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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진방 스크랩 백두산 여행을 마치고
김원석 추천 0 조회 207 09.07.28 15:13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백두산 여행을 마치고



○ 서 언

민족의 영산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는 백두산을 가 보고 싶어도 민족분단의 역사가 이를 막고 있던 중 다행히 중국에 있는 부분이라도 가보자고 산악회 총무를 맡고 있는 아내의 제의를 받고 시간이 많지 않고 여행경비도 넉넉지 않아 고민을 하다가 지금 안가면 언제 가볼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 최소한의 경비(80만원=여행사 56만원+등정관리비 20만원+맛사지, 팁 4만원)로 5박6일의 백두산트래킹에 따라 나섰다.

 


 ※ 여행코스 : 인천⇒단동⇒통화⇒송강하⇒서파⇒북파

                         ⇒이도백하⇒통화⇒집안⇒단동⇒인


○ 중국개관

중국은 대한민국 100배의 토지와 12억 3천만의 인구, 56개의 민족으로 이루어 졌으며 한족에 한해 1가구 1자녀 정책을 펴 그 역작용으로 호적에 오르지 못한 아이(흑해자, 헤이하이즈)들이 많아 13억 정도 추정하고 있는데 그중 94%는 한족, 나머지 6%가 장족, 회족, 묘족, 만주족 등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족은 약 200만 명으로 연변 조선족 자치구를 중심으로 살고 있고 중국의 직통국제전화(0082+0을 뺀 지역번호+개인번호)는 한국에 비해 70% 이상 비싸므로 수신자부담 서비스(10800-820-1611)를 이용하는 것이 저렴하며 문자는 1통마다 150원 정도이므로 가장 좋다.


□ 첫째날[배를 타고 단동항으로 (7. 3. 금요일)]

○ 광주 출발(12:00)

광주역에 집결하여 대원여행사의 은하수 관광버스를 탔는데 경찰 선배님인 삼희산악회 이재규회장님의 동기 22명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출발하였다.

○ 출국수속(16:00)  

인천항 연안부두 제 1터미날에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단동훼리인 동방명주호를 타고 22명 정도 잠을 잘 수 있는 425호를 배정받아 짐을 풀고 선상에 올라가서 인천항 전경을 바라보았다.

   

 

 

○ 출항(17:10)

배는 인천항을 뒤로하고 중국 단동을 향해 움직이고 배안에서는 술판이 벌어졌는데 나도 선배님들에게 복분자술을 한잔씩 따라드리고 받고 하면서 덕담을 나누다보니 정신이 알딸딸하여 선상으로 나와 보니 배는 영종대교 건설현장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갈매기들이 계속 따라오고 있어 예전에 강화도 여행했던 경험을 살려 먹을 것을 던져주니 잽싸게 받아먹는걸 보고 다른 사람들도 따라했다.    

 

  

○ 저녁식사(18:40)

배에서 비빔밥으로 저녁을 먹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식사 후 배안목욕탕을 갔는데  중국 젊은이들이 문신을 하고 팬티와 양말을 세탁하고 있어 좀 지저분한 느낌이 들어 탕 속에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 오락(19:30)

일본을 왕래하는 선박은 풍랑이 거센 현해탄을 건너서인지 1만2천톤 급으로 배도 깨끗하고 노래방 같은 오락실도 있었으며 속도도 좀 빠른 것 같았는데 이 배는 1만 톤급으로 속도가 느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북한에서 미사일을 발사한다고 해서 공해상으로 바로 올라가지 못하고 중국연안으로 항로를 바꾸어 가므로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배안의 TV는 한국방송이 나와 텔레비전을 보다가 고스톱 화투놀이를 하였으며 배안의 글씨를 보니 小心滑倒.(미끄럼 주의), 小心落水(물 추락조심), ?勿吸煙(금연), 禁止自帶食物(음식물반입금지)등의 문자들이 눈에 띄었다.

 

 

○ 취침(20:30)

소주를 몇 잔 해서인지 피곤해서 일찍 잠을 청했다. 술을 너무 많이 먹으면 내일 아침 입국 수속 시 신종플루 감염여부 조사 시 열이 있어서 곤란을 격을 수도 있으니까 조금만 먹으라는 가이드의 경고도 있었다.


○ 심야순시(00:30)

한참을 자다 소변을 보려고 일어나 보니 그때까지 열심히 고스톱을 치는 분들이 있어서 “도박꾼들은 잡아 간다”고 엄포를 놓고 밖으로 나가보니 공해상인지 섬과 갈매기 등은 보이지 않고 상현달이 찰랑대는 고요한 바다를 비추고 있었는데 파도가 없어 배의 흔들림은 거의 없었고 배의 뒤편에는 연인인 듯한 중년남녀가 서로 포옹을 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으며 배는 힘이 들어선지 숨을 헐떡이며 계속 북으로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 노인기상(중국시간⇒04:00. 지금부턴 중국시간 사용) 우리시간 05:00

중국은 동서로 5,500km 이므로 5시간 정도 시차가 나는데 표준시를 우리보다 1시간 늦게 정했다고 하는데 경도가 같아서인지 감각적으로 우리나라와 거의 똑같게 인식되었으며 여행의 설레임이 있어선지 벌써 몇몇 어른들은 일어나 샤워를 하고 있었으나 난 에어컨 바람에 추워서 비옷잠바를 꺼내 입고 다시 잠을 청했다. 


□ 둘째날[백두산 송강하까지 버스 이동(7. 4. 토요일)]

○ 아침식사(07:00)

06:00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감자국, 김치, 디포리젖을 반찬으로 아침식사를 하는데 먹 을만 했다. 배 승무원 이야기를 들으니 저녁식사는 5,000원. 아침식사는 4,000원을 받는다고 하며 아직도 밖은 안개가 자욱한 망망대해. 배는 계속 북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 단동항 연안(08:00)

중국배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 단동항 연안에 도착한 것 같다. 이제 햇빛이 비치기 시작한 맑은 날씨로 관광에는 최적의 날씨인 것 같다.

 

 

 

○ 단동항 도착(09:00)

단동항 입구에 도착하니 도선사가 마중 나와 배를 묶어 안내를 하여 정박 시켰다. 지금 한국시간으로는 10:00이므로 인천항에서 이곳까지 무려 17시간이 걸렸다. 일본 후쿠오카항까지는 7시간이 걸렸으므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 항해에는 파도가 좀 있었지만(배멀미를 할 정도는 아님) 이 노선은 거의 파도가 없었다.

 

○ 하선(09:35)

단동항의 첫인상은 아직 개발되지 않는 항구로 연탄과 고철이 부둣가에 쌓여있었고 武警이란 군인들의 살벌한 감시속에 신종플루 감염여부를 알기위해 열검사를 하는 등 검역을 마치고나서 물자국 버스를 타고 좀 나가서 입국심사를 한 후 광장에서 사진을 찍으니까 무경이 쫓아와서 못찍게 하면서 찍은걸 지우라고 한다. 역시 사회주의 국가로 철권통치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금강산 관광을 할 때 북한보단 심하지 않았다.

 

 

 

○중국버스승차(10:25)

상당히 깨끗한 버스인데 안전벨트가 없어서 좀 불안해하고 있으니까 현지 가이드인 오송환(30세)이 올라와 중국말(쉰콜라) 몇 마디를 가르켜주고 자기는 함경북도 출신의 3세 조선족인데 지금은 대한민국 서울 가락동에  요가강사인 부인과 딸이 있다고 소개한 후 대한민국은 아버지, 북한은 어머니, 중국에 있는 200만 동포는 버려진 아들이라고 비유하면서 그래도 우리 아버지 나라가 중국보다 더 잘살고 있어 자랑스럽고 56개 소수민족 중에 조선족만큼 똑똑하고 자랑스런 민족이 없다고 자긍심과 명예심이 높았다. 주의사항으로는 중국에서는 한국여권이 500만원 정도에 거래되는 귀한 물건이므로 모두 욕심을 내니 잘 간수하라는 것과 중국화장실에는 화장지와 물이 없으니 항상 준비하라고 했으며 우리가 가려고하는 백두산은 6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3개월 동안만 관광을 하므로 투자를 많이 하지 않아 시설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하며 이해를 해 달라고 했다.

 

○ 북한 국경선(10:50)

버스는 단동항에서 조금 나와 북한과의 국경선인 압록강을 따라 단동시로 향하는데 강이 없는 평야지대에는 철조망이 처져 있었는데 철조망 밑에는 땅굴을 파고 굴을 통해 북한 군인들이 경비를 하고 있다고 하며 압록강을 경계로 하는 지점은 국경선이 없는 대신 중.조 공동관리구역으로 여기에서 나오는 모든 생산물은 50:50으로 나누어 수익한다고 한다.


   

○ 단동 식당도착(11:10)

단동은 중국의 요녕성에 속하는 북한의 신의주와 국경지대로 60년대 이전에는  안동관할보호관청에서 유래된 안동이란 이름으로 불리웠으며 65년에 紅色東方之城 (해가 뜨는 동방의 붉은 도시)이란 뜻으로 단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단동에는 압록강공원과 6.25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교각만 남아있는 단교, 금강산공원, 고구려 천리장성에 해당하는 박작성 등이 있는데 우리 일행은 조선대주점이란 한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 졸본성을 향하여(12:00)

우리 버스는 압록강 중. 조우의교 옆을 지나 백두산을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버스 안에서는 가이드가 여러가지 정보를 들려주는데 압록강은 802km이며 그 안에 위하도를 비롯한 207개의 섬들이 있고 중국에는 3가지(사람, 자전거, 짝퉁)가  많이 있다고 한다. 또한 조선족이 사는 집은 8각형인데 한족이 사는 집은 3각형이고 80년대 전에는 묘지가 있었으나 그 후 화장을 하여 현재는 묘지가 없으며 길가에 가로등이 없는 대신 가로수가 있는데 밑에서 약 1m정도는 하얀 페인트로 칠해 병충해도 방지하고 가로등 역할도 한다고 한다.

 

○ 동북 3성  

중국의 동북 3성은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곳인데 평안도 사람이 많이 사는 요녕성, 함경도 사람이 많이 사는 길림성, 경상도 사람이 많이 사는 흑룡강성이 있는데 이들은 1910대 한일합병 전후로 조선에서 양반들의 행패와 일본 식민지 정책의 폭정에 시달리는 논도 집도 없는 동포들이 많이 이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기후와 토지는 옥수수 재배에 적합하여 주로 옥수수를 재배하여 씨앗은 쌀과 바꾸어 먹거나 가축의 사료로 쓰거나 북한에 수출을 하고 옥수수대는 사료로 쓰거나 연료로 쓰므로 꿩 먹고 알 먹는 식물이라고 하 며 가끔은 콩과 담배 등을 재배하는데 물이 풍부한 평야지대에서는 벼농사를 하기도 한다. 또한 1978년도 모택동의 개혁개방 정책에 의해 정치체제는 사회주의지만 경제정책은 자본주의로 바꾸어 토지에 대한 개인소유는 인정하지 않으나 30년을 기간으로 임대계약 형식을 빌어 인구비례로 똑같이 나누어 주었으며 한자도 간자체로 바꾸어 문맹율을 80%에서 20%로 낮추었다고 한다.

 

 

      ※ 위의 이상한 모형은 공중변소인데 칸막이, 물, 화장지가 없고

          냄새도 너무 나서 기절을 할 정도이다.


○ 만주 자치현 통과(13:40)

만주현에 있는 주유소에서 변소를 보고 있는데 옆에 있는 자전거형 마차가 신기하게 보였으며 이곳은 청나라 당시 황제 루르아치가 개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아 통치를 한 지역으로 만주족이 모여 사는데 그 이후 만주족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次川?에서 변소를 보고 강을 따라 올라 가는데 골재채취가 한창인걸 보니 건설공사가 많은 것 같이 보였고 산에 있는 수종은 소나무가 귀하고 메타세퀘이아, 아카시아 나무가 많았으며 벌을 키우는 양봉업자와 염소 100여 마리, 소 100여두를 몰고 가는 목동 등이 있었다.

 

○ 졸본성 통과(15:20)

홍강(비루수)를 따라 부여의 금화왕과 유화부인 사이에 태어난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졸본성의 평지성과 산지성을 볼 수 있었는데 평시에는 평지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전시에는 해발 823m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지성으로 밧줄을 타고 올라가 피난을 하였다고 전하며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오녀산성이라 부르며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이 되어있다

  

 

 

○ 졸본성의 역사

고구려 왕성, 왕릉 및 귀족고분으로 구성되었으며 행정구역은 요녕성 환인만족자치현 오녀산풍경구이며 평면은 구두장화 모양으로 동,서,남문이 있고  남북길이는 1500m, 동서 넓이는 300~500m이며 역사자료에 의하면 기원전 37년에 북부여왕자 주몽이 이곳에 [흘승골성]이란 도성을 구축, 고구려정권을 세우고 40년을 존속하였다고 하며 현재 성에 올라가는 길에 938계단이 있다고 한다.


○ 길림성 대천 통과(18:00)

길림성에는 연길시(엔지시), 도문시, 둔화시, 안도현, 화룡시, 용정시, 훈춘시, 왕청현을 관할하는 옌벤 조선족 자치주가 있는데 면적은 43,474㎢. 인구는 216만이다.  자치주의 성립은 소수민족 33%가 넘어야 하는데 이곳은조선족 인구가 전체인구의 39%이고 연변텔레비전방송국과 연변대학교, 연변일보 등이 있다.

 

○ 통화시 도착(19:40)

통화시는 통화현, 집안시, 백산시, 장백시 등을 관할하는 인구 700만의 행정구역인데 이곳에는 와인회사, 강철회사, 제약회사 등 회사원이 많으며 월급은 30~40만원 정도이고 자영업을 하는 사람도 많은 편이라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붉은색은 복과 안녕을 상징하여 주로 서민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황궁과 귀족은 노란색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 금화식당 석식(19:00)

통화시에 있는 금화식당에 가서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백두산을 향해 이동하면서 가이드가 나시족은 태어나서 3번 목욕을 하는데 태어났을 때, 결혼할 때, 죽었을 때라고 소개하였다. 또한 중국은 16개 언어와 23개 문자를 사용하면서 초등학생은 500자, 중학생은 2,000자, 고등학생은 3,000자 대학생은 5~7,000자를 사용하며 전체 글자 수는 42,580자 인데 죽을 때까지 배워도 다 못 배운다고 하나 요즘은 간자체가 발달하여 문맹율이 낮아 졌으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한자를 간자체로 다시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중국의 차량번호

차량은 색상에 따라 노란색은 버스. 트럭, 하늘색은 승용. 소형차, 검은색은 외국인. 영사들이 사용하는데 요녕성은 遼 E 12345, 길림성은 吉 F 12345

흑룡강성은 黑 A 12345 라고 기록하는 것 같았으며 교통신호등은 이곳도 상해와 같이 남은 시간을 초단위로 알려주는 시스탬을 사용하고 있었다.

 

  

 

○ 송강하 호텔 도착(23:00)

12시간 35분 동안 버스를 타고 구경도 하고 졸기도 하면서 백두산 밑에 있는 장백산유객복무중심 항해산장에 도착하니 때는 한 밤중인지라 달빛은 창연하고 고요한데 백두산 자락의 주막에 나그네가 하루 밤 유숙을 간청하는 김삿갓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산장은 객방부, 취식부 등이 있었는데 방에 들어가 수도를 돌리니 녹물이 나와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 셋째날[백두산 천지관광(7. 5. 일요일)]

○ 기상(05:00)

이곳에서 백두산까지 40Km 정도 된다고 일찍 일어나  취식부에서 식사를 하고 06:00경 버스를 타고 출발 하는데 여기서부터 백두산 종주팀과 관광팀이 구분되어 관광팀은 늦게 일어나 북파방향으로 바로 가고 우리는 서파에서 입산하여 백두산 천지못 둑을 타고 9시간 동안13km를 걸어서 북파까지 가야 한다고 한다. 산행 중에는  절대 담배를 피울 수 없고 피우다 적발되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된다고 가이드가 겁을 주었는데 난 다행히 담배를 끊은 지 이제 만 90일이 되었으므로 별 걱정을 하지 않고 한참을 가다보니 단속 하여야할 중국 안내인이 골초라서 쉴 때 마다 담배를 물어 단속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또한 백두산에는 장사들이 많은데 “보지도, 만지지도 마라” 고 주의를 주었는데 만약 만져보고 사지 않으면 기스(흠)가 났다고 우겨서 기어이 팔아먹으려고 하면 나중에 곤란해진다고 하였다.

 

 

 

○ 서파 산문 통과(07:00)

밀림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서파산문에 도착하니 장백산이란 건물이 있어 입장권을 살려고 하자 아직 직원들이 출근을 하지 않아 약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사회주의는 경쟁이 없어 발전이 안 되는구나하는 느낌을 받으며 그 안에서 움직이는 셔틀버스를 타고 백두산 천지 서파입구로 가는데 해발 약 1,900m 정도 되는 곳부터 수목 한계선이 있어 나무가 없고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 피어 있었다.

 

 

 

서파 주차장 도착(08:00)

버스에서 내려 천지를 향해 한계단 한계단 걸음을 옮기는데 천지까지는 900m, 1,236계단을 올라가야 내생애에 그리운 천지못과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진단다. 계단 옆에는 이름모를 풀과 꽃 그리고 잔설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것이 마치 봄, 여름, 겨울 3계절이 공존하는 것 같았는데 가을 맛은 나지 않았다.

 

 

 

○ 백두산 개관

백두산은 약 250년 전에 멈춘 화산활동으로 부식토가 산정상에 하얗게 쌓여 「흰머리 산」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인데 중국에서는 청나라 때 장백산(창바이샨)으로 불러졌으며 전체면적 중 1/3은 중국의 영토로, 2/3는 북한의 영토에 속하고 연평균 기온은 -8도로 연중 눈, 비가 내리는 날이 200여 일에 달한다. 천지의 평균수심은 213m, 최고수심은 384m인데 16개의 봉우리가 14km를 둘러싸고 있으며 입산할 수 있는 기간은 6월말~9월 초순까지 약 3개월 정도이다.

 

  

 

○ 5호 경계비 도착(08:30)

5호 경계비는 조. 중국경선을 나타내는 표지로 북한 땅과 중국 땅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우측 맞은편은 백두산의 최고봉인 2,749m의 장군봉(백두봉, 병사봉)이 있고 정면에는 2,670m의 천문봉이 있었는데 우리 종주팀은 마천우⇒ 청석봉⇒ 한허계곡⇒ 백운봉⇒ 녹명봉⇒ 새우등능선을 거처 장백폭포로 하산하여 관광팀과 합류하기로 되어있다.

 

  

  

○ 마천우를 돌아서

관광팀은 5호 경계비 지점과 천문봉지점에 올라와 천지를 보고 내려 가는데 우리는 1인당 20만원씩을 더 내고 산악가이드를 고용하여 중국정부로부터 산행허가를 받아 약 13km의 산행을 하게 되어있어 여기서부터는 산악가이드 안내에 따라 山菊꽃과 철쭉꽃이 피어있는 꽃밭과 잔설을 밞으며 해발 2,691m인 마천우를 돌아 나갔다.

 

  

  

○  5호 경계비에서 천문봉으로 돌면서 본 천지모습

백두산 천지는 보는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구름 바람의 조화로 여러 가지 모습이 연출되는데 이를 모두 카메라에 담기는 어려웠다  

 

  

   

   

                           

○ 청석봉에서 한허계곡으로

아름다운 천지의 둑을 따라 걸으며 “야~~하~~” 감탄사를 연신 쏟아내고  너무너무 좋아 콧노래와 함께 더덩실 춤이 절로 나왔다. 우리 모두는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행복해 하면서 걷는데 때로는 길이 험해 미끄러지거나 추락할 위험이 있었지만 비바람과 눈만 없으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 한허계곡에서(11:00)

2,662m의 청석봉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가니 천지에서 세어 나온 물과 잔설이 녹아내린 물로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어 우리는 잠시 신발을 벗고 발을 물에 담그니 10초도 못 있을 정도로 차가워 호들갑을 떨면서 오이를 먹었다. 그런데 대원여행사 박기성사장님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절뚝이며 잘 걷지를 못하니까 산마루 산악회 회원들이 스틱을 주고 파스를 붙여주며 보살펴주는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  백운봉으로

한허계곡에서 거리는 약 1.5km, 높이는 약 500m 정도 고지인 2,630m의 백운봉을 올라가는데 제일 힘든 코스인 것 같았다. 평소 산행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은데다 배타고, 버스타고 계속 오면서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런지 약간 힘은 들었으나 어느 산에 가든지 이 정도 힘이 든 것은 보통이라고 생각하며 중국측 안내인을 보니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건장하게 생겨 산행을 잘 했으나 우리 현지 가이드인 오송환씨도 무릎이 아프다고 양쪽무릎에 보호대를 하고 절뚝거려서 한달에 몇 번씩이나 산행을 하느냐고 물으니 약 2번 정도는 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같이 좋아서 하는 것은 괜찮으나 직업적으로 의무적으로 계속해서 하는 것은 좀 힘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백운봉 능선에서 (12:20)

능선을 올라오니 처음엔 땀이 나고 더웠지만 곧 체온이 내려가기 시작해서 우의를 꺼내어 보온을 한 후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는데 기름진 반찬에 많은 밥을 남길 수가 없어 모두 다 먹었더니 나중에 배 속이 불편해서 상당한 고생을 하였다. 내가 항상 다른 사람에게 강조하는 사항이지만 산에 갈 때는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을 자기가 먹을 만큼만 스스로 가지고 가는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조금 과식을 했더니 고생을 했다. 다음부턴 산에 갈 때 절대 음식을 많이 가져가지 않을 것이며 좀 부족하다 고 생각이 들 정도로 소식을 하여야겠다. 

 

  

 

○ 녹명봉을 거처 새우등 능선으로

이제 오르막길은 모두 끝나고 천지를 보면서 평지 같은 천지 둑을 걸어 2,603m의 녹명봉으로 오는데 바람과 구름의 조화로 엷은 구름. 진한구름이 천지를 조명하였다가 배경으로 변하는 여러 가지 모습을 연출하는데 정말 장관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돈 20만원이 아깝지 않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을 하며 지금 이곳 장관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이런 감동과 행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라며 좋아했다.

 

  

 

 ○ 장백폭포로 하산(14:00)

2,696m의 차일봉과 2,550m의 철벽봉, 2,670m의 천문봉을 바라보면서 하산을 하던 중 대피소라고 하는 천막을 지나는데 산악가이드는 그곳에 가서 산행을 하였다는 흔적사인을 하고 내려왔다. 대원 여행사 박기성사장님은 피곤한데도 우리들의 사진을 열심히 찍어 주면서 원래 우리도 차일봉을 지나 달문을 거처 장백폭포로 내려와야 하는데 산사태로 코스가 막혀 이곳에서 장백폭포로 내려 가야한다고 했다. 조금 내려오니 달문에서 물이 내려와 장백폭포로 떨어지는 그림 같은 정경이 눈에 들어와 기념사진을 찍고 엄청난 급경사 코스로 내려와 나무계단을 따라 장백폭포로 다시 올라갔다.

 

  

 

○ 장백폭포에서(창바이푸뿌 15:30)

장백폭포는 높이가 60m로 겨울에도 다른 폭포와 달리 얼지 않으며 마치 용이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비룡폭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 천지물은 송화강으로 흐른다고 하여 기념으로 물통에 물을 가득 담은 후  신발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니 물이 너무 차가워 10초 이상 있을 수가 없었으며 가이드의 말대로 장뇌삼이라고 인삼을 팔려고 하는 장사꾼과 귀거리, 목거리 등 장신구를 파는 사람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어 보기가 좋지 않았다.

 

  

 

○ 노천온천지대

장백폭포에서 밑으로 내려오다 보니 폭포물이 내려오는 하천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곳이 있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노천온천 지역이었다. 이곳 물의 온도가 최고 섭씨 82도가 되어 이 물에 달걀을 삶아 팔기도 한다고 하며 그 바로 밑에 온천장이 있는데 아직 개발이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 주차장 도착(16:20)

서파주차장에서 08:00에 출발하였으므로 8시간20분이 소요되었는데 해찰을 안 하고 낙오자가 없으면 7시간 정도이면 종주가 가능할 것 같았다. 주차장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소천지로 가는 길이 있었고 온천장이 있어 조금 쉬고 있으니까 우리 일행인 관광팀이 이제야 이곳에 도착하여 조그만 무개 셔틀버스를 타고 장백폭포에 올라갔다가 내려온다고 하여 좀 기다리고 있으니까 다녀와서 종주코스가 어땠는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물어보고 나서 처음에 겁을 먹고 종주를 안 한다고 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종주를 못하고 간다고 너무 서운해 하면서 후회를 하였다.


○ 이도백하로 출발(17:30)

주차장에서 이도백하로 내려오다가 19:30경 식당에 들려 저녁식사를 한 후  6,000원을 주고 1시간 정도 목욕을 하고 7,000원을 주고 발 마사지를 하였는데 땀 흘리고 나서 몸 씻고 마사지 하고 나니까 너무나 개운하고 기분이 좋았다.


○ 이도백하역 대기(22:30)

우리는 기차를 타기위해 이도백하역으로 이동하여 대기하는데 이곳은 호적이 없는 불량아들이 많으므로 개인행동은 하지 못하도록 하여 역전가게 앞 편상에서 맥주 등 술을 사서 마시면서 보니까 우리나라 티코 같은 차량의 영업용택시가 손님을 싣고 다녔다. 

 

○ 기차 승차(23:30)

우리는 집안으로 가기위해 칸이 12개있는 통화행 열차를 탔는데 가이드가 이곳에서는 모두 잠을 자므로 물건을 잃어버릴 수가 있으니 관리를 잘 하라고 경고를 하여 통로안쪽으로 짐을 정리하였다. 기차는 3층 침대가 양옆으로 있는 6인실로 베개, 이불 등은 흰색으로 비교적 깨끗한 편이어서 나는 2층을 잡아 잠을 맛있게 잔 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코를 골았다고 핀잔을 들었는데 산행 뒤라서 피곤해서인지 모두가 다 코를 골았다고 한다.

 

 

 

□ 넷째날[집안 국내성(7. 6. 월요일)]

○ 기상(06:00)

한참을 자다가 깨어보니 날은 이미 밝았는데 밖에는 비가 조금 온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세수를 하였다. 기차도 밤새 달려와서 그런지  피곤해하며 연신 기적을 울려대고 승무원 아줌마는 상당히 뚱뚱한 편이었지만 이불을 개고 정리를 하며 친절하고 성실하였는데 한국말도 영어도 하지 못하여 언어소통은 되지 않았다.

 

○ 통화역 도착 아침식사(06:50)

짐을 정리하여 기차에서 내려 통화역 앞으로 나가 길을 건너 뷔폐식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걸인인 듯한 할머니가 뭐라고 하면서 따라오니 식당주인이 나가서 뭐라고 하니까 돌아가고 우리는 가볍게 아침식사를 하고 먼 여행을 하여야 하므로 모두 변소에 가서 먹은걸 반납하고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탔다.

 

  

 

○ 집안으로 출발(07:40)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의 현 지명인 집안시는 AD 3년경 고구려 제 2대왕인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424년 동안 수도로써 광개토대왕비, 태왕릉, 장군총 등 유물이 많이 있으며 북한의 만포와 접경으로 철로와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고 하며 중국에서는 남여평등을 넘어 여성의 힘이 너무 강하여 남자축구는 나라의 적이라고 하고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국 드라마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고 하는 「사랑이 뭐길래」가 가장 인기가 있다고 한다.


○ 경찰제도

길거리에 公路巡警이란 건물은 교통경찰의 사무실이고 큰 도시마다 있는 공안이란 건물은 우리의 경찰서를 말하며 武警이란 산림보호요원, 항구 등의 출입국관리와 검역작업을 하는 군인으로 경찰이란 이를 총칭하는 명칭이라고 한다. 길거리에서 검찰이란 순찰차도 보였는데 중국에서도 공안과 검찰은 서로 갈등관계에 있다고 한다.

 

○ 광개토대왕비 관람(09:30)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로써 높이 6.39m, 무게 37톤의 방추형 자연석으로 4면의 고르지 않은 비신에는 1,775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으며 현재까지 1,500자 정도가 해석되었는데 그 내용은 고구려 건국과정과 대외정복사업과 업적, 수묘체계 등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에 따라 중국에서는 好太王碑라고 불린다. 이 비는 1880년 중국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처음에 금나라 황제의 비 인줄 알고 끼어있는 이끼를 불로 태우고 보니 광개토대왕비로 확인되었다고 하며 일본인이 신라. 백제 침략의 정당화를 위해 일부 글씨를 지워버리고 조작하였다고 하니 일본인의 만행은 여기서도 증명이 되고 있다.

 

  

○ 태왕릉

정사각형의 7단 석실묘로 높이 14.8m, 한 변의 길이가 66m로써  현재는 많이 무너져 상단부만 보존되어 있으며 철제계단으로 올라가 내부를 살펴 볼 수 있는데 내부에는 직사각형의 모양의 돌이 2개있고 그 겉은 플라스틱 틀로 덮여있는데 대왕과 대왕비를 합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 위에는 중국인들이 복을 빌며 던진 동전들이 보이는데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모두 도굴이 되었다고 하며 능의 남. 북 양쪽에는 중국과 북한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지대라는 점도 이색적이다.

 

 

  

○ 장군총 관람(10:35)

집안에 남아있는 12,000개의 묘지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길이가 5.7m인 엄청난 크기의 화강암 1,100개를 계단식으로 쌓아올려 밑변 32m, 높이 12m인 피라미드형 方壇階段積石墓(돌을 계단형식으로 네모지게 쌓아올린 형태의 무덤)를 만들었는데 정면은 국내성을 바라보고 석실안 석관의 머리방향이 53도로 백두산천지를 향하고 있으며 적석총을 둘러싼 12개의 받침돌(호석)과 배총이 있다. 호석은 무덤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4면에 3개씩 12개(십이지신상)가 있었는데 현재는 하나가 소실되었고 배총은 고인돌 형태로 수호신을 상징한 것으로 보이며 본 장군총은 고구려 대정벌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20대 장수왕릉이라는 견해가 압도적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애첩을 순장한 조그만 총이 하나 더 있었다.

 

 

  

○ 국내성 관람

처음에 성 인줄 모르고 성벽에 집을 짓고 살다 나중에 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존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 길이는 3.5km에 이른다.  국내성에는 조선족학교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계단이 3~4개 되는 귀족들의 무덤이 많이 보존되어 있었으며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피난성은 방어하기 쉽도록 치를 설치한 옹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고향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 중국 한자의 간자  鄕⇒ , 戶⇒ , 動⇒ ,麗⇒ , 産⇒ , 塚⇒ , 寧⇒  ,    邊⇒  , 縣⇒  , 電⇒  ,

 

○ 단동으로 방향을 잡고(13:40)

혼강을 거슬러 단동으로 가는 길에 도로공사 중인 곳이 많아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고 달려가는데 운전이 거칠어 좌우로 흔들거리는데도 안전벨트가 없어 고정시킬 수도 없고 상당히 불편했다. 마을 안쪽에 나무십자가가 있는 교회 2곳이 있었고 이동통신 안테나가 설치된 높은 통신탑이 많았으며 길거리에 목재검문소가 눈에 띄었다. 농촌주택에는 화목을 때서 난방과 조리를 하며 공사장과 시골에는 3발 트럭, 택시, 자전거 등이 있었고 거푸집, 시멘트 비비는 기계 등은 우리나라 70년대 장비와  같았으나 집집마다 바람이 잘 통하게 만들어진 옥수수 창고에 지금도 옥수수가 있는 걸로 봐서 배고프게 살지는 않는 것 같았다.


○ 공산당원이 되는 길

중국의 중화정책으로 중국에서 공무원이 되고 승진하여 출세를 하려면 공산당원이 되어야 하고 공산당원이 되려면 한족으로 귀화하도록 하는데 공산당원이 되는 길은 2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군에 지원하여 약 30: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하여 2년 이상 복무하면 공산당원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방법은 초등학생 시절에 가장 우수한 소수대원으로 뽑혀 교육받고  다시 중학교에 가면 탄원대라하여 망치와 낫이 있는 오성깃발 넥타이를 매고 교육을 받으며 고등학생 시절엔 비당원으로 당원 수업을 마친 후 20세 이상 성년인 대학생이 되면 교장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공산당원이 될 수 있는데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공산당원이 되면 월 10위안 정도 당비를 내야 한다.

 

○ 중국 공산당 정책

시골 공산당 대표가 현 공산당 대표가 되고 현대표 중에서 시 대표를 선출하고 시대표 중에서 성 대표를 선출하고 성대표가 되면 인민대표자 대회에 참석하는데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은 [자유를 주면 권력을 주지마라] [권력을 주면 자유를 주지마라]라는 원칙 하에 철저한 통제체제를 갖추고 있다.

 

  

 

○ 지역별 특성 

북경은 명. 청의 수도로 지식인이 많은 정치중심도시이고 상해는 강택민을 배출한 도시로 최고의 발전으로 돈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도시이며 광동은 등소평의 고향으로 개혁 개방에 앞장서 장사수단이 좋으며 돈에 살고 돈에 죽는다는 슬로건처럼 돈을 중시하는 곳이며 천진은 지금의 후진타오의 고향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 또한 사천성은 부지런한 여자가 내조를 잘하여  복 받은 남자들이 사는 곳이라고 하고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북 3성은 진시황제를 대표로 호전적이며 용감한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고 하며 중국요리는 날아다니는 비행기와 바퀴달린 기차만 빼고 모두 먹는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데 특히 사천성, 절강성, 광동성 요리가 유명하다.


○ 압록강 하구 도착(17:10)

고개를 3~4개 넘어 압록강 하구에 도착하니 멀리 벌거숭이 민둥산이 보였는데 북한이라고 하고 강에는 태평원 수력발전소가 있었으며 조금 더 내려오니 압록강에 부교 15개가 보였는데 전쟁이 발발하면 30초 안에 중국과 북한을 잇는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하였다. 거기서 조금 내려오니 녹도라는 섬이 보였는데 중국 측에서 그 섬의 높이를 높여 별장을 짓는 등 개발을 하려고 하니까 장마철이면 물길이 변하여 북한의 경계초소가 침수된다고 강력반대를 한다고 하며 단동시가 가까워지니 진주고리분회라는 골프연습장이 있었는데 땅이 넓어선지 거리가 거의 300m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 

 

  

 

○ 박작성(호산장성)에 대하여

단동시 방향에서 압록강 쪽으로 쭉 뻗어나간 해발 320m의 산능성이를 따라 성이 쌓여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망루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 성을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다」라고 주장을 하면서 사료를 모아 박물관을 운영하기도 하는데 만리장성의 동단은 훨씬 남쪽인 산해관이므로 중국의 주장은 엉터리이며 고려의 마지막 경계성인 천리장성의 박작성이란 설이 정설로 당태종이 이 성을 치러왔다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마라”는 유언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 성에 오르면 뒤쪽으로는 압록강 지류가 흐르고 그 너머로는 신의주이기에 우리 땅을 지키는 박작성이라고 하여야 한다.   

  

 

○ 丹東?鴻大酒店에서 식사(18:40)

중국의 호텔은 대주점이라고 하면서 숙박과 음식을 같이 팔고 있었는데 이곳 단동흠홍대주점은 일류호텔로 시설이 아주 좋은 편이었지만 고랑주 200㎣ 한병에 1만원을 달라고 하여 너무 비싸 1병만 사먹고 숙소 옆에 있는 술집과 노래방을 가자고 나왔다.


○ 시내 외출(20:20)

단동은 비교적 발전을 한 도시라서 치안상태도 양호한 것 같아 우리는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10여명이 어울려 길거리 노점에 들어가 숯불을 피우고 양고기, 소고기, 닭똥집 등 꼬치 하나에 600원씩 한다고 하여 철찰산이란 고량주 1병에 10,000원, 맥주 한병에 2,500원을 주고 먹는데 통화, 이도백화를 포함한 이곳은 모기가 전혀 없는 것 같았으나 여성분들은 뭐가 물어뜯는다고 하여 노래방을 가려고 하니 노래방이 있기는 한데 차를 타고 가야할 거리에 있다고 하여 내일 여행 일정을 생각해서 포기하고 호텔로 들어왔는데 환율이 인민페 10위안=\1,600원.  달러$1 =\1,280원이 적용되어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 다섯째 날[압록강 유람선 관광(7. 7. 화요일)]

○ 기상(06:30)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커피를 한잔하며 딸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이곳은 날씨가 매우 맑은 편인데 광주는 비가 엄청나게 온다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비를 피해서 여행을 하는 것 같아 행운아라고 생각을 하면서 아침을 먹고 08:20경 출발했다.

 

 

 

○ 압록강 유람선 관광(09:00)

압록강 중. 조 우의교와 단교가 있는 물가에 나와 보니 백두산 천지의 눈이 시리도록 맑은 물이 압록강을 따라 802km를 내려오면서 온갖 쓰레기를 품어왔는지 너무나 탁한 모습이어서 자연은 정말 깨끗하게 보존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배를 타고 단교를 통과하여 위쪽으로 올라갔다가 이성계가 회군을 하였다는 위하도 밑을 거쳐 신의주 옆을 통해 밑으로 쭉 내려갔다가 강 중앙을 통해 다시 단동항 쪽으로 올라오는데 신의주와 단동의 발전상이 너무 대조적이어서  같은 민족으로 가슴이 아팠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북한이 개방을 하여 우리가 중국에 주는 관람비를 받아 개발을 하면 잘사는 나라가 될 텐데...” 라며 아쉬워하였는데 북한도 이것을 모르지 않겠지만 개방을 하면 체제가 무너질까 걱정이고 또 백두산에 공항을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한다면 중국에서 그냥두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중국의 부속도시 같은 북한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단교와 中. 朝友誼橋에 대하여

단교는 조선총독부가 1911년 완공한 길이 944m, 12개의 교각으로 구성된 아치형 철교인데 9번째 교각부터는 범선이 통과하도록  90도 회전 가능한 개폐식으로 만들어 열면 십자, 닫으면 일자가 되도록 설계되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팽덕회 사령관이 개입하자 맥아더 장군이 B29로 폭격하여 단교가 되었다. 중국인들은 단교입구에 팽덕회의 동상을 세워놓고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미화하여 애국주의 공산주의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나 한국인에게는 일제의 침략과 수탈, 한국전쟁의 아픈 민족사가 이 단교에 남아 있으며 중. 조우의교는 단교를 대신하여 그 옆에 나란히 세운 다리로써 기차와 차량이 통행할 수 있고 북한과의 교역중심지라고 하는데 보통은 항구를 통해 교역이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야간에만 이루어지는지 이동상황을 전혀 보지 못했다. 

 

   

 

 신의주에 대하여

북한의 개혁. 개방도시라고 하여 상당히 발전된 도시로 알았는데 건물, 배 등을 보니 전혀 개발이 안 되고 단동과는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어 정말 민족적 비애를 느꼈다. 강변에 ‘압록강각’이란 간판이 있는 건물이 있었으며  그 밑 또 다른 허름한 건물 전면에 “21세기의 태양 김정일장군 만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선전문구가 보여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같은 민족인지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 쇼핑코스 출발(10:15)

관람을 마치고 쇼핑코스로 가면서 “중국에서는 어머니 말고는 모두 가짜라고 할 정도로 가짜가 많으니 필요 없는 물건을 너무 많이 사지 마라”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한민국 제품은 가전제품이다”고 소개하면서 금강산공원 앞에 있는 상점에 들어가 물건을 샀다. 와이프는 참깨 15kg를 9만원에 샀는데 한국에서 참깨 1kg에 1만 3,000원 정도 한다니까 조금 싼 것 같았고 그 옆에 있는 짝퉁(가짜 모조품) 가방을 하나 살까 하다가 그만두고 나와 와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 중 길가에 단동 17중학교가 눈에 띄었는데 중국에서는 배나 학교의 고유명칭이 없고 지역명칭에 1,2,3,4 번호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가 보다. 

 

  

  

○ 시장관광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시간이 여유가 있어 시장을 둘러보면서 과일 등 물건을 사는데 가격은 우리나라와 비슷하였고 물건은 풍부한 편이었으며 여기서의 超市는 우리나라의 슈퍼를 뜻하였다.


○ 단동항으로 출발(13:00)

단동에는 코리아타운이 있어 조선족학교가 있다고 하고 길옆에 교통은행 이라는게 있었는데 뭐하는 곳인지는 모르겠다. 이 길은 처음에 올라가면서 본 코스인데 북한 신의주 들녘 논에는 5~6명이 모여 논을 메는게 보였고 중국은 바다에 대형관을 묻어놓고 뻘을 빨아들여 토지를 높이는 간척사업을 하고 있었으며 버스 안에서는 처음 백두산 종주를 하는데 입산료 20만원을 내야하고 13km를 9시간 만에 종주하여야 한다는 말에 겁을 먹어 포기하고 짚차를 타고 천문봉에 올라 약 20분간 천지를 보고 온 선배님들이 나중에 종주하는 것이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못내 아쉬워하였다.


○ 귀국을 위한 출항(17:00)

단동항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마치고 승선하여 배안 면세점에서 바렌타인 30년산 양주를 307,200원에 사서 배낭에 넣고 일행들과 술을 한잔 마신 다음 선내식으로 저녁식사를 한 후 고스톱을 즐기다가 잠이 들었는데 한참을 자다 일어나 소변을 보고 텔레비전을 보니 한국은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졌다는 뉴스가 나오고 그래서 그런지 배가 약간 흔들리는 것 같았다.


□ 여섯째 날[귀국. (7. 8. 수요일)]

○ 기상(06:20)

지금도 우리 배는 쉼 없이 인천항을 향해 거친 물살을 가르고 있는데 아직은 망망대해여서 배안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07:00 아침식사를 한 후 밖을 보니 섬들이 보이기 시작하여 국제로밍을 해제하고 수신된 문자를 보았더니 영사관에서 위급상황 발생시 연락처를 문자로 송신하였고 신장성 위그루 자치구 여행을 자제하라는 안내와 함께 골키퍼라고 하여 나를 호출하는 전화번호가 전송되어 있었는데 외국에서는 문자로 연락하는 게 가격도 저렴하고 안정적일 것 같았다. 

 

 

○ 인천항 도착(10:40)

09:30경 인천항 연안에 도착했는지 섬과 등대가 보이고 갈매기가 먹이를 달라고 배 꽁무니에 매달린다.  약 1시간정도 더 달려 인천항에 도착했는데 무려 17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긴 여행이었지만 그렇게 지루하다는 느낌은 없었으며 입국수속은 신종 플루에 따른 검역과 사가지고 온 참깨, 담배, 술 등을 보았는데 그렇게 까다롭지 않게 마치고 11:15 인천항을 빠져 나왔다.


○ 귀향(16:40)

인천항에서 조금 나와 12:20경 비원식당에서 조기탕으로 점심을 먹는데 중국에서 기름에 튀긴 음식에 물렸는지 너무나 시원하고 맛있었다. 아침에 배에서 소주 몇 잔을 먹었더니 속이 쓰리고 아파 점심때는 술을 먹지 않았는데 대천 휴게소에 오니 삼희산악회 선배님들이 소주와 맥주, 수박, 통닭 등을 준비, 한턱내어 즐거운 마음으로 폭탄주를 몇 잔하고 얼큰하게 취하여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보니 광주에 도착했다. 모두들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는 열정이 있어 여행기간 동안 내내 즐겁고 행복했다. 


지금까지 무사히 5박 6일 동안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여준 대원여행사 박기성사장님과 산마루산악회 회원, 여행의 파트나였던 삼희산악회 선배님들께 모두 감사드리며 본 여행기는 보고 들은 사항을 정리한 자료이므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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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7.28 15:43

    첫댓글 좋은 여행 정보에 감사 드립니다

  • 09.07.28 19:13

    추카드립니다. 언제 쉽게갈수있을까??? 빨리통일되어 바로가서 볼수있다면 소원이죠?좋은여행 부러움니다. ^*^

  • 09.07.29 11:43

    재미있게 읽었네요 좋은 정보도 얻었고요 감사합니다

  • 09.07.29 13:09

    좋은자료 감사드려요..카페가 가득차는 느낌 너무좋구요...두일에도 한번 나오시길 기다립니다...

  • 작성자 09.07.29 15:42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산행일정 있으면 연락 주세요.

  • 09.08.02 10:09

    네..... 고맙습니다. 9월에 포항 내연산인데, 어떨까요.??? 그리구 백두산 여행 추카드리고요. 덕분에 저희들이 잘보고있답니다. 생생한 동영상까지 올려주셔 더욱이 잘보고있지요. 두일산악에서도 한번쯤 갈날 있겟죠 ??? 항상 두일산악 아껴주시는 맘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함께하는 산행날 기대하며 늘 ~~~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 11.08.25 20:28

    저도 백두산 가게되었습니다.
    툐욜날 출발임다.
    먼저다녀오셔 자료에 감사드립니다.
    김원석님께서 다녀오셨던데 저도 가게됨 감사감사 !~~~

  • 작성자 09.08.03 14:08

    돌집 아짐! 고마워요. 태백산 갔을때 너무 인상이 좋은신 분들이 많아서 다음에 꼭 함께 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 09.08.04 13:06

    바쁘신가운데 두일산악 이렇게 찾아주심 넘 감사드립니다. 담에 시간되면 함께하는 산행기대해봅니다. 건강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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