 잡으러 마실 나온다는 마법,
여태껏 마술사를 본 적은 없다
흰 절집
누에 숨이 가벼워지나 봐요
몸 안으로 집어넣은 것은 빗소리가 아니에요
뽕잎이 가진 흰빛
누에들은 몸의 그림자 속에 구멍을 뚫기도
혼자 오롯한 나사못이 되기도 해요
헤진 지붕을 가진 절집,
연필 긋는 소리가 새어 나와요
오소소 돋아난 누에들
뽕잎을 갉고 있나 봐요
거미줄에 걸리지도 않은 이슬과 서쪽
잠실에 무지개와 새소리가 질 때까지
누에의 입엔 장마처럼 그늘이 우거지나 봐요
제 그림자 세우려고
온몸에 힘을 주고 있죠
수십 개의 다리가 없어지는 마술,
지구를 한 바퀴 돌리는 힘이 숨어있죠
해와 달이 자리바꿈하는 시간,
누에의 몸이 잠을 여는 중입니다
뒤꿈치가 보이지 않네요
길이 희미해지다 묻힙니다
서늘한 창호 문에 달빛이 높습니다
민머리 여승들일까요
석 달하고 십여 일
겨우 한 걸음을 떼었을 뿐인데요
뿔이 자란다
슬며시 피었다가 얼룩으로 지는 봄밤
나는 참나무 몸통과 함께 서 있다
잡목림 그림자는 허술하고
이 봄밤이 들고 가는 고목도 허술한데
참나무 냄새만이 찬연한 향기로 꺾이고 꺾인다
봄비는 어떻게 언덕을 넘어갈까
아지랑이 숨기고 넘어갈까
개구리알처럼 다글다글 모여있는 빗소리
나는 할 일 없어 이 동림산에 온 것이 아니라
참나무 몸통에 눈동자를 심어주러 온 거다
버섯 종균이라 쓰고
순록의 눈이 온다고 믿는다
아니 뿔이 온다고 믿는다
참나무에 순록이 오면 늦가을이라고 했다
죽은 참나무만 있는 봄
나는 나를 위해 들깨칼국수를 끓인다
구멍 뚫린 자리가 산모롱이일까
산벚꽃같이 생긴 달이 왔다 간다
허드렛물에 몸 씻고 가는 박새같이
뿔이 나올 것 같다
새 울음까지 먹으며 뿔이 자랄 것 같다
나의 예쁜, 백百
오늘은 새였다가 내일은 돌
어제는 모래였던 사람의 잇몸은 기초석 같다
나무가 죽을 때까지 수목한계선을 걷듯
빗장뼈를 남겨놓기 시작한 죽음이 있다
돌이 될 얼굴과
모래가 될 발과 손에 검버섯을 피운다
가맛바람 쐬던 새가 빗장 틈으로 들어온다
어머니는 새와 돌과 모래가 될 그곳으로
등이 휘어진 뒤부터
숨을 밀었다 당겼다 한다
그림자는 수피처럼 갈라진다
홀로 깊어지는 한 호흡의 시간
반나절 자니 하늘빛
반나절 깨어 있으니 역광만 난분분하다
주름 풀어진 날개로
다시 풀씨를 품겠다는 듯 흙빛을 모으고
있는 나의 어여쁜, 백百
고등어 숲
나무가 없는데 나무가 보인다는 심해
우리는 텅 빈 그림자로 숲을 이루고 살지요
삼천리 길에서 걸어온 나무는 흑청색 물결 무늬를
간직하고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기도 해요
향고래, 혹등고래인데요 천 년을 잘못 읽은 책
우리는 죽어서야 문자가 되고 문장이 되지요
세상의 마지막 풍경이 고래의 입속에서 본 노을인데요
해와 달이 반반씩 스며도 심해와 함께해요
아가미들이 수평선을 파먹고 살면서도
서귀포가 수억 년 전의 음악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죠
그 음표를 몸에 새기고 사는 우리는
지느러미가 지느러미를 밀쳐내는 놀이를 하는 중이에요
사실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아가미에 고인 물을
힘차게 털어내는 중이거든요
저 큰 고등어의 숲, 꼬리를 한번 흔들었는데
마지막 힘줄이 꿈틀, 비단 빛깔 공기가 펼쳐지네요
검은
빛이면서 보랏빛인 우리는
한편의 숲이 구겨져 시가 되는 황홀을 맛보는 중이에요
유리창을 매다는 사람
나무를 끼고 집을 짓는 사람
동그란 집에 빛이 갇혀 있다
숨을 들일까, 말까 하는 박새 앞에서
유리창을 매달고 있다
박새는 작은 지구를 매달고
늦봄에 이르러서야 알은 핏줄을 가진 걸까
어미 새는 기름진 것을 먹고
나무는 작은 지구가 숨을 품어 안을 때까지
제 그림자 모아 새 유리창 하나 짜낸다
알은 껍질이
나무는 새싹이
집은 제 숨구멍이
유리창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지붕이 몸이고
몸이 지붕인 것들도 있지만
유리창에 비친 봄밤은
갈대나 물결도 새 옷을 입는 것을 바라본다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들도
날개를 사선으로 지우고 있다
한 치씩 커가는 것과
한 치씩 물러나는 그림자 속에서
유리창을 낸 사람은
화색 도는 새 발자국을 읽고 있다
차오르는 백색 조명
세잔의 정물화를 엿보려고
살구나무 굵은 가지를 베어 냈다
동쪽 능선으로 흐르는 구름과
물수제비 뜨는 저수지가 내려다 보인다
깜박이는 것은 저수지의 물결일까
겨울잠 털고 일어난 소금쟁이일까
한 뼘 높아진 기온이
지울 수 없는 꽃 그림을 그려낸다
꽃의 후생은 왜 열매일까
왜 살구는 여름이 오기 전에 떨어질까
빗소리로 제 몸을 으깨는 걸까
열매 배꼽을 우리는 왜 꼭지라고 할까
저 박새만이
나뭇가지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풍경을 바라보는 내 눈은
빛이 침수되는지 알 수 없지만
축축한 나뭇가지마다 이미 살갗이 아닌 듯
잘린 나뭇가지 옆에서
꽃가지가 나온다 흉터를 가리고 있다
봄날 아침의 발품이겠다
|당선소감|
사진을 찍듯이 그렇게 언어로 그림을 …….
늦가을 형제들이 모여 마당이 분주해집니다. 나의 형제들은 밤과 고구마, 서리태, 송아리와 표고버섯과 떡가래입니다. 오늘 쏘가리 남편은 내 옆에서 설거지를 해줍니다. 제주 바다에 다녀와서 경주까지 시 공부를 하러 다녔습니다. 말이 말을 달라붙게 하는 힘이 좋다고, 계속해서 시를 쓰라고 짚어주신 전동균, 손진은, 함기석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올해 어머니께서 상수에 드십니다. 누군가를 모시고 사는 일이 시 쓰는 일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시를 가까이하면, 시는 멀리 가고, 어머니 역시 가까이하면 멀리 가려고만 했습니다. 묵묵히 시집을 읽고 쓴 지가 8년 가까이 됩니다. 그동안 몇 개의 작은 상을 받았지만, 이제는 제 이름을 걸고 시를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무척 기쁩니다. 제 부족한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고해주신 김윤배, 박형준, 이경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올해도 뒷산을 흔들고 가는 멧돼지 울음이 크게 들립니다. 멧돼지가 몰고 오는 가을비가 지나가는 것과 웅덩이에 고인 빗소리도 잘 들여다보겠습니다. 오늘 밤엔 단풍잎으로 옷을 갈아입는 가을의 목소리를 받아 적어보고 싶습니다. 자연 속으로 든 지 십여 년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시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사진을 찍듯이 그렇게 언어로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제 소중한 인연들, 청주의 문우들과 거나하게 한잔하고 싶습니다.
김은순 l 1957년 대전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사진작가.
l 2023년 제6회 남구만신인문학상 수상.
|심 사 평|
감각적 사유를 은유로 결합하는 탁월한 능력
제6회 남구만신인문학상 본심에는 투고된 500여 편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 예심의 블라인드 심사를 거쳐 열네 분의 작품이 올라왔다. 본심 심사위원들은 먼저 이 열네 분의 작품을 꼼꼼히 읽고 각자 상대평가 방식으로 세 분의 작품을 추천하였다.
전반적으로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상당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기교와 노련함에 비해 신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패기와 새로운 목소리를 보여주는 작품은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우선 심사 기준으로 신인이라면 자신의 능력 안에서 언어를 매만지는 실력도 필요하지만 아울러 자신의 능력 바깥에서 현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끌어안는 참신함을 갖추어야 한다는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추천을 받은 작품들을 다시 읽고 재논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결국 두 차례의 논의 과정을 거쳐 세 분의 작품이 최종심에 회부되었다.
「친절한 금자씨」 외 7편은 다루는 소재의 폭이 넓고 그것을 개성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현실 인식이 날카롭다. 특히 농촌의 현실 상황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서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신선하다. 하지만 다소 상투적인 진술과 가다듬어지지 않은 산문적인 호흡이 군데군데 눈에 띄어 아쉽다.
「희망촌에서」 외 6편은 안정적인 언어 운용을 통해 현실 감각을 버무려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소외된 공간을 직시하는 표면적인 언어 능력에 비해 그것을 토대로 상상화해가는 시의 이면에서 구체적인 삶의 양상이 뚜렷하게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흰 절집」 외 6편은 눈에 보이는 대상과 대상 이면의 감각적인 사유를 은유로 결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가령, 투고자가 가장 앞에 놓은 「흰 절집」만 보아도, ‘잠실(蠶室)’을 ‘절집’으로, 그리고 태어나는 누에를 ‘민머리 여승’으로 겹은유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집의 마술」은 ‘멍텅구리배’를 ‘섬’과 ‘사람들의 집’으로 은유하면서 그것을 한순간에 현실화하는 이미지와 리듬이 서정시로서 갖춰야 할 짜임새와 깊이를 보여준다. 동력이 없으면 바다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멍텅구리배의 사실적인 관찰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지 못하면 공존하기 어려운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확장했다. 시와 시인이 일치하는 것 같은 자유자재함이 생략과 여운의 독특한 서정으로 겹은유되어 되풀이 읽게 만드는 매력을 발휘하는 작품이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김윤배(시인),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박형준(시인, 동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