箕子의 교화(敎化)가 있은 뒤에 古朝鮮은 당시 중국 동북지구 문명의 邦이 되었다. 그래서 다음 기사에서 보듯이 “君子國”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山海經•海外東經》: “君子國……衣冠帶劍, 食獸, 使二文虎在旁, 其人好讓不爭.” 《論語•子罕》에 적혀있기를 공자(孔子)는 九夷에서 살고 싶다고 하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고 하였다.《論語正義》: “子欲居九夷, 與乘桴浮海, 皆謂朝鮮.”
이리하여 “君子國”은 周 왕조의 번국(藩國)의 별칭이 되었는데, 지금의 조선반도 북부가 주요 활동 중심이었다. 《戰國策•燕策》에 “燕東有朝鮮, 遼東.”라고 하였다. 전국시대때 燕의 동부는 지금의 요하(遼河) 일대이니, 古朝鮮族의 서부 활동범위는 이미 지금의 요하 유역까지 달했다는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다음의 기사가 있다. 《山海經•海內北經》: “朝鮮在<列陽>東, 海北, 山南, <列陽>屬燕.” 여기서 “列陽”은 바로 지금의 “遼陽”이다.《海內經》: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이러한 기사들은《戰國策•燕策》의 기사와 서로 뒷받침된다.
箕子가 그 족속을 이끌고 古朝鮮에 들어가 살게 된 후,《史記•秦始皇本紀》의《正義》에서 인용된《括地志》에 그 도성은 王險城이라고 적혀있다. 王險城은 뒷날 漢의 낙랑군(樂浪郡)에 예속하게 되는데 지금 북한(朝鮮)의 수도인 평양이다.
古朝鮮族의 문화는 물질 방면은 물론 정신 방면에도 당시 이 일대 지역에 있던 타민족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필자가 그것에 대해 전방면에 걸쳐 인지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한 두개만 대략 알고 있을 따름이다.
역사 기록이 모두 古朝鮮族의 “衣冠帶劍”를 말하고 있으나, 劍의 형태나 형식에 대한 것은 적혀있지 않다. 1949년 이후, 요하유역에서 압록강 유역에 이르기까지, 西周 만기~전국시대 중기 시기의 동북계 청동단검 [역자주: 비파형청동검을 말함]이 무더기로 출토하였다. 연구에 따르면 이런 류의 동북계 청동단검은 漢1시기에 속하는 동북지구 대국(大國)적 문화의 하나라고 한다. 그 정황과 이치를 따져볼때 그것들은 다름아닌 箕氏朝鮮의 것이다.
《管子•揆度》에 古朝鮮族은 “紋皮”을 갖고 있다고 적혀있고,《輕重》에는 “飧服”이 적혀있다. 생각해 보건대 “紋皮”은 바로《山海經•海外東經》에 기재된 “文虎”인데 호랑이 가죽 또는 표범 가죽이다. 毤服은 털을 제거한 가죽옷이다. 이러한 두가지 물품은 趙, 齊등의 나라에 기꺼이 받아들여졌다. 현재 조선 북부지역에서 출토한 많은 燕, 趙, 齊등의 제후국의 화패는 실제로 古朝鮮族의 산물을 구매해갔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까닭에 古朝鮮族의 사회경제와 상업무역은 몹시 발달하였음이 증명된다.
문화예술 영역에 있어 古朝鮮族은 東夷族 계통이 즐기는 가무(歌舞) 습속을 완전히 계승하였다. 《古今注•音樂》에 적혀있기를: 古朝鮮族의 악곡의 하나로《箜篌引》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津卒(나룻터를 지키며 뱃사공 노릇을 하는 사병)인 霍里子高의 처 麗玉이 지은것으로 “子高晨起, 刺船而濯. 有一白首狂夫, 被髮提壺亂流而渡, 其妻隨而止之不及, 遂墮河水死. 於是援箜篌而鼓之, 作《公無渡河》之歌, 聲甚悽愴, 曲終自投河而死. 霍里子高還, 以其聲語其妻麗玉, 玉傷之, 乃引箜篌而寫其聲, 聞者莫不墮淚飮泣焉. 麗玉以其曲傳隣麗容, 名之曰《箜篌引》.” 唐나라 王睿의《灸轂子錄•序樂府》에도 “《箜篌引》, 亦曰《公無渡河》, 舊說朝鮮津卒霍子高妻麗玉所作也.”라고 하였다. 《箜篌引》은 가련한 일을 이야기한것으로 그 노래가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높은 예술수준과 전파력을 지니고 있어 중국 고악부(古樂府)《相和六引》의 하나가 될 수 있었으며 줄곧 후대인의 사랑을 받았다. 이밖에도 古朝鮮族은 춤을 잘 추기로 이름을 날렸다.
어떤 학자는 그러한 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바있다: “古朝鮮族이 이룬 역사상 창조적인 생산수준과 문화예술은 우리들의 선조가 인류역사에 공헌한 것의 하나다.”(傳朗雲, 楊陽).
첫댓글 이 글과 19번 글은 5월 7일에 아이디님이 중국정체성연구방에 올린 글을 이곳에 옮겨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