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처음 맞이하는 주일 아침이다. 숙소에서 제공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주일엔 상점들이 대부분 문을 닫아서 사먹을데가 마땅히 없다는 말을 듣고 어제 보아둔 자판기에서 물과 과자라도 챙겨가려고 갔는데 카드는 물론이고 지폐도 안받는 자판기였는데 동전이 물 두병 뽑고 조그만 소보르빵 한개 뽑으니 없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편의점 하나 정도는 있을 규모의 마을에 카페 외에는 뭘 사먹으려도 살만한 곳이 없다. 오늘은 최근 며칠간 퍼부은 집중호우로 불어난 시냇물이 래프팅이라도 하면 좋을 속도로 흐르는 내를 따라 걷는 길이었다. 지난 이틀간 걸었던 산길처럼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그다지 심하지 않고 비교적 평탄한 길이었는데 날씨도 좋고 흐르는 물소리도 기분좋은 산책로 같았다. 간혹가다 냇물이 범람하여 떠내려온 나뭇가지들이 나무사이에 걸려 수북하게 쌓인 흔적들이 보이곤 했는데 며칠만 일찍 왔으면 이 길도 폐쇄되고 장대비를 흠뻑 맞으며 아스팔트길을 걸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서울을 출발하면서 읽은 블로그에 그날 피레네를 넘는 사진이 올라왔는데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는 가운데 길을 걷는 장면이었다. 서울을 출발 할때부터 모든 일들이 순조로웠다. 철도파업으로 인해 약간의 일정이 틀어지긴 했지만 오히려 파업덕분에 일정과 비용이 절약되었다. 까미노 첫날 이슬비가 하루종일 내려 좀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하루이틀 전에 걸은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꽃길을 걸은 셈이다. 짐을 동키로 보낸 덕분에 몸은 가볍고 길도 평탄하지만 내리막길에서 무릎이 많이 아팠다.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대에 밀밭이나 목장이 보이곤 했는데 특이하게 이곳은 주로 말을 키우고 있었는데 아마 소나 양처럼 식용으로 키우는 듯 보여 어쩌면 어제 먹은 갈비가 말고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들었다. 세시간쯤 걸었을때 어느 마을 입구에 열려있는 카페를 발견했는데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로 북적거렸다. 밥도 못사먹고 쫄쫄 굶는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호박을 썰어놓은 오믈렛 한조각에 감자샐러드를 넣은 샌드위치 한개와 커피와 콜라 한잔이 감사했다. 서로 다른 곳에서 흘러온 시냇물이 합해져 강물을 이룰때쯤 강변에 조성된 공원과 산책로에 가족단위로 캠핑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기, 조깅또는 산책을 하는 팜플로냐 시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큰 소리를 내며 굽이쳐 흐르는 강물위를 가로질러 시내로 들어가는 다리위 넓직한 난간위에 순례자들이 잠시 걸터앉아 쉬고 있었다. 강변쪽 도로와 다리를 건너는 양갈래 길에서 어느쪽으로 가야 하는지를 놓고 딸아이와 작은 다툼이 있었다. 다리를 건너기전 표지판에 화살표를 본것 같아 가서 보려했는데 딸아이는 자기가 이미 다 검색해서 알고 있는데 자기말을 믿지않고 내 맘대로 하려고 한다면서 기분나쁘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경향이 있다면서 그 점을 고쳤으면 좋겠다고 난 네가 하는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하는 거냐고 그럼 여태까지 자기가 다 검색하고 준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 엄마는 자기를 믿지 않냐고 난 너를 믿기 때문에 지금까지 너에게 모든걸 다 맡겨왔고 걱정않고 따라왔는데 그게 널 믿지 않는거냐고 그리고 그 길로 가야한다는게 아니고 한번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도 못기다려 주냐고 네가 옳은 정보를 주었어도 내가 확인하면 안되는거냐고 그러길 바라는건 너희들 키울때 엄마 아빠가 정한대로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는거나 똑같은 거라고 사실 나도 아이들 키울 때 그걸 못기다려 준 적이 많았다. 다솜이가 왼손 오른손을 아무리 알려줘도 구분을 못해서 마구 화를 냈었고 미사 중학생때 수학점수가 징그럽게 안나와서 화내기도 했었다. 아이들은 내가 가르쳐서 자라는게 아니라 스스로 자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프랑스 파리 이후로 만난 가장 큰 도시를 진흙을 잔뜩 묻힌 발로 가로질러 구 도심지에 이르렀을때 오래된 성당을 개조하여 만든 무니시팔(공립알베르게)을 찾아 여장을 풀었는데 이곳은 침대와 화장실과 샤워실을 남녀구분없이 사용해서 적응하기가 어렵다. 내 침대 바로 옆에는 미국에서 오신 아저씨가 주무시는데 딸아이 샤워하는 동안 침대와 베개 시트를 씌우고 있는데 발가락 양말 한켤레를 내밀길래 "Give me?" 하고 물었더니 "Yes. !@~%^&*^/÷@"라고 하시는데 대충 한번도 안 신은건데 필요하면 가지라고 하는 듯해서 "Thank you. I lost it 론세스바예스 라운더리"라고 했더니 "Perfect"라고 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세탁물을 맡겼는데 내 발가락양말 한짝이 없어져서 중간에 한켤레를 사야했는데 잘된 일이다. 도착하자마자 친구가 챙겨준 누룽지 끓여서 김치통조림하고 같이 먹었는데 한국에서는 그냥 줘도 안먹을것 같던 그 김치가 어찌나 맛있던지 한국 떠난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김치와 라면따위가 그리운건지 참 입맛이 간사하기도 하다. 샤워하고 얼음같이 찬물로 손빨래를 해서 빨래건조기에 1유로 넣고 돌렸더니 약간 덜 말라 침대 난간에 널어놓고 근처 중국인 상점에서 한국라면이나 야채를 판다기에 나갔더니 비가 살짝 내리고 있었다. 구글맵이 알려주는대로 따라갔더니 신라면에 김치병조림도 있어 반가운 마음에 신라면 두봉지와 내일 아침에 먹을 즉석빠예야와 스파게티, 오렌지 두개 그리고 물과 이온음료수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라면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성당에 미사드리러 갈 생각으로 3층에 위치한 주방으로 가는데 부부동반으로 오신 자매님 한분이 밥을 하셨다고 한공기쯤 나눠 주셔서 라면하고 같이 먹었더니 그 또한 기가 막히는 맛이다. 설거지하고 내려와 침대에서 잠시 쉬고 있으려니 밖에 나갔다 들어오신 분들이 비가 그치니 거리에 사람들이 엄청 많이 나와 있다고 나가보라 하셨다. 7시 저녁미사시간이 다가와서 길을 나섰는데 밥을 나눠주신 자매님이 알베르게에서 가장 가까운 팜플로냐 대성당에도 7시반에 저녁미사가 있다고 그쪽으로 가자신다. 사실 딸아이랑 미리 가봤는데 아무래도 7시반에는 미사가 아니라 묵주기도시간인것 같아서 다른 성당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그 자매님께서 너무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바람에 긴가민가 하면서 그러기로 하고 시간이 좀 남았길래 광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사각형의 광장 주변에 시청인듯한 건물이 있고 그 앞에 이사벨여왕일거라고 생각되는 동상이 있는 탑이 있고 시청 맞은편쪽으로 헤밍웨이가 자주 갔었다는 제법 큰 규모의 카페가 있고 광장 한가운데엔 팝음악에 맞춰 드럼을 신나게 연주하고 있고 그 주변으로 여행자로 보이는 이들과 이곳 시민들이 많이나와 주일의 오후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7시20분에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들어 갔는데 그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우리딸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역시 우리가 생각했던대로 미사시간이 아니라 묵주기도의 시간이었다. 이미 저녁미사는 놓쳤고 묵주기도가 끝날 때까지 있었는데 성가대의 노래에 맞춰 매우 성스러운 기도를 진행하고 있었다. 비록 주일미사는 놓쳤지만 경험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냈으니 그 또한 은총이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그 성당을 보려면 5유로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는데 기도시간에 가는 바람에 대단한 문화재를 무료로 구경한거였다. 주일미사가 있다고 확신하셨던 자매님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그 자매님도 모르셨던거고 우리도 확실히는 몰랐기때문에 그분 잘못도 우리잘못도 아니다. 그분은 그런줄 알고 알려주셨을 뿐이고 우린 미사를 거르려해서 거른것도 아니고 하느님께서도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우리가 미사 못했다고 너무 속상해하고 있으면 그분도 편치 않으실테니까. 숙소에 돌아와서 마른 빨래를 접어서 정리하고 딸아이는 내일 목적지로 보내는 동키서비스 알아보고 내일 하루를 어떻게 시작할지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첫댓글울 홍보분과장님의 사진을 곁들인 상세하고 세련된 해설 덕분에 함께 순례하는 듯한 기분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남부유럽인으로 태어나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예쁜 여자와 연애하는 상상을 해보았고, 이태리에 살면서 성가곡 가수가 되는 꿈도 꾸어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사진 속 스페인의 풍경을 보니 다시 그곳에 가서 여행을 하며 현지음식을 먹고싶은 생각이 간절하네요.
첫댓글 울 홍보분과장님의 사진을 곁들인 상세하고 세련된
해설 덕분에 함께 순례하는 듯한 기분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남부유럽인으로 태어나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예쁜 여자와 연애하는 상상을 해보았고,
이태리에 살면서 성가곡 가수가 되는 꿈도
꾸어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사진 속 스페인의 풍경을 보니 다시 그곳에 가서
여행을 하며 현지음식을 먹고싶은 생각이 간절하네요.
읽어주시고 글마다 댓글 달아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왜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러번씩 다녀오는지 알겠어요.
저도 벌써부터 또 가고 싶거든요.
안방에 가만히 누워서 순례길 편하게 함께 잘 다녀왔습니다.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