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들판
농경민의 후예들, 벼를 거두다
옛날엔 수십 명이 며칠 하던 일 하룻만에
새들이 떨어진 이삭을 쪼며 겨울을 날 것
논밭이 쉬면 우리도 쉬는 이 사이클이 좋아
앞으로 몇차례 더 빈 들판을 볼 수 있을까
김혜형 전업농부·작가
헤어리베치 씨를 뿌리다
추수를 한 달여 앞두고 헤어리베치 씨앗을 가져가라는 연락이 왔다. 이맘때면 지자체에서 친환경 농가에 헤어리베치 씨앗을 무료로 보급한다. 헤어리베치는 콩과식물로, 질소를 고정해 지력을 높이는 풋거름작물이다. 토종 식물인 갈퀴나물과 비슷한데 갈퀴나물보다 꽃도 일찍 피고 털도 많아서 영어로 hairy vetch, 우리말 이름으론 ‘털갈퀴덩굴’이라 한다. 유기농 벼농사엔 헤어리베치 이모작이 필수 조건이다.
옆사람이 비료살포기를 등에 지고 헤어리베치 씨앗을 뿌리고 있다.
벼 베기 열흘 전쯤 헤어리베치 씨앗을 벼포기 위로 뿌린다. 수확 직전의 마른 논바닥으로 헤어리베치 씨앗이 떨어진다. 벼를 수확한 후나 이듬해 봄에 뿌려도 되는데, 그럴 땐 기계로 로터리를 쳐서 씨앗을 흙으로 덮어줘야 한다. 우리는 기계 작업을 두 번 하고 싶지 않아서 벼를 베기 전에 파종한다. 추수와 동시에 볏짚을 썰어주면 헤어리베치는 볏짚 이불 아래서 겨울을 난 후 새봄 황량한 들판을 푸르게 덮으며 자라난다.
5월에 무성하게 자란 헤어리베치를 경운기로 갈아 땅으로 돌려주었다.
헤어리베치는 덩굴성 식물이다. 5월에 짙은 보라색 꽃을 피우는데, 이때가 헤어리베치를 벨 시기이다. 모내기 2~3주 전인 5월 중순, 푸르게 잘 자란 헤어리베치를 경운기나 트랙터로 갈아 땅으로 돌려준다. 그 땅에 물을 대어 풀을 잘 썩힌 후 6월 초순 모내기를 한다. 헤어리베치는 질소 함량이 높아 화학비료를 대체하는 효과가 있다.
헤어리베치 씨앗까지 뿌렸으니 추수 준비는 마친 셈이다. 이제 농협에 가서 농작물 재해보험 사고 접수만 하면 된다. 예전엔 농작물 재해보험이 있는 줄도 몰랐다. 병해가 심해 수확량의 절반밖에 못 거뒀을 때도 농약을 안 치니 어쩔 수 없다고만 여겼다. 올해는 농작물 재해보험에 처음 가입했으니 수확하기 전 병해 평가를 받아보기로 했다.
농작물 재해보험 손해평가사가 우리 논에서 벼를 채취하고 있다.
농작물 재해보험 손해평가사가 우리 논에 왔다. 깨씨무늬병과 잎집마름병의 분포 면적, 채취한 벼의 포기당 무게, 벼알의 함수율 등을 측정하여 피해 비율을 정한다고 한다. 벼포기가 너무 빈약하고 벼알의 양도 적다 하시기에, 유기농 수확량은 관행농에 비해 70~80% 수준인데 올핸 병까지 와서 더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자부담 20%를 제하면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보험에 들지 않은 것보다는 낫겠지 싶다.
추수 직전의 벼.
추수, 옛사람의 농사를 떠올리다
드디어 추수 날이다. 추수할 논의 입구 쪽 벼를 낫으로 미리 베어놓았다. 콤바인의 바퀴 궤도에 벼포기가 밟히지 않도록 하는 조치다. 이씨 어른께서 콤바인을 몰고 우리 논으로 오셨다. 모내기는 이앙기로 우리가 직접 하지만 벼 베기는 해마다 어른께 부탁한다. 우리 농사 규모에 콤바인 같은 대형 농기계를 갖출 순 없다. 1년에 한 번 쓰는 기계이니 추수 때 비용을 내고 빌리는 게 합리적이다. 이씨 어른께선 본인 농사 외에 이웃들의 추수도 해주면서 소규모 건조장까지 운영하고 계신다. 수확철은 어른한테 가장 바쁜 시기이다.
추수 전, 콤바인이 들어갈 자리를 미리 낫으로 베어놓는다.
기계가 논으로 들어간다. 앞에선 벼를 베어들이고 뒤쪽으론 볏짚을 파쇄해서 내놓는다. 속도와 효율이 대단하다. 허리 숙여 낫으로 벼를 베고, 홀태로 벼알을 훑고, 햇볕에 벼를 펼쳐 며칠씩 말리고, 일일이 손과 발로 방아를 찧었던 옛사람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뒤로 나자빠질 것이다. 사람 손으로 하던 일을 기계가 맡으면서 농사 과정에 들이는 노동량은 획기적으로 줄었다. 옛날엔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며칠씩 걸리던 일이 지금은 기계가 하루 만에 해치운다.
콤바인 덕에 추수 속도가 빠르다.
농경사회의 옛 풍경, 옛사람들의 농사를 상상한다. 도시의 빌딩 사무실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릴 때는 한 번도 떠올려본 적 없는 장면이다. 속한 공간과 노동의 내용이 달라지니 상상의 범주도 달라진다. 과거의 내게 ‘옛사람’은 책으로 만난 역사 인물들, 예컨대 역사기록 속에 등장하는 왕족과 선비들이었다. 지금 내가 떠올리는 ‘옛사람’은 논밭에서 혹독한 노동을 감당했던 노비와 상민들이다. 역사책에 이름 한 줄 올릴 수 없었던, 그러나 온몸으로 한 시대를 떠받쳤던 일꾼들 말이다.
병해가 왔든 수확량이 적든 그냥 받아들이는 마음이 된다.
파종기도 이앙기도 트랙터도 콤바인도 없던 시절, 뼈가 닳도록 노동하고, 병해충과 가뭄에 애태우고, 포악한 관리에 시달리고, 흉년의 굶주림 속에서도 자식들 먹여 살리려 몸부림쳤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갈퀴손으로 일구었던 논밭은 지금 우리의 터전이 됐다. 우리가 떠난 후에도 이 땅은 벼를 계속 키워낼까?
사회의 고도화와 기술력의 진보에 따라 쌀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기계와 연료는 달라졌지만, 몇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벼의 생육 과정은 다를 게 없고 농사지은 곡식을 먹고 사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농경사회를 살았던 옛사람들의 일상이 나의 일상에 겹쳐 보이는 것은 나 역시 갈 데 없는 농경민의 후예라서일 것이다.
콤바인이 수확한 벼를 트랙터의 적재함으로 쏟아붓고 있다.
벼 베기 작업은 2인 1조로 움직인다. 콤바인을 운전하는 사람과 곡물 적재함을 이동시키는 사람. 어른께서 콤바인으로 벤 벼를 트랙터의 곡물 적재함에 쏟으면 어른의 아들이 트랙터를 건조장으로 이동시킨다. 추수하는 동안 이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된다.
어른의 아들은 3년 전 논을 메워 시설을 짓고 블루베리를 심었다. 올해 첫 수확을 했는데 다행히 작황이 좋아 시설비를 건졌다고 한다. 블루베리 농장 옆에는 토란밭이 있다. “토란 일이 많이 힘들죠?” 물으니 “일일이 껍질 벗기느라 손이 너무 많이 가요. 힘드네요,” 한다. 내가 안쓰러워하니 그가 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한다. “의득 형 여름에 풀 매느라 그리 고생했는데… 올해는 나락이 너무 안 나왔네요.” 아닌 게 아니라 수확 마친 후 나락 무게를 재보니 작년에 비해 25%나 줄었다. 옆사람 표정이 좋지 않다. 어쩌랴, 이미 끝난 일. 내년에 잘 지으면 되지.
곡물 건조기에서 건조를 마친 벼가 나오고 있다.
갓 거둔 벼는 수분 함량이 높다. 수확한 벼를 바로 도정하면 쌀알까지 으깨진다. 반드시 벼를 말려야 하는 이유다. 벼를 말릴 땐 적정 시간, 적정 온도, 알맞은 함수율로 건조해야 쌀이 손상되지 않는다. 건조장에서 연료를 아끼려고 고온으로 빠르게 건조하면 도정할 때 싸라기가 많이 나오고 쌀알에 실금이 가서 밥이 푸석하고 맛없어진다. 설정 온도 35~40℃에서 곡물 함수율 14~15%가 되도록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말려야 한다.
햇볕에 벼를 말리고 있다.
건조장에서 말리지 않고 햇볕에 말리는 방법도 있다. 벼의 양이 많지 않으면 건조비도 아낄 겸 햇볕 건조를 한다. 농사 양이 많지 않았을 땐 나락을 햇볕에 널어 말렸다. 길가에 검은 망을 깔고 벼를 펼쳐 고무래로 여러 차례 골을 내가며 말리는데, 가을 햇볕이 좋으면 2~3일 안에 건조가 끝난다. 때아닌 비라도 오면 비상이 걸리지만 말이다. 햇볕 건조는 비용 대신 노고와 시간이 든다. 건조가 끝난 벼를 일일이 삽으로 퍼서 수십 개의 포대에 담아 불끈불끈 들어 올려 트럭에 싣는 일은 너무나 힘들다. 건조장에서라면 톤백째 지게차로 나르면 끝날 일인데.
햇볕에 잘 마른 벼. 벼알의 빛깔이 따뜻하고 곱다.
한 포대에 얼마나 받소?
아침 6시 반, 해가 뜨기도 전에 정미소로 간다. 정미소 사장님네 출가한 딸들과 아들들, 여러 명의 일꾼들까지 모여 정미소가 북적북적하다. 정미소 앞길엔 벼가 담긴 톤백들이 늘어서 있다. 지게차가 왔다갔다 톤백을 실어 나른다. 정미소 안어른께선 새벽밥을 지어놓고 사람들을 방으로 불러들인다. “들어와서 아침 먹어요!” 쌀 찧으러 온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강권에 못 이겨 정미소 집 안방으로 들어가면 따뜻한 아침상이 기다리고 있다. 안주인과 딸들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과 반찬들을 밥상 위로 나른다.
이른 아침 정미소 앞, 벼가 담긴 톤백들이 줄 서서 도정을 기다리고 있다.
추수철 원등정미소엔 먹을 게 넘친다. 비타민 음료, 믹스커피, 막걸리뿐 아니라 건빵, 새우깡, 삶은 계란 등이 가득 쌓여 있다. 따끈따끈한 호박시루떡, 가래떡, 절편도 준비되어 있다. 누구든 오며 가며 내키는 대로 집어먹는다.
윤씨 아저씨가 들어오셔서 테이블에 앉으니 안주인께서 자연스럽게 냉장고에서 맥주 2병을 꺼내오신다. 옆사람과 아저씨가 맥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니 안주인께서 “더 줘?” 하시곤 또 맥주 2병을 내온다. 이번엔 안방 문이 열리더니 딸이 고개를 내민다. “후라이 해줘요?” 윤씨 아저씨가 손사래를 치며 달아난다. “나, 가네!” 열린 공간, 넘치는 인심, 흔한 정미소 풍경이다.
원등정미소 전경.
정미기를 통과한 우리 벼가 쌀포대로 바뀌어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나온다. 일하는 분이 포대를 어깨로 받아 파렛트 위에 내려서 쌓는다. 옆에 계신 할머니께서 슬며시 내게 물으신다. “한 포대에 얼마나 받소?” 할머니의 쌀값을 짐작하기에 차마 대답을 못하고 우물거리는데 곁에 선 농부께서 한마디 하신다. “아이고, 여름 내내 날마다 논에 들어가 징허게 풀 매더만! 적게 받고 말지 나는 그 짓 못허네.”
정미기에서 쌀포대가 나오고 있다.
정미소 사장님께 올해 쌀값을 물어보니 20kg 한 포대에 55,000원이라 하신다. 쌀값에 연동되어 도정비가 정해지니 사장님의 기준은 신뢰할 만하다. 도매가는 이보다 훨씬 낮을 것이다. 기업은 생산비가 상승하면 제품 가격을 올려 이익을 보전하는데, 농민은 자기가 생산한 쌀의 가격을 자기가 결정하지 못한다. 외식 물가가 일인당 1만 원이 넘은 지 오랜데 밥 한 공기(약 100g) 가격은 300원도 안 된다. 모든 물가가 끝없이 오르고 생산비도 계속 오르는데 쌀값은 여전히 제자리다.
우리 쌀은 추곡 수매에 내지 않는다. 우리는 직거래로 팔고, 값도 직접 정하고, 관행농보다 비싸게 받는다. 민망하고 죄송해서 할머니께 답을 못 드린 이유다. 그러나 나의 죄송함은 부당하고 서글프다.
추수 끝난 빈 들판.
추수가 끝난 들판은 고요하다. 새들이 떨어진 이삭을 쪼며 겨울을 날 것이다. 논밭이 쉬면 우리도 쉰다. 농부가 된 후 겨울이 좋아졌다. 직장 다닐 땐 한 계절을 쉰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지금은 작물의 때와 철에 맞춰 움직이고 수확 후엔 긴 휴식에 들어간다. 이 사이클이 마음에 든다.
한 해가 간다. 싹트고 자라서 열매 맺고 사라지는 일은 자연스럽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 내가 숨 쉬는 현재, 내 흔적조차 없을 미래… 유장한 시공간의 흐름 속에 한 점으로 잠깐 머물다 가는 개체일 뿐이라는 생각이 분명해진다. 노동하고 거두고 먹고 사랑하고 돌보고 연민하는, 이것만이 전부라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몇 차례나 새봄을 맞이하고 추수 끝난 들판을 바라볼 수 있을까. 짧은 하루, 짧은 한 해, 짧은 인생의 순간들이 아깝고 귀하다.
(농사만감 연재를 이것으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