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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十回 晉獻公違卜立驪姬 楚成王平亂相子文
제20회: 진헌공이 점괘를 무시하여 여희를 세우고 초성왕이 난을 평정하고 자문을 재상으로 삼다
周惠王十年,徐戎俱已臣服於齊。鄭文公見齊勢愈大,恐其侵伐,遣使請盟。乃復會宋、魯、陳、鄭四國之君,同盟於幽,天下莫不歸心於齊。齊桓公歸國,大設宴以勞群臣。酒至半酣,鮑叔牙執巵至桓公之前,滿斟為壽。桓公曰:「樂哉,今日之飲!」鮑叔牙曰:「臣聞『明主賢臣,雖樂不忘其憂。』臣願君毋忘出奔,管仲毋忘檻囚,甯戚毋忘飯牛車下之日。」桓公遽起離席再拜曰:「寡人與諸大夫,皆能毋忘,此齊國社稷無窮之福也!」是日極歡而散。忽一日,報:「周王遣召伯廖來到。」桓公迎接入館。
주혜왕 10년(기원전 667년)에 서(徐)나라와 융(戎)이 모두 제나라에 신하로 복종하니, 정문공이 제나라가 더욱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정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어 회맹하기를 청했다. 이에 다시 송(宋)나라, 노(魯)나라, 진(陳)나라, 정(鄭)나라 등 네 나라의 군주들과 유(幽) 땅에서 동맹하여 천하의 인심은 제나라에 쏠리게 되었다. 제환공이 회맹을 끝내고 귀국하여 여러 신하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큰 잔치를 열었다. 술이 반쯤 올랐을 때 포숙아가 술잔을 잡고 환공 앞으로 와서 술을 가득 따라 바치며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환공이 말하기를, “오늘의 술자리가 즐겁소.” 했다. 포숙아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는 비록 즐거움 속에서도 지난날의 근심을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은 원컨대 주군께서는 거나라로 달아났던 것을, 관중은 함거에 잡혀온 것을, 영척은 소를 치다가 주군의 수레를 만났던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니, 제환공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재배하고 말하기를, “과인과 여러 대부는 이것이 제나라 사직의 무궁한 복임을 모두 잊지 말아야 합니다!” 했다. 그날, 매우 즐거워한 후에 흩어졌다. 갑자기 어느 날 보고하기를, “주나라 천자께서 소백 요(召伯寥)를 보내어 도착했습니다.” 했다. 제환공이 그를 맞이하여 역관에 들게 했다.
召伯廖宣惠王之命,賜齊侯為方伯,修太公之職,得專征伐。因言:「衛朔援立子頹,助逆犯順,朕懷之十年,迄今天討未彰。煩伯舅為朕圖之。」惠王十一年,齊桓公親率車徒伐衛。時衛惠公朔先薨,子赤立,已三年矣,是為懿公。懿公不問來由,率兵接戰,大敗而歸。桓公乃直抵城下,宣揚王命,數其罪狀。懿公曰:「然則先君之過,與寡人無與也。」乃使其長子開方,輦金帛五車,納於齊軍,求其講和免罪。桓公曰:「先王之制,罪不及子孫。苟遵王命,寡人何多求於衛耶?」公子開方見齊國強盛,願仕於齊。
소백 요는 주혜왕의 명령을 전하여 제환공을 방백으로 삼아 태공(太公)의 직위를 제수하고 정벌을 전결할 수 있게 했다. 그로 인하여 말하기를, “위혜공 삭(朔)이 왕자 퇴를 도와 주나라 왕으로 세웠으니 이는 역적을 돕고 순리를 범한 짓이었다. 짐이 10년 동안 그 일을 가슴속에 품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직 천자의 이름으로 토벌하여 위엄을 드러내지 못했다. 백구(성이 다른 제후)는 번거롭겠지만 짐을 위해 이 분한을 풀어 주기 바라노라.” 했다. 주혜왕 11년(기원전 666년)에 제환공은 친히 전차와 보병을 인솔하고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 그때는 이미 위혜공 삭은 죽었고 그 아들 적(赤)이 뒤를 이은 지 3년이 되었다. 그가 위의공(衛懿公)이다. 위의공은 제환공이 쳐들어온 이유도 묻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접전하여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성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제환공이 곧바로 성 아래에 들이받아 천자의 명을 공포하고 위혜공의 죄상을 열거했다. 위의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선군의 잘못인데 나와는 상관이 없소.” 하고, 즉시 그의 장자 개방(開方)에게 금과 비단 다섯 수레를 실어 제환공에게 보내 강화를 청하며 부친의 죄를 면해 달라고 했다. 제환공이 말하기를, “옛날부터 선왕의 제도에 의하면 아비가 지은 죄는 그 자손에게 물을 수 없다고 했으며, 위의공이 진실로 왕명을 받들어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데, 과인이 어찌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했다. 위나라 공자 개방도 제나라 군사들의 강성함을 보고 제나라에서 벼슬하기를 원했다.
齊侯曰:「子乃衛侯長子,論次序當為國儲。奈何舍南面之尊,而北面於寡人乎?」開方對曰:「明公乃天下之賢侯,倘得執鞭侍左右,榮幸已甚,豈不勝於為君?」桓公以開方為愛己,拜為大夫,寵之與豎貂易牙等。齊人謂之「三貴」。開方復言衛侯少女之美,(衛惠公先曾以女媵齊,此其妹也。)桓公遣使納幣,求之為妾。衛懿公不敢辭卻,即送衛姬至齊,齊侯納之。因以長衛姬,少衛姬別之,姊妹俱有寵。髯翁有詩云:「衛侯罪案重如山,奉命如何取賂還?漫說尊王申大義,到來功利在心間。」
제환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위후의 장자다, 그 차례로 말하면 마땅히 위나라 태자가 될 것인데, 어찌하여 군주가 될 자리를 마다하고 과인을 섬기려고 하는가?” 하니, 개방이 대답하기를, “군주께서는 곧 천하의 어진 제후이십니다. 만일 좌우에서 모시면서 말고삐라도 잡을 수 있다면 큰 영광이겠습니다. 어찌 조그만 나라의 군주가 되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했다. 제환공이 개방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제나라의 대부로 삼고, 수초(竪貂), 역아(易牙)와 함께 총애했다. 제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삼귀(三貴)’라고 불렀다. 개방은 다시 위혜공의 막내딸의 미모를 말했다. (위혜공은 일찍이 딸을 제나라에 잉첩으로 보냈다. 이는 그 여동생이다) 제환공은 사자를 보내 납폐하고 그녀를 첩으로 삼고 싶다고 했다. 위의공은 감히 제환공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즉시 위희를 제나라로 보냈다. 제환공이 맞아들여 언니를 장위희(長衛姬), 동생을 소위희(小衛姬)라 불러 구별하여 자매를 모두 총애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위혜공 삭이 지은 죄는 산처럼 무거운데, 왕명을 받들어 죄를 묻는다면서 뇌물을 받고 돌아섰는가? 천자를 높이고 대의를 천하에 편다고 떠벌렸으나, 마음속에 공명과 이익을 바라고 한 일이네.” 했다.
話分兩頭。卻說,晉國姬姓,侯爵。自周成王時,剪桐葉為珪,封其弟叔虞於此。傳九世至穆侯。穆侯生二子,長曰仇,次曰成師。穆侯薨,子仇立,是為文侯。文侯薨,子昭侯立。畏其叔父桓叔之強,乃割曲沃以封之,謂之曲沃伯;改晉號曰翼,謂之二晉。昭侯立七年,大夫潘父弒之,而納曲沃伯。翼人不受,殺潘父而立昭侯之弟平,是為孝侯。孝侯之八年,桓叔薨,子鱓立,是為曲沃莊伯。孝侯立十五年,莊伯伐翼,孝侯逆戰大敗,為莊伯所殺。翼人立其弟郄,是為鄂侯。鄂侯立二年,率兵伐曲沃,戰敗,出奔隨國。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진(晉)나라는 희성(姬姓)이고 작위는 후작(侯爵)이었다. 주나라 성왕(成王)이 오동잎을 따서 홀[珪]로 삼아 그의 동생 숙우(叔虞)를 이곳에 봉했다. 아홉 대를 전하여 목후(穆侯)에 이르렀다. 목후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를 구(仇)라 하고 차자는 성사(成師)라 했다. 목후가 죽자 장자 구가 뒤를 이었다. 그가 진문후(晉文侯)다. 진문후가 죽고 그 아들 소후(昭侯)가 뒤를 이었다. 소후는 그의 숙부인 환숙(桓叔 ; 成師)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곡옥(曲沃)을 떼어내어 봉해주고 곡옥백(曲玉伯)이라 했다. 소후가 진(晉)나라의 국호를 익(翼)으로 바꾸었으므로 두 개의 진(晉)나라라고 했다. 소후 7년(기원전 739년)에 대부 반보(潘父)가 소후를 시해하고 곡옥백을 불러들였으나 익(翼)나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반보를 죽인 후 소후의 동생 평(平)을 세웠다. 이가 효후(孝侯)다. 효후 8년(기원전 731년)에 환숙[成師]이 죽고 그의 아들 선(鱓)이 뒤를 이었다. 이가 곡옥의 장백(莊伯)이다. 효후 15년(기원전 724년)에 장백이 익(翼)을 공격했다. 효후가 출전하였으나 크게 져서 장백에게 살해되었다. 익(翼)나라 사람들이 효후의 동생 극(郄)을 세웠다. 이가 악후(顎侯)다. 악후 2년(기원전 721년)에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곡옥을 쳤으나 싸움에 패하여 수(隨)나라로 달아났다.
子光嗣位,是為哀侯。哀侯之二年,莊伯薨,子稱代立,是為曲沃武公。哀侯九年,武公率其將韓萬梁宏伐翼,哀侯逆戰被殺。周桓王命卿士虢公林父立其弟緡,是為小子侯。小子侯立四年,武公復誘而殺之,遂並其國,定都於絳,仍號曰晉。悉取晉庫藏寶器,輦入於周,獻於釐王。釐王貪其賂,遂命稱代以一軍為晉侯。稱代凡立三十九年,薨,子佹諸立,是為晉獻公。獻公忌桓莊之族,慮其為患。大夫士蒍獻計散其黨,因誘而盡殺之。獻公嘉其功,命為大司空。因使大城絳邑,規模極其壯麗,比於大國之都。
악후의 아들 광(光)이 뒤를 이었다. 이가 애후(哀侯)다. 애후 2년(기원전 716년)에 곡옥의 장백이 죽고 그의 아들 칭대(稱代)가 뒤를 이었다. 이가 곡옥의 무공(武公)이다. 애후 9년에 곡옥의 무공이 장수 한만(韓萬)과 양굉(梁宏)을 거느리고 익(翼)을 공격했다. 애후가 맞이해 싸우다가 죽었다. 주환왕이 경사(卿士)인 괵공(虢公) 임보(林父)를 보내 애후의 동생 민(緡)을 군주로 세우라고 명했다. 이가 소자후(小子侯)다. 소자후 4년(기원전 706년)에 무공이 다시 그를 유인하여 살해하고 마침내 두 나라를 합치고 강성(絳城)에 도읍을 정해 나라 이름을 옛날처럼 진(晉)이라고 했다. 진나라의 국고에 있던 보물을 모두 수레에 싣고 주나라에 가져가 주리왕(周釐王)에게 바쳤다. 주리왕이 그 뇌물을 탐하여 마침내 칭대(稱代 ; 무공)를 1군(만2천5백명)만 둘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아 진나라 군주로 승인했다. 칭대(무공)가 선 지 39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궤제(詭諸)가 뒤를 이었다. 이가 진헌공(晉獻公)이다. 진헌공이 환숙과 장백의 자손들이 혹시 난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들을 미워했다. 대부 사위(士蔿)가 계책을 올려 그 족속들을 분산시켜 살게 하고 후에 유인하여 모조리 죽였다. 진헌공이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그를 대사공(大司公)에 임명했다. 그리하여 강읍(絳邑)을 큰 성으로 만들게 하고, 규모를 아주 장려하게 하여 대국의 도성에 비견할 수 있게 되었다.
先獻公為世子時,娶賈姬為妃,久而無子。又娶犬戎主之姪女曰狐姬,生子曰重耳,小戎允姓之女,生子曰夷吾。當武公晚年,求妾於齊,齊桓公以宗女歸之,是為齊姜。時武公已老,不能御女。齊姜年少而美,獻公悅而烝之,與生一子,私寄養於申氏,因名申生。獻公即位之年,賈姬已薨,遂立齊姜為夫人。時重耳已二十一歲矣,夷吾年亦長於申生。因申生是夫人之子,論嫡庶不論長幼,乃立申生為世子。以大夫杜原款為太傅,大夫里克為少傅,相與輔導世子。齊姜又生一女而卒。
지난날, 진헌공이 세자로 있을 때, 가희(賈姬)를 취하여 세자비로 삼았으나 오래도록 자식이 없어서 다시 견융주(犬戎主 ; 오랑캐 추장)의 질녀(姪女)인 호녀(狐女)를 취하여 아들 중이(重耳)를 낳았다. 다시 소융 윤성(小戎允姓)의 딸을 취하여 아들 이오(夷吾) 낳았다. 당시 무공이 만년에 제나라에 첩을 구하여 제환공이 종실의 딸을 시집보내니, 이가 제강(齊姜)이다. 그때 무공이 이미 늙어서 제강과는 잠자리를 같이할 수 없었다. 제강은 나이 어리고 용모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헌공이 좋아하여 범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을 몰래 신씨(申氏)에게 주어 길렀으므로 이름을 신생(申生)이라고 했다. 헌공이 즉위할 때에 가희는 이미 죽고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제강을 부인으로 세웠다. 당시 중이는 이미 21세였고 이오 역시 신생보다는 나이가 많았으나 신생은 곧 정부인의 아들이라 하여 나이의 많고 적음보다는 적서를 논하여 신생이 세자가 되었다. 대부 두원관(杜原款)을 태부(太傅)로, 이극(里克)을 소부(少傅)로 임명하여 세자를 보좌하도록 했다. 제강은 딸을 하나 더 낳고 죽었다.
獻公復納賈姬之娣曰賈君,亦無子。因以齊姜所生之女,使賈君育之。獻公十五年,興兵伐驪戎。驪戎乃請和,納其二女於獻公,長曰驪姬,次曰少姬。那驪姬生得貌比息媯,妖同妲已,智計千條,詭詐百出。在獻公前,小忠小信,貢媚取憐。又時常參與政事,十言九中。所以獻公寵愛無二,一飲一食,必與之俱。踰年,驪姬生一子,名曰奚齊。又踰年,少姬亦生一子,名曰卓子。獻公既心惑驪姬,又喜其有子,遂忘齊姜一段恩情,欲立驪姬為夫人。使太卜郭偃,以龜卜之。郭偃獻兆,其繇曰:「專之渝,攘公之羭。一薰一蕕,十年尚有臭!」
진헌공은 다시 가희의 동생을 취하여 가군(賈君)이라 불렀다. 가군 역시 소생이 없어 제강이 낳은 여아를 맡아 길렀다. 헌공 15년에 군사를 일으켜 여융(驪戎)을 정벌하니 여융의 군주가 즉시 강화를 청해 오면서 자기의 두 딸을 헌공에게 바쳤다. 장녀를 여희(驪姬)라 하고 차녀는 소희(小姬)라 불렀다. 여희는 용모가 태어날 때부터 식규(息嬀)와 견줄 만했고, 요염하기는 달기(妲己)와 같았는데, 지략이 천 가지요 교활한 거짓말을 백 가지로 했다. 여희가 헌공 앞에 있을 때는 충성과 신의를 말하며 갖은 아양을 떨어 헌공의 어여쁨을 얻었고, 또 항상 정사에 참여하여 열에 아홉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헌공이 총애하기를 그지없이 하여 음식을 먹을 때는 항상 그녀와 같이했다. 몇 해가 지나가자 여희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해제(奚齊)라 했다. 또 해가 바뀌어 소희도 아들을 낳아 탁자(卓子)라 했다. 헌공의 마음은 이미 여희에게 혹해 있었고 그녀의 소생인 해제를 좋아하게 되어, 마침내 제강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여희를 부인으로 삼고자 했다. 태복(太卜) 곽언(郭偃)을 시켜 거북점을 치게 하니, 곽언이 그 조짐을 바치니 그 점사(占辭)에 이르기를, “마음대로 하면 변이 나서, 그대의 아름다움을 빼앗으니, 하나는 향기, 하나는 악취를 풍겨서, 10년이 지나도 그 냄새가 없어지지 않으리라!” 했다.
獻公曰:「何謂也。」郭偃曰:「渝者,變也。意所專尚,心亦變亂,故曰『專之渝』。攘,奪也。羭,美也。心變則美惡倒置,故曰『攘公之羭』。草之香者曰薰,臭者曰蕕。香不勝臭,穢氣久而未消,故曰『十年尚有臭』也。」獻公一心溺愛驪姬,不信其言,更命史蘇筮之。得《觀卦》之六二,爻詞曰:「闚觀利女貞。」獻公曰:「居內觀外,女子之正。吉孰大焉?」卜偃曰:「開闢以來,先有象,後有數。龜,象也。筮,數也。從筮不如從龜。」史蘇曰:「禮無二嫡,諸侯不再娶,所謂觀也。繼稱夫人,何以為正?不正,何利之有?以《易》言之,亦未見吉。」
진헌공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니, 곽언이 말하기를, “투(渝)는 변한다는 뜻입니다. 오로지 생각대로 하면 마음도 변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하면 변이 난다.’고 했습니다. 또한 양(攘)이란 빼앗는다는 뜻이고, 유(羭)는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변하면 아름답고 추한 것이 바뀌기 때문에 ‘그대의 아름다움을 빼앗는다.’고 한 것입니다. 향기가 나는 풀을 훈(薰)이라 하고, 악취가 나는 풀을 유(蕕)라 합니다. 향기가 악취를 이길 수 없고, 더러운 기운이 오랫동안 없어지지 아니하므로 ‘10년이 지나도 그 냄새가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했다. 진헌공이 한마음으로 여희를 몹시 사랑했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다시 사소(史蕭)를 불러 시초(蓍草) 점을 치게 하여, 관괘(觀卦)의 육이효(六二爻 ; 두 번째 음효)를 얻었다. 효사(爻詞)에 이르기를, ‘엿보는 것은 여자의 정절에 이롭다.’고 했다. 진헌공이 말하기를, “안에 거처하면서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것은 여자로서 바른 태도이다. 이보다 길한 점괘가 있겠는가?” 하니, 태복 곽언이 말하기를, “천지가 열린 이래 모양이 먼저 생기고 후에 수(數)가 생겼습니다. 거북은 모양이고 시초는 수입니다. 시초점을 따르는 것은 거북점을 따르는 것보다 못합니다.” 했다. 사소가 말하기를, “예법에는 두 적자(嫡子)가 있을 수 없으므로 제후는 두 번 정실 부인을 두지 않습니다. 점사에서 말하는 엿본다는 것은 계실(繼室) 부인을 말합니다. 어찌 바르다고 하겠습니까? 바르지 못한데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주역>으로 말하더라도 또한 길함을 볼 수 없습니다.” 했다.
獻公曰:「若卜筮有定,盡鬼謀矣。」竟不聽史蘇卜偃之言。擇日告廟,立驪姬為夫人,少姬封為次妃。史蘇私謂大夫里克曰:「晉國將亡,奈何?」里克大驚,問曰:「亡晉者何人?」史蘇曰:「其驪戎乎?」里克不解其說。史蘇曰:「昔夏桀伐有施,有施人以女妹喜歸之。桀寵妹喜,遂以亡夏。殷辛伐有蘇,有蘇氏以女妲己歸之。紂寵妲己,遂以亡殷。周幽王伐有褒,有褒人以女褒姒歸之。幽王寵褒姒,西周遂亡。今晉伐驪戎而獲其女,又加寵焉,不亡得乎?」適太卜郭偃亦至,里克述史蘇之言。
진헌공이 말하기를, “만약 거북점과 시초점이 정해졌다면 그것은 모두 귀신들의 수작이다.” 했다. 결국 헌공은 사소와 태복 곽언의 말을 듣지 않고 길일을 택해 태묘에 고하고 여희를 부인으로 삼고, 소희는 둘째 부인으로 봉했다. 사소가 가만히 대부 이극에게 말하기를, “진(晉)나라가 장차 망하게 되었습니다. 어찌해야 좋을지요?” 하니. 이극이 크게 놀라 묻기를, “진나라를 망칠 자가 누굽니까?” 했다. 사소가 말하기를, “그것은 여융이겠지요.” 했다. 이극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사소가 말하기를, “옛날 하나라 걸왕이 유시(有施)를 정벌하자 유시 사람들이 말희(妺姬)라는 여자를 걸왕에게 바쳤습니다. 걸왕이 말희를 총애하여 마침내 하나라가 망했습니다. 은(殷)나라 주왕(紂王) 신(辛)이 유소(有蕭)를 정벌하자 유소씨가 달기(妲己)라는 여자를 주왕에게 바쳤습니다. 주왕이 달기를 총애하여 마침내 은나라가 망했습니다. 주나라 유왕(幽王)이 유포(有褒)를 정벌하자 유포 사람이 포사(褒姒)라는 여자를 바쳤습니다. 유왕이 포사를 총애하여 마침내 서주(西周)가 망했습니다. 지금 진(晉)나라가 여융(驪戎)을 정벌하여 그 여자들을 얻어서 또 총애를 더하니 망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그때 마침 태복 곽언이 이르자, 이극이 사소가 한 말을 전했다.
郭偃曰:「晉亂而已,亡則未也。昔唐叔之封,卜曰:『尹正諸夏,再造王國。』晉業方大,何亡之患?」里克曰:「若亂當在何時?」郭偃曰:「善惡之報,不出十年。十者;數之盈也。」里克識其言於簡。再說,獻公愛驪姬,欲立其子奚齊為嗣。一日,與驪姬言之。驪姬心中甚欲。只因申生已立做世子,無故更變,恐群臣不服,必然諫沮。又且重耳夷吾,與申生相與友愛,三公子俱在左右,若說而不行,反被提防,豈不誤事。乃跪而對曰:「太子之立,諸侯莫不聞。且賢而無罪,君必以妾母子之故,欲行廢立,妾寧自殺!」獻公以為真心,遂置不言。
곽언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어지럽겠지만 망하지는 아니할 것이오. 옛날 당숙우(唐叔虞)께서 봉해졌을 때, 점괘에 이르기를, ‘진실로 천하를 바로 잡아 왕국을 다시 일으키시다.’라고 했습니다. 진(晉)나라의 업적이 바야흐로 클 것인데 어찌 망할 리가 있겠소?” 했다. 이극이 말하기를, “만약 난이 일어난다면 어느 때 일어날까요?” 하니, 곽언이 말하기를, “선과 악의 업보는 10년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10은 숫자의 가득 참입니다.” 했다. 이극은 그 말을 죽간에 기록했다. 한편, 진헌공은 여희를 사랑하여 그 아들 해제를 세자로 삼고자 했다. 하루는 여희에게 그것을 말했다. 여희가 마음속으로는 몹시 바랐지만, 신생이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아무런 이유 없이 바꾸면 신하들이 복종하지 않고 반드시 간하여 막을 것이며, 또 중이와 이오도 신생과 서로 우애하고 세 공자가 모두 진헌공의 좌우에 있어, 만약에 말이 나왔다가 성공하지 못하면 도리어 방해만 생겨서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헌공 앞에서 무릎을 꿇고 대답하기를, “신생을 태자로 세운 사실은 모든 제후가 이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태자는 지혜롭고,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군주께서 신첩의 모자 때문에 태자를 폐하려고 하시니 첩은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합니다.” 했다. 진헌공이 여희의 말을 진심으로 알고 마침내 그만두고 말하지 않았다.
獻公有嬖幸大夫二人:曰梁五東關五,並與獻公察聽外事,挾寵弄權,晉人謂之「二五」。又有優人名施者,少年美姿,伶俐多智,能言快語,獻公尤嬖之,出入宮禁,不知防範。驪姬遂與施私通,情好甚密。因告以心腹之事,謀離間三公子,徐為奪嗣之計。優施為之畫策:「必須以封疆為名,使三公子遠遠出鎮,然後可居中行事。然此事又必須外臣開口,方見忠謀。今『二五』用事,夫人誠以金幣結之,俾彼相與進言,則主公無不聽矣。」驪姬乃出金帛付優施,使分送「二五」。優施先見梁五曰:「君夫人願交懽於大夫,使施致不腆之敬。」
진헌공에게는 아첨을 해서 총애를 받는 두 대부가 있었는데, 양오(梁五)와 동관오(東關五)였다. 그들은 바깥일을 진헌공에게 일러바치고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렸다. 진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이오(二五)라 불렀다. 또 시(施)라는 배우가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모습이 아름답고 영리하며 꾀가 많을 뿐만 아니라 구변이 대단했다. 진헌공이 특별히 총애하여 궁궐에 출입할 수 있게 하여 아무 데나 드나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희가 시(施)와 사통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의 정은 더욱 깊어졌다. 그로 인하여 여희로부터 가슴속의 생각을 듣게 된 우시는 세 공자와 진헌공 사이를 이간시키고 세자의 자리를 빼앗을 계략을 서서히 도모했다. 배우 시(優施)가 여희를 위해 계책을 세우고 말하기를, “반드시 변방의 땅에 봉한다는 핑계로 세 공자를 먼 지방으로 쫓아낸 뒤에라야 가히 일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는 반드시 외신(外臣)이 입을 열어 충성스런 꾀를 내야 합니다. 지금 이오(二五 ; 동관오와 양오)가 일을 처리하니, 부인께서는 정성껏 황금과 비단으로 결탁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공에게 나아가 진언하게 하면 주공께서는 듣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했다. 여희가 이에 황금과 비단을 내어 우시에게 주면서 이오에게 나누어주도록 했다. 우시가 먼저 양오를 만나서 말하기를, “군부인께서 대부와 친숙하게 지내고자 변변치는 않지만 경의(敬意)를 표하는 예물을 저를 시켜 전합니다.” 했다.
梁五大驚曰:「君夫人何須於我?必有囑也。子不言,吾必不受。」優施乃盡以驪姬之謀告之。梁五曰:「必得東關為助乃可。」施曰:「夫人亦有饋,如大夫也。」於是同詣東關五之門,三人做一處商議停當。次日,梁五進言於獻公曰:「曲沃始封之地,先君宗廟之所在也。蒲與屈,地近戎狄,邊疆之要地也。此三邑者,不可無人以主之。宗邑無主,則民無畏威之心;邊疆無主,則戎狄有窺伺之意。若使太子主曲沃,重耳夷吾,分主蒲屈,君居中制馭,此磐石之安矣。」獻公曰:「世子出外可乎?」
양오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군부인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가? 반드시 부탁하실 일이 있을 것이오. 그대가 말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받지 않겠소.” 했다. 이에 우시가 여희의 모의를 모두 고했다. 양오가 말하기를, “반드시 동관오의 도움을 얻어야 하오.” 하니, 우시가 말하기를, “부인께서는 대부께 드린 선물을 동관오에게도 똑같이 준비하셨습니다.” 했다. 이에 함께 동관오의 집으로 가서 세 사람은 합당한 계책을 상의했다. 다음날 양오가 진헌공에게 말씀드리기를, “곡옥(曲沃)은 처음 봉해진 땅으로 선군들의 종묘가 있는 곳입니다. 또한 포(蒲)와 굴(屈) 땅은 오랑캐의 땅과 가까워서 변경의 요지입니다. 이 세 고을은 다스릴 사람이 없으면 안 됩니다. 종실 고을에 다스리는 사람이 없으면 백성들이 군주의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변경에 다스리는 사람이 없으면 오랑캐가 엿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 태자로 하여금 곡옥을 다스리게 하고, 중이와 이오로 하여금 포와 굴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며, 주군께서 중앙에서 제어하면 반석처럼 안전할 것입니다.” 하니, 진헌공이 말하기를, “세자가 바깥으로 나가도 되는가?” 했다.
東關五曰:「太子,君之貳也。曲沃,國之貳也。非太子其誰居之?」獻公曰:「曲沃則然矣。蒲屈乃荒野之地,如何可守?」東關五又曰:「不城則為荒野,城之即為都邑。」二人又齊聲贊美曰:「一朝而增二都,內可屏蔽封內,而外可開拓疆宇,晉自此益大矣!」獻公信其言,使世子申生居曲沃,以主宗邑,太傅杜原款從行。使重耳居蒲,夷吾居屈,以主邊疆。狐毛從重耳於蒲,呂飴甥從夷吾於屈。又使趙夙為太子城曲沃,比舊益加高廣,謂之新城。使士蒍監築蒲屈二城。士蒍聚薪築土,草草完事。或言:「恐不堅固。」
동관오가 말하기를, “태자는 군주 다음의 지위입니다. 곡옥도 나라에 둘째가는 지방입니다. 그러니 태자가 아니고 누가 다스리겠습니까?” 했다. 진헌공이 말하기를, “곡옥은 그렇다고 하지만 포와 굴은 황야인데,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허니, 동관오가 또 말하기를, “성이 없으면 황야라 하겠지만 성을 쌓으면 모두 성읍이 됩니다.” 했다. 두 사람이 또 함께 칭송하기를, “하루아침에 두 고을이 늘어나니 안으로는 둘러막아 영지를 만들고 밖으로는 강토를 개척하니 진(晉)나라는 이로부터 더욱 커질 것입니다.” 했다. 진헌공이 그 말을 믿고 세자 신생을 곡옥으로 보내 종실 고을을 다스리게 하고, 태부 두원관(杜原款)을 딸려 보냈다. 중이는 포읍으로, 이오(夷吾)는 굴읍으로 보내어 변경을 다스리게 했다. (중이의 외숙) 호모(狐毛)가 중이를 따라 포읍으로 가고, 대부 여이생(呂鈶甥)이 이오를 따라 굴읍으로 갔다. 또 조숙(趙夙)에게 명하여 태자를 위하여 곡옥에 성을 더욱 넓고 높게 쌓게 하여 신성(新城)이라고 불렀다. 대사공 사위(士蒍)를 시켜 포와 굴 두 성을 오가며 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자, 사위는 섶나무를 모아 흙으로 개서 토성을 쌓게 하여 대충 일을 마무리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성을 튼튼하게 쌓지 않아서 후일이 걱정됩니다.” 했다.
士蒍笑曰:「數年之後,此為仇敵,何以固為?」因賦詩曰:「狐裘尨茸,一國三公,吾誰適從?」狐裘,貴者之服。尨茸,亂貌。言貴者之多,喻嫡庶長幼無分別也。士蒍預知驪姬必有奪嫡之謀,故為此語。申生與二公子,俱遠居晉鄙。惟奚齊卓子,在君左右。驪姬益獻媚取寵,以蠱獻公之心。髯翁有詩云:「女色從來是禍根,驪姬寵愛獻公昏。空勞畚築疆場遠,不道干戈伏禁門。」時獻公新作二軍,自將上軍。使世子申生將下軍,率領大夫趙夙畢萬攻狄、霍、魏三國,滅之。以狄賜趙夙,魏賜畢萬為采邑。太子功益高,驪姬忌之益甚,而謀愈深且毒矣。此事擱過一邊。
사위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몇 년 후면 이 성들은 원수가 될 터인데 견고해서 무엇하겠는가?” 하고, 시를 지어 이르기를, “여우 갖옷이 다 닳도록, 한 나라에 세 공자라네. 나는 누구를 따라야 하나?” 했다. 여우 갖옷은 귀인의 의복이며 방용(尨茸)은 닳아서 어지러운 모습이다. 귀인이 많다는 것은 적서나 장유의 구분도 없음을 비유한 말이고, 사위는 여희가 틀림없이 세자의 자리를 빼앗을 모의를 하는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이렇게 노래했다. 신생과 두 공자는 모두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진나라 변경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오로지 해제와 탁자만이 진헌공 좌우에 있게 되었다. 여희는 더욱 헌공에게 애교를 부려 진헌공의 마음을 미혹시켜 총애를 독차지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여색은 원래 재앙의 근본이니, 여희를 총애한 헌공은 실로 혼암한 군주다. 헛되이 힘들여 변경의 먼 곳에 토성을 쌓으면서, 창과 칼이 궁궐 안에 숨어 있음을 알지 못했다!” 고 했다. 그때, 진헌공은 새로 이군(二軍)을 편성하여 자기는 직접 상군을 거느리고, 세자 신생으로 하여금 하군을 거느리게 하여, 대부 조숙과 필만(畢萬)을 인솔하고 경(耿), 곽(霍), 위(魏) 등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헌공은 조숙에게 경 땅을 주고, 필만에게 위 땅을 주어 채읍으로 삼게 했다. 태자 신생의 공이 더욱 높아져 여희의 시기가 더욱 심해져서, 신생을 해칠 모의가 한결 깊고 독해졌다. 이 일은 한쪽으로 미뤄놓자.
卻說,楚熊囏熊惲兄弟,雖同是文夫人所生,熊惲才智勝於其兄,為文夫人所愛,國人亦推服之。熊囏既嗣位,心忌其弟,每欲因事誅之,以絕後患。左右多有為熊惲周旋者,是以因循不決。熊囏怠於政事,專好遊獵,在位三年,無所施設。熊惲嫌隙己成,私畜死士,乘其兄出獵,襲而殺之,以病薨告於文夫人。文夫人雖則心疑,不欲明白其事,遂使諸大夫擁立熊惲為君,是為成王。以熊囏未嘗治國,不成為君,號為「堵敖」,不以王禮葬之。任其叔王子善為令尹,即子元也。子元自其兄文王之死,便有篡立之意。兼慕其嫂息媯,天下絕色,欲與私通。
한편, 초나라의 웅간(熊囏), 웅운(熊惲) 형제는 비록 초문왕의 부인 식규의 소생이었으나, 웅운은 재주와 지혜가 형보다 뛰어나서 식규의 총애를 받았고, 초나라의 사람들도 역시 존경하고 따랐다. 웅간이 이미 초나라 군주의 자리를 이어받자 마음속으로 그 동생을 시기하여 항상 트집을 잡아 죽여서 후환을 끊으려고 했다. 그러나 좌우에 웅운을 위해 주선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서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웅간은 정사에 태만하고 오로지 놀이와 사냥에만 빠져 재위 3년 동안 이루어 놓은 일이 없었다. 웅운은 형을 혐오하여 몰래 자객을 양성하여 형이 사냥을 나간 틈을 타 웅간을 습격하여 살해했다. 그리고 웅간이 병으로 죽었다고 문부인(식규)에게 고했다. 문부인이 비록 마음에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그 일을 명백히 밝히려 하지 않고, 즉시 여러 대부들을 시켜 웅운을 초왕으로 옹립하게 했다. 이가 초성왕(楚成王)이다. 웅간은 나라를 다스렸다고 말할 수 없어 선군으로 대우하지도 않고 도오(堵敖)라고 불렀으며 왕의 예절로 장사지내지도 않았다. 초성왕은 숙부 왕자 선(王子善)을 영윤으로 삼았다. 왕자 선의 자는 자원(子元)이다. 자원은 그의 형인 초문왕이 죽자 곧 왕위를 찬탈할 뜻을 품고 있었다. 또한 천하절색인 형수 식규를 사모하여 사통하고자 했다.
況熊囏熊惲二子,年齒俱幼,自恃尊行,全不在眼,只畏大夫鬥伯比正直無私,且多才智,故此不敢縱肆。至是,周惠王十一年,鬥伯比病卒。子元意無忌憚,遂於王宮之旁,大築館舍,每日歌舞奏樂,欲以蠱惑文夫人之意。文夫人聞之,問侍人曰:「宮外樂舞之聲何來?」侍人曰:「此令尹之新館也。」文夫人曰:「先君舞矛,以習武事,以征諸侯,是以朝貢不絕於庭。今楚兵不至中國者十年矣。令尹不圖雪恥,而樂舞於未亡人之側,不亦異乎?」侍人述其言於子元。子元曰:「婦人尚不忘中原,我反忘之;不伐鄭,非丈夫也。」
게다가 웅간, 웅운 형제가 나이가 모두 어려, 스스로를 높여 자만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 오만하게 굴었다. 단지 대부 투백비(鬪伯比)가 정직하고 사심없이 공정할 뿐만 아니라 재능과 지혜가 많아서 감히 제멋대로 하지 못했다. 주혜왕(周惠王) 11년(기원전 666년)에 투백비가 병이 들어 죽었다. 이에 아무도 거리낄 사람이 없게 된 자원은 마침내 왕궁 옆에 관사를 크게 짓고, 매일 노래 부르고 춤추며, 악기를 타게 하여 문부인 식규의 마음을 끌려고 했다. 문부인이 그 소리를 듣고 시종에게 묻기를, “궁 밖의 노래와 악기 소리는 어디서 나는 것인가?” 하니, 시종이 말하기를, “이 소리는 영윤이 새로 지은 관사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했다. 문부인이 말하기를, “선군께서는 창을 들고 춤을 추어 무예를 닦아 제후들을 정벌하여 초나라 조정에는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 초나라 군사가 중원에 나가보지 못한지가 10년인데, 영윤이 그 수치를 설욕하지 않고, 미망인 옆에서 노래와 춤을 일삼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닌가?” 했다. 시종이 그 말을 자원에게 전하자 자원이 말하기를, “부인께서 아직 중원을 잊지 못하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정나라를 정벌하지 못한다면 나는 장부가 아니다.”라고 했다.
遂發兵車六百乘,自為中軍,鬥御疆鬥梧建大旆為前隊,王孫游王孫嘉為後隊。浩浩蕩蕩,殺奔鄭國而來。鄭文公聞楚師大至,急召百官商議。堵叔曰:「楚兵眾盛,未可敵也,不如請成。」師叔曰:「吾新與齊盟,齊必來救,且宜堅壁以待之。」世子華,年少方剛,請背城一戰。叔詹曰:「三人之言,吾取師叔。然以臣愚見,楚兵不久自退。」鄭文公曰:「令尹自將,安肯退乎?」叔詹曰:「自楚加兵人國,未有用六百乘者。公子元操必勝之心,欲以媚息夫人耳。夫求勝者,亦必畏敗。楚兵若來,臣自有計退之。」
즉시 전차 600대를 동원하여 스스로 중군대장이 된 자원(子元)은 투어강(鬥御疆)과 투오(鬥梧)를 전대로 삼아 대장기를 앞세워 진군케 하고, 왕손유(王孫遊)와 왕손가(王孫嘉)를 후대로 삼아 호호탕탕하게 정나라를 향하여 쇄도했다. 초나라 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정문공은 급히 백관을 불러 그 대책을 상의했다. 도숙(堵叔)이 말하기를, “초나라 군사들의 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습니다. 화의를 청하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했다. 사숙이 말하기를, “우리가 새로이 제나라와 회맹을 했으니, 제나라는 반드시 구원병을 보낼 것입니다. 마땅히 굳게 지키고 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했다. 세자 화(華)는 나이가 어리고 아주 성질이 굳세어서 성에 의지하여 일전을 하겠다고 청했다. 숙첨이 말하기를, “세 사람의 말 중에서 저는 사숙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초나라 군사들은 오래지 않아서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 했다. 정문공이 말하기를, “초나라 영윤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군사를 끌고 쳐들어왔는데 어찌 스스로 물러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니, 숙첨이 말하기를, “초나라가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지만 6백 대의 전차를 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자 원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을 가진 것은 식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무릇 필승을 바라는 자는 역시 패전도 두려워합니다. 초나라 병사들이 쳐들어오면 신에게는 물리칠 수 있는 계책이 있습니다.” 했다.
正商議間,諜報「楚師斬桔柣關而進,已破外郭,入純門,將及逵市。」堵叔曰:「楚兵偪矣,如行成不可,且奔桐邱以避之。」叔詹曰:「無懼也!」乃使甲士埋伏於城內,大開城門,街市百姓來往如常,並無懼色。鬥御疆等前隊先到,見如此模樣,城上絕無動靜,心中疑惑;謂鬥梧曰:「鄭閒暇如此,必有詭計,哄吾入城。不可輕進,且待令尹來議之。」遂離城五里,扎住營寨。須臾子元大兵已到,鬥御疆等稟知城中如此。子元親自登高阜處以望鄭城。忽見旌旗整肅,甲士林立。看了一回,嘆曰:「鄭有『三良』在,其謀叵測!萬一失利,何面目見文夫人乎?更探聽虛實,方可攻城也。」
정문공이 대책을 의논하고 있는데 첩자가 보고하기를, “초나라 군사가 길질관(桔柣關)을 무찌르고 진군하여 신정성 외곽을 이미 돌파하고 순문(純門)에 들어와서 장차 큰길에 진입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했다. 도숙이 말하기를, “초나라 군사들이 가까이 왔으니 화의를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동구(桐邱)로 잠시 피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숙첨이 말하기를,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하고, 즉시 무장병을 성내에 매복시키고 성문을 활짝 열어 놓은 후 시중의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운 기색 없이 평상시처럼 왕래하도록 했다. 투어강 등의 전대가 먼저 도달하여 성안의 모양을 살펴보니 성 위에는 아무 움직임이 없어 마음속에 의심이 일어나서 투오에게 말하기를, “정나라가 이렇게 한가하니 아마도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를 속여 성안으로 불러들이려는 것이니 경솔하게 진격할 수는 없다. 영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의논해야겠다.” 하고, 즉시 군사들을 물려 성 밖 5리에 영채를 세웠다. 얼마 후에 자원이 대군을 이끌고 도착하니, 투어강 등이 정나라 도성 안이 이러하다고 자원에게 보고했다. 자원이 친히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정나라 도성 안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정나라 도성 안의 깃발이 정연해지고 무장한 군사들이 숲처럼 도열해 있었다. 이것을 한번 본 자원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정나라에 삼량(三良)이 있다고 하던데 그 지모를 측량할 수 없구나! 만일 내가 이기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문부인을 볼 수 있으리오! 다시 정나라의 허실을 정탐한 후에 성을 공격해야 되겠다.”고 했다.
次日,後隊王孫游遣人來報說:「諜探得齊侯國宋魯二國諸侯,親率大軍,前來救鄭。鬥將軍等不敢前進,特候軍令,準備迎敵。」子元大驚,謂諸將曰:「諸侯若截吾去路,吾腹背受敵,必致損折。吾侵鄭及於逵市,可謂全勝矣。」乃暗傳號令,人銜枚,馬摘鈴,是夜拔寨都起。猶恐鄭兵追趕,命勿撤軍幕,仍建大旆,以疑鄭人。大軍潛出鄭界,乃始鳴鐘擊鼓。唱凱歌而還。先遣報文夫人曰:「令尹全勝而回矣!」夫人謝曰:「令尹若能殲敵成功,宜宣示國人,以彰明罰,告諸太廟,以慰先王之靈。未亡人何與焉?」子元大慚。楚王熊惲,聞子元不戰而還,自是有不悅之意。
다음날, 후대의 왕손유가 사람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첩자가 탐지하기를, 제환공이 송나라와 노나라의 제후들을 이끌고 정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투장군 등은 전진하지 말고 군령을 기다려서 적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오.” 했다. 자원이 크게 놀라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제후들의 연합군이 만약 우리의 퇴로를 끊으면 우리는 앞뒤에서 적을 맞게 되어 반드시 꺾이고 말 것이다. 내가 이미 정나라를 공격하여 도성의 큰 거리에 이르렀으니 가히 싸움에서 완전히 이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즉시 비밀리에 군령을 내려 군사들에게 함매(銜枚)하고, 말방울을 떼어내게 하여 그날 밤으로 진영을 뽑아 모두 일어났다. 하지만, 정나라 군사들이 추격할까 걱정되어 군막을 걷지 않고 큰 기를 세워놓아 정나라 군사들을 속이려고 했다. 초나라 대군이 가만히 정나라 경계를 벗어나자 자원은 즉시 명을 발하여 종을 울리고 북을 쳐 개선가를 부르면서 돌아왔다. 자원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문부인에게 보고하기를, “영윤께서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왔습니다.” 하니, 문부인이 감사하며 말하기를, “영윤께서 만약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면 마땅히 나라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싸움 중에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에게는 벌을 주며, 태묘에 고하여 선왕들의 혼령을 위로하여야 하거늘, 이 미망인과 무슨 상관입니까?” 했다. 자원이 매우 부끄러워했다. 초왕 웅운은 자원이 싸우지도 않고 되돌아온 것을 알고 이때부터 그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卻說,鄭叔詹親督軍士巡城,徹夜不睡。至曉,望見楚幕,指曰:「此空營也,楚師遁矣。」眾猶未信,問:「何以知之?」叔詹曰:「幕乃大將所居,鳴鉦設儆,軍聲震動。今見群鳥棲噪於上,故知其為空幕也。吾度諸侯救兵必至,楚先聞信,是以遁耳!」未幾,諜報:「諸侯救兵果到,未及鄭境,聞楚師已去,各散回本國去了。」眾始服叔詹之智。鄭遣使致謝齊侯救援之勞。自此感服齊國,不敢懷貳。再說,楚子元自伐鄭無功,內不自安,篡謀益急。欲先通文夫人,然後行事。適文夫人有小恙,子元假稱問安,來至王宮。遂移臥具寢處宮中,三日不出。家甲數百,環列宮外。
한편, 정나라의 숙첨은 친히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안을 순시하면서 밤을 새우며 잠을 자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 초나라 막사를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것은 빈 진영이다. 초나라 군사들은 물러갔다.” 했다. 여러 사람이 믿지 못하고 묻기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니, 숙첨이 말하기를, “저 군막은 대장이 묶는 곳이다. 징을 울리고 경계하여 군사들의 소리가 진동해야 하는데, 지금 보니 뭇 새들이 군막 위에서 지저귀고 있다. 그래서 군막이 비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짐작건대 제후들의 구원병이 틀림없이 도착하여, 초나라 장수가 먼저 그 소식을 듣고 물러갔을 것이다!” 했다. 얼마 후 첩자가 보고하기를, “제후들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아직 정나라 경계에 이르지 않았는데, 초나라 군사가 이미 물러갔다는 것을 알고 각각 흩어져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했다. 여러 사람이 숙첨의 지혜에 감복했다. 정나라가 사신을 제환공에게 보내어 구원해 준 데 대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후로 제나라에 감복한 정나라는 감히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한편, 초나라의 자원은 정나라를 쳤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으므로 불안한 마음이 되어, 왕위를 찬탈할 생각이 더욱 급해졌다. 먼저 문부인을 사통한 다음에 거사를 일으키려고 했다. 마침 문부인이 몸이 편치 않아서 자원이 병문안을 한다는 핑계로 왕궁에 들어갔다. 곧 침구를 궁중의 침실로 옮기고 사흘 동안 나오지 않았으며, 가병 수백 명을 동원하여 궁궐을 에워쌌다.
大夫鬥廉聞之,闖入宮門,直至臥榻。見子元方對鏡整鬢,讓之曰:「此豈人臣櫛沐之所耶?令尹宜速退!」子元曰:「此吾家宮室,與射師何與?」鬥廉曰:「王侯之貴,弟兄不得通屬。令尹雖介弟,亦人臣也。人臣過闕則下,過廟則趨,咳唾其地,猶為不敬,況寢處乎?且寡夫人密邇於此,男女別嫌,令尹豈未聞耶?」子元大怒曰:「楚國之政,在吾掌握,汝何敢多言!」命左右梏其手,拘於廡下,不放出宮。文夫人使侍人告急於鬥伯比之子鬥穀於菟,使其入宮靖難。鬥穀於菟密奏楚王,約會鬥梧鬥御疆及其子鬥班,半夜率甲以圍王宮,將家甲亂砍,眾俱驚散。
대부 투렴은 소식을 듣고 궁문을 밀치고 들어와 곧바로 침실로 들어가서, 자원이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빗는 것을 보고 꾸짖기를, “어찌하여 신하된 자로서 이곳에서 머리를 감고 빗질을 합니까? 영윤은 빨리 물러가십시오.” 했다. 자원이 말하기를, “이곳은 우리 집안의 궁실인데 어찌 사사(射師 ; 활쏘기 담당)가 간여하느냐?” 하니, 투렴이 말하기를, “왕의 높은 지위는 형제라도 두루 나눌 수 없습니다. 영윤께서 비록 선왕의 동생이지만 그래도 신하입니다. 신하된 자는 궁궐 앞을 지날 때 반드시 말에서 내려야 하고, 태묘 앞을 지날 때 달려가거나 기침을 하고 침을 뱉거나 하면 모두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하물며 궁궐에서 침식을 한단 말입니까? 또한 선왕의 부인께서 이곳에서 아주 가까이 계시고, 남녀가 유별해야 하거늘 영윤께서는 이것도 모르십니까?” 했다. 자원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초나라의 국정은 모두 내가 장악하고 있는데 네가 어찌 감히 말이 많으냐?” 하고, 좌우에 명하여 투렴의 손을 결박하여 궁궐의 골방에 가두게 하고 궁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문부인이 알고 시종을 시켜 투백비의 아들인 투곡오토(鬪穀於菟)에게 급함을 고하게 하고 궁궐에 들어와 평정하도록 했다. 투곡오토가 초왕에게 비밀리에 아뢰고, 투오, 투어강과 그 아들 투반(鬪班)을 모이게 하여 밤중에 무장병을 거느리고 왕궁을 포위하여 자원의 가병들을 어지러이 베니, 가병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다.
子元方擁宮人醉寢,夢中驚起,仗劍而出。恰遇鬥班,亦仗劍而入。子元喝曰:「作亂乃孺子耶!」鬥班曰:「我非作亂,特來誅亂者耳。」兩下就在宮中爭戰。不數合,鬥御疆鬥梧齊到。子元度不能勝,奪門欲走,被鬥班一劍砍下頭來。鬥穀於菟將鬥廉開梏放出,一齊至文夫人寢室之外,稽首問安而退。次早,楚成王熊惲御殿,百官朝見已畢,楚王命滅子元之家,榜其罪狀於通衢。髯翁論公子元欲蠱文夫人之事,有詩曰:「堪嗟色膽大於身,不論尊兮不論親。莫怪狂且輕動念,楚夫人是息夫人。」
그때 자원이 궁녀를 안고 취하여 자다가 꿈결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놀라 일어나 칼을 들고 나왔다. 그때 마침 투반이 칼을 들고 들어오다가 자원과 마주쳤다. 자원이 크게 소리치기를, “난을 일으킨 놈이 어린 네 놈이냐?” 하니, 투반이 말하기를, “내가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특별히 와서 난을 일으킨 놈을 죽이려 한다.” 했다. 두 사람이 궁중에서 싸웠다, 몇 합을 겨루기도 전에 투어강과 투오가 일제히 도착하니, 자원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문을 벗어나 달아나려고 했다. 그 틈에 투반이 한칼로 자원의 목을 쳤다. 투곡오토가 투렴을 골방에서 꺼내어 포승을 풀어서 일제히 문부인의 침소 앞에 이르러 머리를 조아려 문안하고 물러났다. 다음날 아침 초성왕 웅운이 어전에서 백관들과 조회를 마친 후, 자원의 집안을 멸하라고 명하고 그 죄상을 시가지 네거리에 방을 붙여 백성들에게 알리게 했다. 염옹이 공자 원이 문부인에게 미혹된 일에 대하여 시를 지어 이르기를, “아, 호색하는 마음이 그 몸보다 더 커서, 왕후의 존귀함도 형수의 친분도 개의치 않았다. 정념으로 날뛰어 난을 꾀했다고 괴이하게 생각지 말라! 초나라 부인은 바로 천하절색 식부인이 아니었던가?” 했다.
卻說,鬥穀於菟之祖曰鬥若敖,娶鄖子之女,生鬥伯比。若敖卒,伯比尚幼,隨母居於鄖國,往來宮中,鄖夫人愛之如子。鄖夫人有女與伯比為表兄妹之親,自小宮中作伴遊耍,長亦不禁,遂成私情。鄖女有孕,鄖夫人方纔知覺,乃禁絕伯比,不許入宮。使其女詐稱有病,屏居一室。及誕期已滿,產下一子,鄖夫人潛使侍人用衣服包裹,將出宮外,棄於夢澤之中。意欲瞞過鄖子,且不欲揚其女之醜名也。伯比羞慚,與其母歸於楚國去訖。其時鄖子適往夢澤田獵,見澤中有猛虎蹲踞,使左右放箭,箭從旁落,一矢不中,其虎全不動撣。
한편, 투곡오토의 조부는 투약오인데, 그는 운(鄖)나라 군주의 딸을 아내로 맞아 투백비를 낳았다. 투약오가 죽고 백비의 나이가 아직 어려서 모친을 따라 운나라에 가서 살았다. 운나라의 궁중에 드나들어 운부인이 마치 자기 아들처럼 사랑했다. 운부인에게 딸이 있었는데 백비와는 내외종간 오빠와 동생이 되는 친척이었다. 두 아이는 어려서부터 친구가 되어 놀면서 자랐다. 장성한 뒤에도 함께 노는 것을 금하지 않아서 마침내 정을 통하여 운녀가 애를 갖게 되었다. 운부인은 그것을 알고 백비에게 궁중 출입을 금했다. 운녀가 병이 들었다고 소문을 내고 방에 숨어 살게 했다. 이윽고 운녀가 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운부인이 아무도 몰래 시종을 시켜 갓난아이를 옷에 싸서 궁 밖으로 내다가 몽택(夢澤)이라는 호수 속 늪지에 버리게 했다. 그렇게 하여 운나라 군주를 속이고 또한 그 딸의 더러운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투백비가 몹시 부끄러워하여 그의 모친과 함께 초나라로 돌아갔다. 그때 운나라 군주가 마침 몽택에 가서, 사냥하다가 호수 속 늪지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호랑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 좌우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했다. 군사들이 쏜 화살은 모두 호랑이 곁에 떨어지고 하나도 맞추지 못했다. 그 호랑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鄖子心疑,使人至澤察之。回報:「虎方抱一嬰兒,喂之以乳,見人亦不畏避。」鄖子曰:「是神物,不可驚之。」獵畢而歸,謂夫人曰:「適至夢澤,見一奇事。」夫人問曰:「何事?」鄖子遂將猛虎乳兒之事,述了一遍。夫人曰:「夫君不知,此兒乃妾所棄也!」鄖子駭然曰:「夫人安得此兒而棄之?」夫人曰:「夫君勿罪。此兒實吾女與鬥甥所生。妾恐污吾女之名,故命侍者棄於夢澤。妾聞姜嫄履巨人跡而生子,棄之冰上,飛鳥以翼覆之,姜嫄以為神,收養成人,名之曰棄,官為后稷,遂為周代之祖。此兒既有虎乳之異,必是大貴人也。」鄖子從之,使人收回,命其女撫養。
운나라 군주가 의아한 생각이 들어 사람을 보내 호수로 가서 살펴보도록 했다. 그 사람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호랑이가 갓난아이를 안고 젖을 빨리고 있는데, 사람을 보고도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했다. 운나라 군주가 말하기를, “호랑이는 신령스런 동물이라 놀라게 하면 안 된다.” 하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다. 운나라 군주가 그 부인에게 말하기를, “몽택에 갔다가 참 기이한 것을 보았소.” 했다. 부인이 묻기를, “어떤 일이었습니까?” 하니, 운나라 군주가 곧 호랑이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일을 자세하게 말했다. 부인이 말하기를, “부군께서는 모르시겠지만 그 아이는 제가 버렸습니다.” 하니, 운나라 군주가 놀라서 말하기를, “부인이 그 아이를 어디서 얻어다가 버렸소?” 했다. 부인이 말하기를, “부군께서 너무 저를 책하지 마십시오. 그 아이는 실은 우리 딸이 조카 투백비와 관계하여 낳았습니다. 제가 딸의 이름이 더럽혀질까 걱정되어 시종에게 명하여 몽택의 늪지에 버리게 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옛날 강원(姜嫄)은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아들을 낳아서 얼음 위에 버렸는데, 날짐승이 날개로 덮어주니, 강원이 신령스런 아기인 줄 알고 다시 거두어 키웠습니다. 이름을 기(棄)라고 하고, 벼슬은 농사일을 관장하는 후직(後稷)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주나라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어린아이도 이미 호랑이가 젖을 먹이는 기이함이 있으니 반드시 큰 귀인이 될 것입니다.” 했다. 운나라 군주가 듣고 사람을 시켜 거두어 오게 하여 딸에게 기르도록 명했다.
踰年,送其女於楚,與鬥伯比成親。楚人鄉談,呼乳曰「穀」,呼虎曰「於菟」。取乳虎為義,名其子曰穀於菟,表字子文。今云夢縣有於菟鄉,即子文生處也。穀於菟既長,有安民治國之才,經文緯武之略。父伯比,仕楚為大夫。伯比死,穀於菟嗣為大夫。及子元之死,令尹官缺。楚王欲用鬥廉,鬥廉辭曰:「方今與楚為敵者,齊也。齊用管仲甯戚,國富兵強。臣才非管寧之流明矣。王欲改紀楚政,與中原抗衡,非鬥穀於菟不可。」百官齊聲保奏:「必須此人,方稱其職。」楚王准奏,遂拜鬥穀於菟為令尹。楚王曰:「齊用管仲,號為仲父。今穀於菟尊顯於楚,亦當字之。」乃呼為子文而不名。周惠王之十三年也。
그 이듬해 운나라 군주는 딸을 초나라로 보내서 투백비와 혼례를 치르게 했다. 초나라 방언에 젖을 곡(穀)이라 하고 호랑이를 오토(於菟)라고 했다. 호랑이가 젖을 먹였다는 뜻을 취해서 아들의 이름을 곡오토(穀於菟)라고 하고, 자는 자문(子文)이라고 했다. 지금도 호북성 운몽현(雲夢縣)에 오토향(於菟鄕)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곧 자문의 탄생지다. 투곡오토가 성장하자 치국안민의 자질을 보여 온갖 경서와 병법에 통달하여 문무를 겸전했다. 그 부친 투백비가 초나라에 벼슬하여 대부가 되었고, 투백비가 죽자, 투곡오토가 그 직을 이어받아 대부가 되었다. 자원이 죽자 영윤의 자리가 비게 되었다. 초성왕이 투렴을 영윤으로 삼고자 했으나 그가 사양하며 말했다. “바야흐로 초나라의 적수는 제나라입니다. 제나라는 관중과 영척을 기용하여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합니다. 신의 재주는 관중과 영척의 재주를 따를 수 없습니다. 왕께서 나라의 정사를 바로 잡아 기강을 세운 뒤에 중원과 겨루시려면 투곡오토가 아니면 안 됩니다.” 했다. 백관이 일제히 추천하기를, “반드시 그 사람이 영윤의 직을 맡아야 합니다.” 했다. 초성왕이 허락하여 마침내 투곡오토를 영윤으로 삼았다. 초성왕이 말하기를, “제나라가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중보(仲父)라고 부르게 했다. 오늘 투곡오토가 초나라에서 귀한 사람이 되었으니 역시 마땅히 자로써 불러야 할 것이다.” 하고, 즉시 자문이라고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때가 주혜왕 13년(기원전 664년)이었다.
子文既為令尹,倡言曰:「國家之禍,皆由君弱臣強所致。凡百官采邑,皆以半納還公家。」子文先於鬥氏行之,諸人不敢不從。又以郢城南極湘潭,北據漢江,形勝之地,自丹陽徙都之,號曰郢都。治兵訓武,進賢任能。以公族屈完為賢,使為大夫,族人鬥章才而有智,使與諸鬥同治軍旅。以其子鬥班為申公。楚國大治。齊桓公聞楚王任賢圖治,恐其爭勝中原,欲起諸侯之兵伐楚。問管仲,管仲對曰:「楚稱王南海,地大兵強,周天子不能制。今又任子文為政,四境安堵,非可以兵威得志也。且君新得諸侯,非有存亡興滅之德,深入人心,恐諸侯之兵,不為我用。今當益廣威德,待時而動,方保萬全。」
자문이 영윤이 된 후에 공공연히 말하기를, “나라의 화근은 모두 군주가 허약하고 신하들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모든 벼슬아치가 녹으로 받은 토지의 절반을 나라에 되돌려 줍시다.” 하고, 자문이 먼저 투씨가 실행하게 하니, 다른 사람들도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영성(郢城)은 남쪽으로 상담(湘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한수(漢水)와 장강(長江)에 의지하여 경치가 빼어난 땅이라 초나라의 도성을 단양(丹陽)으로부터 옮겨 영도(郢都)라고 불렀다. 자문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현사(賢士)를 추천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임용하여 공족 중에서 굴완(屈完)을 어질다고 대부로 삼았다. 또한 투씨 가문의 투장(鬪章)이 재주와 지혜가 있다고 여러 투씨와 함께 군사의 일을 맡아보게 하고, 그 아들 투반을 신읍(申邑)의 수령에 임명하였다.이에 초나라는 크게 다스려졌다. 제환공은 초성왕이 어진 이를 임용하여 나라를 잘 다스린다는 소식을 듣고 중원을 다투지 않을까 걱정하여 제후들의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정벌하고자 관중에게 물었다. 관중이 대답하기를, “초나라가 남쪽에서 왕이라 칭하고 있는데 땅은 넓고 병사들은 강하여 주나라 천자도 제어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또 자문을 임용하여 정사를 맡겨서 국내가 안정되어서 병사를 출동시켜 위엄을 보인다고 해도 그 뜻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주군께서는 이제 막 제후들의 마음을 얻었으므로 존망(存亡)과 흥멸(興滅)의 은혜가 아니면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 제후들의 병사가 말을 듣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위엄과 덕을 더욱 넓혀서 때를 기다려서 움직이는 것이 만전을 기하는 것입니다.” 했다.
桓公曰:「自我先君報九世之仇,剪滅紀國,奄有其地。鄣為紀附庸,至今未服,寡人欲並滅之,何如?」管仲曰:「鄣雖小國,其先乃太公之支孫,為齊同姓。滅同姓,非義也。君可命王子成父率大軍巡視紀城,示以欲伐之狀。鄣必畏而來降。是無滅親之名,而有得地之實矣。」桓公用其策,鄣君果畏懼求降。桓公曰:「仲父之謀,百不失一!」君臣正計議國事,忽近臣來報:「燕國被山戎用兵侵伐,特遣人求救。」管仲曰:「君欲伐楚,必先定戎。戎患既熄,乃可專事於南方矣。」
제환공이 말하기를, “우리 선군 제양공께서 9대의 원수인 기(紀)나라를 멸하여 그 땅을 병합했소. 그런데 장(鄣)나라는 기나라의 부용국인데 지금까지 복종하지 않고 있어 과인이 멸하고자 하는데 어떻겠소?” 하니, 관중이 말하기를, “장나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나 그 선조는 태공의 지손(支孫)이라서 우리 제나라와는 동성입니다. 동성의 나라를 멸하는 행위는 의로운 일이 아닙니다. 주군께서 왕자 성보(成父)에게 명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기성(紀城)을 순시토록 하면서 마치 (장나라를) 정벌하려는 듯이 시위하면 장국은 틀림없이 두려워서 항복을 청해 올 것입니다. 이것은 친척이 되는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오명을 얻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땅을 넓히는 것입니다.” 했다. 환공이 그 계책을 쓰니, 장나라 군주가 과연 두려워하여 항복하기를 청해왔다. 환공이 말하기를, “중보의 계책은 백 가지 중에서 한 가지도 빗나가는 법이 없구나!” 했다. 제나라의 군신들이 조당에 모여 나라의 정사에 대해 상의를 하고있던 중에 갑자기 근시가 알리기를, “산융(山戎)의 침략을 받게 된 연나라가 사람을 보내와 구원을 요청합니다.” 했다. 관중이 말하기를, “주군께서 초나라를 정벌하시려면 반드시 먼저 북쪽 오랑캐를 평정하십시오. 북쪽 오랑캐의 근심이 사라져야 오로지 남방의 일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했다.
畢竟桓公如何服戎,且聽下回分解。
마침내 제환공은 북쪽 오랑캐를 어떻게 정복할까. 다음 회를 들으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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