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 그리고 이마다
네가 섬으로 향한 것은 어느 해 여름이다.
그리고 그 섬에서 그를 만났다.
바다 저편으로 폭우가 내리치는가 싶더니, 이쪽 바다 위로 쌍무지개가 뜨고, 그런 풍경에 넋을 잃고 있다가, 갑자기 해면 위로 솟아오른 섬에 정신이 돌아왔다. 창으로 선착장이 보이기 시작하자, 아! 하고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 나왔던 것을 기억한다. 섬은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 색깔을 하고 있었으나, 그 숨 막힐 듯 짙은 녹색만은 뇌리에 뚜렷하다.
어디로 출타했는지 알 수 없다는 주인 없는 빈집에서 이틀인가를 보낸 뒤에 그 주인장이 나타났다. 실은 자기도 그 집 소유자는 아니므로 그렇게 미안해할 것은 없다고 씨익 웃으면서 말이다. 가기 전부터 들은 바는 있었지만, 다음 날이 밝아오기 전에 너는 그를 참 오랜만에 보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국경없는의사회’ 멤버였던 그는 소련이 침공한 아프간 최전선에서 독가스에 치명적 손상을 입고 현지에서 본국으로 후송되었다. 몇 달도 남지 않은 생을 선고받자, 마지막은 숲속에서 마감하고 싶다며 미련 없이 친구 등지게에 업혀 시라야마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다들 죽은 줄만 알았던 그가 그 숲을 다시 걸어 나왔다는 이야기나, 한번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들은 홀린 듯 끌려 들어간다는 소문 등이 사실 그를 약간의 사이비 도사틱한 인간으로 예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너는 이 속단을 그와 같이한 며칠 만에 수정하기로 맘먹었다.
어둠 속에서도 섬은 아름다웠다. 서너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크기였지만, 마을 사람들만이 아는 해안가 노천온천은 밀려오는 바닷물에 적당히 식혀져 따뜻하고 쾌적했다. 들고 간 사십도 짜리 고구마 주정 소주는 내장과 머리를 함께 몽환 속으로 인도하였으며,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무수한 별들은 오랜만에 환각 상태에 빠지기에 충분하였다. 이불처럼 감싸주던 온천물 속에서 깜빡 들었던 잠이 깼을 때는 어슴푸레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너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해발 제로 미터에서 갑자기 이천 미터 가까이 오르니 숨이 차고 귀가 먹먹한 것도 그러했지만, 이미 저 아래와는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와 있음을 주위로부터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알려주고 있었다. 우선 구름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그건 구름이 아니라 물속이란 표현이 더 옳을 그런 것이었다. 또 선창에서 보았던 그 짙은 녹색의 정체인 삼나무 숲속으로 들어와 있었는데, 이건 그냥 나무라기보다 ‘생물’이란 말이 더 맞을 그런 것이었다. 짧은 게 천년에서 길게는 칠천 년 정도까지 나이를 먹었다는 그것들은 말 그대로 ‘쌩 것’ 들이었다.
나무들이 말하고, 움직이고, 노래하고, 심지어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건 너의 감수성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그가 전해주는 말들 때문이었다는데 특별함이 있다. 그는 자연이 전하는 말을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 옮겨주는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그게 바로 그에게 빨려 들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본질이었다. 통역을 통해 전해지는 숲의 말을 듣다 보니 그들의 생활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조금씩 그들 행위가 이해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벌이고 있는 ‘축제’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결국 너는 ‘스스로 그렇게 이루는’ 그들만의 흐드러진 잔치에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로 엑스터시를 느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 섬이 해안의 아열대부터 정상의 아한대까지 다양한 기후와 식생을 지닌다거나, 원숭이와 사슴이 각기 육천 마리 정도씩 자연 서식한다거나, 그래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을 받았다거나 하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날 하산 길에 한 그 특별한 경험 때문이리라. 너는 그들의 축제에 동참하고 희열을 느끼고 그래서 적당하게 기분 좋은 피로 속에 하산 중이었다. 거의 숲 출구쯤에 다다랐을 때였다. 찻길을 넓히기 위해 불도저와 중장비들로 파헤쳐지고 있는 그곳에는 뿌리째 밑둥을 드러낸 나무들이 널려있었고, 그것들은 선열 하게 너의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전의 너와는 다른 어떤 반응이 신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그치지 않았으며, 이윽고 온몸이 분노로 떨려오는, 이전엔 경험한 적이 없는 기이한 증상이었다. 네 눈에 들어온 그건 그냥 나무들이 아니라 깨지고, 엎어지고, 피 흘리며 쓰러져 널브러져 있는 축제 군중들이었다. 그리고 옆에 묵묵히 서 있던 그의 가슴속을 타내리는 눈물을 너는 동시에 보았다.
그 섬을 떠난 것은 남녘 바다에서 올라온 태풍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어느 날이었다.
허나 그해 여름에 만났던 그 섬과 그는 떠나지 않고 되살아나 네 안에서 떠돌고 있다.
(2024.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