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삼현 제3 시집 "나의 백인보" 해설을 올립니다.
한번 보아 주세요
그리움의 순례, 지순한 영혼을 찾아서
-안삼현 제3 시집 『나의 백인보』해설
이정운(시인, 시울림 동인)
1. 발로 일구어 쓴 시
시를 굳이 머리로 쓰는 시와 발로 쓰는 시로 나누어 본다면 아마 안삼현 시인의 시는 후자에 가까운 시일 터이다. 서정시에도 서사敍事와 함께 허구가 개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작 방식은 안 시인의 성향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예전 시집이나 제3 시집 『나의 백인보』의 많은 시편들이 대부분 여러 지역을 직접 발로 찾아다니며 쓴 시이기 때문이다. 직접 체험한 자신의 것만을 시적 소재로 받아들인 다는 점에서 안 시인을 결벽 또는 결백한 휴머니스트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의 『시론』에서 휴머니스트 시인들의 일반적 성향을 들어 “I ought to feel deeply”( 나는 깊이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였다. 안 시인의 시가 바로 그러하다. 그의 시에는 화려한 감각적 이미지나 알레고리가 드물며 언어유희도 보이지 않는다. 다감하고 진지하다. 퍼소나persona를 한 겹 벗겨 보아도 민낯 그대로 질박하며 꾸밈이 없다. 그러나 시의 표현이 질박하다 하여 그의 시 세계까지 녹녹한 것은 아니다. 미술과 음악, 종교와 역사의 분야까지 뻗어 있는 인문학적 관심과 소양은 매우 깊어 그의 시에서 읽을거리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다.
2. 지순至純한 영혼을 찾아서
엘리엇T.S. Eliot은 시를 사상의 정서적 등가물이라고 했다. 시가 시인의 사상을 정서로써 표현한다고 본다면 시인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시의 바탕에 시의 미학적 가치에 앞서 삶의 가치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시인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으며 결국 시인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귀착된다.
안 시인과의 대화 중에 “간절함을 종이에 그려내면 그림이요, 마음 속에 그려내면 그리움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안 시인이 그의 시에서 삶의 가치를 부여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면 먼저 그가 말하는 ‘그리움’의 함의含意connotation를 찬찬이 살펴보아야 한다. 그의 그리움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쾌락과 욕망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포장하고 있는 공리주의적 현실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곧 실존적 삶을 살아가는 지순한 영혼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그의 시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인물 군상들과 만나며 교류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시집의 제호로 삼은 시「나의 백인보」에서 “나의 백인은 만인이다”라며 자신의 ‘백인百人’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백인보’는 고은 시인의 『만인보』와 전개 방식이 유사하여 안 시인도 그 점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나는 그저/백인보나 새기려 한다”고 겸손히 진술하고 있으나 기실은 그가 알고 있는 ‘백인’이 결코 ‘만인萬人’에 못지 않은 지순함을 지니고 있으며 더욱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이어서 「가슴이 따뜻한 사람」 연작 시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제 자랑이 미덕이 된 스노비즘의 현실 속에서 들꽃처럼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말없이 한우물을 파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안 시인은 체감온도 ‘영하 13도 外雪嶽’에서 “죽을 각오로 그림 그리고 있다”는 화가(「편지」)와 만나고, “어눌한 시어체 화법을 구사하는 어부 친구”(「가슴이 따뜻한 사람-4」)를 그리워하며 고향을 지키는 오십 먹은 노총각 영돌이(「가슴이 따뜻한 사람-16」)를 찾아간다.
인텔리 목수 이형/국문학을 전공하던 검은테 안경 쓴 이형은/부대끼며 살기 싫다고/어린 나이에 목수가 되었다//
대학 시절/열렬한 현실참여자였던 그를/무지렁이 노목수들은/ 신라 여섯 촌장들이 혁거세 옹립하듯/도목수로 키워냈다면 비약일까//
뜬금 없이 시외전활 걸어놓곤/쉴참에 바라보이는 가을하늘이/왜 이리 고우냐는 우리 이형에게/돈 벌어 뭐하겠냐고 물어 보면/시내 전역 가로수 아래/나무벤치나 놓으리란다
-「 가슴이 따뜻한 사람 2」 전문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반드시 현실에 앞장서서 투쟁하는 이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안 시인은 ‘인텔리 목수 이형’ 같은 이들처럼 소시민들의 지순하고 건강한 삶이 곧 저변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구동력이며 우리 시대의 구원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대학 시절 현실 참여자였던 국문학도가 도목수가 된 현실을 비관적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도목수가 되어 가로수 아래 나무 벤치를 놓겠다는 ‘인텔리 목수 이형’에게서 시보다 더한 문학적 감동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안 시인의 시각에서 그의 시대적 상황 인식에 대한 외연外延을 가늠할 수 있으며 또한 그의 시에 적극적 문명비판이나 다양한 시적 실험이 나타나지 않음도 짐작할 수 있다.
남도에 눈이 내렸다/참 오래간만에/눈 위를 걸어가는 길/내 발자국이 또렷이 찍힌다/
비뚤비뚤/앞서 간 다른 이들의 발자국도 찍혀 있었다/이제부터라도/똑바로 걸어가야겠다
-「 내 발자국 」 전문
백범白凡 선생이 즐겨 읽었다는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시 구절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휴정의 시는 다분히 교훈적이고 메시지가 매우 강한 반면, 안 시인의 경우에는 앞서 간 이와 자신의 어긋난 발자국에서 지나왔던 과거를 성찰하며 지순한 삶을 다짐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중국 당나라 말엽의 시인 사공도司空圖는 그의 저서『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 』에서 시의 풍격風格을 스물네 개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다.
「내 발자국」이 표현하는 인생의 의의와 자긍심을 풍격으로 나타낸다면 『이십사시품』의 다섯 번째 풍격으로 ‘고고高古’가 될 것이다.
고고高古는 “ 현실에서 살아가되 현실의 논리에 휩쓸리거나 매몰되지 않고 인생의 위의를 지키며 살아가려는 시인의 도도한 욕망”(『 안대회, 궁극의 시학 』)으로 풀이된다.
“이제부터라도/똑바로 걸어가야겠다”는 ‘고고高古’의 풍격과 맥을 같이 하면서 그의 결백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시가 「직지直指」이다. 「내 발자국」과 함께 짝을 이루어 읽으면 그의 시 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춘강스님 가르침대로 황악산문으로 갔더니 / 아도화상의 손가락이 보였다/동국대가람 현판 위에/가녀린 혁인 스님의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직지直指」전문
짧지만 선풍禪風의 아취雅趣가 있는 시이다. 불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안 시인의 결백성을 ‘직지’의 의미에 담아내고 있다. 안 시인은 시에서 행간의 내용을 비약시키거나 함축하여 잘 따라오지 못하는 독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경향이 종종 있다. 대체 저 ‘스님’들이 누구이며 ‘손가락’과 ‘손길’은 또 무엇인지 독자들은 의문이 여름철 적란운처럼 피어오를 것이다.
안 시인은 신라 아도화상이 창건한 김천 황악산의 직지사에 들렀다가, 현판에 각자刻字된 글이 자신이 감탄해마지 않는 ‘혁인스님의 손길’임을 알아 본 것이다. 참고로 ‘춘강스님’과 ‘혁인스님’은 호와 법명이 다르나 동일 인물임을 알린다. 현재 전남 강진에서 애오라지 평생 부처 말씀만을 각자하며 수행 정진하는 비구니승이다. 시인의 정서가 치환되는 과정을 차례로 연결해 보면 이러하다.
‘아도화상의 손가락’- ‘가녀린 혁인스님의 손길’ - 안삼현 시인의 마음 속 ‘직지’
위 시는 아도화상의 ‘직지’를 지극히 개인적 상징으로 치환하고 있음을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안 시인의 의도는 바로 작명naming 에 담겨 있는데 안 시인이 제목을 ‘직지사’라 하지 않고 ‘직지直指’라 한 의미를 헤아려야 한다. ‘직지’는 ‘가리킴’이 곧 ‘가르침’이요, 깨달음임을 상징한다. 춘강스님의 외길 삶이 주는 ‘가르침’처럼,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 묵묵히 자신의 본디 바른 성품을 찾아서 Go, Straight ! 똑바로 가라고 일깨우는 것이다.
3. 삶을 보는 두 개의 유현幽玄한 시선
청록파 박두진 시인은 그의 시 「도봉道峰 」에서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이라고 토로하고 있다. 안 시인의 제3 시집에서는 「도봉道峰 」의 쓸쓸함이 저물녘 시골집 연기처럼 배어나오는 시가 자주 보인다. 그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 보면 그 끝에 바위와도 같은 존재론적 고독감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감상적 애상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현상이 부침浮沈하는 처음과 끝을 알기에 쓸쓸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허무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삶의 온갖 신산辛酸을 거쳐 온 이의 깊고 고적한 애수가 담겨 있다. 그러나 안 시인의 시에 보이는 이러한 경향성은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물을 관조하며 한층 유현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대상과 적절한 정서적 거리를 둠으로써 그의 시가 보이는 쓸쓸함과 슬픔을 애이불상哀而不傷, 견딜만한 애잔함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즉 엘리엇T.S. Eliot의 널리 알려진 인용어인 ‘감정으로부터의 도피’, ‘객관적 상관물’로서 시적 대상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섬을 돌아 돌아서/물수제비같이 떠돌다가는/또 이곳 시름의 바닷가에 흘러서 들어 왔다//
그래 /겨울 쪽빛 바다 이곳에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그리움과 서러움이 바위 켜켜이/층을 이루고 있었다//
겨울 밤바다/참 조용하게도 찰싹찰싹 포말을 밀어내고 있을 뿐/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을/우리 삶의 편린 한 조각
- 「섬 」전문
신새벽 실비 내리더니/꽃비 후두둑 지천에 뿌리다/내 고향바다/이제사 당도한 곳
때늦게 다가와선 /눈물처럼 젖은 봄날
-「고향바다 」전문
안 시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은 경남 마산이나 고향을 떠난 지 어언 수십 년이 지났다. 그러한 연유인지 바다와 섬을 노래한 작품이 많다. 위 시에서도 바다와 섬을 향한 그의 향수가 쓸쓸함 속에 녹아있음을 본다. 물수제비를 뜨면 돌은 물위를 튕겨 나가려 한다. 그러나 결국 상승하지 못하고 물속으로 다시 추락하고 만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대중들은 갈수록 왜소해지고 그들의 소모적 삶은 물수제비 돌처럼 추락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안 시인의 눈에 보이는 섬과 보이지 않는 시름의 섬, 그 간극에는 그가 떠돌며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로도 메울 수 없는 깊은 상실감이 존재한다. 어찌할 수 없이 그는 스스로 떠도는 섬이 되었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 또한 그들의 섬 안에서 스스로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삶을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안 시인은 “우리 언제 유배지에서 풀려날까/ 풀어주어도 풀려나지 않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든다”라고 진술한다. (「우리 사는 곳 유배지 아닌 곳이 없다」) 자신과 함께 사랑하는 이들이 힘들게 살고 있는 곳이 사실은 모두 ‘유배지’임을 알았을 때 그의 상실감은 포말과도 같이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을/우리 삶의 편린 한 조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원형 상징에서 바다는 영원한 모성을 나타내며 동시에 죽음과 재생을 뜻한다. 그리고 프라이Northrop Frye는 계절의 순환적 상징에서 봄을 창조와 재생을 의미로 보았다. 안 시인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바다를 보며 생과 죽음, 창조와 재생의 섭리를 그리움과 서러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는 더 물러설 수가 없다. 서러움이 켜를 이루어 쌓이면 참으로 고통스러우나 오히려 그 대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 상흔을 헤집고 들춰내는 방법밖에 다른 약이 없다.
삶을 바라보는 안 시인의 또 다른 시선의 바탕에는 사람과 생명에 대한 따듯한 애정이 깔려 있다. 유달리 아이들에 대한 정이 많은 그는 현직 교사이면서 로맨틱한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 연작에 등장하는 많은 이들에 대한 그리움은 앞에서 소상히 밝혔거니와 그들에 대한 그의 애정 어린 시선을 빼놓고는 『나의 백인보』를 설명할 수 없다. 더욱이 안 시인의 그러한 시선은 인물에만 머물지 않고 동물과 식물은 물론 무정물인 자연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 점은 그의 시에서 실존적 허무감을 극복하는 다른 한 축으로 작용하면서 미적 균형감을 가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장수풍뎅이 두 마리/어느 날부터 우리 교실에 와서/아이들이 지어 준 이름/
암컷은 예쁜 연두 수컷은 힘세다고 헤라/그놈들 참/작명 솜씨 한번 시 쓰는 선생보다 낫다/먹이는 하루에 한번 젤리 한 톨을 주라고/태양이 싫어 태양이 싫어/
나오지도 못하고 통 속에서 갇혀 살고 있지만/꼭 변태할 것 같은 앙증맞은 장수풍뎅이 한 쌍/장마철 초여름을 교실 창가에서 나고 있다/
-「장수풍뎅이 키우기」전문
따뜻하면서도 담백한 시이다. 아이들은 장수풍뎅이를 보고 있고 스승은 그 아이들을 보며 행복해 하고 있다. 스승도 어느덧 아이가 되어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귀여운 벌레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모습이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로 다가온다.
귀여운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안 시인은 “아이들은 모두 내일은 오늘보다/ 훨씬 다르리라 생각하며”(「구봉산아이들」) 아이들이 만들어 갈 내일이 그가 처한 현실보다 더 밝고 건강할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상 속에서 주변을 돌아볼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때가 있다. 아이들이 예뻐 보이고, 나무와 꽃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 그들의 말로 이해될 듯하다. 이렇게 평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징후가 곧 나이 듦의 전조前兆이다. 누구나 나이 듦을 싫어하지만 안 시인은 아이들의 놀이와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으로 보이게 하는 개안開眼이 나이 듦의 축복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포동동 해맑은 얼굴/ 배시시 웃음 짓는 우리 서정이”(「가슴이 따뜻한 사람 15」)앞에서 안 시인의 모습은 그의 손녀가 장중보옥掌中寶玉인 양, 자신만이 천하를 얻은 듯 행복해 하는 여느 할아버지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올 여름 내내/천일홍 수천 송이 꽃밭에 그득하더니/마침내 백일홍 한두 그루 피워 올리다/
여름은 지글지글 타오르는 데/배롱나무 그늘 아래/여기서 저기서/그래 이곳이 바로 꽃밭이다
-「 시원(是苑)」전문
『나의 백인보』를 읽다보면 꽃을 제재로 한 시들이 자주 보인다. 남도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전령사는 매화이다. 매화가 피어나면 안 시인은 “환장할 남도의 매향(梅香)” 에 “님 소식 기다릴 새 없이/ 저 먼저 봄소식 전하려고”(-「 봄비」) 마음이 바빠진다. 이어 앞 다투어 피어나는 봄꽃들의 자태에서 생명의 탄생과 열락을, 뜨거운 태양과 무더위 속에서 피어나는 여름 꽃들에서 만개한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배롱나무는 백일홍으로도 불린다. 대표적인 여름 꽃으로 색색으로 피어나는 모습은 불꽃을 보는 듯 화려하다. 군락을 이루어 피어나는 배롱나무 꽃그늘에 앉으면 깊은 시름이 끼어들 틈이 없다.
잠시 비가 멎었다/鬱鬱蒼蒼/참 푸르다 녹음이여/힘들지 않게 역사를 내려다 볼 수가 있어/
나는 참 행복하다/이제 막 9시 6분발 우등열차가 떠나고/바지런한 역무원의 손끝에서 피워 올린/돌채송화 몇 포기 앙증맞게 뜨락에 앉아 있다
-「 옥곡역」전문
안 시인은 화려한 꽃에만 눈길을 주지 않는다. 한적한 시골 역사의 키 작은 꽃 채송화에도 인사를 건네고 있다. 길 떠나려는 여행자의 시선이 역사의 뜨락에 피어있는 돌채송화의 앙증맞은 눈길과 마주쳤다. 작은 생명과의 교감에서 행복을 느끼는 그의 따스한 시선이 잘 드러나고 있다. 화려함과 소박함, 거시巨視와 미시微視의 세계를 아우를 때 비로소 시인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보았다 할 것이다.
해가 참 길어졌는가 싶어/ 퇴근길에 그리 길지도 않은 그림자 달고 왔는데/
집 앞 느티나무 잎사귀 치렁치렁 매달 때도 머지 않았구나/ 봄이 되면 그 나무 싹수 있겠구나 하였고/ 이 나무 보고 산 지도 20년이 넘었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앞서 자라나는 그 나무/ 제대로만 그 자리 지켜준다면 /그 어느 자리 큰 나무보다 / 나와 함께 살으리랏다
-「 나무 」전문
오래 사귄 친구를 흔히 십년지기라 한다. 생면부지의 사람도 십년을 벗하면 둘도 없이 정다워지는데 집 앞 나무 한 그루와 서로 마주 보며 그림자 길게 끌어온 세월이 이십 년이다. 안 시인의 느티나무는 위압감을 주는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바브나무나 절벽 끝에 독야청청한 낙락장송과는 거리가 멀다. 정을 주며 말을 걸 수 있는 친구나 가족 같은 나무이다. 백석 시인은 그의 외로움이 절절한 시에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를 그리워 했다. 대저 인정이란 시간 속에서 길러내는 나무와도 같다. 갈매나무든 느티나무든 마음 속에 굳고 정하게 들어와 “제대로만 그 자리 지켜준다면” 어찌 이십년 지기만 될 것인가?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신언불미 미언불신 信言不美 美言不信’이라는 말이 있다. 신실한 말은 얼핏 아름답게 보이지 않으며 아름다움만 추구하면 신실하지 않다는 말이다. 꾸미지 않으면서도 신실한 시를 짓는 것이 안 시인이 가진 강점이다. 지순한 영혼을 찾아가는 그의 『나의 백인보』시편들을 읽고 있으면 마음 또한 더욱 신실해지고 따뜻해져서 그와 함께 어디든 순례에 나서고 싶은 마음이 든다.
상재된 시집의 시편들을 더 많이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크나 안 시인의『나의 백인보』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안 시인이 한 번 여행에서 돌아오면 그때마다 침잠의 시간을 갖는 것을 본다. 침잠은 내면 시 세계의 발효과정이다. 그의 침잠이 깊을수록 그의 시도 깊은 맛을 낼 게 틀림없다. 지순한 영혼을 찾아 순례하는 그리움의 ‘대동여지도’가 앞으로 어떠한 모습의 시로 완성될지 자못 기대가 된다.
첫댓글 안시인! 이정운시인의 해설을 대하니 눈은 침침하고, 머리속이 하해 지는것 같으오. 단 이시인의 해설에 비친 안시인의 글의 행보가 마치 그림에 의탁함을 즐거움으로 삼는 남종화의 그림을 대하는 듯 하외다. 언제 함께하여 술잔 기우리길 기대하오.